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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오사카

지진: 일종의 경험통계일 테지만 일본사람들은 '여름이 더운해에 큰 지진이 많다'는 말에 어느정도 신뢰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 일본 열도의 동과 서에서 크고 작은 지진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오늘 저녁에 발생한 니가타의 지진은 큰 인명피해까지 발생시킨 진도 6.8급(3회)의 초대형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 이정도 규모의 지진은 큰 빌딩을 붕괴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행히 도심지 큰 건물의 붕괴는 없었으나 산촌 주거지 주택들이 심하게 파손 수많은 인명이 사상했고, 영업개시이래 최초로 승객을 태운 신칸센이 탈선했습니다. 테레비 재난방송속의 니가타 도로는 직하균열이 심하며, 전기와 전화가 끊겼고, 철도의 신호기 제어장치 마비로 열차운행이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여진이 계속되고 있고, 단전과 단수로 인해 수만명의 재해지역 사람들이 인근의 학교에 대피해 있습니다. 지금 방송되고 있는 테레비 뉴스에서 심각한 피해지역중 한 곳으로 니가타의 에치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곳은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유키구니(설국)'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 '터널을 뚫고 지나면 나오는 하얀 설국 에치고유자와...' 안타깝습니다.

저는 지진이 일어난 그 시간 도쿄역앞의 큰 빌딩안 연회장에서 일본친구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지진으로 인한 여러차례의 소규모 흔들림이 있었지만 모두 제 집안에서의 경험이었던지라 그다지 큰 위험을 느끼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큰 빌딩이 심하게 움직이면서 위에 걸려있는 대형 샹들리에들이 큰 원을 그리며 흔들리는 상황은 좀 겁나더군요. 게다가 30여분 사이에 비슷한 규모의 흔들림이 세번을 반복했습니다. 요컨대, 니가타를 진원으로 한 지진이 280여키로 남쪽에 위치한 도쿄에도 큰 영향을 미친것이죠. 제가 느낀게 그 정도였는데 니가타는 어땠을지 생각하면 어지럽습니다. 물론 결혼피로연은 큰 동요없이 무사히 마쳤습니다. 참, 결혼식에 터키 이스탄불 대학에서 교수하고 있는 친구가 왔는데 자꾸 천정을 처다보길래 너 이런경험 처음이지 하고 물으니 4년전에 이스탄불에 수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큰 지진이 있었다네요. 물론 그때 자기는 미국에 있었지만 거기도 만만치 않답니다. 그 때 생각이 났습니다. 4년전 그 일 있었을 때 내가 그놈에게 니네 홈타운 괜찮냐고 물어봤던거...

땅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번하고 나면 여진이 몸속에 들어와 남습니다.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어도 흔들리는 기분이 들어 자주 머리위의 전등갓을 올려봅니다. 그놈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 몸만...

 

오사카: 여기에 오사카에서 찍은 사진들을 올립니다. 지진만 아니었다면 제가 느낀 일본사람, 일본사회에 관한 단상도 하나 써 놓을 생각이었습니다만 지진때문에 생각을 접었습니다. 오사카는 여행지였다기 보다는 학회 장소여서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요컨대, 교토만큼 적극적으로 다니지 못했다는 거죠. 도요토미가 축성하고 도쿠가와가 보수한 오사카조(오사카성)와 쯔루하시의 코리아타운이 돌아 본 곳의 전부였습니다. 그럼 즐거이 보시기 바랍니다.

 

1) 오사카조와 성벽

 

오사카조에키(역) 쪽에서 진입하게 되면 아래보이는 방어용 못(물)위로 다리가 있고 그곳을 통하면 성에 진입하게 됩니다. 전쟁이 곧 삶이었던 전국시기에 서바이브를 위해 필요한 것은 '불'과 '물'이었습니다. 물은 외부 군대의 성내 진입을 막는 효율적 방어수단을 제공했고 불은 밤을 지켜주었습니다. 그 역사의 잔해들은 일본의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원래 도요토미는 작은 시골의 하급무관(말단 사무라이: 구로사와아키라의 '시치닌노사무라이(7인의 사무라이)'에 나오는 그 사무라이들을 생각하면 될 듯함)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적 집을 떠나 당시 봉건권력들 가운데 핵심이었던 오다노부나가의 신발들고 다니는 심부름꾼으로 무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여러 우여곡적끝에 노부나가 사후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건축한 것이 이 오사카조입니다.

 

2) 오사카조벽을 청소하는 사람들

 

하라다마사토 감독의 영화 '바운스고갸루'라는 영화를 보면 뉴욕에서 공부가 하고 싶어 무작정 집을 나온 리사가 고갸루비지니스를 끝내고 존코와 도망하다가 육교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나지 않아 대강 작문을 함): "뉴욕에서...어떤 중학생이 축구공 하나를 반에 가지고 들어왔는데 어떤 아이가 그랬대...그 공 하나 만드느라고 얼마나 많은 우리 친구들이 밤잠 못자며 피물고 쓰러졌는지 알아?...나는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옷입을 때마나 그 아이들 생각이 나..."

저는 그 말 잊고 있었는데 성벽에 붙어서 돌닦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그 장면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변변한 기술이 없었던 시대에 이토록 큰 건축물을 축조하려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을까요?

 

3) 오사카조 텐슈가쿠(천수각)

 

큽니다. 7층건물이며 각 층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역사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도요토미는 50살이 넘어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 마저도 2년을 못넘기고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 스트레스를 참지 못해 일으킨 것이 '임진년 조선침략(소위 임진왜란)'이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4) 츠루하시역 앞의 거리

 

오사카조에서 나와 전철로 세정거장을 가면 츠루하시역. 이곳에서 10여분을 걸으면 '코리아타운'에 닿을 수 있습니다. 코리아타운으로 가기 전 역앞의 상가들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전형적인 일본의 역전 뒷골목이죠. 원래 우리 가족의 여행취향은 골목여행입니다. 큰 역사물보다는 골목골목 걸어서 돌아다니는 것을 즐겨합니다. 저보다는 제 와이프가 훨씬 골목 매니아죠.

 

5) 코리아타운 현판

 

츠루하시에 있는 유명한 코리아타운의 현판입니다. 여러 한인집단거주지(코리아타운)를 다녀봤습니다만 이처럼 본격적인 곳은 처음입니다. 차이나타운은 거의 예외가 없이 모든곳에 이런 유형이 있었는데...

 

6) 코리아마찌

 

위의 사진을 찍은 바로 그곳에서 카메라 앵글을 아래로 내리기만 하면 바로 이 그림이 보입니다. 좌측 좀 촌스런 전자전광판에 이랏샤이마세(어서오세요)가 보입니다. 다녀보니 한인들보다는 일본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알고보니 이곳은 한일문화의 '접경지'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한국상점들이 밀집된 현판없는 진짜 '한인마찌'는 이곳으로부터 약 10여분 떨어진 곳에 따로 있었습니다. 지나다 들른 돈소쿠(돼지족발)집 한국인 주인 아저씨는 이곳이 한일 문화교류를 위해 정책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더군요.  

 

7) 배용준, 이병헌 그리고...를 파는 사람

 

테레비에는 엔에치케이의 피디가 나와서 왜 후유소나가 인기를 얻고 있는지 열을 올리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후유소나'로 NHK가 벌어들인 돈은 원제작자인 KBS가 번 돈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천문학적인 액수랍니다. 요즈음은 배용준이 한국말로 하는 초코렛 광고도 테레비에 나옵니다. 저 위에는 태극기휘날리며 포스터도 보이죠? 사람없을 때 재빨리 찍어서 그렇지 장사 잘 됩니다. 슬적 엿보니 배용준 화보가 있는 2005년 카렌다가 인기 품목인듯.

 

8) 강강수월래: 동오사카조선중학교

 

도쿄에 돌아오는 기차타러 역으로 나가려던 참에 뭔 소리가 들려 들어가 봤더니 오케스트라(악기는 모두 국악기) 공연이 있더군요. 기념품파는 가게방안에다 공연장을 만들어서 차도 팔고 술도 팔면서 가끔 이런 공연도 한답니다. 일종의 음악 카페죠. 공연을 하고 있는 학생들은 '동오사카조선중학교' 학생들입니다. 이름에서 짐작하시다시피 북한국적의 학생들입니다. 사장은 한국계인데...설명을 들었더니 남북정상회담이후에 민단과 총련계간에 조금씩 화해가 진행되어 지금은 가끔씩 이렇게도 어울린다고 하는군요.

 

하나더: 앞선 교토편에서 말했다시피 일본사람들은 오사카민들을 '구이다오레', 직역을 하자면, '먹고나자빠지'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먹는데 목숨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그만큼 먹거리가 맛있고, 양많고, 쌉니다. 동경에 비해 퀄리티는 좋은데 양대비 가격은 거의 반값입니다.

 

더 쓰려는데 지금도 자꾸 땅이 흔들립니다. 해서 오늘은 이만.

 

흔들리는 일본, sabo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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