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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노동당 7차대회가 5월 6~9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5월 6일부터 9일까지 나흘간 36년 만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7차대회가 끝났다. 당대회 기간 동안 북한을 이끄는 조선노동당은 김정은 위원장의 개회사와 사업총화보고, 당대회 사업총화결정서 채택, 폐회사, ‘전체 인민군 장병들과 청년들, 인민들에게 보내는 조선노동당 제7차대회 호소문’ 등을 통해 1980년 6차당대회이후 진행된 사업을 총화하고 향후 추진할 노선과 정책을 제시했다.
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는 주체사상의 평가원칙인 ‘승리사관’에 따라 36년간을 “우리 당의 오랜 력사에서 더없이 준엄한 투쟁의 시기”였지만 “위대한 전변이 이룩된 영광스러운 승리의 년대”라고 평가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세계적인 반사회주의, 반혁명의 역풍”으로 “전대미문의 엄혹한 시련과 난관”을 맞았지만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통해 “사회주의 수호전”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제국주의의 고립압살책동이 강화되는 속에서도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지켜냈다는 점을 가장 큰 성과로 꼽은 셈이다.
총화보고는 ‘주체사상․선군정치의 위대한 승리', ‘사회주의 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세계의 자주화를 위하여', ‘당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등 총 5개 제목으로 나눠 결산한 후 향후 과업을 제시했고, 이 내용은 거의 대부분 사업총화결정서에 그대로 담겼다.
큰 틀에서 보면 2009년부터 2010년까지 김정은 후계자 시절 내부 토론을 거쳐 마련한 정책방향, 김정은 위원장이 2012년 4월 당중앙위 책임일꾼들과의 담화와 4월 15일 첫 공개연설에서 밝힌 기본방향, 그후 김정은 위원장 이름으로 나온 분야별 문건(‘노작과 담화’), 신년사, 현지지도에서 제시된 내용 등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후계자가 결정된 후 2009년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 당․정․군의 실무간부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토론과 협의를 거쳐 새로운 정책방향을 확정했다. 후계자가 강조한 두 개의 키워드는 '세계적 추세'와 '실리 추구'였다. 당시 정책 마련의 기준점은 1990년대 초반 김일성 주석 시절에 나온 마지막 정책노선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정책방향을 준비, 확정하는 단계에서 새로운 정책방향에 맞게 김정일 위원장은 북중 및 북러 관계를 개선하고,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접촉을 추진(이른바 ‘포괄적 대외전략’)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새로운 경제노선에 맞는 ‘본보기단위’를 집중 현지지도하고, 새로운 경제관리체계 시험, 경제특구 확대 등 ‘신경제정책’(실리사회주의의 전면화)의 토대 마련에 주력했다.
2012년 김정은 제1위원장 공식 승계이후에는 당․정․군에 ‘유일적 영도체계’를 확립해 나가면서 각 분야별로 김정은시대의 특색을 보여주는 정책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의 길'이란 3대 기본정책 방향을 계승하면서 시대적 환경 변화와 ’세계적 추세‘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었다.
이번 7차당대회에서 제시된 정책방향은 이러한 일련의 내부 논의와 흐름을 반영해 종합적으로 체계화 해 제시됐고, ‘사회주의 완전 승리’라는 장기적 목표 아래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의 추진목표로 내놓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북한의 노선과 정책을 파악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별로 제시된 내용을 세밀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당의 최고 강령은 김일성-김정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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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1>조선노동당 7차대회 노선. [자료사진 - 정창현] |
김정은 위원장은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 ‘조국통일’, ‘세계자주화’ 실현을 3대 과업으로 제시했다. 그 중에서도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가 노동당의 최고강령임을 재확인했다.
2012년 4월 6일 김 제1비서는 조선노동당의 지도사상을 김일성-김정일주의로 규정하고, 당의 최고강령은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라고 선포한 바 있다. 이것은 김정일 총비서가 후계자 시절인 1974년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명명하며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내세운 것과 유사한 행보였다. 북한에서는 후계자(계승자)가 선대 최고지도자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를 전 사회의 규범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업으로 설정돼 있다.
김 위원장은 사업총화보고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주체사상과 그에 의하여 밝혀진 혁명과 건설에 관한 이론과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라고 정의했다. 총화보고의 소제목이 ‘주체사상․선군정치’란 점이 주목된다. ‘김일성-김정일주의’가 김일성 주석이 창시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체계화했다고 하는 주체사상을 기초로 김정일시대의 선군정치를 새로이 포함시켜 ‘김일성-김정일주의’라고 규정한 셈이다.
북한 철학계에서 논란이 된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위상과 관계에 대해 2010년 개정된 당규약에서 처음으로 주체사상이 당의 지도사상이고, 선군정치는 “당의 기본 정치방식”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그는 또한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란 “모든 성원들을 참다운 김일성․김정일주의자로 키우고 모든 분야를 김일성․김정일주의의 요구대로 개조해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해 나간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인민대중의 자주성 완전 실현’은 공산주의 사회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주체혁명’의 마지막까지 견지하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투쟁 과업으로 ‘사회주의강국건설위업의 완성"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과제로 인민정권 강화와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을 거론했다. 김일성 주석은 “인민정권에 3대혁명을 더하면 인민대중의 자주성이 완전히 실현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두 가지 과제는 1980년 6차 당대회에서도 강조된 것으로 김 위원장은 “사회주의건설의 전 기간 수행하여야 할 계속혁명의 과업”이라고 설정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당대회에서 이 두 가지 과제에 전략적 노선으로 ‘자강력제일주의’를 추가로 포함시켰다.
특히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결정서는 “사회주의강국건설은 온 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기 위한 투쟁의 력사적 단계”이며 “사회주의의 기초를 다지고 사회주의 완전승리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현단계 국가목표로 제시된 ‘사회주의 강국 건설’이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라는 당의 최고강령을 실현하는데 1단계 과제이며, 이 과제는 ‘사회주의 기초’를 다지는 단계와 ‘사회주의 완전승리’를 이룩하는 단계의 연속적인 두 과정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전반적인 기조에서 6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당의 최종목표와 김정일시대에 내건 강성대국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즉 정치사상강국으로서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통한 일심단결의 강화, 군사강국으로서 정치군사적 위력의 강화, 경제강국으로서 과학기술 강국과 문명강국 건설 등을 정책방향으로 내세웠다.
혁명단계 설정 = ‘주체혁명위업수행의 도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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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2>북한의 혁명단계. [자료사진 - 정창현] |
김정은 위원장은 당대회 개회사에서 당면 시기를 ‘주체혁명위업수행의 도약기'로 규정하고, 이번 대회가 ’김일성-김정일 주의 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완성을 위한 투쟁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는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2000년대 초반 북한은 김일성시대를 ‘주체혁명의 선행시대’로, 김정일시대를 “혁명발전의 새로운 높은 단계”라며 ‘선군시대’로 명명한 바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일단 지금 시기를 ‘주체혁명위업수행의 도약기’로 규정한 셈이다. 앞서 이야기한 ‘사회주의 기초를 다지는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혁명단계별로 인민민주주의혁명기(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기)→사회주의의 이행 과도기(사회주의 건설기→사회주의 완전 승리)→공산주의 사회(낮은 단계→높은 단계)로 나눈다.
북한은 1958년 사회주의 제도가 수립된 후 사회주의 건설기를 거쳐 ‘사회주의 완전승리단계’에 진입했다고 보며, 1970년 5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완전 승리’를 공식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완전 승리’란 말 대신 당의 최종목표를 “인민대중의 자주성이 완전히 실현된 사회”라고 수정했고, ‘사회주의 완전 승리’란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현실의 어려움을 반영해 사실상 ‘혁명단계’를 낮춘 것이다.
그런데 이번 당대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사회주의 완전 승리’란 단어를 여러 차례 사용했고, 마지막날 채택된 호소문에도 “당 제7차대회의 모든 결정들을 철저히 관철하고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완전승리를 온 세상에 긍지높이 선언하자”라며 ‘사회주의 완전 승리’를 강조했다. 그만큼 내부적으로는 ‘선군시대’로 규정된 ‘사회주의 수호전’의 어려운 시기를 지나 새로운 경제 도약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 것이다.
즉 ‘주체혁명위업수행의 도약기’를 거쳐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 완전승리 단계’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결국 국가적 목표로 제시된 사회주의강성국가 완성은 곧 혁명단계론으로 보면 ‘사회주의 완전승리 단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당규약에 ‘경제 건설 핵 무력 건설 병진노선’ 명시
김정은 위원장은 ‘주체혁명위업수행의 도약기’에 견지해야 할 전략적 노선으로 ‘경제 건설과 핵 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제시했다. 2013년 3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채택한 ‘경제-핵 병진노선’을 재확인한 셈이다. 개정된 당 규약에도 이를 포함시켰다.
김 위원장은 ‘경제-핵 병진노선’이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응책이 아니라 우리 혁명의 최고 이익으로부터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전략적 노선”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병진노선이 “핵무력을 중추로 하는 나라의 방위력을 철벽으로 다지면서 경제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번영하는 사회주의 강국을 하루빨리 건설하기 위한 가장 정당하고 혁명적인 노선”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 건설을 위해서는 안보가 튼튼해야 하고, 안보를 위해서는 재래식 무기경쟁이 아니라 비대칭전력으로서 핵무력을 강화해야 하며, 이를 통해 핵보유국의 지위에서 미국과 협상해 평화협정을 체결해 평화체제를 마련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 단계 더 추론해보자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안정적인 평화체제가 구축될 때까지는 ‘최종적인 비핵화’에 나설 뜻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으로 해석하면 평화체제가 구축돼 북한 입장에서 안보 우려가 해소되면 최종적으로 비핵화에 나설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병행해서 추진하자는 제안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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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년만에 열린 조선노동당 7차대회 전경.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경제-핵 병진노선’에 의거해 김정은 위원장은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 개선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의 3대 지표인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 ‘경제강국’ 중 “정치․군사강국의 지위에 당당히 올라섰지만 경제부문은 아직 응당한 높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다.
그는 낙후된 경제 현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경제전반을 놓고 볼 때 첨단수준에 올라선 부문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부문은 한심하게 뒤떨어져있으며 인민경제 부문들 사이 균형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선행부문이 앞서 나가지 못하여 나라의 경제발전에 지장을 주고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북한을 방문해 보면 선전과 달리 뒤떨어진 분야가 많다는 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김정은 위원장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의 기본목표도 “인민경제 전반을 활성화하고 경제부문 사이의 균형을 보장하여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으로 설정했고, 5개년 전략의 철저한 수행을 강조했다. 당대회에 앞서 이미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이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 위원장은 “사회주의 경제강국을 성과적으로 건설하기 위하여서는 인민경제 발전을 위한 단계별 전략을 어김없이 집행해나가야 한다”고 발언해 당면한 5개년 전략 외에 더 장기적 ‘단계별 전략’의 수립도 시사했다.
그러나 4, 5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6개년 또는 7개년 인민경제계획이나 6차 당대회에서 나온 ‘사회주의 경제건설 10대 전망목표’보다 구체적이지 않다. 구체적 목표치보다는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정책방향을 제시하는데 그쳤다. 국제적 경제제재 속에서 목표 달성이 불확실하다고 봤을 수 있다. 다만 내각에서 수립한 5개년전략에는 더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번 당대회에서는 경제 건설을 위한 전략노선을 “자력자강의 정신과 과학기술을 틀어쥐고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정보화, 과학화를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며 인민들에게 유족하고 문명한 생활조건을 마련하여 주는 것”으로 설정됐다. 언급된 기본방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인민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자립적 민족경제의 물질 기술적 토대를 튼튼히 다지고 경제강국 건설의 도약대를 마련”한 만큼 이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국가의 경제조직자적 기능을 강화하고 ‘우리 식 경제관리방법’을 전면적으로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내각책임제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전반적 경제사업을 내각에 집중시키고 모든 경제부문과 단위들이 내각의 통일적인 작전과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규율과 질서를 엄격히 세울 것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내각 총리를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고, 당과 내각의 경제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곽범기 전 경제비서, 로두철 내각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 오수룡 계획재정부장을 모두 정치국위원으로 선출했다. 내각책임제를 실질적으로 이끌 경제관료를 중용한 것이다.
그리고 경제관리개선의 핵심인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의 확립을 강조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공장, 기업소, 협동단체들은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의 요구에 맞게 경영전략을 잘 세우고 기업활동을 주동적으로, 창발적으로 하여 생산을 정상화하고 확대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2년부터 지속적으로 경제관리방식의 개선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기업경영방식과 협동농장의 포전담당제 도입이 시범적으로 실시됐다.
특히 김 위원장은 2014년 5월 30일 당․국가․군대기관 책임일군(간부)들과 진행한 담화 ‘현실발전의요구에 맞게 우리식경제관리방법을 확립할데 대하여’(5.30담화)를 통해 새로운 경제관리방법으로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제시한 바 있다. 당시 김 위원장은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공장, 기업소, 협동단체들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에 기초해 실제적인 경영권을 갖고 기업활동을 창발적으로 해 당과 국가 앞에 지닌 임무를 수행하며, 근로자들이 생산과 관리에서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게 하는 기업관리방법”이라고 정식화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당대회에서 경제개혁 조치가 발표되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감을 드러냈지만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가 전면적으로 확립, 실시될 경우 북한 경제운영방식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통해 2002년 7월 시행된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조치’보다는 더 포괄적인 ‘경제개혁’이 단행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셋째는 과학기술강국에 기초한 경제건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과학기술강국’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사회주의강국건설에서 오늘 우리가 선차적으로 점령하여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제시했다. 과학기술이 경제강국건설에서 기관차의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하며, 이를 통해 경제의 현대화, 정보화를 달성하고 자강력을 증대시킨다는 구상이다. 북한은 2012년까지 경제발전에서 차지하는 과학기술발전의 기여율을 30%로 올리겠다는 구상을 발표한 바 있어, 5개년 전략에서는 이보다 더 높은 수치가 제시됐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 위원장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 수행기간에 추진해야 할 방향을 분야별로 제시하면서 전력문제 해결과 식량 자급자족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전력문제 해결이 5개년전략수행의 선결조건이며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의 중심고리라고 규정하면서 “당에서 제시한 전력생산목표를 반드시 점령”할 것을 주문했다.
이를 위해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포함해 대규모 발전소와 중소형 발전소 건설, 풍력과 조수력․생물질과 태양에네르기에 의한 전력생산, 발전소 생산공정 및 시설 정비보강, 발전설비 효율 증가와 전력생산 원가 체계적 절감, 국가적 통합전력관리체계 구축, 송배전망 개건보수 등을 제시했다. 다만 전력생산목표를 수치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전력 부족이 경제건설에서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식량문제와 관련해서는 식량의 자급자족 실현을 강조하면서 “식량생산을 지속적으로 늘이며 농업을 세계선진수준에 올려 세울 것”을 요구했다. 북한은 2013년의 식량생산량이 566만t이라며 식량생산량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벨라이 데르자 가가 FAO 북한사무소 대표도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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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진핑도 뜨끔한 중국의 부정부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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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연구소 곽동기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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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입력: 2016/05/13 [20: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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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도부의 부정부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지금껏 19세기 청 왕조나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부정부패로 민중의 지지를 잃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젠 중국공산당이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중국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중국 국민들은 예로부터 부패한 공산당 지도부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그 불만을 정치에 활용하였습니다. 시진핑은 자신이 국가주석에 오르고 난 후인 2014년, ‘부정부패 척결’을 선포하였습니다. ‘부정부패’를 내세워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무산대중의 정당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건드리기만 해도 각종 부패사건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재벌 뺨치는 시진핑 가족
그런데 부패척결의 과정에서, 급기야 시진핑 주석도 뜨끔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시진핑 주석의 친인척들에게서도 역시나 비리의혹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시진핑 주석의 큰 누나인 치차오차오(齊橋橋)와 매형인 덩자구이(鄧家貴)는 시진핑 주석이 상무위원에 오른 2007년부터 막대한 재산을 긁어 모았습니다. 이들은 2007년 12월 한 국유은행과 제휴해 투자회사인 베이징 친촨다디(北京秦川大地)를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는 처음부터 시진핑의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치 부부로부터 지분을 인수한 금융인 샤오젠화(肖建華)의 대변인은 매입 당시에도 “이 매각은 가족(시 주석)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공산당 상무위원인 시진핑은 수입에 변화가 없는데 상무위원 동생을 둔 누나는 천문학적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었을까요? 비리의혹이 파다하게 퍼진 것입니다.
이들은 그저 한 두 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 시진핑 일가의 재산규모는 재벌급입니다. 2012년 6월 블룸버그 통신은 치 부부 재산까지 합친 당시 시 국가부주석 일가의 재산규모가 3억7,600만 달러(약 4,310억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 재산이라면 한국의 재벌총수에 비교될 만합니다. 계급철폐를 내걸었던 중국공산당이 후대에 와서는 투자회사를 설립하는 것 자체가 충격입니다. 그런데 시진핑 가족들이 독점자본을 능가하는 천문학적 재산을 축적했다는 것은 중국 사회주의 혁명에 목숨을 바쳤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지하에서 뒷목잡고 쓰러질 반전입니다.

시진핑 가족은 이후 행각도 의심스럽습니다. 큰 누나인 치 부부는 막대한 재산이 논란이 되자 재산을 차례로 처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재벌 뺨치는 재산이 동생의 권력가도에 부담을 준다고 봤던 것입니다. 치 부부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도 부동산과 광산을 중심으로 10개 회사에 투자했던 자산을 처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진핑 일가의 천문학적 재산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에게 좋은 먹잇감으로 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즈>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보도를 인용해, 덩자구이가 2008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부동산 개발 관련 유령회사를 세워 지분 50%를 소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2012년에 <블룸버그>가 지목됐던 홍콩 고급주택 중 상당수도 여전히 치 부부가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돈이 넘쳐나는 중국 당 간부
그런데 중국공산당에서는 시진핑의 누나만 천문학적 부를 쌓아올린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 간부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것이 하나의 보편적 유행이었습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지난 1월 폭로한 내용에 따르면 2000년부터 조세회피처 법인 설립을 통해 중국에서 해외로 유출된 자산은 최대 4조 달러(약 4270조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중국이 약 4000조원, 그러니까 우리나라 10년 치 예산이 넘는 자금을 해외로 빼돌린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폭로된 명단에는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의 아들 원윈쑹(溫雲松)이 나오고 중국 8대 혁명 원로의 자손인 푸량(傅亮) 등이 포함됐다고 합니다.
일례로 중국공산당 최고위직인 공산당 상무위원에게 16년형이 선고되기도 했습니다. 2015년 6월 11일, 상무위원 저우융캉은 부인과 아들, 측근 등이 1억 2977만 2113위안(약 232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중국 법원은 판결문에서 "저우융캉이 받은 뇌물 액수가 매우 크고 직권 남용, 기밀 누설 등의 죄목이 매우 무겁다"며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선고한다"고 발표했다가 16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 ▲ 부패혐의로 법정에 선 저우융캉(주영광)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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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융캉은 베이징 석유학원 출신으로 석유공업부 부부장, 석유천연가스공사 사장, 국토자원부 부장 등을 역임하다 장쩌민 전 주석의 도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저우융캉의 비리 구속사건을 두고 시진핑의 장쩌민계 저격이라고 합니다. 시진핑 주석이 자신의 경쟁자들을 비리혐의를 빌미로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시진핑은 실제로 지난 1월 12일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정치적 야심이 큰 이들은 “살아 중난하이(中南海·중국 최고지도부 거처)에 들어가고 죽어 바바오산(八寶山·중국의 혁명열사 묘지)에 들어가겠다”고 거들먹거린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발언은 저우융캉(周永康)의 핵심 측근인 장제민(蔣潔敏) 전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주임이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부패척결인지 권력투쟁인지 아리송한 장면입니다. 이것도 중국공산당 내부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푹푹 썩었기 때문에 가능한 현실입니다.
중국의 혁명 원로 중 하나인 보이보(薄一波)의 아들인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는 엽기적 행각으로 중국민중의 지탄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보시라이도 처음에는 충칭시의 부정부패를 적발하고 조직폭력 범죄자를 처형하는 실적 공개에 앞장섰다고 합니다. 무려 1500명의 부패사범을 적발하여 인기를 끌었지만, 알고 봤더니 보시라이 자신이 부패의 몸통이었습니다.
| ▲ 부패혐의로 재판을 받는 보시라이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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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충칭시의 한 호텔에서 보시라이 일가와 친밀한 닐 헤이우드(Neil Heywood)가 사망하였는데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가 살해에 관여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시라이 부부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불법 자금을 조성하고 해외로 빼돌렸다는 의혹도 제기되었습니다. 아울러 보시라이가 100명이 넘는 내연녀를 두었다는 사실도 공개되었습니다.
아버지 보이보는 자본의 착취를 끝장내기 위해 한 생을 바쳤는데, 그의 아들은 100여명의 정부를 거느리고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민중의 피땀을 해외로 빼돌리는 민중의 적이 되었습니다. 지하에 있는 중국공산당 1세대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사회주의에 먹칠한 중국공산당
겉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모택동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중국공산당이, 실제로 그 내부가 푹푹 썩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중국사회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중국경제는 중국민중의 삶보다 자본의 성장이 중시되는 자본주의 경제제도로 완전히 정착되었습니다. 사회주의라던 중국사회에서 노-사 갈등이 다시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중국이 사적소유를 전면적으로 용인하고 더 엄중하게는 부의 세습마저도 인정해 불로소득, 스스로 일하지 않고 남의 땀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용인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중국이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질서를 온전히 받아들였다면, 정치에서도 다당제를 받아들여 상호간의 견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경제제도는 자본주의이면서 정치제도는 공산당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일당독재를 하고 있습니다. 민중보다 자본이 우대받는 사회에서 독재는 그 당이 제 아무리 자본을 배척하는 공산당이라고 하더라도 필연코 부르조아 계급의 독재로 귀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적어도 부정부패에 있어서만큼은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며 비판하였던 청 왕조나 중화민국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는데 정치적 독점이 지속되면 그 권력은 천문학적 자금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천문학적 자금을 경계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결국 사회주의 정권에서는 집권당이 민중을 위한 정치, 민중을 위한 권력을 구축하느냐가 ‘사회주의 혁명’을 지속하는 핵심요인이 됩니다. 나라의 중앙권력이 민중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본을 쫒는 정치를 하는 순간, 그 나라가 제 아무리 사회주의를 표방하더라도 부의 양극화는 시작되고 민심은 집권당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시진핑 주석은 또한 민중을 위한 정치에서 이탈해 부정부패 척결을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이 향후 끝없는 권력투쟁으로 치달을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진핑의 경쟁세력들은 향후 재벌 뺨치는 자금을 긁어모은 시진핑의 누나를 조준할 것입니다. 물론 시진핑도 누나를 지켜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으니 앞으로 권력에 더욱 집착할 것입니다. 결국 ‘중국’은 공산당 간부들이 개인 치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순간 국기만 붉은 색일 뿐, 하는 행색은 자본주의 정당과 차이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중국공산당의 부패는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운동에도 일정한 장애를 조성합니다. 지난 1991년,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붕괴하자 세계인들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시도는 죄다 실패”하였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마찬가지로 2016년, 거대한 중국이 부정부패로 몸살을 앓자 국제적으로 “사회주의는 죄다 부패”라는 인식이 갈수록 확산될 판입니다.
중국이 부정부패를 제대로 척결하려면 해법은 한 가지입니다. 중국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이 청렴해지고 나라의 모든 재부가 중국의 진정한 주인인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제공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대변화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의 초심으로 돌아갈 때 가능합니다.
부패한 중국공산당 간부가 권력을 독점하고 부패한 중국자본이 중국경제를 거머쥔 국면이 지속된다면, 언젠가 중국공산당도 청 왕조와 중화민국처럼 분노한 민중에 의해 붕괴될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법칙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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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여론조사 불신여론이 깊어지면 국가와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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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두만 | 2016-05-14 09:4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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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들이 여론조사 문제점을 작심하고 심층보도를 통해 퇴출의지를 보이고 있다. 특히 중앙일보는 지난 5월 6일 1·4·5면에 대대적으로 이 문제를 보도하면서 칼을 빼들었다. 중앙일보만이 아니다. 아래 표에도 나타나지만 최근 많은 언론들도 이를 간과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번 총선을 통해 여론조사 회사의 ‘여론조사라는 이름의 정치행위’에 대한 폐해가 심각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여론조사로는 민심을 알 수 없다’는 심리가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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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민간 여론조사에도 안심번호 도입 추진 공감대 연합뉴스 - 2016. 5. 11.
“여론조사 응답률 낮은 경우 ‘편향 오차’ 커질 수 있어” JTBC - 2016. 5.15
응답률 1%대 ‘속 빈’ 여론조사, 논란에도 버젓이 공개 JTBC - 2016. 5.15
[단독] “여론조사 응답률 10% 못 미치면 공표 금지 추진” 중앙일보 - 2016. 5. 11.
그 업체 알고 보니선거용 ‘떴다방’ 시사IN - 2016. 5. 11.
“여론조사 업체 자격 강화…선거철 저가 ARS·떴다방 막자” 중앙일보 - 2016. 5. 11.
“이대로 놔두면 2년 뒤에 또 틀린다” 시사IN - 2016. 5. 11.
양정열 한국조사협회 회장 "집전화 의존한 조사는 한계" JTBC - 2016. 5. 11.
4·13 이변 다시 한 번?…대선은 총선과 다르다 한겨레 - 2016. 5. 10.
[정동칼럼]여론조사는 ‘공공재’이다 경향신문-2016. 5. 10.
[뉴스룸 레터] 여론조사도 구조조정 중앙일보-2016. 5. 11.
20대 총선 여론조사는 왜 실제 표심 반영 못했을까 미디어오늘-2016.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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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여야 3당 지도부 또한 부정확한 선거 여론조사의 폐해를 막기 위해 20대 국회에서 공직선거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더민주 우상호 원내대표는 11일 “20대 총선처럼 부정확한 여론조사의 폐해가 극심한 적이 없었다”면서 “당 차원에서 여론조사 개혁을 위한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고, 신뢰도가 낮은 여론조사 결과는 공표를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그 스스로 지난 2012년 8월 ‘정당 지지도나 당선자를 예상하는 여론조사 응답률이 10% 미만인 경우 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 포함된 선거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으며, 현재 이 법안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그러나 현행법에는 여론조사의 조사방법·표본크기·응답률을 조사 결과와 함께 공개하도록 하고 있지만 조사 신뢰도와 직결된 응답률 수준을 제한하는 규정은 없다.
그런데 지난 총선 당시 우후죽순처럼 하루 단위로 나온 각종 여론조사(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보고된 조사들)에 따르면 평균 응답률은 8.9%로 10%에도 못 미쳤다. 실제 통계학자들이 신뢰도를 담보할 수 있다며 권장하는 평균 응답률은 20%다. 하지만 중앙선관위 자료에도 나타나듯이 우리나라 여론조사는 이 권장 평균치에 절반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더민주 이종걸 19대 국회 원내대표도 “부정확한 여론조사는 ‘통계적 흉기’나 다름없다”면서 “신뢰성·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론조사기관 인증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중앙선관위 신우용 법제과장은 “자유주의적 전통이 강한 프랑스조차 국가 권력이 개입해 별도의 여론조사심의위원회를 두고 선거 여론조사의 공정성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면서 “미국은 여론조사협회에서 자율적으로 응답률이 30%가 넘지 못하면 발표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지난 총선 당시 깃발을 날렸다가 참패한 여론조사 회사들은 지금 국회의 규제법안 제정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리고 리얼미터의 이택수 대표는 공식적으로 여론조사 불확실성을 사과하면서 국회에 “여론조사 회사도 휴대전화 안심번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제도 때문만일까? 휴대전화 안심번호가 도입되면 여론조사 회사의 ‘여론조사란 정치행위’를 막을 수 있을까? 아래의 분석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특정 여론조사 회사의 특정인 특정당에 대한 선호 형태가 매우 분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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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한국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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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미터 응답률 5%대(유무선 통합 자동응답) 조사 결과 : 문재인 26.2%, 안철수 17.6%, 오세훈 12.9%로 문재인 1위, 갤럽 응답률 24%(무선전화 전화면접)조사결과 : 안철수 20%, 문재인 18%, 오세훈 9%로 안철수 1위… 양쪽 모두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각각 ±3.1%p로 발표…
이 두 사례는 가장 최근인 5월2주차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등답표다. 그런데 이 조사를 비교하면 리얼미터의 조사는 문재인만 유별나게 특출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리얼미터 조사의 안철수 지지율은 17.6%, 갤럽 조사의 안철수 지지율은 20%이므로 리얼미터와 갤럽이 발표한 표본오차를 감안하면 안철수의 국민적 지지율은 20%대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리얼미터의 오세훈 지지율은 12.0% 갤럽 지지율은 9%라면 이 또한 각각 오차범위 안에 있으므로 오세훈의 국민 지지율은 10%대가 정당한 평가다.
그런데 문재인에 이르면 리얼미터의 조사 신뢰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즉 리얼미터의 문재인 지지율은 26.2%, 갤럽 지지율은 18%다. 양측 모두 표본오차가 ±3.1%라고 발표했으므로 이 두 수치는 표본오차를 벗어나서 리얼미터의 지지율이 높게 나온다.
이뿐 아니다. 리얼미터 조사에서 정당 지지율도 더불어민주당이 타당에 비해 훨씬 후한 수치가 나타난다. 리얼미터 5월2주차 여론조사의 정당 지지율은 새누리당 31.0%, 더민주 28.6%, 국민의당 20.8%였다. 그런데 갤럽의 같은 기간 정당 지지율은 새누리당 31% 더민주24%, 국민의당 21%다.
이를 분석하면 새누리당은 31%로 갤럽과 리얼미터가 갖고 국민의당은 0.2% 차이이므로 사사오입이면 21%로 갖다. 하지만 더민주 지지율은 리얼미터 28.6% 갤럽 24%로 리얼미터에서 4.6%가 후하게 평가되어 있다. 이 때문에 리얼미터의 조사로만 보면 새누리와 더민주가 오차범위내 1,2위를 다투고, 국민의당은 멀찍이 3위로 처진 형국이지만 갤럽조사는 새누리당이 오차범위 밖 1위이며, 2,3위를 오차범위 안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경쟁하고 있다. 결국 이 두 회사의 여론조사에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가 확실히 문재인과 더민주에게 후함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응답률 10% 이하의 여론조사는 신뢰성이 없으므로 공표금지를 해야 한다는 법안이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의 대표발의로 제출되어 있다.
그런데 리얼미터의 조사 응답률은 조사기간 3일 평균이 5.56%(9일 5.4%, 10일 5.5%, 11일 5.8%)로 이 법의 규제를 받으면 공표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리얼미터는 어떻든 현재는 법의 규제 대상이 아니므로 평균 5%대 응답률 조사결과를 매주 발표하고 있다.
이에 더민주 지지층은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 그 조사표를 최대한 활용,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으로 정치적 코너를 벗어나곤 한다.
그렇지만 이런 평가를 받는 여론조사 회사는 그 스스로 자신들의 신뢰성을 갉아먹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업은 소비자의 신뢰가 최우선인데 소비자로부터 편파적이란 평가와 비판을 받는다면 그 생명은 길 수 없다. 그런데 어찌 보면 리얼미터는 아예 이런 비판도 감수하려는 것 같다.
그래서다. 이런 정치행위, 이제 멈춰야 한다. 법의 규제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기업 양심으로라도 이제는 멈춰야 한다. 그것이 기업의 장래로도 나라의 장래로도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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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3 17:54:57
[살림 이야기] 몬산토 반대·①
'몬산토반대시민행진(March Against Monsanto: MAM)'은 다국적기업 몬산토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풀뿌리운동으로, GMO와 글리포세이트에 기반을 둔 제초제의 위험성을 알리려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다. 2013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2015년에는 52개국 400여 개 도시에서 열렸다. 한국에서도 2013년부터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몬산토반대시민행진을 처음 기획한 사람은 주부이자 두 딸의 엄마인 타미 먼로 커낼 씨다. 그가 살던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2012년 11월 GMO를 포함한 식품에 GMO 여부를 표기하도록 하는 '제안 37'이 주민투표에 붙여졌으나 부결됐다. 그 과정에서 몬산토가 제안 37이 통과되는 걸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썼고, 그 일이 커낼 씨의 "눈을 뜨게 했다." 커낼 씨는 두 딸을 위해서라도 몬산토에 반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2013년 소셜미디어를 통한 캠페인으로 전 세계의 공감을 얻었다. 그 결과 2013년 5월 25일 전 세계 330여 개 도시에서 몬산토반대시민행진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2014년에는 40개국 400여 개 도시에서 시민행진이 열렸다.
▲ 세계 각지에서 펼쳐진 몬산토반대시민행진 모습. '씨앗은 몬산토가 아닌 자연의 것', 'GMO에 반대한다', '몬산토는 먹을거리에서 떠나라' 등의 구호를 내걸고 있다. ⓒ2016 몬산토반대시민행진 홈페이지
페이스북에 'GMO 없는 한국'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고종혁 씨는 2013년 한국에서 처음 시민행진이 시작될 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다. 고종혁 씨가 몬산토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소주' 때문이다. 특정 소주만 마시면 소위 '필름이 끊겼는데', 알고 보니 그 소주에 인공감미료인 아스파탐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파탐은 유전적으로 조작한 박테리아로 제조하는데, 1990년대까지 몬산토에서 특허를 갖고 있었다. 흔히 다이어트 콜라 등 '0' 칼로리 음료에 들어 있으며, 한국에서는 막걸리와 소주 등에 아스파탐을 넣는다.
이를 계기로 몬산토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2011년 당시만 해도 국내에 관련 정보가 없어 외국 뉴스 등을 보고 정보를 나르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몬산토에 따른 세계(The World According to Monsanto)>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에서 몬산토반대시민행진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종혁 씨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한국에 들어와 있던 원어민 영어강사 중심으로 약 50명 정도가 모였다"고 한다. 규모는 작았지만 GMO나 몬산토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전남 광양이나 부산에서도 올 정도였다. 같은 해 5월과 10월에 두 번 시민행진을 했고, 2014년부터는 1년에 한 번 5월에 진행한다.
2013년에는 홍보용 전단을 500장 찍었는데 다 못 돌렸다. 2014년에는 2000장을 찍었는데 역시나 많이 남았다. "사람들이 GMO가 뭔지도 모르고 전단을 받지도 않더라"는 게 종혁 씨의 말이다. 그런데 지난해 2000장 찍은 건 몽땅 다 나갔을뿐더러 모자라기까지 했다. GMO에 대한 관심이 커진 걸 느낀다. 또 2014년까지는 외국인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지난해부터 한국인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다. 올해는 GM벼 재배 이슈 때문에 농민 단체들도 관심을 갖고 있어 시민행진 규모가 좀 더 커질 것 같다.
▲ 2015 몬산토반대시민행진. ⓒ2016 몬산토반대시민행진 홈페이지
기술 악용하는 악덕 기업 퇴출돼야
몬산토반대시민행진은 과격한 시위라기보다는 몬산토가 뭔지, GMO가 뭔지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 알리는 창구이다. "시민운동은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GMO 없는 한국'을 운영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꾸준히 고민하고 바꿔 나가려 하는 게 중요해요."
고종혁 씨가 활동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 "'카더라'가 아닌 사실이 중요해요. GMO 찬성 논리에 잘 대응하고 내 주장이 묻히지 않으려면 정확한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정보를 이중 삼중으로 확인한다. "GMO에 관심은 있지만 정보를 너무 몰라요. 단순히 '나쁘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죠. 그러면 GMO 찬성론자에게 빌미를 잡힐 수 있어요." '유전자조작이나 육종이나 돈 벌려고 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또 잡종 1세대인 F1 씨앗과 GMO 씨앗을 헷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듬해 씨를 받아 심어도 같은 게 나오지 않는 F1 씨앗과 달리 GMO 씨앗은 재생산할 수 있다. "GMO 씨앗은 받아서 기를 수 있어요. 단, 그렇게 하면 특허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몬산토로부터 제소를 당할 수 있죠."
고종혁 씨는 유전자조작 기술 자체보다 기술을 악용해 건강에 해를 끼치고 그 사실을 은폐하는 게 문제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몬산토라는 악덕 기업을 퇴출시키는 게 주목적이다. 그런데 "최근 몬산토 주가가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던 몬산토의 기세가 조금은 꺾인 듯도 싶다.
종혁 씨는 "시민행진으로 단기간에 큰일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먹을거리에 대한 사실을 알리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 "저는 각자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행진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많이 모여서 세를 과시하기보다는 자기가 아는 바를 실천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종혁 씨는 친구들에게 먹을거리 문제에 대해 종종 이야기한다. "그중에 한두 명이라도 알아들으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먹을거리를 스스로 바꾸는 게 중요하잖아요?" 종혁 씨가 페이스북에 올리는 먹을거리 관련 글에 '좋아요' 한번 안 누르던 친구가 채식을 시작했다고 하는 등 변화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종혁 씨는 GMO는 문제의 일부분일 뿐, GMO만 없앤다고 해서 먹을거리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텃밭을 가꾸고, 가까운 먹을거리를 먹고. 결국 소비를 제대로 해야 생산도 제대로 되겠죠. 내가 소비를 바꾸면 이 세상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면 좋겠어요." 이를 위해 생협에서 몬산토에 반대하는 이유와 함께 먹을거리 철학도 더 잘 알리면 좋겠다.
앞으로의 바람은 "외국의 관련 단체들과 좀 더 긴밀하게 연대해서 시민행진의 영향력을 넓혀 가는 것"이다. 또 토박이씨앗 지키기 등 다른 운동과도 잘 연결하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GMO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 "그때그때 직접 몸으로 활동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요. 내 관심사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시나리오만 잘 쓴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전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중요한 건 일상을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 어떤 먹을거리와 환경이 필요한지 알고, 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참고
- March Against Monsanto 홈페이지(www.march-against-monsanto.com)
- 2016 몬산토반대시민행진 홈페이지(nongmokorea.wix.com/mam-korea-2016)
- GMO 없는 한국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groups/gmofreekorea/)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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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특파원, 북 지상낙원 만들자 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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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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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입력: 2016/05/13 [08:5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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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일간의 7차 당대회를 마치고 축하행사를 함께 하기 위해 연단에 들어선 김정은위원장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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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 축하행사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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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 7차 대회 성료를 기념하는 군중대회에서 전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김일성 광장 인민 궁전 연단에 올라 "우리는 조선(북한)을 지상 낙원으로 만들 것이다"고 말했다고 "군중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며 12일 안드레이 이바노프 스푸트니크 특파원이 스푸트닉에 보도하였다.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를 성사시킨 축하 행사는 노동당 위원장에 추대된 김정은위원장이 연석에 등장한, 정확히 10시에 시작됐다. 알록달록한 색색의 수천개의 풍선, 축포와 더불어 김정은을 본 군중들은 '만세!'를 연호했다. 풍선이 날아갔고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반 시간 가량 축하 연설을 했다. 그는 "노동당의 영도아래 미국의 저항에도 북한은 지상 낙원과 선진 강국으로 바뀌고 있다"며 "당대회는 북한 인민들의 사상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 ▲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 성사 축하행진 ©자주시보, 스푸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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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 성사 축하행진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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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 축하공연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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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이 끝난 후에는 대회가 시작됐다.
축제 의상을 입은 시민들은 '만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을 외치며 '승리자의 대회', '선군 정치' 같은 표어가 적힌 카트와 탄도 미사일 및 우주 로켓 모형의 설치물들과 함께 연단 옆을 행진했다.
같은 날 7일 저녁 광장에서는 콘서트가 열렸다. 땅거미가 내려앉아 횃불 행진이 진행됐다. 횃불을 든 젊은이 수 만 명이 '선군', '김일성', '핵강국이라 적힌 플래카드를 순서를 바꾸면서 실수하지 않고 대오에 맞춰 걸어갔다.
외신 기자들을 통솔했던 가이드는 "횃불 행진을 위해 학생들이 할애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부를 하지 않고는 조국을 지상낙원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스푸트닉은 전했다.
| ▲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 성사를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축하하는 북 주민 행진대오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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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 성사를 축하하는 청년들의 북소리 행진대오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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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행사와 청년들의 횃불행진을 보면 그렇게 틈틈이 시간을 내어 연습했음에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을 보면 북 주민들과 청년들의 조직규율과 열정이 어떤지 짐작이 간다.
| ▲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 성사 축하행사를 기다리며 쉬고 있는 북 인민군 군악대, 맡은 일을 수행하면서 이런 행사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스푸트닉은 보도했다.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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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남측위, 6.15공동위원장회의 추진 입장 밝혀5월 20~21일 중국 선양에서 진행..정부 승인 없이 진행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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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6.15남측위원회)는 ‘6.15공동위원회 남북해외위원장회의’를 오는 20~21일 중국 선양(심양)에서 진행한다고 12일 발표했다. 정부는 불허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앞서,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위원장 김완수)는 4월 21일자 서신을 통해 “6.15민족공동위원회의 앞으로 활동방향과 관련한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한 북,남,해외 위원장회의를 오는 5월 중순 중국 심양에서 진행했으면 하는 의견”이라고 제안했다.
6.15남측위원회는 “북측의 공동위원장회의 제안을 민간교류 재개의 계기로 보고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다”며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9명의 대표단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나아가 “현재와 같은 남북관계 위기와 민간교류 전면 중단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대북 제재국면과 별개로 민간교류는 하루 빨리 재개되어야 한다”며 “6.15남측위원회의 대북접촉 신청에 대해 정부의 적극적 이해와 협조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올초 북한의 핵시험과 인공위성 발사 등을 이유로 팩스 교환 등 간접적 대북접촉마저 전면 금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통일부 정준희 대변인은 지난 9일 정례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북한에 민간이 있느냐”면서 “통전 차원의 정치적 교류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정부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며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진정성 있는 변화를 보이는 것이 먼저”라고 답했다.
앞서, 통일부 관계자는 6일 “지금 핵 심험 이후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는 상황이고 추가 핵실험도 이야기되는 상황에서 이런 것은 적절하지 않고 적전분열이다. 북한에 이용당하기 딱 좋은 행사”라며 “자기들(북측)은 평화 이미지이고, 마치 이 것에 불응하면 ‘반통일 분자’, 이런 식의 구도를 만들어가는 통전(통일전선)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고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고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정부가 불허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상황에서 6.15남측위원회가 회의 추진을 발표한 것은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 하더라도 회의를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해석돼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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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회의는 정부의 승인 없이 진행됐다. 왼쪽부터 김완수 6.15북측위원회 위원장,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곽동의 6.15해외측위원회 위원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
6.15남측위원회는 2013년 7월에도 정부의 승인 없이 중국 베이징에서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회의를 강행해 이창복 상임대표의장 등이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벌금을 물은 바 있다.
한편, 2005년 6.15남측위원회와 북측위원회, 해외위원회가 함께 구성한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는 6.15 남측위원회와 북측위원회, 해외위원회 위원장들이 참가하는 ‘남북해외 공동위원장 회의’를 주요한 회의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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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구 선생 회고록3권 ‘수학자의 삶’1952년 대학입학과 4.19혁명의 격동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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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3권 ‘수학자의 삶’을 연재한다. 1권 ‘가짜 해방’, 2권 ‘찢어진 산하’에 이어진다. 1952년 대학 입학과 재학시절, 그리고 4.19혁명의 격동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독자들은 친일잔재와 분단이 남긴 비극을 한 대학생의 고뇌를 통해 읽게 된다. 특히 군 복무 시기에 맞은 4.19혁명을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게재된다.[편집자] |
전쟁의 한가운데서 대학생이 되어
새 냇가 새 바위에 푸른 숲속에 피 끓는 젊은 넋이 자라는 전당
이상은 하늘같이 높기도 하고 정성은 바다처럼 가득도 하다
경북대학교는 우리의 자랑 경북대학교는 세계의 자랑
1952년 5월 28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부속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생합창단의 목소리가 기념식장(지금의 경북대학교 본관 터)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로 경북대학교 개교의 노래다. 고운 물색의 겨레 옷을 입은 여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따라 곱고 어린 음색의 노래와 풍금소리가 늦은 봄날의 기념식장을 은은하게 채웠다. 또한 기념식장을 둘러싼, 학교의 교색으로 지정받았다는 자금(紫金)의 빛이라는 익은 감 빛깔의 천이 노랫소리에 따라 춤을 추듯 펄럭이고 있었다.
개교라는 정다움을 더욱 따뜻하게 감싸주는 자금의 장막은 이 땅의 허리를 잘라놓은 외세의 꼬드김으로 서로 죽일 내기에 정신이 빠져있는 세월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입학 축전의 이 순간에도 조국 반도의 허리를 남과 북으로 자른 전선에서는 이곳 봄날의 ‘자람의 잔치’와는 상극되는 ‘살육의 전쟁판’으로 밤낮이 없었다. 그러니 우리들에 대한 이 축복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석단의 중심에는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백낙훈(白樂薰) 박사와 대구의과대학(경북대 의대의 전신) 학장으로 초대 경북대 총장에 선임된 고병간(高秉幹) 박사가 그 권위를 상징하듯 박사학위 정복에 금빛수실이 찬란한 학위모를 쓰고 앉아 있었다. 또한 도지사와 대구시장을 비롯해 많은 하객들이 함께 그 지위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는 이 대학교의 첫 신입생으로서 주석단 앞의 넓은 공간에 내놓은 강의실 학생용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참으로 감개가 무량했다. 두어 해 전, 어린 우리 청소년들까지 목숨을 담보하고 겨레의 분단을 반대하여 싸웠던 2.7투쟁과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의 세월. 오늘 축복의 자리에 선 내가 과연 그 세월의 내가 맞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기가 어려웠다. 무릉동 학습조의 동무들과 박철환 선생님의 안부는 어떤지, 손기용 선생님의 그 처참한 주검과 구정식 선생님의 생사는 또 어떤지……. 기억이 여기까지 이르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눈이 아픈 양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제는 모두 만날 수 없는 스승과 동무들이었다.
당시 경북대학교는 일제 때 관립학교로 설립된 대구사범학교, 대구의학전문학교, 대구농림전문학교가 8·15해방 이후 대구사범대학과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으로 승격된 뒤 이 세 대학을 합쳐 1951년 10월 경북대학교로 개편했다. 여기에 문리과대학과 법정대학을 신설해 1952년 모두 다섯 개의 단과대학으로 정식 개교한 것이다.
학교 이름에 거창하게 도명을 붙인 경북대학교는 1951년 가을부터 도민들한테서 설립기금을 모금해왔다. 이 기금은 농가마다, 월급쟁이는 월급봉투마다에서 떼 내어 모은 것이다. 도민들은 후대를 위한 교육이라는 취지에 군소리 한 마디 없이 기성회비라는 이름으로 돈을 모아나갔다. 이 돈으로 산격동 공동묘지 일대를 부지로 사들였다. 그 터전 위에 강의실과 도서관, 그리고 연구실을 세워 나갔다.
명색이 대학교라지만 그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미군 부대에서 쓰다 남은(나중에는 이것들조차 원조라며 모두 높은 값을 쳐서 갚아야 했다.) 허드레 각목과 판자, 아스팔트 루핑과 창문용 셀룰로오스 철망 등으로 후다닥 지은 판잣집이 교사(校舍)였다. 그렇게 강의실과 연구실을 대충 맞추어 나갔다.
하지만 개교 기념식이 열린 당시만 해도 공동묘지의 묘를 연고자들이 이장하고 난 직후라 험상궂은 교정 곳곳에는 황토가 벌겋게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운동장도 그냥 터만 대충 불도저로 밀어놓아 그 바닥에 잡석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굴러다니는 공터였을 뿐이다.
대학은 2월 20일경에 수강신청을 시작했고, 3월부터 강의도 시작됐다. 이때는 대구 시내 경북도청 옆 대구야간대학에서 낮 시간 동안 강의실을 빌려 수업을 했다. 그러다 개교 직후인 6월부터 비로소 산격동 교정으로 강의실이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에 입학한 나는 3월에 들어 강의시간표에 나온 시간에 맞춰 지정된 교실로 찾아들어갔다. 그런데 강의 시작을 기다려도 교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강의시간에 맞춰 교실을 찾아온 2학년 선배학생들이 한 10분쯤이나 앉아 있었을까,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때쯤 온 다른 학생들도 창문 너머로 강의실을 힐끗 들여다보고는 그냥 지나쳐 갔다. 나는 도대체 영문을 몰랐다. 나의 이 황당한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선배학생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신입생입니까?”
“예, 선배님. 오늘 강의는 안 합니까?”
“보아 하니 아마 휴강인 것 같소.”
하고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대학이 원래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 이 교수는 다다음 주쯤 되어야 강의를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는 먼저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텄다.
“나는 2학년인데 신진숙이라 합니다. 근데 어째 신입생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말씨에 김천 지방의 억양이 묻어 있었다.
“아닙니다. 신입생 맞습니다. 저는 안재구라고 부릅니다. 선배님, 인사드립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교사 경력을 가진 내게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참 냄새가 나지 않은 듯싶었다.
“이 강의를 하는 박 교수는 휴강하기로 유명합니다. 한 학기에 강의실에 세 번 오면 보통이고, 때로는 두 번만 강의하고 학기가 끝날 때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학점은 어떻게 줍니까?”
“학점이야 리포트라고 시험지 2, 3매를 적당히 써서 내면 됩니다. 물론 이 교수가 좀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대학 강의라는 게 다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나는 도무지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둘이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학생 몇 명이 강의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드밀었다가 가곤 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신진숙 선배로부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착실히 받고 있었던 셈이다.
“선배님, 그런데 교수님이 강의는 잘 하시는가요?”
“나야 뭐가 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잔뜩 영어에다가 독일어에다가 흑판에 열심히 써나가는데 당최 구름 잡는 것만 같아서…….”
“수학에 무슨 영어고, 독일어는 뭐지요?”
“글쎄, 내가 압니까?”
“그러면 질문해서 뭣인지 설명해달라고 하시지요?”
“그러다가 잘못 보이면 학점도 못 따고 졸업도 못하려고?”
박 교수는 서울대학교에 다니다가 ‘국대안 반대투쟁’이 거세어지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대구사범대학에 강사로 왔다고 한다. 전쟁 이전부터 국대안 반대투쟁의 여파로 실력 있는 교수들이 대거 북으로 가면서 남쪽에는 대학 교수가 절대 부족했다. 일본의 구제(舊制)고등학교(대학 예과에 해당)를 졸업한 실력쯤 되면 대학 교수로 환영을 받는 시대였다. 이런 정도의 학습능력을 갖춘 사람조차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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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구 선생 약력
아버지 안의환(安義煥), 어머니 김태숙(金兌淑) 두 분의 장남으로 1933년 10월 24일 달성군 구지면 외갓집에서 출생. 고향 밀양에서 항일혁명가이신 할아버지 우정(于正) 안병희(安秉禧) 선생 슬하에서 성장
1940년 밀양제이심상소학교에 입학,
1946년 밀양중학교 입학
1947년 밀양중학교 1학년 때 노동절집회 참가사건으로 퇴학.
1949년 대구시 달성군 구지국민학교 교사
1952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 입학
1956년 경북대 수학과 강사. 영남고등학교 교사, 1961년 2월까지 근무
1958년 경북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석사과정 졸업
1956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에서 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역임.
1976년 ‘국가관 미확립’과 ‘학생운동’ 동정을 이유로 경북대 교수직 재임용 탈락
19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 중앙위원, 교양선전선동부책, 통일전선부책
1977년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 교수로 임명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조직노출로 검거. 1심에서 사형. 세계수학자들의 항의와 진정으로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1988년 만 9년 2개월의 징역을 살고 가석방
1990년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를 출간함
1991년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와 수원캠퍼스에서 교양학부 강사.
1994년 구국전위 전위조직사건으로 재구속 무기징역 선고
1999년 형집행정지로 석방
[저서]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광야, 1989),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죽산, 1990), <수학문화사>(일월서각, 1990),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돌베개, 1996),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아름다운사람들, 2003), <끝나지 않은 길>(내일을 여는 책, 2013), 기타 수학에 관한 교양서적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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