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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랑 같이 놀다가
잠깐 화장실에라도 가면
막 울거나 징징거리는 일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혹시 분리불안인가 싶기도 한데
항상 그런 건 아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예전보다
혼자 있는 걸 되게 싫어하는 건 분명합니다.
낮에 미루를 보다 보면
좀 쉬고 싶을 때도 있고
잠깐 졸고 싶을 때도 있는데
옆에 있으면서 좀 쉬려고 하면
손이나 발로 쳐대고
좀 떨어져서 잠깐 졸아볼까 하면
눈물을 글썽거려서 잠을 확 달아나게 합니다.
오늘 아침엔
일주일 내내 아팠던 후유증으로
몸에 힘도 없고 해서
미루 옆에 누워서 노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습니다.
방바닥이 따뜻하니 좋습니다.
옆에서는 주선생님이 유축기로 젖을 다 짜고
모유보관팩에 젖을 보관할려고 왔다 갔다 합니다.
"근데 상구 있잖아~미루 ..분리불안인가봐..."
"그런 것 같지? 내가 보기에도 좀 그래.."
"원래 이 시기 쯤 되면 분리불안 느낀다고 하긴 했으니까..."
"한번 다른데로 가볼까?"
미루 옆에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다른 데로 가면
미루가 또 징징거릴지 어떨지 궁금해져서
한번 다른데로 가볼까하고 물어보니까
주선생님 곧바로 그러자고 합니다.
"응, 한번 해봐"
"싫어"
말은 했는데 귀찮습니다.
주선생님이 곧바로 한마디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분리불안이야~"
"뭐가?"
"방바닥하고 분리되기 싫어하는 분리불안!!"
사실 이런 분리불안은
모든 피곤한 인류의 공통된 특징일 겁니다.
암튼 오늘까지
피곤이 안 풀려서
미루가 분리불안을 느끼는지에 대한 객관적 실험은
그냥 안하기로 했습니다.
미루 평생에
언제 아빠 좋다고 꼭 붙어있을까 생각해보면
분리불안 느끼는 게 그렇게 나쁘진 않습니다.
물론, 그래도 전
미루가 저보다는
엄마한테 분리불안을 느끼길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요새 미루는
가늘고 긴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꼭 방 구석을 따라 놓여 있는
전선 같은 걸 잡고 놉니다.
아무리 방을 열심히 쓸고 닦아도
전선에 진하게 묻어 있는 먼지는 잘 안 닦는데
인제 그런 것 까지 신경 써야 합니다.
전선 말고 미루가 또 관심 있는 건
볼펜입니다.
'벌써부터 볼펜을 좋아하다니
책도 입으로 안 빨고 열심히 보기만 하는 거 보면
앞으로 공부 잘 하겠군' 같은 생각은 전혀 안 합니다.
공부 잘 해봐야
자기만 알고 사는 사람들 많이 봐와서
썩 달갑지도 않습니다. 진짭니다.
아마 볼펜도 가늘고 긴 것에 속하니까
잡고 놀기 편해서 좋아 하는 것 같습니다.
또 가늘고 긴 것에는
제 인생이 있는데
미루는 아마 아빠의 인생을 나중에 좋아할 것 같습니다.
"상구~미루가 볼펜으로 막 쓰는 시늉을 했어~~!!"
주선생님이 언제나 그렇듯이
미루의 작은 몸짓에 큰 호들갑으로 반응합니다.
볼펜으로 쓰는 시늉을 했다니
아까는 숟가락을 잡고 흔들었는데
주선생님이 봤으면 밥 푸는 시늉이라고 했을 겁니다.
주선생님이 너무 심하게 좋아하길래
제가 조용히 한 마디 해줬습니다.
"정말? 우와~미루 잘 한다~~!!"
근데 좀 위험하기도 하고 해서
다른 장난감을 손에 쥐어 주고 볼펜은 뺏었습니다.
가늘고 길면서도 다치지 않을 만한 걸 좀 찾아야겠습니다.
"상구, 얘 봐~지 허벅지에 낙서했어~"
"어디? 정말이네~~"
금방 볼펜을 뺏었는데
그 새 허벅지에 볼펜자국이 주욱 나 있습니다.
중간에 끊어진 곳 없이
한번 붓을 대서 끝까지 쭉 나갔습니다.
이런 걸 일필휘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미루가 허벅지에 그은 볼펜자국을
미루 인생 최초의 낙서라고 부르기로 할려고 했는데
주선생님이 방을 청소하다가
방 바닥에서 또 다른 낙서를 발견했습니다.
"히히..방바닥에다가도 낙서를 했네..."
주선생님이 아까 말한 게
사실이었습니다.
미루는 볼펜으로 쓰는 시늉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썼습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볼펜을 휘날릴 때가 되면
온 집 안이 난장판이 되겠지만
그래도 오늘 낙서만큼은 매우 뿌듯합니다.
그리고 주선생님한테는
또 호들갑 떤다고 혼자 생각했던 게
미안합니다.
육아휴직을 하고 애를 키운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신기한 일이고
처가집한테는 놀라운 일인데
저희 부모님들한테는 탐탁치 않은 일입니다.
1년 육아휴직을 했다는 말씀을 드리는 데도
거의 3개월 정도가 걸렸었는데
그 사실을 부모님이 실제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따르르릉..."
주선생님이 얼른 뛰어가서 전화를 받습니다.
"상구는 나갔냐?"
"아니오 집에 있는데요.."
어머니나 아버지는
제가 뻔히 미루 키운다는 걸 아실텐데도
집에 전화하시면 꼭 '상구는 나갔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게 물으신 건 아닙니다.
"상구는 사무실 안 가냐?"
"현숙이 나갔으면...니가 지금 애 보겠네?"
가끔 밤에 전화 하시면
"상구는 들어왔냐?" 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항상 들어와 있는데요라고 주선생님이 대답하지 않은 건
참 현명한 행동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점점 상황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어느날부터인가
전화하실 때 마다 제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루는 자냐? "
"그럼...애 키우는 게 그게 쉬운 게 아냐.."
"애 낳고 키워보니까 부모 심정이 이해가 가지?"
그래도 부모님은 제가 계속 집에만 있다는 사실을
결코 본인들 입에 담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담기는 했습니다.
"야...너 일주일에 몇일씩이라도 나가는 데 없냐?"
"너 불러주는 데 그래도 좀 있지 않어?"
그러는 사이에 벌써 7개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육아휴직 5개월 남았습니다.
5개월 후면 집에 더 이상 못 있습니다.
전 그 전에 부모님이 저의 육아휴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길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오늘
그날이 왔습니다.
찬란한 환희의 역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미루 아팠다면서?"
"네..."
"어쩌다 그랬다냐.."
"사실은 제가 먼저 감기걸렸었는데요, 그게 옮았나봐요.."
"넌, 뭐 집에만 있는 애가 무슨 감기가 다 걸렸냐?"
순간 저는 집에만 있다 보니까
면역력이 떨어져서 더 쉽게 감기에 걸린 것 같다는
통찰력있는 분석을 제시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어머니의 제일 끝 발언의 역사적 의의를
놓치지 않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드디어
부모님께 제 육아휴직을 인정 받았습니다.
"상구~미루 좀 봐봐.."
주선생님이 재운다면서 미루를 데리고 들어가 놓고
한참 있다 저를 부릅니다.
"우바바바..우웨웨웨..버버버.."
"우히히, 얘봐....너무 웃겨~"
미루가 아랫턱을 쭉 내밀고
자꾸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고,
옆에서 주선생님은
신기해 죽겠다면서 좋아하고 있습니다.
"근데, 상구 있잖아..이러는 게 미루가 이쁘긴 한데...눈물을 흘리네.."
그러더니 주선생님은
곧바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빨 날려나 보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합니다.
저의 남은 역할은 호들갑을 떠는 겁니다.
"이야~정말? 우와~~!! 우리 미루 이빨 나는 거야?"
손을 혀밑으로 넣어서 만져보니까
왼쪽 앞니 한개가 벌써 나와 있습니다.
근데 너무 아파합니다.
치발기를 갖다 줬습니다.
주선생님은 걱정하는 저한테 설명을 해줍니다.
"생각해봐~7개월 동안 입 안에 아무것도 없다가 뭐 딱딱한 게 생긴다고 해봐...얼마나 당황스럽고 그렇겠어..."
"우바봐봐바..."
진지하게 설명하는 주선생님 옆에서
미루는 여전히 괴로운 표정입니다.
"게다가 살을 뚫고 나오니까 아프기도 할 거고...그지 미루야?"
"그렇군..."
"역시 미루는 엄마 맘을 참 잘 알아~그치?"
"엄마는 미루 맘을 참 잘 알아 아닌가?"
"음...그러네..."
하기야 내내 매끈했던 얼굴에서
뾰루지라도 하나 나면 가렵고 신경 쓰이는 데
하물며 이빨이 나는 거니 오죽하랴 싶습니다.
너무 멋없는 비유 입니다.
내내 매끈했던 등짝에서 처음 날개가 돋아날때
천사도 비슷한 당황스러움과 고통을 느낄 겁니다.
며칠 아프고 나면 꼭 이런 비유만 생각납니다.
오늘 몸이 좀 괜찮아지고 나서
육아 잡지를 봤는데,
거기에 치발기에 대해 나와 있었습니다.
치발기의 원래말은 '치아발육기'이고,
치발기는 딱딱한 부분과 부드러운 부분이 있어서
이빨과 잇몸을 자극해서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미루가 처음에 아파할 때 옆에서 좋아했었습니다.
신경써서 치발기도 골라주고, 진작부터 잇몸살 없게 도와줄 걸 후회가 됩니다.
암튼 인제 미루도 이빨이 났습니다.
근데, 천사가 날개 돋을 때 가려우면
효자손 같은 걸 날개발육기로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휴...
"현숙아...나 땜에 너 일도 못하고 미안해 죽겠다..
내가 오늘밤 안으로 꼭 다 나을께..."
"빨리 자.."
10시 30분에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를 잤을까 미루가 깨서 울고 있고
주선생님이 샤워하다 말고 뛰어들어옵니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빨래 돌아가는 소리에 잠이 깹니다. 12시
거실에 나가보니 집이 아주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고,
주선생님은 쇼파에 앉아 있습니다.
"청소하느라고 고생했겠다..."
"상구..나도 감기 기운이 있어.."
아까 샤워하다가 뛰어 나왔을 때
찬 기운이 몸에 확 들어왔답니다.
12시 40분
미루가 다시 깨더니 엄청 크게 웁니다.
서러움이 북받친 울음입니다.
주선생님은 체온을 재고, 배 마사지를 해줍니다.
"상구는 어서 자...자꾸 깨지 말고..."
한참 뒤척이는 중에
주선생님이 계속 미루를 챙기는 게 느껴집니다.
"지금 몇 시야?"
"응...2시 45분"
"콜록, 콜록...케에엑...콜록.."
몸을 일으켜 미루를 봤는데
주선생님이 같이 일어납니다. 3시 20분.
"현숙아 나 몸이 굉장히 많이 좋아졌으니까 지금부터는 미루 내가 볼께..."
"괜찮아..빨리 자..."
4시 16분
다시 미루가 기침을 합니다.
"현숙아 진짜 내가 볼께..."
"그래..그럼.."
"콜록, 콜록..." 하필이면 꼭 그때 기침이 나옵니다.
"상구, 안되겠다. 내가 볼께..."
그러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어디서 유축기 소리가 들립니다.
눈을 떠보니 5시.
조금있다가 주선생님이 침대에 돌아와 눕고
또 조금 있다가 미루가 발작적으로 웁니다.
"내가 볼께~"
벌떡 일어나 미루를 달랩니다. 5시 15분
잘 안 달래집니다.
"상구..미루 배마사지 해줘봐.." 배가 아주 딴딴합니다.
주선생님이 체온을 잽니다. 39도.
"안되겠다.."
미루를 데리고 나와서
옷을 벗기고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어서 열을 내려줬습니다.
"아바바바..."
보행기에 태워 물도 좀 먹였습니다.
"우봐봐봐..으브으브..아바바"
그 와중에 미루는 계속 떠듭니다.
힘들어도 입은 살아 있는게
자기 엄마랑 비슷합니다.
"아이고...아픈 데 너 처럼 말 많은 애기는 첨 봤다...미루야."
최악의 컨디션인 건 주선생님도 마찬가지일텐데
목소리가 참 따뜻합니다.
'현숙아..너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니...'
이런 말은 속으로만 하고 말아야 그럴 듯해서
진짜 속으로만 했습니다.
이렇게 3명이 동시에 아팠던 첫째날이 시작되고
비슷한 상황이 4일쯤 계속됐습니다.
그 4일간 주선생님은 정말 끝내주게 우릴 간호했습니다.
인제 거의 다 살아났습니다.
며칠간 무리했는지
어제 저녁부터 몸이 안 좋더니
오늘 아침에 완전히 뻗어버렸습니다.
아침을 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혹시 몸살 감기 아냐?"
"모르겠어...그냥 머리가 아파 죽겠다..."
"체온 한 번 재보자.."
주선생님이
침대에 쓰러져 있는 제 귀에
미루한테만 쓰던 체온계를 푹 집어넣었습니다.
"이거 봐...지금 체온이 39도야..."
어쩐지 두통도 아주 심하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처럼 욱신거렸었는데
몸살이 난 거였습니다.
"상구~쉰다면서...왜 자꾸 일 해..."
어제 밤에 몸이 안 좋다고
좀 쉬겠다고 해 놓고는
주선생님이 밥 차리는 동안
괜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미안해서
거실을 치우다가 구박을 받았었습니다.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어질러져 있는 것들을 보면
치워버려야지 하면서 손이 먼저 갑니다.
주선생님 말대로 그냥 쉴 걸
괜히 착한 척 하다가 제대로 아파버렸습니다.
도저히 아침밥 할 힘이 없습니다.
"일단 이거 해열제라도 좀 먹고 쉬어..."
약을 먹고 누워 있는데
온갖 생각이 다 듭니다.
내가 이렇게 아파 버리면
주선생님이 밥 해야 하는데
주선생님은 아침 일찍부터
위랑 장이 안 좋아서 힘들어했기 땜에
밥을 차릴 상황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다 아파 버리니 굶어야 할 판입니다.
아플 때는 밥이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심난합니다.
결국, 우리는 오늘
하루 종일 풀뿌리로 연명하다가
오후 늦게 밖에 나가서 뭘 좀 사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저는 다시 아무렇게나 누워서 쉬고
주선생님은 미루를 봅니다.
"어이구, 우리 상구 아파서 어쩌냐...내다 버릴 수도 없고..."
"나 버리면 누가 밥해..."
예전에는 아프면 그냥 쉬면 됐고
특별히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었는데
이젠 아파서 누우면
밥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제일 큰 걱정입니다.
다른 집에서는
밥 하는 사람이 아프면 누가 밥하는지
참 궁금합니다.
"이야~신기하다.."
"뭐가?"
"상구한테서 미루 냄새가 나..."
주선생님이
바로 코 앞에 서 있다가 한 이야기입니다.
"그래? 신기하네.."
"그러게 정말 신기하다.."
"혹시 미루한테서 내 냄새가 나는 건 아니고?"
"헤헤~아니야..."
하루 종일 미루랑 붙어 있다 보니까
제 나쁜 냄새가 미루한테 옮겨갔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
저한테서 미루 냄새가 나는 겁니다.
매우 기분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붙어 있다 보면 표정이 닮아가고
성격이 닮아가고 말투가 닮아간다는데
아무래도 최고 경지는 체취가 닮아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에게서 미루냄새가 난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 안했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한 보람이 있구만..'
또 오버한다고 할 까봐
혼자 생각만 하고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술담배 냄새에 찌들지도 않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편이라서
미루 냄새가 옮겨 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습니다.
더욱 보람있습니다.
기쁜 마음을 안고 샤워를 했습니다.
수건을 들고 몸을 닦습니다.
며칠전에 인터넷에서 보니까
씻고 얼굴을 닦은 다음에 5초 내에
로션을 안 바르면 피부가 노화한다고 적혀 있어서
요새는 로션을 손에다 묻혀 놓은 다음에 얼굴을 닦습니다.
수건을 들고 얼굴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로션을 찾았습니다.
"아...내 로션 다 떨어졌지..."
할 수 없이 저쪽에 있는
아토마일드를 쭉 짜내서 발랐습니다.
"상구~~~~!!! 왜 미루 로션 바르고 그래~?"
"응? 어....내 로션이 다 떨어져서...이거 꽤 괜찮어.."
"냉장고에 남자용 로션 있다니까 그래...미루꺼 바른지 얼마나 됐는데?"
"응...며칠 됐어..."
"에잇~! 그럼 그렇지~그러니까 상구한테서 미루 냄새가 난 거였구만~!!"
주선생님이 저한테서 맡았던 미루의 체취는
바로 애기 로션 냄새였습니다.
애랑 어른 체취가 그렇게 쉽게 같아질 리가 없습니다.
"오늘 저녁에 눈 온대..."
"진짜? 미루한테 보여주면 좋겠다"
정말 눈이 왔습니다.
저한테는 올해 첫눈이었고
미루한테는 난생 첫눈이었습니다.
눈 오는 데 심장이 벌렁거린 건
10대때 이후로 처음입니다.
전공이 집회와 시위가 되고 나서는
눈 오면 그것 땜에 불편한 사람들 생각부터 났었는데
참 오랜만입니다.
"현숙아~나와봐~~"
"왜?...우와~~~!!"
한밤 중인데
눈이 얼마난 내리는 지
밖이 죄다 하얗습니다.
중학교때 도서관 칸막이 책상에 앉아서
비듬 털어 모으는 게 취미였는데
그때 쏟아지던 것 보다 더 많이 내립니다.
어느새 동네 애들이 공원 운동장 바닥에
도널드 덕을 그리고 있습니다.
눈이랑 뭔 상관이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쏟아지는 눈을 미루한테 보여줘야 하는데
미루는 잡니다.
"내일 꼭 보여주자..."
밤이 지나고 오늘 아침.
"좀 있다가 외출할까?"
"그러자~!!"
뭔가 자질구레한 일들로 오전을 다 보내고
1시가 넘어서 겨우 나갈 준비를 합니다.
주선생님은 밖이 얼마나 추운 지 보려고 나갔고
미루는 두꺼운 옷을 안 입을려고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안되겠다...춥다..바람도 많이 불어...."
혹시 미루한테 안 좋을까봐
아주 쉽게 외출을 포기하고 비디오를 빌리러
저 혼자 나갔습니다.
앞에 아이 둘이 큰 눈 뭉치를 안고 갑니다.
"병철아~밑에 좀 잘 보고 다녀...철퍽철퍽 그게 뭐야..."
"응?"
"밑에 좀 잘 보고 다니라고..."
"왜?"
"옷 다 버렸잖아...엄마가 꼭 이렇게 잡고 가야 돼?"
"근데 엄마...눈이 왜 이렇게 무거워?"
"니가 많이 뭉쳤으니까 그렇지.."
"작게 뭉치면 안 무거워?"
"아, 눈 좀 버려~집 앞에도 많이 있어..."
미루도 빨리 커서 저렇게 눈을 좋아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사실 오전에 잠깐 베란다 쪽으로 가서 바깥을 보여줬는데
세상이 왜 하얀 색인지 통 관심이 없이 자꾸 몸만 뒤로 젖혀댔었습니다.
비디오를 빌려서 돌아오는 길.
공원에는 눈사람이 10명도 넘게 와서 쉬고 있습니다.
집 앞에서 나무가지 위에 있는 깨끗한 눈을 세 주먹 뭉쳐왔습니다.
옛날에는 맨손으로 눈싸움도 했었구만
이 짓도 손시려워서 못하겠습니다.
뭉친 눈은 락앤락에 넣어서
냉동실에 보관했습니다.
미루한테 보여주려고 한 건 데
잊어먹고 결국 오늘도 못 보여줬습니다.
내일 꼭 보여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냉동실에서 몇 달 갈 겁니다.
옆집에 사는 연우네가 놀러왔는데
연우가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변비 때문이랍니다.
연우 엄마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어제까지 우리도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주선생님은 얼굴에 인상을 쓰다 못해
몸까지 비비 꼽니다.
"예전에도 관장했었는데 그때 연우가 너무 힘들어해서
오늘은 병원에 갔다가 약만 받아왔어요..."
그런데 우리가 딱 보니까
아무래도 이건 관장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연우 배를 만져봤더니
육체미 선수의 복근만큼 단단합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막 괴로워하는데
이건 분명, 똥을 밀어내는 장의 작용과 변비의 반작용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고통 때문입니다.
연우는 통증이 올 때면 허리도 못 펴고 웁니다.
어제 간호사선생님이 "이렇고 저렇고 할 때만 변비예요."라고 말했던
바로 그 상황입니다.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주선생님도 한번 이런 일을 겪었었는데
그때 병원 응급실에 가서 정말 굉장한 물질을
사투끝에 빼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물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줄의 균열도 없이
최고수준의 밀도를 자랑했다고, 화장실에서 나온 주선생님이
왼손으로 자기 오른팔 팔꿈치 부분을 잡고 팔뚝을 흔들어 보이면서
저한테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때 '응급실에 이런 일로도 올 수 있는 거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연우가 바로 그때 힘들어 하던 주선생님과
똑같은 몸짓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관장해야 할 것 같애요..."
저와 주선생님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관장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저는 얼른 약국으로 달려갔습니다.
관장약을 사서 집에 와 보니
집이 난장판입니다.
연우가 오줌을 응접실 여기저기에 뿌려놨고
연우 엄마의 옷도 오줌으로 다 젖어 있습니다.
똥도 조금 나오긴 했는지 여기 저기 묻어 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는
어지러진 집이 어울립니다.
연우 엄마가 관장약 주입 역할을 맡았습니다.
"아무래도 약이 잘 안들어갔나봐요..."
관장약을 넣고 꽤 시간이 흘렀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1차 시기는 실패입니다.
2차 시기의 주자로 나선 것은
주선생님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주선생님은 매우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주선생님은 관장기를 들고, 약을 깊이 주입할 자신이 있다면서
"이런 걸 항문에 대면 알아서 빨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평소에 많이 해본 것 같은 말투인데, 저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지어낸 것 같습니다.
암튼 주선생님은
관장기의 길게 나온 입 부분을 항문에 대더니
놀랍도록 익숙한 솜씨로 관장약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3~4분 후 샴페인의 코르크 마개가 열렸습니다.
무슨 돌덩어리 큰 거 하나가 툭 빠져나왔습니다.
그렇게 단단한 게 뱃속에 있었다는게 놀랍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연우 엄마, 아빠, 미루 엄마, 아빠 모두 기뻐했습니다.
주선생님은 그걸 들고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습니다.
냄새까지 맡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연우는 조금 나아져서
하루 종일 밥도 안 먹던 아이가
밥도 좀 먹고, 저한테 윙크도 하면서
컨디션을 회복해갔습니다.
연우 엄마가 그러는데
집에 돌아가고 나서 똥을 두번 더 쌌답니다.
진정 개운합니다.
생각해보니까 어제 미루는 변비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평소랑 같은 똥에 전혀 딱딱하지도 않았습니다. 울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꽤 오랜만에 똥을 싼 겁니다.
우리가 또 호들갑 떨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야 겠습니다.
변비, 참 무섭습니다.
미루가 똥을 안 싼지
오늘이 6일째였습니다.
주선생님은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런 종류의 고통은 저보다 주선생님이 잘 압니다.
"얘 봐...얼굴이 누래졌어..."
정말 미루 얼굴이 노랗습니다.
속은 얼마나 묵직하고 답답할까 싶습니다.
병원에 전화를 했습니다.
"저, 미루 아빤데요...미루가 6일째 똥을 안 싸서요..."
"아, 네...보채나요?"
"아니요...많이 보채진 않구요, 잘 놀아요..."
"잘 놀면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예요..."
"그럼, 어떤 때 확실히 변비인 걸 알 수 있어요?"
"애가 배가 볼록 나오고요, 막 엄청 힘들어 할 때...그때 병원에 오시면 되요.."
애가 사경을 헤매기 시작하면 오라는 소리입니다.
"그럼 그때까지 기다려요?"
"아니면 아빠가 비닐 장갑 있잖아요, 그거 끼시고요..."
"...손가락 집어 넣어서 직접 빼내라고요?"
"아니요 배마사지 해주시라구요.."
비닐장갑끼고 배마사지 하라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저녁이 되어 주선생님이 퇴근을 했습니다.
"상구, 오늘 힘들었지..
내가 저녁밥 닭갈비 해줄테니까 오늘은 요리하지 말고 미루 옆에서 좀 쉬어.."
옳다구나 싶었지만
절제된 대사로 분위기를 유지했습니다.
"나 괜찮은데...너도 하루 종일 일하고 와서 힘들잖아.."
요리를 시작하는 주선생님을 뒤로 하고
미루가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순간적으로
미루의 대장 속에 들어간 느낌이 확 들었습니다.
냄새가 모든 걸 압도합니다.
"현숙~미루 드디어 쌌어~~~~!!!"
기뻐하면서 열심히 물티슈로 닦아주는데
주선생님이 옆에서 말합니다.
"내가 아까 방에서 열심히 배마사지 해줬거든...
방구를 뿡뿡 뀌더라구..."
오늘이 있기까지 자신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는 발언입니다.
"그랬구나...잘했어, 현숙아.
나도 아까 낮에 내내 배 마사지 해줬는데..."
어쨌든 미루가 똥을 싸니까
두 사람 속이 다 시원합니다.
깨끗이 닦아주고, 기저귀도 치우고
이제 모든 게 말끔하고 개운해졌습니다.
"뿌지직~"
미루가 두번째 똥을 쌌습니다.
조금있다가 세번째 똥을 쌉니다.
처음 건, 병뚜껑이 열린 데 불과했습니다.
세번째 똥은 정말 냄새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자기 아이 똥은 하나도 안 더럽다고 하는데
그건 이유식 먹이기 전까지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완전 어른 똥입니다.
"어휴....흐..읍...진짜 안되겠다"
마스크를 쓰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주선생님은 멀리 부엌에서 닭갈비 냄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에이, 그냥 내가 닭갈비 할 걸..."
여유롭게 좀 쉴려고 했다가 고생만 합니다.
"상구, 그렇게 인상 쓰면서 하면 미루가 자기가 뭐 잘못한 줄 알 거 아냐...웃어..."
"웃으라고? "
"응..."
"알았어...
아이고 우리 미루...똥을 세번씩이나 싸고...잘 했어~아주 잘 했어~~"
미루가 잘한 건 맞습니다.
변비 탈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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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 ^^*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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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가 너나나나의 학수고대를 저버리면 주선생님은 서러울까? 편할까? 편하게 서러울까? ^^;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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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그런일 당하면 서러울걸...누리가 요새 "누리 누가 낳어?" 하고 물어보면 "엄마딸"하고 대답하고 엄마에게 분리불안을 더 느끼는데.. 그럴때마다 누리아빠왈 "자식키워봤자 다 소용없어. 지 엄마밖에 모른다니까"하며 무지 섭해하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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