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잘 만든 교과서 하나, 열 조직 안부럽다 -《레즈를 위하여》,《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레즈를 위하여 -실천문학사, 장석준, 황광우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책벌레, 리오 휴버먼/장상환


잘 만든 교과서 하나, 열 조직 안부럽다 -《레즈를 위하여》,《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4년 8월호
http://www.ynlabor.net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레즈를 위하여》, 황광우, 장석준 공저, 실천문학사(2003년)

80년대 중반, 수많은 청년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변혁운동의 한 길'에 던지고자 할 때, 그들의 곁에는 두 권의 책이 있었다. 선배들이 물려주었을 수도 있고, 공단과 학교 앞 낯선 사회과학서점에 들어가 구입했을 수도 있는 책 두 권은 이 땅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다수의 '의식화된 활동가'들을 양산했다. '정인'이 쓴《들어라 역사의 외침을》과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가 바로 그것이다.

《레즈를 위하여》공동 저자 중 한 명인 황광우의 필명이 바로 '정인'인데, 그는 저명한 시인 황지우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 책의 또 다른 저자인 장석준은 90년대 초반 진보학생연합의 주요 활동가였고, 현재는 민주노동당 기획부장을 거쳐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 학습마당은《공산당선언》과 관련된 내용을 한국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역사와 결합해 읽기 쉬운 수필 형식으로 써내려 갔다. 제1부는 이 책의 주요 부분이기도 하다.
제1부는 80년대적 향수로 가득 차 있다. 서툴지만 비장하고, 순수했으며, 과도하게 단순했지만 명쾌하고 분명했던 그 시대를, 저자는 일종의 반성과 희망적인 전망으로 그려내고 있다. 80년대 (정파를 불문하고) '변혁운동의 시대'를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분위기가 꽉 들어차 있는 제1부는 그러하기에 90년대 이후의 독자들에게는 '과거의 신선함'과 '역사의 치열함'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비망록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80년대 정서와는 별개로 황광우 개인의 경험이 짙게 베어 있음으로 해서 나타나는 과거 편향적인 평가들, 진보정당, 민주노동당 전망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는 과거와 미래에 현재를 종속시킨다.

제2부는 맑스의《공산당선언》전문을 다시 번역한 부분이다.

제3부는 (아마도 장석준이 쓴 부분이라 생각되는데), 선언 이후 현재까지 되풀이되는 논쟁에 대해 간략한 요약을 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레즈를 위하여》에서는 장석준의 유려한 필체를 구경할 수 없다. 다소 딱딱한 주제들(자본주의 국가에 대하여, 폭력혁명에 대하여)을 한정된 분량 안에 채워 넣으면서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은 책들과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자칫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개념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내용은 월드컵경기장이지만, 어쨌든 독자의 상상력은 경기장 안에 갇히고 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이론적 논의보다는 한국 역사에 있어서 공산당선언 내용이 갖는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게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닌가?

소위 '모래시계 세대'인 황광우가 '붉은 세대'인 장석준(동의할까?)과 같이 작업한 것도 흥미롭고, 80년대와 90년대 주요 필진이 만났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한국의 사회운동이 사회적 주도력을 상실하면서, '운동권'은 이 사회에서 가장 '고리타분하고,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며, 공부 더럽게 안하고, 현실을 모르며, 고집 센'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예전의 '운동권'은 현실과는 때때로 멀 때도 있고, 가까울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자신의 사회 내에서 가장 선진적이었고, 변화에 민감했으며 스폰지처럼 자양분을 과감하고 빠르게 흡수했었다.

지금, 책 한 권 달랑 읽고 후배 앞에서 당당하게 5년을 버티는 운동가들과, 상부조직의 문건 외에는(혹은 그것마저도) 읽지 않는 '간 큰 활동가'들에게 천만 노동자의 삶과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각 사회운동의 주요조직들의 임원 선거들이 끝나서 일수도 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부와 학습, 투입하고자 하는 열망'이 곳곳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열의가 높은 분들이 그동안 어떻게 참아왔는지 놀라울 정도로 '학습의 붐'이 일어나고 있다.
선배를 바라보고 운동하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후배와 미래를 바라보고 투자하고, 운동하는 것이 현재 우리 노동운동의 긴급한 과제라고 할 때, 후배들에게 '술 한번 사기전에, 책 한 권 사주고 술마시는 풍토가 빨리 확산되어야 한다.

건강한 청년 노동자들의 '웰빙 노동생활'을 위해 선배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레즈를 위하여》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87년 노동자대투쟁 세대'가 '새로운 노동운동의 후속세대'에게 권해줄 수 있는 책이다. 그런 점에서 황광우와 장석준, 두 저자들의 작업은 의미있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괜찮은 운동 교과서'들이 있는가 이다. '잘 만든 교과서 하나, 열 조직 안 부럽다.' 현 시기,《공산당선언》이라는 '개취급' 받는 '빨간책'을 대중적인 필치로 한국의 역사와 결부시켜 그렸다는 점에서, 또한 새로운 운동세대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장상환 역), 책벌레(2000년)


2004년 2월 27일, 미국의 저명한 맑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Paul Marlor Sweezy)가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폴 스위지는 '빨갱이 사냥'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49년 당시 미국 사회에서 좌파잡지 <먼슬리 리뷰> 창간을 주도했는데,《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의 저자 리오 휴버먼 역시 이에 함께 했다.


휴버먼은 PM이라는 노동자 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국선원노조의 교육부장을 지내기도 한 미국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휴버먼은 매우 어려운 급진적인 내용을 쉽게 쓸 수 있는 재주를 지녔으며, 수많은 자료를 원용해 앙상한 가지가 아닌 풍성한 역사의 숲을 그려내는 진지함도 지녔다.


이 책은 1936년도에 나온 책이다. 벌써 68년이 지난 책이다. 그러나 역자도 말하고 있듯이 아직까지도 이 책의 효능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지난 시기 스탈린에 의해 왜곡된 역사발전 5단계설이니, 자본주의 이행의 도식적 설명을 달달 외웠던 경제사 학습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책은 생생한 역사를 증언해주며, 현재를 돌아보게끔 한다.


조사 대상 129가구 가운데 96가구에서 16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일하고 있었으며... 이 어린이들의 절반이 12세 미만이었다. 그 중 34명은 8세 이하였고, 12명은 5세 미만이었다. 2-3세 어린이는 2명이었다... 정말 충격적인 사실이 아닌가? 이 보고서는 선대 제도가 성행하던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상황에 대한 보고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인용문이 묘사한 조건은 언제, 어디의 조건이었을까? 시간: 1934년 8월, 장소: 미국 코네티컷 주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출현한' 자본주의의 역사는 현재도 되풀이되고 있다. 저자는 괴물과 같은 자본주의의 역사의 종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에 대해 동인도 제도의 일화를 통해 설파하고 있다.


원숭이(자본가)는 코코야자 열매에 손을 밀어 넣어 설탕을 쥐고 주먹을 빼려고 애쓴다. 그러나 구멍이 작기 때문에 원숭이의 꽉 쥔 주먹은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탐욕 때문에 원숭이는 파멸한다. 왜냐하면 원숭이는 목표물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한편으론 자본주의 이행의 경제사와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전망을 담고 있는 경제사 관련 도서임과 동시에, 중간중간 경제학자들의 이론들을 역사적 맥락과 함께 쉽게 풀어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저작이다.


얼마 전 개봉된 멕시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의 연인이자, 유명한 멕시코 벽화운동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이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데, 이 표지에 실린 그림 안에는 봉건제와 자본주의 이행, 성직자와 정치가, 제국주의자와 식민지 인민 모두가 등장한다. 표지가 책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매우 재미있는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출판사의 단조로운 편집과 글꼴은 다소 흠이기도 하다.

<2004. 8. 1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래의 도전, 연대의 제안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출판사: 아이필드



         아래의 도전, 연대의 제안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리뷰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4년 6월호
http://www.ynlabor.net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지난달에 소개한《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를 본 몇몇 사람들은 절망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막막함을 느꼈다고 필자에게 말씀을 해주셨다. "너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너의 영혼은 판매되었으며, 곧 너라는 존재는 사라졌다"고 한다면 세상 살 맛이 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실 바쁘게 살아가는 동지들에게 세상의 '총체적 변화'를 느낄만한 시간이 없는 게 사실이고, 따라서 초국적 자본의 물질적 힘을 압축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여건상 쉬운 일이 아니다. 장시복 선생이 쓴《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를 소개한 이유는 '시간 없는 운동가들을 위한 핵심 간추리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소개를 드렸다.

그런데, 적에 대해서는 잘 알더라도, 자신과 자신의 동맹군이 어디까지 진격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섬멸되기 딱 좋은 꼴이다.
살아가는 데에는 한 개인의 경험이 물론 중요하지만, 적과의 전투에 있어서는 (개인이 아닌) '우리와 우리 동맹군의 집단적 경험'을 상기하고, 지도상의 현재 좌표를 찾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지도가 '바둑판'이나, PC 게임 스타크래프트상의 '맵'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눈에 확 들어오면 좋으련만, 현실의 지도는 그렇지 않다. 더군다나 '우리와 우리 동맹군'이 한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갑갑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우리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또는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맞서 나아가기 위한 '동맹의 지도'를 제고해 주는 책이다. 지난달에 소개한《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에는 '일관된 세계 생산체계 속에 묶여 있는,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 전세계에 흩어진 노동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행동의 조건은 만들어진다. 아직도 세계는 종교와 언어, 인종과 성, 계급 등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또한 지금과 같이 전세계적인 동질적인 조건으로의 변화를 맞이한 적도 없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관철하는 '빈곤의 동질화'는 '아래로 떨어지는, 떨어진, 떨어질 사람들'을 빠르게 하나로 묶어 세우고 있다.

현재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화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세계화'의 흐름을 선두에서 추동하고 있는 주체가 '초국적 기업'이라면, 우리는 이들의 '음모'에 의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들에 불과한 것인가? 저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초국적 기구들, 초국적 자본들의 새로운 경제 기회의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위로부터의 세계화'가 어떤 '음모'나 '계획'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이기도 한 것으로 저자들은 파악한다.

위로부터의 세계화가 (의도와는 다르게) 창조한 최고의 작품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일 것이다. 저자들 역시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한 주체들이며, 위로부터의 세계화가 창조한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노동조합운동, 개발, 환경 정책, 입법 캠페인, 국제사회운동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세 명의 저자 중, 한 명은 저술활동가, 한 명은 트럭 운전사로서 팀스터 노조 활동가이고, 마지막 한 명은 국제 사회운동을 지원한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에 참여하는 수많은 인종, 국가, 성 주체 범주의 다양성만큼, 또 환경, 노동, 개발, 인권, 평화 등의 주제의 다양성만큼 이 책의 내용이 써지기까지는 수많은 고려들을 해야 했고, 알아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3명의 저자의 공동집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종성(多種性)이 결합하는 방식은 '연대'이다. 연대는 모든 생각의 통일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사실 운동은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명확해진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위로부터의 세계화'와 마찬가지로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는 '국가나 이익 집단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기초해 형성되고 있으며, 또한 내부의 분열과 차이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지금껏 진행되어 온 무수히 많은 논쟁 속에서 '아래'가 최소한으로 공유할 수 있는 원칙을 '강령'의 형태로 제시한다. 물론, 저자들은 자신들이 제안한 강령이 완전하다고는 믿지 않는다. 분열과 차이를 뛰어넘되, 연대를 강화하는 세계 행동 강령을 한번 음미해 보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경주해야 하는 것, 우리의 투쟁이 방어해야 하는 것을 상기시켜 줌과 동시에 취약성 역시 드러내 줄 수 있다.

1. 노동, 환경, 사회, 인권 상황의 수준을 높인다.
(바닥을 향한 경주를 멈추려면 바닥에 있는 노동, 환경 및 인권 상황을 끌어 올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2. 지역에서 세계까지 모든 단계의 기구들을 민주화한다.
3. 결정은 그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내린다.
4. 국제적 부와 권력을 균등하게 한다.
5. 국제 경제를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개조한다.
6. 인간과 환경에 필요한 것을 충족시낔으로써 번영을 창조한다.
7. 갑작스런 국제 경기의 변동을 막는다.


위의 사항들을 통합적으로 연결시키는 행동들 속에서 '세계화'를 근원적으로 재성찰하는 '아래의 대안'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안은 결코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니다. '위로부터의 세계화'가 불러오는 '파국'과 '위기의 삶'을 구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치와 경제, 제도와 운동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 속에서 새로운 사회관계가 생산된다. 이는 민주적 재구조화의 과정이다. 그것은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고, 다시 그 행동은 관계형성에 영향을 줄 것이다.


국제주의를 부르짖는 것만으로는 국제주의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는 자신이 현재 위치한 곳에서의 투쟁이 전세계적 지배구조에 어떤 식으로 반격을 주는지 수많은 예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무수히 많은 활동가들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현재의, 이곳의 투쟁을 세계와 연결시키는 것은 자동적이지 않다.

이 책 역시, 세계화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바쁜 활동가들에게 적절한 해답을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다나 프랭크가 이 책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장밋빛 전망을 보여주긴 하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제안들을 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전망을 만들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아래'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그려준다. 이미 '위로부터의 세계화'는 위기에 처했다. 왜냐하면 '지배'가 '동의'를 전제하고 있다면 전세계 민중들은 '동의'를 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간단한 사실에서부터 출발하자면, 혼자 나지막이 되뇌건, 함께 큰소리로 외치건 '아니다'라는 단순한 외침은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자적 반세계화에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등으로 나아가는 과정들은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대한 범세계적 반작용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어디까지 와 있는지 알려준다. 그 여정에 우리 역시 합류되어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합류하게 될 것이다. 열쇠는 누가 쥐고 있는가? 초국적 기업과 기구들인가? '무수히 많은 아래의 소인'들인가?


<2004. 6. 2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수라백작에 마주선 노동자 -《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80
장시복 (지은이)
정   가 : 5,900원
2004-04-25 



    아수라백작에 마주선 노동자 -《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4년 5월호

http://www.ynlabor.net

이 책의 서두는 의미심장한 에피그랩(epigraph)으로 시작한다.



당시의 어떤 학자들도 그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이와 같은 크기를 지닌 어마어마한 괴물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그것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었으며, 사람들의 사고를 신비의 세계로 몰아가는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이 초자연적인 존재의 출현이 전 세계에 일으키는 반향은 능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것을 우화로 돌리는 건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쥘 베른, 《해저 2만리》




청바지 리바이스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데님을 사고, 프랑스로 수송하여 청바지를 만들고, 벨기에에서 이 청바지들을 세탁하고, 영국에서 개발된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독일에서 청바지를 판매한다. 단지 유럽만의 일이 아니다. 여기에, 한국의 공장과, 아시아의 하청기지를 대입하면 한국을 본국으로 하는 초국적기업의 사례가 만들어진다.



이미 '한국의 대표 자본'이라고 일컬어지던 현대, 삼성 등의 주식소유는 50% 이상이 외국자본이 잠식하고 있고, 제일은행 등 금융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추세와 더불어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떠들어대는 협박도 세계적인 유사성을 띄고 있다.



전 IBM 사장이자 독일 전경련 회장인 올라프 헨켈은 1995년 가을에 '값비싼 독일 노동자'에 반대하는 뻔뻔스러운 선동을 계속했다. 그는 독일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복지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에 독일 회사들은 매년 수십억 달러를 해외에 투자하고 있고 바로 이 때문에 자본과 함께 일자리도 해외로 빠져나간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일자리는 독일 최고의 인기 수출품이다.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278쪽



조중동 등의 언론에서는 독일인이 떠든 '글로벌한 논리'를 동일하게 구사하는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전경련의 입장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요지는 이렇다. 해외자본유치와 투자촉진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하고, 따라서 임금인상투쟁 등 노동조합의 권리요구는 '시대착오적인 공공의 적'이라는 것이다. 대세에 순응하지 않을 때는 굶어 죽는 것이고, 대세에 순응할 때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마주했던 '선성장 후분배'는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다른 한편으로 초국적기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러한 초국적기업이 지배하는 세계적 자본축적 방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한, '죽어라 일해도 살 수 없는 빈곤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해는 단지 출발선일 뿐이다. 사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있어 '초국적기업에 대한 이해'라는 출발선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적 자본축적 방식에 대해 정면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가당키나 한 일일까?



불행하게도 탈출구를 발견 또는 '창조'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초국적기업'과 연관된 '국민국가', '세계화', '초국적기구' 등의 무시무시한 원시림에 직면하면 뇌는 하얗게 되면서 작동 중지된다. 게다가, 저항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또다른 거인 '중국'이 등장하게 되면 무장해제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국적기업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 아니 '창조'할 수 없는 한, 방어는 언제나 '구멍난 바가지' 신세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자명하다. 죽느냐 사느냐 그 갈림길에서 어차피 사는 길을 택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이해하고 싸우는' 방법말고는 없겠다. 더군다나 초국적기업에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이미 충분히 마주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 거역할 수 없는 힘이라고 여기지만, 거품을 거둬내고, 착시현상을 교정하고, 두 눈 부릅뜬다면, 누가 아는가? 노동자들의 '홈런'이 터질지도 모른다. 3경기 빈타에 허덕인다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슬럼프는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는 초국적기업이라는 현대의 종교, 거대한 괴물의 이마에 파열구를 내기 위해서는 '선구안'이 필요하다. 출발선은 초국적기업이다.



1. 초국적기업이란 무엇인가?


다국적기업이 지닌 모호함을 벗어나기 위해 초국적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s)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즉 '한 국가의 관심 등을 초월'한다는 의미가 강조되고, 국적이 여럿이라는 오해를 피하게 해준다. 그러나, 기존의 초국적기업의 정의는 다국적기업과 대체로 유사하다. 따라서 초국적기업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초국적기업은 다섯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본국의 기반을 바탕으로 자본축적을 세계적 규모에서 수행하며, 이러한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과 조직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둘째, 세계적인 활동을 전개하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전략과 조직을 보유한다. 이른바 '세계적 기업 조직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셋째, '본국의 기반을 넘어서서' 세계적인 자본 축적을 하는 기업이다.
넷째, 초국적기업이라는 용어는 국민국가를 완전히 벗어난 자본의 세계적 축적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국의 기반을 무시한 초국적기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초국적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자본 축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다섯째, 초국적기업을 자본 축적 과정의 세계적 확장으로 파악하게 되면 '노동의 세계적 통일과 분열'을 분석할 수 있다.



2. 거대한 아수라백작의 탄생과 노동의 일상사




초국적기업은 전세계에 포진하고 있는 자신의 기업 네트워크간에 제조뿐 아니라, 조립, 판매 과정에서 활발한 기업 내부 거래를 한다. 이러한 기업 네트워크간 기업 내부 거래는 조세를 회피하게 되고, 그 결과 국민국가의 결정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초국적기업은 단일 기업이라기보다는 '그룹 형태'를 띤다. 세계 물공급의 70%를 독점하는 '비방디'는 대한민국 청소년이 열광하는 컴퓨터 게임 '디아블로'와 '웤크래프트' 같은 게임과, 밥 말리, 너바나 등의 음악 CD를 생산하고,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었으며, 휴대폰 또한 만든다.


초국적기업이 이렇게 전세계에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전세계적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가 될 것이다. 자신들끼리 위협적 경쟁도 벌이지만, 또한 활발하게 협력도 한다. 99년 전세계 자동차 생산량 5,600만대 중, 도요타, GM, 포드, 폭스바겐, 크라이슬러 5개 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54%였고, 현대, 피아트, 르노, 혼다 등 10대 기업의 생산 비중은 무려 80%에 달한다. 단지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반도체, 타이어, 석유, 곡물 회사 등도 마찬가지이다.



80년대 들어 세계 경제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자 거의 전 산업에 걸쳐 초국적기업 간 대형 합병이 줄을 이었고, '합병의 도미노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공기업 사유화와 연관된 국제 인수, 합병도 이루어졌다.



물론, 경쟁이 격화된다고 해서 무조건 몸집을 부풀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기술 제휴, 조달 제휴, 생산 제휴, 판매 제휴 등 다양한 전략적 제휴 또한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경우,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 소니와 제휴하고, 인터넷 솔루션의 경우 야후와 제휴하며, 방위산업은 탈레스, 인터넷 게임은 배틀탑, 세탁기 부분은 미츠비시, 마케팅은 ALO-타임워너, 코펫 PC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제휴한다. 이러한 제휴를 고려하면 전세계 6만개가 넘는 초국적기업 간 거의 무한대의 제휴의 조합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초국적기업은 73년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되고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금융 변수들을 줄이기 위해 금융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초국적기업 간 경쟁이 격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간 엄청난 출혈을 일으키는 금융 자본의 경쟁 속에서 파산도 줄을 이었다. 초국적기업이 금융 자본을 이용해 단기 수익을 노리면서 애초, 금융 불안정성을 벗어나기 위한 외환 시장 개입은 온데 간데 없고, 금융 불안정 심화의 한 주체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생산과 금융의 혼합, '아수라백작'은 이렇게 등장했다.



그렇다면, 초국적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의 세계는 과연 어떠할까?



초국적기업이 생산입지를 옮기든, 노동력을 수입하든 간에, 한번도 만나본 적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은 자본 순환의 세계적 분할 과정에 편입된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대우받는 것은 아니다. 초국적기업의 피라미드형 네트워크는 노동의 피라미드형 네트워크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된다. 위계화된 분절은 초국적기업의 자본 축적 전략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고 다시 정립된다. 이러한 위계화된 분절 속에서 전세계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경쟁할 수밖에 없다.



자본은 생산 공장을 다른 나라로 옮기겠다고 '노동 위협(Labour threat)'를 끊임없이 한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공장 이전 예정 지역, 예를 들어 중국이나 동남아의 노동자들과 경쟁 관계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노조의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러한 노동위협은 'MBC 100분 토론'이나 한나라당, 전경련의 발표문, 조중동 신문의 사설에도 흔히 나타나고 있다. 전경련의 패널이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다. 법과 규제가 너무 많다. 임금이 너무 비싸다. 중국이나 동남아에서는 러브콜이 날라든다'면서 노동위협, 자본탈출을 선동한다. 노동자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자본가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초국적기업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생산의 유연화도 급속도로 진행된다. 생산의 유연화와 동전의 양면인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들간 경쟁을 격화시키고, 정규직에게는 비겁과 배신, 비정규직에게는 굴종과 포기를 강요한다.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정'에 신음하고, 노동조건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 대량감원과 비정규직화, 실질 임금의 급속한 하락 속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노동자들은 '제3세계화'하고 있다. 후진국의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빈곤선 아래의 최저임금과 극악한 노동조건, 멸시와 학대, 실종된 인권 속에서 일하고 있다. 그야말로 '산업혁명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3. 초국적기업과 국민국가의 관계


초국적기업이 전세계를 지배하면서 국민국가의 운명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몇 가지 논리를 살펴보자.


우선 '국민국가의 소멸론'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이 논리는 오마에(Kenichi Ohmae)가 주장하는 것인데, 투자, 산업, 정보기술, 개별소비자의 자유로운 이동은 국민국가의 역할을 필요 없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라이시(Robert Reich) 역시 국경이 사라진 세계 경제가 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멸론'과는 약간 다른 '국민국가 약화론'이라는 논리도 있다. 이 논리의 결론은 결국 초국적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초국적기업의 생산, 판매 활동을 내버려둬야, 부를 창출할 수 있고, 정부는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입장과 대별되는 것으로 '국민국가 재편론'이 있다. 이 재편론은 국민국가와 초국적기업의 관계는 영합(zero-sum)적이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국민국가는 장기적인 경제발전의 관점에서 산업 정책을 사용해 경쟁력 있는 산업을 육성하거나, 사적 자본과 협의하여 정책을 수립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들은 초국적기업과 국민국가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국민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민국가는 '사회적 관계'이고, 자본주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중요한 정치 형태의 공적기구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과 자본간 관계와 자본 축적 방식의 조건에 따라 국가개입 형태는 여러 가지 형태(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로 변화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국민국가의 개입이 초국적기업에 의해 약화된 것이 아니고, 초국적기업의 세계적 자본 축적에 맞게 국민국가의 개입 형태가 변한 것이다. 따라서 국민국가는 초국적기업의 세계적 자본 축적을 강화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초국적기업과 국민국가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며, 자본이 노동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국가 개입 형태가 변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관계의 역전 없는 상태에서, 국민국가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국민국가에 대한 착시현상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4. 초국적기업, 저항을 만나다



저자는 또한, 초국적기업에 대한 분석이 목적하는 바, 즉 이러한 지배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즉 반세계화운동, 또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성과를 언급하고, 구체적인 세 가지 입장을 검토하고 있다. 첫째로, 가장 영향력있는 대안으로 거론되는 국제 케인즈주의를 검토하면서 저자는 국제 케인즈주의가 대안을 설명할 때 국가 사이의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고, '민주적 UN' 등에 대해서만 강조하며, 또한 국민국가가 정신만 차리면 현재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의 국가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두 번째 입장으로, 지역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을 검토한다. 이 입장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자급자족하는 수많은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고, 또 이 공동체들이 국민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대신할 수 있는지, 해답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아침이 오면 다시 꿈에서 깨어나야만 하는 슬픔에 빠지게' 된다.



세 번째 입장으로, 좌파 자율주의 그룹의 이론을 검토한다. 저자는 네그리(Negri)의 '제국' 이론은 반세계화 운동이 국민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인 동시에 초국적 기구에 대항하는 세계적 연대 운동이라는 점을 부정하고 있고,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적인 '제국'과 싸우는 허망한 상태에 빠진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2004년 4월 25일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책이다.
다분히 요약 발췌하는 식으로 서평을 써서, 난삽하게 되었지만, 변명을 한다면, 이 책은 서평하기 까다로운 경제학 서적이라는 점, 그리고 본문 172쪽(전체200쪽) 짧은 분량에 수많은 논의와 함께, 투명한 현실을 빼곡이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이 책은 줄줄 읽히는 책은 아니다.(내용이 어려워서는 아니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일 뿐)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각주가 150개 넘게 달려 있는 것을 보더라도 저자는 '초국적기업에 대한 이해'에 많은 욕심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이 '혼란의 시대에 쏟아지는 주장에 파묻혀 우왕좌왕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 신비화를 벗어나기 위해' 꼭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간의 논의들을 '빠른 시간 안에' 따라잡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이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 나름대로 재미있는 비유와, 문학적 표현들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불어나는 소인국 사람들의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이루는데 있어 저자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한다.


장시복, 《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2004. 책세상.

<2004. 5. 23>

 


이 밖에도 저자는 초국적기구들, 예를 들어 UN, IMF, 세계은행, WTO, 다자간 무역협정 등 다양한 초국적기구들이 초국적기업의 활동을 보장해주고, 또한 이러한 기구들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미국의 패권적 영향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초국적기업은 거대한 세계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흔히들 네트워크하면 위계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다. 초국적기업의 네트워크는 본사와, 지역거점, 수많은 지사와 판매망 등의 촘촘하게 구성된 위계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뒷받침하는 것은 정보통신혁명과 교통의 발전이다.

단지 크기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우리가 초국적기업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괴물'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새로운 존재가 '신비한 힘', 또는 '현대적 종교'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신비는 우리가 익숙한 '일자리 창출', '국가경쟁력' 논리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국가경쟁력 향상과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해외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는 논리가 첫 번째 논리라면, 역으로 한국자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력 비용이 싼 해외로 공장을 이전해야 한다는 논리가 두 번째 논리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천수를 누릴 노동운동의 역사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전순옥 (지은이)



*리뷰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4년 3월호
http://www.ynlabor.co.kr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2000년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 '전망', '뉴(New)' 등등의 수식어를 붙인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디어가 혼돈과 불안을 부추길수록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 모두가 몰두했다. 이러한 현상과 더불어, 앞의 현상보다는 훨씬 값지고 의미있는, '과거'를 정리하는 작업 성과물들 역시 꾸준히 출판되었다. 흔히들 역사를 10년, 100년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역사는 그런 식으로 단절되지 않는다. 역사는 '십진법'과 '오진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역사는 현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살아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끊어질지 모른다. 그것은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이 쥔 '칼자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1000년이 주는 효과는 대단한 것인가 보다. 아무래도, 100살까지 사는 사람은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모두의 소원?), 천년을 누리는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89년 겨울, 90년 봄, 수많은 '운동권 잡지'들은 80년대를 '평가'했다. 그리고 딱 10년 뒤, 99년 겨울, 2000년 봄, 운동권 잡지들은 '평가'를 중단했다. 대신 '전망'만을 내놓았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2000년 들어 노동운동을 정리하는 작업은 꾸준히, 아니 폭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90년대 후반, 마산의 김하경 선생은《내사랑 마창노련》을 내놓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더욱 빨라졌는데, 강인순·이옥지 선생이《한국여성노동자 운동사 1, 2》를 발간했다. 오장미경 선생의《여성노동운동과 시민권의 정치》, 구해근 선생의《한국노동계급의 형성》등도 출판되었다. 단위노조나 투쟁사업장들 역시, 예전에 비해서는 "기록"에 대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5인의 구술을 묶어 낸《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전순옥 선생과 함께 해온 최순영, 박순희, 이총각, 이철순, 전향자의 눈물겹지만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최근에는 노동운동의 주인공 옆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그녀'들, 노동운동가 가족과 부인의 이야기를 조주은 선생이《현대 가족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내놓기도 했다.
2004년 2월말, 또하나의 저작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 '전태일 열사의 누이'이자, 그 자신이 70, 80년대 여성 노동운동의 산 증인인 전순옥 선생의《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가 출판된 것이다(한겨레신문사).


나는 70년대에 태어났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주인공인 여성노동자들의 수혜를 받은 '자식'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키워준 시대', '나를 양육한 사회적 존재들'에 대해 나는 익숙해야 당연하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익숙치 못하다. 무엇보다도, 70년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더더군다나 "운동"이라는 것을 접한 이후에는 나에게 70이라는 숫자는 80 또는 87에 비해 매우 '먼' 세월, '기호'였다. 게다가 나는 불행히도 '젠더(gender)' 또는 '여성적 관점'에 대해 무지하다. 이는 '서평'을 하는데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은 몹시 부담되는 일이다. 저자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전태일 열사의 누이'이자 '이소선 어머니의 딸'(어쩌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 수식어가 다른 누구보다도 전순옥 선생에게는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국노동운동사 중 70년대 1차 사료들에 입각한, '오랜 참여관찰(?)'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누누이 언급될 중요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자신이 '시다'였고,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에 있었으며, 이제 '연구자'로 돌아온 그녀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국에는 때때로 존재하는 '현장노동자 출신 학자'가 한국에 등장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다시 한번 이소선 어머니와 전순옥 선생에게 빚을 질 '영광(?)'을 얻게 되었다.



저자는 79번의 개인 인터뷰(70년대 노동운동의 주인공들, 또는 사용자)를 했으며, 4번에 걸쳐 총 28명이 참가하는 집단토론을 했다. 또한 전화, 팩스 등을 이용한 27차례의 추가 인터뷰를 했고, 저자의 동지이기도 했던 인터뷰 대상자들에게서 많은 자료를 기증받거나,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또한, '남성'들 역시도 조사대상이었는데,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사람들(김영삼, 최장집, 김승호, 김문수, 이태호, 김영대, 장기표, 김세균, 김금수 등등) 역시 저자의 조사대상이었다. 이러한 조사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소선 어머님'의 칠순잔치였다고 한다.



저자의 관심사항은 남성 중심의 유교적 문화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어떻게 해서 민주노동조합운동을 태동시켰고, 독재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여성노동자들의 운동이 무시당하고 잊혀지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는가 이다.



책을 쓰는 작가나 역사가들은 전태일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바로 그 사람들, 전태일에게 가장 고무받고 동기를 부여받은 그 사람들이 남한 사회에 공헌한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저서들은 예외 없이 민주노동운동의 탄생 시기를...그의 죽음 이후 거의 20년이 지나서라고 보고 있다. 360

이 책 10장의 소제목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또한, 앞서 소개한, 70년대 선배 여성노동운동가들의 구술을 묶은 책의 제목은《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이다. 한국 노동운동사 속에서 70년대 경공업 여성 노동자운동이 정당하게 자리매김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다.



동일방직 지부장이었던 이총각은 다음과 같이 구술한다.



남한 노동운동이 1987년 이후 엄청나게 진보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외부인들은 그 모든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났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노조 지도자들이 누리는 안락한 생활은 그들 자신이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이전 세대가 투쟁해 온 결과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1970년대 노동자들의 희생은 모두 잊혀져버렸다. 363



저자는 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을 '경제주의적 투쟁'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거부감을 표시한다. 전두환 정권이 YH, 청계피복 등 70년대 민주노조를 파괴하려고 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70년대 민주노조들이 이루었던 공적들이 심각하게 잠식당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가족에서 벗어난 70년대 도시의 여성 노동자들은 전통적인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조건들로 변화했고, 이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의 권위를 사실상 넘어서는 집단적인 세력'으로 스스로 위치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한 남성 노조운동가들은 박정희 시대 내내 자랑할 만한 성과를 이룬 것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그런 사실을 공식적인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학생운동가 출신 활동가들은 '과학적인 원칙'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70년대의 역사를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80년대 학생 출신 운동가들의 '관념적, 기계적 평가'와 '딱지 붙이기'를 통해 70년대의 역사가 심각하게 파손되거나, 의도적으로 '선별된 전승'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하게 70년대 민주노조들을 '경제주의적 투쟁으로 매몰'되었다는 평가에 의심을 품어볼만 하다. 경제주의적 투쟁과 정치주의적 투쟁의 선은 때때로 불분명하며, 중첩적이다.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전후의 논의과정, 김경숙의 죽음과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대구를 거쳐 터져나온 부마민중항쟁, 박정희 암살 등 연결되는 일련의 과정은 개발독재 시대에 노동운동이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감수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70년대 노동운동은 박정희 정권과 끊임없이 대면해야 했다. YH 노동자들은 이미 그 사실을 간파했고, 따라서 농성장소를(미대사관, 조흥은행, 공화당, 신민당 중) 신민당 당사로 선택했던 것이다(337쪽).



전순옥 선생의 분석대상은 70년대 노동운동이며, 특히 청계피복노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노동조합이 아니라, 왜 하필 청계피복노조일까? 첫째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신호탄이었고, 열사의 주요 활동 공간이 청계천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청계피복노조는 70년대를 넘어 80년대에도(비합법시기를 포함해서) 활동을 계속 유지해 왔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셋째, 청계피복노조는 구로동맹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구로의 주요 활동가였던 심상정은 구로동맹파업을 지지·엄호해줄 수 있는 본부로 청계피복노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청계피복노조는 기꺼이 제공해 주었다. 구해근,《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183쪽). 청계피복노조에는 당시 학출 활동가, 광범위한 지식인 집단, 교회조직, '민주단체', 노동운동가들이 매개된 일종의 활동가 네트워크 센터의 역할 또한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후, 청계피복 노조는 구로에 있던 여타 조직과 함께 '정치적 노동조합주의'를 내세웠던 '서노련'에 참가했다. 이러한 사실은 70년대 노동운동의 대표조직이었던 청계피복노조가 80년대에도 꾸준히 활동영역과 이슈를 넓혀 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70/80년대, 경제주의/정치주의 등등으로 구분, 평가되는 선들의 가운데에서 '역사 매개자'(?)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해준다. '서노련' 내에서 청계피복노조 혹은 70년대 활동가들이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비판과 그로 인한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86년 5월, 집회장에 올려진 집체극에서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에 '이소선 어머니'를 비유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371쪽). 어쨌든 전순옥 선생이 주요하게 복원시키고자 했던, 70년대 노동운동의 정당한 평가에 있어 '청계피복노조'만큼 적당한 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구해근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왜곡된 성문화에 기초한 시각과 근시안적 역사관, 이 두 요소로 인해 한국 노동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주변적이고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1980년대 중반까지 민주노조운동에 활동적이었던 대다수 여성들은 산업현장을 떠났다. 그들 대부분이 주부가 되었지만, 대부분 평범한 가정주부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여러 형태의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계급불평등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노동계급의 강한 정체감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노동운동과 80년대 초중반까지의 노동운동이 일정하게 새로운 불씨를 잉태하고,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정당한 위치지움 또는 격상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87년 7,8,9 노동자대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퇴색시킬 수는 없다. 구해근 선생의 언급처럼, 70년대와 80년대를 총체적으로, 장기적 관점으로 보면서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단절적 면' 역시 쉽게 부정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자는 경쟁적 관계가 아닐 것이다. 70년대 운동이 80년대 운동에 스며드는 그런 관계가 아닐까? 마치, 어머니의 영향을 부인하는, 혼자 커온 듯이 말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처럼. (하지만, 아들에게는 아들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다.)



또 다른 문제로, 많은 페미니즘 시각의 연구에서는 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 '여성을 위한 성(gender)에 관련한 쟁점'에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강인순 선생은 여성노동자 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목적으로 한 연구에서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또 최저생활이 보장되지 못해 생존만이 중요했던 상황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노동자이기에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는 존재조건은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의식조차 잊게 하였던 것이다.《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1》, pp.29-30.



이러한 평가에 대해 오장미경 선생은 "본질적인 질문에 정면승부하기보다는 그것을 살짝 비켜간 듯한 느낌을 준다. 단지 '환경적 탓'만이 이유였을까? 우리 사회에서 여성주의 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좀 더 깊이 있는 구조적·심리적 분석과 설명을 해냈어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순옥 선생은 이러한 페미니즘 시각의 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명확한 설명은 없는 것 같다. 다만, 남성 중심 어용 노동조합이자 국가 통제기관인 한국노총과의 대결, 섬유노조와의 대결 과정은, 그 자체가 여성노동자들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으며, 70-8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독자적 행보를 잉태한 '산파'였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한, 전순옥 선생은 페미니스트들이 70년대 사건들을 분석하고 있지 않고, 서구에서 나온 페미니즘 모델들을 이용하는 것을 언급한다. 간접적으로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오장미경 선생의 강인순 선생의 《한국여성노동자 운동사》에 대한 비판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힘주어 주장한 '여성노동자 운동사' 서술의 필요성을 반감...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여성노동자'에 관한 역사이지, '여성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쓰여진 역사라고 하기 어렵다...'누락되고 배제된 여성의 역사를 채워넣고 복원하는 작업'이지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의 역사서술을 비판, 수정하는 젠더사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기억과전망》, 2003, 겨울호, p.321.



여성노동자운동의 복원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시각의 비판에 대한 '반증'도 전순옥 선생의 연구에서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노동운동에서 성 의제(gender issue)가 제기되지 않는 한, 이 사회의 실질적 평등의 길로 나가는 것은 매우 요원하다. 계급적 문제는 '순수하게 계급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70년대 노동운동의 치열함과, 순수함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70년대 노동운동이 교회와 맺은 깊은 인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온정주의적인 분위기와 정신적 충만함 같은 것은 전순옥 선생의 문장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영어로 쓴 박사논문을 다시 우리말로 옮겨서 그런지, 문장이 매끄럽게 못한 부분은 흠이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그동안 묻혀있던 많은 자료들이 인용되고 검토됨으로써 우리에게 70년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한층 흥미롭게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가 발로 뛰면서 찾아 낸, 한국노총 섬유노련 김영태의 '반동적 행위', 그리고 이를 국제노동계에 알렸던 민주노조의 대응, 국제노동계가 취했던 행동들과 박정희 정권의 위기의식, 김재규의 재판 녹음기록 등은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이 책 이외에도《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사》나《원풍모방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해태제과 8시간 노동을 위하여》, 청계피복과 YH노동조합운동사 등은 아직도 주변을 찾아보면 많이 남아 있는 책들이다. 이 책들에는 70년대 노동운동이 지녔던 민주성과 대중적인 실천들, 짜임새 있는 교육프로그램과 조직의 치밀함, 여성노동자들의 고통뿐만 아니라 열망과 연대감에서 오는 동료애 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지금은 절판된, 민종덕 청계피복노조위원장이 이소선 어머니의 구술을 받아 쓴,《어머니의 길》(돌베개, 1990)도 소중한 우리 운동의 역사 기록물이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기록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우리 노동운동을 조명하면 할수록 그 빛은 더욱 화려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노동열사들이 제 몸을 던지기도 했고, 많은 노동운동의 선배들이 지금도 산 채로 제 몸을 던지기도 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인간해방의 가치는 그럴 수 없다. 한국 노동운동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싶은가? 천수를 누리는 길, 있다. "실천의 기록과 전파, 공유와 토론을 통한 계승" 바로 이것뿐이다.


"기록하지 않는 것, 노동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2004. 3. 1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5.31] 침통한 민주노동당, 퇴조 원인은?

  
[5.31] 침통한 민주노동당, 퇴조 원인은?
노동계 등 진보진영에 대한 국민적 불신
2006-06-01 09:00:08  

'진보개혁 세력 교체론'을 통해 정치지형을 '보수-진보 전선'으로 구축하겠다던 민주노동당이 목표 달성에 실패, 퇴조세를 보였다. 광역단체장은 물론 기초단체장마저 기존에 울산 동구 북구청장 두자리를 모두 내준 채 전국에서 단 한 곳에서도 승리하지 못했고, 득표율도 목표치에 크게 밑돌았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5.31선거에서 정당 득표율 15%, 지방의원은 현재의 44명(광역 11, 기초 33)에서 모두 2백명(광역 20~30명, 기초 1백70~1백80명)으로 크게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민노당의 2002년 6.13 지방선거 정당 득표율은 8.1% , 2004년 17대 총선 득표율은 12%. 그러나 이번 5.31 선거에서는 10%를 겨우 상회했다. 17대 총선과 비교하면 분명 퇴보다.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는 이번 선거 부진과 관련, "이번 선거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심판적인 성격이 크지만, 민주노동당이 대안적인 내용을 알리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당의 싱크탱크로 불리는 진보정치연구소 김윤철 연구실장도 "지역과는 달리 중앙이 지방선거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다는 것이 문제"라며 "중반이후에야 진보세력 교체론이 나오기는 했지만 너무 늦었고 지역 후보와 중앙당을 아우르는 연결패키지 전략이 부재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선거구호 기조가 중앙당으로부터 내려왔지만 쓸모없는 것이었거나 뒤늦은 것이었다"며 "울산 시장에 출마한 노옥희 후보의 경우 중앙당이 보내준 복지 이슈를 제기했으나 정규직에게 만큼은 복지가 철저한 기업도시의 대명사 울산과는 상당 부분 거리가 있었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뿌리깊은 당내 분파 갈등도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이번 선거에 비지도부 계열은 선거전에 대거 불참했다. 경남도지사 후보에 출마한 문성현 당 대표는 선거운동에 바빠 당내 계파간 갈등을 조정하는 데 소홀했다.

이밖에 노회찬 등 당내 유명스타 의원들이 서울시 등 주요 광역단체장 선거에 출마, 비록 본인은 낙마하더라도 당의 득표율을 끌어올려야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보다 큰 원인은 최근 잇따라 발생한 민노총 스캔들 등으로 국민 사이에 확산된 노동운동 및 진보 진영에 대한 불신감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칫 열린우리당 참패와 맞물려 전반적인 진보 진영 퇴조의 쓰나미에 함께 휘말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많다.

민노당에서도 앞으로 상당기간 이번 선거 패배 원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심형준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주노총의 전통? 노동해방의 전통?

강승규 부위원장의 배임수재 혐의 구속 이후 민주노총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각종 보수언론의 공세는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조금은 양심적인 언론과 진보언론들에는 현 사태에 대한 수많은 대책과 대안, 논평이 줄을 잇고 있다.

 

미디어 참세상에 김승호 지도위원의 글이 실렸다. 오랜만에 보는 김승호 위원의 글이다. 그의 현재 직함은 사이버노동대학 이사장이지만, 오래전 그의 직함은 지도위원이었다. 그 잊혀진 직함만큼이나 김 지도의 글은 오래된 과거를 들추고 있다.

바로 현재 한국사회에 유령으로만 존재하는 그 작지만 거대한 존재. 전노협이 그것이다.

 

요지는 이렇다. 전노협을 죽이고 만든 민주노총은 애초 변혁성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현 집행부를 공격하는 사람들 역시 전노협 죽이는 것에 동참해 왔기에 믿을 바 못된다, 내지는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표시.

 

많은 사람들은 '민주노조의 전통'을 이야기한다. 그 전통은 한편으로는 전노협정신이라는 두리뭉실한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전태일 정신이라는 말로 나타나기도 하고,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통'이란 무엇인가? 흔히 전통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낡은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대 속에서 그 낡은 것은 '힘'이기도 하다. 바로 동원의 힘, 동원 자원인 것이다. 누구도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기억은 아픔이기도 하지만 어떤 기억은 환희(오르가즘)이기도 하다. 아픈 기억이기에 피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극복할 수 있는 면역력을 길러주기도 한다. 패배에서 배우고, 패배에서 성장하는 노동운동의 그 기억 말이다.

 

김승호 지도위원의 글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려 있다.

'그래서 우짜자고?', 또는 '양비론에 기대어 변혁성을 말하나 변혁성을 거세하고 있다' 는 등의 댓글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김승호 지도위원의 글을 보고는 너무 허망했다. 맨날 하던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김승호 지도위원에게 기대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한마디로 썰렁했다. 내 머리를 지우는 지우개같은 썰렁한 바람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런데, 나는 똑같이 댓글들에 풍기는 지긋지긋한 엘리트주의를 맡는다.

소부르주아 지식인이니 뭐니 하면서 낙인 찍는 그 옛날의 버릇을 더 강화해 쏟아내는 댓글들에는 진정성도 없고, 광기만 있을 뿐이다.

 

민주노총의 전통은 더큰 단결과 체제내화 또는 이념적 하락을 맞바꾸는 것이었다.

전노협의 전통은 전통형성 즉 계급형성과 변혁성, 전투성 견지였다. 그렇다고 전노협이 이념적 수준이 높았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한국 노동운동의 이념적 수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상관없이 매우 낮은 수준이다.

낮은 이념적 수준을 상쇄했던 것은 바로 수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목숨처럼 지키던 '도덕성'이라는 것이었다.

 

댓글들이 현장 노동자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진짜 '댓글 쁘띠, 골방 지식인 파'들의 광기인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어쩌면 이수호 위원장은 민주노총의 전통에 충실한 사람일 지 모른다. 강승규는 민주노총의 전통이라는 기준에 맞춰 볼 때도 하한선에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노동해방이라는 가치를 내걸었던, 평등세상을 지향했던 전노협 정신의 회복이라도 하면 다행일지 모르나, 그것 역시 오로지 목소리 크기나 선언만으로, 의지만으로 된다고 믿는다면 오산일 것이다.

 

보이스의 평균치 말고, 조합원들의 이념적 평균치를 높이는 것은 이수호 집행부를 설득하고, 압력 넣고 사퇴시키는 것, 전통을 그나마 유지하는 것 이상의, 어쩌면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 말고 다른 출구는 없다. 그 댓글들에 내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슬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