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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는 어떻게 '광주' 지우고 민주주의 무너뜨리는가

정승호 시민기자

jeong.seungho@hoasen.edu.vn

베트남 호아센대학교 언어심리학부 전임강사,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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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불참·스벅 탱크데이·국힘 맞장구 맞물려

'극우 5·18 밈' 대형매장 통해 공적 언어 둔갑

말의 폭력이 왜 제동 받지 않았는지 파헤쳐야

"내일 스벅 들러야지"…정당이 냉소에 편승

5·18 직접 부정 안해도 조롱 통해 상처 입혀

커뮤니티→기업→정당→국회로 냉소 유통

잔혹한 기억을 광고와 농담, 수사로 희석

냉소적 이데올로기가 노리는 교활한 승리

국가 폭력의 공포, 제도와 언어에 새겨야

우원식 국회의장이 8일 국회에서 열린 5월 임시국회 제2차 본회의 산회를 선포한 뒤 의장석에서 내려가고 있다. 앞서 국민의힘은 대한민국헌법 개정안과 다른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우 의장은 이날 본회의에 대한민국헌법 개정안 등을 상정하지 않았다. 2026.5.8 연합뉴스

5월 7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새기고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올랐다. 원내 6개 정당 의원 181명과 무소속 의원 6명, 총 187명이 서명한 안건이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한 명도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함은 열어보지도 못한 채 불성립 처리됐다. 이튿날 우원식 국회의장은 재표결을 시도하려 했으나,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 신청 앞에서 개헌안 상정을 포기하고 절차 중단을 선언했다. 산회를 선포한 그는 의장석을 내려오며 눈물을 훔쳤다. 6·3 지방선거와 동시에 국민투표에 부쳐질 수 있었던 39년 만의 개헌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46주년 기념식이 열리던 바로 그 시각, 스타벅스코리아는 ‘탱크데이’ 이벤트를 시작했다. ‘5/18’이라는 날짜와 함께 ‘탱크데이’라는 문구가 홍보물에 올랐고, ‘책상에 탁!’이라는 카피가 붙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탱크가 광주를 짓밟던 기억과, 박종철 열사를 고문하고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둘러댄 그 언어가 텀블러 광고에 부활했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뉴스처럼 보인다. 하나는 국회의 정치적 교착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의 마케팅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건의 밑바닥에는 같은 감각이 흐른다. 광주의 공포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 공포를 가벼운 장난으로 만들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에 제도적 제동을 거는 일마저 피하는 정치다.

스타벅스 사태를 두고 ‘실수냐 의도냐’라는 논쟁이 오갔다. 물론 고의가 있었다면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고의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5·18 기념일에 ‘탱크’와 ‘5/18’과 ‘책상에 탁’이 한 홍보물 안에서 만났는데도 왜 아무도 멈추지 않았는가. 왜 그 조합이 위험하다는 감각이 작동하지 않았는가.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악의보다 넓은 무감각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몰라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안다. 알고도 한다. ‘전땅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탁’이라는 소리가 어떤 죽음을 건드리는지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그 앎이 웃음의 재료가 된다. 금기인 줄 알기 때문에 더 웃기다고 여긴다.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냉소적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 척하면서 즐기고, 즐기면서 책임을 피한다.

“그냥 드립인데 왜 진지해?”라는 말은 이 냉소의 방패다. 농담이라는 형식은 발화자에게 두 개의 출구를 준다. 하나는 “진지하게 말한 게 아니다”라는 부인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과민반응하는 것”이라는 책임 전가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조롱한 사람은 가벼워지고, 기억하자는 사람은 무거워진다. 피해자의 고통을 말하는 쪽이 오히려 “유머를 모르는 사람”으로 밀려난다.

 

문제는 이 냉소가 더 이상 변방의 게시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베식 5·18 밈이 폐쇄적 하위문화 안에서만 돌고 돈다면 파급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 언어가 전국 매장을 가진 대기업의 공식 프로모션을 통과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하위문화의 은어가 자본의 공적 언어로 세탁된다. 탱크는 텀블러의 이름이 되고, 고문의 언어는 광고 카피가 된다. 죽음의 잔해가 마케팅의 장식으로 옮겨진다.

이번 사태가 실무자의 돌발 행동인지, 조직문화 안에서 ‘말해도 되는 것’의 경계가 이미 무너진 결과인지는 조사로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질문은 피할 수 없다. 왜 이 문구는 기획되고, 승인되고, 공개될 때까지 아무 제동도 받지 않았는가. 어떤 조직에서는 탱크와 고문의 언어가 위험신호가 아니라 마케팅 소재로 보이는가. 말의 폭력은 물리적 폭력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는다. 피해자의 기억은 시장의 진열대 위에 다시 눕혀질 수 있다.

그런데 이 냉소적 감각은 기업에서 멈추지 않았다. 스타벅스 사과문이 나온 직후, 국민의힘 충북도당은 SNS에 “내일 스타벅스에 들렀다가 출근해야지”라는 글을 올렸다. 김선민 국민의힘 거제시장 후보 측 계정은 “가서 샌드위치를 먹겠다”는 댓글을 달았다.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한복판에서 일부러 스타벅스 방문을 과시하는 듯한 문장이었다. 논란이 커지자 “의도한 게 아니다”, “담당자가 한 것이다”, “5·18이나 박종철 열사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라는 해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 해명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공당의 책임은 의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말은 행위다. 특히 공식 계정의 말은 정당이 시민에게 보내는 공적 행위다. 문제는 누가 정말 스타벅스에 갔는지가 아니다. 문제는 왜 그 순간, 그 문장을 공당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고 여겼는가이다.

 

국민의힘 충북도당 스레드 갈무리

“내일 스타벅스에 들렀다가 출근해야지”라는 문장은 짧다. 그러나 정당의 언어에서 짧음은 결코 무죄가 아니다. 이 문장은 커피 취향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5·18 기념일의 ‘탱크데이’가 왜 문제인지 묻는 시민들 앞에서, 공당의 계정이 내놓은 정치적 눈짓이다. 그것은 논증하지 않는다. 반박하지도 않는다. 다만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그 분노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정치는 말로 한다. 그래서 정치인의 말, 정당의 말은 가볍게 흘릴 수 없다. 아렌트가 두려워한 것도 거대한 악의 음모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세계를 부수는지 생각하지 않는 무능, 공적 현실을 사적 농담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생각 없음이었다. 5·18을 직접 부정하지 않아도, 5·18을 기억하려는 시민들의 고통을 조롱의 배경으로 삼는 순간 정치는 공통 세계를 갉아먹는다.

공당의 SNS는 낙서장이 아니다. 그것은 정당이 시민에게 내미는 가장 가벼운 얼굴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에서 가장 가벼운 얼굴은 결코 가볍지 않다. 공식 논평보다 더 솔직하게, 그 정당이 무엇을 우습게 여기고 무엇 앞에서 멈추지 않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진보당 김재연 대표,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 사회민주당 한창민 대표가 18일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열린 제46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2026.5.18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국민의힘 지도부가 5·18 기념식에서 보인 태도도 이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장동혁 대표는 기념식에 참석했지만, 참석을 앞두고 이미 SNS에 민주당이 5·18을 권력 확장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올려두었다. 기념식 직후에도 대통령의 기념사를 겨냥한 비판을 이어갔다. 몸은 기념식장에 있었지만, 언어는 광주를 다시 정쟁의 무대로 되돌리고 있었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기념식 불참과 관련해 “더러워서 안 간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보도로 논란에 휩싸였고, 국민의힘은 “서러워서”였다고 반박했다. 표현을 둘러싼 공방은 남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핵심은 분명하다.

광주는 그들에게 함께 감당해야 할 헌정의 기억이 아니라, 불편하거나 억울한 정치 현장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기념식 참석은 면죄부가 아니다. 광주에 몸을 두었다고 해서 광주를 존중한 것이 자동으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5·18을 기리는 자리에 서면서도 곧장 그 기억을 “상대 당의 도구”로 환원한다면, 추모는 의례가 아니라 알리바이가 된다. 광주를 헌법에는 새기지 않으면서 기념식에는 참석하고, 광주의 항의를 들으면서도 그것을 민주주의의 고통이 아니라 진영의 소음으로 여기는 정치. 바로 그 틈에서 냉소는 자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정당이 불과 며칠 전 5·18 정신의 헌법 수록을 표결 불참으로 무산시킨 바로 그 정당이라는 사실이다. 제도적 차원에서 5·18의 기억을 헌법에 새기는 일을 거부한 정치세력이, 문화적 차원에서 5·18을 조롱하는 밈에 동조하는 듯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기념식의 공간에서도 그 기억을 정쟁의 언어로 되돌렸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로만 보기 어렵다. 커뮤니티에서 기업으로, 기업에서 정당으로, 정당에서 국회 본회의장으로, 다시 기념식장으로 이어지는 냉소의 경로가 보인다.

보수정당은 원래 국가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헌법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법질서를 지키자고 말한다. 그렇다면 국가가 시민에게 총을 겨눈 사건 앞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멈춰 서야 한다. 5·18은 보수가 회피할 기억이 아니라, 국가권력이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헌정의 교과서여야 한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헌법 전문에 5·18을 새기는 일에는 불참했고, 소속 도당과 후보 측 계정은 스타벅스 논란 직후 조롱으로 읽힐 수 있는 말을 남겼으며, 지도부는 기념식의 자리에서도 광주를 정쟁의 언어로 밀어 넣었다. 이것은 호남 민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헌정 보수의 자기배반이다. 국가와 헌법을 말하는 정당이 국가폭력의 기억 앞에서 멈추지 못한다면, 그 보수는 무엇을 보존하겠다는 것인가.

미국의 정치이론가 주디스 슈클라는 자유주의의 출발점을 자유, 평등, 정의 같은 높은 이상에서 찾지 않았다. 슈클라는 “잔혹함을 최고의 악으로 놓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하며 ‘공포의 자유주의’를 언급했는데, 국가가 시민에게 가할 수 있는 물리적·정신적 공포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데 자유주의 정치의 가장 낮고 단단한 토대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 렌즈로 보면, 5·18의 본질은 “누가 이념적으로 옳았는가”가 아니다. “국가가 시민을 탱크로 짓밟을 권리를 가지는가”라는, 자유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질문이다.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아직 미완이다. 현행 헌법은 5·18을 지나 6월항쟁으로 이어진 민주주의의 피 묻은 경로를 전문에 온전히 적지 못했다. 이번 개헌안은 그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5·18 정신을 헌법에 명시적으로 수록하려 한 개헌안은 국가폭력의 기억을 헌정 질서 안에 묶어두는 작업이다.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강화하려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12·3 내란의 기억이 채 마르지 않은 시점에서, 이 개헌안은 군부독재의 불법 계엄과 헌정 유린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헌법적 방어벽이었다.

국민의힘은 이 방어벽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5·18 기념식에 참석해 “5·18 정신”을 말했다. 이것은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넘어선다. 잔혹함의 기억을 제도화하는 것은 거부하면서, 그 기억을 수사적으로 전유하는 일이다. 광주를 헌법에는 새기지 않으면서 기념사에는 호명하는 정치. 광주에 참석하면서도 광주를 정쟁의 도구로 되돌리는 정치. 바로 그 틈에서 냉소는 자란다.

냉소적 이데올로기는 가해의 방법이고, 공포의 삭제는 그 가해가 도달하는 목적지다. “알면서 즐기는” 사람들은 국가폭력의 공포를 유희로 전환한다. 그렇게 해서 그 공포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민주주의적 합의의 토대를 깎아낸다. 탱크와 고문을 밈으로 소비하는 감각은 피해자가 느낀 공포를 공적 기억에서 용해시키고, 가해의 언어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잔혹함의 기억이 사라지면, 잔혹함을 경계하는 감각도 함께 사라진다. 슈클라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그 감각의 마비였다.

스타벅스의 ‘탱크데이’는 공포의 기억을 밈으로 용해시키는 것이고, 개헌 무산은 공포의 기억을 헌법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국민의힘 지도부의 기념식 태도는 그 배제와 용해가 의례의 공간에서도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방법은 다르지만 도달하는 곳은 같다. 잔혹함을 경계하는 감각이 제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동시에 해체되는 곳이다.

 

스타벅스 텀블러와 머그컵을 망치로 망가뜨린 모습 소셜미디어 갈무리 연합뉴스

민주주의는 아름다운 이상으로만 세워지지 않는다. 잔혹함에 대한 공포를 잊지 않는 것으로 유지된다. 텀블러를 부수는 분노는 정당하다. 불매운동도 의미 있다. 그러나 분노와 불매를 넘어, 이 냉소의 구조 자체를 해부하고 이름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진지충”이라는 낙인, “선거용 개헌”이라는 프레임, “그냥 실수”라는 해명, “권력 확장의 도구”라는 역공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잔혹함의 기억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것. 냉소적 이데올로기의 가장 교활한 승리는, 바로 이 사소화를 통해 비판 자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냥 드립인데 왜 진지해?”라는 말에 웃어넘기는 순간, 우리는 그 냉소에 가장 값싼 승리를 헌납한다.

5월의 광주가 묻는 질문은 46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국가는 시민을 짓밟을 권리를 가지는가. 그 질문을 헌법에 새기는 일을 거부하고, 그 질문의 무게를 텀블러 광고와 SNS 농담과 기념식장의 정쟁 언어로 희석시키는 일이 같은 시기에 벌어지는 나라에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분명하다. 냉소에 맞서는 것은 비장한 표정을 짓는 일이 아니다. 공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제도와 언어와 문화 안에 단단히 박아 넣는 것이다.

슈클라가 옳다면, 민주주의는 잔혹함을 이긴 체제가 아니라 잔혹함을 잊지 않으려는 체제다. 그러므로 5·18을 농담으로 만드는 냉소 앞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광주의 명예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가 다시 시민을 적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감각, 그 감각을 헌법과 제도와 언어 속에 묶어두는 일이다. 그 기억이 사소해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먼저 웃음 속에서 무너진다.

정승호 시민기자 jeong.seungho@hoasen.edu.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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