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사나흘 남았는데 떡 주문은 얼마나 들어왔나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주문은 무슨... 떡 장사 25년 혔지만 이렇게 바닥인 설 경기는 첨 봐유. 작년만 혀도 설을 앞두고 시루떡 주문을 그런대로 받았는디, 올해는 간이 천리유. 작년의 절반도 안 되니께.(한숨) 떡 많이 먹으믄 젊어진다는디 물어보는 사람도 없네유..."
지난 24일 오후 전북 군산의 역전시장 떡 가게 주인(추정순·추양순 할머니 자매)과 나눈 대화이다. 두꺼운 방한복 차림으로 손님을 기다리던 추양순(70) 할머니는 기자의 질문에 토라진 표정으로 한동안 바라보더니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추 할머니는 "작년만 해도 설을 앞두고 매상을 200~300(주문 포함) 정도는 올렸는데 올해는 100만 원어치도 팔지 못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두 할머니와 나눈 대화는 10분 정도. 그들은 장기적인 불경기 원인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불거진 소비심리 위축을 첫째로 꼽았다. 그들은 김영란법도 거론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과 독선, 거듭된 공약 파기 등을 에둘러 비판했다.
"뛰는 물가보다 꽁꽁 얼어붙은 소비 심리가 더 걱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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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게 다가왔던 군산 신영시장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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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24일 오후 5시 10분 전북 군산의 신영시장 입구 모습이다. 이 시간이면 장 보러 나온 주부들과 노점상들로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던 시장 입구가 텅 빈 운동장처럼 썰렁하다. 골목 가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가게를 철시해서 더욱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간혹 보이던 구루마꾼도 보이지 않는다. "설이 코앞인데 이렇게 썰렁해서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기자는 2013년 2월에도 군산의 전통시장(신영시장, 공설시장, 역전시장 등)을 취재한 적이 있다.(관련 기사: <
"생선장시 40년에 이런 설은 첨 봐유!">)당시에도 올처럼 생활물가 상승과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설 경기가 영하 10도의 날씨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상인들의 한숨과 탄식은 그때와 비슷했으나 매상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해 심각함이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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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강복, 김정자 부부가 생선을 손질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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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장수 30년째라는 최강복(65) 김정자(61) 부부는 한목소리로 "올 매상이 작년의 절반도 안 된다"고 하소연. 노련한 솜씨로 명태포를 뜨던 김씨는 "점심 먹고 내내 공치다가 손님 주문으로 작업하고 있다"며 "건너편 채반에 말리고 있는 박대랑 조기가 오늘 아침에 널어놓은 것인데 지금까지 박대만 다섯 마리 팔고 그대로"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명태를 씻던 남편 최씨가 거들었다.
"날도 춥지만, 나라가 이렇게 시끌시끌하고 뒤숭숭하니까 사람들도 나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먹는 것도 줄이고 돈도 더욱 절약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입 달린 사람은 다 대통령을 욕해요. 최순실은 평생 징역 살아야 한다는 손님도 있어요. 박근혜는 아버지 덕에 대통령 됐으니 잘해야 했는데 오히려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있어요.
나이 먹은 사람들은 노령연금을 20만 원씩 준다고 해서 다 찍어주고, 젊은 사람들은 대학등록금을 절반으로 내려준다고 해서 박근혜를 찍었는디 이뤄진 게 하나도 없으니 누가 좋다고 하겠습니까. 거기다가 거듭된 거짓 해명으로 국회에서 탄핵까지 받았으니 할 말이 없게 됐죠."
최씨는 뛰는 물가보다 꽁꽁 얼어붙은 소비 심리를 더 걱정했다. 물가가 상승해도 희망이 보이면 소비 심리를 자극해서 경기가 풀리고, 물가가 하락해도 전망이 어두우면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지난 조금 때 생선을 잔뜩 구매해놨다는 최씨는 "올 설에는 내 돈(본전) 빼먹기도 힘들게 생겼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얼마나 팔았느냐는 질문에 버럭 화를 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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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선가게 주인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선어들을 바라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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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곶감을 구매한 손님이 값을 치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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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생선가게에서는 국내산 홍어(小) 한 마리에 3만 원, 도미(小) 3마리 2만 원, 꽃게(大) 1kg에 2만 5000원, 주꾸미 1kg에 1만 7000원, 왕새우(수입) 1kg에 2만 원, 갈치(大) 한 마리 2만 원, 아귀(小) 한 마리 1만 5000원, 준치(일본산) 한 마리 8000원, 오징어 3마리 1만 원, 상어(大) 한 마리 3만 원, 제수용 조기(상품) 10마리 5만 원, 박대(中) 10마리 3만 원, 병어(大) 한 마리 1만 5000원, 명태포(한 마리) 5000원씩 했으나 거래는 뜸했다.
한가하기는 공설시장 역시 마찬가지. 그래도 거래가 드문드문 이뤄졌다. 과일가게에 들른 손님이 곶감을 구매하고 값을 치르는 모습이 반가울 정도. "설이 며칠 남았으니 두고 봐야 알겠지만 올 대목장은 싸가지가 모가지"라며 탄식하는 아저씨도 있었고. 얼마나 팔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다 알면서 뭐하러 묻느냐!"라며 버럭 화를 내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선물용 멸치는 크기에 따라 달랐다. 한 상자(1.5kg) 기준으로 잔멸치(조림용)는 2만 5000원, 중간크기(안주용)는 1만 5000원~2만 원, 큰 멸치(국물용)는 1만 원~1만 2000원을 호가했다. 김은 최상품(돌김) 한 톳에 1만 8000원 일반 재래김은 7000~8000원이었다. 건어물상회 주인은 "멸치는 작년보다 50% 김은 100% 정도 올랐다"며 "과일이 비싸면 선물용 멸치를 많이 찾고 과일이 흔하면 멸치 인기가 떨어진다"고 귀띔했다.
해장국집 주인 "깍두기 담그기가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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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제수용 부침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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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가 몰고 온 달걀 파동에도 불구하고 제수용 부침개(명태, 표고버섯, 동그랑땡, 맛살, 대파 등) 가격은 1kg에 2만 원으로 4년 전과 비슷했다. 소비자의 필요에 따라 500g(1만 원) 구매도 가능했다.
제수용 생선찜은 품목에 따라 상승 폭이 달랐다. 종류별로 보면 조기는 7마리 1만 원에서 1만 5000원~2만 원, 장대는 1마리 5000원에서 1만 원, 박대는 1마리 5000원에서 3마리 기준 2만 원, 병어는 1마리 1만 원에서 1만 5000원~2만 원으로 4년 전보다 30%~100% 오른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제수용 반찬 가게를 9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임성진(39) 씨는 "편리해서 좋다는 손님은 조금씩 느는 추세이지만, 매상은 갈수록 떨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매상이 떨어지는 원인을 부침개 주재료인 달걀값 상승과 정부의 무성의, 대통령 탄핵사태 등을 지적했다. 이어 임씨는 "달걀값 올랐다고 양이나 크기를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난감해했다.
군산시 월명동에서 콩나물 해장국집을 운영한다는 김종권(60대) 씨는 "달걀값도 배로 올랐지만, 한 개 1000원 하던 무가 2500~3000원으로 뛰어 깍두기 담그기가 더 무섭다"고 말했다. 그는 "재룟값은 올랐지만, 해장국은 예전대로 5000원씩 받는데 타산이 안 맞아 값을 올리든지 문을 내리든지 해야 할 모양"이라며 "요즘엔 깍두기 찾는 손님이 더 많아졌다"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AI 사태로 한 판(30개)에 1만 2000원까지 치솟았던 달걀과 무를 제외하고 고사리, 도라지, 취나물, 시금치 등 각종 나물과 곶감, 밤, 대추 등은 4년 전 가격과 비슷했다. 제수용 사과와 배는 30%~50% 정도 올랐는데 씨알도 작았고 선도도 예전만 못했다.
상인들이 불경기 원인으로 꼽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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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경꾼도 보이지 않았던 역전시장 신발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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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가게, 옷가게 정육점 역시 손님의 발길이 뜸했다. 정육점 주인아주머니(50대) 설명에 따르면 돼지고기(동그랑땡 재료)는 한 근에 6000원, 국거리 쇠고기는 한 근에 2만 5000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이어 아주머니는 "작년 설 대목만 해도 그런대로 주문이 들어왔던 쇠고기 선물 세트가 올해는 거짓말처럼 딱 끊겼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가해서 놀러 왔다는 이웃 소금가게 주인 소이영(60대) 씨는 "정치가 이 모양 이 꼴이고 눈까지 와 불었으니 누가 장 볼 마음이 나겄소. 이건 대통령이 몰고 온 재난이지 대목이 아뇨. 왜냐믄 국민이 믿고 대통령 뽑아놓고 뒤통수 맞은 거 아니요. 긍께 대목이 아니란 말입니다"라며 가슴에 쌓인 불만을 털어놓았다.
상인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탄핵 정국), 김영란법, 조류인플루엔자(AI),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폐쇄 등을 불경기 원인으로 꼽았다. 취재 중 만난 상인과 손님은 20여 명. 놀랍게도 그중 불경기 원인으로 탄핵 정국을 꼽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김영란법, AI, 군산조선소 폐쇄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지방 소도시 전통시장 민심조차 '군산조선소 폐쇄'와 같은 지역 현안보다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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