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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프리다


두 명의 프리다/1939/Canvas oil painting/173.5*173cm

 

프리다칼로(Frida Kahlo)1907-1954

 

“칭찬을 들으려는게 아니에요. 진지한 비평을 듣고 싶습니다. 난 예술애호가도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살아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라고 한다.
18세. 아직 피기도 전의 소녀 프리다는 버스와 전차가 부딪히는 교통사고로 인해 인생의 커다란 변혁기를 맞는다. 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환상과 상상의 세계에 안착한 그녀에게 그림은 자아의 본질이었고, 내면을 키우고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다.(그에 반해 디에고에게 그림은 세상을 정복하고, 여성을 유혹하는 권력이자, 보는 이를 감동시키고 장악하는 수단이었다고 한다. 흐흠..) 


<두명의 프리다>앞의 프리다

 

<두 명의 프리다>.

그녀의 자화상은 자아를 꽤뚫어보려는 듯 깊이있게 그리고 냉정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두 개의 심장은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끝은 가위로 끊기어 선혈이 뚝뚝 떨어진다. 새하얀 드레스를 시뻘겋게 적실만큼 붉은색은 강렬하나 불안하다.
맞잡은 두 손은 인생의 고독과 외로움에 서로가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듯 애처롭게 다잡았지만 때로는 사랑스럽듯 정겹게도 보인다. 배경의 하늘은 햇빛한점없이 먹구름으로 가득 드리워져 있다. 뭔가 불길한 징조처럼 말이다.
너무 처절해보여 슬픈 그림이다.
그녀들은 하나지만 둘인데 왜 슬퍼보이는 걸까? 왜?

내가 슬픈걸까?

 

살아가기 위해 붓을 잡았던 그녀에게 인생을 함께 한 디에고는 무슨의미였을까?

“디에고, 난 정말 말하고 싶지도 잠자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마법도 없이 바로 당신의 두려움과 당신의 고뇌, 당신의 심장소리속에 내가 갇혔음을 느낍니다. 이 모든 광기를 당신에게 요구한 것은 나였지만 그것이 당신의 침묵에서 나는 소리일 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 광기가 당신에게 난폭함을 요구합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나에게 호의를, 빛과 온정을 주는군요."
<프리다 칼로의 일기 에서>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식

: 그림이 훨씬 좋은데 웹에 올라온 그림이 없다. 사진에는 디에고가 챙이 큰 멕시코 모자를

  들고 있지만 그림에서는 나무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림에서의 프리다의 얼굴표정은 정말 편안해 보인다.

  그림에서 인상적인건 또하나있는데 신발의 크기이다. 리베라의 신발은 이상할정도로

  크지만 프리다의 신발은 보일듯 말듯 작게 그려져 있다. 왜일까?

 

코끼리와 비둘기에 비유될만큼 둘의 외형적 어울림은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인생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로운 여성이었다.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는 디에고와 프리다의 결혼식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어떤 자화상보다도 그녀의 얼굴이 환하고 다소곳한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디에고의 지나친 여성편력이 결국엔 프리다에게 영혼의 상처가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에고와 프리다는 서로에게 예술과 세계관을 공유했던 인생의 동지였다.



버스/1929/Oil on canvas/25.5*55.5cm
: <버스>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표현한 그림이다.
  프리다의 그림중 보기드물게 인물들의 밝은 표정과 배경의 칼라가 안정적이며
  편안해 보이는 작품이다.

 

커튼 사이에서_레온 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1937
Oil on canvas/87*70cm

: 1937년 멕시코로 피신해왔던 트로츠키가 프리다의 집에서 잠시 은신했던 시절
  그녀와의 염문설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프리다>에서는 둘의 관계를 확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나온다.


상처를 입은 사슴/Oil on canvas/1946/22.4*30cm

: 침상에서도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프리다는 1953년 개인전에서 침상에 누운 체로

  자신의 전시에 참여해 친구들의 축하와 열광적 지지를 받는다. 그 당시 전시되었던 그림.

 

<프리다 칼로>Naver 지식검색

멕시코의 여류 화가.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하였다. 독일인인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 지도자인 자파의 부하들을 보살펴 준 것을 계기로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하여 죽을 때까지 골수 스탈린주의자였다.

7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18세 때 교통사고로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그의 작품 세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파블로 R.피카소(Pablo Ruizy Pacasso)·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나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며 정체성을 강하게 지켰다.

삶은 매우 연극적이었고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였으나 사회 관습에는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으며,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금속에 유채, 38×30.5㎝, 1932), <나의 탄생>(캔버스에 유채, 173.5×173㎝, 1932), <프리다와 유산>(종이에 리소그래피, 31.7×23.5㎝, 1932)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친 사슴>(나무에 유채, 22.4×30㎝, 1946) 속의 그녀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낸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다.


>>사족
갠적으로 그림그리는 남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미술사적으로 유명하다는 남성화가들의 여성편력을 보면 더더..
대학시절 가까이서 접한 그림쟁이 남성들은 하나같이 비사회적이고 이기적이며 게다가…바람둥이들이 너무 많다.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애처롭고 신비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품기에 좋은 캐릭터들이지만 실상 남자로는 다들 별루다. 이건 철저히 갠적 취향일 뿐임을 밝힘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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