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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과 김민기 노래 ,어둠이 깊어 더 빛나던 별

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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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청년 김민기 이야기]⑭

1971년은 참담하고 위험천만했던 한해

부정선거로 얼룩진 제7대 대통령 선거

학원 시위, 휴교령과 위수령, 유신전야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앨범 ‘김민기’ 발매

중고교 시절 김민기를 아는 친구들은 그가 왜 갑자기 그림에서 손을 뗐는지 궁금했다. 당시 그림은 거의 유일한 보람이자 일과였고, 벗이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1학년 말에 이미 개인전까지 열 정도로 그림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런 궁금증을 표시하면 그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기억하는 이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김민기는 수업을 하도 많이 빼먹어 ‘학점 미달’로 1학년을 꿇었다. 특히 많이 결석한 교양 국어 과목에서 F 학점을 받은 것이 ‘학점 미달’의 원인이었다.

입학 이듬해였다. 안 다닐 수 없어 다녔지, 학교 수업은 여전히 지긋지긋했다. 당시 서울대 미대 교과과정은 기본을 갖추지 못하고 들어온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져 있었다. 돈 있고 빽 있는 집안의 학생들이 저의 적성과 재능과 관계없이 ‘고액 레슨’의 힘으로 입학하는 경우가 적잖았다고 한다. 특히 여학생들에게 ‘서울대 미대’는 잘 팔리는 ‘혼수’였다. 수업 수준을 이런 학생에 맞추다 보니, 김민기의 흥미를 끌 리 없었다. 고교 미술반에서 이미 끝낸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런 수업을 1년 더 하자니, 교실에 앉아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어느 날 풍경을 그려오라는 과제를 위해 창경궁(당시는 창경원)에 갔다. 캔버스를 놓고 붓질하다 보니 짜증이 솟았다. 왜 이런 걸 그려야지? 페인팅 나이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신경질적으로 캔버스를 긁었다. 얼마나 세게 긁었던지 캔버스에 구멍이 났다. 때려치우려다가 얼마나 뚫렸는지나 보자는 생각으로 뚫린 곳 가까이에 눈을 댔다. 그런데 구멍 속 저편에 그가 그리던 나무가 보이는 것 아닌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가 만질 수도 있는데…. 나무를 그릴 게 아니라 끌어안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후 김민기는 미대 수업에서 더 멀어졌다. 붓을 잡는 시간은 줄고, 길 건너 문리대 친구들과 어울리는 날이 많아졌다. 문리대는 허구한 날 시위였다. 많은 동창이 주동자였다. 그때 보고 듣고 토론하게 된 당시의 학내외 상황은 그를 좁은 화실에서, 더 비좁은 캔버스에서 바깥 세계로 밀어냈다. ‘대상을 직접 만지고 끌어안도록’ 재촉했다.

청년 김민기가 기타를 치며 노래 하는 사진과 1971년 시대상황을 챗지피티를 활용해 합성한 이미지.

그는 1970년 여름께부터 이미 ‘친구’ ‘아침이슬’ ‘아하 누가 그렇게’ 등의 노래로 대학 캠퍼스는 물론 사회에도 그 이름을 알리고 있던 터였다. 캔버스 밖 주변, 화실 밖 세상은 그의 그림이 아니라 그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래를 짓고 대중 앞에 서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게 됐다. 그림은 감각에서 출발은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지적인 작업이었다. 시각에 들어온 것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인식의 영역이었다. 이에 비해 노래는 이성의 문자가 포함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마음속 떨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노랫말도 그렇고 선율도 그랬다. 따라서 더 많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해야 했다.

1971년 말 김윤수(전 서울대 미대 교수), 김지하 등이 이끌던 문화예술 비평 모임 ‘폰트라(poem on the trash의 약자, 쓰레기 더미 위의 시)’에도 참여했다. 폰트라는 사유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확장했고, 특히 김지하는 그의 예술적 지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2년에는 김지하 등과 함께 가톨릭 문화운동(가톨릭의 사회 참여 운동)에도 가담하고, 잠깐이지만 마산자유무역지역 공단 노동자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당시 사회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거점으로 떠오른 ‘원주’에도 발을 들였다.

김민기는 김지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무위당 장일순과도 한살림 운동을 함께 했다. 사진은 1991년 겨레의 노래 공연후 자리를 함께한 세사람. 왼쪽부터 장일순, 김민기, 김지하. 사진출처:강원도민일보

1971년은 참담하면서도 위험천만한 시기였다. 산맥의 분수령과도 같은 때였다. 한편에선 정치적 억압이 프레스처럼 사회를 짓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선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폭발 직전까지 차올라 있었다.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해 4월 박정희는 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온갖 선거 부정에도 김대중 후보와의 차이는 근소했다. 당선은 됐지만, 박정희 정권의 불안은 커졌다. 한 달 뒤인 5월 25일 치러진 8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심의 이반을 극적으로 확인했다. 제1야당 신민당이 사실상 승리한 선거였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패배도 자명해졌다. 박정희와 정권 담당자들은 전전긍긍했다. 난국을 타개할 방법은 국민의 선택을 봉쇄하고, 영구집권이 가능한 체제로 전환하는 것뿐이었다. 북한 체제는 좋은 모델이었다.

체제 전환을 위해 선행해야 할 일은 총동원 체제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이 ‘병영화’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면서 취했던 조처와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청년, 학생들의 저항이었다. 야당 정치권, 재야, 종교계의 반발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변수는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학생들은 4.19 민주혁명의 승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고, 1964년 6.3 항쟁을 통해 박정희 군사정권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학원을 병영화해,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이에 따라 1971년의 대학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학생군사교육훈련(교련)이 강화돼 학기 초부터 학교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고, 휴학과 개학 그리고 휴업을 되풀이했다. 6.3 항쟁 이후 처음으로 위수령이 발동돼 군인들이 학원 안으로 진주했고, 수많은 학생이 체포, 구속, 제적을 당하거나 군대로 끌려갔다.

학교 밖 청년들의 조건은 더 혹독했다. 세계 최장 노동시간, 최악의 노동조건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힘을 길러야 했고, 사용자 및 공권력과 맞서야 했다.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이후 노동운동이 꿈틀거리기는 했지만, 압도적인 물리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비해 승리의 기억이 여전한 학원 상황은 달랐다. 더 심해진 압박은 더 강한 반발을 불렀다. 특히 총선과 대선이라는 정치적 자유의 공간은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맞설 기회를 제공했다. 개학이 되자마자 한편에선 교련 반대 시위를 거국적으로 벌이는 한편, 양대 선거 감시 기구를 조직해 정부 여당의 부정선거를 봉쇄하려 했다. 개학하자마자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것은 학교 병영화 반대 시위였다.

 

고려대학교 학갱들이 1971년 4월 26일 교련 전면 철폐를 주장하며 학내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학생 군사교육훈련은 1955년 중단됐다가 1969년 부활했다. 1971년엔 필수과목으로 채택됐다. 병영에 입소해 훈련을 받는 집체교육도 포함됐다. 남학생들은 주 3시간, 대학 졸업 때까지 711시간을 이수해야 했다. 교관도 예비역에서 전원 현역으로 바뀌었다. 교내에선 학생 열에 다섯이 교련복을 입고 다녔으니, 대학은 병영을 방불케 했다.

4월 2일 연세대 학생의 시위를 시작으로 4월 6일 고려대생 1,500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4월 15일엔 전국적으로 2만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해,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 양상은 6.3 항쟁이나 다름없었다.

7대 대통령 선거는 4월 27일 치러졌다. 이후락의 중앙정보부가 총괄한 선거였다. 1월 우유부단한 김계원 대신 이후락이 중정부장이 되면서 예상됐던 일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여당인 공화당의 중앙선거대책본부는 물론 실무선거대책본부까지 모두 관장했다. 공화당과 정부 부처 책임자들은 중정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현황 파악, 대책 수립, 집행, 결과 검토 등 모든 과정은 삼청동과 궁정동의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이루어졌다.

중앙정보부는 이번에도 공안정국 조성을 위해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4월 20일)을 발표했다. 물론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유진산 신민당 당수를 구워삶아 협력을 유도하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의 핵심 선거 참모를 매수해 이중간첩으로 삼기도 했다.

관권 금권 총력전을 펼쳤는데도 판세는 낙관하기 힘들었다.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로 간다’라는 전망이 선거판을 흔들고 있었다. 대도시에선 여당 선거운동원이 외면당하거나 핀잔받기 일쑤였다. 박정희는 결국 “이번에 당선되면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일을 없을 것”이라고 발표해야 했다.

투표 과정은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 때를 방불케 했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에서 릴레이 투표, 대리투표 등이 자행됐다. 야당 쪽 참관인도 없이 개표가 이뤄진 개표소가 수두룩했다. 투표인 수보다 투표용지 숫자가 더 많은 투표함도 많았다. 섬 등 격오지의 투표함이 바꿔치기 됐다는 제보가 빗발쳤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대중 후보가 장충단 공원에 운집한 100만 서울시민 앞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 총통시대가 올 것이라며 사자후를 토하고 있다. 온갖 부정으로 얼룩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박정희에 석패했다. 연합뉴스

투표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참패했다. 투개표 부정이 힘들었던 서울에선 개표 결과 김대중 후보(59.39%)가 박정희 후보(39.95%)를 20% 가까이 앞섰다. 박정희는 당선자라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얼마나 창피하고 실망했으면 박정희는 공화당과 중앙정보부 그리고 장관들 앞에서 “돈을 얼마나 썼는데 표차가 이것(94만여 표)밖에 안 되나”라고 흥분했다고 한다.

이듬해 벌어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이철희 차장이 주도한 김대중 납치 및 살해 시도는 그 연장에서 터진 사건이었다. 선거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불과 1년 반 뒤 유신 친위 쿠데타로 현실화했다.

친위 쿠데타를 더욱 서두르게 한 건 대선 후 1개월 만인 5월 25일 치러진 8대 총선 선거 결과였다. 당선자 수에선 공화당(113석)이 신민당(89석)을 앞섰다. 그러나 신민당이 확보한 의석 수는 1967년 총선 때(44석)의 두 배에 달했고, 특히 서울(19개 선거구 중 18개), 부산(8개 중 5개), 대구(5개 선거구 모두) 등 민도가 높고, 부정선거가 어려웠던 곳에서는 의석을 휩쓸다시피 했다. 공화당은 돈과 막걸리, 고무신 따위로 매표가 가능하고, 투개표 부정을 자행할 수 있었던 농촌에서나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양대 선거에서 얼마나 많은 선거 부정이 저질러졌고, 학생 시위와 시민의 동요가 불안했던지, 박정희는 7대 대통령 취임식도 하기 전에 전국 대학교에 휴업령부터 내렸다. 학교 문을 아예 잠가버려 학생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원천 봉쇄했다.

1971년은 이런 정치적 격변 외에도, 사회적으로도 모순이 커지다 못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도가니’였다. 양대 선거 직후인 한여름(8월 10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관할구역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이른바 ‘광주 대단지 사건’이었다. 서울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청계천 변이나 산동네에서 쫓겨난 도시빈민을 쓸어 담아, 내다 버리다시피 한 집단 거주지에서 일어난 항쟁이었다. 이주 단지에는 먹고 살 일자리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고, 생명이 위태로워도 찾아갈 병원이 전무했다. 심지어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물차에 의지해야 했고, 먹거나 입을 것을 사고파는 시장도 형성돼 있지 않았으며, 그곳에 버려진 이들은 거적을 덮은 움막에서 2대, 3대가 함께 살아야 했다. 게다가 정부는 이주민에게 택지마저 애초 약속한 것보다 4~8배까지 더 받으려 했다. 몸에 붙은 살점까지 뜯어먹으려 했다.

이주민들로선 사나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앉아서 죽느니 싸우다 죽는 게 나은 형편이었다. 이주민의 절반에 가까운 5만여 명이 돌이나 몽둥이를 든 건 그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이주민이 거리로 나섰고, 정부 시설이나 사무소, 파출소 등이 파괴되거나 불에 탔다. 한동안 경찰 등 공권력은 그곳에 접근도 할 수 없었다.

봉기가 일어나자, 박정희 정권은 다짜고짜 언론의 출입을 막고 보도를 통제했으며, 인적 물적 왕래를 차단했고, 물과 식료품 등 생필품의 반입도 막는 등 물 샐 틈 없이 봉쇄했다. 아예 굶겨 죽이기로 작정한 듯했다. 광주 대단지는 지옥이었다. 한때 그곳 주민들이 살기 위해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9년 뒤 박정희의 애제자 전두환은 ‘전남 광주’에서 그 지옥을 재연한다.

끓어오른 것은 도시빈민만이 아니었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전문가 집단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헌법과 법률을 멋대로 짓밟는 정보, 공안 통치와 상명하복의 억압구조에 대한 반발이었다. 양대 선거 직후인 1971년 6월 국립의료원 수련의들이 파업했다. 7월엔 사법부에서 판사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내는 미증유의 사건이 터졌다. 군사정권의 비호 속에서 사법부를 멋대로 조종하려 했던 검찰의 행태에 분개해, 전국의 판사들이 사표를 제출한 ‘7.28 사법파동’이었다. 8월 ‘광주 대단지 항쟁’에 이어 9월엔 베트남 파견 기술자들이 임금체불을 일삼던 대한항공 본사를 습격해 불을 지르는 사건도 일어났다.

남북 관계나 국제관계에서도 위기의 연속이었다. 베트남전은 미국의 패배가 확실해졌고, 주한미군 철수 혹은 감축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휴전선에서는 북한군과 미군의 충돌이 잇따랐다. 안보 상황마저 일촉즉발이었다.

1971년 서울 학원가는 휴업을 반복됐다. 사진은 위수령으로 무장군인들이 연세대학교내 백양로를 점거하고 있다. 사진출처: 서울신문

5월 총선 이후 서울 시내 대학들은, 학생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막기 위해 모두 문을 닫았다(휴업). 그렇다고 2학기까지 휴업할 순 없었다. 개강하자마자 대학가는 그동안 억눌렸던 에너지가 곧바로 분출했다. 주요 대학 학생회 중심으로 시위나 농성이 벌어졌다.

일부 정치군인들이 이런 학생들에게 본때라도 보이기라도 하듯 시위 현장에 군을 투입했다. 10월 5일 새벽 수도경비사단(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무장 군인 22명이 고려대 학생회관에 난입해 농성 중인 고려대생 5명을 폭행하고 연행한 것이다. 학생들과 시민사회는 경악했고, 고려대와 전국 대학생들은 분기했다.

기왕 벌어진 일,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 즉각 군을 동원했다. 시위가 부정선거 문제로 확산하는 걸 막아야 했다. 정부는 10월 15일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했고, 공수특전단과 유격여단이 출동해 서울 시내 대학들을 점거했다. 양택식 서울 시장이 ‘학원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군 투입’을 요청하는 형식이었지만, “경찰은 학원 안에 들어가 시위 주동 학생을 색출하고, 안 되면 군 투입해서라도 질서를 잡으라”고 한 박정희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11월 8일 위수령이 종료되기까지 24일 동안 군과 경찰에 의해 학생 1,880명이 체포되고, 119명이 구속됐다. 23개 대학에서 학생 117명이 제적됐고, 제적과 동시에 군대로 끌려갔다. 서울대학교에선 59명이 제적되고, 강제 입영 당했다. ‘자유의 종’ ‘횃불’ 등 대학가의 많은 간행물이 발행 중단됐으며, 사회법학회, 사회과학연구회, 후진국사회연구회, 문우회 등의 학회가 해체됐다.

위수령에 이어 중앙정보부는 11월 13일 학생운동권을 빨갱이로 내몰기 위한 조작 사건을 또 발표했다.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이 그것으로 중정은 서울대생 4명을 국가보안법 제1조(반국가단체 구성) 위반, 내란 예비 음모 혐의로 구속했다. 이신범(법대, 서울대 『자유의 종』 발행인), 심재권(상대, 민주수호학생투쟁위원회위원장), 장기표(법대생), 조영래(사법연수생)와 수배중인 김근태(상대) 등 4명이 폭력으로 국가 전복을 모의했다고 터뜨렸다.

학생 4명이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니… 참으로 허무맹랑하고 졸렬한 조작이었다. 시민들은 학생운동을 경계하고 주동자를 비난하기는커녕 정권의 치졸한 행태를 조롱했다. 재야단체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서는 즉각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조작의 근거를 발표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내란 음모, 폭발물 사용 음모 등이 사실로 인정된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조영래, 김근태는 김민기가 존경하던 고교 선배였다.

위수령으로 반정부 시위의 예봉은 꺾었지만, 이반한 민심은 걷잡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판사판이었다. 영구집권을 위한 체제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차기 선거의 패배는 확실하고, 선거에서 패배하면 군사정권 관계자들은 그동안의 죄과를 피할 수 없었다. 더 근본적인 대책, 더 극단적인 조처가 필요했다.

박정희는 12월 6일 유신 친위 쿠데타의 선행 조처로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중공의 유엔 가입, 북한의 남침 위협을 핑계로 꺼낸 대통령의 ‘비상대권’이었지만,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그 근거가 없었다. 공화당은 부랴부랴 근거 법률을 마련하기 위해 12월 27일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법’을 날치기 처리했다.

대통령에게 국민의 기본권 전반을 제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으로, 헌법적 한계를 넘어서는 명백한 위헌이었다. ‘북한의 남침 위험’에 대해선 미 국무부까지도 ‘전혀 타당성이 없다’라고 일축할 정도로 날탕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당시 기댈 건, 유신체제 때 남발했던 ‘비상조치’ ‘비상대권’ 외에는 달리 없었다.

1971년 11월 발매된 앨범 김민기. 세상 밖으로 나와 시대의 어둠과 맞섰다. 사진은 2025년 11월 발매한 앨범 김민기 복각 LP 판 이미지. 출처 :학전 제공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오랜 잠에서 깨우고, 대중음악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앨범 <김민기>가 발매된 건 바로 이런 그때였다. 집권 세력은 권력의 유지와 영구집권을 위해 미쳐 돌아가고, 민주화를 향한 노력은 거듭 꺾여, 모두가 지쳐 있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였다. 주류 대중음악의 애상과 신음, 도피와 일탈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 때였다.

그런 판에 등장한 김민기의 노래들은 그야말로 아침이슬처럼 싱싱했다. 신음은커녕 한숨도 없었고, 애상은커녕 전체 수록곡을 통틀어도 사랑이란 낱말은 아예 없었다. 일탈과 도피는커녕 현실과 나에 대한 성찰과 고민으로 가득했다. 폭력의 벽 앞에서 주저하고 번민하는 나를 돌아보았고, 시대의 어둠 속에서 나아갈 길을 더듬어 찾았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공명하는 떨림으로 가득했다.

1971년 저 밑 모를 어둠 속에서 스무 살 청년 김민기는 뜻하지 않게, 이웃의 고통과 슬픔, 절망과 분노로 뒤엉킨 저 거친 광야로 성큼 발을 내딛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노래로 발언하고 행동하며, 시대의 어둠에 맞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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