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환경읽기]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
핵전쟁으로 몰락한 지구 무대로 펼쳐지는 디스토피아 세계
성찰 없는 맹목의 성공 부추기는 사회, ‘발랄라’는 우리의 개발 청사진
»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통해 인류에 드리워진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성찰해 볼 수 있다.
<매드 맥스>가 다루고 있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는 22세기 핵전쟁으로 지구가 초토화되고, 물과 기름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된 세계에서 아내와 딸을 잃고 환영과 환각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맥스의 ‘생존 본능’을 다루고 있다.
<매드 맥스> 시리즈의 상징이라면 자동차 추격전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매드 맥스> 1편은 1979년 개봉했다. 그 당시 공동 각본가인 제인스 매코스랜드는 1970년대 호주를 강타한 오일쇼크의 혼돈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떠올렸으며, 감독인 조지 밀러는 엄청난 제작 비용이 드는 유토피아적 세트장을 포기하고 호주의 사막을 배경으로 한 황량함을 택했다.
실제 제작사 쪽은 호주 정부에 폭주족에 대한 세미 다큐 영화를 찍는다고 속여 지원금을 수령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나빴다고 한다. 또한 1970년 시드니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수련의로 근무했던 조지 밀러는 수많은 자동차 사고 환자와 사망자를 지켜보며 이들이 곧 폭력의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닌 힘과 공포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영화의 주요 소재로 쓰게 된다.
우연이 필연을 만든다고 했던가. 이후 만들어지는 <매드 맥스> 시리즈는 모두 이러한 암울한 세계의 배경과 자동차라는 소재를 따르고 있다.
» 사막의 황량함과 자동차로 상징되는 <매드 맥스> 시리즈의 배경.
<매드 맥스>에서 인류는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가는가?
영화 속에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물과 기름이다. 또한 사용하는 장비들은 첨단 장비가 아닌 업사이클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20세기 전리품인 자동차들이다.
이러한 설정은 대부분의 아포칼립스(세기의 종말)를 다룬 영화에서 종종 나타난다. 그렇다면 왜 <매드 맥스>의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는 첨단 과학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미래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첨단 기술이 인류의 파멸 행위에 의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에게 친숙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한다. <미래 소년 코난>에서는 인류를 파멸로 이끈 전쟁으로 인해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사라진다.
이후 개봉한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도 비슷한 설정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인류를 파멸케 한 첨단 과학의 결과물, 거신병 로봇을 멸망을 경험한 인류가 숨겨서 찾지 못하게 한다.
» <매드 맥스>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물과 기름이다.
자원의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 자원은 원자력도 최신 신재생에너지도 아닌 물과 기름이다. 사실 두 가지 자원은 성질이 거의 반대이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으며, 재생 가능한 자원과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대표한다. 나타내는 이미지도 물은 생명과 탄생에 가깝고, 기름은 소비나 소멸에 가깝다.
영화는 이러한 이질적인 자원을 미래의 중요 자원이라는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어 함께 그려내고 있다. 이는 어찌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기술의 양면성과 같다. 물은 필요(needs)이고, 기름은 욕망(wants)이다. 물을 통해 생명을 말한다. 또 생명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은 기름의 산물인 무기와 가스이다.
<분노의 도로> 위에서 그들은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분노의 도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세상이 멸망하면서 누가 미친 건지 알 수 없어졌다. 나인지 이 세상인지.”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이러한 절망을 헤쳐나가기 위해 극단적인 몸부림을 친다.
악의 축인 임모탄 조는 완벽한 유전자를 가진 후계자를 갈망하고, 그를 돕는 워보이들은 핵전쟁의 후유증으로 스스로 혈액을 생성해 내지 못해 피 주머니를 달고 강제로 생명을 이어가며 발할라라는 천국에 집착한다. 맥스는 아내와 딸을 잃은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임모탄 조에 납치된 자바사의 딸인 여전사 퓨리오사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생존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 남성과 힘의 억압을 상징하는 임모탄 조에 대항하는 여성의 이미지에서 에코페미니즘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표 지점은 어디였나? 남성과 억압으로 상징되는 임모탄 조의 시타델에서 맥스와 퓨리오사 일행이 궁극적으로 향한 곳은 ‘고향’이라고 불리는 ‘녹색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물이 오염되어 사라졌음을 알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갈 것인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것인지 갈림길에 선다. 그리고 결국 현실 세계를 택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 세대인 어머니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등장한다. 씨앗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오래된 미래’ 같은 진리를 의미하기도 하다. 즉, 맥스와 퓨리오사는 유토피아를 찾지 못했지만, 씨앗을 통해서 현재의 디스토피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을 본 것이다.
한편, 영화는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여성을 택한다. 남성과 힘의 억압을 상징하는 임모탄 조에 대항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끝없는 착취로부터 자연을 해방시키는 동시에, 한없이 소외되고 주변화되는 것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에코페미니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사건 전개의 매체인 임모탄 조의 부인들.
“날 기억해 줘!”
또 주목할 만한 캐릭터로 워보이가 있다. 이들은 “반짝반짝 광택이 나는(shiny and chrome)” 상태가 되기 위해 입에 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적의 차로 뛰어들면서 “날 기억해 줘(Witness me!)”라고 외친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맥스나 퓨리오사가 그리는 세상보다 임모탄 조가 강요하는 세상에 더 가깝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임모탄 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워보이들의 모습에 더 동화되는 면이 있다. 사실 워보이는 지배자에 의해서 자신의 주관 대신 사회의 가치만을 주입받고, 다른 사람의 피로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이다.
» “날 기억해 줘!”라고 외치며 죽음 속으로 뛰어드는 워보이.
이런 점에서 워보이는 사회가 주입하는 환경의 가치나 이미지를 좇아 충분한 성찰 없이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발할라’는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 또는 사회적 명성이나 성공, 각종 개발로 얻게 될 장밋빛 청사진일 수 있다.
그들에게는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고,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사치일 수 있으며, 불의(임모탄 조)에 대해서도 숭배를 할 뿐 이에 저항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맥스 일행과 함께하면서 가치의 변화를 보이며,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죽음에 이르는 눅스(니컬러스 홀트)는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를 거둔 인물로 볼 수 있다.
절반의 성공이란 자신을 성찰하고 정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절반의 실패란 결국 희생을 당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가치라고 해도, 과정에서 그 주체가 희생을 당하는 방식은 성공이라고 부르기엔 중대한 결격 사유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준은 환경에 관련된 행위를 할 때 항상 염두에 두고 생각해 봤으면 한다. 모든 전장은 전쟁의 명분과 승패에 관계없이 죽은 자들의 무덤이 되기 때문에 무의미한 일로 남게 된다.
<분노의 도로>에서 마지막까지 지킨 것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씨앗이며, 진정한 변화는 승패 이후에 남겨진 것들에 의해서 발화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글 안재정/ 김포 장기고등학교 교사·환경교육 박사, 사진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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