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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휴심정 2013. 01. 27
조회수 398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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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등장하는 동자승이 개구리와 놀고 있다. 사계절의 순환과 ‘윤회’를 소재로 한 이 영화 속에서 개구리의 몸에 돌을 묶는 동자승은 자신도 모르게 죄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28> 그때 그 사람들

동지 지나 1월 말이 되니 햇살이 확연하게 맑고 밝다. 수은주는 영하 10도를 밑돌아도 목련 꽃눈이 제법 커졌다. 겨우내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던 마당가 국화도 그 눈구덩이 아래서 어느새 파란 싹들을 빼꼼히 올리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다.

 

엊그제 황인철 변호사 가신 지 20년째 되는 날, 묘소에 사람들이 추모하러 모였다. 이석태, 나, 조용환 세 사람이 덕수합동법률사무소에 몸담게 된 건 당신의 몇 차례에 걸친 권유 덕이었다.

 

산속이라 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우리가 변론했던 임수경의 어머니가 20여년 만에 보는 조 변호사에게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아유, 그 이뻤던 변호사님이 이젠 나이가 들었네” 이러는 거였다.

 

 

다시 한번 ‘땅을 넘어 극락 가소’

 

그랬다. 황 변호사 가실 때 나이보다 우리 나이가 훨씬 더 많다. 황 변호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갔고, 이제 우리도 가을이 지나간다.

 

김기덕 감독 영화가 생각난다. 동자승 녀석이 물속 개구리며 뱀을 실에 묶어 잔돌을 매달아 놓는다. 앞으로 나가보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얼마간 안간힘을 쓰다가 죽어버렸다. 그 녀석은 커서, 정을 통한 젊은 처자 쫓아 속세로 가서 살인까지 하고 저 스스로 묶어놓은 돌에 발버둥쳤다. 그리고 되돌아와 중노릇하면서 엄마 잃은 아이를 동자승으로 키우는데, 그 녀석이 또 똑같이 개구리를 돌로 묶는다. 중은 스스로 맷돌을 허리에 매고 끌고 절 뒤에 있는 겨울산을 죽을힘을 다해 오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렇게 삶의 수레바퀴가 끝없이 굴러가는 동안, 이 세상은 좀 좋아져 가고 있는 걸까.

 

지난 일 년, 글 쓰며 만났던 이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6·25 때 인민군 소위로 참전했다가 지리산에서 붙잡혀 36년 감옥살이하다 나온 장기수 노인의 마지막 유서에 다시 마음이 아프다. “본인은 1990년 11월21일 4시10분을 기해 세상을 하직합니다. 당과 조국 앞에 무수한 과오를 범했고 앞으로도 씻을 길 없어 부득이 이 길을 택합니다. 일편단심 자기 사상을 고수했을 뿐 이 세상에 왔다가 아무런 한 것도 없이 흐린 자취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통영 앞바다에서 목맨 노인부터
용산 남일당 철거민들까지
지난 1년 동안 글 쓰며 만났던
이 모든 일들이며 사람들이
김기덕의 영화, 바로 그것이다

 

 

동자승이 돌을 매단 개구리는
버둥거리다 죽어버렸다
그 동자승도 커서 살인하고
스스로 매단 돌에 버둥거린
그리고 또 다른 동자승이…
이렇게 삶의 수레바퀴가
끝없이 굴러가는 동안
세상은 좀 좋아지고 있는 걸까

 

 

 

전쟁이 없었다면 고향 평안북도 용천에서 참한 여자 만나 아들딸 낳고 평안한 일생을 보냈을 건데. 장가도 못 가고 평생을 감옥에서만 보낸 그가 도대체 무슨 ‘당과 조국 앞에 무수한 과오’를 범했다는 건가. 많이 가진 사람, 없는 사람 차별 없이 평등한 사회주의 세상을 꿈꾼 게 무슨 큰 죄라고, 북녘땅 고향에도 못 가보고 세상천지 아는 이 하나 없는 저 머나먼 남쪽 끝 한산도에서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며 소나무에 목을 맨 건가.

 

남쪽의 많은 이들이 지금도 이 노인 얘기를 들으면 지독한 빨갱이라며 저주를 퍼부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정반대 일이 저 북녘에서도 벌어졌겠다.

 

안양 병원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이랬다. “변호사님, 제 처 좀 잘 돌보아 주이소.”

 

돈 벌러 이 땅에 왔다가 살인 누명 쓰고 감옥살이만 실컷 하고, 그래도 목숨이라도 건져 돌아간 게 천만다행인 커다란 눈망울의 스물세살 파키스탄 노동자 아미르 자밀.

 

공안기관에 쫓기다 거문도 바다에 시신으로 떠오른 중앙대생 이내창이며, 여수 돌산도 바위굴 속에서 목맨 채 발견된 가스 배달 청년 신호수. 그들의 죽음은 아직도 의문사다. 다시 한번 씻김굿을 한다.

 

“오늘 불쌍한 이씨, 신씨, 두 망자 씨가 꽃을 받고서 극락 가고 꽃을 받고서 세왕 가고 왕생극락 가시시고 청춘 상을 가시시고. 꽃은 꺾어서 머리 꽂고 잎은 띄어 채견 보고 왕생극락 가자세라. 땅을 넘어 극락 가고 땅을 넘어 세왕 가소.”

 

 

다음 생애에선 좀 덜 구차하게 살 수 있을까

 

젊은 처자들 보성 앞바다에 삿대로 밀어 넣은 칠십대 어부 노인은 힘이 장사였다. “아가씨, 나는 작년부터 관계를 못하는데 아가씨 유방이라도 단도리 해버려야 돼요.” “얘들이 운이 없었고 불쌍혀. 나와 니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팔자를 타고났나벼.” 청춘 넷을 바다에 밀어 넣은 이 이상하고 괴기스런 노인도 ‘존엄하다’고 헌법에 씌어 있으니 우리는 어쩔 건가.

 

치과의사 처와 한살짜리 딸 잃고 그 살인범으로 몰려 오랜 세월 사형과 무죄, 천당과 지옥 사이를 수없이 오고 간 남자며, 겨울비와 안개 스멀대던 양평 모곡유원지 인적 끊긴 깊은 산속 임도에서 그만 삶이 무너져내린 여자.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다 죽었다. 땅에 산 채로 묻혀, 혹은 사형장에서, 그리고 여자는 긴 감옥살이 마치고 나와 문학을 공부하다 시골 병실에서 암으로.

 

그 여자가 감옥에서 보내온 “절망”이란 시를 다시 읽어본다.

 

“이 구차한 삶이여. 그때 그냥 죽었어야 할 것을. 강도 짓 하는 데 공모하여 망을 보고 일가족을 무참히 죽였노라고 인정하므로 나도 그들처럼 사형당해 죽었어야 할 것을. 아, 그리운 평범이여. 스물일곱의 평범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꽃잎의 떨림에도 가슴 팔랑이던 소녀에서 모성으로 성숙되는 여인의 평범함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 돌아라. 끊임없이 돌아라. 윤회의 삶이여. 누명은 누명인 채로, 절망은 절망인 채로, 가슴에 품자. 품어서 소멸될 업이라면 한 없이 품어서 내생에는 지독히도 평범한 구차하지 않은, 아니 적당히만 구차한 삶으로 살고 싶다.”

 

새로 맞은 어느 생에서 여자는 적당히만 구차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즐겨 읽던 공동경비구역(JSA) 소대장 김훈 중위. 그 젊은 죽음의 원인을 덮은 가장 큰 책임은 미군에게 있다. 미군은 지금이라도 그 진실을 밝혀야 하리.

 

중정 마당에서 머리에 피 흘린 주검으로 발견된 최종길 교수의 수사관은 지금도 이리 발뺌을 한다. “제가 최 교수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착한 교도관의 배려로 서대문구치소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남편에게 등에 업힌 딸 얼굴만 겨우 보이고 돌아선 ‘세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인혁당’ 사건의 이수병이 던진 딱 두 마디 말. “어, 많이 컸네. 많이 컸네.”

 

어느 만화가가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다. 작년 추석 시집간 딸이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이 만화를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더니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린애 둘러업은 채 감옥 마당에서 한마디 말도 못 건네 보고, 남편과 영원한 만남, 아니, 영원한 이별을 했던 이수병의 처 나이가 지금 내 딸 나이다.

 

이헌치가 보안사 감방에서 생과 사를 오가고 있을 때 같이 붙들려 간 엄마 뱃속에 있던 아들은 15년 만에 처음 아버지 품에 안겼다.

 

저 죽을 구덩이 제 손으로 파고, 조금 뒤 제가 그 구덩이에서 총살되어 묻힐 줄도 모르고 웃고 있는 시골 촌부 보도연맹원들. 그 자손들은 오늘도 재판에서 희생 사실을 인정받지 못할까 애타하며 법원을 드나들고 있다.

 

그리고 숱한 재개발지역 철거민들, 활활 불타오르며 쓰러져 가는 용산 남일당 망루….

 

이 모든 일들이며 사람들이 영락없이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그것이다. 동자승의 개구리 같고, 맷돌 등에 지고 끌고 산을 오르는, 그 동자승이 자라난 중 같다.

 

 

나와 너가 따로 없다, 사건이 있을 뿐

 

세상은 좋아질 수 있을까.

 

온갖 지혜와 복덕, 원력과 자비, 신통과 위신력을 갖추신, 무한히 크고 반듯하고 너르신 부처님(大方廣佛)이 오셨어도, 하느님과 일체이신 성자 예수님이 오셨어도,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세상은 바뀐 게 없다.

 

돌, 나무, 돼지, 사람.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 세상 만물이 저마다 개체로 존재하는 한, 그래서 개체가 서로 다르고 개체가 자기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려 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게 개체 사이의 충돌이다. 저마다 이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밤이면 별빛 쏟아져 내리는 사막에 은둔하며 하느님을 묵상하는 수도승도, 히말라야 설산 토굴 속에 앉아 주관과 객관의 차별이 사라지는 ‘비상 비비상처 삼매’(非想 非非想處 三昧)에 든 수행자도 하다못해 풀이나 낟알이라도 먹어야 사는 법. 하지만 풀이나 곡식이 어디 수행자한테 먹히려고 생겨난 건 아니다. 그것도 생명인데 남의 생명 먹고 그 수도자 ‘개체’가 어디 높은 ‘경지’에 이른다는 건 좀 그렇다.

 

수행자와 낟알은 서로 이해가 부딪친다. ‘빨갱이’와 ‘보수반동’이 이해가 충돌하듯이. 이내창과 그를 쫓는 공안 수사관이 생각이 다르듯이.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세상 만물이 변하지 않고 다른 것과 독립하여 저 혼자 개체로 존재하는 건 없다. ‘나’라는 게 아버지 어머니가 만나 유전자를 나눔으로써 비로소 이런 성격과 생각, 몸이 합성된 것이니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 인류의 유전자 풀에서 일시적으로 ‘나’란 조합이 생겨난 거고 판사도 사형수도 그렇다. 돼지고기 먹고 내 살이 되고, 내 살 썩어 풀의 거름이 되었다가 염소가 뜯어 먹고 그 염소를 사람이 잡아먹는다.

 

생각도 본래 내 것이란 없다. 유전자 특성에다 그간 남들이 이루어 놓은 지식과 내가 특정한 환경에서 겪은 경험이 합해져 잠시 ‘내 생각’이 되었다.

 

우리의 개념, 언어란 게 본래 어떤 순간만을 포착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게 서로서로를 구성하고 영향을 주며 변해가는 걸 잡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개체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둘 중 하나로 표현한다. 있다 없다는 표현은 개체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만물은 이합집산하며 변해가므로 어떤 ‘개체’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그저 만물의 끊임없는 이합집산인 흐름, 사건이 있을 뿐.

 

그래서 만물은 하나다.

 

성서에서는 이걸 모든 게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화엄경에선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나타나심 아닌 게 없다고 했다.

 

현대 과학은 40억년 전 최초 한 개의 세포가 만들어져 이게 진화하면서 이 무수한 생명체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150억년 전으로 거스르면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저 수많은 창공의 별이나 산 위의 바위며, 푸른 숲, 바다가 단 하나의 점, 크기는 없고 질량만 있는 하나의 점이었다.

 

세상 만물이 모여 그저 잠시 동안 나라는 개체로, 너라는 개체로 몸을 입고, 그 몸인 뇌 신경세포들의 창발적 활동으로 생각도 하고 아름다움도 느낀다.

 

어제 빨갱이의 아들이 오늘 보수 반동이요, 오늘 사형수의 아들이 내일 성철 스님이다.

 

우리 스승들이 그러셨듯이, 그저 이 한세상 살면서 나와 이웃들이 이런 이치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서로서로 도와줄 일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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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은 이번주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다음주에는 김형태, 금태섭 변호사의 ‘비망록을 말하다’ 대담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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