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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신학으로서의 미국흑인신학의 기원과 방법

 

 

 

미 흑인신학 “기독교적 흑인이 미국바꿔”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18) 제3세계 신학으로서의 미국흑인신학의 기원과 방법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2/11/29 [01:59] 최종편집: ⓒ 자주민보
 
 

지금으로부터 390여년 전인 1619년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이 미국으로 끌려오기 시작하여 200년 동안이나 계속됐으며 약 1천2백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미국으로 끌려왔다. 17세기 말쯤에 남부지방에 흑인노예의 수가 백인의 수에 육박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노예들은 미국사회에서 백인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엄청난 학대와 인종주의적 노예생활을 하며 수백년 동안 살아 왔다.

미국은 자유와 정의라고 하는 이름으로 세워진 기독교국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에서 흑인들에게는 자유와 정의 그리고 종교적인 삶의 길은 절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이 발표한 노예해방 이후에도 해방은 정치적인 술어일 뿐이고 오랜 기간 흑인들은 조금도 변함없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억압과 차별 속에서 노예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국 백인들이 제정해 놓은 노예제도하에서 흑인의 역사, 정체성, 인간성, 공동체, 지식과 언어 등 그 모든 것이 박탈되고 부정되었다. 백인들은 흑인노예들에게 강제로 기독교인이 되도록 강요했는데 그 이유는 흑인노예들이 백인들에게 말없이 복종하도록 하는 통치수단과 방법으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었다.

흑인노예들이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더라도 노예의 신분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고 법으로 규정해 놓았다. 흑인노예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노예라고 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마음을 스스로 참고 견디기 위하여 특유한 방법으로서 기독교의 종교적 관행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 미국 흑인신학의 기원과 방법론의 특징

미국의 흑인신학은 1950년대에 들어서서 흑인들 스스로 미국에서 흑인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의 관점에서 흑인들의 인권운동을 일으키는 데서부터 처음 시작됐다. 지금까지 세계의 진보주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다만 무신론과의 신학적인 논쟁에만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기독교신학이 제3세계에서 억압받고 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데 참여해야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세계적인 신학의 동향이 남미를 비롯하여 이른바 해방신학이 제3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미국의 흑인신학의 기원도 이러한 제3세계의 해방신학에 힘입어 시작됐다. 흑인의 해방이라고 하는 새로운 자아의식 운동의 정체성과 흑인신학을 확립하는데 제3세계 신학이 크게 기여하게 됐던 것이다.

미국의 흑인신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비로소 1950년대부터 자유주의사상에 힘입어 흑인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자아의식과 흑인들의 정체성을 심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전지전능한 신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흑인들의 투쟁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흑인신학은 자유해방을 위하여 인간의 경험을 신학의 규범으로 삼음과 동시에 특히 착취와 억압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인 삶의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흑인신학의 정치성과 사회적인 면에서와 경제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신학은 흑인만을 위한 신학으로서 수세기 동안 백인의 식민통치와 억압 속에서 살아온 비참한 역사적 현실에서부터 해방시키려는 기독교적인 실천을 추구하는 혁명적인 신학이다.

이러한 미국의 흑인신학을 다음의 두 가지 형태의 맥락으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인권운동으로서의 해방신학

주로 1910년-1950년대에 이르러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을 기초로 하여 해방신학이 전개됐다. 이 시기에 인권운동으로 인하여 흑인들의 자아의식 수준이 급속히 발전됐으며 또 많은 책들이 출판됨으로써 흑인교회들이 백인교회에 예속당하고 있는데 대하여 부당함을 주장하여 흑인교회의 독자적 운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 킹 목사로 시작된 혁명적 흑인인권운동의 출발은 비폭력저항운동이었다. 이 시기의 비폭력적 저항운동은 주로 일반적인 시민권 투쟁이었으며 백인 주도의 교회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이었으며 특별한 학구적인 투쟁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흑인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정의를 획득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해도 좋은지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주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흑인신학의 초기적인 단계에서는 기독교 신학교육의 학위조차 획득하지 못한 일반 교회 안에서 흑인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처음 시작됐다. 하지만 흑인교회들의 투쟁들은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항거단체들이 교회 안에서 창건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ㄱ. 남부기독교인 지도자협의회(SCIC)
ㄴ. 흑인교회 전국협의회(NCBC)
ㄷ. 흑인공동체 초교파재단(IFCO)
ㄹ. 백인교회 안에 있는 흑인들의 위원회들.

어쨌든 1960년대에 흑인신학의 초기단계는 성장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애와 그의 신념과 업적으로 인하여 흑인신학의 기초가 마련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흑인신학이 처음 출현하는데 대하여 백인 보수주의교회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혼합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킹 목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백인 자유주의적 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당분간 무조건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미국의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은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인 바르트, 블트만, 몰트만 등의 “신의 죽음의 신학”에 대하여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흑인신학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모르는 척 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인교회들의 무관심과 냉담 속에서 흑인교회 내부에서 흑인의 해방을 위한 신학적인 탐구가 흑인교회 지도자들에게서 처음 활발히 시작되고 있었다.

ㄱ) Richard Allen(감리교 감독회의 창시자), ㄴ) Henry Garnet(장로교 설교자로서 노예제도에 항거했다), ㄷ) Nat Tuner(60명의 백인을 살해한 흑인반란의 주모자인 침례교 설교자), ㄹ) Henry McNeal(하나님은 니그로이다를 주장한 감리교 감독) 그리고 다른 많은 흑인기도교인들이 노예의 역사와 종교적인 역사를 탐구하면서 그들의 정치적인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교회 안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전개하고 있었다.

1950-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선두로 하여 흑인신학을 태동시켰는데 백인의 인종차별을 완강히 거부했다. 킹 목사는 신의 창조가 흑인들을 노예로 혹은 2등 시민으로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백인들을 향하여 주장하면서 인권운동 투쟁을 선두에 서서 전개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1929-1968)는 보통사람의 생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흑인들의 노예해방 100주년을 기념하는 1963년 8월28일에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행진에서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하여 아직도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죽음을 각오한 불을 내뿜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킹 목사는 “비폭력” 주의자였다.

킹 목사를 신학자라고 하기보다는 흑인 인권행동주의 비폭력 주의자로서 29번이나 투옥을 당하면서도 불변의 신념으로 미국 기독교 공동체로 하여금 억압은 종교적인 정의가 아니며 종교의 근본적인 사명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종교적 불변의 진리를 인식하도록 킹 목사는 죽을 때까지 주장했다.

킹 목사는 백인들의 정치쇼로 1964년 12월 10일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는 했으나 1968년 4월 4일에 역시 백인들의 정치적 음모로 멤피스에서 암살을 당했다.

미국의 흑인신학과 흑인 민족주의자 말컴 엑스(X) 블랙파워의 등장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1960년대에 흑인 인권운동의 쌍벽을 이루었던 운동은 말컴 엑스 (X)의 블랙파워 흑인 민족주의운동이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을 기준으로 하여 이루어진 미국의 정치적 제도에 항의하여 말컴 엑스는 강력하게 싸웠다.

말컴 엑스(X)는 누구? 그는 백인 폭력에 대항하여 싸운 “분노한 검둥이”였다. 말컴 엑스 (1925-65)는 그의 본래의 성을 버리고 대신 엑스(X)라는 성을 사용했다. 왜냐하면 미국 흑인들의 성은 백인이 흑인노예들에게 제멋대로 붙여준 성이기 때문에 말컴은 백인이 붙여준 성을 버리고 차라리 엑스-X를 자기의 성으로 삼겠다고 해 말컴 엑스(X)가 된 것이다.

말컴 엑스는 흑인 침례교 목사 가정에서 6님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흑인들의 고향인 아프리카로 귀향할 것을 설교하는 반백인적 목사였다. 이로 인하여 말컴 엑스의 아버지는 백인우월주의(KKK) 단원들에게 참혹하게 산 채로 두 동강으로 잘려 살해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이 일로 인하여 정신착란증으로 사망했다. 말컴 엑스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아들이 되고 말았다.

말컴 엑스는 중학교에서 말썽을 일으켜 미시간주 소년원에 수감되어 8년을 지냈으며 그 후 다시 학교에 들어가 새로 마음을 바로 잡고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반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해 분개하여 그의 마음속에는 백인에 대하여 증오의 벽을 쌓기 시작했다.

졸업을 한 말컴 엑스는 뉴욕시 할렘가로 진출하여 7년 동안 방황생활과 무장강도범으로 경찰에 체포되는 처지에 빠져 있었다. 감옥생활 2년째 되는 어느 날 말컴 엑스의 동생 레지날드가 감옥에 찾아와 면담을 하게 됐다. 그 후부터 말컴 엑스는 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독서에 전념하면서 감옥에서 5년을 지냈다. 5년의 감옥 생활은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것 이상으로 독서로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1952년에 가석방으로 자유의 몸이 된 말컴 엑스는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슬람교의 전도사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슬람의 종교적 신념을 확실히 하기위하여 1963년에 회교 성지 메카를 순례하였고 1964년에는 “사단법인 회교사원”을 조직하여 보다 활발한 반미-반기독교적 흑인 해방운동을 전개했다. 말컴 엑스는 기독교의 종교적 편견을 뛰어 넘어 미국 흑인들의 정치, 문화, 경제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동분서주하면서 흑인해방을 위한 큰 지도자가 됐다.

하지만 말컴 엑스의 반미-반기독교적 흑인 해방운동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평생 동안 주장한 “비폭력 해방운동”과 “흑인-백인 통합주의적 해방운동방식”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상이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말컴 엑스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장한 “비폭력 통합주의적 흑인 해방운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면으로 쓴소리를 했다.

“비폭력 통합주의? 그것이 정말 가능한가? 어떤 형식의 통합을 말하고 있는가? 만일 통합이라는 것이 백인들의 생활양식,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면 흑인은 그런 통합을 반대해야 마땅하다. 흑인이 백인과 통합해야할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백인들은 생각하기를 만일 흑인들이 백인들처럼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흑인들의 망상이며 착각으로 여기고 있다. 흑인들이 백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흑인들의 인간성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 흑인들의 망상이고 착각이라고 백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악마와 같은 백인들과 통합하는 것을 주장하는 킹 목사의 비폭력방법으로는 흑인의 참된 해방을 쟁취할 수 없다. 흑인으로서 백인들과의 관계로 이룩되는 비폭력 해방운동은 절대로 용인할 수가 없다. 백인들이 흑인을 지배할 만한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따위의 비폭력적 통합주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로 흑인 해방운동이 불가능 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비폭력을 주장하는데 대하여 말컴 엑스는 “블랙파워”를 주장했다.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 흑인해방운동 방식과 킹 목사의 비폭력운동 방식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말컴 엑스와 킹 목사는 서로 다른 운동방식을 초월하고 보완함으로서 해방운동의 중요성을 보다 높이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백인교회는 킹 목사와 말컴 엑스사이에 있는 흑인 해방운동의 방법 상에 있는 차이점에 대하여 이것을 악용하여 두 진영이 서로 대립하여 싸우도록 유도하면서 보수주의적 흑인들을 충동하여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운동을 배격하도록 유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교회 성직자들은 백인 인종주의 유혹을 끝내 배격하고 백인교회의 악마적인 분열공작을 무력화시키고 미국의 흑인신학을 정착시켰다.

말컴 엑스가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향하여 내뿜은 열변적인 논평에 대하여 그 일면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ㄱ. 백인이 흑인에게 “왜 우리 백인들을 증오하는가”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마치 늑대가 양에게 “왜 우리 늑대들을 증오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강간을 당한 사람이 강간범을 증오하는 것이 당연한 증오아닌가?

ㄴ. 블랙파워 흑인해방운동이 흑인신학의 의식적인 발전에 대하여 서로 공헌한다. 가난한 흑인들의 투쟁은 모두 다 동일한 투쟁이다. 하지만 블랙파워는 흑인들이 정치적 운명을 정치적으로 스스로 해결할 것을 추구하면서 힘으로 투쟁해야 한다.

ㄷ. 미국에서 흑인의 해방을 위하여 평화적인 비폭력벙법으로 싸우는 것은 미국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하는 것 뿐이다. 백인들이 소방차 물호스를 마구 쏘고 또 개를 풀어 여자들을 물게 하며, 총으로 남자들을 쓰러지게 하는데… 오른뺨을 맞으면서 왼뺨을 내밀어서야 어떻게 흑인의 해방을 쟁취할 수 있겠는가?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는 “오른뺨을 맞으면 총을 들라”고 외쳤다. 말컴 엑스의 당연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미국 언론은 흑인들이 백인을 향하여 증오로 가득찬 것으로 교묘하게 묘사하여 백인들로 하여금 흑인을 증오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말컴 엑스는 1965년 2월 21일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집중 총경을 받고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꿈”을 주장했는데 말컴 엑스는 “악몽”으로 쓰러졌다.

비폭력 흑인 해방운동자인 미틴 루터 킹 목사의 운명과 블랙파워를 주장한 말컴 엑스의 운명은 흑인 해방운동 방법론에 있어서 두 사람의 차이점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진실은 흑인 해방운동 정신에 있어서 차이점 보다는 분명히 공통점이 보다 더 크고 많은 근본적으로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목적으로 투쟁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와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는 흑인 해방역사의 한 시대적인 과제를 그들의 가슴에 품고 총탄에 쓰러진 동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 간 후에 40여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미국 역사는 흑인대통령이 배출했다.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와 말컴 엑스의 블랙 파워의 염원이 극히 일부 일지라도 조금씩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킹 목사와 말컴 엑스가 꿈꾸었던 흑인의 정신으로 미국의 미래를 심도 있게 깊이 들여다 본다면 흑인들의 꿈과 희망의 성취는 빙산의 일각만도 못한 것으로써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멀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2. 흑인신학의 혁명과 폭력에 대하여

미국의 흑인신학은 단순히 항의가 아니다. 흑인신학은 종교적 양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과 모순되는 백인의 법률을 타파해야할 의무를 느낀다. 그러므로 백인의 불법적인 억압에 대항하고 불복종하는 것은 흑인신학의 진리에 대한 충성이며 인종차별 사회에서 혁명적인 과업이 된다.

인간의 운명과 민족주의 진로는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미국의 흑인신학이 추구하는 확고한 신념이다. 이 신념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종교적으로 타락한 것을 의미한다.

백인에 대한 흑인의 저항은 인간적이며, 종교적이며, 혁명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흑인신학이 혁명적이라는 말은 때로는 강제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흑인신학은 “폭력신학”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백인이라는 압제자를 타도하기 위하여 흑인신학이 게릴라전이라도 일으킨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은 백인들이 고의적으로 만들어 악선전을 하는 말 뿐이다.

하지만 만일 피압박자의 목에 백인들이 죽음의 밧줄을 매고 그 밧줄을 잡아당기려 하는 긴박힌 순간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를 상상해 보라. 이러한 긴박한 위기에 처한 순간에 반드시 생각하게 되는 실존적 질문이다. 피입박자가 억압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성이 깨지고 물건으로 취급당하고 있을 때 그 반응이 자연발생적인 생존을 위한 “폭력”이라는 단어가 필연적인 모습으로 나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백인 압박자들은 뻔뻔스럽게 “질서있는 사회에서 정의는 실현된다”라고 하면서 “폭력”이라는 말의 단어를 이유막론하고 범죄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백인의 살인적인 행동을 문화와 종교적인 이유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질서란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그러므로 흑인신학이 백인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피압박자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고난의 문제를 취급하면서 불가불 폭력의 사용 문제를 솔직하고 진리로 당연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에 의하여 희생을 당하는 약한 자를 구출해 내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의로운 혁명적 폭력이다. 정의로운 폭력이라면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필요한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흑인신학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더 깊이 고민을 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기독교전통을 과시하고 있는 미국의 백인들에게 끝까지 추궁해야 할 정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흑인신학에 있어서 탁월한 흑인신학자 제임스 코온(James Cone, 1938- )이 있다. 코온은 현재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의 석좌교수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흑인 신학자로서 많은 제3세계 해방신학의 신학자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한국의 민중신학에도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제임스 코온은 미국의 흑인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참으로 만일 기독교가 억압당하는 자를 위하여 있다면 나는 주장하기를 종교는 반드시 흑인을 위하여, 흑인을 통하여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코온은 미국의 신학은 미국의 흑인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검은 색은 미국 주류사회에서 억압의 표시로 제일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코온은 그의 저서 <흑인신학과 혁명(Black Theology and Power)>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출판했는데 그의 일관된 주장은 기독교적인 흑인이 됨으로써 미국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흑인의 사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시민이 된다는 것은 피부의 색깔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자기의 피부의 색깔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 자기의 영혼, 자기의 지성, 자기의 몸이 귀중하고 고귀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비록 피부의 색깔은 다르다 할지라도 인간의 동일성을 중요시하는 것이 정말로 종교적 역할이다. 이와 같은 종교적 역할이 올바로 인식될 때 이런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를 나는 희망한다. 인류의 인간성이란 똑같다는 사실을 종교적 차원에서 올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 비로소 미국을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는 길이다.”

제임스 코온이 주장하는 흑인신학은 피부의 검은색의 문제가 분명이 미국의 분쟁의 암으로 역사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사실대로 시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백인이든 흑인이든 종교적으로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신학자이다.

제임스 코온은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유명한 미국의 흑인신학자로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적 흑인 해방운동과 그와 상반되는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 흑인 해방운동의 두 진영의 상이한 흑인 해방운동 방식에 대하여 두 사람이 하나의 같은 목적으로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화합하고 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임스 코온은 흑인의 해방운동 양진영의 대립에 대하여 흑인신학자적인 역할을 통하여 양진영의 운동 방식을 화합과 협동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제임스 코온의 해방신학이 미국의 백인과 흑인의 피부 색깔의 차이로 대립하고 있는 극한상황을 종교적으로 똑같은 이념의 화합을 성취함으로써 능히 평화적으로 인종적인 색깔의 대립을 화해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임스 코온은 오늘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로서 미국의 흑백 대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미국인들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종교적 이념으로 똑같은 길을 선택하는 길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글을 맺으며

흑인과 백인이 같이 버스를 탈 수 있도록 결사적으로 투쟁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없었다면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왜 미국이 다른 나라의 인권에 간섭하고 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 내의 인권 상황은 이 모양으로 날로 악화되고 있는가라고 폭력적으로 항의한 말컴 엑스가 없었다면 오늘 흑인 오바마가 가히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영화 <뿌리>, <흑인 오르페>, <흑과 백>, <칼라 퍼플> 등 흑인들의 처절한 삶을 고발한 작품들이 없었더라면 미국에서 역사적이며 개혁적인 변화가 일어나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역사가 절대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중에 흑인신학의 등장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쨌든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이후 142년 만에 미국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되어 집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신보수주의는 무능해졌고, 신자유주의는 탐욕으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 미국은 할 수 없이 졸시 탈출구를 찾아 낸 것이 바로 백인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선거 비상대책으로 흑인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삼은 것이다. 미국이 덜 오만한 척 하는 위선적인 겉모양을 전 세계에 보이려고 흑인대통령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흑인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역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외교정책에 있어서 더욱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베트남전과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과거사에 대하여 솔직히 사과를 했다.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1975-1979년에 170만 명이 희생됐다. 하지만 오바마는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미국의 과거사를 논의하는 것조차 회피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언론은 분석보도를 했다.

어디 그뿐인가? 힐러리 클린턴 외무장관과 미구 국무성 동아태 차관보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 자신은 분주하게 줄줄이 미얀마를 방문하여 미얀마-북조선(북한) 관계를 단절하고 적대하도록 헙박하면서 이간을 조성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북조선을 고립압살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전직 대통령들의 유산을 오바마가 그대로 이어 받은 증거이다. 그뿐만 아니라 또 오바마 대통령은 오히려 대조선적대정책을 전보다 더 강화함으로써 흑인 오바마는 미국의 백인들의 기득권 세력에 아부하고 충성심을 표시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오바마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2월 대선에서 코리아반도(한반도) 남단에 평화정착을 이루어낼 정권이 창출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렇다. 우리민족끼리 북과 남이 손잡고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대행진이 분명히 전개될 때 오바마 대통령도 속으로 못 견디는 체 하면서 코리아반도의 난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해결하는데 양심적인 호응을 분명히 하게 될 것이다.(2012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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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제국과 굶주리는 제3세계
 
히틀러보다 덜할 게 없는 영국의 역사
 
영국-프랑스의 2차 백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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