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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석운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공동대표는 촛불시민혁명의 완수를 위해 2017년은 '성과를 내는 해, 승리하는 해'로 만들자고 역설했다. [사진-조천현] |
지난해 10월 29일 저녁 6시 청계광장에서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진행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시민촛불’은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촛불시민혁명’의 신호탄을 올린 대회였다.
누적된 모순은 마침내 질적 전환을 이루며 노도와 같이 광장을 집어 삼켰다. 그날 종로 보신각에서 유턴해 광화문 광장으로 진입한 시민들의 행진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엄동설한의 날씨도 적폐에 분노하고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발길을 돌리지 못했고 촛불을 끄지 못했다. 시민들은 스스로 광장의 주인임을 확인했으며, 초유의 1,000만 촛불은 거침없이 박근혜 탄핵을 관철시켰다.
광장의 민심을 잘못 판단한 야당은 끝없이 동요하고 타협했지만 주말 범국민촛불은 매번 그들을 돌려세웠다.
이제 꼭지를 따야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탄핵인용 결정이 나와야 하고 정권의 공범자, 부역자 등에 대한 인적청산, 적폐 정책 청산 등이 이어져야 한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대통령 선거가 어느새 일정에 올라있다.
13차까지 석달이 넘도록 범국민촛불이 진행되는 동안, 아니 그 1년 전부터 민중총궐기투쟁본부와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의 책임을 맡아 광장의 민심을 예리하게 주시해 온 박석운 공동대표를 만나 촛불의 현황과 앞으로의 과제, 전망 등에 대해 들어봤다.
24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1층 카페에서 만난 박석운 공동대표는 여전히 동분서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이재용 구속영장 실질심사, “딱 느낌이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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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려있다. 팩트가 너무나 명백하다." [사진-조천현] |
□ 통일뉴스 :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결정 일정에 대해 2월말 3월초를 전망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 박석운 공동대표 : 아마도 2월말, 3월초에 된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3월 13일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가 끝나는데, 그때까지 결정이 나지 않으면 탄핵심판이 굉장히 위태로워지고, 그렇게 되면 헌법재판소의 존립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헌재도 어지간하면 이정미 재판관 퇴임 전에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지노선을 3월 9일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사안 자체가 너무나 명확하다.
청와대 쪽에서 굉장히 천박한 수준의 지연작전을 쓰고 있는데, 증인이나 증거신청한데 대해서 아예 묵살했다는 소리는 안 들어야 할 테니까 일정 정도 수용해주는 등 신청인 쪽이나 피신청인 쪽의 균형을 거의 맞추어서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빨리 잡아 2월 중하순도 안될 것 없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2월말, 3월초가 더 맞는 것 같다.
□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한 것은 어떻게 보나?
■ 사실은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장 심사하는 날 아침에 퇴진행동이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 때 제가 모두발언에서 그날 영장담당 판사의 문제점에 대해서 짚었다. 딱 느낌이 오더라.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신동빈 롯데회장을 기각했고, 가습기 살균제 판매기업인 옥시 대표도 기각했다.
영장기각 사유에 대해 다른 것도 있지만 제일 큰 게 뇌물받은 사람 수사가 없었다는 것인데, 그건 뭐 형식 논리적으로 물어본다면 뇌물받은 최순실과 박근혜를 조사한 후 영장을 재청구하는 게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뇌물공여죄는 국민정서법상 피해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려있는 것인데, 한번 잔꾀를 써서 어쨌든 피해보겠다는 것이지만 분명한 건 다시 리턴매치가 있다는 것이다. 특검조차도 굉장히 눈치를 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마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팩트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이다.
□ 해가 바뀌면서 날씨가 굉장히 추워지기도 했고 13차까지 석달 정도 촛불이 진행되면서 피로감에 대한 우려가 일부 제기되는 것 같다.
■ 저는 뭐 올해 들어 신년인사를 ‘올해는 성과 내는 한해, 승리하는 한해가 되도록 합시다’라고 하고 있다. 이게 솔직한 저의 예상이고 기대이다.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까지 가게 한 그 굉장한 동력들이 추위에 약간 줄어드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는데, 저는 거꾸로 생각한다.
그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고 생각한다. 촛불집회에 1,000만명이 모인 과정을 보면, 어린애들 손잡고 가족단위로 나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왜 날씨가 너무 추우면 어린애들은 데리고 나오기 힘들지 않나.
굉장히 추웠던 1월 14일에는 13만 명 정도가 모였는데, 그날 사전집회에 참여해서 연설했었다. 그날 정원스님 영결식도 치렀는데, 영결식하고 사전집회할 때만해도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 그런데 오후 5시 30분 본 집회 시간이 되니까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십 몇 만명이 쫘악 나오는데, 실로 장엄한 모습이었다. 숫자는 제일 작았지만 그 추위에 모인 분들에게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그걸 보고 장엄한 물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월 21일은 눈이 내리긴 했지만 날은 좀 풀렸었다. 그땐 이재용 석방 등으로 다들 걱정들이 많아지지 않았나. 그 눈 내리는 날씨에 서울에서 두배 이상인 32만명이 왔다. 광장의 열기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는 거꾸로 이야기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 강추위에, 그 눈보라 치는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기적이다.
“백남기 농민 장례투쟁이 이번 촛불 직접적 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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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의 고 백남기 농민 부검 시도에 맞서 지난해 10월 23일 서울대병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박석운 공동대표는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촛불대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고 평가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21일 민중총궐기 투쟁선포식이 열렸는데, 눈보라가 휘날렸지만 조직이 움직인 것 치고는 다소 인원이 적었던 것 같다.
■ 본래 1월 21일은 중간 집결 정도로 하자는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촛불이 잦아드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있어서 조직대오들이 선봉대를 자처한 것이다. 작년 10월 29일 첫 촛불도 민중총궐기투쟁본부에서 시작한 것이다.
21일 민중총궐기 투쟁선포식에서 눈보라가 몰아쳤는데, 그날 마음속으로 ‘민중총궐기가 눈보라를 몰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대규모 집중은 2월 25일로 잡고 있다. 이날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에서 작심하고 조직대오를 발동해서 전국 집중해서 하자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자주 못하는 그런 측면이 있다.
촛불혁명이 명예혁명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나. 한편으로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점이 좋은 점이긴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원하게 뭔가 해결되지 않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굉장히 끈질기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기를 이어가는, 그래서 눈 부릅뜨고 고함을 계속 질러 가야 한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똑바로 하라. 그렇지 않으면 거센 규탄으로 똑바로 가게 하겠다’, 그런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 2015년 민중총궐기로부터 작년 촛불혁명으로 연결지어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 그렇다. 본래 시작은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괜히 주관적 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운동이 진화를 해 온 것이다. 특히 지난해 9월말부터 있었던 백남기 농민 장례투쟁이 이번 촛불을 만드는데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그에 앞서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투쟁으로 인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5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그렇게 살해가 됐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적반하장으로 부검까지 하겠다고 덤벼드니까 그걸 끈질기게 하여튼 역전을 시킨 거지 않나.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서 이번의 촛불대항쟁으로 발전해 간 것이다. 그래서 2015년 민중총궐기에서부터 시작한 항쟁이다.
이번의 과정을 보면 작년 10월 29일 3만명이 모인 첫 촛불은 주최 단위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였는데, 그날 보니까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를 한 거였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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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0월 29일 1차 범국민촛불부터 지난 1월 21일 13차 촛불까지 현장을 계획하고 지켜 온 박 대표는 매 상황을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진-조천현] |
□ 초기 상황이니까 그때 이야기를 좀 자세히 해달라.
■ 10월 24일 낮에 박근혜가 국회에 가서 개헌을 하자는 ‘굉장한’ 꼼수를 던졌다. 그대로 됐다면 야당이 대혼란에 빠지는 상황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JTBC에서 최순실 테블릿 PC를 공개하면서 치고 나간 거다.
그날 낮까지만 해도 박근혜 탄핵이나 퇴진이 실감이 나는 상황은 아니었다. 우리가 2015년부터 박근혜 퇴진을 제1구호로 내걸고 투쟁은 했지만 사실 실감이 잘 안나는 상황이었다. 작년 12월 9일 국회 탄핵가결 무렵 어느 한 라디오와 인터뷰를 하면서 “꿈이냐 생시냐, 요새 그런 생각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10월 24일까지만 해도 실감은 없었다. 29일 발표되는 것 보면서 '누적된 모순이 질적 전환을 이루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 갖고 된 일은 아니다. 세월호를 비롯해서 대선 부정선거, 국정교과서, 위안부 야합, 백남기 농민 살해 등 누적된 모순이 질적 전환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임계점을 만드는 그런 거 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29일부터는 구호가 아니라 실전상황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고 논의를 시작했다. 판을 넓게 짜야 되기 때문에 절충이 불가피했다.
처음에 시민단체들은 시간을 좀 갖고 가자, 발빠르게 움직이기 보다는 아래에서부터 동력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가야 된다는 입장이었고,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말하자면 지금 퇴진행동같은 기구를 만드는 것은 시간을 두고 하더라도 대중들의 솟구치는 분노에 대해서 즉각적인 호응을 해야 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 주 토요일인 10월 29일 촛불집회를 광장에서 잡은 것이다. 당시에는 시민단체들이 시간을 좀 갖자는 의견을 보였기 때문에 어쨌거나 선봉에서 치고 나가는 것도 있어야 길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최단위가 되었던 것이다.
그주 수요일(10.26)부터는 지금도 하고 있는 매일 촛불을 시작했다. 매일 촛불을 소규모로 계속 하면서 큰 규모 촛불을 토요일부터 시작한다고 밝히고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나선 것이다. 청계광장에서 집회를 했는데 그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줄은 몰랐다.
이때 종로통으로 행진을 하면서 보신각에서 올라가다가 우회전을 하기로 집회신고도 되어 있었는데, 시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광화문으로 가자’고 해서 유턴을 해버린 거다. 경찰이 막아도 물밀듯이 밀고 들어갔다. 그래서 3만여 명의 시민들이 광화문 사거리와 광장을 점령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건 사변적 사건이었다.
애초부터 준비하고 있던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등 조직대오보다 더 많은 미조직 일반시민들이 대거 참가하는 그런 뜨거운 열기를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 주에는 시국회의를 하고 11월 5일 확대된 주최 단위(퇴진행동(준))를 소개하면서 촛불집회 계획을 발표했다. 그날 백남기 농민 장례를 치르는 날이기도 해서 그렇게 진행을 했는데, 그날 20만 명을 훌쩍 넘는 인파가 몰렸다. 당시 주최 측은 5만명이나 올까 했었다. 굉장히 놀라운 기적이 만들어진 것이다.
“집회 참가인원을 100만 명으로 줄여서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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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17일 8차 촛불집회에서 박석운 공동대표는 “인적청산과 함께 적폐청산 활동에도 국민들이 함께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이후 비상시국회의를 한 차례 더 열고 복잡한 논의를 거쳐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만들어졌다. 내부에서 전국적인 체계를 갖는 국민운동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과 낮은 수준의 네트워크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할 수 없이 절충했기 때문에 단체 명칭이 그렇게 된 것이다.
퇴진행동은 11월 5일 지나서 출범할 당시, 일단 시작은 그렇게 하다가 상황의 발전에 따라서 추후 조직발전에 관한 논의를 한다고 되어 있었다.
11월 12일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의 지역에서 올라오는 버스만 15만 명, 수도권 5만 명 등 조직대오가 20만 명 이상에 일반 시민들이 많이 참석했기 때문에 40~50만명 되지 않을까 예상했으나 130만 명이 모인 놀라운 상황이 벌어진 거다.
그날 오후 4시에는 몇 달 전부터 준비해 왔기 때문에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집회를 하고 3차 범국민촛불을 저녁 7시30분에 광화문 광장에서 하는 절충적 방식으로 집회가 진행됐다.
계속 확대되는 추세를 보여야 한다는 우려가 제기돼 당시에는 집회 참가인원을 100만 명으로 줄여서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때 이미 촛불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전국 집중방식으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경우 1만 명 이상이 상경을 한 상태에서 남아있던 사람들이 조그마한 판을 벌였는데 여기 3만 5,000명이 모여들었다. 광주에서도 시민들의 촉구에 따라 당초 준비했던 문화행사가 1만 명 이상이 참여한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로 진행되기도 했다.
이 상황을 주목해서 11월 19일은 지역에서도 촛불집회를 만들자는 지침이 만들어 지고 전국으로 번져 나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퇴진행동 부산본부에서 자신감이 붙으니까 이날 10만 명 목표를 제시하고 광주 10만, 대구 4만명으로 불어났다.
11월 26일 140~150만 명에 이어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에 이상 징후가 보이자 12월 3일엔 사상 초유의 230만 명이 집결한 범국민촛불로 이어졌다.
박근혜 일당이 계속 연료를 부어 넣어준 상황에서 사람들은 상황이 잘못될까 봐 우려하면서 숙제하듯이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숫자가 조금씩 빠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규모는 유지가 되는 상황이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불가피하게 숫자가 조금 줄어들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눈보라치는 엄동설한에 이렇게 엄청나게 모이는 것 자체가 감동이고, 장엄한 민중의 물결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 전반적 적폐를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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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 규모의 시민사회단체 연대조직인 '퇴진행동'은 헌재의 탄핵결정이 나면 없어져야 하는데, 박 대표는 관련 논의를 현재 시작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사진-조천현] |
□ 퇴진행동이 내세우고 있는 투쟁방향을 다시 한번 설명해 달라.
■ 제일 중요한 게 인적청산이다. 퇴진행동의 이름을 정할 때도 박근혜가 아니라 ‘박근혜 정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공범자들과 부역자들 다 쫓아내고 청산해야 한다.
황교안, 김기춘, 우병우와 이재용, 신동빈 등 재벌총수들, 세월호 참사 책임자들, 백남기 농민 살해 관련 책임자들에 대해 인적 청산해야 된다.
그 다음 적폐 중에 긴급한 6대 현안을 연말까지 하려고 했으나 아직 해결이 되지 않고 2월까지 늘어지고 있는 상황인데, 그 사이에 다른 급한 사안들이 있지 않느냐 해서 6대 긴급현안 외에 ‘촛불의 명령’을 모으고 있다.
여기엔 △긴급 생존권 과제(최저시급 1만원, 손배가압류 금지, 밥쌀 수입 중단, 쌀값보장), △정치제도 개혁(18세선거권, 연동형 비례대표제, 결선투표제, 국민소환제, 국민발안제), △공안기구 개혁(고위공직자수사처 신설, 국정원을 해외정부처로 변경, 경찰 완전 개혁, 테러방지법 폐지), △위험사회에서 안전사회로(핵발전소 중단, 4대강 소통) 등이 수렴되고 있다.
□ 적폐 청산과 관련한 과제들의 집중도는 많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 사실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주말촛불은 계속 유지해 가면서도 한편으로 박근혜 한 명 쫓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 적폐를 고쳐야 한다는 점은 계속 강조해야 한다.
제일 아쉬운 문제가 촛불광장의 열기와 요구를 이른바 제도권으로 연결하여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이 문제에 대한 지렛대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정치권과 일정한 정도의 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내부에 분열요소가 될 수 있어 조심하고 있다. 분열요소는 최소화하자는 합의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한계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다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본다. 지금 뭐 대선판으로 그냥 가고 있지 않나.
□ 말씀하신 대로 아무래도 관심이 대선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 그래서 민중의 장엄한 요구와 염원을 현실화, 제도화시킬 지렛대 내지 연결고리를 잡아야 하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 야권 지도부와 면담도 갖지 않았나.
■ 몇 번 만나서 면담을 했는데, 압박하고 요구하는 정도이지 함께 뭔가를 합의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가서 말로 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광장의 민심으로 어떻게 강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과제이다.
□ 한때 민주당쪽에서 광장과 연계하는 기구를 만들겠다는 발표가 있었는데.
■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퇴진행동 내부에서는 정치권과 그렇게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걱정이 일부 있다. 사실상 민주당 쪽의 제안은 퇴진행동에서 거부한 셈이다. 일부 단위에서 그런 걱정이 있는데 그걸 논쟁거리로 삼으면 날 새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퇴진행동 차원에서는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 퇴진행동의 그런 방침은 여전히 유효한가
■ 그렇다. 그건 뭐 계속 의견을 고집하는 측이 있긴 있는데...
그렇지만 안 되는 일이라고 해서 그대로 놓아둘 수도 없지 않는 측면이 있어서 다양한 방안을 모색중이긴 하다.
예를 들어 6대 긴급현안에 대해서 정치권으로부터 확실한 약속을 받아 내자는 요구에 찬성하는 주요 핵심 단위들이 주축이 되어 2월 4일 광장에서 야3당 대표와 유력 정치인을 초청해서 ‘인적청산과 6대 긴급현안을 2월 국회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공개적으로 국민들에게 약속하라는 광장 토크를 하기로 했다.
다들 관심도 있을 테고 빨리 해야 한다는 공감도 높은 현안이기 때문에 긴급현안에 대해서는 대선전에 해결하라는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고 본다.
“올해는 성과내는 한해, 승리하는 한해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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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진행동은 1월 11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갖고 “1987년 시민이 헌법을 바꿨다면, 2017년 우리들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다짐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광장의 요구를 현실화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온라인으로 하는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가 있었고 직접 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광장의 원탁토론 등이 진행되었는데, 일반화에 어려움이 있지 않나.
■ 일반화가 잘 안되는 사안이다. 만민공동회도 하고 자유발언도 계속 하고 있다. 의견들은 모아지고 있다. ‘촛불의 명령’으로 의제를 모으고 있는데, 우리가 다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자료를 전국적으로 배포한 후 의견을 모아달라고 하는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 광장에서는 시민발언대로 의견을 모으고 온라인과 별도로 지역과 부문에서도 계속 의견을 모으자는 것이다.
인적 청산과 관련해서는 부문별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그 와중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올리는 댓글도 달고 인기투표도 할 예정이다. 많이 참여할 것으로 본다.
□ 앞으로 퇴진행동의 계획에 대해 설명해달라
■ 탄핵결정이 나면 퇴진시킨 것이니까 퇴진행동은 끝이 나는 것이고 그 이후에 진로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한 상황이다. 형식적으로는 과제가 끝이 나니까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가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느 수준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워낙 스펙트럼이 넓어서 의견들이 서로 다를 것으로 보이는데 지켜봐야 할 일이다.
□ 2,300~2,400여 단체가 결집한 사상 최대 규모의 단체인데, 이후 발전 방향은 어떻게 되나.
■ 처음 시작할 때는 1,500~1,600개로 출발했는데,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 와중에 지역본부가 만들어지고 부문에도 본부가 만들어진 곳이 많다. 상설조직으로 될 가능성은 없지만 국민운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최근 나오기도 했다.
1천인 선언을 추진하는 분들이 퇴진행동에 국민운동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고, 지금은 그런 걸 갖고 논의를 해야 되는 상황이다.
뭐 피할 수 없는 내용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모아지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소속단체들이 전체 다 찬성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설 명절을 맞아 시민들에게 한 말씀해 달라.
■ 거대한 촛불항쟁, 촛불시민혁명이 성과를 내서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이 오랜 질곡의 상황을 벗어나서 민주, 민생, 평화, 평등의 새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이번 설 명절 때 주변 분들과 열심히 토론해서 좋은 방향으로 여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하여튼 성과내는 한해, 승리하는 한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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