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특집] 33년 전 죽은 동생, 한국 '5·18 테이프'에 살아 있다니

[내 이름은 원덕기: 누나 록산, 미네소타 인터뷰①] 죽기 전 그날의 '목소리' 찾던 팀 원버그..."동생에게 광주는 공동체"

26.05.20 06:48최종 업데이트 26.05.20 07:11

5·18민주화운동 46주년 및 위르겐 힌츠페터 10주기를 맞아 다큐멘터리 영화 <내 이름은 원덕기>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펀딩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합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광주를 사랑한 팀 원버그(한국 이름 원덕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펀딩 바로가기 https://omn.kr/2i36q[편집자말]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다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팀 원버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이 지난 3월 1일 미네소타에서의 인터뷰 도중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미공개 테이프 영상을 지켜보고 있다. 이희훈

33년 전 지병으로 죽은 동생이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다. 노트북 화면 속 동생은 떨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2분 30초 동안 머나먼 나라의 학살을 증언하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광주" 한복판에서 동생은 못 보던 선글라스를 쓰고 "군인들이 잔혹하게 때려 사람들의 머리가 찢어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고 연신 목소리를 높였다.

고 위르겐 힌츠페터(2016년 작고)가 촬영·편집한 총 30여 분의 이 영상은 동생의 모습 외에도 그의 말을 증명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사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동생은 죽기 전까지 그날의 광주를 이야기했다.

다만 동생이 목격한 참상을 두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50년 넘게 간호사로 일했고 인간의 신체에 익숙했지만, 잔혹한 폭력의 잔상은 누나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왜 그토록 동생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고 했는지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5·18민주화운동 중인 1980년 5월 24일 촬영한 인터뷰 영상의 화면을 갈무리한 것. 영상 속 인물은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 원버그(Tim Warnberg, 한국 이름 원덕기)다. 5·18기념재단이 보관하고 있던 이 영상은 그 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으며, 항쟁 한복판에 있던 인물의 현장 인터뷰는 5·18 관련 기록물 중 이 영상이 유일하다.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그의 미소 닮은 누나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1978년부터 광주에 머물다 5·18민주화운동을 한복판에서 경험한 고 팀 원버그(Tim Warnberg, 5·18 당시 25세). <오마이뉴스>는 5·18기념재단이 보관한 힌츠페터의 미공개 테이프에서 46년 전 팀의 인터뷰를 발견했고 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Roxanne Warnberg Wilson, 72)을 만나러 지난 겨울 끝자락에 미국 미네소타로 향했다. 5·18 당시 촬영된 누군가의 인터뷰 영상은 그동안 볼 수 없는 기록물이었다.

열흘 간의 항쟁을 목격한 팀은 시민들을 구타하는 계엄군을 말리다 곤봉에 얻어맞기도 하고, 총칼을 찬 군인들 사이로 부상자들을 병원에 이송하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오라는 주한 미대사관의 지시를 거부하고, 유창한 한국어로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도왔으며, "5월 18일에 광주에 있었다"며 힌츠페터가 제안한 인터뷰에도 기꺼이 응한 그였다. 1987년 외국인 최초로 5·18을 폭도의 소행이 아닌 시민의 항쟁으로 정의한 논문을 발표한 팀은 6년 뒤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말 처음 힌츠페터 테이프에서 팀의 인터뷰 영상을 발견했을 때, 취재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었다. 팀과 함께 5·18을 목격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비드 돌린저, 폴 코트라이트에게 그의 누나 록산이 미네소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처를 받았다.

영상통화로 만난 록산은 팀과 같은 갈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도 비슷했다. 의사를 꿈꾸며 광주에서 의료 봉사를 했던 팀처럼, 록산도 50년 넘게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매년 동생의 기일이면 록산은 소셜미디어에 그가 46년 전 광주에서 들것을 든 모습을 올린다고 했다. 팀을 더 알고 싶다는 취재진의 목표는 그때부터 바뀌었다. 스물다섯 청년 팀의 육성을 팀을 꼭 닮은 그의 가족에게 뒤늦게라도 직접 들려주고 싶었다.

지난 2월 28일, 12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미네소타는 영하 15도에 육박했다. 도로 곳곳에는 직전 내린 눈이 얼음으로 단단히 굳어 있었고, 지난 1월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를 동원한 국가폭력과 이에 대응한 대규모 저항의 여파도 남아 있었다.

우리는 3월 1일과 4일 두 차례 록산을 인터뷰했다. 두 번째 만남은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 사이 달라진 점은, 록산이 힌츠페터 영상 속 동생의 모습과 광주의 참상을 눈으로 봤다는 것뿐이었다.

첫날 인터뷰 중 영상을 본 록산은 "정말 끔찍하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날 밤 취재진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이 영상을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라고 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잔혹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니, 정말 충격적입니다. 피해자들, 목격자들, 심지어 군인들에게도 참혹한 마음이 듭니다. 영상을 직접 보니, 동생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용감하게 나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마치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a gift and a burden to carry)입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는 우리가 맞서야 할 일들이 있고, 함께 지켜야 할 가치들도 있으니까요."

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19일, 들것에 실린 환자를 옮기는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체크무늬 셔츠)와 광주 시민들. 전일빌딩에 있던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가 건너편 당시 광주관광호텔(현 무등빌딩)을 지나는 이들을 촬영했다.나경택 제공

따뜻함에서 나온 팀의 용기

록산은 "사람들이 동생의 용감함과 담대함에 주목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더 중요한 건 그의 따뜻함"이라고 했다. 광주에서 보여준 팀의 용기가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던 그의 성정"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뜻하다(kind)고 할지,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한다(compassionate)고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팀은 타인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뒤에서 묵묵히 챙기던 사람이었어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팀의 친구를 몇 년 후 만났을 때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무도 나에게 다정하지 않았을 때, 팀은 우리 집에 놀러 와 나와 이야기를 나눴어요. 팀은 내가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걱정했죠. 그때 저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팀이 정말 좋은 친구가 돼줬어요'."

록산은 팀의 이런 면모를 두고 "부모님의 좋은 점을 고루 물려 받았다"고 떠올렸다. 그는 "어머니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 조용히 알아차리고 챙겼다"며 "어디에 있든 사람들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능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우리 지역 치안의 총책임자(한국의 지방경찰서장과 비슷한 개념인데 차이점은 선출직 - 기자 주)였는데 다양한 계층과 친구가 되는 능력이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한국에 머물다가 5·18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팀 원버그의 어린 시절 모습. 뒷줄 가장 키가 큰 두 사람이 팀과 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이다.록산 원버그 윌슨 제공

이러한 맥락에서 록산은, 팀의 용기가 5·18 전 2년 간 광주에 살며 광주를 "자신의 마을"이자 "공동체"로 여겼기 때문에 발휘됐을 것이라고 짚었다.

"광주는 팀에게 자신의 마을이자 스스로 속해 있다고 느끼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는 '한국은 내가 아끼는 나라고, 광주 시민들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다. 침묵할 수 없다. 목소리를 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팀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항쟁에 나서기도 했고 다치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미국인인 자신이 현장에 몸을 던져서 '멈추라'고 외치고, 외신기자들에게 이 상황을 알린다면 뭔가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적어도 아끼는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건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록산을 통해 제공받은 대학원생 팀의 글에도 한국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사실 나는 한국을 선택한 게 아니라 미국 정부에 의해 평화봉사단원(1960년대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로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 - 기자 주)으로 한국에 파견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기대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 내가 만난 한국인들의 친절함과 너그러움, 그리고 인내심에 매료됐다. 몇 달이 지나자 나는 한국에서 꽤 편안함을 느끼게 됐고,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국은 나의 집이 됐다(Korea was to be my home)."

5·18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팀 원버그가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중 한국인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 오른쪽은 함께 5·18을 목격한 데이비드 돌린저.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동생의 삶 뒤흔든 광주

특히 록산은 "광주가 동생의 삶을 뒤흔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팀은 한국 정부, 그리고 미국 정부까지 5·18에 연루됐다고 생각했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잔혹함과 폭력이 용인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팀에게 충격이었죠. 다른 면에서는 그 경험으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얼마나 용감해질 수 있을지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을 도와 식사를 준비하는 것과 실제로 누군가를 위해 총 앞에 서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니까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죠."

정말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애초 의대 진학을 위해 평화봉사단원이 됐던 팀은 의대에 가지 않았다. 5·18 이후 5년을 더 한국에 머무른 뒤, 1986년 미국 하와이대학 한국학 석·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대학원 첫 학기 수업에서, 그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5·18에 관한 논문을 쓰기로 결심하고, 1년 뒤 이를 발표했다. <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 >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록산은 그 논문이 실린 하와이대학 한국학 학술지를 지금도 갖고 있었다.

"당시 팀은 저에게 그 논문이 담긴 책을 보여줬어요. 제 기억으로 팀은 자신이 5·18에 관한 글을 쓴 최초의 외국인이라고도 했어요. 팀은 광주에서의 일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실제로 그렇게 했고요."

팀 원버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이 지난 3월 1일 미네소타서의 인터뷰에서 동생이 쓴 5·18민주화운동 관련 논문의 원본을 내보이고 있다.이희훈

록산은 팀이 박사과정 중 집필한 여러 글 또한 내보였다. 팀은 5·18 논문을 쓴 이후에도 꾸준히 한국의 정치상황, 특히 직접 겪은 5·18이 학생운동과 한국의 민주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었다. 팀이 1991년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학생운동의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 for the student movement)>라는 제목의 글엔 이런 내용이 담겼다.

"광주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 내부 세력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의 시민을 학살하는 일까지 감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전두환과 그의 측근들은 이후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지만, (...) 그에 대한 국민적 수용은 기껏해야 냉담한 수준에 머물렀다. 한국 국민은 민주화를 원하고 있었고, 광주의 참상 또한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았다. (...) 특히 1987년, 한국이 이른바 '프라하의 봄'과 같은 시기를 맞으며, (...) 정부가 자국민에게 무력을 행사할 리 없다고 믿고 싶어 했던 사람들조차 참혹한 학살을 담은 수많은 비디오 테이프·사진·TV 프로그램·생생한 증언을 접했고 결국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록산은 팀이 죽음을 앞두고도, "광주가 잊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강조했다. 그는 "팀은 테리 앤더슨(Terry Anderson, 5·18 중 팀을 인터뷰한 AP통신 소속 미국 기자)에게 연락해 당시 자신이 한 인터뷰의 녹음 테이프가 있는지 물었다"며 "또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광주항쟁' 논문의 존재를 알렸다. 필요할 때 우리가 그 논문을 찾을 수 있도록 굉장히 신경 썼다"라고 설명했다.

록산은 팀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병이 점점 자신을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테리 앤더슨 기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회상하며 "팀은 자신만이 간직했던 광주의 기억을 기록하고 싶어 했다"라고 전했다. 이어 "그것이 광주를 계속 드러내고 널리 기억되게끔 하려는 팀의 노력이었다"며 "테리가 그 테이프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팀은 결국 광주를 증언하던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하고 떠났다"라고 설명했다.

아래 팀이 테리 앤더슨 기자에게 쓴 편지를 요약했다.

팀 원버그가 숨지기 1년 전인 1992년 3월 5·18민주화운동 당시 자신을 취재한 테리 앤더슨(당시 AP통신 기자)에게 쓴 편지. "제 삶에서 저를 깊이 변화시킨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저는 그 혼란스러웠던 광주의 날들을 떠올리게 됩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록산 원버그 윌슨 제공

친애하는 테리에게

제 이름은 팀 원버그입니다. 12년 전, 제가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 광주에 있고, 당신이 그 도시의 학살 사건을 취재하고 있었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당신은 저를 인터뷰했으며, 녹음도 했습니다.

상태가 다소 호전되기는 했지만, 병은 서서히 저를 잠식하고 있습니다. 제 삶에서 저를 깊이 뒤흔든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저는 혼란스럽고 참혹했던 광주의 날들(chaotic days in Kwangju)을 떠올리게 됩니다. 학살의 참상에 충격을 받았고 인간이 서로에게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경악했습니다.

지금 가족과 함께 보내고 계신 소중한 시간을 더 방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 상황이 저를 조금은 대담하게 만듭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저를 인터뷰하며 녹음하셨던 테이프가 아직 남아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사본을 받아 당시 제가 직접 겪은 학살에 대한 제 증언(my first-hand account of the massacre)을 다시 한 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진심을 담아, 팀 원버그 드림

1992년 3월 20일

이 편지를 설명하며 록산은 취재진을 통해 본 팀의 인터뷰 영상을 재차 언급했다. 그는 "팀이 인터뷰 영상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에게 큰 위로가 됐을 것"이라며 "그가 테리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도 바로 그 당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자 한 것" 이라고 말했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렵지만, 이 영상을 봤다면 기쁨(joy)도 느꼈을 것 같아요.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기쁨을 느낀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팀은 자신의 말이 여전히 남아 있고, 자신이 본 것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모습에 안도했을 거예요."

<내 이름은 원덕기> 제작을 위한 펀딩

당신의 이름을 보태주세요. 오마이뉴스는 다큐멘터리 영화 <내 이름은 원덕기>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펀딩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할 계획입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광주를 사랑한 팀 원버그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바로가기 https://omn.kr/2i36q

기획 소중한 취재 소중한·전선정·김화빈·이진민·유지영

촬영 강상우·이희훈 편집 콘텐츠팜 호미

CG 김수연 타이틀 김소설 음향 DMC 사운드 비전 내래이션 이승준

펀딩 기획 장유정·이기종·봉주영

영상 제공 5·18기념재단·루먼 형제(Ben&Sam Luhmann)

영상 번역 자문 로버트 그라찬

사진·자료 제공 고진석·나경택·서나래·유경남·변재원·안영주·록산 원버그 윌슨·데이비드 돌린저·폴 코트라이트·캐롤린 투르비필·케빈 페어뱅크스·로버트 그라찬·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외교사료관·박지원 의원실

촬영 협조 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대병원·전일빌딩245·국가보훈부·별밭·필로스팅하우스

제작 지원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동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