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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할 인권보다 짓밟힌 사람 찾기 쉬운 이곳, 한국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7/14 12:20
  • 수정일
    2014/07/14 12:2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서울인권기행] 서대문형무소, 남산 안기부터, 남영동 대공분실을 가다
박장준 기자  |  weshe@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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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7.13  16: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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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체육관선거로 당당하게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전두환 각하는 이듬해 12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그리고 똑같은 체육관선거로 당선됐다. 각 기업들은 각하를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다. 1981년 2월26일자 조선일보 1면 하단에 실린 롯데의 광고내용은 이랬다. “새 역사창조에 신명을 바치실 위대한 영도자의 탄생을 충심으로 경축하며 우리 모두 새 영도자를 중심으로 힘과 슬기를 모아 민주복지국가 건설에 이바지 할 것을 다짐합니다.” 재벌은 유신독재에 이은 군부독재에서도 알아서 기었다.

재벌만 권력을 떠받든 것은 아니다. 정당성이 취약한 정권은 비판세력을 없애야 했다. 음지에서 일하는, 지금도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 그리고 공안경찰과 검찰… ‘익명의 고문자들’이 권력의 한축을 담당했다. 이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한이 있었다. 수많은 운동권 학생들과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름 모를 장소로 납치돼 고문을 당했다. 따지고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군부독재 시절까지 한국 근현대사는 이근안씨 같은 ‘고문기술자’의 무대였다. 이곳에 인권은 없었다.

<미디어스>는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진행된 인권재단 사람의 서울인권기행에 동행했다. 남산 안기부터, 서대문형무소, 남영동 대공분실에 다녀왔다. 조선 최초 ‘근대감옥’ 서대문형무소에서 울려 퍼지던 전향구호 “천황폐하만세”는 “대한민국 만세”로 바뀌었다. 남산의 기술자들은 납치한 사람들을 지하로 끌고 내려갔다. 서울유스호스텔 건물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황제 테니스를 즐긴 곳은 안기부 건물이었다. 지금은 경찰청인권센터인 남영동 대공분실 5층에서 박종철이 숨졌고, 김근태는 고문을 당했다.

   
▲ 서대문형무소. (사진=미디어스)

인권을 삭제하기 시작한 곳,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 군데군데 남아 있는 붉은 벽돌과 망루, 그리고 윤형철조망은 백 년 전 그대로다. 서대문형무소가 있는 무악재는 과거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곳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1908년 10월21일 ‘경성감옥’을 개소했다. 최대 3천명까지 효율적으로 수용, 감독할 수 있게 설계된 조선 최초의 근대감옥이다. 해방 뒤에는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 1967년에는 서울구치소로 이름을 바꿨다. 일제는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를 이곳에 가뒀고 고문했다. 유관순도 이곳에 있었다.

수감자들은 죄질에 따라 밥의 양도 달랐다. 이게 ‘가다밥’(원통형의 틀에 밥을 찍어 배급, 가다는 일본어로 ‘틀’)이다. 1936년의 수감자 식량규정표를 보면 일제는 특등급, 1~8등급, 중간식, 죽까지 등급을 나누고 배급량도 차별했다. 배가 고픈 수감자들은 쥐를 길러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고 한다. 그나마 독방에 갇힌 사상범은 이마저도 못했다. ‘천황폐하만세’를 외치지 않는 사상범 등은 양손이 뒤로 묶이고 두발까지 묶여 스스로 대소변도 해결하지 못하는 ‘돼지묶음’ 신세로 0.75평 독방에 갇혔다.

   
▲ 서대문형무소 0.75평짜리 독방이 늘어선 모습. (사진=미디어스)

일제는 자본주의 노동규율을 가르친다며 수감자들에게 5~10㎏의 몸수갑을 채우고 하루 10시간 넘게 노역을 시켰다. 그리고 일제는 사상범을 ‘교회’(敎誨, 잘 가르쳐 과거의 잘못을 깨우치게 함)했다.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 말대로 고문의 목적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진술을 얻기 위한 것”이다. 해방 뒤에도 이곳은 교회의 장소였다. 공안들은 이곳에 파견돼 사상범들을 취조, 고문했다. 1950년대 수감자의 절반 이상이 좌익인사들이었다고 알려진다. 구호는 “대한민국 만세”로 바뀌었다.

   
▲ 서대문형무소 내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는 수감자를 표현한 사형수상. 조각가 김운성·김서경씨가 만들었다. (사진=미디어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남산의 지하에서 만들어졌다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이 옥새를 데리우치에게 넘긴 곳은 남산 통감관저 2층 침실이었다. 박래군 소장은 남산을 “일제의 침략이자 독재를 상징하는 장소”로 설명했다. 일제가 빠져나간 뒤 남산은 중앙정보부가 장악했다. 문학의집, 삼림문학관, 서울유스호스텔 등 충무로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과거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 소유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곳 남산에 막사를 치고 도·감청부터 시작했다. 1972년 국회 해산 뒤에 여기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법”을 뚝딱뚝딱 만들었다.

   
▲ 남산은 본래 일제의 침략기지였다. (사진=미디어스)

남산은 정권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간첩’을 만들어냈다. 서울유스호스텔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됐다. 문익환 고은 함세웅도 이곳에 끌려왔다. 1973년 유신에 반대한 집회를 하다 연행된 서울대 제자들을 옹호하던 최종길 교수가 전기고문으로 숨진 곳이기도 하다. 서울종합방제센터는 당시 수감장이었고 유스호스텔과 지하로 연결돼 있었다. MB 황제테니스로 알려진 <남산창작센터>은 과거 안기부 요원들의 체력단련실이었다. TBS 교통방송, 서울특별시 도시안전실도 안기부 터였다.

“남산 1호터널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가장 끔찍한 사건을 만들어낸 ‘5국’이 있다. 이곳 지하 2층에는 고문실이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임수경 의원이 “안기부 기억 때문에 남산터널을 못 지나간다”고 한 바로 그곳이다. 당시 사상범들은 납치당한 뒤 눈이 가려진 채 지하로 끌려갔다.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부터 1983년에는 특히 간첩조작 사건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데리고 온 사람에게 암호해독법 등을 가르친 뒤 진술서를 쓰게 강요했다. 또 이곳에서는 정국전환용 사건도 기획했다고 한다.

   
▲ 남산 안기부 5부 고문실로 내려가는 계단. (사진=미디어스)
   
▲ 고문실이 잇는 5층 창문만 유독 작은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인권센터). (사진=미디어스)

아름답게 설계된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실

건축가 이수근의 설계로 1976년 신축된 남영동 경찰청인권센터 건물은 유독 5층 창문 모양만 다르다. 창문크기가 유독 작다. 이곳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난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이곳에는 고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의장이 22일 동안 묶여 있었다. 2005년 경찰청 보안국 보안3과가 홍제동으로 이전해 인권센터로 바뀌기까지 29년 동안 이곳 5층에는 수많은 시국사범이 끌려왔다. 이들은 1층 나선형 철제계단에 올라타 5층으로 끌려온 뒤 갇혔다.

   
▲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실이 있던 경찰청인권센터 5층 복도. 바깥에서는 안쪽을 볼 수 있지만 안쪽에서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사진=미디어스)

한국의 공안들은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체포영장 없이 납치하다시피 체포”했다. 고문실의 책상과 의자는 바닥에 단단히 고정돼 있다. 자해방지용이다. 창문을 작게 만든 것은 탈출 방지용이다. 흡음장치도 설치했고 바깥에서만 안쪽을 볼 수 있게 했다. 박래군 소장은 고문의 최대 후유증 중 하나는 물건에 대한 개념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고문피해자들은 전기고문을 당한 침대에 눕지 못하고, 물고문을 당한 욕조에 못 들어가고, 물소리만 듣거나 고문 받은 계절이 돌아오면 잠을 못 잔다고 한다.

지금도 대공분실 기능을 하는 곳이 전국에 36곳 정도 있다고 한다. 저 위에 있는 분들은 “경찰이 무작정 때려잡던 박통시절보다 살기 좋아졌다”고들 한다. 실제 서대문형무소, 남산 안기부터, 남영동 대공분실은 사라졌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인권을 지우는 이들의 수법은 더 강하고 치밀해졌다. 2009년 용산과 쌍용차 평택공장, 2014년 밀양에서 경찰들의 모습은 과거보다 강하다. 국가정보원은 중앙정보부보다 더 치밀하게 간첩을 조작한다. 아직도 기념할 인권보다 짓밟힌 사람들을 찾는 게 쉽다.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1987년 6월 항쟁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 (사진=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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