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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 2003.7월(109호) 네덜란드 노사관계 모델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 연대와실천> 2003년 7월호(109호)

네덜란드 노사관계 모델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노사관계 모델로 네덜란드 모델이 거론되면서 자본과 노동, 보수언론과 여야 정당 등에서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제기되는 방식이 네덜란드 모델의 ‘끈질긴 사회적 주체간 대화와 합의의 문화’와는 배치되는 다소 뜬금 없고 즉흥적인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과연 네덜란드 모델을 도입하려는 자세가 노무현 정부에게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노사관계 개혁’의 방향에 대한 본격적인 첫 논란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글에서는 네덜란드 노사관계 모델의 특징을 간략히 언급하고, 논란의 과정, 한국에서의 네덜란드 모델의 수용의 불가능성, 노동운동계에 주는 함의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네덜란드 노사관계 모델의 특징


‘네덜란드 모델’ 뿐 아니라, 새만금 간척사업, 네이스를 둘러싼 논쟁들 등 거의 모든 사안에 있어 노무현 정부는 상반되는 진영에게 각각 거부되는 기이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네덜란드 모델에 대해 조선일보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를 인용해 네덜란드 모델의 사망을 선고한다(2003.7.9). 한겨레 21의 기사에서 윤진호 교수는 네덜란드 노사관계 이면엔 비정규직 노동자 고용과 임금억제만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즉 상반된 두 입장 모두 ‘네덜란드 모델’이 80-90년대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는지는 모르나, 지금 현재는 쇠퇴한 것이 아닌가 하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은 이미 2002년 1월, 네덜란드 모델에 대한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KBS 역시 1월, ‘네덜란드의 기적(Dutch Miracle)’에 대한 리포트를 내보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상태에서 이 모델의 도입 가능성은 점칠 수 없는 상태였고, 간헐적으로 소개된 네덜란드 모델은 수면 밑으로 잠복하게 되었었다.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네덜란드 모델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레시안은 네덜란드 노사관계 모델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제시했다.


1. 전면적이고 지속적인 임금억제

2.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증가, 임시직 증가 등 노동시장의 유연화

3. 공공지출의 삭감

4. 독일 마르크에 대한 길더의 고정환율제

5. 직접적인 직업 창출 등 실업대책


이러한 네덜란드 노사관계 모델의 첫 출발점은 70년대의 불황과 79-80년 2차 오일쇼크로 인한 최악의 경제 침체에 대한 대응으로 이루어진 82년 ‘바세나(Wassenaar Agreement)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서 노사 양측은 임금과 고용을 교환하였고, 임금하락-생산성 증대-노동유연성 강화-신규 일자리 창출-채용이라는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협정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요구는 제외되었다.

두 번째의 계기는 93년에, 88-91년 사이의 국제경제의 호황이 다시 92-94년의 불황으로 전환되면서 이루어진다. ‘새로운 경로’(New Course)라 일컬어지는 협약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유형의 다양화, 세금 감축 등이 논의되었고 노동시간 단축의 합의에는 실패했지만, 노동유형의 다양화라는 방식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후, 노동시간은 96년 교섭의제에서 다시 나타났다. 현재는 전체의 60%가 단체협약으로 주 36시간을 체결하고 있고 나머지 40%는 주 38시간을 체결하고 있다. 연간노동시간은 1983년 1,530시간, 90년 1,433시간, 96년 1,372시간으로 단축되었는데, 이는 독일의 1,522시간(96년), 프랑스의 1,529시간(96년), 미국의 1,951시간(96년)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치이다.(OECD, Employment Outlook, 1998)


<각국의 근로시간 변동 추이(OECD, 1997)>

 

1973

1979

1983

1990

1996

네덜란드

1,724

1,591

1,530

1,433

1,372

독일

1,804

1,699

1,686

1,562

1,508

프랑스

1,771

1,667

1,558

1,539

1,529

영국

1,929

1,821

1,719

1,773

1,732

미국

1,896

1,884

1,866

1,936

1,951


임금억제는 80년에 시작되어 15년 이상 지속되었다.  92-94년 불황기를 거치면서 사용자들은 임금동결 캠페인을 벌였다. 79-97년 사이에 노동생산성은 36%가 오른 반면 시간당 실질 임금은 6%만이 올랐을 뿐이다. 90년대 초반 호황이 불황으로 역전되면서 정부는 임금동결 경고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냈고, 노사는 이러한 일련의 경고에 화답해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안정을 또 다시 교환하게 된다.

79년-97년 네덜란드의 고용률은 28% 증가했다. 89년 이후 임시직은 급격히 증가했고, 노동자의 1/3을 임시직이 차지하게 되었다. 기혼 여성 노동자들은 2차 수입을 위해 대거 비정규 노동시장에 참여했다. 파트타임 노동자 비율은 83년 21%에서 96년 38%로 늘어났다. 하지만, 네덜란드 파트타임직의 상당수는 정규직이고, 정부와 노조는 파트타임 노동자에 대한 권리와 노동조건을 보호하는 법과 제도를 완비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93-95년 동안 법적 사회급부는 동결되었고, 87년 실업자 급부 시스템은 급부 수준을 낮추고 자격을 강화하는 동시에 남성에 대한 우대를 제거했다. 몇몇 사회부조 시스템은 민간 보험업자에게 개방되었다.

네덜란드의 실업률은 83년 노동력의 11.2%에서 94년 7.6%, 95년 6.9%, 96년 6.3%, 97년 5.2%로 낮아졌다. 94-98년 동안 정부는 35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공언했다. 83년부터 90년 사이에 7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 있는데, 상대적으로 인구 중 젊은 연령대가 많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의 대부분은 신규노동시장 진입자들의 몫이고, 대부분이 파트타임직이며, 장기 실업문제가 심각하다. 노동자 부부 사이에는 ‘1.5 일자리 모델’이 번성하고 있다.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에서 ‘네덜란드 모델’로 이행하는데 있어 또 하나의 핵심적인 개혁 중 하나는 사회복지 개혁이었다. 물가-임금-복지급부의 연동으로 인한 동반상승의 고리를 끊고, 가장 문제가 되었던 장애보험의 급여수준을 제한하고 판정 기준을 엄격하게 했다. 또한 장애보험 미신청과 장애자 채용시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해고를 제한하기 위한 ‘노사갈등의 외부화’, ‘노사간 담합’의 길을 차단하였다.



네덜란드 모델을 둘러싼 논란들


네덜란드 모델의 도입이 가능한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논쟁에 참여한 거의 모든 주체들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 역시 도입의 ‘속도’를 조절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쨌든 논란에 참여한 각각의 주체들 사이에는 네덜란드 모델의 어떤 점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은 노동자 경영참가를 강조한다. 그는 현재의 노사협의회 수준보다는 높되,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보다는 낮은 ‘협의’ 수준의 경영참가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의 ‘소신’이 그대로 관철될 지는 미지수이다. 자본과 언론의 강력한 반발이 거세지자, 경영참가의 수준을 ‘협의’ 수준으로 낮추어 명료화하는 모습에서 그의 진정성은 깎여 나갔다. 오히려, 현재의 경제 상황과 노동-자본간 힘의 역관계를 고려할 때, 노동계를 현혹시키는 ‘미끼’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이는 고건 총리를 비롯한 정부 관료들의 시각을 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고건 총리는 국회 노동문제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얘기의 초점은 경영참여에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사문제를 사회적으로 합의제에 의해 해결해 나가고 있는 폴더 모델에 대해 얘기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즉 독일의 사회경제협의회(SER)와 비슷한 것으로 상정되고 있는 우리의 ‘노사정위원회’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재벌과 한나라당, 조중동, 한경신문을 비롯한 수구언론들은 막무가내식으로 ‘법과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에게 법과 원칙은 네덜란드식의 ‘끈질긴 대화와 설득, 합의의 문화’가 아니다. 노동에 대한 즉각적인 철퇴를 가하는 것이 네덜란드 모델의 도입보다 훨씬 더 간편하고 값싸며,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네덜란드 모델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우려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네덜란드 모델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 축 중 하나인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논의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조선일보는(2003.7.18) 금속노조와 사측 간의 임금삭감 없는 주5일제 근무 합의에 대해 강한 질타를 가했다. 노무현 정부의 ‘네덜란드 모델’과 같은 단막극이 벌어지는 동안, 주도권은 금속노조에게 넘어갔고, 금속노조가 한 나라의 노동정책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사간 합의(그것도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조차 배격하고 ‘네덜란드 모델’의 핵심적 내용과 배경들은 실종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법과 원칙이 있겠는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네덜란드는 복지의 천국이다. 네덜란드에서는 80-90년대를 거치면서 복지제도 상의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제도의 골간과 사회적 평등지수는 어느 정도 유지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각종 개혁이(물론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물 건너가고 있는 상황에서 네덜란드 모델의 도입이란 실상 노자 양측의 win-win을 가장한 노동조합에 대한 무장해제 요구에 다름 아니다.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는 외면하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복지제도도 미흡한 상황에서 네덜란드 모델의 도입은 불가능하다.

언론들이 말하듯이 노사간 전투적 대립이 심한 한국에서 이러한 모델 도입을 위해서는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선도적인 지도력이 전제되어야 한다(특히 노사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자본에 대한 지도력).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게는 이러한 힘이 없다. 재벌과 자본에 들이밀 수 있는 무기를 거세당한 정부가 무엇을 가지고 타협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일방적으로 대립을 부추기고 노사관계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조중동과 자본에게 어떤 카드를 내밀 수 있는가?

네덜란드 모델을 제기한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의 발언은 수구신문들-한나라당, 고건 총리를 비롯한 정부 내 관료들, 민주노총, 한국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의 반대, 경총 등 자본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청와대가 추진하고 있는 노사관계 개혁 대책은 일정상의 차질을 빚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러한 노사관계 모델을 포기할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이정우 실장을 비롯해 점진적 추진을 약속해 왔고, 노사관계의 일정한 변화에 대한 압력들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조합 운동 진영에서는 노동시간 단축과 사회복지의 확충(특히,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보험을 비롯한 복지 적용 등), 생존권과 노동조건의 보호, 고용안정에 대한 대책 수립, 노사관계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자본에 대한 끊임없는 공세를 벌여 나가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아직 모른다. 진정으로 네덜란드 모델의 도입 조건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은 현재 노동운동 외에는 아무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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