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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탐방? 이미지 정치 뒤로 숨어버린 ‘책임정치’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8월 7일 경남 함양군 지리산 함양시장을 방문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상인들과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8월 7일 경남 함양군 지리산 함양시장을 방문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상인들과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이미지를 정치에 도입한 최초의 임금이었음에도 고종은 특히 사진을 통해 표현되는 자신의 이미지에 관해 깊이 이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진을 보면 고종이 복장과 배경에 신경써서 괜찮은 ‘그림’을 만들려고 했던 점이 엿보인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이후에도 카메라를 통해 황실의 힘과 권위를 나타내 보이려 했던 것은 바뀌지 않았다. 신문물이 한 발 앞서 들어온 일본이나 서구 열강의 군주들에 비하면 늦은 셈이지만, 함부로 어진을 볼 수 없게 해 왕조의 위엄을 세우려 했던 선대보다는 이미지의 정치를 잘 예측했던 셈이다.

현대에 이르면 정치인들은 늘상 카메라 앵글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민생을 탐방한다는 이유로 수염도 깎지 않고 수수한 차림새로 시장이나 노동현장 등 시민들의 생활공간에 들르는 행보는 으레 거쳐가는 필수 경로나 다름없게 됐다. 남는 것은 사진과 이미지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민생투어’라는 이름으로 진도 팽목항에서부터 전국의 민생현장을 돌아다닐 때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히말라야 도보여행을 다니는 모습이 SNS에 올라올 때, 두 정치인의 얼굴엔 깎지 않은 수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당직에서 물러나 ‘야인’ 또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이미지가 언론을 통해 유권자들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재래시장, 독도, 탄광 곳곳 SNS게재…“순식간에 만표 왔다갔다 한다”
김무성 전 대표가 민생투어를 시작하기 전 김 전 대표 의원실에서는 기자들에게 공지 문자메시지를 돌렸다. 민생투어의 일정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고 시민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불필요한 혼잡이 있을 수 있으니 김 전 대표의 방문일정을 사전공지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김 전 대표가 돌아다닌 행적을 홍보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SNS 등을 통해 김 전 대표가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가 빠르게 공유됐다. 김 대표가 팽목항에서 수심 깊은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사진과 지리산 자락의 함양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손을 잡는 이미지는 유권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7월 25일 독도를 방문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독도경비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연합뉴스

7월 25일 독도를 방문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독도경비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연합뉴스

 

 
문재인 전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염을 기른 상태로 부탄 총리를 접견하고, 네팔 현지음식을 손으로 먹는 모습이 SNS는 물론이고 이를 인용한 언론의 보도에 등장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이전의 수염은 사라졌지만 독도와 백령도를 방문하는 등 김 전 대표와 비슷한 민심 탐방 행보가 이어졌다. 10년 전인 2006년 민생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역시 이미지 정치를 잘 활용했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도 오랜 야인 생활을 끝내고 정계복귀를 타진하고 있다. 당시 탄광에서 수염난 얼굴에 땀과 검댕이로 뒤범벅이 됐던 손 전 대표의 이미지는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본격적인 대선국면을 앞두고 각 대선주자마다 전열을 꾸리고 행보를 넓혀가는 시점에서 ‘민생’이라는 키워드의 이미지 정치가 전초전 격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에서 정치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득표와 당선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단지 선거국면에서만이 아니라 당내활동이나 의정활동 중에도, 당직이나 공직에서 물러나 정해진 소속이 없는 시기에도 이미지가 끊임없이 생산돼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의원들 중에는 ‘무플보다는 악플’이란 말처럼 욕 먹는 기사라도 올라오는 걸 더 좋아한다는 쪽도 많은데, 지역구에서만이라도 어디든 가서 사진 한 장 남기는 식으로 눈도장 찍고 (기사에) 한 줄이라도 더 나오려 한다”고 말했다.

지역구의 표에 신경써야 하는 국회의원을 넘어 전국 단위의 표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대선주자의 입장에서는 선거까지 남은 일정에 맞춰 그때그때 정치 상황에 맞는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은 정치인과 주변 참모들을 고심케 하는 과제다. 목소리와 발음, 패션과 옷의 색깔, 신체언어 등 조금이나마 유권자의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요소들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야권 후보의 여론동향을 분석하는 일을 맡았던 한 당직자는 “토론이나 연설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나갈 때마다 트위터나 각종 사이트, 뉴스 댓글까지 훑어보며 어느 시점에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를 일일이 분석했다”며 “상대 후보에게서 보이는 반응까지 고려해 계속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히는 일이 잘 되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몇 만표가 왔다갔다 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검증할 정보 없는 중고차 시장과 같아
내년의 대선에 대비해 수면 아래서 시기를 재고 있는 ‘잠룡’들이 등장할 타이밍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어떤 이미지로 인상을 남기느냐의 문제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민생’을 앞세운 대선주자들이 여러 현장을 방문하는 소식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쇼맨십’ 또는 ‘퍼포먼스’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민들의 반응이 나오는 것도 흔한 공식이 됐다. 보여주기식, 수박 겉핥기식으로 유권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 손을 잡지만 진지한 고민과 대안 모색은 부족하다는 것이 비판의 배경이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대선주자 같은 유력 정치인들이 잘 다듬어서 보여주는 이미지에 비해 그에 걸맞은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시민들이 반복되는 구도의 이미지 대신 현실적인 내용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주자들만큼이나 이미지 정치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는 역시 대통령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한 한 전통시장에서 방앗간 상인과 대화하며 “국산 고춧가루가 귀하다”고 한 발언도 논란을 불렀다. ‘세상 물정에 밝지 않은’ 이미지를 지닌 대통령인지라 일각에서 “고춧가루 값이 얼마인지도 잘 모르느냐”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간 역대 대통령들의 여름휴가 동안 책을 읽으며 정국을 구상했다고 했던 것처럼 박 대통령도 휴가를 책과 보고서를 읽으며 보냈다고 SNS에 올렸다. 책을 읽고 정책을 고민하는 것이 그나마 정치인의 이미지에 맞는 콘텐츠를 갖추는 방법이라는 인식이 폭넓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휴가 때 읽은 책들을 바탕으로 향후 정책 수립에 참고하는 것처럼 빈약한 정치적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는 현 정치권에서는 이미지 정치에 걸맞은 콘텐츠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00일 민심 대장정’길에 오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28일 오후 강원도 삼척시 경동주식회사의 황조본갱에서 근로직 직원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100일 민심 대장정’길에 오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28일 오후 강원도 삼척시 경동주식회사의 황조본갱에서 근로직 직원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내용 없이 꾸며진 이미지만 넘쳐나는 정치의 문제는 하루이틀 된 사안이 아니지만 현대 정치에서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 자체는 꼭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상 이미지와 정책을 칼로 자른 듯이 구분하는 것도 어려운 데다, 정책적 함의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이미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득세하고 있는 유력 정치인의 이미지를 통해 사회상을 읽고 시민들이 어떤 정치적 욕구를 품고 있는지를 읽어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안병진 교수는 “정치인의 이미지는 사회의 욕망이 투영된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기도 하다”며 “이미지를 뒷받침할 내용이 없는 정치인들은 쉽게 한계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에 언론이나 유권자가 그들을 검증하면서 대선주자들 간의 차별성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유권자들의 치밀한 검증은 이미지 정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방법인 동시에 보다 적합한 정치인을 선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지 정치가 만연한 정치판일수록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의 정책 지향과 실현 능력에 관한 정보를 얻기 힘들다는 데 있다. 투표권이 있는 유권자를 소비자로, 각각의 정치인들을 생산·판매자로 비유하면 정치 역시 시장과 비슷한 거래가 오고가는 영역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 팔리는 것이 정치인의 이미지인지 정책과 능력인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정치 소비자로서의 유권자들에겐 정치인들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보 외에는 판단에 도움이 되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래 당사자 간의 정보가 비대칭인 시장의 대표적인 예가 중고차 시장이다. 과거 대형 사고가 난 적이 있는지, 부품들이 작동하는 데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판매자가 알리지 않으면 쉽게 알 수 없는 정보를 바탕으로 소비자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이렇게 정보 비대칭 상태가 쉽게 개선되지 않는 ‘레몬 시장’에서는 실제로 구입해 보고 나서야 진짜 품질을 알 수 있는 재화가 거래된다. 유권자들은 투표 후 당선자를 뽑고 난 뒤에야 당선자가 직책에 맞는 정치인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 결국 해당 시장에는 저질의 불량품만이 나돌아다니게 된다.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는 보다 나은 상품을 파는 판매자가 품질로 차별성을 알릴 방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치라는 시장이 레몬 시장이면서 독과점 시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대체재가 있는 중고차 시장과는 달리 정치에는 대체할 시장이 없다. 한국 정치가 맘에 안 든다고 미국 가서 투표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현재 정치권에서 힘을 얻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소수의 대선주자군 외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새로운 대안 후보를 세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할 현실적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저마다 다른 시민들의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민주적으로 반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각 정당들이 밝히고 있는 정견과 강령에 따라 민의를 모아야 하지만 국내 정치상황은 정당구조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소수의 정치인을 중심으로 이미지 정치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정치를 오케스트라에 비유했다. 유권자들이 관객의 역할이라면 각 정당이 여러 악기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이며 그 정당의 대표주자가 지휘자로,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정당 내부의 다양한 파트들이 불협화음을 피하고 조화로운 연주를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그 정당의 흥행과 성패를 좌우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현재의 특정 정치인 위주의 이미지 정치는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인 정당을 바라보며 연주를 지휘하지 않고 돌아서서 관객을 똑바로 마주보고 정치하는 꼴이라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당연히 연주는 엉망이 되고 지휘자는 신뢰를 받지 못하며 관객들은 불만이 높아진다. 하지만 지휘자와 관객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불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오케스트라도 서너 개 있지만 사정은 똑같다. 오케스트라를 고를 선택권은 있지만 불협화음이 내는 불쾌한 연주를 피할 도리는 없는 셈이다.
 

 

시민들 ‘쇼맨십’에 거부감 보이기도

 

 

나아가 소수의 대표 정치인에 좌우되는 이미지 정치는 사실상 민주주의라기보다 귀족정치에 가깝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문제에 해당한다. 소수의 귀족적 정치인들에게는 자신의 정치력을 보증해주는 대상으로서 표를 바치는 유권자들만 필요할 뿐 유권자들에게서 선택을 받은 뒤에 져야 할 책임은 극히 미미한 것이다. 박 대표는 “내년 대선을 대비하는 국면이 점차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정치적 특권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는 소수의 정치인들 위주로 대선을 치르면 누가 당선되더라도 그 이후 지금의 문제가 반복되거나 더 큰 문제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 황제가 프러시아식 정장을 하고 찍은 사진.

대한제국 시기 고종 황제가 프러시아식 정장을 하고 찍은 사진.

결국 이미지 정치의 반대말인 정책 정치나 어젠다 정치가 자리잡으려면 우선 각 정당들이 보다 정치적 구조를 굳건히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 같은 지적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각 당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제일 힘 있는 한 사람 지시가 그대로 당 전체에 퍼지는 오더 정치를 완전히 막진 못하더라도 어느 자리에 누가 앉느냐와는 상관 없이 당이 본연의 틀 정도는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전대만 했다하면 휘청휘청하는 모습은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더민주의 한 당직자도 소속 당을 향해 “당론이 정해지기 어려운 민감한 사안이면 토론이라도 화끈하게 벌어져야 하는데 서로 눈치만 보며 조용히 있는 당에서 어떤 활력이 나오겠느냐”며 쓴소리를 냈다.

고종이 선대 임금들과는 달리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유포한 데에는 본인의 의지도 작용했지만 일본을 비롯한 각국 열강의 압박이 더 큰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러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한 일본의 요구로 일본 덴노의 이미지를 유포하던 방식과 비슷하게 고종의 이미지가 민간에 퍼져나간 것이다. 고종의 초상을 통해 근대 초기의 시각문화를 분석한 <이미지와 권력>의 저자인 권행가 덕성여대 연구교수는 저서에서 “조선의 강제병합 이후 조선의 황제는 일본의 천황 사진 아래, 훨씬 작은 크기와 장식으로 배치되었다”며 “고종은 이미지 재현의 주체가 되려 했으나 일본에 의해 선전용 이미지로 전락했다”고 분석했다. 식민지로 넘어갈 위기의 국내 상황을 자신의 권위적 이미지로 가리려 한 고종의 행보는 결국 망국이란 결과를 낳았다. 정치인의 이미지에 가려 시민들의 여론은 반영되지 않는 현대 한국의 정치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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