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일 저녁 서울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100명의 배우가 가설무대에 오르는 사상 초유의 뮤지컬 공연이 진행된다. 1946년 전남 화순탄광사건을 소재로 한 ‘화순1946’.
야외 광장을 무대로 삼았다는 점과 그 무대에 오르는 배우가 100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한국 뮤지컬 역사상 지금까지 시도한 바 없는 최대 규모의 공연이다. 또 공연 100분을 끌어가는 31곡의 유려한 뮤지컬 넘버는 노래로 극 전체를 관통하는 정통 ‘송-스루 뮤지컬(Song Through Musical)’의 감동을 선사한다.
지난해 9월 대학로 소극장에서 초연을 한 이래 ‘한국판 레미제라블’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앵콜, 재앵콜 공연 무대를 올렸고, 올 초에는 전남 광주에서 3,000명의 노동자들이 단체로 관람하기도 했다.
이번 광화문 광장 공연으로 ‘화순1946’의 제1기를 마무리하겠다며,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배우들과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하고 있는 작가·연출자·작사자인 류성(42)씨를 지난달 24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지하 연습실에서 만났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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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화순1946'의 류성 연출자가 9월 8일 광화문광장 공연 준비를 위해 한 여름 폭염속에 구슬땀을 흘리며 배무들과 연습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8월 24일, 약속 시간인 오후 4시 30분. 서울 마포구 망원동 마포구청역 인근 주택가의 지하 연습실. 문을 열자 후끈거리는 열기가 온 몸을 덮치고 거울로 둘러싸인 연습실 안에는 30여명의 남녀 배우들이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 노래 연습에 여념이 없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 늦은 오후에도 수온주는 35도 이하로 내려가는 법이 없었다.
“이 노래에는 뭔가 삶이 바들바들 버티려고 하는 게 있어요. 무섭고 도망가고 싶고... 그러니까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뭔가가 있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겼다가 아니라 이겨내려고 애쓰면서 겨우 겨우 버티는 사람들이에요.”
파업 중인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진압을 준비하는 바깥쪽 진압군들과 비를 맞으며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르는 합창곡 ‘비 내린다’. 류성 연출자는 장면을 설명하면서 배우들의 감정을 세심하게 지도했다.
"아직은 캄캄한 밤, 어둠속의 꽃처럼 아직은 두려운 밤. 알 수 없는 내일, 별빛도 달빛도 이 땅을 비추지 않고 우리의 조국은 우리를 구하지 않아도. 허나 이 비는 그치리라, 내일은 꼭 오리라. 이 밤, 이 고통, 이 슬픔, 모두 지나가리라. 간절한 기도, 애타는 소원, 이루어지리라. 맑은 하늘은 새 아침은 밝아 오리라. 내일은 꼭 오리라."(내일은 꼭 오리라)
“무대 위에 있는 배우들이 캐릭터가 아니라 한명 한명의 사람으로서 관객들에게 ‘여러분 힘냅시다’, ‘우리 힘내요’라고 하면서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힘을 주어야 하는 거죠. 공연할 때마다 마지막 노래를 부를 때 너무 빨라지는데...약간 웅장하게 가세요.”
공연 끝 대목 커튼콜 때 부르는 ‘내일은 꼭 오리라’에 대해서는 몸을 들썩이며 다른 주문을 했다.
예정된 5시까지 연습을 더 하고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뮤지컬 ‘화순1946’은 전라남도 화순 탄광의 광부 3천명이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로 향하던 중 22번국도 경계의 너릿재 터널에서 군대와 경찰을 앞세운 미 군정의 발포로 학살당한 사건을 소재로 한 ‘역사 팩션(fact+piction)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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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뜨거웠던 한 여름 폭염 속에 배우들이 한 달 이상 뜨거운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절망에 무릎 꿇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 통일뉴스 : 올해 유난히 더운데 배우들도 많고 해서 연습하는 것도 큰 일일 것 같다.
■ 류 성 : 100명이 연습을 해야 되는데 장소가 좁기 때문에 A, B, C 세 팀으로 나누어서 연습을 하는데, 조금 전에 한 건 B팀이고 저녁에 또 연습하러 온다. 보신대로 발 디딜 틈도 없고 에어컨을 막 틀어도 별 효과가 없다. 각 팀이 일주일에 4일 정도, 하루 3~4시간씩 연습한다.
연습은 8월 1일부터 했는데 지금은 노래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좀 편하게 하고 있는 편이다. 작년에는 매일 연습을 했는데, 지금 멤버들의 40% 정도가 작년에 했던 사람들이어서 새로 들어온 배우들의 노래연습도 도와주고 한다.
8월 말부터는 A, B, C 세 팀이 종로의 큰 연습실에 모여서 집중연습에 들어가게 된다.
□ 작년부터 공연에 대한 호평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작품을 소개해 달라. 1946년 화순탄광사건이 배경으로 되어 있는데...
■ 화순탄광사건이 사실 많이 알려진 사건은 아니다. 기록도 많이 없다. 예전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등 활동이 있을 때 자료가 좀 있고 지역에서 연구한 분들이 몇 분 있긴 한 것 같은데... 다른 사건에 비해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당시에 몇 명이 죽었는지도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어떤 기사에는 2명, 어떤 보도에는 30여명이 죽었다고 나와 있고 어떤 증언에는 엄청 많이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팩션(fact+fiction)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이다.
□ 작품 소개 브로슈어에는 ‘민족자주’, ‘평화와 생명’, ‘노동과 공동체에 대한 염원’ 등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이 되어 있던데...
■ 그건 그냥 홍보문구이고. 저는 사실 이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공연을 본 분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가 용기와 희망을 느꼈다고 한다. 굉장히 비극적인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 분들이 하는 말씀이 뭐냐 하면 ‘절망 속에서도, 절망에 무릎 꿇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는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 작품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대본도 쓰고 연출도 하고 노랫말도 썼는데...
■ 특별히 계기가 있지는 않았다. 예전에 이 사건을 우연히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굉장히 꽂혔다. 충격적이었다고 해야 하나.
□ 어떤 대목이 그랬나.
■ 어떤 대목이었냐면, 딱 그거였어요. 1946년 8월 15일 해방절 기념대회에 가는 광부들을 미군정이 직접 공격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데, 그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7~8년 전쯤에 그저 그런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있다가 틈틈이 살펴보던 중 몇 가지가 더 보였다. 그때 진압군들이 굉장히 많이 왔었는데 쉽게 치지는 못하는 거다. 탄광에는 다이너마이트가 있으니까.
기록을 보면, 광부들이 진압군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화순으로 들어오는 다리를 끊어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되게 격렬하게 싸웠구나 싶더라. 군대와 싸운 거니까. 무서웠을텐데...
그런 상황들을 보면서 ‘아! 이 뮤지컬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 세월호 때문이었던 것 같다.
□ 많이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었나보다.
■ 공연을 보신 분들도 세월호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한다. 그리고 쌍용차도 떠오른다고 하시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월호 이야기가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이야기라면, ‘화순1946’은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 오랜 세월 이 문제를 머릿속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작업을 한 것 같다.
■ 계속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인상적이었일 뿐이었는데, 말한대로 세상이 자꾸 사람들을 절망 속에 밀어 넣으니까 이야기로 풀어봐야겠다는 갈망이 커져갔던 것 같다.
□ 그럼 대본은 집필을 시작한지 얼마 만에 완성되었나.
■ 예전에 40분 짜리로 썼던 적이 있고 그걸 팟캐스트 라디오 반민특위 드라마로 1시간 30분 짜리로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작년에 이걸 뮤지컬로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 라디오 반민특위는 겸업으로 할 일은 아니었을 텐데
■ 라디오 반민특위를 운영하던 후배로부터 라디오 드라마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여러 편을 써서 주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화순탄광이야기였다.
□ 화순탄광 이야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다뤘던 다른 역사적 사건이 있나.
■ 내가 하는 작품이 다 그런 것 같은데...70년대 여공들 이야기나 체르노빌 이야기 같은 것들이 대다수이다. 체르노빌 이야기는 우리 극단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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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성 연출가는 절망속에서 오히려 더 커가는 갈망을 위해 기꺼이 쓰러져 가는 무릎꿇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객들이 감동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인간의 진짜 척추'지키려는 의지 소중
□ 이런 작품을 만든 연출자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할 독자들을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 학번으로는 94학번, 나이로는 42살이 된다. 결혼해서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과 1학년 된 딸이 있다. 대학 다니면서 풍물치고 마당극하다가 연극을 하게 됐다. 대학로에서 처음부터 연극을 했던 건 아니고 주로 민족극이나 마당극하는 팀들과 많이 했다.
2년 전인 2014년에 대학로에 ‘극단 경험과 상상’을 만들면서 뮤지컬도 하고 연극도 하게 됐다.
□ ‘화순1946’이 극단의 첫 작품이었나?
■ 극단 만들고 한 첫 작품은 체르노빌 이야기였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저한테 크게 작용한 문장이 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서문에 보면 ‘인간의 진짜 척추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문장이 있다. 제가 생각할 때 이건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의지’에 대해 작가인 조세희 선생이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하는 작품들에는 그런 것들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체르노빌 이야기는 ‘어떤 사랑’이라는 제목인데, 주인공이 방사능에 피폭된 여자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이다.
남편은 체르노빌 발전소에 불이 나서 그걸 끄기 위해 갔던 소방관이었다. 방사능에 너무 많이 피폭이 된 남편에게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 여자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다가가지 못하는 자기 남편의 곁을 죽을 때까지 지킨다.
그러다가 자기도 피폭을 당하고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소방관인 남편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죽었고 다른 남자와 사이에 생긴 아이도 1년에 6개월을 병원에 다닌다.
이 작품에서도 담고 싶었던 이야기는 비극을 극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피폭된 줄 알면서도 그 여자를 사랑하는 어떤 남자 등, 그 여자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제 생각에는 이 화순1946도 맥락은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진짜 척추’라는 표현이 강렬하게 느껴져서 나중에 찾아보았더니 2000년 발행 난쏘공 서문에 나온다.
“천구백사십년을 전후해 태어난 우리 세대가 어느 사이에 서른을 넘어서 ‘힘없이’ 무너지는 것이 평범한 직장인이 된 나의 눈에도 보였다. 물론 이것은 우리 세대가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선배 세대들의 경우를 보아도 젊은 시절에 인간의 진짜 척추라고 믿고 애써 간직하려고 했던 귀한 가치들, 그리고 개개인의 마음 속 소유인 아름다운 정신을 부양 가족 거느린 가장이 되며 밖으로 던져버리는 일은 흔했다.”(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서문 중 일부, 이성과 힘, 2000년)
□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극단을 만든 건가?
■ 그렇진 않다. 이런 연극을 만들고 싶어서 극단을 만들었다고 말하면 다 쉬울텐데... 이런 게 있지 않나. 살다보면 자기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을 묶어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제가 연극하면서 만나왔던 선·후배·동료들을 극단이라는 형태로 묶어야 하는 때가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극단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겠다는 건 전혀 없었다.
□ 젊은 시절부터 공연예술은 계속 했던 것인가?
■ 그렇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조용히 옆에 있던 연극 연출가 강승환 씨는 “연극은 여러 예술장르 중에서도 혼자 할 수 없고 뭉쳐야 하는 고유한 속성이 있는데. 그중 이렇게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연출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 남아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연출가 후배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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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화순1946'은 지난해 9월 초연 이후 화순탄광사건 70돌을 맞아 진행되는 광화문광장 대공연으로 1기를 마감하려고 한다. [사진제공-극단 경험과 상상] |
무대위 곧게 선 직립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 이제 ‘화순1946’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1년 동안 공연하면서 혹시 대본을 수정했거나 의미 있는 변화같은 것이 있었다면 소개해 달라.
■ 그냥 지금 하고 있는 공연에서는 처음 쓴 대본 그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조건에서 하는 것도 아니어서 사실 정신도 없다. 관계하는 사람이 많긴 한데... 말하자면 제작이나 홍보 같은 일을 해 본 사람들이 붙어서 하는 게 아니니까.
저도 연출이지만 이일 저일 하다보니 정신이 없어서 많이 손보거나 이러지는 못하고 있다.
어쨌든 이번 광화문광장 공연까지를 ‘화순1946’의 1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1기를 이렇게 마치고 다음에 다시 하게 될 때는 손을 보려고 한다. 지금은 손보고 어쩌고 할 상황이 못 된다.
□ 지금까지 관객들의 반응을 쭉 보아 왔는데...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해 달라.
■ 기억에 남는 반응이 너무 많아서...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마트 노동자인데 우연히 와서 공연을 보고 나서 보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고 하더라. 뭔지 모르게...
그리고 서울에서 초연, 앵콜, 재앵콜한 후 광주에 갔는데 서울에서 할 때 세 번 다 오신 분들이 꽤 있다. 광주까지 따라오신 분들도 여럿 있다.(웃음)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건 광주공연이었다. 민주노총 광주본부에서 초청해서 노동자들이 집단관람을 한 경우였다.
□ 광주공연도 실내에서 진행했나.
■ 광주 교육연수원이라고 있는데, 굉장히 크다. 가로 26미터로 객석이 1,000석 규모이다. 거기서 세 번을 좌석이 꽉 찬 상태에서 했다.
□ 그때도 출연배우는 50명이었나.
■ 이번에 100명으로 늘린 것이고 광주까지는 50명이었다.
□ 강승환 : 그 많은 배우를 어떻게 모집하나.
■ 이게 좀 황당한 것인데, 작년에 제 페이스북으로 ‘화순탄광사건을 가지고 뮤지컬을 만들 건데 할 사람들 연락달라’고 올렸다. 그리고 ‘페이없음, 변명도 해명도 핑계도 대지 않겠습니다’라고 토를 달았는데, 일주 일만에 50명이 마감이 되었다. 우리 극단 단원 절반과 페이스북으로 모집한 배우 절반.
이번에도 그렇게 올렸는데 지난 번에 했던 사람들이 40명, 새로 온 사람들이 60명 이렇게 해서 100명을 채웠다. 배우모집도 홍보도 다 페이스북으로 했다. 뭐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 소극장 공연에 이어서 광주 공연을 하고 광화문광장으로 나오게 된 건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 처음에 초연한 100석짜리 소극장, ‘오르다’는 무대 크기로만 보면 가로 7미터, 깊이 8미터 정도였다. 배우 50명이 들어가니까 너무 바글거릴 정도였다.
그 다음 앵콜 공연할 때가 250석 짜리 ‘엘림홀’이었는데, 무대 길이가 12미터로 늘어났다.
재앵콜을 한 ‘CTS아트홀’은 16미터에 450석 정도였다. 그리고는 광주로 가게 된 거니까 점점 커진 거다.
□ 강 : 스탠딩 뮤지컬이라는 표현은 처음 듣는데, 배우 동선이 없고 서서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가?
■ 스탠딩 뮤지컬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작년에도 많이 받았다. 배우들의 동선, 움직임이 없거나 한 것은 아니고 많이 서있기는 한다.
이 작품에는 합창이 많고 노래가 전체 31곡으로 많은데, 움직이면서 노래를 부르면 좀 듣기 싫기도 하고 해서 특정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주로 서있는다. 그렇지만 그래서 스탠딩 뮤지컬이라고 한 건 아니다.
□ 무대가 좁아서 등·퇴장이 어려워서 계속 세워두나?
■ (웃음)등·퇴장도 계속 하고 동선도 일사분란하게 한다.
□ 강 : 일반적으로 배우가 너무 많으면 동작을 역동적으로 연출하기에 불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섯 명이 부르나 열명이 부르나 노래의 효과는 비슷한데 좁은 공간에서 이렇게 규모를 키운 것은 어떤 이유인가? 또 배우들을 세우는(스탠딩) 특별한 의도가 있나?
■ 미학적으로 말씀드릴 것은 별로 없고, 저는 딱 뭐랄까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크게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은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사실 연출 입장에서는 피곤하고 감수해야 할 것이 많다.
어쨌든 예술적인 부분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연출이니까 연출 입장으로서는 잘 하는 사람 소수로 작품을 만드는 게 평가받기에는 제일 좋다.
그런데 무대 경험도 없는 어린 아이들까지 무대에 막 올리고 하면 보게 되겠느냐는 이야기도 많지만, 저는 연출가로 이름을 날릴 생각도 없다.
100명이 모이면 잘나가는 배우도 있고, 이제 학교 졸업해서 올라오는 친구도 있다. 저는 여러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면서 잘하는 사람들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것이 좋다.
실제로 작년에 첫 공연 올리고 난 후 그 배우들로 광주까지 가게 됐는데, 이 배우들이 자기들끼리 극단을 만들어서 따로 공연을 하고 아르바이트도, 촛불집회에도 함께 다니고 하는데 그런 모습이 보기에 좋더라.
□ 공연을 하면서 예술활동도 하고 조직사업을 하신 거네. 그럼 배우 모집할 때 오디션도 엄격하게 안하실 것 같은데...(웃음)
■ 오디션 없다. 노래 잘 못하면 뒷줄로 보내서 마이크 소리 안 빠지는 자리로 보내면 된다.
□ 그렇더라도 인원이 많다보면 배우 역할별로 관리(?)의 어려움도 있을 것 같다.
■ 작년에 첫 공연을 하고 나서 앵콜, 재앵콜, 그리고 광주까지 원래 계획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매번 여기까지가 끝이었고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이탈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 하더라.
원래 하던 멤버들이 그대로 다 갔다. 돈 되는 지방공연이 잡혀있던 배우들도 그 일정 다 조정해서 여기로 왔고 광고, 촬영 일정 들어왔던 것 다 빼고 우리 공연에 다 들어왔다.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공연을 했다. 그때 50명중에 40명 정도가 그대로 참여했다. 그 배우들이 친구들도 데려오고 특히 작년에 공연을 봤던 배우들이 많이 왔다.
오면서도 욕심을 갖고 오지 않는다. 배우가 100명이니까 1분짜리 대사를 줘도 100분이 꽉 차지 않나. 그러니까 내가 튀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 대사 한마디 없는 분도 많겠다.
■ 그렇다. 그러니까 다 튀는 건 포기하고 오는 거다. 대신 노래는 다 한다. 합창이 많으니까.
□ 배우들 소개해달라.
■ 제일 나이 많은 배우는 52살쯤 된다. 제일 어린 배우는 만 20개월 된 아기 배우가 있다.
작년에 만 8개월부터 연습을 해서 엄마하고 무대에 섰다. 엄마한테 안겨서 아빠하고 함께 무대에 올랐다. 엄마, 아빠는 둘 다 우리 단원이다.
엄마가 자기도 무대에 서고 싶은데 애기 때문에 고민하는 걸 보다가 그때 화순탄광에 애기가 없었겠냐며 같이 출연하라고 했다.
공연 중에 아기가 울기도 하는데 희한하게 울어도 되는 장면에서 울고 괜찮은 장면에서는 박수도 치고 그런다.
한번은 엄마가 무대 위에서 애기한데 젖을 물린 적이 있다. 조용한 장면에서 대사를 치고 있는데 애가 너무 칭얼대니까, 얼른 대사를 마치고 무대 뒤쪽으로 물러나서 애를 달랜 거다.
□ 그렇게 무대 위에서 계획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면 연출자는 답답하지 않나.
□ 강 : 보통 연출은 무대가 시작되면 자기 손을 떠난 것으로 생각하지 않나.
■ 저는 뭐 알아서 하라고 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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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1946' 2016년 9월8일 광화문광장. [사진제공-극단 경험과 상상] |
31곡의 유려한 노래로 끌고가는 100분의 감동
□ 노래에 대해 좀 물어보겠다. 굉장히 유려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31곡이 전부 창작곡인가?
■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뭐 이렇게 시작하는 광복절 노래를 빼고 30곡이 창작곡이다.
□ 그건 시대 배경이 그러니까 그럴 수 있겠다. 가사는 연출이 쓰시고 작곡은 한 사람이 한 건가?
■ 아까 연습실에서 노래 연습 도와주던 음악감독 이정아 씨인데, 저한테는 누나이다. 여러 편에 걸쳐서 공동 작업을 했는데 이번에 정말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
□ 뮤지컬 음악에 대한 별도의 수요도 있었을 것 같은데...
■ ‘내일은 꼭 오리라’라는 노래가 있는데, 우리 단원이 아닌 분들이 합동추모제에서 부른 경우도 있고 6.15합창단이 몇 번 집회에서 부른 적이 있다.
□ 음반작업은 계획이 없나.
■ 음반이야기는 되게 많이 나오는데 이게 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다.
□ 광화문으로 공연을 갖고 나오려고 했을 때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광화문에서 한 차례 공연을 하고 끝낸다는 게 너무 아깝지 않나. 공연 이후 계획은?
■ 전혀 없다. 광화문광장 공연까지 하면 1년인데 그동안 공연을 준비하고 할 때마다 무척 즐겁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지만, 정말 힘이 많이 들었다.
돈이 없는 상태에서 하니까 결국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 빚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실제 빚이든, 마음의 빚이든. 첫 앵콜 공연을 할 때 도와달라고 한 후 몇 번 반복해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계속 도움을 청하게 되었는데...더 이상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아마 이번 공연을 끝으로 기획하는 형하고 저하고 몇 명은 앞으로 2~3년간 빚을 갚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1년간 적자가 얼마나 되나.
■ 작년부터 지금까지 올 때는 많이 아꼈다. 스텝 쪽에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그걸 많이 아껴야 했고 대관료에 대한 압박도 있어서 공연할 때마다 6~7회 정도씩밖에 못 잡았다.
초연할 때는 저녁 8시 공연이 아니고 7시에 한번하고 9시에 한번 했다. 그러니까 7시에 시작하면 8시 40분에 끝나게 된다. 10분 만에 관객들 내보내면 뒷 공연 관객들이 8시 50분부터 입장하는 거다. 나중에는 관객이 나가는 동안 새 관객이 들어오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공연장을 5일 빌려서 이틀 리허설하고 3일간 6회 공연을 한거다.
그때는 티켓을 팔았는데 전석 매진이 되었다. 나중에 따져 보니까 배우들한테도 회차당 4만원 정도가 지급됐더라. 한번 공연에 6회차 공연을 하니까 20여만 원 정도 가는거다.
저는 아예 못줄거라고 생각했는데, 배우들도 나중에 받으면서 황당해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무대와 트러스, LED, 현장 카메라 중계 8팀, 조명·음향 장비, 발전차 2대 등 이렇게 하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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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조국은 우리를 구하지 않아도' 그날은 꼭 오리라. [사진제공-극단 경험과 상상] |
□ 무대 세우고 중계도 하나.
■ 무대 위에 서게 되는 LED 영상으로 공연장면들이 계속 상영된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를 하자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직은 할지 말지 잘 모르겠다. 녹화는 할 예정이다.
기술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도 있다.
□ 그렇게 되면 예산규모가 얼마나 되나
■ 하드웨어인 음향, 조명 등 장비만 해도 1억 원 정도. 연습기간 동안 배우, 스텝, 자원봉사자들의 식비 등을 최저 수준으로 잡아도 하루에 200만 원 정도씩 그냥 날아간다.
집중연습할 때 사용하는 연습실은 일주일에 300만원이다. 며칠 만에 2천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수준이다. 제값을 다 치른다면 2~3억원이 들어가는 일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유례없는 광화문광장 무대의 중압갑
□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마이크를 다 차게 되나.
■ 다 못찬다. 핀마이크를 20대, 무대 중간 중간에 확성이 잘되는 세우는 마이크를 20대 정도 설치할 예정이다. 한꺼번에 100명이 대사를 하는 경우는 없으니까 40대를 가지고 조합을 해서 운영할 계획이다.
□ 주변 잡음은?
■ 이게 고민이다. 음향 엔지니어들이 하는 얘기가 이 경우는 음향팀의 무덤이라고 한다.
악조건이 한둘이 아닌데, 가장 큰 건 차량소음이 너무 심하다는 거다.
그때그때 사용하는 마이크만 올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내려놓으면 주변 소음도 최대한 차단할 수 있긴 한데, 무대에서 배우가 대사를 할 때 누가 그걸 원활하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고민이다.
또 광화문을 허가를 내주면서 민원 때문에 여섯시 이전에는 메인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달려 있어서 리허설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7, 8일 이틀을 빌렸는데 첫날 셋업을 하고 그날 리허설을 끝내야 하는 상황이다.
8일에는 스피커를 사용하지 못하는 조건에서 리허설을 진행해야 한다.
스탭들이나 배우들이나 좀 불안 불안한 구석이 있다. 작전을 잘 세워서 스피커는 켜지 않고 모니터만 켜 놓은 채 리허설을 하든지 여러 방법을 짜내야 한다.
□ 만약 당일 비가 오면 핀마이크 사용이 위험하지 않나.
■ 핀마이크는 더 위험하니까 사용하면 안되요. 또 공연 전에 비가 내려도 잔디가 젖어서 앉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매우 나쁜 상황이다.
감동과 보람이면 적자도 메꿔지겠지
□ 문화예술 후원 프로젝트인 텀블벅에 ‘화순1946’ 계좌를 개설했는데...성과는?
■ 오늘(8월 24일)까지 200만원.(9월 2일 현재 2천만원 목표액의 21%인 426만원) 작년에도 후원을 받지 않았는데 텀블벅에서 진행하는 후원 프로젝트가 너무 많아서 그랬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못했다. ‘세월호’를 앞세워 벌이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두렵다.
우리는 화순탄광사건을 알리려고 하는 것 아니라 광화문광장에 정말 사람들이 많이 오시기를 바란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모시려고 하는데 공연장에 한 5,000명쯤 모이면 그분들에게 발언 기회도 좀 드리고 싶은데 너무 적으면 죄송하지 않나.
□ 단체 관람도 많이 있을 수 있지 않겠나. 추진위원들도 많이 모셨던데.
■ 추진위원들이 워낙 바쁜 분들이어서 어떨지는 모르겠다. 이름 주신 것만으로도 공신력은 생기는 것 같다. 뭐 적극적으로 해주시면 좋겠는데 ‘야 이거 어떻게 하지’라고 고민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더라.
추진위원들이 주로 진보단체에 계신 분들이기 때문에 특정 계기 행사에는 집중하지만 이런 공연에 뭔가 회원들과 함께 참여한다든지 하는 방식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다.
□ 아무래도 재정문제에 대한 고민이 많지 않나.
■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너무 막 잠이 안 오는 데, 이게 결국 돈 때문이다.
빚도 많이 져야 하고, 이걸 갚을 생각을 하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뒤척이다가 다음 날 마음을 고쳐먹기도 한다.
어쨌든 이 공연을 하는 목표가 있다. 하나는 무조건 그날 온 관객들이 큰 감동을 받게 하는 거다. 그러려면 우리도 잘해야 하고 관객도 많아야 한다.
두 번째는 이 공연에 관계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그 분들이 ‘아 내가 참 잘했구나, 내가 이 공연에 보탬이 됐어, 참 의미있는 공연이었어’라고 말할 수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가 적자를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목표가 잘되면, 즉 많은 관객들이 감동을 느끼면, 두 번째 참가하는 사람들이 보람을 느끼는 것도 되고, 세 번째 적자를 줄이는 것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연출자로서 공연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면 소개해달라.
■ 올해 1월 재앵콜 공연을 하던 ‘CTS아트홀’에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온 적이 있다. 사실 모시지 않았었다. 너무 마음 아파하실까봐.
그때 유민아빠는 ‘여러분들이 10년 뒤에 세월호를 지금 이 작품처럼 만들어 달라. 여러분들이라면 잘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며, 공연하던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이 이야기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왜 10년 뒤라고 했을까? 10년 뒤라고 한 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이야기를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다는 의향을 밝힌 것으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이 이야기는 책임감 같은 걸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저희가 막 잘하지는 않는다. 잘하는 사람은 많이 없다. 잘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거칠고 투박하고 그런 건데... 그런 마음 같은 게 보이는 게 아닐까 싶다.
아 참, 우리 배우 중에 요즘 한참 뜨는 효녀연합도 있어요. 어효은이라고...
다시 한번 '인간의 진정한 척추'
인터뷰를 마치면서 류성 연출자는 “저는 지금 모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요. 이 사람들, 이 집단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이날의 인터뷰도 연출의 이야기라기보다 배우와 스탭들을 대신해서 하는 이야기로 들어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사실 연극하는 사람들이 순수한 사람들이 많아요. 지금 모여 있는 사람들도 어차피 돈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고 보람있는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마음이 공연을 보러 온 분들에게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든 잘 전달됐으면 합니다.”
“세월호 이후에 연극하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세월호 농성장에도 매주 일요일은 연극인들이 당직을 서고 티내지 않고 많이 찾아갑니다. 예술인들의 이런 마음이 없으면 ‘화순1946’도 못했을 겁니다. 많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듯 류성 연출자는 배우와 스탭들을 사랑하고 관객과의 소통을 한 순간도 잊지 않는 좋은 연출자이고, 지난 1년간의 공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물한 검증된 연출자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진정한 척추’를 고민하면서 자신의 것을 소소하게 챙기려하지 않고 광장에서 우리 모두와 함께 가치를 공유하려는 큰 예술가이다.
9월 8일 오후 8시 광화문광장 ‘화순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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