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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보수화'로 졌다? 하나마나한 분석!"

[박동천 칼럼] 朴 찍은 1577만 명 중 文 찍을 사람 누구냐?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1-09 오전 8:19:31

 

1.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이 패배한 후, 왜 졌는지를 나름대로 설명하려는 말들이 무성하다. 50대가 보수화되었다는 둥, 친노 세력이 앞장을 서서 졌다는 둥, 안철수로 단일화되지 못해서라는 둥, 민주당의 좌클릭 때문이라는 둥, 얼핏 보면 모두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진실의 과녁을 정곡으로 찌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태의 진상에 관해서 과녁을 찌르기보다는 그 주변에서 대충 변죽 울리기로 만족하는 한편,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찾고자 하는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다.

"안철수로 단일화했어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

2. 먼저, 안철수였다면 이겼으리라는 주장부터 따져보자. 안철수가 야권 연대 후보로 나섰다면 이겼을지 모른다는 말은 현재 시점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문재인이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철수였다면 이겼다"는 말은 헛소리다.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패인을 굳이 꼽아야 한다면, 도박꾼들의 관심이 상황을 지배했다는 데 있다. 안철수와 문재인 중에 누가 단일화 경쟁에서 승자로 떠오르느냐를 가지고 내기를 거는 방식으로 보도와 평론과 지지와 응원이 이뤄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에만 몰두하느라 '어떻게'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결과 협상이 깨졌고 안철수가 일방적으로 사퇴한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누가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했다. '감동을 주는' 단일화, '아름다운' 단일화, 단일화의 '시너지 효과' 따위가 가능하려면, 쌍방이 어떻게든 단일화의 규칙에 합의하고, 그 규칙에 따라 두 세력을 하나로 합하는 역량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왜? '어떻게'보다 '누가'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막판에 안철수의 '가상대결' 요구를 과감하게 받아버렸어야 했다 (안철수의 요구가 일방적이었지만 그랬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먼저 안철수가 단일화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어야만 했다. 출마 의사를 밝힌 시기도 훨씬 앞당겨야 했고, 출마 의사를 밝힌 이후에는 바로 단일화 규칙을 위한 협상에 나섰어야만 했다.

이제 와서 가정법으로 말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무슨 일이든 결과가 나타난 다음에는 무책임한 말들이 무제한적으로 횡행한다. 이제 와서 "안철수였다면 이겼다"고 말한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어떻게'의 중요성은 보지 못하고 '누가'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증거다. "안철수였다면 이겼다"를 말하기 전에, 안철수가 왜 단일 후보로 되지 못했는지, 뭘 어떻게 했어야 감동적인 방식으로 단일 후보가 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책임 있는 담론이 가능해진다.

"2010년 좌클릭은 성공, 2012년 좌클릭은 실패?"

3. 민주당이 좌클릭을 해서 중도 표를 잃었다는 말도 유행한다. 그런데 민주당이 좌클릭했다고 할 때, '좌클릭'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좌클릭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경제민주화, 한반도 평화체제, 복지 강화 등을 주장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것 말고 어떤 '좌클릭'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일까?

진보세력과의 연합이 오히려 중도층의 이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왕당파를 상대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일반명제들 가운데 어떤 것이 현재의 맥락에 적실한지를 가리려면, 연합의 이익과 손해를 맥락적으로 따져서 저울질해야 한다.

한국에서 '청적(靑赤) 연대'는 2010년 지방선거,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명백한 성과를 보여줬다. 그래서 그때는 '좌클릭'이 문제라는 소리는 나오지 못했다. 2012년 4월 총선, 그리고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결과가 기대치에 못 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좌클릭'이 문제였다는 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서 이기리라는 '기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주관적인 낙관 말고 도대체 어떤 정세 분석에서 그런 '기대'가 나왔는가? 그런 '기대'가 도대체 어떻게, 누구 맘대로, '예상'으로 둔갑했을까? 낙관은 원래 근거가 없는 것이고, 근거 없는 낙관은 자유다. 단, 낙관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 책임은 낙관에게 물어야지 엉뚱한 곳에서 분풀이 대상을 찾으면 마녀사냥이 된다. 그리고 이런 버릇을 못 고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좌우지간, 이번 선거에서 '좌클릭' 때문에 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왜 청적 연대가 성공했는지 답해야 한다.

결함은 좌클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호함에 있다. 민주당과 문재인 캠프는 중도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 생각 자체는 옳다) 매몰되어, 분명한 결기를 보여야 할 곳에서까지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NLL과 관련해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밝히자고 오히려 민주당이 주장했어야 하는 것이다. 정상회담 녹취록을 공개하면 국익에 위배된다는 걱정은 일차적으로 새누리당과 원세훈과 이명박의 몫이었다. 이걸 뒤집어 생각한 오류 때문에, 마치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녹취록 공개에 반대하는 듯한 이미지만 뒤집어쓰고 말았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자료사진) ⓒ뉴시스


"'종북' 프레임에 정면으로 돌직구 날려야"

'종북', '좌익', '빨갱이' 프레임 때문에 소위 '중도'라는 사람들이 민주당에 표를 주기 꺼려한다는 데까지는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프레임에 걸리지 않을까? '좌클릭'을 하지 않으면 될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먼저 왜 박근혜의 '좌클릭'은 득표에 도움이 되었는지부터 자문해 봐야 한다. 박근혜의 '좌클릭'은 국민대통합의 행보가 되는데 왜 민주당의 '좌클릭'은 소위 '중도층의 안보불안감'을 증폭하는 것인지를 캐물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중 기준이 프레임의 본질이다. 이 프레임을 그대로 두는 한, 민주당 및 한국의 개혁세력은 절대로 '종북', '좌익', '빨갱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다. 즉, 조갑제에게 '종북'이라고 낙인이 찍히기만 하면 움찔 놀라 지지를 거두는 유권자에게 어떤 다른, 보다 부드럽고 감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서 표를 구걸하기 보다는, 조갑제가 찍은 '종북'의 낙인에 구애받지 않을 유권자들을 찾아내서 그들의 합리적인 자부심에 호소해야 한다. 이제 와서, 선거에서 지고 나서, '좌클릭 때문에' 중도표를 잃었다는 진단은 정확히 매카시즘에 인식론적으로 굴복했다는 표시에 불과하다.

비현실적인 정책,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과격한 변화를 추구한 면이 있었다면, 그런 면들은 사후에라도 가려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민주당이 내 건 정책 중에 비현실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은 2011년 말에 터져 나왔던 '한미 FTA 당장 폐기론'을 깔끔하게 해소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재협상을 주장한 일 정도다. 이 건에 관해 나는 "문제가 나타나면 그때 가서 생각한다"고 한 안철수의 입장이 맞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문재인이 표를 잃어서 선거에서 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무례하게', '공격적으로' 박근혜를 몰아붙인 이정희의 퍼포먼스 때문에 문재인이 졌다는 소리도 헛소리다. 문재인이 이길 선거였다는 근거 없는 전제를 깔고 생각하니까, 어디선가 이유를 만들어내야 하다 보니, 온갖 추측이 난무하게 된다. 이정희의 공격성이 박근혜의 가련한 이미지에 보탬을 줬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사후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조성된 가능성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문재인이 표를 잃었다고 말하려면, 이정희의 공격성 때문에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 곧 이정희의 공격성이 없었더라면 문재인을 찍었을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특성을 가지는 유권자들일지 대충이나마 추려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108만 표 가운데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확인할 방법을 이론적인 가능성 수준에서나마 동시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이정희의 공격성 때문에 문재인이 표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데나 찔러 보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빠져나가는 뺑소니 어법에 불과하다.

민주당은 좌클릭을 해서 진 것이라기보다는, 좌클릭을 하기는 한 것인지에서부터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까닭에 마지막 2% 정도의 유권자를 잡지 못해 진 것이다. 중도층을 잡으려고, '종북' 프레임에 정면으로 돌직구를 날리기보다 '종북'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위해, 모호함에 의존하다가 정작 그 때문에 중도층의 불안감을 불식하지 못한 것이다. 수많은 정책들을 내놓았지만 급조한 의제들이다 보니 잠재적 지지층이 될 수도 있었던 유권자 가운데 안정을 희구하면서 망설이고 주저하는 마지막 2%에게 침투하지 못해서 진 것이다. 간략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구호의 형태로 정책을 요약해서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문재인과 개혁의 이미지를 형상화해 내지 못해서 진 것이다. 선거법 상으로 문재인과 같은 신인에게 시간이 절대로 부족했는데, 캠프 안에서도 민주당 안에서도 이러한 환경적 요인을 간취하고 대책을 수립할 만한 전략적 안목이 없어서 진 것이다.

4. 친노니 비노니를 따지는 짓은 단순한 책임전가 및 내분 이상의 의미가 없다. 누군가 패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면, '친노' 따위의 모호한 화법을 사용할 일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누가 왜 어떤 책임을 져야 할지 꼬집어 말해야 한다. 모호한 화법에 의존하는 한, '친노 책임론'은 민주당의 내분을 부추길 뿐인 프레임에 자발적으로 투신하는 꼴에 불과하다. 이 얘기를 나는 여러 달 전에 쓴 적이 있다 (관련기사 ☞ "담합과 동맹 사이에서").

"문재인을 찍을 수도 있었던 박근혜 지지자를 찾아라"

5. 마지막으로, 50대의 보수화 때문에 문재인이 졌을까? 108만 표의 차이는 50대 말고도 숱한 설명이 가능하다. 충청도와 강원도 표, 경남부산 표, 그리고 경기도 표 가운데 하나만 문재인 쪽으로 바뀌었어도 문재인이 이겼으리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50대의 보수화에서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4지 선다형 문제에서 연필 굴리기로 답을 찍는 태도와 흡사하다.

경기도나 경남 등 지역으로 분류하든, 연령으로 분류하든, 특정 부류의 유권자들이 보수화해서 문재인이 졌다는 말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물어야 할 질문은 왜 그들이 문재인보다 박근혜를 찍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은 단순히 "박근혜를 찍었다"는 문구를 "보수화"로 바꾼 데 불과하다.

경기도든 경남이든 부산이든 강원도든, 50대든 60대든 40대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학력이 어떻든 소득이 어떻든, 108만 표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어떤 하나의 변수가 결정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와 논객과 전략가들은 4지선다형 정답찍기식 시험에 길들여진 한국인답게 '하나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1577만 표와 1469만 표 사이의 차이를 '하나의' 인구통계학적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기적에 가깝도록 예외적인 사태일 것이다.

"왜 졌을까?"를 묻는 사람들은 문재인이 뭘 잘못했기 때문에 졌다는 전제를 깔고서 시작한다. "이겨야 할 선거였다"는 규범적 진술과 "질 리가 없는 선거였다"는 사실적 진술을 지속적으로 혼동한다. 이렇게 혼란스럽게 들뜬 눈으로 마녀사냥에 나선다. 그리하여 박근혜를 찍은 1577만 표 가운데 아무데서나 임의로 108만 표를 골라, 그 표 때문에 문재인이 졌다고 우겨댄다.

문재인이 이길 수도 있었던 선거였는데 졌다고 말하려면 승패를 가른 108만 표 가운데 적어도 55만 표는 원래 문재인을 찍을 수도 있었는데 어떤 상황적인 요인 때문에 박근혜로 선택을 바꿨다는 진술을 확립할 수 있어야 한다. '문재인을 찍을 수도 있었는데 박근혜로 선택을 바꾼 사람들'의 집합은 일단 매우 추상적인 집합이다. 이들이 인구통계학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단, 특정 지역이나 특정 세대에 이들이 몰려 있으리라는 추정을 전제로 삼고 시작해서는 진상에 접근할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낮아질 것이다.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은 1577만 명이지만 이 가운데 문재인을 찍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1577만 명이 누구였는지도 사실은 샅샅이 찾기는 불가능한데, 그 중에서 문재인을 찍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도대체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이에 답하려면 그 전에 방법론적 성찰을 하나 거쳐 가야 한다. 산술적으로 도식화한다면 1577만 명 가운데 문재인 쪽에 가장 가까운 순서로 최소한 55만 명을 추려낸다는 말이 되는 데, 애당초 '문재인 쪽에 가장 가까운 순서'라는 것을 도무지 어떤 척도로 잴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자문하면서 찬찬히 생각해보면, 1577만 명 가운데 문재인을 찍을 수도 있었던 확률이 가장 높았던 순서로 최소 55만 명을 추려낸다는 일은 곧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잠재적 지지층으로 잡아서 설득하고 호소해야 할지를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과업과 분리될 수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도 민주당을 포함한 민주진보개혁 세력은 이와 같은 전략적 선택을 위해 지혜를 모았어야 했는데 이를 해내지 못했다. 앞으로 당장 4월에 재ㆍ보선이 있고, 2014년 지방선거, 2016년 국회의원 선거, 2017년 대통령 선거 등등, 줄줄이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부동층 가운데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제를 가지고 호소해야 할지 기본적인 전략의 원칙을 고안해내야 한다. 아울러, 부동층 즉, 산토끼를 잡기 위해서 고정 지지층 즉, 집토끼를 소외시키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 민주통합당이 18대 대통령 선거 패배로 충격에 빠진 가운데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246호실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한 의원들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뉴시스


"민주당, 집권해서 변화 추동해낼 역량 있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다음 두 가지는 분명해진다.

첫째, '종북' 프레임에 빠져 있는 유권자보다는 그런 프레임과 상관없이 자기 나름의 분별력을 갖춘 사람들을 과녁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친노' 프레임 역시 마찬가지다. 친노가 싫어서 박근혜를 찍은 사람이라면 애당초 노무현의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을 찍을 확률이 낮았다고 봐야 한다. 아울러 노무현이 싫어서 박근혜를 찍을 정도라면 애당초 한국 사회에서 민주진보개혁의 필요를 별로 못 느끼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분명해지면 아울러 마지막 세 번째 요점도 분명해진다.

셋째, 이번 선거를 주도한 실질적인 의제는 경제민주화, 한반도 평화, 그리고 복지사회건설을 통한 성장동력 확충이었다. 이 의제들의 파괴력은 4월 총선 때부터 박근혜가 표절해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였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 의제들을 민주진보개혁 진영에서 부르짖고 박근혜는 단지 제목만 표절함으로써 내용을 희석시켰는데 왜 박근혜가 당선되었느냐는 대목이다. '문재인을 찍을 수도 있었는데 박근혜를 선택한 사람들'은 바로 이 부근에 위치하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한반도 평화, 복지를 통한 성장 등의 의제에 주목하고, 이런 방향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박근혜보다 문재인의 진정성이 높다는 사실도 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왜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를 찍을까?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뜻하는 대로 개혁을 성취할 힘이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핵심적인 원인이고, 이것을 고치는 것이 곧 한국 사회의 민주화, 정상화, 공정화에 해당한다.

당장 국회 과반수가 새누리당인데다가, 언론, 관료제, 검찰, 학계, 그리고 자본 등, 구조적 권력이 일방적으로 문재인에게 불리하다. 노무현 정권 때 실제로 목격했듯이, 민주진보개혁 진영이라는 것은 합심해서 뭉쳐도 기득권에 대항하기가 버거운데,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을 서로 높여보려고 정신없이 물어뜯고 싸웠다. 민주니 진보니 개혁이니 떠들지만 결국 각자 사춘기 수준의 자기현시욕일 뿐이고, 그 때문에 기득권 구조의 타파는 고사하고 도리어 기득권의 강력한 장벽 앞에서 무너질 뿐이다. 이 구조를 고칠 힘이 민주당에게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민주당이 무슨 그럴듯한 정책을 내놓아도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직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당은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말로 떠들어댈 줄은 아는지 몰라도, 사회를 민주진보개혁적으로 바꿀 역량이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이것은 민주당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고, 소위 '원로 그룹'을 포함한 시민운동가 그룹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그래도 48%의 유권자는 문재인을 지지했다. 집권해서 변화를 추동해낼 역량이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일단 기회를 줘볼 가치는 있다고 본 사람들이다.

그러나 1577만 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박근혜가 불쌍해서 표를 준 사람도 있고, 박정희가 위대하다고 생각해서 표를 준 사람도 있고, 박근혜로 대표되는 기득권에 자기가 속하기 때문에 표를 준 사람도 있고, 문재인이 대통령 되면 안보가 불안할까봐 표를 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문재인을 찍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1577만 명 가운데 이런 사람들은 앞으로도 민주진보개혁 진영에 표를 줄 확률이 별로 높지 않다.

경제민주화, 평화, 복지에 찬성하지만, 문재인은 기득권을 누를 힘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을 해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박근혜가 물타기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박근혜는 공약을 지킨답시고 흉내라도 내는 척을 할 테고, 이에 대해 기득권이 대놓고 저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문재인의 정책에 진정성이 있지만, 어차피 기득권의 저항 (그리고 민주진보진영 과격파의 불만) 때문에 박근혜가 시늉내는 정도의 성과도 없이 정치판이 싸움판으로 전락할 바에야 차라리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와 진보와 개혁을 입에 담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런 사람들을 주목하고 이런 사람들의 의견과 정서를 존중해야 한다. 이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고, 이들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정치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 전에는 민주당 그리고 안철수까지 망라하더라도 범진보세력이 집권할 가망은 별로 없다. 패인 분석이라는 미명 아래 책임전가와 권력투쟁과 마녀사냥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책임전가와 권력투쟁과 마녀사냥이라는 사실조차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권이 박정희와 전두환과 이건희를 숭배하는 폭력적 속물들의 집권에 비해서 왜 나은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변화를 선호할 이유를 심어줘야 하는 것이다.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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