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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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정치” 박근혜 대통령의 역린이다. ‘배신했다’는 것은 과거엔 한배를 탔다는 뜻이다. 한때 ‘친박’, 한때 아버지 박정희에게 충성했던 이가 돌아섰을 때 박 대통령에게 배신자로 찍힐 수 있다. 지난 10월 청와대 5자회동에서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게 3년이 지난 일을 꺼내며 “인상도 좋으시던데 왜 저보고 이년, 그년 그런 거냐”고 묻는 걸 보면 박 대통령은 기억력이 좋고 뒤끝은 길다.
박 대통령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 2월 JP의 부인이자 박 대통령과 사촌지간인 박영옥 여사가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을 때 박 대통령이 빈소를 방문하고, 지난 대선 때 JP가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지지한 것을 보면 최근 3년 박정희의 2인자와 박정희의 딸 관계는 돈독해 보인다.
하지만 대선 이전 약 30년간 둘의 관계는 다르다. 1975년(당시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 박정희와 갈등 끝에 국무총리에서 경질된 JP는 1979년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실권을 쥐지 못했다. 10·26 이후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유신정권의 흔적을 지워갔다. 다들 유신과 결별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1974년 8월 어머니(육영수 여사)를 잃은 박근혜와 그의 동생들은 아버지를 잃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사람들’도 잃었다.
▲ 퍼스트레이디 시절 박근혜(오른쪽)과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출처=청와대 홈페이지 박근혜 갤러리 | ||
1989년 1월 ‘여성동아’와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유신 시절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앉았던 정치인 중에는 유신을 죄악시하는 요즘의 풍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 반대를 했다. 내가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발뺌을 하는 경우가 쉽게 보인다”며 박정희와 선을 그은 ‘박정희의 사람들’을 비판했다. 거기엔 JP도 예외일 수 없다.
JP는 곧 박정희의 업적을 가지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는 등 박정희 옹호자로 복귀했지만 박근혜는 개인적으로 JP에게 서운한 감정을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JP는 신군부가 들어서 돌봐줄 이 없는 사촌 박근혜를 외면했다. JP는 일본·미국 등지로 돌아다니다 1986년이 돼서야 (JP에 따르면)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박정희의 자녀들을 돌봐준 사람은 박태준(1927~2011·포항제철 창립자·국무총리 출신)이다. JP가 박정희의 킹메이커이자 2인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박정희가 정말 신뢰했던 사람은 박태준이었다. 5·16에 박태준이 가담하지 않은 이유도 혹 쿠데타에 실패했을 경우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가족을 맡아달라고 부탁해서다. 쿠데타 성공직후인 1960년 7월 박태준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다. (이대환, 대한민국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
좋을 때(박정희 집권기) 함께했던 사람보다는 힘들 때(박정희 사망 이후) 외면한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1987년 JP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며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구미 지역구 총선출마를 제안했을 때도 박근혜는 응하지 않았다.
1997년 15대 대선, 둘은 완전히 갈라졌다. JP가 DJP연합으로 김대중 정부 2인자가 될 때 박근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1998년 대구 달성 재·보궐선거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됐다. 둘은 같은 해 11월 대정부질의에서 햇볕정책을 놓고 충돌하기도 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당내 경선에서 JP는 박근혜가 아닌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박근혜가 서운해한 JP
JP가 미워한 사람은?
권력은 나눌 수 없다. 빼앗는 것만이 가능하다. 권력의 맛을 본 사람에게 최악의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빼앗은 자다. JP가 지난 2월 부인 박영옥 여사 빈소에서 “졸수(90세)가 되고 보니 미워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지난 9월23일 중앙일보 홈페이지에 올라온 JP 증언록 영상에는 1986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7주기 행사를 앞두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 중앙정보부 후신) 장세동과 나눴던 대화 내용이 나온다.
▲ 지난해 9월23일 중앙일보 홈페이지에 올라온 JP증언록 영상화면 갈무리. | ||
JP는 “(86년) 10월 (박정희)대통령 7주기를 내가 당당하게 한다고 떠들었는데 나를 제일 괴롭히고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이 장세동”이라고 말했다. 이어 JP는 “이 자식(장세동)이 쫓아다니면서 방해를 해”라며 장세동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회고했다. “내일이 보이느냐. 너 이러고 돌아다니는데. 내일이 안보이지? 그게 너한테 이로워. 내가 기억해두겠다.”
1979년 말 다음 대통령은 자신이라고 믿었던 JP가 213억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뺏기고 미국으로 망명까지 간 게 신군부 때문이니 “이 자식”이라 할만하다. JP가 신군부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장세동을 특정한 이유는 그가 전두환의 2인자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에도 “군주는 잔인하기보다는 인자하다는 평판을 받으려 한다”고 했다.
대신 유능한 2인자가 악역을 자처한다. JP가 4대 의혹사건이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주도하며 박정희의 빈 부분을 메웠던 것과 같은 이치다. 장세동은 집권 후에도 5공화국의 모든 죄악을 스스로 떠안고 옥에 간 충신이다. JP에게는 가장 미운 사람이다.
여자 문제가 있었던 이후락
중앙일보는 JP 증언록을 시작하며 지난 3월3일 “정치인의 지혜는 무엇인가. 직설보다 함축, 진격보다 우회, 단정보다 은유를 주문한 듯하다”라고 표현했다. ‘정치 9단’ JP는 직설적으로 상대를 비판하지 않으며 메시지를 전달한다. JP가 직접 비판하지 않고 타인의 입을 빌려 비판한 사람을 찾으면 그가 미워한 사람을 알 수 있다.
JP의 강력한 경쟁자 중 한 명은 이후락(3대 대통령비서실장, 6대 중정부장)이다. JP는 증언록에서 “머리 회전이 빨랐던 이후락은 독특한 책사형 인물이었다”면서 “육영수 여사는 이후락의 정보부장 임명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주일대사 시절 그의 염문설이 육 여사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JP는 “육영수가 이후락의 여자문제에 민감했고, (이후락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72년 김일성을 만나는 일을 꾸몄다”고 말했다. 이후락의 사생활뿐 아니라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끈 그의 업적을 깎아내릴 소지가 있는 발언이다.
▲ 1972년 이후락(왼쪽)과 김일성 | ||
JP는 계속 이후락을 몰아붙였다. JP는 이후락이 ‘북괴’가 아닌 ‘북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한 것을 상세히 지적했다. ‘반공’을 국시로 내건 쿠데타 세력에겐 ‘기회주의적 속성’으로 비칠 행동이다. JP는 이후락에 대해 “일 꾸며 자리 지키는 데 재주가 있다”고 평가했다.
JP는 이후락이 몰락한 ‘윤필용 사건’을 상세히 설명했다. JP와 육사동기(8기)인 윤필용은 1972년 10월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신분이었다. 윤필용은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과 술자리에서 ‘박정희가 노쇠하니 물러나게 하고 후계자로 이후락을 내세워야 한다’는 말을 했다. 이 대화가 도청돼 청와대에 보고됐고 윤필용은 이 사건으로 숙청됐다.
JP측근들이 일본 극우인사인 고다마 요시오에게 박정희 후계자로 JP를 언급한 게 청와대로부터 도청된 사건(고마다 불충사건)을 증언록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과는 대비된다. ‘윤필용 사건’으로 이후락은 박정희 눈 밖에 났다. JP에 따르면 이후락은 이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사건’을 기획했다.
미국 프레이저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은 “중정의 부정이나 김대중 납치 때문이 아니라 이후락 개인 권력에 대해 대통령이 두려워해 실각됐다”라며 ‘윤필용 사건’을 언급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권력욕에 눈먼 이후락과 이를 비판하는 JP의 대결구도를 예상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락과 JP의 실상은 비슷했다.
JP는 “윤필용 사건 뒤 박정희의 태도가 달라졌다”며 “이후락·윤필용·하나회처럼 경계해야 할 대상은 옆에 키워놓고서 쓸데없이 나를 경계했다”고 말했다. JP는 “이후락과 같이 정말 위험한 대상은 따로 있는데 자신을 견제하는 게 박정희의 약점”이었고, 그것이 권력 종말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덜 된 ‘남산의 돈까스’ 김형욱
JP는 가장 오래 중정부장(1963년 7월~1969년 10월)을 역임한 김형욱을 소개하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시작했다. JP는 “김형욱의 인간성의 여러 색깔은 골프를 칠 때 잘 나타난다”고 말했다. JP에 따르면 김형욱은 늘 내기 골프를 쳤는데 자신이 이길 것 같으면 내기 금액을 올리고 질 것 같으면 각하(박정희)가 찾는다며 도망갔다.
▲ 김형욱(오른쪽) 제4대 중앙정보부장과 JP | ||
김형욱은 과격한 성격 탓에 ‘남산의 돈까스’, ‘멧돼지’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JP는 김형욱의 성격을 먼저 흠집 낸 뒤 그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JP는 김형욱이 중정부장 시절 박정희에게 잘 보이기 위해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을 조작했다고 비판했다. JP도 중정부장 시절 밀사 황태성을 간첩으로 둔갑시켜 사형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JP가 김형욱을 미워하는 이유도 이후락을 미워하는 이유와 같다. 2인자 간 암투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게임’이다.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정희가 김형욱을 불러 “요새 (JP 측근) 김용태가 회장이 돼 공화당 안에 무슨 복지회라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데 이건 JP를 71년 대통령 선거에 추대하기 위한 공작”이니 조사해볼 것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민복지회 사건’이다. 친JP계의 ‘불충’이 청와대에 보고되자 1968년 5월 친JP인사 김용태, 최영두, 송상남이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됐고, 당시 당 의장이었던 JP 역시 정계를 떠나야 했다. 자신을 쫓아낸 김형욱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JP는 이후락·김형욱의 과(過)는 부각하고 공(功)은 감췄다. 하지만 이후락(1924~2009)과 김형욱(1925~1984)은 모두 세상을 떠나 이를 반박하지 못한다.
‘공화당 4인체제’ 리더 김성곤은 좌익출신
JP는 “내 인생의 여러 인연 가운데 김성곤·김형욱·이후락은 악연에 속한다”며 “셋 모두 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추천했고 한 시대를 누렸고, 그들은 나와 박 대통령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성곤(1913~1975)은 JP를 견제한 ‘공화당 4인체제(4인방)’의 리더로 쌍용그룹 창업주,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JP는 김성곤의 좌익 이력을 먼저 꺼냈다. JP는 “김성곤이 공화당에 합류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는데 5·16 직후 금성방직과 동양통신사를 운영하던 김성곤이 찾아와 자신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출신 공산주의자 기록을 지워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박정희, JP의 장인이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 박상희 친구 황태성도 모두 남로당 전력이 있다.
JP는 “그렇게 경력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면 정말 충성을 다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서 부탁을 들어줬다”고 말했다. 이어 JP는 “김성곤은 얼마동안 깍듯이 박정희를 모셨다”며 “공화당에서는 재정위원장을 맡아 성의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국가 기록을 마음대로 지운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까지 JP가 강조한 것은 김성곤이 ‘하자 있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구제해줬다는 사실이다.
JP가 두 차례 외유(1963년 1차 외유, 1964년 2차 외유)를 다녀온 뒤 JP는 구주류 세력이 됐다. 반면 공화당의 재정·공천·운영을 좌지우지하는 실세그룹, 신주류는 반JP세력이며 TK(대구·경북)출신이었다. 이들을 ‘공화당 4인체제’라고 불렀는데 1966년 1월 당시 김성곤은 공화당 재정위원장, 백남억은 정책위의장, 김진만은 원내총무, 길재호는 사무총장이었다.
JP는 이들이 “엄민영 내무부 장관을 비롯해 대구고보(경북고) 선후배를 중심으로 뭉쳤고, 박정희와 출신 지역이 비슷해 친밀도가 높았다”며 “대통령을 돕는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치고 올라오는 인물을 누르는 데 앞장섰다”고 말했다. “기업인으로 부를 쌓은 김성곤의 재력이 이를 뒷받침하니 박정희의 마음이 서서히 거대 파벌인 TK세력이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공화당 4인방은 사사건건 JP를 견제했다. 1965년 국회의장단 선출을 둘러싸고 JP가 정구영을 국회의장으로 밀자 4인방은 대구출신 이효상을 지지했다. JP에 따르면 야당 의원들 정치자금까지 관리하던 김성곤의 영향력으로 국회의장은 이효상으로 선출됐다. 1968년 JP가 스포츠소년단 창설을 추진하자 4인방은 “JP가 대통령하려고 별짓을 다 한다”며 견제했다.
결국 5·16 성공 초기부터 2인자로 급부상한 JP는 공화당 4인방·김형욱·이후락 등 6인에게 포위됐다. 박정희는 6인이 JP를 견제하는 것에 대해 묵인했다. JP는 증언록에서 요직에 앉은 자들이 서로 경쟁·감시하게 해 박정희에게만 충성하게 만드는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을 수차례 언급하며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박정희에게 서운했나?
한국정치문제연구소가 펴낸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에 따르면 3선 개헌 이후 박정희는 JP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JP의 수족이 이미 잘려나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1970년대 권력의 중심은 중정에서 청와대 경호실로 차츰 이동했고, JP는 국무회의에서조차 정치문제를 꺼내지 못했다. JP는 정치에서 소외됐다.
박정희 시절 총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공천명단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1978년 10대 총선에서 JP는 당 공천에서 제외될 정도로 밀려났다. 우여곡절 끝에 당선된 뒤 ‘JP 국회의장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불발됐다.
1967년 ‘국민복지회’ 사건 당시를 회상하며 JP는 증언록에서 “6인방(김성곤·백남억·김진만·길재호·이후락·김형욱)의 행보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예견했던 일”이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나 자신에게도 염증이 났다”고 말했다. 이어 “나를 정계에서 몰아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구사한 6인방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박정희 대통령까지 솔직히 싫어졌다”고 덧붙였다.
당시 JP는 박정희에게 대들었다고 말했다.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 JP는 “지독한 견제와 감시에 시달려왔던 내가 참다 참다 토해낸 한 마디였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알아듣지 못했다. JP는 박정희에게 이집트 혁명 뒤 1인자 ‘나기브’를 제치고 대통령에 오른 ‘나세르’라고 설명했다. 1인자보다 유능했던 2인자, 끝끝내 권력을 양보 받지 못했던 JP. 결국 JP가 박근혜를 외면했던 것은 박정희에 대한 서운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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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일회담
6. 김종필이 미워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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