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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황당한 방산비리 사건을 아시나요?

 
문형철 2015. 05. 12
조회수 354 추천수 0
 

  진흙포탄, 돈지랄 전차를 아시나요? 
  연이은 방산비리 관련 뉴스가 약방의 감초처럼 자주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방산비리의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 무기는 그야말로 황당하고 어이없어 보이고 그래서 우스운 헤프닝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라의 명운을 거는 사건이기도 했고, 권력과의 이권 결탁 등 지금 우리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들이었기에 여전히 큰 교훈을 준다. 
                                   
권력형 방산비리의 ‘고전’ 진흙포탄

 

 진흙으로 포탄을 만들 수 있을까? 가능하다. 일찍이 화약의 원조인 중국에서는 진흙으로 포탄을 만든 역사가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아주 참담했다. 원래 진흙포탄은 훈련용으로만 사용되는 훈련탄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해군에게 이 진흙포탄이 실전에 사용되는 실탄으로 지급됐다. 그 결과  일본해군과 비교해 엄청난 수적 우세를 보였던 청의 해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청일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청나라 해군은 진흙포탄을 지급받게 된 것일까? 
 그 속사정은 이렇다. 청의 서태후가 자신의 별장(이화원)을 만드는데 해군 예산을 6년간이나 털어먹었다. 그 바람에 청국 해군은 총포, 탄약 구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곤란을 겪는다. 이를 안 청나라 해군의 포탄납품업체가 실전 포탄은 비싸니까, 콩과 진흙, 석탄으로 만든 가격이 훨씬 싼 연습용 포탄을 실전용이라고 속이고 납품을 한 것이다. 막상 해상전투가 벌어지니 일본 함정에서 쏘는 포탄은 청나라 함정을 박살내는데 청나라 함에서 쏜 포탄은  콩과 진흙, 석탄가루만 사방으로 뿌리고 말앗다. 이미 청에 패한 전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해군은 설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던 터라, 진흙포탄의 청나라 해군은 무참하게 패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흙포탄은 일본에 승리를 가져다주었고 청나라에게는 시모노세키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가져다주었다. 동아시아 근대사 최초의 권력형 방산비리였던 진흙포탄은 두나라의 향방을 엇갈리게 하는 큰 단초가 되었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

 

개떡 같은 맛이 민수시장에 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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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납품된 허쉬 초콜렛. 맛없는 보급 쵸콜렛 덕분에 애프터마켓이라는 위문품산업이 활기를 보인다.

 

 어린 시절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게 “미군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묻는다면 “초콜렛”이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군의 막대한 전쟁물자 중 가운데 전투식량(C 레이션)에서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물자가 쵸콜렛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군의 대명사인 쵸콜렛이 2차대전까지 형편없는 맛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미군의 쵸콜렛을 방산비리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 형편없는 맛이 오히려 민간 관련 산업을 활성화시킨 재미난 사례이기에 언급하려고 한다.
 초콜렛 대명사 허쉬가 미군에 군납을 시작한 것은 1937년, 그 당시 전투식량을 개발 중이었던 미국 군수사령부의 로간 대령은 허쉬사와 접촉하여 전투식량에 사용될 초콜릿을 개발하여 달라고 요구한다.  당시 미군당국이 요구한 군사요구도는 “무게는 4온스 (약 113그램)에 상온에서 녹지 않아야 하며 맛은 삶은 감자수준의 단맛에 고열량일 것”이었다.  삶은감자보다 나은 당도에 고열량이라는 조건은 한마디로 맛은 포기하고 인체를 죽지 않게 버티게만 하는 쵸콜렛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에 허쉬사는 이 네 가지 조건에 맞춰 무게 4온스에 약 49도에서 녹지 않으며 1,800칼로리를 제공하는 초콜릿을 만들었다. 미군당국은  맛이 너무 좋으면 병사들이 일상 중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로 맛없게 주문을 했다고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맛이 없었기에 보급품보다 민수품을 선호하게되는 풍조가 만연했고 그 결과 고향의 여친이나 부모, 형제들이 사제 초콜릿을 참전병용 선물상자를 통해 보내는 ‘애프터 마켓’이 활성화 되게 된다. 이 외에도 ‘문파이(moon pie)'라고하는 원조 쵸코파이도 납품이 되는데 상용품보다 마쉬멜로 함량이 떨어져 야전에서 벽돌처럼 굳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불량한 맛과 질이 민수제과업에 반대로 호황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효율성 무시 많으면 장땡

FP45 극히 조악하고 장전하는데 시간이 걸려 대부분 한번 발사후 버리는 것이 현실이었다3.jpg

FP45 극히 조악하고 장전하는데 시간이 걸려 대부분 한번 발사후 버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악평의 무기를 들자면 영국군의 S-T-EN 일명 스텐기관단총과 미국의 FP45 리버레이터가 가장 대표적인 악평무기였다. 영국군의 스텐기관단총은 근접전투에서 효과를 보인 독일군의 MP40에 자극을 받아 급조된 기관단총이었다. 영국군은 스텐을 만들기 이전에 부랴부랴 소화기들을 긁어모았고 기관단총도 수입했지만 비싼 가격에 영국전쟁성이 곤혹을 표명하자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관단총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바로 스텐기관단총이었다. Mk.1~3까지 세 가지 버전이 나왔지만, 가격의 문제로 품질은  점점 더 조악해졌다. 실제로 쇠파이프와 공업용 스프링으로 몸통과 완충장치를 만들어서 개머리판을 떼버리면 쇠파이프라고 불릴 정도로 엉성한 모습이었다. 모양새뿐만 아니라 성능도 아주 개판이었는데 안전장치가 너무나 부실해서 교전 직전까지  탄알집 결합을 금지할 정도였는데 실제로 바닥에 떨어트리면 격발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 영국군에서는 총을 적 참호로 던지면 격발되서 독일군을 제압 할 수 있다는 투척무기라는 풍문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배관공의 악몽’, ‘죽음의 탭댄스’라는 악명을 얻었고 레지스탕스도 줍지 않는다는 악평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얼마나 찍어댔는지 전쟁 후에 약 400만정이 중동 등지에 뿌려졌고 인도의 치안군은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스텐 기관단총과 함께 악명을 얻은 무기로는 2등을 하라고하면 서러울 녀석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의 FP45 리버레이터다. FP45는 2차대전 중에 레지스탕스를 지원하기위해 만들어진 권총이었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무기 지원요청에 따라 빠르고 싸게 만들기 위해 GM사가 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군의 군사요구도는 “빠르고 싸고 대량으로 만들어야 할 것, 공중투하와 은닉성을 보장하기위해 작고 가벼워야 함, 정규생산라인을 방해해서는 안 됨, 적이 주워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9밀리 탄을 쓰는 독일제 명품권총인 루거와 발터에 호환되지 않게 위력이 강한 45구경탄을 쓰게 만들어졌다. 레지스탕스들의 기록에 따르면 “탄종이 맞지 않아 독일군이 사용하지 못하기 보다는 너무나 후진성능 때문에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되었을 정도로 장난감에 가까운 열악한 성능이 큰 문제였다.
 사용제원에 따르면 사거리는 고작 8미터였고 이것도 정확히 사살하기 위해선 3미터 이내까지 접근해야만 피해를 줄 수 있었다. 3미터까지 접근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한발 발사하면 버리고 도망을 가야할 정도로 조악했기 때문이었다. 
 FP45는 절판 두 개를 합쳐 리벳으로 고정하는 형태였고 그래서 사거리와 정밀도을 위해 필요한 강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42년 6~8월 사이에 100만정이 제작되었지만, 실제로 레지스탕스에게 활용된 것은 극히 미비했고 영국수송기들도 공중투하를 단념해 미국본토에서 잠을 잘 무렵 미국은 FP45를 항일저항군 지원용으로 공중투하를 했고 의외로 일본군을 상대로 다소의 전과가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전쟁말기 물자부족으로 목총을 사용하게 될 정도로 물자부족이던 일본군이 이걸 노획해 사용했는데 이걸 다시 노획한 미군들이 FP45를 일본제라고 생각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발생했다고 한다.
 
로비로 인한 돈지랄 프랑스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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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군사 박물관에 전시된 R-35 전차

 

 2차대전 직전이었던 1933년 프랑스군은 새로운 경전차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1935~36년경에 일련의 전차들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선정된 전차는 1종이 아닌 무려 3종이나 되었다.  원래 1933년 당시 프랑스군은 경전차 개발 사업에 참석한 5개 업체의 시제품중 하나를 선정해 양산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최초로 선정되었던 것은 르노 사의 R-35였다. 
 하지만 르노사의 R-35선정에 미심쩍은 부분들이 많았고 결국은 르노사의 격한 로비로 선정되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르노와 경쟁관계였던 호치키스 사와 FCM 사가 강하게 반발해 정치·경제문제로 사건이 크게 비화되었다.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 결국 프랑스 육군은 3개 업체의 경전차 모두를 양산모델로 복수선정하게 되었고 납품계약을 체결해 제식화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기형적 군납품 선정은 결국 ‘돈지랄’에 불과했다. 실제로 3개사의 전차들은 같은 개발제원 하에서 만들어져 비슷한 외관에 비슷한 성능이었고(FCM-36은 생산량도 작았고 다소 차이는 있음) R-35와 H-36은 각기 1000대 이상이 생산되어 프랑스 기갑전력의 중추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프랑스군이 보유한 Somua S-35전차와 비교했을 때 열악한 성능으로 평가되어 국내외로부터 악평에 시달여야만 했다. 결국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제대로 된 전과도 없이 물러서야 했다. 업체의 로비와 군의 한심한 사업자 선정이 부른 ‘돈지랄’의 결과는 무참한 패전이었다. 우리군도 다양한 무기를 개발해 한 가지 임무에만 활용한다는 점을 보면 왠지 2차대전 프랑스군과 닮은 모습이 있는 것 같다. 스웨덴이 한 가지 무기를 다양하게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현실과 비교한다면 결코 프랑스군의 ‘돈지랄’은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상황이지 않을까

 

스웨덴, 바사호의 교훈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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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 박물관에 전시된 전함 바사의 모형

 

 스웨덴 스톡홀름 소재의 바사박물관(The Vasa Museum)은 거대 호화전함 바사호와 관련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바사호는 바사 왕가의 구스타프 2세 시절인 1625년에 건조를 시작해 1628년 8월 완성되었다. 당시 스웨덴은 북유럽 발트해 주변 제국 건설에 필요한 막강한 해군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기에 국부의 상당부분을 이 전함 건설에 쏟아부었다. 
바사호는 그러한 전략적 필요로 진수된 전함 중의 하나였고 450명이 탑승가능하고 64문의 화포가 탑재 가능한 막강한 화력을 지니고 있던 가장 강력한 야심찬 군함이었다. 하지만 국내외 귀빈 등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식을 마치고 부두를 떠난 뒤 얼마 못가서 돌풍에 배가 기울었고 열린 포문으로 물이 들어 수 분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국부의 상당부분을 투입했던 거대전함이 어이없이 물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스웨덴의 입장에서는 그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역사의 일면이지만, 스웨덴은 침몰한지 333년이 지난 1961년 이를 인양해 특수보존 처리 후 현재의 바사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바사호의 침몰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부의 상당부분을 투입하고 눈 깜짝 할 사이에 바사호와 함께 소중한 인명과 국부를 바닷속에 수장시켜버렸다는 것은 오늘날 스웨덴 사회가 중요시하는 안전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산무기정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통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앞서 언급된 황당방산비리와 결함을 스웨덴인들은 큰 교훈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글 문형철 디펜스 21 + 기자 captin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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