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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은 어쩌다 일본에 퇴짜 맞았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7> 해방과 분단, 열두 번째 마당

기사입력 2014.02.09 00:10:07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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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1948년 12월 12일 유엔에서 중요한 결의안('대한민국 승인과 외국 군대 철수에 관한 결의')이 통과됐다. 이 결의안에 대한 해석이 엇갈린다. 유엔이 결의한 사항이 '한반도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지닌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38선 이남에 대한 관할권을 지닌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도 있다.

 

서중석 : 이 얘기는 영문 자료만 정확하게 번역하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거다. 유엔이 결정한 게 영문 자료로 다 있지 않나. 이미 명확한 설명이 이루어진 것인데도 참 끈질기게 많은 사람들한테 부정확하게 전달되는 면이 많다.

 

사실 이승만 정부가 이 부분을 왜곡했다고 할까, 부정확한 내용을 아주 강하게 교육, 선전, 홍보했다. 박정희 정부도 그걸 똑같이 계승했다. 말 잘못하면 감옥소 가던 때 아닌가. 현대사 연구와 교육에서 얼마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이 문제라고 본다. 이 사안은 당시의 여러 문제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전반적인 문제와 결부돼 있다.

 

프레시안 : 어떤 문제인가.

 

서중석 : '한반도엔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 이것에 대해 한국인들이 너무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헌 헌법 제4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돼 있다. 이건 물론 북한에 분단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통과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당시 소장파 (국회의원) 한 사람만 질문했을 뿐 다른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한 사람이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유진오 전문위원이 국회에서 이렇게 답했다. "이 헌법이 적용된 범위가 38도선 이남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 고유의 영토 전체를 영토로 삼아가지고 성립되는 국가의 형태를 표시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말듯한 설명이다. 한마디로 민족의 당위, 민족의 규범을 여기서 표현한 것이라고 얘기하면 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참 어이없는 헌법 조항이 북한에서 등장한다.

 

프레시안 : 어떤 조항인가.

 

서중석 : (1948년 만들어진) 북한 헌법 제103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府)는 서울시다", 이렇게 돼 있었다. 세상에, 눈곱만큼도 서울에 관할권이 없는데도 그랬다. (이 조항이) 10~20년 간 게 아니다. 1972년 헌법이 바뀔 때까지 계속 그랬다. 1972년에 북한 헌법(의 해당 조항)이 바뀌는 건 통일 정부,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는 사고가 바뀌어서 그런 게 아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다. 북한이 주체사상의 나라가 되면서 역사관 자체가 확 바뀐 것이 큰 원인이었다. (북한은 1972년 개정 헌법에서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바꿨다. <편집자>) 어쨌건 (1948년 북한에서 만들어진) 이런 헌법은 전 세계 어디서도 있을 수가 없는 거다. 정말 어이없는 헌법이다.

 

그런데 한국인들한테는 이게 또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엔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고 여겨서다. 한국인들이 통일을 얼마나 갈구했는가를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바로 이런 문제와 직결돼 있다.

 

1969년 박정희 정부가 국토통일원을 발족하면서 통일에 관한 여론 조사를 했다. 박정희 정부가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통일 논의를 억압했는데도 90퍼센트가 넘는 국민이 '반드시 통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39.5퍼센트가 '10년 이내에 통일이 가능하다'고 했고, 18퍼센트 정도는 '그건 안 된다', 나머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중립화 통일안 같은 걸 지지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국토통일원이 1969년 말 실시해 1970년 2월 발표한 결과다. 이 조사에서 90퍼센트가 넘는 응답자가 '통일은 반드시 이뤄야 할 민족적 지상 과제'라고 답했다. <편집자>) 그렇게 반공 교육을 시켰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왔으니 얼마나 놀랐겠나. 그 후에도 통일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하면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1980년대까지 그랬다. 이것이 한반도 문제를 그렇게 (풀기) 어렵게 만든 한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독일에선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건 주자학적 명분론과도 관련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정통'이란 말을 한국인들이 즐겨 쓰지 않나. 주자학이 이 땅을 지배하던 조선 후기에 양명학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사문난적으로 처단됐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이것(분단 정부임에도 남북한 전체를 대표한다고 강조한 것. <편집자>)에는 주자학적 명분론이 상당히 가세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이 점은 좌익도 비슷하더라. 좌익에서도 이런 명분이 강하게 작용하니까 아까 이야기한 (북한) 헌법 제103조 같은 게 나온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울러 유엔 승인 문제와 관련해서는 분단 세력의 입장이 아주 강하게 작용했고, 그러면서 분단 세력이 집요할 정도로 이것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된 것 아닌가. 1950년대에 함석헌이 <사상계>에 '도대체 남이건 북이건 서로 괴뢰라고 하니 우리나라엔 괴뢰만 있는 거냐'라는 내용을 썼다가 혼난 적이 있다. 남쪽에선 북한을 1950년대엔 '괴집'(괴뢰 집단)이라고 불렀고 1960년대 이후엔 '북괴'라고 하지 않았나. 북한에선 남한을 '미 제국주의자의 괴뢰'라고 했다. 참 슬픈 일인데 거기엔 역사성도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함석헌은 <사상계> 1958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실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문제가 된 핵심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고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아 있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다." 이 필화 사건 후 <사상계> 구독자는 오히려 급증했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1948년 유엔 결의는 '38선 이북 관할권, 한국에 없다'는 것

 

프레시안 : 1948년 12월 12일 유엔에서 결의한 내용을 정밀하게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유일 합법 정부라는 부분에 관해 1948년 유엔 결의를 가지고 얘기해 보자. "한국 인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한국 지역에 효과적인 통치와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가 수립됐다는 것과, 이 정부는 한국의 이러한 지역의 유권자의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이고 임시위원단이 감시한 선거에 기초했다는 것과, 이 정부가 한국 내의 이러한 유일한 정부라는 것을 선언"한다는 내용이다.

 

풀이하면 이렇다. '한국인 유권자의 자유의사가 정당하게 표현된', 이건 '(1948년) 5.10선거가 치러진'이란 말이다. '한국 인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이건 남한이 2000만 명이고 북한이 1000만 명이었으니 남쪽이 한국인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유엔이 규정한 것이다. 그 지역에서 '통치와 관할권을 갖는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다', 이렇게 유엔에서 결의한 것이다.

 

유엔 결의는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에, 다시 말해 38선 이북까지 관할권을 갖는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괴집', 북괴라고 한 것이다.

 

유엔에서 이것이 통과되기 전에 미국도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 지역에 대해서까지 관할권을 갖는다'는 식으로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영국, 캐나다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 실제로 그렇지 않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미국도 그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정부라는 주장을 접고, 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는) 그런 식으로 조율된 것이다.

 

프레시안 : 38선 이북에 대한 관할권 문제는 한국전쟁 때 바로 불거졌다.

 

서중석 : 그렇다.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건 국군이 (1950년) 그날 38선을 넘은 걸 이야기하는 것임을 다들 알고 있지 않나. 그런데 유엔군은 유엔의 결정을 기다렸다가, 유엔에서 일정한 결정을 한 후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 부분과 관련해 유엔에서 다시 한 번 천명한 게 있다. 북쪽 땅을 유엔군과 국군이 차지하게 되면서 '그러면 북쪽 지역에 행정 기구를 어떻게 설치할 것이냐', 이 문제가 대두한 거다. 그래서 유엔 소총회에서 (1950년) 10월 12일 이렇게 결의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감시 및 협의할 수 있었던 한국 지역에 효과적 지배권을 가진 합법 정부로서 유엔에 의해 승인됐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기타 지역에서", 여기서 기타 지역은 38선 이북을 말하는 거다, "합법적이며 효과적인 지배권을 가졌다고 유엔이 승인한 정부는 없음을 상기하며", 이 내용이다.

 

그러고 나서 구체적인 결정을 내린다. 뭐냐 하면 "전쟁 발발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효과적 통치 하에 속한 것으로 유엔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으며 현재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국 지역의 모든 정부와 민간의 행정 책임은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해당 지역의 행정을 고려하게 될 때까지는 통합군 사령부가 임시로 담당할 것을 권고"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승만 정부는 (38선 이북에서 주권을 행사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바로 주권 행사를 해서 마찰이 생긴다. 유엔 결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여기서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그 지역 관할권이 한국 정부에 자동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사진은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는 모습(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그 지역 관할권이 한국 정부에 자동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사진은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는 모습(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유일 합법 정부'를 놓고 벌어진 박정희 정권과 일본의 힘겨루기

 

프레시안 : 북한 지역이었다가 한국전쟁 결과 남쪽으로 넘어온 지역에 대해,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1년여 동안 유엔군이 관할권을 행사한 것도 유엔 결의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서중석 : 그렇다. (그 후) 조봉암의 진보당이 평화 통일을 주장하고 나서, 1958년 이때쯤 가면 민주당도 통일에 대한 정책을 바꾸게 된다. 그런데 다른 이유도 있고 해서, 국회에서 자유당이 아주 집중적으로, 요즘의 종북몰이 비슷하게 민주당을 막 몰아세운다. 반공에서는 (자유당과 민주당 중) 누가 형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민주당도 반공주의가) 센 세력인데도 (자유당에서) 몰아세운 거다. 그러자 조재천 민주당 선전부장이 '(1948년) 12월 12일 유엔 결의' 내용을 영어로 읽고 하나하나 번역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장하는 게 이렇게 합법적인 거다'라고 명시하는 대목이 국회 속기록에 그대로 나온다.

 

(이 무렵 민주당은 이승만 정권의 북진 통일론과 선을 그었다. 북진 통일론은 허구라는 주장이었다. 미국과 유엔의 평화 통일론을 모른 척할 수 없었고 자유당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평화 통일을 고려할 수 있다면서도 '반공 민주 통일만 대상으로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과 관련해서도 이 문제는 논란이 됐다.

 

서중석 : 한일기본조약 제3조엔 이렇게 돼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 총회 결의에 명시된 대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 박정희 정부가 바로 설명을 했다. '이것은 대한민국 주권이 한반도 전체에 미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그러자 바로 일본에서 반박했다. '우리가 여기에 동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유엔 총회 결의에 있는 그대로다. 북한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일본은 '유일한 합법 정부' 조항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유엔 결의에 명시된 대로'라는 문구를 넣을 것을 고집했다. 일본은 한국의 반대를 누르고 해당 문구를 넣는 데 성공했다. 이는 한국이 한반도 북쪽에 관할권이 없음을 분명히 하려 한 조치로 풀이된다. 향후 북한과 관계를 맺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한일기본조약이 장애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느리긴 하지만 조금씩 분위기가 바뀐다.

 

서중석 : 7.4남북공동성명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에 갔다 온 후 나온 것이다. 남쪽의 최고 권력층이 북한 최고위층을 만난 거다. 당시 일각에선 '괴뢰를 만났으니 이후락도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북한을 만난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973년 6.23선언에서도 (박정희 정부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을 하자고 했다. 이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한 것 아닌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게 이어져서) 2000년 6.15정상회담으로 남북이 만나 획기적인 성과를 거둔 것이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까, 1980년대 언젠가부터 북괴 대신 북한으로 쓰게 됐다. 전쟁 불사를 외치는 극우(의 상당수)도 이젠 북괴가 아니라 북한이라고 부르지 않나.

 

이렇게 명백한데도 왜 극우 분단 세력이 계속 유엔의 한국 정부 승인과 관련해 부정확한 주장을 하느냐, 이 부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주장이 분단 체제를 유지하는 비법이랄까, 정통성을 주장하는 무기로 작동한 측면이 있고, 그것과 짝을 이루는 것이지만 대북 적개심을 고취하는 데 '괴집', 북괴라고 하는 게 유용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또한 구체적인 정부 정책에서 이 부분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이걸 생각해 봐야 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통일 논의 억압과 선건설론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나타났나.

 

서중석 : 북진 통일은, 윤천주 교수가 1950년대에 쓴 논문에서 이미 잘 설파했듯이, 이승만 정권과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데 마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 것이었다. 북진 통일이란 살벌한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 평화 통일을 이야기하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도 이승만 정권은 붕괴할 때까지 계속 북진 통일을 주장한 거다.

 

(1958년) 진보당 사건이 났을 때 기소에서 제일 중요한 건 조봉암과 진보당이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평화 통일이 제일 큰 죄목으로 부각됐던 거다. 그랬던 건데 1심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조봉암에게 불법 무기 소지죄로 5년형을 선고했지만, 다른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편집자>) 2심에서는 다 유죄가 되긴 했지만, 3심 판결이 아주 묘하게 나왔다. 이상한 판결이었다. '평화 통일은 대한민국 헌법에 부합한다. 그러나 조봉암은 양명산과 연결된 간첩이다', 그러면서 사형시키지 않나. 통합진보당 문제 때문에 진보당 해산 사례가 다시 부각되기도 했는데, 이승만 정권 때는 정부가 진보당을 그냥 해산하기만 하면 됐다. 해산하는 제일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 이 부분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발표한 진보당 등록 취소 사유 중 하나가 유엔 결의에 어긋나는 통일 방안을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 결의에 어긋나는 것은 조봉암의 평화 통일론이 아니라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이었다. <편집자>)

 

프레시안 : 4월혁명을 계기로 양상이 달라진다.

 

서중석 :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북진 통일 주장을 더는 할 수 없게 됐다. 유엔이 한국 문제에 대해 계속 결의하고, 미국도 여러 번 평화 통일을 천명했다. 그래서 민주당도 (1960년 4월혁명 후 치러진) 7.29선거 때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자유 선거를 통해) 평화 통일(을 도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민주당은 평화 통일 과정에서 선행할 수밖에 없는 남북 교류는 거부했다. <편집자>)

 

그렇게 되니까 통일 운동이 막 일어났다. '이건 안 되겠다. 골치 아프다. 억제해야겠다' 하면서 민주당 정부에서 강력하게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지금은 선건설(을 할 때)이다. 먼저 건설해야지, 통일 논의를 가지고 국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반공법도 만들려고 했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그때는 데모 규제법이라고 불렀는데 그걸 만들려다가 오히려 되게 당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분위기가 그렇지 않지 않았나. 이걸 강력히 채택한 것이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었다. 1960년대에는 선건설론 이외의 어떠한 주장을 해도 아주 어려움을 겪었다. '통일 논의를 하고 북한과 교류하자' 그러면 반공법으로 구속되고 그랬다. 여러 사건이 있지 않나.

 

(정리하면) 이승만 정권 때는 북진 통일을 주장하면서 통일 논의를 억압했고, 장면 정부 때부턴 그것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니까 평화 통일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통일 논의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사실상) 금지하는 선건설론을 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스물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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