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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충격적 투신자살, 그가 '동포에게 드리는 글'

 

[주장] 5.18 참상 알린 후배의 죽음 이후 떠난 한국... '국정원 강화법' 막아야

16.02.26 18:20l최종 업데이트 16.02.26 18:20l

 

 

나는 현재 오스트리아 빈에서 33년째 살고 있습니다. 1982년 9월, 서른 살 때 한국을 떠났는데, 왜 떠났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강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생이었던 1980년 5월 15일, 전 서울역 '10만 전두환 타도' 학생시위대 속에 있었습니다. 5월 18일 새벽, 형사들에 의해 집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치소에 수감됐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10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풀려나 집으로 가니 어머니께서 '사흘 전(5월 25일)에 후배가 널 찾아왔는데 네가 그리됐다 하니 여기서 쓴 편지를 봉투 안에 넣어 놓고 갔다'고 했습니다. 봉투 뒷면에 '김의기 올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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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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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 속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들어 있어 사진부터 꺼내 보았습니다. 군인 세 명이 쓰러진 사람을 곤봉으로 때리는 장면, 피흘리며 쓰러진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군인, 얼굴에서 피흘리는 남자 목덜미를 군화발로 밟는 군인, 서너 명의 시체 주변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대여섯 명의 군인들, 한 청년의 가슴에 총검을 찌른 군인. 

서너 장의 사진이 더 있었으나 보지 않고 '도대체 이게 뭔가' 생각하며 편지를 꺼내 읽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편지 내용입니다.

후배가 남긴 편지와 사진, 5.18의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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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의기 열사.
ⓒ 김의기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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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오랜만이야. 손이 떨리고 가슴이 떨려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 KUSA(한국유네스코학생회) 이번 여름 농촌활동 토의 전국 지역 간부모임 차 광주에 갔다가 우연히 5월 18일부터 23일까지 내가 광주의 참상(慘狀)을 목격하고 직접 찍은 사진들의 일부야. 그 군인들은 먹이를 쫓는 맹수처럼 남녀노소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때리고 차고 찌르고.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어. 마치 정신병자들 같았어.

급기야 21일에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기 난사를 자행했어. 눈물 때문에 사진 못찍고 사진기 옆에 놓고 펑펑 울었어. 거리는 피바다, 비명과 아수리장. 난 지금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형이 그 장면을 목격했더라면 아마 기절했을 거야. 난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언론 매체는 한 군데도 없어. '북의 지령을 받아 시위를 하는 거고 죽어가는 자들이 다 폭도며 남파 공작원들'이라 떠들고 있어... 

나라도 서울 시민들에게 알려야 것 같아서, 24일 서울로 올라와서 사진 현상하고 전단지 초고를 만들자마자 형에게 달려 온 거야. 형의 조언 듣고 수정하고 많은 얘기 나누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형과 나를 연결한 연극이 고맙고, 형이 연극할 때 만나 나눈 우리들의 시간이 그래도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 어떤 누구도 형만큼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준 사람은 없었어... 형을 언제나 만날 수 있을지... 5월 25일, 형과 이 나라 걱정하는 의기가." 

또 한 장의 종이는 그가 쓴 전단지 초고였습니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 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 잔당들의 악랄한 언론 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 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박 유신 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동안 허위적 통계 숫자와 사이비 경제 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 넣은 결과를,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 가진 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있다.

유신 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것인가?

동포여, 일어나라.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라! 우리의 힘을 모아 싸워 역사를 정방향에 서게 하자.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라! 유신 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라! 동포여!

매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라! 동포여!"

눈에 눈물이 고이고 숨이 막혔습니다. 이건 초고가 아니라 '완벽한 글'이었습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사진과 편지, 전단지 초고를 다시 봉투에 넣었습니다. 집 밖으로 나와 뒷 동네 약간 언덕 진공터로 올라가 나무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습니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생각해 봤습니다. 4년 전 내가 복학하고 연극반 반장이 된 뒤 연출한 연극(셰익스피어의 <실수 연발>)에 비중이 작은 역에 출연했던 무역학과 1학년생 의기. 그는 그 후 연극반이 아닌 한국유네스코학생회(KUSA)에 들어가 활동했습니다.

의기는 내가 연출하거나 출연한 연극엔 빠짐없이 찾아와 관람한 후 그날 본 연극 비판은 물론이고 그가 속한 유네스코 학생회의 활동을 열렬히 피력하였습니다. 활동 중 그가 가장 좋아한 건 농촌 활동이라 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전 숀 오케이시(Seán O'Casey)의 <쥬노와 공작> 공연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그에게서 학생 운동에 더욱 깊이 참여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3년 전의 의기가 아니라, 마치 이 나라의 병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의사 같았습니다.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을 하겠다'던 나였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 날부터 연극을 생활비 마련의 수단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나에 비해, 그의 사회 인식은 깊고 넓었습니다. 하고자 하는 목표(졸업 후 농사를 지으며 유신 독재 체제의 고도의 산업화 정책으로 가장 피해를 받은 농민들의 권리를 찾는 농민 운동을 하겠다고 했다)도 뚜렷하여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끝내 사망한 후배, 난 한국을 떠났습니다

갑자기 난 그가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가 지금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 보아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녔다는 형제 교회를 수소문해서 찾아보았으나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이 생각 저 생각하며 걷다가 철학도인 대학 친구를 찾아가 사진과 전단지를 보여줬습니다. 

세 번째 사진부턴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습니다. 사진을 다 보고 전단지를 읽고 난 뒤 한숨을 크게 쉬더니 소주병 마개를 돌려 열고 소주를 자기 잔, 내 잔에 따르고 자기 잔을 들이키고 그 잔에 소주를 따라 또 마셨습니다. 그러더니 말을 꺼냈습니다.

"전두환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넜고, 그 후배가 그사이에 전단 복사해서 이미 살포했다면 그도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건데. 그 둘의 차이는 이거야. 전두환은 살고, 네 후배는 죽는다는 거야." 

나도 술을 들이켜고 말했습니다.

"살포하기 전에 막아야 되는데, 이 편지 쓴 지가 사흘이 지났으니 벌써 일을 끝내고 잡혀간 건 아닐까?"
"잡혔다면 차라리 잘 된 일이지."
"잘 되다니?"
"죽음은 유보됐으니까. 그렇지 않고 도망을 쳤다면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죽거나 둘 중의 하나야."
"자살? 절대 그 친군 자살할 친구가 아니야. 삶의 목표가 뚜렷한 친구거든."
"그 친구는 쫓기다 절벽에 도달하면 그대로 뛰어내릴 거야. 내 보아하니 붙잡혀 구차하게 살아갈 친구가 아닌 것 같아."

그의 말이 맞지 않기를 난 바랐다. 내가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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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9일 금남로에서 진압 군인이 시민을 진압봉으로 폭행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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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의 사진 뒷면의 날짜를 보고 생각했어. 5월 18일 사진을 보면 계엄군에게 맞고 칼에 찔리는 사람들은 학생 시위대가 아닌 일반 행인들이야. 그럼 이게 뭘 뜻하는 걸까? 그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자극해 급기야 광주 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나도록 한 거야. 5월 21일자 사진을 봐. 총 맞아 쓰러진 사람들과 그 뒤에 엄청난 수의 시위대를. 그들은그냥 평범한 광주시민들이야.

총을 쏴 그들이 무기를 들도록 자극한 거야. 전두환은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고. 그들의 감정을 자극해 폭도로 만든 거지. 전두환은 12.12부터 시작된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학생들을 끌어들인 거야. 

전두환과 그의 추종세력은 돈으로 매수한 논객들로 하여금 마치 한 달 가까이 계속된 전국의 학생 시위가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 그 학생 지도부와 수많은 민주 인사가 북한의 사주를 받았고 이는 실로 '북한에 남침의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현재 대한민국은 국가 안보가 심히 위태로운 비상사태로 치닫고 있다고 신문 사설에 매일같이 쓰게 하고. 순진한 국민은 또 그 글을 믿고. 마침내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한 거야. 이젠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박통 시대로 돌아가는 건가?"

그가 답했습니다.

"네 가지 경우가 있겠지. 첫째, 입 닥치고 아무 일 없는 듯이 옛날처럼 노예임을 자각 못 하고 산다. 둘째, 세력 가진 자와 금력 있는 자와 그들에 붙은 기생자는 배를 두드리며 무지한 국민을 지배하며 산다. 셋째, 이 나라를 떠난다. 넷째, 자네 후배처럼 운동하다 산화한다. 난 셋째 경우를 택하겠어. 너는?"

내가 답했습니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우린 그 뒤에도 많은 얘기를 한 것 같았습니다. 술이 약한 난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그의 표현을 빌리면 '어느 순간 갑자기 기절했다' 합니다. 다음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술탓인지 모르겠지만 온 몸이 아파 이틀을 드러누웠습니다. 31일 아침 어머니가 날 깨우시며 '여기 왔던 후배가 자살했다'며 신문을 보라 말하셨습니다.

신문기사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모학교 대학생 김의기씨가 5월 30일 오후 5시경 종로 5가 기독회관 6층에서 현 시국 비판 전단지를 살포하고 투신 자살하였는데 살포된 전단지는 계엄군이 모두 회수하여 전단지의 내용은 알 수가 없다"고. 

내 친구의 말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살이 아니라 사실상 죽임을 당한 셈입니다. 나는 그날 한국으로부터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고 2년 후에 정말 한국을 떠났습니다. 김의기는 후에 '열사'로 추대되어 광주 5.18묘지에 안장됐습니다.

역사 퇴행 막으려면 '국정원 강화법' 막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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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제8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2016.2.24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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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다시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 하는가 하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킬지도 모를 '테러방지법'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국정원에 의해 어쩌면 또 다른 김의기와 같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온 국민이 일어나 이름만 '테러방지법'일뿐 실제로는 '국정원 강화법'인 법안 통과를 막아야 합니다. 야당(더불어민주당, 정의당)이 필리버스터로 입법을 지연시키고 있긴 하지만 약간의 절충으로 테러방지법은 국회에서 통과될 것처럼 보입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 국정원으로 하여금 모든 비판세력의 입을 틀어 막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것은 아닐까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55년 전으로 돌아가 국민들은 지금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지도 모릅니다.

김의기 열사의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나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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