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등’이란 한 글자 위력

 

 

 

등’이란 한 글자 위력
한나라당 “이사 추천자 조항에 넣어라”
열린우리 “개방형이사제 무력화…안돼”
한겨레 허미경 기자 최현준 기자
▲ 여야가 사립학교법 재개정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27일 비정규직 관련 법안 등을 논의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한나라당 의원들의 불참으로 열리지 못하자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퇴장하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관련기사]

개정된 사립학교법의 ‘개방형 이사제’ 조항은 ‘학교법인은 이사 정수의 4분의 1 이상은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가 2배수 추천하는 인사 중에서 선임해야 한다’(제14조 3항)고 돼 있다. 이사 정수는 ‘7인 이상’이다.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25일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열린우리당 쪽에 요구하면서 이 조항에 ‘등’을 삽입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한다면 4월 임시국회에 계류중인 다른 법안을 처리하는 데 있어 여당과 “대승적으로 타협하겠다”고 했다. 위 조항 가운데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를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 등’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글자 수는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교육현장에서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등’이란 낱말 하나가 개방형이사제 도입의 근간을 뒤바꾼다는 것이다.

▲ 사학법은 민생법안의 올가미?

새 사학법의 취지는 사학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했고, 친인척의 학교장 취임을 금지해 족벌경영의 폐단을 막고자 했다. ‘등’을 넣는 순간 개방형이사제 도입은 무력해진다는 게 교육·시민단체들의 지적이다.

더욱이 초·중·고교의 학교운영위와 대학의 평의원회는 학교 구성원의 의견을 결정할 수 있는 법정 기구다. ‘등’을 통해 개방형이사 추천권을 다른 임의기구에 줄 경우, 이른바 재단의 뜻을 대변하는 ‘들러리’ 기구들이 추천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학교 현장은 추천권을 둘러싼 갈등의 장으로 변모한다.

사립학교개혁 국민운동본부(사학개혁국본) 박경양 상임대표는 “법정기구인 평의원회,학운위가 있는데 개방형이사 추천권을 다른 임의기구에 부여한다면 몇명이 모여 임의로 ‘개방형이사 추천’ 기구를 구성한 뒤 이사를 추천하겠다고 줄줄이 나설 경우 막을 길이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방형이사 추천 주체를 확대하겠다는 한나라당의 요구는 학교현장을 추천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몰아넣는 일이자 개방형이사 도입 취지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사학개혁국본은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여야의 사학법 재개정 움직임을 정치야합으로 못박았다. 이들은 “지난해의 사학법 개정은 열린우리당의 생색내기용 결과물이 아니라, 사학의 공공성을 바라는 국민적 투쟁의 성과물”이라며 “여야의 사학법 개악 음모에 맞서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허미경 최현준 기자 carmen@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될듯말듯…우리·민노 ‘반(反)한나라당 연대’

개인적으로

이번에 열우당은 강금실이고 진대제로 다 깨진 다음에

정동영-김한길 그대로 내려오고

새로 시작하는게 좋겠다는 생각

 

평상시에 원내 교섭 단체 터주지도 않는 특권층들이 어디 선거 때나 나와서 설래바리를

 

 

 

될듯말듯…우리·민노 ‘반(反)한나라당 연대’
우리당 연이은 ‘구애’에 민노당 일언지하 ‘퇴짜’…그 이유는?
입력 :2006-04-26 21:43:00   김세옥 (okokida@dailyseop.com)기자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이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연일 ‘딱지’를 맞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부산시장 후보로 전략 공천한 오거돈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지난 25일 김석준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부산의 일당(한나라당) 독점체제에 따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노동당은 물론 무소속 후보까지 포함하는 ‘범시민연석회의’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가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다.

경남도지사 후보로 나선 김두관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이 지난달 19일과 이달 5일 같은 지역에서 출마한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대전제 아래 울산시장과 경남도지사 자리 ‘빅딜’, 경남지역 후보단일화를 위한 ‘경선’ 등을 제안했다가 “앵벌이냐”라고 빈축을 산 데 이어, 벌써 두 번째다.

▲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대전제를 앞세우며 민주노동당에 후보단일화와 선거연대를 제안했던 열린우리당 김두관 경남도지사 후보와 오거돈 부산시장 후보.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사진부  

“말이 좋아 ‘반(反)한나라당 연대 구축’, 민노당에 후보내지 말라는 뜻”

거듭되는 열린우리당의 구애에 민주노동당이 콧대 높게 계속 ‘딱지’를 놓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명분 아래 여당 후보들이 제안하는 ‘후보단일화’, ‘선거연합’ 주장은 절차와 형식 그리고 진정성 중 어느 하나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지안 민주노동당 언론국장은 26일 데일리서프라이즈와의 전화통화에서 “열린우리당은 ‘반(反)한나라당 전선구축’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강조하며 우리에게 ‘왜 대의를 추구하지 않냐’고 비판한다”면서 “그렇다면 왜 여당은 대의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일절 않다가 본격 선거전 중, 그것도 민주노동당 후보가 경쟁력을 갖는 지역에 대해서만 선거연대를 얘기하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아성인 부산에서 벌써 두 번째 시장선거에 도전하고 있는 김석준 후보는 지난 2002년 지방선거 당시 19만2594표(16.8%)를 득표해 화제를 낳은 바 있다.

당시 선거에서 부산시장으로 당선된 한나라당 소속의 안상영 전 시장과 한이헌 민주당 후보는 각각 72만9589표와 22만1938표를 기록했다. 김 후보가 당시 집권당의 후보였던 민주당 후보에게 고작 2만9344표 밖에 뒤지지 않은 것으로, 이는 민주노동당에 매우 의미있는 득표율이다.

반면, 열린우리당이 지난 2004년 과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며 17대 국회에 제1당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실시된 6·5 재보선에서 여당의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오 전 장관은 현 시장인 허남식 한나라당 후보의 득표율 62.3%(56만6700표)보다 24.6%p(22만3590표) 부족한 37.7%(34만3110표)밖에 얻지 못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이 국장은 “결국 (지난 25일 있었던) 오거돈 후보의 ‘범시민연석회의’ 제안도 듣기 좋은 명분을 앞세워 김석준 민주노동당 후보를 배제, 그의 득표력을 흡수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겠냐”면서 “결국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을 주장하는 여당 후보들의 말은 ‘민주노동당이 후보를 내지 않길 바란다’는 말”이라고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이 국장은 또 현재 여당의 후보들이 제안을 던지는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비정규직법,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놓고 일말의 접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현격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보이는 두 정당이 어떻게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명분 아래 ‘당대당’도 아닌, 후보 개인의 기자회견·간담회 등에서 툭툭 던져지는 제안을 갖고 논의를 할 수 있겠냐”고 지적했다.

한 마디로 여당 후보들의 제안 방식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다. 이 국장은 “열린우리당의 주장이 ‘투정’을 넘어 ‘진정성’을 담보한 제안이 되려면 차근차근 순서부터 밟아야 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용진 대변인 역시 “열린우리당이 진정성을 말하기 위해선 민주노동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는 지역 혹은 열린우리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는 지역 등에 대해 먼저 정책적으로 상호 공조하려는 노력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꼬집었다.

박 대변인은 “그럴 리도 없지만 설사 당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한나라당을 무찌르기 위해 열린우리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지도부가 말한다 하더라도 과연 당심(黨心)이 이를 따르겠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지난 2004년 11월 김창현 당시 사무총장이 최고위원회의 내부 전략 문건을 통해 “열린우리당 2중대 소리를 듣더라도 한나라당과 투쟁해야 한다”며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을 주장한 것이 알려지면서 민주노동당은 한 차례 거센 폭풍을 겪은 바 있다.

우리-민노 공조, 본격 논의될 수 있을까…당장의 전망은 ‘흐림’

그렇다면 5·31 지방선거를 ‘반(反)한나라당 정서’에 기반한 ‘지방권력 심판론’의 구도로 끌어가고 있는 열린우리당에선 민주노동당의 이 같은 문제제기를 수용, 정책을 밑바탕으로 한 기초단위부터의 ‘당대당’ 공조 논의를 차근차근 밟아나갈 생각이 있을까.

핵심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초선의원은 26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당장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후보들 사이에서) 민주노동당과 (개인적으로) 후보단일화 등을 추진하겠다는 말이 나오면 정동영 의장께선 ‘생각대로 해보라’고는 답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대당’ 논의로 이끌어 갈 의지까지 보이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여당의 후보가 ‘반(反)한나라당 전선 구축’이란 대전제 아래 개별적으로 민주노동당에 선거연대 등을 제안해 소위 말하듯 ‘입질’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게 냉정한 현실이란 얘기다.

그러나 또 다른 당직자는 “지금 당장은 현실적이지 않아 보여도 계속 얘기를 꺼내면 차츰차츰 논의의 폭이 넓어지지 않겠냐”면서 “김두관 최고위원이나 오거돈 전 장관의 진정성을 폄훼하기 앞서 계속되는 그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의 '안티'인 군사 마니아들에게 말한다

 

 

 

나의 '안티'인 군사 마니아들에게 말한다
[기고-임종인] 국회 국방위 활동을 마무리하며
텍스트만보기   임종인(jonginim) 기자   
▲ 지난 2005년 12월 3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이라크파병연장안에 대해 임종인 열린우리당 의원이 반대토론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최근 나에 대한 군사 마니아들의 안티 활동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2006년 4월 국회에서 조기경보 통제기의 주파 수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적한 것이 계기가 됐다.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해군의 발전방향인 대양해군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온 것도 표적이 됐다.

마침 4월 임시국회가 끝나면 17대 국회 전반기 국방위원회 활동이 마무리된다. 그래서 지난 2년간 국방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나는 무슨 일을 했고, 무엇을 주장했는지 중간결산을 해보려 한다.

내가 추구하는 통일·외교·안보 정책기조는 대미자주, 평화통일, 동북아 안정이다. 국방정책의 1순위는 병사들의 인권과 복지 개선이다. 나는 이런 정책기조가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방정책의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50년 이상 우리 국방정책은 북한무력남침론, 북한무력우세론, 주한미군전력보충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문제는 시대변화에 따라 이런 고정관념이 현실과 맞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2004년 국정감사에서 국회가 생긴지 56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무력 우세론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우리의 군사력이 북한보다 우세하다는 나의 분석에 대해 국방부와 육·해·공군의 입장은 완고했다. 공군만 북한보다 우세하다고 인정했고, 육군과 해군은 북한보다 열세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의 정책기조는 자주국방·평화통일·병사인권

2004년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국방개혁안의 기초자료로 남북한 군사력 비교에 대한 연구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연구에서도 공군만 북한보다 우세(103%)했고, 육군(80%)과 해군(90%)은 북한보다 열세라고 나왔다.

그러나 내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해군이나 육군의 전력도 북한보다 우세했다. 열세라고 주장할 근거는 희박했다. 결국 2005년 국정감사에서는 해군도 북한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가 2004년에 분석한 핵심내용을 소개하면, 해군은 1천톤이상 함정이 한국39:북한3으로 우리가 많았다. 공군은 신형 F-16이 153대로 북한의 동급 MIG-29(30대), MIG-23(46대)보다 77대가 더 많았다. 지상군도 우리는 신형 전차인 K1A1과 K1을 1100여대나 보유하고 있으나 북한은 우리와 동급의 신형전차가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참조. www.wedream.or.kr)

그런데도 육군은 지금도 북한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작전을 총괄하는 합동참모회의(합참) 의장은 272조원의 전력증강비가 더 투자되는 2020년에도 육군은 북한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2003년 3월 16일 미 국방부에서 군부 인사들과 가진 정례 회동에서 "한국의 국내총생산 규모는 북의 25~35배에 이른다, 필요한 만큼의 억지력을 부담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갖고 있다"(한겨레, 2003년 3월 16일)고 밝혔다.

이제 주한미군은 대북억지 역할을 하지 않는다

남북한 군사력비교를 통해 북한무력남침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다음으로 나는 주한미군전력보충론을 검증했다. 우리가 주한미군에게 매년 7천억원의 주둔비부담금(토지·세금·카투사 등 직간접지원비는 1조원 별도)을 주는 것은 미군이 우리를 돕기 위해 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더 이상 대북억지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한반도 안보는 한국군에게 맡기고 주한미군은 한국을 거점으로 전 세계 분쟁지역으로 보낸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

2006년 1월 19일 반기문 장관과 라이스 장관은 공동성명을 통해 이른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용산기지이전협정과 연합토지관리계획(LPP)협정이다. 주한미군 기지의 통폐합과 재배치를 위한 협정이다. 이로써 평택은 동북아기동군으로 변한 주한미군의 거점이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주둔비 부담금, 평택기지 이전부지 385만평, 기지이전비용 5조5천억원 등 미국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들어주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9·11테러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은 선제공격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는 작전계획 5027에 따른 대북군사연습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태에 휘말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전시작전통제권을 빨리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와 한국군의 대미종속에 대한 인식없이 자주국방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한미군의 역할변화는 우리 민족의 생사가 달린 문제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군사적 종속에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자주국방을 해야 한다. 전력만 늘린다고 자주국방이 되는 게 아니다.

국방개혁 전력증강, 미국의 요구가 더 크게 작용했다

국방개혁과 전력증강에 대한 입장도 논리적 맥을 같이한다. 국방부는 2020년까지 한국군의 구조와 전력을 개편하는 국방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국방개혁의 실제 목표가 군구조 개편이 아니라 전력증강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의 국방개혁은 우리 스스로의 필요보다 미국의 요구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첨단무기 구입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전시작전권은 한국군이 능력이 돼야 줄 수 있다는 럼스펠드의 말은 이런 뜻이다. 그리고 한국군이 도입하는 첨단무기는 미군과의 연동을 위해 미국제가 대부분이고, 천문학적인 돈은 미국 무기회사의 손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첨단무기의 필요성을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전력증강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국민, 특히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누누이 염려해왔다.

국방개혁2020에 따르면 국방부는 2020년까지 무려 272조원을 전력증강비로 투자할 계획이다. 경상비 349조원을 더하면 621조원이다. 예산증가율을 보면 초기 5년간(2006~’10) 무려 9.9%의 증가율을 유지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우리는 이미 70년대 율곡사업 이래 2005년까지 80조원을 전력투자비로 지출했다.

그러나 최근 3년간 경제성장률은 5%에도 못 미친다(2003년 3.1%, 2004년 4.6%, 2005년 4.0%). 2005년 말 기준 국가부채가 248조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비를 9.9%나 증액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나는 경제성장률이나 재정증가율 아래로 국방비 증액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700만명이 빈곤층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계와 교육, 의료지원이 절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정된 예산으로 국방예산만 9.9%씩 올리면 서민들에 대한 지원은 어렵다.

주변국에는 일관된 평화정책으로 대응해야

주변국 위협에 대비한 전력증강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다. 주변국 위협에 대비하려면 먼저 북한을 이긴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북한군도 못 이기면서 주변국의 위협에 대비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국들은 우리의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다. 이런 문제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남겨두는 편이 낫다.

지금 동북아정세가 매우 불투명한 것은 사실이다. 북핵문제는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 합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동북아 패권을 둘러싼 미일동맹과 중국의 대응 또한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엄중함에도 선택할 방법이 많지 않다는 데 고민이 있다.

나는 지금의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은 평화를 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흔들림없는 평화정책을 통해 동북아 안정과 다자안보체제를 추구하는 것만이 나라와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균형자 역할을 하자는 것이다.

전력증강은 최소한의 자위권을 갖추되 방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정책은 평화노선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노선은 위험하다. 우리가 전력증강을 외치는 것은 주변 4강의 군비경쟁을 가속화할 뿐이다.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전력증강이 안보를 더 위협하는 꼴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병사인권 개선으로 튼튼한 군대 만들어야

다음으로 내가 주력하는 분야는 병사들의 인권과 복지다. 2005년 1월 10일 훈련소 인분사건, 2005년 6월 19일 전방GP총기사고가 벌어졌다. 나는 평소에도 병사들의 인권과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 사건을 계기로 병사들의 복무조건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새삼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국방정책의 우선순위를 병사들의 인권과 복지에 두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비대한 육군을 줄이고 불필요한 간부도 줄여서 거기서 확보되는 예산을 병사 복무여건 개선에 우선 투자하라고 요구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첨단무기도 필요성을 철저히 검토하자고 한 것도 병사들에 대한 예산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내가 주장하는 병사 인권·복지 개선책은 11가지다.

첫째, 병사월급을 30만원으로 올리는 것이다. 나는 민주국가에서의 병역의무는 2200년전 진시황이 백성들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쌓던 시절의 강제노역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병사들에게 의무복무를 시키려면 국민에게 세금을 걷어서 상당한 돈을 줘야 한다.

징병제 국가인 대만이나 독일에서는 병사들이 사회에서 또래들이 받는 평균임금의 1/3~1/4을 받고 있다. 이를 한국 기준에 대입해 계산해보니 30~40만원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30만원까지 당장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는 의무복무기간을 18개월로 줄이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징병제를 하는 나라는 60여개국이다. 그 중 우리보다 긴 의무복무기간을 가진 나라는 북한을 비롯한 5개국 정도로 알고 있다. 남북 대치상황이라고 하지만 24~27개월은 너무 길다. 병사들이 기능을 습득하는 데는 1~2개월이면 충분하다. 전차나 자주포 등 전문성이 필요한 병과는 부사관 같은 직업군인에게 맡기고, 의무복무기간은 18개월로 줄여야 한다.

셋째는 내무반을 침대형으로 빨리 바꾸는 것이다. 넷째는 미군의 75%(6,912원)까지 식대를 올리는 것이다. 그밖에도 나는 ▲보급품 지급 확대 ▲휴대전화와 인터넷 사용 확대 ▲병사들의 서열문화 개선과 평상시 존댓말 사용 ▲병사 징계영창 폐지 ▲자살사고 방지에 국방부가 관심을 기울일 것을 주장했다.

또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매년 9만여명이 대체복무로 군복무를 대신하고 있다. 병무청의 신체검사자료(2004년)를 보면, 대상자 36만7913명 중 현역 26만1657명, 대체복무 9만9448명, 면제(5·6급) 6808명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600여명이다. 9만명이 대체복무하는 상황에서 600명에게만 징역을 보내는 것을 나는 납득할 수 없다.

대체복무는 병역면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현역보다 1년이 더 긴 3년동안 장애인이나 노인 수발 등 어떤 험한 일도 하겠다는 입장이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입법을 권고했다. 조속히 대체복무제를 시행해서 당사자의 인권문제도 해결하고 복지예산도 절약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장생처럼 내 눈에 불칼이 들어와도 나는 대미자주국방, 한반도 평화, 병사인권을 주장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 우리 아들, 조카인 병사를 위한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006. 4. 26 국회의원 임 종 인

추신 : 나를 공격하는 군사 마니아들에게 말씀드린다. 자유민주국가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주장도 존중해야 한다.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장 자체를 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같다.

다른 견해를 폈다고 무조건 비난부터 해서는 안 된다. 나와 견해가 다르더라도 상대방이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욕이 아닌 대화와 토론으로 모든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낡은 팬티로 러닝을

낡은 팬티로 러닝을
2006-04-24 19:16 | VIEW : 4,044

1. 낡은 팬티가 주위에 있는지 찾아본다.
2. 가위를 준비한다.


3. 그림처럼 가운데를 자른다.
4. 입으면 멋진 러닝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기발하지 않습니까?
ㅋㅋㅋ

도깨비뉴스 독자= 불늑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상미 버스

남상미 버스
화일1
namsangmibus.jpg (214.7 KB) Download : 4
링크1 http://os1.com/100sexy/KHM-100sexy/2006-100sexy/namsangmibus-os1.jpg

이관성입니다.

시내버스에 부착된 한 소주광고 사진입니다. 녹색버스에 붉은 원피스의 남상미는 술맛을 돋구는데 부족함이 없어보입니다. 문제는 버스가 기름이나 가스가 떨어져 주유소 주유기앞에 갔을 때 벌어집니다. 주유구를 열기 위해 주유원이 남상미앞으로 갑니다. 주유원은 왼손으로 뚜껑을 젖히고 오른 손으로 마개를 서서히 돌립니다. 마개가 열리면 주유건을 깁숙히 꽂고 손잡이를 쥡니다. 만원단위를 맞추기 위해 주유원은 손잡이를 쥐었다 폈다 반복합니다. 3분이 되어 기름이나 가스가 꽉차면 주유원은 주유기를 빼서 입구안에 대고 서너번 털어 남은 기름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조치합니다.

남상미는 버스에 열심히 기름을 넣어준 주유원을 바라보며 계속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주유원은 주유하는 동안 내내 남상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한번도 웃지 않았습니다.

도깨비뉴스 독자리포터 = 이관성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쇼핑몰 몸짱녀 라는데..

 

 

 

쇼핑몰 몸짱녀 라는데..

실물이 궁금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노당펌: 물신주의

 

 

   

2006. 4. 17. 월요일
남로당 예술진흥위

[no title] from "Ways and Means" 1976-7

타이트한 검정색 보디수트에 팔꿈치를 덮는 긴 가죽장갑,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미끈한 가죽부츠, 아찔한 하이힐... SM잡지의 한 장면 같은 위의 이미지는 영국의 팝 아티스트 알렌 존스(Allen Jones)의 작품입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알렌 존스의 1960-70년대 작품을 통해 페티시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알렌 존스는 1937년 생으로 혼시 미술학교(Hornsey College of Art)와 왕립 미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정규미술교육을 받은 영국의 팝아티스트입니다. 1963년부터 특유의 에로틱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후 영국 팝아트의 선발주자로 잘 나갔던 작가입니다.

여기서 잠깐 팝아트(Pop Art)에 대해 짚고 넘어가죠. 196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유행했던 팝아트는 소위 '고상한 미술(High Art)'에 반발하여 저속한 대중문화와의 결합을 시도한 흐름입니다. '일시적, 대중적, 대량생산된 것'이라는 대중문화의 속성을 미술에 차용했던 시도는 상당히 획기적인 것이었는데, 팝아트는 대중문화의 일상적이며 상징적인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생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앤디 워홀(Andy Warhol) [마릴린 먼로] 1962

자살한 뒤에도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었던 팝스타의 초상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산업화된 미술은 이런 것'이라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기에, 워홀은 자신의 제작팀을 '공장(Factory)'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
[오늘날 우리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 so different, so appealing?)] 1956

질문에 대한 답을 그림 안에서 찾아보세요. 우리의 가정이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팝아트는 가장 미국적인 미술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조류는 영국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에서 자본주의 문화의 산물에 주목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렌 존스는 리차드 해밀턴, 피터 블레이크, 데이비드 호크니, 로널드 B. 키타이, 피터 필립스 등 영국의 쟁쟁한 팝아티스트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이 작가들은 산업사회의 파편적 인간과 기계적인 일상의 이미지나 대중매체에 반영되는 이미지를 표현했는데, 이들의 무심한 시선에서 우리는 분명한 성적 코드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섹스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알렌 존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no title] from "Ways and Means" 1976-7

호색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성인잡지야 말로 저속한 대중문화의 표상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적나라한 일면이며 동시에 현대인의 욕망이 들끓는 장입니다. 그렇다고 알렌 존스의 작품이 현대사회의 성 상품화 또는 상업적인 성에 대해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고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팝아트의 기본정신은 대중문화의 비판이 아닌 수용이거든요.

[no title] from "Ways and Means" 1976-7

'미술 작품은 사회적인 결과물이다' 라고 말하는 데에 본 필자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미술사는 결국 역사와 문화사의 거대한 조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구요. 하지만 창작의 원동력은 보다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많은 예술가들이 사회체제에 그리 순응하지 않는 삶을 살았거든요. 이들이 사회에 반대하며 욕먹고 얻어맞고 돈도 못 벌면서 아방가르드한 작품을 내지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개인적인 욕망이라고 보아야 할 거에요. (물론 사회와 무관하게 완전히 독자적인 개인의 욕망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일례로 알렌 존스와 데이비드 호크니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미국의 상업주의 포르노를 재생산한 듯한 위의 작품들은 알렌 존스가 미국을 방문한 이후에 제작한 것입니다. 같은 영국 출신의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미국을 여행하며 넓은 대륙, 황량한 사막, 끝없는 고속도로와 같은 인상을 간직한 반면, 우리의 알렌 존스는 보다 생활에 밀접한 이미지에 더 강렬하게 끌린 것 같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고 함께 미술교육을 받았으며 비슷한 이념을 전제로 창작에 임했던 작가인데, 이들이 선택한 소재는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미지의 차이를 통해 작가의 톡특한 성적 취향을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색적인 취향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던 알렌 존스의 초기 작품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citing Women] 1964

[Neither Forget your Legs] 1965

페티시즘, 특히 다리와 하이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알렌 존스의 초기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가죽부츠,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다리는 벌거벗은 다리보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정도라면 톡특한 미적 취향의 수준이겠지만, 페티시즘은 이를 넘어선 수준으로 성도착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알렌 존스가 1963년에 니체와 프로이트, 융의 저작을 읽었다는 기록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그가 프로이트의 이론을 얼마나 수용하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우리는 프로이트의 성도착 이론을 조금 살펴본 뒤 알렌 존스의 작품을 다시 보기로 하지요.

[Wet Seal] 1966

프로이트는 성도착을 성 대상(Sexualobjekt)에 대한 도착과 성 목적(Sexualziel)에 대한 도착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성적 대상에 대한 도착은 성적 매력을 느끼는 대상(상대방의 성별)이 도착된 경우로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성적목적에 대한 도착은 생식기 결합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적인 긴장을 해소하거나 성욕을 충족하려는 경우를 말합니다. 프로이트는 성목적 도착을 성대상의 과대평가, 입술과 항문의 성적인 이용, 그리고 성대상의 부적절한 대체물, 즉 페티시즘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 외에도, 관음증(=절시증)과 노출증, 가학피학 성향 등을 설명합니다.)

페티시즘은 절편음란증(切片淫亂症)이라고 번역하는데, 신체의 일부 또는 그것을 연상케 하는 다른 물건들에 대해 성충동을 느끼는 이상심리를 말합니다. 프로이트는 발이나 머리카락, 속옷이나 옷 등에 성목적을 가지는 경우는 '야만인들이 자기들의 신을 구현시킨 것이라고 믿는 물신(物神)과 비슷하다'고 봅니다.(정신분석학 용어 이전에 페티시(fetish)는 물신, 맹목적 숭배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상적인 애정에서도 페티시는 흔하게 나타는데, 이런 심리가 병적인 것으로 진단받는 경우는 페티시의 대상이 필요조건 정도를 넘어서 '정상적인 성목적(생식기 결합)을 대신'하게 될 때라고 규정합니다.또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의 원인을 어린 시절의 성적 느낌 때문이거나, (모피가 여성의 음모를 연상시킨다는 식으로) 어떤 물건이 성기와 상징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알렌 존스(Allen Jones), [모자 걸이, 테이블, 의자], 1969

그렇다면 명백하게 SM적인 페티시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알렌 존스는 1969년, 여성의 모습을 마네킹으로 제작하고 이를 가구로 제시한 작품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롱부츠와 장갑, 가죽 칼라를 달고 짧은 팬츠만을 입고 있는 여성이 모자 걸이로, 테이블 받침으로, 의자로 표현되어 있는 이 조각을 통해 물질화된 여성, 상품화된 여성에 대한 비유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성들은, 사실 '여성'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인 객체로 보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단지, 몹시 에로틱한 모자걸이, 테이블, 의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성을 물질화하는 가학적 성향의 전통은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의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린 소녀를 침대와 식탁으로 사용했다는 고전적인 내용에 보다 현대적인 가학의 상징물이 첨가되어 이런 이미지로 표현된 것이겠지요.

[I], [IV] from "The Magician Suite" 1976

알렌 존스의 70년대 작품에서 여성의 스타킹, 하이힐, 부츠에 대한 집착은 최고조로 나타납니다. 이미지 속의 여성들은 오직 다리만으로 등장하며, 그녀의 얼굴이나 신체의 다른 부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신발이나 슬리퍼가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하게 하는 상징이라고 하는데, 알렌 존스의 심리에서 하이힐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VI] from "The Magician Suite" 1976

알렌 존스의 하이힐 페티시에 관해 본 필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합니다. SM의 상징물을 도상학적으로 해석하거나, 하이힐 페티시의 심리를 새삼스레 분석하거나, 정상적인 성과 비정상적인 성도착의 경계를 억지스럽게 그어 내리거나, 남성들의 하이힐 페티시로 인한 여성들의 자발적 전족 문화를 비판하거나, 현대판 전족 하이힐이 발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개탄할 이유는 없습니다. 알렌 존스의 페티시즘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든 감상자에게 파장을 일으켰다면, 필자로서는 의미 있는 작가를 소개하는 소임을 다 한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이 본 칼럼의 의의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다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성도착이 다양한 성적 취향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알렌 존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생물학자 킨제이의 말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간주할 만한 분출형태는 생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학적으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Woman-Splash] 1970-1

* 지난 편에 근친애 환타지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하겠노라 말하며 글을 맺었는데 뜬금없이 페티시즘이란 주제를 들고 나온 이유를 궁금해하실 것 같아 덧붙입니다. 사실은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를 읽다가 갑자기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가 눈에 들어왔고 충동적으로 이쪽에 꽂혀버렸습니다. 어쨌든 정상적 성충동과 비정상적 성도착의 이분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 성도착에 대한 견해는 프로이트의 [...에세이]를 전적으로 참고했습니다. 백년전에 발표된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 부정, 수정 보완하는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살펴보지 못해 아쉽지만, 차후에 보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 기사는 남로당(www.namrodang.com)에서 제공합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노당펌: 치치올리나

 

 

 

   

2006. 4. 21. 금요일
남로당 진상조사위

아시는지 모르겠다. 치치올리나라고...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 번은' 세기의 독재자 후세인에게 독재를 포기하면 잠자리를 같이 해주겠노라고 말한 바 있던 이탈리아 국회의원을 지낸 포르노스타 말이다. 그 제의를 포기한 후세인은 결국 미국의 법정에 서는 쪽팔린 일을 당하고 있다.

그녀가 또 한 건 했다. 물론 대단한 낚시질에서 끝이 나겠지만, 지난 14일 루마니아에서 열렸던 한 에로박람회에서 그녀는 세기의 테러리스트 빈 라덴에게 한 코를 제의했다. '포악한 테러 행위"를 그만두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자유와 평화의 여신이 따로 없다.

내가 후세인이고 빈라덴이라면 하룻밤의 끈끈한 정사로 독재와 테러를 그만두겠지만 말이다, 후세인은 그러지 않았고, 미스터빈 또한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돈다발에 양주를 받고, 애완용 강아지에 10만원의 세금 아닌 세금을 물리겠다는 엉뚱한 발상의 전환을 가지신 의원나리들이 횡행하는 이 시기에 그녀의 한 마디가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누구는 몸을 바쳐 세계평화를 위해 애 좀 쓰겠다는데, 누구는 그 몸 하나 부지하려고들 이 좁은 반도의 작은 강 바닥의 쥐좇만한 섬 안에서 애가 탄다. 닝기리~.

여하간 이 두 번의 세기적인 동침선언을 한 치치올리나가 바로 오늘 진상조사의 주인공 일로나 스탤러(Ilona Staller)이다. 그럼 이탈리아 급진당 전의원이신 치치올리나, 일로나 스탤러를 만나보기로 하겠다. 물론 레드썬이다.

남로당 : 안녕하신가요? 세기적인 성인웹진 남로당입니다. 이렇게 세기적인 포르노 배우이자 전 의원이시고 러브 퍼포머이신 치치올리나 일로나스탤러를 만나게 되어 무지하게 기쁩니다.

일로나 : 그냥 짧게 일로나로 가자구요. 나도 반가워요. 호호호... ^^

남로당 : 우선, 음... 나이가 아니 연세가 좀 있어보입니다. 시방 몇학년 몇반이신지...

일로나 : 음, 내가 1951년 11월생이니 그쪽 나이로 5학년6반이네요. 별로 안 먹었죠?

남로당 : 생각보다는 좀 있으시네요. 허허허... 근데 이탈리아가 고향인가요?

일로나 : 아니에요. 고향은 헝가리 부다페스트랍니다.

남로당 : 근데 어떻게하다가 이탈리아에서 국회의원도 하게 되었나요?

일로나 : 음, 얘기하자면 좀 긴데... 요약정리를 해서 말씀드리지요.

말했듯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어요. 나의 계부는 정부의 공무원이었고, 엄마는 조산사로 일을 했지요. 10대인 1964년부터 모델 활동을 했어요. 그리고 16살때 흑인학생에게 첫 순결을 주었지요. 그러다 미국 외교관들이 잘 묵는 부다페스트의 호텔에서 일을 했지요. 그때가 아마 60년대 말쯤... 되었지요.

그러다 결혼을 하면서 이탈리아로 귀화했어요. 70년대 초 포르노 작가인 리카르도(Riccardo Schicchi)를 만나면서 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죠. 그렇게 이탈리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후로 30여편의 작품활동을 했네요. 미국아이들에 비교하면 그리 많지 않죠?

남로당 : 그렇군요. 그럼 국회의원은 어떻게...?

일로나 : 그러니깐 1979년 이탈리아 녹색당의 유력한 후보중의 하나였어요. 그 사회는 포르노배우도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주의니깐... 그러다 1985년 반핵운동과 인권운동, 기아 반대 운동 등 여러가지 사회운동을 별였지요. 그리고 1987년 이탈리아 급진당의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어요.

남로당 : 네 그렇군요. 얼마전 우리 나라에서는 직업 여성이 국회의원이 된다는 영화가 있었는데, 말이 참 많았죠. 국회 등원장면을 찍어야했는데 국회의사당에서 허가가 나지않아 국회 담을 넘다가 경찰에 붙들려 가고 그랬던가... 암튼 우리 사회와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선 20년은 더 뒤져있군요.

어린 시절의 일로나

남로당 : 근데 일로나 스탤러가 본명인가요?

일로나 : 아니에요. 본명은 'Elena Anna Staller'이고, 치치올리나(Cicciolina)이탈리아말로 '포옹, 꼭 껴안다'라는 뜻이에요. 내 테디베어 곰인형 이름이 '치치올리노'에요. 나의 팬들은 '치치올리니'이구요. ^^

남로당 : 불현듯 모 그룹사의 광고가 생각나네요. "안아주세요오오오, 아 나아주세요~". 아, 세기적인 팝아티스트와 결혼을 했다던데요.

일로나 : 제프 쿤스(Jeff Koons)라는 미국사내에요. 팝아트라는 게 뭐 별거 있나요? 그냥 영감이 떠오르면 저지르는 거죠. 어쩌면 기존의 예술보다 더 대중적이지 않은지도 몰라요. 왜 얼마전에 돌아가신 백남준씨가 그랬잖아요. 예술은 사기라고... 아무튼 그는 나와 1989년 [천국에서 만든 (Made in Heaven)]이란 연작 전시를 했지요. 뭐 그냥 응응응 작품이에요. 그리고 1991년 결혼을 했어요. 지금은 이혼을 한 상태고, 그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내가 키우고 있죠. 양육권 때문에 법정까지 같지만 그는 치졸하게 나를 공격했죠. 하지만 내가 결국에 승소했어요.

제프쿤스는 위와 같은 성실하고 착한 응응응 전시물로
당시의 비평가들을 겉으로는 화들짝 놀라게 했다.

남로당 : 하긴.. 말이죠. 전위니 행위니 팝아트... 뭐 그런 거 사실 이애하기는 좀 힘들어요. 다소 주관적이라... 사실 느끼지 못하는 예술은 별 의미 없죠. 뭐 세상 꼴리는대로 사는 거지만... 근데 예전에 러브당인가 뭔가 만들지 않았나요?

일로나 : 그랬죠. 동료배우인 모아나 포찌(Moana Pozzi)랑 같이 창당했지요. 주 공약이 '러브 공원'이라 부르는 성매매 집결지의 합법화와 보다 실용적인 성교육을 주창했었죠. 하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어요.

Moana Pozzi

남로당 : 오오... 우리 남로당에 입당을 하셔얄 것 같네요. 너부리 사무총장이 너무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고향에서 정치를 해볼 생각은 없나요?

일로나 : 안 그래도 2002년에 헝가리의 총선에 출마를 했지만 낙선하고 말았어요. 오래 떠나 있었던 탓이 아닐까 생각해요.

남로당 : 얼마 전에 누드집을 냈어요. 의외로 얌전한 누드집이었는데요.

일로나 : 로마에서 누드 사진 전시회를 시작했어요. 같은 업계의 동료였던 지안 프랑코 살리가 사진을 찍었구요, 어떤 사진은 10대처럼 보일 정도로 잘 나왔답니다. 호호호.

남로당 : 에구 설마요. 제가 다 봤어요. 참 근데 중요한 걸 안 물어봤네. 사이즈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요?

일로나 : 그러니깐 처음에 모델 활동할 때는 31B-22-31 정도였구요, 하원의원시절에 33C-22-34 정도, 그리고 애낳고 수술을 좀 해서 36D-25-37이에요. 이것도 예전에 잰 거라 지금은 좀 처져서...

남로당 : 능히 세기적인 위인이 가질 만한 사이즈네요. 전설적인 포르노 배우인 존 홈즈와 뭔가 일이 있었다던데요.

일로나 : 일이라기보다는 죽을 뻔 했죠. 난 존 홈즈의 배우생활 후반부에 몇 편 같이 했는데, 그는 그때 이미 에이즈 환자였어요. 하지만 그는 코카인을 사기 위해 그것을 숨기고 배우생활을 했죠. 결국 그는 죽었고, 나는 다행히도 에이즈에는 걸리지 않았어요. 천만 다행이죠.

남로당 : 정말 큰일 날 뻔 했네요.

[The Rise of the Roman Empress 1987] 중에서

남로당 : 그런데 어떤가요... 우리 나리들 중에는 여색을 밝혀 뒤에서 가슴을 만지는 나리와 그를 동정하는 나리들이 좀 있답니다. 빈 라덴도 좋지만 그들에게도 좀 베풀어주시는 것은...

일로나 : 아... 인터뷰가 좀 싸게 나가네요. 살짝 기분 나쁠려고 하는데... 일단 명분이 좀 없네요. 그냥 혼자서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세요. 아래 누드 사진을 몇 개 더 서비스 해드리죠.

남로당 : 아,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아무튼 남은 인생 즐겁게 사시고, 빈 라덴이 생각의 전환을 통해 누님 품속에서 사정 한 번 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무장해제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부시나 고이즈미랑도 한 자리씩 하시기를 권해드려봅니다.

그리고 본 인터뷰는 인터넷에 널려있는 누님의 자료를 근거로 엮은 가상 인터뷰이니 불필요한 오해를 하는 독자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일로나 : 뭐 다 큰 성인들이니 알아서 이해하시겠지요. 소심하기는... 함 안아줄까?

남로당 : 어머머! 치치올리나 누님~ 이러시면 안되어... 와락! ^O^;;;

* 본 기사는 남로당(www.namrodang.com)에서 제공합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국 네티즌들은 점잖아서 이런 것 안하죠

 

 

한국 네티즌들은 점잖아서 이런 것 안하죠
2006-04-25 15:44 | VIEW : 26,439

짓궂은 청년 3명이 광고판 속 미녀 사진의 가슴을 더듬고 있습니다. 저렇게 해 봤자 팔만 아프지 재미있을 턱이 없지요. 하지만 청년들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합니다.

가슴을 더듬는 것 보다 저런 포즈로 사진을 찍는 '놀이'가 재미있다는 것이겠지요.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엽기 사진 찍기가 유행입니다만 외국서도 별반 다르진 않는 모양입니다.
놀이 자체는 어쩌면 유치하고 저질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걸 촬영해 개인홈피나 블로그에 올려 놓고 아는 사람들끼리 낄낄대며 돌려 보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온 게시판에 퍼져 등장인물들이 유명해지면 그것도 재미있고~~

이런 경향은 한국 네티즌들이나 외국 네티즌들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인데 한가지 다른 점은 국내에는 이처럼 노출이 심한 여성 속옷 광고판을 이용한 엽기사진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한국 네티즌들이 점잖아서 일까요? 아마 국내에는 이처럼 노출이 심한 광고판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듯합니다.

외국의 엽기 사이트 등에는 이같은 사진이 흔히 올라 오고 있으며 곧 바로 국내 사이트로 전해져 네티즌들 사이에 인기를 끕니다.
위 사진은 '성희롱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유머사이트 등에 돌아다니는 사진입니다.

도깨비뉴스가 몇 차례 소개했던 '이런 사람 꼭있다', '너무 많이 본 엽기 사진' 등등의 엽기 사진들과 '컨셉'이 비슷한 것입니다.


2006년 1월 중순 '이런 사람 꼭 있다'란 제목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인터넷상에 '란제리 입은 여성을 뒤에서 껴안는 변태'라는 제목으로 돌아다니는 사진입니다. 한 남자가 여성 속옷광고 포스터가 붙어 있는 큰 원형기둥을 붙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2004년 4월 중순 '너무 많이 본 엽기 사진'이란 제목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속옷 패션 모델의 팬티를 들춰보고 있습니다. 당시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올라와 있던 것으로 사진에대한 정확한 해설이나 출처가 없었습니다.


2004년 5월 초 '세살 버릇 여든까지…'란 제목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당시 오늘의 유머에 '루스까야'님이 '그림의 떡'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사진입니다. 위에 소개한 '너무 많이 본 엽기사진'의 아이가 크면 이러한 장난을 또 하지는 않을지…


2004년 5월 말 '그 아이가 결국엔'이란 제목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당시 엠파스 유행 검색의 대략난감 게시판에 '큐레이터'님이 올린 사진입니다. '너무 많이 본 엽기 사진', '세살 버릇 여든까지…', '그 아이가 결국엔'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어렸을 때는 직접 손으로 여성 속옷모델 포스터에서 팬티를 들춰보더니 아저씨가 되서는 속옷 모델 포스터의 브래지어를 훔쳐봅니다. 이 남자 할아버지가 되어서는 지팡이로 상반신 누드의 뒷모습이 그려진 액자를 들춰보고 있다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redian.org펌]세계의 사회주의자④ - 장 폴 사르트르

 

 

 

> 뉴스 > 국제 | 세계의 사회주의자
     
(실존주의)자유는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실현된다
세계의 사회주의자④ - 장 폴 사르트르

"그것은 아직도 어린아이 단계에 있다. 그것은 자기 발전을 거의 시작도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들 세기의 철학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아직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낳았던 시대적 상황이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참여작가로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1905∼1980)가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라는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철학”이라고 주장한 사르트르였지만 그가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파리고등사범학교 시절 철학을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스승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57년에 쓴 위 논문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25년, 즉 내가 스무살이었을 때, 대학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강좌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학생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는 것이나 또는 심지어 자신들의 세미나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하는 것조차 경계하고 있었다."

2차대전 중 파리 지식인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

     
   
▲ 사르트르는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사시로 인해 시력이 크게 저하됐다.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사르트르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일하면서 <구토>, <벽>등 소설과 희곡작품을 발표하다가 2차대전 기간 군복무 중 독일군에 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근무하던 중 그는 나치에 반대하는 희곡 '파리들'을 발표하는 등 독일군 치하에 있던 파리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으나 지식인으로서 활발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개했다. 사르트르는 이때 그의 동반자인 시몬느 드 보봐르, 메를로 퐁티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지하서클 ‘사회주의와 자유’(Socialisme et Liberté)를 결성했다.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사회 참여(앙가주망, engagement)를 강조했던 사르트르의 사상은 이미 전쟁중 그의 저항운동에서 그 단초를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사회주의와 자유’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그는 서클을 해산하고 집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는 포로수용소 시절에 구상했던 실존주의 철학서 <존재와 무>를 1943년 발간함으로써 철학자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5년 교직생활을 청산한 후 사르트르는 학창시절부터 오랜 친구였던 철학자 메를로 퐁티와 함께 좌파 잡지 <현대>를 창간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1968년 혁명에 열렬한 지지 보내

하지만 전후 자신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이 프랑스 지성계에서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사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1951∼1952년 무렵 마르크스를 다시 읽기 시작한 이후였다.

사르트르는 냉전이 깊어가기 시작하자 1952년 빈에서 열린 공산주의자들의 평화를 위한 민중대회에 참석하고 소련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등 사회주의 지식인으로서의 실천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사르트르는 그의 오랜 친구였던 알베르 카뮈와 멀어졌다.

1950년대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이 자유의 신장과 사회의 변화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당으로 보고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68년 혁명 당시 학생들의 투쟁을 한낱 철부지들의 모험주의로 치부했던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고 철저히 학생들의 편에 섰다.

그는 프랑스의 주요 지식인 가운데 처음으로 학생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인물이었다. 사르트르는 1968년 5월 혁명의 학생지도자 다니엘 콩방디와의 대담에서 "우리 사회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무언가가 당신에게서 솟아 나오고 있다. 나는 이것을 가능성의 확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포기하지 말라"며 강력한 지지의사를 표시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은 그에게 현실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게 만들었지만 사르트르는 "하나의 가치, 즉 스스로 목적으로 고양되는 자유"로서의 사회주의마저 버리지는 않았다.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결합 시도
   
 
▲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이 1946년에 찍은 사르트르. 오른쪽은 건축가 장 뿌이용.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시도했다. 실존주의자로서 '자유'를 중시한 사르트르에게 있어 자유는 혁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자유를 실현할 "혁명은 보다 길게 지속될 것이며 보다 강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중 세력이 부르주아의 권력에 대해 부분적 승리를 거두고 진보와 반동이 되풀이되며 제한된 성공과 일시적 실패가 반복되는 이 싸움은…모든 권력이 완전히 해소되는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적어도 50년은 걸릴 것"이라며 "혁명은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에 의해 전복되는 순간이 아니라 권력을 극복해가는 하나의 긴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해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던 사르트르는 1968년 혁명 이후 1980년 숨을 거둘 때까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는 등 신좌파 학생들의 운동에 동참했다.

사르트르에 대해 부르주아 철학자들은 그가 초기의 실존주의에서 후기 마르크스주의로 '경도'되면서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거부하고 민중을 지키는 민중계급의 옹호자로 남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실천적 좌파 지식인이었다.

     관련기사
· "그가 노동당 당원증을 찢어버린 이유"
2006년 04월 18일 (화) 13:34:31 윤재설 기자
윤재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