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강원도 깊은 산 속에서 살다 보니 문득 도인이 된 듯 자연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면 생명의 움직임과 자연의 변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달은 너무 길고, 날은 너무 짧아 맞추기 힘들지만 거의 보름씩마다 마디가 있는 절기를 따라가면 흐르는 시간이, 바뀌는 생태계가 오감에 와 닿는다. 그 때에 맞추어 숲 속에 들어가면 꽃도 피었고 나비도 날고고 새도 노래한다. 몸이 근질근질해 창 밖을 내다 보다 계곡으로 나가면 꽁꽁 얼어붙어 있던 물 속 깊은 곳 얼음 밑으로 물 녹는 소리가 들리며 해빙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귀 기울이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뭇잎 떨어지고, 눈 오는 소리도 들린다. 말똥가리가 나타나고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 요란한 시점도 대략 그 때, 그 절기쯤이다.
» 눈덮힌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전경.
자연이 색을 바꿔 푸른빛 감도는 때가 대한
1월 20일은 24 절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기 대한이다.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춥다. 가장 춥다는 소한을 따뜻하게 보낸 게 아쉬운지 영하 15~17도의 맹렬한 추위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절정인 한파에 날선 칼바람까지 불어 몸으로 느끼는 온도는 족히 영하 30도는 되어 맨살이 나와 있는 모든 부분은 베인 듯 따갑고 바람이 불 때마다 뼈와 뼈가 부딪혀 덜덜덜 소리를 낸다. 추위와 함께 온 깨끗한 눈 덮인 흰색 비단길을 찬바람을 맞으며 걸어본다. 연구소 길 끝, 넓고 새하얀 눈밭이 깨끗한 하늘의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고요와 생명력을 품고 있는 깊은 자연 앞에서 추위로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진다.
지저분했던 땅위의 많은 것들을 감추어 주는 백설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땅 속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식물을 비롯한 많은 생명들에겐 온도와 습도를 유지시켜 주는 포근한 이불이 되기도 한다. 옷을 두텁게 껴입고 보온을 하거나 해바라기를 하며 몸을 덥힐 수 있는 인간과는 달리 그 자리에서 버틸 수밖에 없는 생물들에겐 쌓인 눈은 매서운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보온 덮개로 고마운 존재다.
» 추운 겨울의 얼어붙은 땅에서도 살아나는 민들레
절기를 따라가며 자연의 표정을 보면 대한은 가장 어둡고 짙은 회색의 동지에서 반환점을 돌아 조금씩 색을 바꿔 푸른빛이 감도는 때이다. 언뜻 보면 너무 춥고 꽁꽁 얼어서 아무 것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때를 맞춘 괴불주머니와 민들레는 이미 파릇파릇하다.
» 괴불주머니 나물
벌레라는 이름으로 천대받는데 얼마나 멋지면!
모든 생물이 조용히 몸을 사리는 시련의 계절, 겨울 한 복판에서 유독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만이 느긋이 혹한을 즐기며 쑥쑥 자라고 있다. 겨울에만 열리는 강원도 인제, 화천 축제도 추워야 제 맛이 나지만 추워야만 기를 펴는 붉은점모시나비는 빙하기 생태계의 비밀을 300만 년 동안 간직한 ‘빙하기 생물화석’이라 할 수 있다. 얼음으로 뒤덮여 모든 생물이 거의 다 죽었던 빙하기 이후 그린랜드의 사향소나 옐로우스톤의 아메리카들소처럼 영하 50도 안팎의 가혹한 선택에서 견뎌낸 멸종위기생물로, 국제자연보호연맹(IUCN), 멸종위기 동식물 교역 국제협약(CITES)에서 특별히 보호 받고 있다.
» 멸종위기 동식물 교역 국제협약에 따라 특별히 보호 받고 있는 붉은점모시나비.
‘빙하기 생물화석’으로, 멸종위기생물로 생물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미적 기준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급 대접을 받고 있다. Apollo butterfly. ‘태양의 신’이라는 신격화 된 호칭으로 불리고 있으니! 보통 곤충은 벌레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하찮게 천대받는 존재인데, 얼마나 멋지면 태양의 신으로 대접 받을까?
붉은점모시나비의 알은 반년 조금 넘게 약 190일을 알 속의 애벌레(Pharate 1st Instar Caterpillar) 상태로 있다가 한겨울이 시작되는 11월 말에서 1월 초에 알에서 나온다. 겨울에 살 수 있는 월동 시스템을 확인 한 후 알부터 실험을 시작했다. 알 속에서 꿈틀거리는 물체를 확인한 후 알 속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매일 메스와 핀셋으로 알을 잘라 고해상도 현미경, 전자현미경(COXEM. EM-30)으로 촬영, 관찰하였다. 3번의 반복 실험으로 9일만에 소화기관, 14일에는 눈, 16일째는 단단한 머리와 더듬이, 움직일 수 있는 가슴다리 3쌍, 배다리 4쌍, 항문다리 1쌍 등 모든 기관이 형성되었다.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애벌레로 발육하였고, 알 속 애벌레의 특별한 형태로 173여일을 지낸다는 사실을 2016년 초에 알아냈다.
창조적 즐거움 느껴 학자로서 큰 행운
왜 알이 아니고 애벌레로 그 오랜 시간을 좁디좁은 알 속에서 웅크리고 여름잠을 잘까? 부화 기간이 길어지면서, 붉은점모시나비의 알은 몇 달 동안 지속 될 더위나 가뭄 때문에 발육하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 미리 몸을 만든 후 버티는 작전을 사용한 것 같다. 알 속 애벌레는 과열과 건조한 여름을 피하고 추위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겨울을 나는 월동(越冬)이 아니고 여름잠을 자는 하면(夏眠)하는 독특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됐다. 영하 50도의 혹한에 적응하도록 태어난 붉은점모시나비가 40도가 넘나드는 여름의 건조하고 무더운 날씨는 고문과도 같을 것이므로 피하려고 진화 중인 셈이었다.
» 붉은점 모시나비의 일년 생활사
어떤 생물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천적을 피하거나 이용하기 위한 진화적 과정이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어떤 생리적 물질을 만드는지, 어떤 장소에 사는지 등 생물의 생활사를 완벽하게 알아내는 것은 생물학자에게도 매우 힘든 일이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규칙을 찾아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붉은점모시나비 연구가 계속되면서 단계가 높아지는 재미를 느꼈다. 멸종위기종이라 너무 조심스럽고 어려워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육, 관찰, 실험과 일상이 전혀 분리되지 않고 오랜 기간 연구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 환호하곤 했다. 끈질기게 현장 조사와 관찰을 하면서 기초 정보를 극복한 후에는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3년 간 재정적 도움으로 집중적인 심층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생명 현상을 이해하고 생태계 구성 원리를 알아가는 창조적 즐거움을 느낀다.
생물학적으로, 심미적으로 또한 생물자원으로서 가치를 발하는 위대한 곤충인 붉은점모시나비를 곤충학자로서 연구하게 된 일도 굉장히 큰 행운이다.
일장기 닮아서일까, 일본 삼척에서 밀반출하려다 걸려
빙하기 때 한반도에 붙어 있었던 일본이지만 일본에는 붉은점모시나비가 없다. 뒷날개의 선명한 붉은색 원형 무늬가 마치 일본 일장기와 비슷하여 갖고 싶은 생물이었을까. 2004년 5월 강원도 삼척에서 ‘붉은점모시나비’를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 적발 된 적이 있다. 보전지구에서도 겁도 없이 행해지는 일본인들의 밀반출이니 다른 지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일본인들의 전리품으로 수난을 당하는지 알 길이 없다. 일본의 고약한 수탈사가 생물에게도 행해지고 있다.
역사의식도, 윤리적 사고도 없는 일본인들이 밉다. 제멋대로 역사를 왜곡하고 단 한 번의 진심어린 공식적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에 오히려 말도 되지 않는 협상을 하자고 끌탕하던 박근혜정부가 더 한심하다. 영화 ‘귀향’에서 위안부 할머니의 영혼이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나는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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