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김준연(金俊淵, 1895~1971) 항목의 소제목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에서 해방 후 극
우 정치인으로 변신."
"이승만 뜻에 따라 내각제 헌법초안을 대통령중심제로 급히 바꾼 장본인."
"천하의 모사꾼으로 야당을 분열시킨 극우 브레인 노릇."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회프락치 사건 발단 제공하고 반민특위 와해에 앞장서."
한 사람이다. 일제치하에서 고문과 옥고를 겪으며 조선독립을 꿈꾸던 인텔리가,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를 파괴하고, 국회프락치 사건의 불씨를 당기고, 김구 암살의 배후로 거론되고, 부역자 학살의 법적책임자가 됐다. 이 변신의 궤적이 이 글의 핵심이다.
'영암 천재',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김준연은 1895년 4월 8일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영암보통학교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를 전교 6등으로 마친 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제국대학 독법과를 졸업하고 1921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정치·법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1925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이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특파원이었다. 그는 소비에트연방 전체회의를 참관하고, 공산주의 이론가 부하린의 연설문을 번역 게재했으며, 스탈린의 저서를 39회에 걸쳐 연재했다.
1926년 재건된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선전부장을 맡았고, 1927년 9월 당 책임비서가 됐다. 1928년 2월 간부들이 모두 검거되면서 조선공산당이 붕괴됐고, 김준연도 체포돼 6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그런데 출옥 후 그는 공산주의와 절연한 정도를 뛰어넘었다. 극우정치인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이 변신에 대해 역사가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공산혁명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이었다는 설, 감옥 안에서 배신자로 의심받으면서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는 설,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와 독일어로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특수한 위치를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설. 어느 쪽이든 그 변신이 완전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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