교과서에선 노동의 의미를 생계유지의 기반이자, 자아실현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 확인을 위한 것이라고 배웠다. '생산'이라는 것은 그대로 자연과의 관계 맺기, 자기 역능의 발견, 사회적 존재로서의 위치 확인이다. 보고 만질 수 있는 모든 물질, 존재하는 모든 것이 노동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사실 노동은 삶의 근본이고 기초다. 모든 존재는 노동한다.
우리는 그런 노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스스로 노동의 가치를 폄훼하고 있진 않을까. 그래서 일을 하겠다고, 생계유지를 위해 정당한 임금을 받겠다고, 삶의 행복을 위해 휴식할 시간을 보장받겠다고, 그것을 결정하고 논의할 수 있는 '진짜 사장'과 대화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이를 모욕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왜 노동을, 그러니까 우리 삶 그 자체를 이토록 폄훼하게 되었을까.
교과서 같은 말을 했지만, 기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본래적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일한다. '삶의 역능'이라니. 배부른 소리라고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 고통스러운 '일'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구직난, 해고, AI 대체 같은 말이 너무나 익숙하다. 이윤추구가 절대의 가치인 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체제, 삶의 순위를 경제적 순위로만 이해하는 사회적 인식, 그걸 부추기는 미디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자본. 자본주의의 역사는 결국 노동과 인간을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우리는 교과서 밖에서는 노동의 가치니 의미니 하는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가 노동을 폄훼하게 된 것은, 일을 해서 삶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일에서 도망가기 위해 주식이나 코인을 하라고 부추기게 된 것은, 그저 돈을 버는 것만이 삶의 지고한 가치라고 오해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을까. 인간을, 생명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소외시키는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무엇으로 노동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우린 '이렇게 살면 다 죽겠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만들었다. 적어도 우리 모두의 삶을 파괴하지 않을 어떤 '선'(善일 수도, 線일 수도)을 만들자고. 그게 '공공'이다. 함께 쓰는 것들, 함께 존재하는 것들, 나눠 쓰고 같이 쓰는 것들을 위한 사회적 약속이다. 법과 질서, 의료와 교육 같은 것들.
정부와 공공영역은 그 '선'을 지키고 제시한다. 법과 제도를 만들고 사회적 인식을 제시한다. 그 '선'에는 노동의 가치도 포함된다. 노동의 본의를 가르치고, 제시하고,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를 손보고 다듬는 것이 공공의 선이다.
공공영역이 노동의 '선'을 만드는 역할엔 제도적, 법적 역할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 앞서 '사용자'로서의 역할이 우선된다. '우리 사회의 사용자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범 사용자'로서의 역할이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공기업엔 수많은 노동자가 있다. 이들의 진짜 사장은 자치단체장이거나 공공기관장이다. 거리를 청소하는 생활폐기물 수집 노동자, 학교 급식실의 조리 노동자, 학교의 특수교사나 실무사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공공영역은 '모범사용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생활폐기물 수집은 대부분 '민간 위탁'으로 운영된다. 이들은 새벽 출근을 강요받고, 적정임금을 받지 못한다. 지난 2019년부터 환경미화원 작업 안전 지침에 따라 청소 노동자들의 주간 근무가 원칙으로 제정됐지만 민간 위탁 업체는 이를 지키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진짜 사장'인 지자체장과 직접 교섭을 요구하고 있지만 많은 지자체들이 이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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