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안보분야 차관급 협의채널은 제2의 ‘워킹 그룹’?
한미 FTA는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완전히 당했다. 포장은 번지르르했다. 세계 최대 시장을 무관세로 열어 선진 통상국가가 된다, 국민소득이 크게 오르고 한국 경제는 비약한다, 엄청난 말잔치였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이 차려지기도 전에 미국은 알짜배기 건더기를 이미 하나씩 뽑아먹고 있었다. 스크린쿼터 축소,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건강보험 약가제도 현행 유지,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 완화,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이었다. 정부는 선결조건이 아니라고 우겼다. 미국은 입장료처럼 챙겼다. 경제동맹이라는 이름의 FTA는 한미동맹처럼 일방적인 약탈이다.

지금 한미 안보분야 공동팩트시트가 같은 길로 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미끼는 핵잠수함이다. 거기에 우라늄 농축,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라는 단어가 붙었다. 한국이 드디어 핵 주권을 확보하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은 아주 하찮은 요구사항이다. 핵잠은 기술을 달라는 것도, 소형 원자로를 지어달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원자로에 들어갈 저농축 우라늄을 제공해 달라는 요구일 뿐이다. 농축과 재처리도 20% 이하의 저농축에다가 특수한 방식의 재처리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팩트시트는 그러한 과정을 지지한다고만 했다. 약속한 것이 아니다. 웃기고 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약속한 것은 광범위하다. 경제 분야에는 2000억 달러 전략투자, 1500억 달러의 조선 투자에 미국은 원래 0%이던 한국산 자동차와 부품에 15% 관세를 매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세협상으로 죽었어야 했을 한미 FTA가 미국만을 이롭게 하는 틀로 버젓이 되살아났다. 안보 분야에서는 한국 국방비를 GDP의 3.5%까지 증액하기로 했고, 2030년까지 미국산 군사장비 250억 달러 어치를 구매하기로 했으며, 주한미군에 330억 달러를 추가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더 큰 것이 합의문 안에 몸을 숨기듯 도사리고 있다.
한국 언론은 핵잠을 본다. 작년 10월 29일 경주에서 열린 2차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모두 공개발언으로 요구한 사항이라는 시각적 요인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핵잠 승인”이라는 한 줄에 흥분할 때 미국은 표 전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안보 이슈만 해도 미국은 한반도 방위의 한국 책임 강화, 전작권 반환을 둘러싼 줄다리기,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국방비, 무기구매, 대만해협, 한미일 군사망을 한 묶음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우리가 핵잠과 원자력에 한눈을 파는 사이 미국은 한국을 중국을 겨냥한 미군의 전진기지로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숭미파들이 미국의 내심과 요구를 좇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국가안보실장 위성락의 언행은 세밀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2025년 12월 그는 미국을 방문해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만나 한미정상회담의 후속 협의에 착수했다. 핵잠에 관한 미국의 약속을 채근하기 위해서였다. 귀국 뒤 그는 핵잠 협력에 관해 한미가 ‘별도 협정’ 필요성에 의견을 같이했고, 미국 실무대표단이 이른 시기에 한국에 와서 사안별 협의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농축·재처리도 같이 논의한다고 했다. 미국 원자력법상 군용 핵물질 이전 문제가 걸려 있어 ‘별도 협정’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나왔다. 우리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2026년 2월이 되자 말이 달라졌다. 위 실장은 우리가 대미투자 입법을 지연하고 있어서 핵잠, 농축, 재처리 등 안보 분야 후속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안보협상팀이 지금쯤 한국에 와 있어야 하는데 지연되고 있다고도 했다. 결국 미국은 통상, 기업, 관세, 법률, 플랫폼 규제까지 한 상 위에 올려놓고 한국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4월에는 쿠팡이 나왔다. 위 실장은 쿠팡 문제가 한미 안보협의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마치 우리가 쿠팡을 잘못 다뤄 미국이 화내고 있음을 두둔하는 발언이었다.
한미동맹이란 미국이 휘두르는 만능의 압박 장치다. 국무부 정무차관 앨리슨 후커의 6월 1-3일간 방한은 그 압박 장치가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명목상으로는 한미 공동팩트시트의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협의의 발족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우리가 핵잠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미국은 한국을 어떻게 자기들 입맛에 맞게 통제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후커 차관의 일행에는 국무부, 백악관 NSC, 에너지부, 국방부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위 실장과 조현 외무장관 외에 주한미군사령관과의 별도 회동도 가졌다.
후커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다. 트럼프 1기 때 백악관 NSC에서 한반도와 아시아를 다뤘고, 싱가포르·하노이·판문점 북미 정상회담에도 관여했다. 북한을 연구한 사람이자 한국 압박의 내부 문법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앞으로 챙길 사안은 한국의 꿈이 아니라 미국의 장부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한국 국방비 증액, 미국산 무기 구매, 한미일 군사협력, 중국 견제, 정보통제, 비확산 관리가 후커의 관심사다. 이번에 발족한 차관급 협의채널은 문재인 정부 시절 ‘워킹 그룹’의 재판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단단히 경계해야 한다.
미국은 핵잠과 원자력 협력을 공짜로 주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은 한국의 핵잠을 중국 견제를 위한 그들의 무기로 이용해 먹을 거라는 말이다. ‘별도 협정’이 만들어지면 거기에는 연료 공급 조건만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운용 조건, 검증, 정보공유, 작전협력, 비확산 의무, 미국의 승인권,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따라붙을 공산이 크다. 한미 FTA 협정문 곳곳에 미국 기업의 권리가 박혔듯, 안보판 협정문 곳곳에는 미국의 군사적 권리가 박힐 것이다. 전작권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전작권을 쥐고 있어야 한국을 계속 갖고 놀 수 있다.
미국의 큰 그림은 오래전부터 같았다. 한국을 일본과 함께 대중국 전진기지로 세우는 일이다. 조선협력은 미 해군 재건과 연결된다. 핵잠 협력은 중국 잠수함 추적망과 연결된다. 한미일 군사협력은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의 군사동원 체계와 연결된다. 한국 국방비 증액은 미국 방산업체의 매출과 연결된다. 한국의 숭미파는 그것을 알면서도 국민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핵잠과 원자력이라는 말로 눈을 후린다. 그 사이 미국이 원하는 모든 것을 챙겨줄 것이다. 김현종이 한미 FTA로 미국의 요구를 위해 “죽도록 싸운” 것처럼 누군가는 다시 미국의 큰 그림을 위해 “피터지게 싸울”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진짜 대한민국을 하겠다면 여기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미국과 협상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미국을 정확히 보고 협상해야 한다. 핵잠을 얻는 대신 군사주권을 더 잃는다면 그건 성과가 아니다. 농축·재처리 문구를 얻는 대신 대중국 전진기지 역할을 떠안는다면 그건 원자력 주권이 아니다. 원자력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승인권이 더 촘촘해진다면 그것은 독립이 아니다. 국민 앞에 장부를 펴야 한다. 무엇을 받는가. 무엇을 내주는가. 누가 이익을 보는가. 어느 전선에 끌려가는가.
이번 지방선거의 패배도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진보진영은 외교안보의 자기 언어를 만들지 못했다. 국힘을 응원하는 숭미세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한미동맹은 정책이 아니라 신앙이다. 그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정부내 숭미파들의 준동 역시 경계할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참모진의 재정비다. 워싱턴의 표정부터 살피는 사람들, 한국 국민의 이익보다 미국 관료의 문장을 더 무서워하는 사람들, 핵잠이라는 장난감 하나에 나라 전체를 미국의 군사 전진기지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이제 몰아내야 한다. 한미 안보분야 공동팩트시트 협력은 자주의식을 가진 인사들이 들여다보아야 할 사안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보판 한미 FTA가 된다. 한 번 속으면 실수다. 같은 방식으로 두 번 속으면 공범이다. 끝.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