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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6/07/03

[레디앙/산별좌담]박유기, 임영일, 김창한

실질적 민주주의 이끌어낼 산별노조
[산별특별좌담]비정규직 노조가입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
 
 
 

6월 30일 현대자동차노조 등 금속산업연맹 13개 노조 9만명의 조합원들이 기업별노조에서 산업별노조로 전환해 현재의 금속노조와 합쳐 13만명의 거대한 금속노조를 탄생시켰다. 지난 20년 동안 회사 내의 종업원을 대변하는 기업별노조 체제가 산업 전체 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산별노조 체제로 전환한 역사적인 사건을 맞아 <레디앙>은 7월 2일 특별좌담을 마련했다. 이날 특별좌담에서는 산별노조 전환의 역사적 의미, 노동운동과 노사관계 및 한국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전망이 논의됐다. <편집자 주>

참석자
김창한 전국금속노동조합 위원장
박유기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임영일 경남대 교수

사회 이광호 <레디앙> 편집국장

정리 박점규 현장기자

   
 ▲ 김창한 금속노조 위원장, 임영일 경남대 교수, 박유기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왼쪽부터)
 

이광호 이번 산별노조 전환은 기업별노조의 굴레를 벗고 마침내 산별노조 시대를 활짝 연 20년만의 쾌거였다. 특히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된 현대자동차의 가결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언론의 대대적인 반대와 회사의 방해, 노조 내 일부의 산별 반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조합원들이 산별노조를 선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박유기 사측이 노골적으로 개입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한 대의원이 유인물을 냈고, 회사 관리자가 이걸 배포했다. 언론에서는 노골적인 반대가 있었다. 울산은 지역방송이 특집방송을 통해서 현대 사례를 외국과 비교하며 산별노조가 되면 혼란스럽고 안 좋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도부는 확고한 의지로 밀고나갔다. 90% 이상의 조합원들이 4시간씩 교육을 받았고, 조직력이 약한 곳에 '산별특공대'라고 부르는 교육 전문가 4명을 거의 한 두 달씩 파견보내 교육했다.

"자본이 가지 말라는 곳이 우리 가야할 길"

11개 현장조직이 2번에 걸쳐 산별노조에 찬성하는 공동의 입장을 밝혔다. 또 각 현장조직들이 독자적인 선전물을 현장에 내고 조직원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게 산별노조가 대세라는 것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막판 방해공작들은 마지막 집회할 때 "혼란스러울 때는 자본이 가지 말라는 곳으로 가자,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고 조합원들에게 호소했다.

조합원들은 기업별노조의 위기를 세뇌가 될 정도로 들었고, 정리해고와 고용불안. 해외공장에 따른 산업공동화, 법제도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산별만이 살길이라는 것에 공감했다.

   
 ▲ 김창한 전국금속노조 위원장
 
김창한 1998년 금속산업연맹이 출범할 때 19만 8천명이었는데 2000년에는 17만 5천명, 지금은 16만명이다. 고용불안, 해외공장 등 신자유주의 세상에 맞서기 위해 조합원들은 산별노조를 선택했다. 간부와 활동가들이 헌신적으로 뛴 것이 자신있게 통과시킨 것이다.

임영일 여러 곳에 교육을 다니면서 올해 특히 간부들의 자세나 긴장감이 전과 달랐던 점을 가는 곳마다 느낄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2007년 앞두고 올해 산별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가 가장 강했다.

이광호 이번에 투표에 붙이지 않은 노조와 실패한 노조들이 7월에 다시 투표를 할 예정인가? 가결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예정이며, 어떻게 전망하는가?

김창한 부결된 사업장에 다시 투표를 붙이기 위해서는 의기소침해져 있을 걸 지도부부터 추스려야 한다. 연맹 차원에서 분위기를 형성해줘야 한다. 10만명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13만명이 됐다. 이 결과가 큰 힘으로 작용할 거다. 현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들어가면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7월 5일 쌍용자동차노조와 철강분과 노조들이 산별전환 투표를 실시하는데, 여기서도 현대자동차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산별노조를 선택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임영일 시간은 좀 늘어질 지 모르겠지만 금속은 대세의 흐름은 정해졌다. 시간이 좀 더 걸리면서 참여하는 쪽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별로 넘어오는 큰 흐름 안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광호 이후 투표할 때 현대자동차노조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임영일 교육위원을 파견하면 좋겠다.

박유기 실패한 사업장은 빨리 투표를 부쳐야 할 것 같다. 요구되면 충분히 할 것이다.

이광호 이번 투표 이후 출범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 이 과정에서 논의돼야 하는 주요 의제들은 무엇인가.

김창한 산별전환에 성공한 노조와 금속노조, 금속산업연맹이 모여 추진기구를 구성하고 10월 경 대의원대회를 거쳐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할 것이다.

금속노조의 규약규정이 연맹의 산별노조 추진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완성도가 높지만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토론을 활성화해야 한다. 금속노조는 내가 같이 만드는 조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위해 현장토론을 충분히 해야 한다.

곁방살이에서 우리집 시대로, 비정규직 다 들어와라

이광호 이번 산별전환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임영일 기업별노조는 규모가 크든 작든 남의 집 곁방살이하는 조직이지 우리 조직이 아니다. 산별노조는 곁방살이하다 나와서 자기 집을 하나 지은 것이다. 언론에서는 거대조직이 생긴다고 호들갑인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제 초가삼간 수준이다.

이 집에 새 살림을 꾸려야 하는데 그 방식이 문제가 될 것이다. 곁방살이 하다 모여서 우리 집 지어놓고 보면 안방은 내가 들어가겠다 넌 뒷방으로 가라 이렇게 싸울 게 아니라 집을 넓혀야 한다. 그동안 조직화의 외곽에 방치되어 있던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우리 집에 다 오라고 하고 담이 좁으면 담 허물어서 넓혀야 한다. 노동운동에서 큰 고비를 넘은 것이다.

박유기 아산공장에 가니까 충남지역 한국노총 산하 노조가 현대자동차 산별전환하면 들어 오겠다고 했다. 산별노조 전환은 지금까지 차별과 차이를 양산하고 극대화시키는 기업별 조직체계와 교섭체계를 변화시켜 대공장과 중소공장,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과 차이를 완화시키는 조직체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평등을 기치로 하는 노동운동에 걸맞게 방향을 튼 것이다. 원하청 불공정거래도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 사장도 사석에서 얘기하면 기아, 대우사장들하고 협상에 나가는 건 이해하는데 부품업체 사장들하고 같이 나가는 건 말이 되냐고 한다.

이제 조직틀과 교섭틀을 바꾸었다. 각각이 아니라 단일노조로 금속노조가 내 노동조합이라는 소속감을 높여낸다면 해낼 수 있지 않겠냐. 막판에 조합원들에게 산별전환을 실패하고 영원히 배부른 귀족노조로 남을 건지 남한사회 산별노조를 새롭게 견인할 건지 당신들이 선택하라고 했다.

산별노조는 대공장-중소공장, 정규직-비정규직 차별과 차이 해소하는 조직

김창한 20년동안 기업별노조를 임단협 중심으로 해와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큰 계기가 됐다. 비정규, 로드맵, 한미FTA 문제 등이 정부 계획대로 되면 아이엠에프 이후 착취구조가 고착화되고 민주노조는 무력화된다.

지금까지 정신 못차리고 대응 못하다가 이제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운동의 새로운 변화가 모색될 것이고 그 변화는 금속 내에서뿐 아니라 다른 조직에도 전달될 것이다. 실질적으로 연대해보자고 했는데 한 조직으로 묶인 것은 단결의 강화다. 승리의 기초를 닦았다. 새로운 출발이다.

임영일 작년 가을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사람들은 한국의 산별노조에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기업별노조는 한국과 일본 뿐인데 자기들이 50∼60년대 시도하다 실패했기 때문에 자기들 경험으로 보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기업별노조를 해산하고 산별노조로 조직을 재편한 게 아니라 기업별노조를 묶어서 상급조직 중심으로 교섭투쟁을 끌고갔고 그걸 산별운동이라고 했다. 일본 노동운동이 못한 걸 우리가 해냈다. 노동운동사 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본노동운동 극복 노동운동사상 중요한 의미

이광호 이번 산별노조 전환은 전체 민주노조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김창한 현장에서 기득권을 놓을까 주저하는데 금속의 대공장이 했다는 것이 다른 곳에도 자신감을 줄 것이다. 조합원들에게 노동운동을 주도해온 금속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절반은 먹고 들어간 것이라고 본다.

임영일 예전에 경상대에서 주요 조직 설문조사 했는데 조직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산별노조에 대해 70∼80% 이상 동의했다. 그럼에도 산별 조직전환이 지체되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의 경우에 노조 간부들의 적극성의 부족을 지적한다.

금속은 10여년 이상 내부에서 토론도 많이 했고 시도도 많이 했다. 그 과정이 없던 조직은 막연하게 기업별은 안되고 산별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간부들의 자기 확신이 부족한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할 때 금속의 변화가 다른 조직의 대중들에게도 자신감을 줄뿐 아니라 노조 간부들한테는 굉장히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여러 조직에서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경쟁적 정파들 산별노조라는 운동의 원칙에 동의

이광호 개인적으로는 울산이 진보정당이나 민주노조운동에 희망이냐 질곡이냐는 고민을 한 적이 있는데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한 산별노조 전환은 영향은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클 것 같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정파'들이 모두 동의돼서 함께 실천했다는 점도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박유기 현자노조 대기업 이기주의 이런 것도 있고 노조 내 조직이 난립해 권력을 향해 간다는 비판들이 있었는데 경쟁적 활동관계에 있는 조직들 사이에 운동의 원칙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의가 있었다.

또 중심에 서있는 간부들이 현자노조를 이끌어냈다. 10년 이상 산별노조 논의해왔는데 조합원 2/3 이상이 찬성하는 결과를 만든 것에 대해 다같이 기뻐했다. 이제 기업별노조에서 뭔가 하려는 생각은 다 접고 산별노조에서 활동을 어떻게 할 건가를 고민해야 한다.

조합활동이 기업을 뛰어넘어 전국적 차원이 되지 않으면 현자노조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운동적 과제는 산별적 사업 과제로 빨리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다. 

비정규직 가입, 교섭하는 획기적 돌파구

이광호 비정규직 문제를 산별노조가 어떻게 기여하고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해달라.

임영일 실제로 비정규직을 조직화하고 그들을 대표해 교섭하고 투쟁하는 틀이 없었다. 기업별노조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했고, 산별로 갔을 때 그 길이 열린다는 걸 알고 있다. 금속노조가 몇 년 활동했지만 비정규직에 큰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4만명 밖에 안되는 소수산별노조의 역량의 한계가 때문이다.

대기업노조가 전환해 돌파구를 열었다. 조직체계를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 비정규직 조직화가 진행되고 그들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생겼다. 교섭을 통해 그들의 이익을 지키고 신장시켜 줄 단계로 넘어갈 상황이 됐다. 획기적인 돌파구가 생기게 됐다.

자본, 비정규직 수혈한 노동운동에 두려움

김창한 그동안 금속노조는 규모나 역량의 한계도 있었지만 산별노조의 책임성 때문에 싸워왔다.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법안 반대 투쟁에 최선을 다했고, 전략지부를 선정해 재정과 역량 지원해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피터지게 싸웠고 전국적인 파업까지 진행했다.

중앙교섭과 사업장 단체협약을 통해 비정규직 보호 조항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이 어려웠다. 대공장의 산별노조 전환으로 그동안 일어나고 싶어도 못 일어났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어나 조직력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

또 대공장노조 중에서 노동운동의 건강성을 상실한 곳이 있는데 착취받고 탄압받았던 비정규직이 민주노조 운동에 뛰어들면 새로운 건강성을 생길 것이다. 자본은 비용의 증가로 보는 게 아니라 전략적 문제로 보고 있다. 노동계급이 비정규직을 수혈해 새로운 힘을 얻고 돌파구가 열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도 비정규직 문제를 전략적 과제로 받아안고 어떤 고통이 수반되어도 가야 한다. 간부와 활동가들이 새로운 자각을 하고 출발하면 될 것이다.

울산공장 1만명 비정규직 노조가입 급격히 늘 것

   
 ▲ 박유기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박유기 지금 울산 승용3공장은 비정규직이 파업하고 있다. 대체인력이 투입되면 이걸 막으니까 정규직 입장에서 보면 일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귀찮고 괴롭다. 왜냐면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비정규직노조는 97.5%가 산별노조 전환에 찬성했다. 이제 금속노조라는 단일노조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가입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울산공장에 1만명이나 되는 비정규직을 어떤 조직체계에 담아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1만명의 비정규직과 2만5천명의 정규직이 자본에 맞서 같이 싸우면 저들은 비정규직을 쓸 이유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조직가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지금은 소수가 가입돼 있으니까 타겟이 될까 두려운 것이다. 산별노조니까 들어와야 한다고 하면 거의 다가 들어올 것이다.

더 나아가 지역 내의 고용안정센터 같은 곳을 통해 어떻게 고용안정망을 구축할 거냐를 고민해야 한다. 건설플랜트도 금속노조로 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도 있고, 지역단위로 비정규직을 묶어 대안과 비전을 만들어내야 한다.

결정되면 반드시 한다는 정신을 지켜야

이광호 힘이 세진 거 사실이지만 연대의 어려움을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김창한 금속노조는 지난 5년 동안 피눈물나게 싸웠다. 금속노조 간부들은 한번 결정된 방침은 기필코 사수하려고 했고, 조합원들도 동의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연대의 정신을 지켜올 수 있었다. 단일노조의 근본성격이 깨지는 순간 금속노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왔다.

지금 연맹 조직들이 들어와서 그런 것들이 사수될 수 있을까 우려된다. 간부나 활동가들이 결심하면 분위기도 바뀔 것이다. 우리가 열 번 파업했다면 앞으로는 한 번 파업해도 된다. 금속노조는 15만이 결정하면 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우리 내부와 사용자들에게 심어주면 된다.

초기에 그걸 못 잡아주면 우리 내부에 불신이 생기고 상대방도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다. 연맹에서 전환된 노조의 간부와 활동가들이 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별노조의 의미가 없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서 풀어나갈 능력이 많아졌는데 내부적으로 조직운영에 부대끼면 안된다.

임영일 현명하게 해야 할 것 같다. 임금과 고용형태가 다른 노동자가 한 울타리에 모이는데 그걸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는 섬세한 조직체계를 잘 짜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조합 조직은 조합원들의 요구를 사용자와 교섭으로 푸는 것인데 다양한 요구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해서 교섭구조도 유연하게 배치할 필요가 있다.

초기에 그 틀을 잘 잡아야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이 강화될 것이다. 거기에 산별노조 간부와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자세가 덧붙여져야 한다.

비정규직 탄압, 산별 지역총파업으로 대응해야

박유기 내부 갈등이나 지도집행력에 대한 우려가 많다. 하지만 현장 공동화 같은 문제는 오히려 기업별노조의 역사가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18년 동안 기업별노조가 해왔던 현장을 다지고 조직한 경험이 축적돼왔고 소중한 자산이 될 거다. 노동조합의 권한이 현장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대공장과 중소공장을 뛰어넘는 지도집행력을 만들어가야 한다.

금속노조의 전국총파업을 조직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지부나 지역의 총파업은 스스로 배치해서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 사업장에 탄압이 벌어지면 금속노조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여주면 된다.

이광호 조직력, 투쟁력 강화가 많이 얘기되는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정책역량의 강화가 아닌가 싶은데.

박유기 조직과 집행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자노조에 90명의 상근이 있고 나머지가 130명이 있다면 중앙으로 얼마 보내고 지부로 얼마 보내느냐가 고민이다. 또 조직이 이 만큼 커지면 전문역량을 채용해야 할 것이다. 연구진들 중에 현장에서 전망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정책과 교섭, 교육과 선전에 대한 기능을 중앙이 통제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조합원을 위한 사업과 동시에 전체 노동자를 위한 사업 배치해야

   
 ▲ 임영일 경남대 교수
 
임영일 한국노총 금융노조는 내용상으로 보면 기업별노조의 연합체 성격을 크게 못 벗어났다. 조직체계를 놓고 보면 금속노조가 그나마 산별노조에 걸맞는 조직체계였다. 금속노조가 15만 조합원을 위한 사업을 배치해야 하고 동시에 금속산업 내에 조직대상이 되는 150만명을 위한 사업과 괴리되지 말아야 한다.

민주노총 내 어떤 산별노조는 산별노조 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역량이 조합원에게만 집중되어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했다. 금속노조는 최저임금을 공장 내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에게까지 적용하는 등 조금 달랐다.

조직체계와 교섭구조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다.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는 조직과 배치되지 않도록 세밀하게 배치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책역량의 강화가 매우 중요하고 매 시기마다 고리를 어떻게 잡아야 하느냐의 판단이 중요하다. 일단 재정과 인력의 확충은 시작이고 그 역량을 정확히 배치하고 가동하는 게 중요하다.

김창한 정책기획역량을 강화해 조직운영의 중장기적 과제, 내부 현장의 문제, 전체 계급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결국 재정과 인력의 문제인데 이번에 대공장에서 현장의 경험을 가진 동지들이 많이 올라오면 실질적 내용들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을 거다. 재정이 확보되면 역량도 새롭게 확보해야 한다.

이광호 조합비는 얼마나 되나

김창한 현재 4만 금속노조의 조합비는 일반, 특별회계까지 하면 80억 정도 된다. 대공장이 들어오면 의무금과 현장에 내려주는 교부금 다 포함해 4∼500억 정도 된다.

산별노조가 질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주체가 되야

   
 ▲ 이광호 <레디앙> 편집국장
 
이광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후퇴했다는 견해가 많다. 산별노조가 우리 사회 질적인 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는데 핵심 주체로 나서야 될 것 같다.

박유기 무엇이 진보적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고 이념인지 훨씬 더 퇴색되어 가는 느낌이다. 산별노조로 전환됐다 해서 어느 날 계급적으로 되지는 않겠지만 꿈을 꾸고 이상을 갖는다는 점에 있어서 가능성이 보인다.

산별노조는 기업 내의 종업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처지와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전체 계급적 차원으로 사업을 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조직속성상 조합원이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 주체의 이해관계와 전체 계급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면서 끌고 나가는 게 중요하다. 이 과정이 질적이고 경제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교육비 등 산별노조의 요구가 사회적 의제로

임영일 실질적 민주주의, 경제적 민주주의는 후퇴됐다. 87년 이후 민주주의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계급적 불평등을 해결해준 경우는 없다. 양극화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정당 체제가 진보 보수로 간다 해도, 그 토대가 뭐냐가 중요하다. 산업화된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우리의 경험을 보면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그 토대가 될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가 제기하는 핵심적인 의제 자체가 과거와는 달라질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로 설문조사 하면 직접임금에 대한 조합원들의 요구가 낮아지고 이미 사회경제적 요구인 교육비 주택주거비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런 요구는 정부정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기업별노조로는 이걸 사회적 의제로 등장시키기 어렵지만 산별노조는 실질적인 힘으로 제기하기 때문에 핵심적인 사회적 의제가 될 것이다. 큰 산별노조가 요구하고 사용자들이 답할 수 없으면 지방정부든 중앙정부 수준에서든 안 다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확신을 가지고 기대해보자. 가능성이 열려가고 있다.

이광호 구체적인 사안으로 산업공동화 문제, 원하청 불공정거래의 문제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임영일 산업정책 자체가 교섭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의 일방적인 논리와 결정으로 해외 이전, 구조조정이 되는 상황에서, 현자노조처럼 이렇게 하지 마라 사전에 합의해라 이렇게는 했지만 산업정책 차원에서 다뤄지지 못했다. 산별 중앙교섭 차원에서 논의할 수밖에 없다. 자본의 일방 통행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과 산업공동화를 막을 수 있다.

원청·하청회사 같이 교섭 나오면 불공정거래 숨기지 못해

   
 ▲ 7월 2일 오후 5시부터 서울 여의도 <레디앙> 사무실에서 '20년 숙원 산별노조전환 의미와 전망'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박유기 산업의 의제와 관련해 지금까지 현장에서 쟁점이 되거나 만들어진 적도 없고 기업주 주도하에 일방적으로 해외 투자 같은 게 이뤄졌다. 이게 중앙교섭에서 다뤄질 것이고 이 문제로 파업을 할 수 있으면 큰 쟁점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자연스럽게 어떤 방법으로든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업의 의제와 관련해 지금까지 현장에서 쟁점이 되거나 만들어진 적도 없고 기업주 주도하에 일방적으로 해외 투자 같은 게 이뤄졌다. 이게 중앙교섭에서 다뤄질 것이고 이 문제로 파업을 할 수 있으면 큰 쟁점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자연스럽게 어떤 방법으로든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하청 문제는 교섭구조를 통일시키면 가능하다. 원청회사는 불공정거래가 없다고 우기고 하청은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못한다. 원청사와 부품사가 동시에 교섭에 나와 원하청 불공정 거래의 투명성을 요구하면 해결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산업공동화문제 사회적 의제가 되면 승리할 수 있어

김창한 금속노조가 파업 일주일 해도 신문에 안 나지만 현대자동차 노조는 하루만 하면 난다. 대공장 들어오면 새로운 교섭력을 가질 거다. 산업공동화는 개별자본과 협의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운영원리에 대한 협상이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볼 수 있다. 사회적 쟁점으로만 만들어놓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본다. 산업공동화는 단순히 고용문제가 아니라 내수시장 문제, 모든 산업의 기반이 되는 제조업을 죽이느냐가 쟁점화 되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

이광호 현 정권은 제조업에 대한 패배주의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북아 유통중심, 금융중심이라는 노선과 한미 FTA 조기 체결도 이런 맥락이다. 매우 논쟁적인 주제다. 산별노조는 제조업 중심 국가론으로 이에 맞설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산별시대에 적응을 위해 정부와 자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또 언론은 산별노조를 무슨 괴물이나 나타난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데.

산별노조 전환에 따라 노사관계로드맵 대폭 수정돼야 

임영일 노사관계로드맵은 산별노조 전환을 감안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내년 이후에 노사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로드맵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할 수밖에 없다. 단체교섭과 관련해서도 산별교섭을 요구할텐데 아무 내용이 없다.

단체협약 적용률은 특별한 법제도 개선이 없어도 산별전환으로 통로가 많이 열린다. 노조는 중앙교섭과 지역, 지부교섭이라는 중층적 교섭을 해야 한다. 조합원 15만명에만 적용할 협약으로 제한하자고 할 간부는 없다. 금속노조 최저임금이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에 다 적용하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적용범위를 넓힌 것은 의미가 크다.

현행법으로 보면 일반적 구속력을 우리가 요구할 수 있다. 특히 지역단위로 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 하자면 프랑스처럼 노사간에 맺어진 협약이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적용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최저수준을 정하고 높여가면서 협약의 효력을 확장하는 정당성이 사회적으로 분명히 있다.

언론의 산별 보도를 보면 왜곡한다는 차원보다는 아예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산별노조가 무지한 기자들 교육시켜야

   
 ▲ 6월 30일 현대자동차노조 대회의실에서 개표위원들이 산별노조 전환 조합원 찬반투표를 개표하고 있다.(사진 금속산업연맹)
 

이광호 산별노조가 나서면 지금처럼 무지하게 하진 못할 거다. 기자들도 공부를 해야 할 거다.

김창한 정부가 양극화 얘기를 하는데 이걸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합의한 것을 다 적용해라 이렇게 하면 영세한 곳은 실질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박유기 언론은 무식할 정도로 얘기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죽어 없어져야 하는데 덩치가 더 큰게 나온다니까더 난리를 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언론의 보도를 본 회사 관리자들이 더 불안해하는 것 같다. 우리 조합원들은 언론이 우리를 욕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대해 많은 부분 무시하고 있다. "가진 놈들 앞잡이니까 그런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정확히 알고 쓰고 제대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산별노조 잘하면 민주노동당 획기적으로 강화

이광호 지금 진보정당은 아장아장 걷고 있고, 산별노조는 이제 탄생이다. 산별노조의 출범이 민주노동당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나. 

박유기 산별노조 차원에서 정치방침이 확정되면 훨씬 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정치사업의 결합력을 높여낼 것이다. 산별노조 의제 자체가 기업 단위 내에서 맴돌던 의제들을 일상적으로 제기해 조합원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게 된다.

산별사업과 정치사업이 뗄래야 뗄 수 없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산별교섭이든 협약이든 법·제도적 보완될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 시대에 정치위원회는 일상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다.

김창한 산별노조는 정치세력화를 더욱 추동하는 힘이 있어서 더 잘 될 것이다. 지부가 치밀하게 사업을 짜고 현장에 파고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잘만 하면 획기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임영일 스웨덴은 중요한 산업정책 노동정책은 산별노조의 정책단위에서 결정돼 당에 전달된다. 독일도 그렇다. 당은 그걸 반영한다. 당과 노조와의 관계가 그렇게 가야 한다. 그런 전제가 산별노조다. 산별노조가 강화되고 그 위에 당이 서는 것이다.

지역정치에서도 그렇고 중앙정치에서도 그렇다. 노조 덩치가 커졌으니까 당도 커져야지 그런 게 아니다. 커진 노조의 역량을 당이 어떻게 흡수할 것인가 하는 시각으로 봐야 한다. 

이광호 오늘 오랜 시간 토론해주셔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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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운동자료/시민의신문]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

사회를 흔든 ‘학생인권’ 함성
[인권오름]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①
새로운 청소년인권운동의 발원지, 최우주씨 사건
 
2006/6/2
인권운동사랑방
청소년인권운동사 연구를 시작하며

체벌, 두발규제, 강제자율학습, 입시경쟁교육 등 각박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은 하고픈 말도 많을 터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간주되어 사회적 의사결정의 과정에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반영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21세기 들어 청소년들의 다양한 ‘반항’이 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것도 그러한 기존 시각에 충격을 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자신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싸워온 역사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청소년인권운동사 연구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 배치하고 알리기로 한다. 이미 잘 알려진 사건의 경우에도 체계적인 해석을 덧붙여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현재 청소년인권운동의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되는 운동의 단절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이다. 앞으로 청소년인권운동에 발을 들이려는 사람, 또는 이미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한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로 우리는 1995년 최우주 씨 헌법소원 시도 사건을 다루고자 한다. 이 사건이야말로 199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청소년인권운동의 출발점이자 발원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글, 한국사회를 흔들다

“저의 바램은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방과후의 시간을, 방학 동안의 시간을 당연히 학생들 자신의 적성에 따라 활용할 수 있도록 학생 개개인에게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의사 표명 이후 하이텔에 개설된 토론방에서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인권운동사랑방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의사 표명 이후 하이텔에 개설된 토론방에서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1995년 7월 22일 하이텔 게시판에 올라온 이 한 편의 글은 이후 청소년 인권운동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당시 강원도 춘천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우주 씨는 학교의 강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시행과 관련해 청와대, 교육부, 강원도교육청 등에 민원을 제출하며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본래 헌법소원을 내려다 절차상의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게 된 최우주 씨는 ‘학교가 학생의 기본권을 짓밟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최 씨의 민원에 대해 교육청은 “보충, 자율학습의 강제성은 사실이 아니며 학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면서 보충, 자율학습은 “희망학생, 희망교과에 한해 실시하게 되어 있다”는 공허한 답변만 내놓았다.

교육당국의 이런 무성의한 답변과는 대조적으로 언론과 하이텔에서의 반향은 적지 않았다. 같은 달 26일에는 강원도민일보, 27일에는 중앙일보 사회면에 관련 기사가 났고, 29일에는 전교조에서 ‘강제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이 사라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이윽고 8월 3일 하이텔에서는 [최우주 군의 학교 문제, 함께 따라가 봅시다]라는 제목의 토론방이 개설되어 학생 인권에 관한 논의를 확산시켰다. 당시 하이텔 토론방에서는 최우주 씨의 문제제기 방법에 대한 비판과 재반박에서부터 체벌, 보충수업, 분반, 입시교육, 심지어 선거연령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청소년문제와 교육구조 전반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 씨 본인은 몇몇 교사로부터 자퇴나 전학을 가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한때 교장으로부터 ‘민원을 취하하고 학교에 순응하든지, 혼자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을 빠지든지, 아니면 전학/자퇴를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기도 했다.

개혁도 민주화도 말뿐, 변하지 않는 학교

최우주 씨로부터 촉발된 일련의 논쟁은 95년 당시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교육과정의 획일성과 경직성 개선, 다양성과 인간성 존중이라는 교육목표를 내건 6차교육과정이 도입되었고, ‘5.31 교육 대개혁’ 방안이 정부 차원에서 발표되었다. 5.31 교육 대개혁에 담긴 ‘경쟁력 향상, 교육의 질 제고’는 교육에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도입, 경쟁교육을 한층 심화시킬 가능성과 학교 구성원들의 부담을 불필요하게 증가시킬 위험을 안고 있어 교육계 내부에서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당시 하이텔 토론방에서도 말뿐인 교육 청사진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근데.. 교육개혁이라는 게 대단히 애매하고 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군요. 현재 학교에는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말만 있고 구체적인 말도 안 나오고 있으며 선생님들께서는 교육개혁 신경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한편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국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민주화의 열기가 곳곳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 입장에서 볼 때 학교는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질서를 강고하게 갖추고 있었다. 하이텔 토론방에서도 변하지 않는 학교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우리들은 20세기에 살고 있고 이젠 21세기라는 또 다른 세계로 달려나갈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들의 학교라는 곳은 아직도 19세기적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 시대 방법으로 교육을 하고 학생을 이끌고 또 학생들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일고 있는 민주화 흐름과 달리 학교의 반민주적 질서가 학생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촉발시킨 요인이 되었던 셈이다.

또한 ‘민주화’라는 말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가고 또 금방이라도 사회가 민주화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인권’이나 ‘기본권’, ‘헌법’ 등의 개념이 좀 더 빈번하게 사용된 점도 최우주 씨가 헌법소원을 생각하게 된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온라인, 우리들의 오아시스

하이텔 토론방은 최우주 씨 사건이 하나의 ‘반짝’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다른 청소년들이 서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결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회에서 발언의 통로를 갖지 못하고 있던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소통하고 표명할 수 있는 매체에 목말라 있었다. 당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PC통신 공간은 그런 청소년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매체인 온라인 공간에 몰려들면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등은 사회적인 광장의 역할을 했다. 학교에서 당한 모욕적인 일, 부당한 일을 이제는 온라인 공간에서 다수와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문제의식이나 해결방안에 대한 고민 등도 공유할 수 있었다. 최우주 씨가 적극적으로 헌법소원까지 생각하며 민원을 냈다는 자체도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 것이었으나, 그 행동이 다른 청소년들의 의식이나 의지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준 것은 분명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학생, 인권을 말하다

최우주 씨의 글은 청소년에게도 기본권, 인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헌법소원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부터 청소년, 중고등학생도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의 주체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최 씨의 글은 다시 읽어봐도 유의미한 탁월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강제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은 학생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으로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 이렇게 부당하게 감금된다는 점에서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 방학 동안 강제학습 때문에 교회수련회에 참석할 수 없으므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 등 최 씨는 이 글에서 헌법의 구체적 조항을 열거하며 자신의 권리를 조목조목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토론에 참여했던 김한울 씨는 “헌법소원은 단순한 해결방법이 아니라 학생도 ‘인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행위였다”고 말했다. 전영민 씨 역시 “‘학생도 사람이다'라는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하이텔 토론, 학생인권단체 결성으로 이어져

최우주 씨 사건은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김한울 씨는 “최우주 씨가 구체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토론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점점 이런 학교 문제가 하루 이틀만의 문제냐, 토론만 해서 뭐가 달라지냐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번에도 흐지부지 끝나서는 되겠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몇몇이 이런 분위기에 공감했고, 토론 종료 후에 <학생인권회복회> 결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라고 회고한다. 하이텔 토론방에서 「학생인권회복회....모집 합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던 전영민 씨는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모일 수 있고, 뭔가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는 힘이 됐다”고 말한다. 이처럼 최우주 씨 사건은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고, 직접적으로는 <학생인권회복회>(이후 학생복지회로 바뀜)를 탄생시키는 결실을 맺게 된다.


중고등학생 운동, 인권운동으로 부활하다

지난 3월 열린 청소년인권활동가 워크숍. 이제 청소년들이 인권의 이름으로 억압에 맞서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인권운동사랑방

지난 3월 열린 청소년인권활동가 워크숍. 이제 청소년들이 인권의 이름으로 억압에 맞서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청소년인권운동사의 측면에서 최우주 씨 사건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의 참교육 운동과 함께 타오르다 쇠퇴해가던 중고등학생 운동을 ‘인권’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일으켰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사건을 계기로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에 <학생복지회>가 생겨나면서 인권의 측면에서 청소년문제·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 성장해갔다. “학생인권”이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널리 퍼져나간 것 또한 학생복지회 결성 이후부터였다. 이후의 문제제기나 운동에서 학생 인권이 전면에 나서게 된 이유도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시도가 끼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까지의 청소년운동은 비록 인권이슈를 다루고 있기는 했지만, 인권 개념을 전면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우주 씨 사건 이후 인권개념을 중심에 둔 새로운 의미의 ‘청소년 인권운동’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인권오름 제 2 호 유윤종(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
[인권오름] 기획-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②
87년 항쟁과 고등학생운동, 청소년인권운동의 뿌리
 
2006/6/2
인권운동사랑방

1987년 12월, 150여명의 고등학생이 명동성당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주교육 쟁취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19일부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농성 시작일에 대한 기억의 혼재  
* 신문 등 공식 기록상으로 농성 시작일이 19일로 되어 있지만, 농성 참가자의 증언 중에는 16일 대통령 선거 당일부터 명동성당에 모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군부독재 정권과 한 몸통이나 다름없었던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12월 16일)된 직후. 당시 농성에 참여했던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회’(서고련) 학생들은 13대 대통령선거는 부정선거인 만큼, 비록 민정당이 승리했더라도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87년 민주항쟁의 상징이었던 명동성당으로 찾아들었다.

민주화 세력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일어설 것이라는 이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5박 6일간의 투쟁은 쓸쓸히 막을 내렸고 농성 참가자들은 제각각 흩어졌다. 그러나 이 농성은 80년대 중반부터 전사회적으로 확산됐던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매우 주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87년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던 민주화의 불꽃이 미완의 불꽃으로 사그라질 위기에 처했을 무렵,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했던 고등학생들의 외침은 그만큼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 고등학생들의 운동이 좀더 조직화된 방식으로 학교의 변화를 넘어 정치의 중심으로까지 파고들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민주화라는 대격변이 열어젖힌 ‘인식과 실천의 해방구’가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두환 신군부정권 하에서 강요됐던 억압적 입시체제 아래서 바로 옆 친구들과의 치열한 경쟁만을 강요했던 학교에 대한 저항의지는 그렇게 민주화의 열기와 맞물리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학내 민주화와 인간다움을 찾아

80년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삼청교육대 설치 등 이른바 ‘사회정화’ 조치를 통해 정권의 기반을 다진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은 교육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7.30 교육개혁조치’ 이후로 강화된 입시경쟁, 학도호국단을 통한 군대식 통제도 고등학생들의 열망과 외침을 막지는 못했다. 특히 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는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학내 민주화와 인간다움, 비리 척결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청구상업학교 교사, 학생들이 서울시교위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인권운동사랑방

청구상업학교 교사, 학생들이 서울시교위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85년 3월 의정부시 복지중고에서는 잡부금 징수 금지, 학교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수업거부와 인근 야산에서의 농성이 시작됐고, 같은 해 목포여상에서는 여고생들이 학교측의 교사 탄압에 항거해 수업 거부, 등교 거부, 시험거부 등으로 맞섰다. 85년 ‘민중교육지’에 대한 정권의 대대적 탄압 이후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오른 교육민주화 운동은 고등학생운동의 성장에도 불을 댕겼다. 이듬해인 86년 5월에는 원주고를 시작으로 원주시 몇 개 고등학교에서 자율학습을 거부하고 학생들이 집단 귀가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고, 7월 서울의 중대부고에서는 2학년 학생 5백여 명이 두발자유화, 자율학습 폐지, 강제 보충수업 금지 등의 요구를 내걸고 운동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비록 이들의 투쟁이 연속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와 인간다움에 대한 열망은 그렇게 전국 곳곳에서 학교의 빙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반장에서 대통령까지 직선제로

87년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생들의 요구는 점차 학도호국단의 자리를 대신한 학생회의 직선제 쟁취 쪽에 무게를 두기 시작한다. 학생 자신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공감대를 넓혀나갔고, 대통령 직선제 쟁취의 경험은 학생회 직선제 쟁취 운동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87년 3월 진주 대아고에서, 4월에는 서초고에서 직선제 학생회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6월항쟁 이후에는 그 움직임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경기도 파주여종고, 광주 대동고, 서울 석관고, 구로고 등 전국 학교에서 폭발적인 시위가 이루어졌는데, 민주적 학생회 쟁취라는 요구를 좀더 분명히 내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백일이 넘게 장기적인 투쟁을 벌였던 파주여종고, 2천여명이 수업거부에 들어간 이래 명동 가두시위와 시교위 농성 등으로 확대됐던 정화여상 등의 사례는 당시 고등학생 운동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는 좋은 보기이다. 그 결과 88년 말 서울 1백 여교, 전국 400 여교에서 직선제를 얻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인권운동사랑방
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학생회 직선제 요구는 고등학교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88년 서울 석관중학교에서는 ‘민주 돌곶이회’라는 소모임이 결성되어 간선제 학생회장 당선을 한동안 저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 교외에서 진행된 4.19 기념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모임을 이끌었던 권혜진 씨(88년 당시 중3)에 따르면 처음에 8명으로 시작했던 모임이 2학기에 들어서면서 60명으로까지 확대됐다고 한다. 혜진 씨는 “87년 6월 항쟁에서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자는 사회적 외침이 중학생이었던 당시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시기였다.”라고 회상한다. 그는 “옆 학교인 석관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 직선제운동을 했기 때문에 ‘종이비행기 날리기’, ‘아침이슬 부르기’ 같은 시위도 볼 수 있었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고, 후배들도 만나 직선제하자고 설득하고 다녔다.”라고 설명한다.

민주항쟁의 경험, 조직화에 불 댕겨

이러한 학내 운동에 기반이 된 것은 각종 소모임들이었다. 87년의 사회적 격랑을 전후하여 사회모순과 교육모순을 함께 고민했던 학생들은 학교별, 지역별로 다양한 비밀 소모임을 꾸리게 된다. 용산고의 ‘용민민투’, 석관고의 ‘석민연’, 대원고의 ‘목마름’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소모임에서는 학교문제를 고민하면서 교내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한편, 사회 문제에 대한 토론과 학습도 이뤄졌다. 고등학생 소모임은 87년 민주항쟁의 영향을 받은 고등학생들의 자발적 참여와 함께 고등학생운동을 고민해온 기존 활동가들의 결합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당시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활동가였던 강주성 씨는 “그때는 지역별로, 학교별로 소모임이 많았다. KSCM이나 푸른나무 이야기모임 같은 공개단체에서 활동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언더에서 소모임으로 활동하던 학생들도 많았는데, 그런 모임을 지원하는 성인활동가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당시 개별 학교 차원을 넘어 고등학생들이 참여했던 대표적 공개단체는 흥사단과 KSCM이 있다. 흥사단 서울지부가 개최한 87년 11월 학생의 날 행사에는 1천5백여 명의 중고생이 참석하여 공식적인 대중집회의 물꼬를 텄다. 흥사단은 그 후 고등학생아카데미(고아)를 통해 고등학생들의 사회참여 활동을 지원했고, 특히 KSCM과 함께 4.19 기념행사나 학생의날 행사를 대규모로 열어 당시 학생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KSCM은 88년 2월 ‘자율적 학생회를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는데, 이 공청회에만 4~5백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이들 공개단체들은 ‘학생회비 운영’, ‘소모임 운영’에 대한 공청회를 계속 이어가면서 고등학생 운동의 의제를 던지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푸른나무 출판사에서 만든 <푸른나무> 무크지를 통해 모인 ‘푸른나무 이야기모임’도 있다. <푸른나무>는 당시 진보적 교사와 학생들에게 알려진 청소년 잡지로 학생회 직선제와 자율적 학생회 운영에 대한 토론,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읽자는 주장 등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내용의 공개단체 활동은 9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푸른나무 이야기 모임과 KSCM을 지도했던 강주성 씨는 87년을 기준으로 전후 고등학생 운동의 차이를 ‘대중성’에서 찾는다. 주성 씨는 “고등학생 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도 학생회 직선제 구호나 공개활동에 대해 ‘정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중운동이 되려면 대중들의 요구와 정서에 맞게 내용과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한다. 당시 고등학생 운동으로 활발히 전개된 학생회 직선제 운동은 대중성에 기초한 활동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고등학교에서 흥사단 활동을 한 권혜진 씨는 ‘조직화’에서 특징을 찾았다. “87년 이전은 자발적 운동의 태동기라고 생각된다. 그러던 것이 87년 6월 이후 조직적 흐름을 가지게 됐다.” 87년 이전의 고등학생운동이 산발적이고 고립적으로 이뤄졌다면, 87년 이후의 도드라진 점은 바로 대중성에 바탕을 둔 조직화가 이루어진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인권운동의 맹아이자 뿌리

당시 고등학생 운동은 민주화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 고등학생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독재정부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나아가 모순으로 얼룩진 사회에 파열음을 내며 조금씩 열려지고 있던 변혁의 공간에서 고등학생들은 자신들만의 운동 의제도 찾아나갔다. 민주화와 자신들의 삶 사이에 가교를 놓으면서 독자적인 운동의 세력화를 꿈꿨던 것. ‘학생자치권 보장’, ‘두발자유화’, ‘보충.자율학습 철폐’ 등의 구호는 학교의 민주화, 학생 삶의 민주화를 요구했던 것이었다. 당시 터져 나온 구호들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학생 청소년 인권운동에서 핵심적인 과제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당시 고등학생운동이 지금의 청소년인권운동의 맹아이자 뿌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급작스런 성장만큼 한계도 존재했다. 개별 학교를 잇는 조직적 연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에 발맞추어 상대적으로 운동의 경험이 적은 고등학생들에게도 너무 많은 짐을 지우면서 부담을 주었던 점도 힘겨움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용산고에서 ‘용민민투’ 활동을 한 서준섭 씨는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면서 현재 인권운동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전한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 고등학생 운동이 제 삶의 뿌리에요. 정신적으로 성장했던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그 어린 나이에 사회랑 부딪치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시행착오도 겪었고. 지금 친구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했던 친구들도 지금 와서 약간 회한 같은 게 있으니…. 그 나이에 움직이고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고, 그렇게 하려면 강해야죠. 무척 강해야지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인생에 밑거름이 되고 계속 발전할 수 있고…. 청소년들이 많이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인권오름 제 6 호  전누리(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들불처럼 번진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
[인권오름]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③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2006/6/29
인권운동사랑방
꺼지지 않은 불씨

1987년 6월 항쟁의 불꽃은 한 번 타오르고 끝날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운동’(*)도 그 영향을 받은 곳 중 하나였다. 청소년들은 1987년을 계기로 더욱 본격적인 자주적 학생회 운동, 교육 정상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고운의 불길은 거기에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학생회 직선제 운동을 비롯한 1987년 직후의 운동은, 오히려 1989년부터 시작된 ‘참교육 운동’의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1980년대 학생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다. 전두환 정권은 본고사 폐지와 내신성적 반영, 대학입학인원 확대, 전일수업제 대학 운영, 과외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교육정책을 발표했다. 내신성적 반영은 고등학생들을 더욱 성적경쟁 속으로 내몰리게 만들었다. 과외금지 이후 과외가 음성화되자 정부는 학교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전면 허용하였고, 그 결과 학생들은 강제적인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그 당시의 인사는 그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생들도 전두환 정권의 정책에 따라 뒷전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열악한 상황에 처했다. 입시경쟁 강화와 학교에서 밤 12시가 넘어서야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억압적인 학교 상황, 열악한 교육 등이 청소년들에게 미친 영향은, 1980년대의 자살학생 수 증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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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청소년들의 유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자살했던 학생들이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써있었다. “친구들은 감정도 없는 사람 같고 다 똑같아 보입니다. 전혀 개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친구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어른들이 밉습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입니까? 저희는 쓸모없는 2차 방정식 값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까?” 특히 1986년 서울사대부속여중 3학년 학생이 남긴 유서에 쓰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구절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켜 같은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견딜 수 없는 현실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만들었다.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참교육”을 내세우며 창립식을 가졌다. “참교육”은 일그러진 교육 현실에 대한 저항의 기치였다. 전교조 창립 초기부터 활동했던 교사 김융희 씨는 당시 참교육 운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애들을 독재체제에 적합한 인물로, 말단 병사나 노예처럼 압박하는…. 그런 현실에 대한 안티감이 (참교육 운동은) 굉장히 강했다. …학교는 애들 성장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군대교육이나 일부 교장의 사리사욕이나 기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깐. 그런 것들이 아팠다. 완전 비교육자들이었고 비교육적인 분위기였다. 이건 교육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억압적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기에 전교조의 “참교육” 구호는 괴로운 학교생활을 경험하고 있던 청소년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1989년에 고등학생이었던 구정인 씨(미림여고 소모임 활동)는 “입시경쟁 때문에 학생들이 3일에 한 번씩 죽는 상황에서 교사들도 전교조를 통해 참교육이라는 구호를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죽이는 교육이 아니라 살리는 교육…. 교사들의 양심선언이었다. 단순히 노조운동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살리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콩나물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콩나무를 키우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구호가 너무나 호소력 있게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라고 회상했다.

그랬기에 1989년에 시작된 ‘참교육 운동’은 교사만의, 전교조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참교육 운동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전교조였고 그것을 주도한 것도 전교조였지만, 참교육 운동의 주체는 비인간적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모든 교육주체들이었다. 전교조의 생각과 학생들의 생각이 완전히 일치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방향과 대의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청소년들은 참교육 운동을 지원하는 역할뿐 아니라 스스로 참교육 운동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했다.

“선생님을 지키자!”에 담긴 뜻

판화과 김준권의 1990년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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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과 김준권의 1990년도 작품 "얘들아! 얘들아!"

정부는 전교조에 대한 대대적 탄압에 나서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에 대한 해임.파면.면직과 함께 사법처리를 강행했으며 그 결과 1989년 9월까지 1700명이 넘는 교사가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전교조 교사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불만이 누적되어 있던 차에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던 ‘좋은 선생님들’에게 핍박이 가해지자 인간적인 분노까지 더해져 학생들의 운동은 대중적으로 번져갔다. 운동 속에서 학생들이 내걸었던 “선생님을 지키자!”라는 구호는 그런 분노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전교조 교사를 지지하고 지킨다는 것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참교육의 기치에 대한 동의였고, 강제적 보충수업.자율학습, 입시경쟁 등으로 얼룩진 교육에 대한 반대였다.

학생들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리본달기, ‘밤샘공부’(하교 거부), 수업시간에 전체 학생이 뒤로 돌아앉기에서부터 점거농성, 단식농성, 시위, 심지어 투신까지…. 학생들은 개별 학교 단위에서 전교조 교사들을 지키고 참교육을 실현시키기 위한 저항에 발 벗고 나섰다. 광주 광덕고와 문성고 학생 3천여 명은 이사장실 점거 농성으로, 광주 동아여중고생 4천여 명과 송원학원의 중고생 8천여 명은 운동장 농성으로 징계위원회를 무산시켰다. 서울 구로고등학교의 류호철 씨 등 2명은 “직위해제 철회” “참교육 실현”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3층에서 투신하여 참교육에 대한 절절한 열망을 보여줬다. 인천 세일고의 경우, 해직된 선생님 수업에 대리강사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수업을 거부한 채 한 달 간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전교조 학생사업국에 보고된 것만 하더라도 1989년 한 해 동안 전교조를 지지하며 투쟁에 나선 전국 학생들의 수가 250여개 학교, 47만 명을 넘어섰다.

단위 학교를 넘어선 싸움

싸움은 개별 학교 단위에서만 이루어지진 않았다. 6월 17일 연세대학교 광장에서 열린 ‘참민주교육을 위한 고등학생결의대회’를 비롯하여,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 ‘부산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부고협), ‘마산.창원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마창고협), 그리고 ‘나주지역고등학생연합’, ‘목포지역고등학생연합’ 등의 결성은 학교를 넘어서 지역별로 이루어진 고등학생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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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광고협은 최초로 결성된 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광고협은 20여개 학교에서 중고생 2만여 명이 참여한 연합집회를 조직하고, 같은 날 5천여 명이 참가한 전남대 시위 등을 실행했다. 이후에도 광고협은 광주 시내 전학교 학생들의 통일된 행동으로 해직교사들의 출근 투쟁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자주적 학생회 투쟁의 결실로 생긴 학생회연합회가 발전하여 이루어진 부고협도 탄압을 뚫고 부산대에서 발대식을 치르고 전교조를 지지하는 투쟁에 나섰다. 마창고협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의 연합체들도 정부와 학교의 탄압 속에 힘겹게 참교육 운동을 해나갔다.

정부와 학교의 탄압으로 많은 학생들이 징계를 당함에 따라 광고협 이형준, 부고협 의장 황순주(둘은 11월22일 시작), 남서울상고 학생회장 김설준(11월23일 동참), 마창고협 부의장 전경국(11월26일 동참) 등 4명의 학생들은 평민당 중앙당사에서 구속학생 석방과 학생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단식 투쟁을 벌여 각 지역 고협들의 연대를 실천했다. 학생들은 4인의 단식 농성을 지지하며 동조 행동에 나섰다. 광고협 집행부 26명이 전남대에서 4일간 동조단식을 했고, 전남대 5.18 광장에서 6백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지지집회를 가졌다. 부고협 70여 명은 부산대에서 이틀간 단식농성을 벌였고, 서울 평민당사를 격려 방문한 학생 2백여 명도 규탄집회를 가졌다. 전교조도 호응하여 단식투쟁 지지와 전교조 탄압 분쇄를 위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고등학생 대표자 4인은 12월 2일 ‘학생탄압 분쇄 및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사, 학생, 학부모 결의대회’를 가진 후 단식농성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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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학생들은 학교나 정부와 싸우는 과정에서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1991년 전남 보성고의 김철수 씨는 노태우 퇴진과 참교육 실현을 외치며 분신했다. 이런 식으로 김철수 씨를 비롯하여 심광보 씨(1990년 분신), 김수경 씨(1990년 투신) 등이 전교조와 학생들에게 가해진 탄압에 죽음으로 항거했다. 교사 김융희 씨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당시 투쟁에서 목숨을 던진 학생들”이라며, 학생들이 죽은 소식을 접했을 때 정말 분노가 들끓었다고 회상했다.

독자적인 길을 닦은 청소년들

이처럼 참교육 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교조 교사들의 양심적인 외침과 요구가 청소년들의 요구와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다. 비인간적 교육 속에서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릴 수 없었던 청소년들은 그런 현실을 바꾸고자 끊임없이 싸워왔으며, 그 싸움은 전교조 창립이라는 계기로 더욱 촉발되었다. 전교조 교사와 학생들의 유대 속에 운동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갈 수 있었고, 학생들은 전교조 교사가 우리 이야기를 대신해주고 우리 대신 희생당한다는 생각에 참교육 운동에 한층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신동아> 89년 9월호 기사. '충격보고'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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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89년 9월호 기사. '충격보고'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한편으로 참교육 운동 때 보여준 학생들의 동원력과 조직력은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의 저항의 구심점은 1987년 6월 항쟁의 흐름 속에 조직되어 온 소모임, 동아리, 학생회 등이었다. 학교 안에 존재하던 동아리나 소모임 등에서 학생들은 사회비판적 의식을 키워가고 있었고, 또 그런 조직들의 자주적 학생회 투쟁으로 세워진 직선제 학생회에 적극적이고 의식 있는 학생들이 진출하면서 학생회 조직은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흥사단 아카데미나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YMCA 등의 공개단체들도 조직적인 운동에 한몫했다.

구정인 씨는 “고1부터 탈춤반 활동을 하고 봉천놀이마당에서 청소년패였던 ‘바발패’ 패장이 되었는데, 학생의날 준비위원회 회의를 나가보니 KSCM, 흥사단, 바투 등 단체와 개별학교 소모임들이 많이 와 있었다. 이때 행사를 하고 처음 큰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라며 소모임들이 참교육 운동에서 한 역할을 증언했다. 구정인 씨는 미림여고에 재학 중이던 1988년 12월에 학내 소모임을 꾸리고 학생회 직선제 투쟁과 학생회 선거운동을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다가 참교육 운동이 시작되자 그 흐름을 이어갔다. “우리 학교 교사 한 명이 전교조였는데, 이분이 징계위에 회부가 된 상태였다. …전교조가 계속 출근투쟁을 하니까 우리 소모임에서 유인물을 뿌리는 상황이 됐다.”라는 것이다. 미림여고 학생들은 이후 을지로에 있던 재단사무실 앞에서 징계위원회 개최 저지 시위를 열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소모임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부고협 1기 의장을 맡았고 단식투쟁을 하다 제적당했던 황순주 씨(1987~1989년 용인고 학생회 활동)는 1988년에 학내 시위를 벌여 직선제 학생회를 쟁취했다. 황순주 씨는 용인고 최초의 직선제 학생회장이 되었고, 이후 학생회장들의 모임을 만들어 서로 고민을 공유하였다. 그러다가 전교조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1989년 8월 이 학생회장 모임은 부고협으로 전환된다. 황순주 씨는 자율학습 반대 등을 명확하게 제시하며 출마하여 1기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전교조 사수 투쟁 이전부터 청소년들이 자신들만의 주체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황순주 씨는 참교육 운동과 그 이전부터 있어온 고등학생운동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산지역 고등학생들도 이런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우리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학생을 대표하든 학생회를 대표하든 연합체 형식의 조직을 준비해서…. 당시 정권에서 전교조 교사가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선전했는데, 선생님을 뺏기는 상황이었고 교육의 문제가 사회문제로 촉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문제도 같이 제기하자면서 나갔던 것이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각각 주체별로 준비를 해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전교조 투쟁만을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었다. 교육 주체로 자주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전교조 교사를 보호하는 것은 일부분이었다.”

학생들이 전교조 지지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운동을 펼치려 했음은 여러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광고협은 “우리는 단순히 교원노조 지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교육의 주체인 학생으로서 당연히 주장해야 할 권리인 참교육과 민주교육을 목청껏 부르짖으며 학내의 비민주적 요소들을 척결하고 학내 민주화를 쟁취하려는 발전적인 싸움으로 한 차원 높은 싸움을 온몸으로 전개해야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1989년 7월 20일 발표했다. 마창고협도 같은해 9월 30일 발족선언문에서 “우리 학우들의 단결된 힘으로 우리를 입시 전쟁과 철저한 이기주의적 인간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 풍토를 개선하고 민주 시민의 예비단계로서 모든 학생회 활동들을 자율적으로 민주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학우들의 자율적 능력을 무시하고 단지 의무와 순종적 인간만을 요구하는 관료주의적 교육자와 재단에게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여야 하며 또한 이것은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라며 그 창립목적을 밝히고 있다.

탄압받는 고등학생운동

참교육 운동을 거치면서 고등학생운동은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정부의 탄압은 주로 기존의 대학생운동 세력 등이 중고등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참교육 운동에서 중고등학생들이 격렬하고 대중적인 힘을 보여주자 직접 학생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그 형태가 바뀌었다.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이후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하였고,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운동세력들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중고등학생들을 회유하는 한편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정부는 학생회나 소모임 등에 대한 전면 압박에 들어갔다. 체벌과 징계를 통해 주동자들을 처단하는 한편 학생회의 독립적 예산권을 뺏는 등 학생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학생회의 권한을 상당부분 위축시켰다. 참교육 운동에 역량을 집중한 조직들은 그러한 탄압 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교사 김융희 씨는 당시 정부의 탄압을 이렇게 전했다. “애들 요구를 수용해서 변화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주동자에 대해서는 엄격히 탄압했다. 교사와 경찰은 물론 교장까지 나선 전방위 압박에다 굉장히 엄한 체벌과 징계도 있었다. 학생회도 제도적으로 축소시켰다. 그때는 학생회비를 따로 걷어서 학생 예산권이 독립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없어졌다. 대대적으로, 그때부터 억눌린 게 지금까지도 온 것이다. 별로 회복이 안 되었다.”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이 보여준 것

정부는 참교육 운동을 탄압하면서 “전교조가 학생을 선동한다.” “전교조가 학생을 이용해 먹는다.”와 같은 비난으로 청소년들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투쟁을 폄하했다. 실제로 학생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서는 것을 보수적인 성인들은 상당히 불안하게 느꼈기 때문에 이런 선전은 먹혀들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주체로 선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성인 집단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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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은 전교조에 완전히 종속된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전교조 사수와 학생자치권 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기도 했으며 투쟁 과정에서 자율학습 폐지 등 학생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비록 “참교육”에 대한 공감이 학생들의 대중적 투쟁을 끌어내긴 했지만 당시 학생들의 운동을 주도했던 청소년들은 학생들의 요구를 전교조 교사들을 통해 대변되기만을 바라진 않았던 것이다.

청소년들이 전개한 참교육 운동에 대해 구정인 씨는 “4.19, 5.18에 이어 고등학생이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현실화한 것이었다. …자기 현실을 바꾸는 것뿐 아니라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생각이 확고했다.”라고 말했다. 청소년들 스스로가 사회변혁의 주체임을 참교육의 불꽃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고등학생운동은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회변혁.민주화의 관점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혼재해 있었던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오성 씨(1989년~1991년 대원고에서 활동)에 따르면, 그 당시에도 교육이나 학생들의 삶, 권리에 집중한 쪽과 정치적 이슈에 집중한 쪽의 내부적인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앞서 인용된 마창고협 발족 선언문 등 당시 각종 선언문이나 성명서의 표현들도 청소년들의 권리 의식을 보여주며, KSCM이 발표한 결의문에는 “학생들에 대한 극심한 인권 탄압이 수시로 행해지고 있는 이러한 교육현실은 실로 분노할 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등 “인권”의 언어가 조금이나마 엿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민주화’라는 흐름 속에서 청소년들의 권리 찾기가 독립적인 운동으로 나아갈 기미를 보이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1980년대 고등학생운동의 흐름은 비록 대대적인 탄압과 사회운동 전반의 침체로 인해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지만, 그 당시부터 청소년들의 권리의식 성장과 청소년인권운동의 조짐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1980년대~1990년대 초반에는 “청소년운동”이란 말이 아닌 “고등학생운동”이란 표현을 주로 썼기에 그 현장성을 존중하여 이렇게 표기했다. 대학생들의 운동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중학생들도 참여하긴 했으나 다수가 고등학생이었다는 점에서 고등학생운동이란 용어를 쓴 것으로 보인다. “중고등학생운동”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 참교육 운동 이전의 학생들의 저항에 관해서는 이전 기사 “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를 참고하기 바란다.
 

인권오름 제10호 유윤종(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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