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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디지털 인민재판

진교수님, 오래 기다렸습니다.

 

과연 인터넷이 간접 대의제 민주주의(루소식으로 단 하루 선거일에만 주인되는)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 일단 더 지켜봐야

 

싸가지 없는 것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다. 사법부등 아무도 의지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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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진중권  (2005-06-11 22:49:22, Hit : 1341, Vote : 27)
Subject  
   [정동칼럼] 디지털 인민재판

[정동칼럼] 디지털 인민재판


〈진중권/ 문화비평가〉


처음 컴퓨터를 샀을 때만 해도 그것은 그저 편리한 타자기에 불과했다. 인터넷과 더불어 이 타자기는 새로운 기능을 획득했다. 타자기에 전화기가 결합되자 그것은 새로운 ‘통신 매체’로 자리를 잡았다. 수많은 개인용 컴퓨터들이 네트로 서로 연결되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물리적 공간과 별도로, ‘사이버’라는 이름의, 실재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사이버공간서 직접 정의 실현-


이 공간은 곧 정치적 중요성을 획득했다. 그 중요성은 일점송신의 기존 매체와 달리 쌍방통신의 성격을 가진 데에서 나온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곧 ‘대의제 민주주의’다. 수천만 유권자가 여의도 광장에 모여 국사를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여의도의 그 자리에는 열린 광장 대신 국회의사당이라는 닫힌 건물이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이 어디 우리를 대표하는가? 우리 손으로 뽑은 우리의 대표가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의 이익을 배반한다는 것. 그것이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다. 그러던 차에 모처럼 고대 그리스처럼 모든 민중이 정치에 대해 직접 발언을 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의 공간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 공간이 ‘사이버’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같은 얘기를 입법부만이 아니라 사법부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근대적 사법체계는 모든 인민으로부터 제 힘으로 정의를 실현할 권리를 박탈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오늘날 제 힘으로 복수를 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된다. 범죄나 사기의 피해자는 그 억울함을 법에 호소해야 하고, 자기에게 해를 입힌 상대를 처벌하는 것은 국가의 힘에 의뢰해야 한다.


하지만 사법부가 어디 민중의 정의를 대변하던가? 힘없는 이들은 빵 한 개를 훔쳐도 구속되어 실형을 사나, 가진 자들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처벌을 받아도 곧 ‘사면’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풀려나며 기자들의 플래시를 받는다. 사법부의 판결을 보면서 민중들은 정의가 훼손되었다는 강한 불만을 느끼다가, 곧 운명론적 체념의 감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은 치사하게 법원에 기대지 않고도 정의를 직접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해준다. 요즘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인터넷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기자들이야 어떤 방식으로든 입을 틀어막을 수 있지만, 인터넷의 거미줄 구조는 그런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이버 공간에서는 종종 사법부도 대표하지 않는 민중의 정의가 실현되곤 한다.


-‘개똥녀’ 사건 윤리 각성 계기로-


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분명히 간접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한계 내에서의 일. 윤리가 허용하는 한계를 넘어설 때 사이버 공간의 재판은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치닫는다.


혁명기의 공산당은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려고 소비에트를 조직했고, 민중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민재판을 도입했다. 하지만 소비에트와 민주주의, 인민재판과 민중의 정의는 서로 붕어빵과 붕어만큼의 관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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