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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말]웃자고 만든 아시아의 '몬스터 쇼'

하루에 하나씩 꼬박꼬박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에너지 소비인지...허걱...

할수 엄씨 오늘은 내가 젤루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글을

디지털말에서 퍼다 올려본다.

 

한류열풍을 바라보는 정성일씨의 시각은 독특하다.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좌파적으로 영화판읽기 또는 문화산업읽기라 넘 좋다.

아시아시장을 선점하려는 각국 자본가들의 Keyword는 스타 또는 장르등으로 표출되는데

<몬스터>는 3개국영화자본가들의 시장탐색을 위한 실험적 성격으로

영화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또다른 영화보기의 잔재미인 듯하다.

무국적, 비역사성, 탈민족성....더 이상 영화는 각 문화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배를 불려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건

씁쓸하다 못해 몸서리쳐지게 공포스럽다...

그건 곧 영화가 역사적 토대를 배경으로 우러나는 문화적 변별점에서,

화려하게 포장되고 세련된 철저하게 상업화된 자본가의 문화로만 재편된다는 얘기.

관객은 더이상 다양한 영화를 제공받고 유기적 힘을 발휘하기보다는

커다란 파도에 의해 한가지 칼라만 색칠된 컨텐츠만 일방적으로 제공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이므로...비약이 심한건가? 몰겠다...어쩄든 요즘 국내에서 뜨는 영화들을 보면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며, 유치하고 가벼운 유머를 스타라는 멋진 껍데기로 화려하게

포장하여 전국 상영관에 전진배치해버리면 100만은 거뜬히 넘기는듯...

 

언제나 제기되어졌던 대안이라면...국내 독립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지원이라는 것...자본의 흐름을 거역하고 바꾸는 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견되겠지만..조금씩 조금씩....

 

스릴러, 공포물등의 장르는 별로 내키지 않은 영화였으나 정성일씨의 날카롭고 독특한

비평으로 인해 호기심 만빵. 함 보고싶다!

이번주에는 <연인>부터...벌써부터 장쯔이의 무용같은 무술장면을 보고싶어

좀이 쑤신다. ㅎㅎㅎ

 

 

웃자고 만든 아시아의 '몬스터 쇼'. 
정성일의 영화세상_「쓰리, 몬스터」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정성일 영화평론가

 

세 명의 감독이 하나의 에피소드를 담당하여 만든 <쓰리, 몬스터 >를 보았다. 세 명의 감독은 서로의 나라에서 모두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스타의 자리에 선 이름들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컷! >을 연출한 사람은 <올드 보이 >로 올해 깐느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박찬욱이다.

'착한' 영화감독(이병헌)의 집에 어느 날 찾아온 엑스트라(임원희)가 감독의 피아니스트 아내를 인질로 자기 아이를 죽이라고 협박하기 시작한다. 감독은 자기 아내의 손가락이 다 잘려나가는 걸 감상하든지, 아니면 그의 요구대로 그의 아들을 죽여야 한다. 선택의 딜레마! 두 번째 에피소드 <박스 >를 연출한 일본의 미이케 다카시는 일본의 '엽기' 감독이다. 그는 시종일관 거의 기절할 만한 아이디어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에게는 그의 가장 얌전한 영화 <착신아리 >만이 소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54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한 사람이다. 미이케 다카시는 서커스단의 어두운 기억을 안고 쌍둥이 동생을 죽인 다음 샴 쌍둥이가 되어 살아가는 한 여류 소설가의 이야기를 처연하게 이끌고 간다. 세 번째 에피소드 <만두 >는 우리에게 <메이드 인 홍콩 >으로 유명한 프루트 챈이 만들었다. 젊은 시절의 미모를 되찾아 남편의 사랑을 돌이키려는 여배우는 아직 임신 상태의 태아를 꺼내 고기로 다져 만두를 만든다는 여인을 찾아간다. 그녀는 점점 만두의 맛에 매혹되고, 만두 만드는 여인이 중국으로 돌아가자 가까스로 임신한, 자기의 아이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한다. 


아시아의 '몬스터'들이 진정 원하는 것.

그냥 영화만으로 이야기하자면 세 편 모두 웃자고 만든 영화들이다. 가장 엽기적인 것은 프루트 챈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미이케 다카시이고, 가장 소란스러운 것은 박찬욱이다. 세 사람은 서로 지켜야 한다는 최소의 원칙만을 지켰다. 그건 "귀신을 내세워서 이야기를 끌고 가지는 않는다"이다. 그 다음에는 '몬스터'라는 부제가 달리기는 했지만, 그들 세 사람은 '괴물'에 대해서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가갔다. 서로 연결해서 볼 필요도 없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프루트 챈은 장편 길이의 편집본을 별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그들 자신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박찬욱은 마치 스트레스를 풀 듯이 만들었고(시종일관 '영화감독이 얼마나 힘든 직업인 줄 알어?' 라며 징징거린다), 미이케 다카시는 자신도 예술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무언가 보여주려고 힘을 잔뜩 지고 만든다. 프루트 챈은 크리스토퍼 도일을 데리고 마치 <화양연화 >의 공포 버전처럼 영화를 끌고 간다.

 여기에 무슨 대단한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차이에 대한 논쟁을 벌일 생각은 세 사람 모두에게 없다. 그냥 웃자고 만든 영화를 시침 뚝 떼고 심각하게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아마도 이런 영화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걸 프로듀서 자신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여기에 돈을 댄 투자자도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일까? 이 프로젝트가 정말로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잠시만 눈을 더 크게 뜨고 쳐다보자. 영화의 끊임없는 관심은 시장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토대가 결국은 자본이기 때문이다. 이건 말을 아무리 바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영화는 자기의 시장을 넓히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아시아 영화의 연대라는 말은 허울 좋은 명분이다. 혹은 시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화학자들의 따분한 평화 공존론이다. 그건 매우 아름답지만 지켜질 수 없는 희망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역사에서 자본의 평화로운 공존을 목격한 적이 없다. 만일 서로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더구나 연대를 하면 안 된다. 이것이 스크린 쿼터 논쟁의 약한 고리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서는 우리를 방어하면서, 우리들은 하여튼(!) 아시아로 나가고 싶어한다. (남이 하면 제국주의, 우리가 하면 문화교류?) 중국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만과 홍콩에서 열리기 시작한 시장을 놓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일본 영화시장에 한국영화 직배회사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류의 핵심은 사실상 (내 생각에) 유행이며, 무국적성이며, 탈(지역화-민족화-국적화-)역사화의 신기루 위에 선 상상적 공동체의 환상론(의 돌림병)이다. (여기서 한국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순간 문화 제국주의의 그림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환상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는 물론 자본이다.

서론이 너무 긴 것일까? 하지만 우리도 이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한편의 영화 제작비가 마침내 1백억 원을 넘을 때 시장의 '규모'는 무엇보다도 핵심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술적인 계산. 1백억 원을 쓰면 전국에서 3백80만 명이 볼 때 제로섬이 된다. 고민은 여기에 있다. 제작자들의 말에 의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대치는 한국 시장에서 3백만 명이라고 한다. 그 이상의 성공은 사실상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적에 사업을 내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싸움은 둘 중의 하나가 된다. 더 많은 극장을 지어서 더 많은 관객을 영화관으로 끌어내든지, 아니면 새로운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

'스타'보다는 고상하게 '장르'로

그냥 말을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자.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영화 '자본'의 공통 관심사는 무엇일까? 이미 전지현을 내세운 (트랜스-자본-)아시아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듯이 홍콩의 영화제작자 빌 콩은 아시아를 묶는 수단으로 '스타'를 생각했다. (그에게 배용준과 최지우, 이병헌, 김희선의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는 실제로 열렬한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좀더 신중하게 기획된 <쓰리, 몬스터 >는 그 고리를 '장르'라고 생각한다.

 이미 2년 전에 처음 시도된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는 (태국의) 논지 니미부트르, (홍콩의) 진가신, (한국의) 김지운이 모인 옴니버스 영화 <쓰리>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홍콩과 타이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한국에서는 실패하였다. 실패의 이유는 많을 것이며, 그것을 일방적으로 한국 쪽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같은 것이다. 결국 시장에서 실패했다.

여기에는 좀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영화사 '봄'의 대표인 오정완씨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한류(韓流)를 준비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강제규의 <은행나무 침대 >를 기획해서 충무로에 자기 이름을 등극 시켰으며, 그 이후 영화사 '봄'을 만들어 독립한 다음에 김지운의 <반칙왕 >과 이재용(과 '욘사마' 배용준)의 <스캔들 >을 기획하고 제작하였다. 물론 실패한 영화들도 있다. 임상수의 <눈물 >은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전편 디지털 영화를 시도하여 저예산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였지만 좌초하였다.

아주 사적인 자리에서 오정완씨는 내게 "나는 즐겁자고 영화를 해요, 만일 같이 일할 사람이 괴롭게 느껴지면 1천만 명의 관객을 약속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함께 일할 수 없어요. 사실 돈을 벌자면 영화를 하는 건 미친 짓이거든요"라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이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오정완씨는 사이더스의 차승재(<살인의 추억 >, <지구를 지켜라 > <무사 > <화산고 >, 그리고 올 여름의 <늑대의 유혹 >), 명필름의 심재명과 이은(<공동경비구역 JSA > <와이키키 브라더즈 > <섬 >)과 함께 자기 색깔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름 중의 하나이다. 오정완씨가 한계에 부딪친 것은 시장 전체가 배급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이다. (충무로에서는 '드디어' 한국 영화가 블랙 마켓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1라운드를 겪기 시작한 것이 올해라고 말한다.) 이제 한국 영화는 더 이상 제작자의 결정이 아니다.

제작자는 자본을 끌어대기 위하여 투자자를 찾아야 하고 투자자는 배급을 장악한 멀티 플렉스 소유주 (제일제당 산하의) CJ 엔터테인먼트와 (동양그룹 산하의) 쇼 박스이다. 그 둘은 당신 동네에 CGV와 메가박스를 소유하고 있으며, 아마도 내년에는 더 많은 양쪽 소유의 영화관을 보게 될 것이다. 영화관이 요구하는 영화는 단 하나이다. 더 많은 관객, 더 많은 수입. 그 소비의 속도 안에서 영화관은 최대 관객, 최소 빈 좌석의 원칙을 세우고 밀어붙인다. 당신이 영화를 보기 위해 멀티플렉스에 갔을 때 마주치는 두 가지 기이한 체험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관 수는 열댓 개에 이르는데 상영 중인 영화는 대여섯 편이고, 잠시 미루면 이미 어느 영화관에서도 그 영화를 볼 수 없다. 영화사는 한 편의 영화에 최소 이 년 이상을 매달리는데 영화관의 수명은 이주를 전후로 한다. (그것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떤 영화는 금요일에 개봉해서 월요일 오후에 이미 '잘리'는 경우도 있다) 일시에 더 많은 성공을 위해서 마케팅비용은 점점 커지고, 입 소문이라는 전통의 방법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비용은 온전히 영화사의 부담이다. 충무로의 대응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네마 서비스(로 상징되는 강우석)의 방법이다. 배급 주식의 일부를 소유하고, 그 유통구조에 개입하려는 것이다.

물론 여기 선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주식에 뛰어들 때 여기에 휴머니즘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 물신과 물신 사이의 자본주의적 약육강식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가진 자의 쟁탈전이다. (그리고 최근 시네마 서비스는 이 싸움에서 CJ로부터 완패했다. 이제 더 이상 강우석은 충무로 파워 맨 1위가 아니다.) 오정완씨는 여기서 뛰어들 수 없는 영화사의 탈출구에 대한 프로젝트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쓰리 >는 시장의 개념을 크게 잡아서 다시 설정해 보려는 시도이다. 결국 영화 시장은 국경이 없다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다시 한번 영화의 주도권을 제작자가 가져보려는 안타까운 노력의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장은 서로 다른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그 시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제작자의 연대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므로 <쓰리, 몬스터 >는 박찬욱(한국)-미이케 다카시(일본)-프루트 챈(홍콩)의 영화가 아니라 사실은 그들을 내세운 오정완(한국)-가도가와 쇼탱(角川書館)(일본)-진가신(홍콩)의 서로가 서로의 시장을 탐색하는 일종의 연습게임이다. 누가 누구를 먹을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찔러보고, 그 반응을 면밀하게 검토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영화가 아니라, 더 많은 감독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더 많은 기회를 가지려는 그들 자신의 자본에 대한 복종이다.

 

    
국적 팔아 살집 키우는 공포의 '몬스터'

박찬욱은 시사회에서 자신의 영화를 소개하면서 "저는 등장인물에게는 고통을, 투자자에게는 기쁨을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라고 말했다. 좀 역겹기는 하지만 그 말이 핵심이다. 이 영화는 투자자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원칙인 영화이다. 그러나 그 투자자의 다국적성은 아시아 자본의 연대를 보여주는 21세기 아시아 영화 시장의 청사진이 될 것이다. <쓰리, 몬스터 >는 사실상 그 자본의 성격이 '괴물'같은 영화이다. 지금은 이 영화를 보면서 놀라는 척 하면서 비명을 지르거나 낄낄대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훗날 점점 더 자본이 종횡으로 엮어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시장이 개편될 때는 아무도 웃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박찬욱에게 반문을 해야 한다. 알겠다, 당신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런데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이 한국 영화관객이 아니라 아시아의 관객이 될 때, 그것은 아시아적 정체성의 획득이 아니다. 그때 우리가 얻는 것은 무국적성-비역사성-탈민족성의 삼위일체일 것이다. 그 말은 그저 영화를 보면서 웃고, 울고,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면서, 황홀경에 빠져든 채, 오락의 무아지경에 뛰어든 채, 우리가 누구인지,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쓰리, 몬스터 >는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부분적으로 재미있고, 비교적 흥행의 부담에서 벗어나서 만들어낸 자유자재의 상상도 있다. 실패하면 책임을 전가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 프로젝트의 숨은 목표이다. 시장의 부담을 전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 먹이사슬은 동시에 좀 더 많은 이익을 전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영화는 아시아와 잡종교배 되어간다. 한국영화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시장 속의 우리들의 존재가 점점 한국 영화 관객으로부터 국적을 알 수 없는 아시아의 바보가 되어간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국적도 알지 못하고, 역사도 모르며, 민족을 잊어버린 채, 혹은 알 필요 없는, 또는 질문할 필요 없는 바보가 되어갈 것이다. 그것이 <쓰리, 몬스터 >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2004년 09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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