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지도부가 5·18 기념식에서 보인 태도도 이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장동혁 대표는 기념식에 참석했지만, 참석을 앞두고 이미 SNS에 민주당이 5·18을 권력 확장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올려두었다. 기념식 직후에도 대통령의 기념사를 겨냥한 비판을 이어갔다. 몸은 기념식장에 있었지만, 언어는 광주를 다시 정쟁의 무대로 되돌리고 있었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기념식 불참과 관련해 “더러워서 안 간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보도로 논란에 휩싸였고, 국민의힘은 “서러워서”였다고 반박했다. 표현을 둘러싼 공방은 남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핵심은 분명하다.
광주는 그들에게 함께 감당해야 할 헌정의 기억이 아니라, 불편하거나 억울한 정치 현장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기념식 참석은 면죄부가 아니다. 광주에 몸을 두었다고 해서 광주를 존중한 것이 자동으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5·18을 기리는 자리에 서면서도 곧장 그 기억을 “상대 당의 도구”로 환원한다면, 추모는 의례가 아니라 알리바이가 된다. 광주를 헌법에는 새기지 않으면서 기념식에는 참석하고, 광주의 항의를 들으면서도 그것을 민주주의의 고통이 아니라 진영의 소음으로 여기는 정치. 바로 그 틈에서 냉소는 자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정당이 불과 며칠 전 5·18 정신의 헌법 수록을 표결 불참으로 무산시킨 바로 그 정당이라는 사실이다. 제도적 차원에서 5·18의 기억을 헌법에 새기는 일을 거부한 정치세력이, 문화적 차원에서 5·18을 조롱하는 밈에 동조하는 듯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기념식의 공간에서도 그 기억을 정쟁의 언어로 되돌렸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로만 보기 어렵다. 커뮤니티에서 기업으로, 기업에서 정당으로, 정당에서 국회 본회의장으로, 다시 기념식장으로 이어지는 냉소의 경로가 보인다.
보수정당은 원래 국가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헌법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법질서를 지키자고 말한다. 그렇다면 국가가 시민에게 총을 겨눈 사건 앞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멈춰 서야 한다. 5·18은 보수가 회피할 기억이 아니라, 국가권력이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헌정의 교과서여야 한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헌법 전문에 5·18을 새기는 일에는 불참했고, 소속 도당과 후보 측 계정은 스타벅스 논란 직후 조롱으로 읽힐 수 있는 말을 남겼으며, 지도부는 기념식의 자리에서도 광주를 정쟁의 언어로 밀어 넣었다. 이것은 호남 민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헌정 보수의 자기배반이다. 국가와 헌법을 말하는 정당이 국가폭력의 기억 앞에서 멈추지 못한다면, 그 보수는 무엇을 보존하겠다는 것인가.
미국의 정치이론가 주디스 슈클라는 자유주의의 출발점을 자유, 평등, 정의 같은 높은 이상에서 찾지 않았다. 슈클라는 “잔혹함을 최고의 악으로 놓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하며 ‘공포의 자유주의’를 언급했는데, 국가가 시민에게 가할 수 있는 물리적·정신적 공포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데 자유주의 정치의 가장 낮고 단단한 토대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 렌즈로 보면, 5·18의 본질은 “누가 이념적으로 옳았는가”가 아니다. “국가가 시민을 탱크로 짓밟을 권리를 가지는가”라는, 자유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질문이다.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아직 미완이다. 현행 헌법은 5·18을 지나 6월항쟁으로 이어진 민주주의의 피 묻은 경로를 전문에 온전히 적지 못했다. 이번 개헌안은 그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5·18 정신을 헌법에 명시적으로 수록하려 한 개헌안은 국가폭력의 기억을 헌정 질서 안에 묶어두는 작업이다.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강화하려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12·3 내란의 기억이 채 마르지 않은 시점에서, 이 개헌안은 군부독재의 불법 계엄과 헌정 유린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헌법적 방어벽이었다.
국민의힘은 이 방어벽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5·18 기념식에 참석해 “5·18 정신”을 말했다. 이것은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넘어선다. 잔혹함의 기억을 제도화하는 것은 거부하면서, 그 기억을 수사적으로 전유하는 일이다. 광주를 헌법에는 새기지 않으면서 기념사에는 호명하는 정치. 광주에 참석하면서도 광주를 정쟁의 도구로 되돌리는 정치. 바로 그 틈에서 냉소는 자란다.
냉소적 이데올로기는 가해의 방법이고, 공포의 삭제는 그 가해가 도달하는 목적지다. “알면서 즐기는” 사람들은 국가폭력의 공포를 유희로 전환한다. 그렇게 해서 그 공포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민주주의적 합의의 토대를 깎아낸다. 탱크와 고문을 밈으로 소비하는 감각은 피해자가 느낀 공포를 공적 기억에서 용해시키고, 가해의 언어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잔혹함의 기억이 사라지면, 잔혹함을 경계하는 감각도 함께 사라진다. 슈클라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그 감각의 마비였다.
스타벅스의 ‘탱크데이’는 공포의 기억을 밈으로 용해시키는 것이고, 개헌 무산은 공포의 기억을 헌법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국민의힘 지도부의 기념식 태도는 그 배제와 용해가 의례의 공간에서도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방법은 다르지만 도달하는 곳은 같다. 잔혹함을 경계하는 감각이 제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동시에 해체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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