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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결과적으로 황우석 박사는 거짓말한 셈”

 

 

 

진중권 “결과적으로 황우석 박사는 거짓말한 셈”
22일 SBS컬럼 “윤리문제제기 매국노로 모는 광신적 애국주의” 일침
입력 :2005-11-22 10:14   이기호 (actsky@dailyseop.com)기자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의 줄기세포연구에 사용된 난자가 매매된 것을 밝혀진 것과 관련해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가 광신적 애국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진 씨는 22일 오전 자신이 진행하는 ‘진중권의 SBS전망대’에서 ‘생명윤리와 국수주의’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그는 ‘2002년 매매된 난자로 연구를 진행할 때에는 관련법이나 윤리규정이 없었다’고 해명한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의 언급을 인용했지만 “인체를 대상으로 한 과학연구기준인 헬싱키선언은 이미 1964년에 나왔고, 2001년 제정된 ‘의사윤리규정’도 의사가 난자의 매매에 관여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꼬집었다.

특히 ‘사이언스’지에 논문을 공개할 당시 황 박사가 ‘16명의 자발적 기증자로부터 난자를 기증받았다’‘한양대병원 기관윤리위원회의 철저한 검증을 받았다’고 밝힌 점을 들어 “결과적으로 황 박사는 거짓말을, 기관윤리위는 허위검증을 한 셈이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전날 노 이사장이 밝힌 내용이 분명치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진 씨는 “과연 황 박사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기증받은 난자 중에 여성 연구원의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노 이사장의 언급은 모호하기만 하다”며 “앞으로 이 부분은 황 박사가 직접 밝혀야 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생명윤리과 관련해 진 씨는 “이번 일로 배아도 생명인가 하는 문제와 구별되는 또 다른 윤리의 영역들이 드러났다”며 “‘여성의 신체’에 대한 기술의 개입, 즉 난자의 채취가 여성의 신체에 끼치는 위험이 그 동안 제대로 평가가 됐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돈을 받고 난자를 제공한 여성들의 상당수가 생계의 위협을 받는 ‘저소득층’이라는 점을 들어 “장기의 매매가 이루어질 경우 몸의 일부를 파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 마음에 새겨둬야 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진 씨의 이날 칼럼 중 가장 관심을 모은 대목은 이번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을 ‘매국노’로 몰아가는 현실에 대한 비판.

그는 “이번 사태가 황 박사의 연구에 대한 질시와 시기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생명윤리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는 이들을 매국노로 몰아가는 광신적 애국주의도 조국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정서와 외국과 다르다는 변명은 그 자체도 바람직스럽지 못할 뿐더러, 국제무대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 국수주의적 넋두리에 불과하다”며 “인권도 인류보편적 가치라 하는데 생명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고 꼬집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침 자발적인 난자 기증을 활성화하기 위한 난자기증재단이 설립됐다”며 “이렇게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난자기증의 시스템을 확보하고, 거기에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윤리적 검증장치를 갖춰 이번 일을 생명과학 연구를 위한 안정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관/련/기/사
“치료위해서라면 난자기증, 범법이라도 하겠다” /이기호 기자
황교수 매매난자 보도한 MBC, 누리꾼들에게 ‘역풍’ /최고다 기자
매매난자 후폭풍 최악의 경우는 논문취소 /안성모 최한성 기자
황우석 교수 ‘난자 기증 윤리 논란’ 파문 일지 /김길원 기자
“황우석 줄기세포 연구에 난자 돈주고 샀다” /문윤희 기자
네이처 “한국 정부가 황우석 조사하라” 사설 파문 /이창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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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인권론'은 진실한가

 

 

그들의 '인권론'은 진실한가
[손석춘 칼럼] 목소리 높아가는 '대북 인권공세'
텍스트만보기   손석춘(ssch) 기자   
▲ 지난 17일 유엔본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 북한인권 결의안이 찬성 84, 반대 22, 기권 62로 통과됐다.
ⓒ 연합뉴스 김계환

사람을 잡아먹는 악어. 식인악어다. 서양의 전설이 전하는 특별한 악어가 있다. 이집트 나일강의 악어다. 사람을 잡아먹은 뒤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단다.

그래서다. 악어의 눈물. 그것은 위선, 아니 거짓의 눈물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을 들먹이는 윤똑똑이들을 보며 새삼 떠오른 '눈물'이다. 유엔총회가 대북인권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인권론자들의 눈물은 더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다. 보라.

"위태로운 인권 상황, 특히 상당수의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육체적-정신적 발달에 지장을 받고 있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유엔 총회가 채택한 '결의'의 일부다. 물론, 유엔의 결의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03년부터 유엔 인권위의 '연례행사'다. 문제는 대북인권결의를 총회가 채택한 데 있다. 나라 안팎에서 '인권론자'들의 목소리가 무장 커져갈게 틀림없다.

나라 안팎에서 '대북 인권론자'들 활개

당장 6자회담 앞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미국의 호전적 세력에게 '인권'은 얼마나 좋은 명분인가. 그 뿐인가. 어김없이 이 땅의 한나라당도 흥분했다. 짝을 이루는 수구언론도 부르댔다. 한나라당은 곧장 선언했다.

"대한민국은 인권국가이기를 포기했다."

찬찬히 톺아볼 일이다. 인권결의에 온 세계가 나선 게 결코 아니다. 유럽연합이 제출한 결의안의 표결 결과는 찬성 84표에 반대 22표다. 압도적 표차로 보이지만 기권이 62표다. 반대와 기권을 합치면 찬성표와 같다.

중국만이 아니다. 이집트와 쿠바도 미국과 유럽을 비난하며 강조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명백한 이중잣대(double standard)다."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가.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은 지난 시기 친미국가에서 일어난 대량 인권침해에 침묵했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숱한 정치적 학살을 돌아 보라. 아니 수백 명을 학살한 이 땅의 '오월'에 유엔은, 아니 미국은 무엇을 했는가. 미국은 되레 학살의 공범 아니었던가.

한나라당 또한 마찬가지다. 인권국가이길 포기했다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차라리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들 스스로 대한민국의 인권을 유린한 자들 아닌가. 대한민국의 인권을 유린하거나 방조한 자들은 되레 공격한다.

"왜 박정희와 싸우며 인권을 주장하던 진보세력이 북의 인권에 침묵하는가?"

유행처럼 '수구좌파'라는 딱지를 살천스레 붙인다.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은 갈수록 목소리를 높여간다. 하여, 진정으로 묻고 싶다. 바로 그대들이 아니었던가. 남쪽의 인권운동을 펴던 사람들에게 '북과의 연계' 운운하며 탄압하던 자들이.

조금이라도 논리적 판단을 할 수 있다면, 자문하기 바란다. 북쪽의 인권운동을 지금 남쪽에서 편히 살고 있는 그대들이 펴는 게 과연 도움이 되겠는가.

'제국주의 악어'가 흘리는 눈물의 본질

미국의 눈물 또한 위선이다. 진정으로 평양 어린이들 인권이 안타깝다면, 거듭 명토박아 둔다. 미국이 할 일은 따로 있다. 대북경제 제재를 풀고 수교에 나서라. 북핵문제는 그 순간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할 때다. 인권을 들먹이는 미국의 제국주의 세력은, 그리고 그에 용춤추는 국내 일부 수구세력은 숨기지 않고 있다. 스스로 호전적임을.

저들의 인권론을 '악어의 인권론'으로 규정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서다. 먹이를 삼키기 좋게 침을 섞는 행위, 그것이 악어의 눈물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다. 저 악어의 인권론도 그 연장선에 있지 않을까. 다른 나라를 잡아먹는 악어, 그렇다. 전설이 되어 가는 서양의 특별한 악어, 제국주의 악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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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제임스 본드 '다니엘', 잘 할 수 있을까?

 

 

새 제임스 본드 '다니엘', 잘 할 수 있을까?
007시리즈 21편, <카지노 로얄> 내년에 개봉
텍스트만보기   박형준(ctzxp) 기자   
논란이 많은 새로운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은 애정을 가진 시리즈와 캐릭터를 꼽자면, 역시 007 시리즈와 제임스 본드는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외모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탁월하면서 적당히 인간적인 매력까지 안고 있어,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이렇게 친숙한 캐릭터는 생각보다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단한 제임스 본드에게도 다소 거부감이 드는 모습은 있다. 사실 나는 바람둥이로 소문난 제임스 본드가 아름다운 여자들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장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여자들에게 정신을 빼앗기다 뒤통수를 맞고 기절한 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딘가에 묶여져 있는 그의 모습은 요즘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치게 느끼한데다가 그 패턴도 너무 일정해서 질린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차이다. 어쩌면 이 장면의 코믹한 분위기 때문에 제임스 본드를 더 좋아하는 마니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주연배우가 캐스팅되지 않아 논란이 일었던 007 21편 <카지노 로얄>이 드디어 내년에 개봉한다. <카지노 로얄>은 007 시리즈의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의 데뷔작이자, 그가 제일 아꼈다고 전해지는 시리즈인데, 그래서인지 이안 플레밍은 007 시리즈의 제작자인 해리 샐츠먼-알버트 브로콜리 콤비에게 영화화 판권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카지노 로얄>은 이안 플레밍의 사망 이후 그 유가족이 판권을 미국 측 제작사에 넘겨 엉뚱한 코미디 영화로 제작되었지만, 마니아들은 이 영화를 007 시리즈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카지노 로얄>은 그 시리즈만큼이나 새롭게 6대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된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많은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시선이 대부분 부정적이라는 것인데, 이전의 제임스 본드들에 비하면 그의 외모 자체도 매력적이지 않거니와 결정적으로 그의 이미지가 독일 병정에 가깝다는 것에 가장 큰 원인이 있는 듯하다.

사실 그의 캐스팅 이전에 출연이 유력했던 배우는 <엑스맨> 시리즈의 휴 잭맨과 <킹 아더>의 클라이브 오웬, 그리고 <폰 부스>의 콜린 파렐이었다. 특히 콜린 파렐은 피어스 브로스넌의 강력한 추천도 있었고, 심리적인 연기에 능숙한 배우이기 때문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기 좋은 배우라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는 기본적으로 그 액션의 소화나 긴 촬영 기간, 그리고 실패 이후의 뒷감당 등 고려할 부분이 많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유명배우들이 기피하기도 한다.

▲ 6대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된 다니엘 크레이그
ⓒ2005 소니픽쳐스릴리징코리아

숀 코네리도 007 시리즈에 출연하기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었고, 스타로 부각된 이후에는 여러 번 출연 의사를 번복했던 전례가 있었다. 그가 이따금씩 출연을 번복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힘들어서'였다고 한다.

게다가 로저 무어는 이안 플레밍의 추천이 말해주듯이 '너무 잘 어울려서' 이미지 변신에 실패했고, 조지 라젠비와 티모시 달튼은 '너무 안 어울려서' 실패한 이후, 지금까지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유일하게 연기 변신에 성공해 노년기에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숀 코네리는 다양한 영화에 다양한 캐릭터로 출연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지금의 그 위치를 만든 것이다. 콜린 파렐이나 기타 많은 배우들의 거절에는 그런 이면이 숨겨져 있다.

M과 Q, 그리고 미스 머니페니가 없다면 제임스 본드는 없었다

▲ 가장 매력적인 '미스 머니페니'였던 로이스 맥스웰
ⓒ2005 MGM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007 시리즈는 제임스 본드 혼자서 열심히 몸을 움직인다고 만들어지는 시리즈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의 곁에는 M이 있고, Q가 있었으며, '미스 머니페니'가 있었다. 이들은 등장하는 시간은 짧지만, 언제나 제임스 본드의 곁에서 무시할 수 없는 양념의 역할을 하면서 시리즈의 재미를 만드는 일조해왔다.

이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캐릭터는 당연히 '미스 머니페니'라고 볼 수 있겠다. '미스 머니페니'로 출연한 로이스 맥스웰은 원래 남편이 심장병에 걸린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테렌스 영 감독에게 출연을 사정해 '미스 머니페니' 역을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로저 무어와 애매한 로맨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 말할 수 없이 우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이후의 '미스 머니페니'인 캐롤리안 블리즈와 사만다 본드는 '미스 머니페니'라고 보기에는 다소 경박해 보인 덕분에 결국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캐롤리안 블리즈는 하필이면 그 당시의 제임스 본드가 최악이라고 평가받는 티모시 달튼이었기 때문에 그 시너지 효과(?)가 만만치 않았다.

제임스 본드의 상관인 M은 현재 중견 여성 배우인 쥬디 덴치가 맡고 있다. '여성'이라는 그 자체에서 이색적이었던 쥬디 덴치는 놀라울 정도의 품위와 냉철함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적인 캐스팅으로 평가받는다. 쥬디 덴치의 이미지는 우리나라의 중견 탤런트인 반효정 씨와 다소 비슷해 보이는데, 이렇듯 품위와 냉철함을 겸비한 여성 배우를 찾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때로는 통제가 안 될 정도로 톡톡 튀는 제임스 본드를 능란하게 제어하는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또한 Q라면, Q로 등장한 데스몬드 리웰린의 영화 인생 그 자체였다. 007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시리즈에 출연한 배우인 그는 2편부터 19편까지, 총 18편의 007 시리즈에 출연해 특유의 재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왔는데, 만 85세의 나이로 007 시리즈 19탄인 <언리미티드>에서 간접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작고했다고 한다. 배우로서는 크게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그에게 몰렸던 많은 애도에서는 007 시리즈에서 보였던 노익장과 함께 톡톡히 양념의 역할을 해주던 그의 엉뚱하면서도 순수한 유머를 다시 보기 힘들 것이라는 아쉬움의 뜻이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이루어진 Q의 소개로 새로 무기발명가 역할을 맡은 R역의 존 클리즈는 영국의 유명 코미디 그룹인 '몬티 파이손'의 멤버라는 사실에서 말해주듯이 원래부터 코믹 연기에 능숙한 인물이기 때문에, 다행히 Q에 대한 아쉬움과 갈증을 어느 정도 해갈해주고 있다. 앞으로도 쥬디 덴치와 존 클리즈의 맹활약을 기대한다.

말도 안 되는 팝콘 영화로 변질된 007 시리즈의 해답은?

한편으로 007 시리즈는 그 액션과 스펙터클의 비중이 커지면서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스펙터클의 확대에 치중하면서 지나치게 말이 안 되는 설정은 물론이고, 악당조차도 매력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주복을 입고 있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이 이 영화의 황당함을 말해준다.
ⓒ2005 MGM
007 시리즈의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대표적으로 증명하는 영화는 11편인 <문레이커>다. <문레이커>에서 제임스 본드는 전 세계도 좁은 것인지 활동 영역을 아예 우주로 확장한다. 무중력 공간에서 열심히 악당을 물리친 뒤, 늘 그래왔듯이 '본드걸'과 포옹을 나누는 장면은 007 시리즈의 마니아가 봐도 더 이상 할 이 없는 장면으로 손꼽히기로 유명하다. <문레이커>는 그나마 덩치가 어마어마할 정도로 크고, 힘도 무척 셌던 악당인 '죠스'가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소녀와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이색적이었기 때문에, 무난한 영화로 기억남을 수 있었다.

17편인 <골든 아이>의 악당도 언론 조작으로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욕에 불타는 미디어 재벌이 등장하면서 그 황당함의 깊이를 더했다. 제임스 본드의 존재 근거였던 '스펙터(SPECTRE)'와 냉전 체제가 사라진 뒤, 그 정도가 더 심해진 악당들의 황당함은 결국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북한의 등장과 함께 절정에 달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공상 과학 영화처럼 변질돼가고 있는 007 시리즈의 새로운 화두는 '복고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때 쿠엔틴 타란티노가 '피어스 브로스넌이 다시 출연한다면'이라는 조건과 함께 연출을 원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많은 기대가 몰렸던 이유도 마니아들 사이에서 '원상 복귀'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굳이 007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스펙터클과 액션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시대에서 원래부터 정통 스파이 영화였던 007 시리즈가 무리하게 스펙터클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007 시리즈가 다른 영화와의 구별되는 뚜렷한 개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정 그렇게 믿을 만한(?) 악당이 없다면 다시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부활시켜 다니엘 크레이그와 대결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블로펠드는 역대 007 시리즈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악당이었고, 그런 만큼 향수까지 느껴지는 악당이기 때문에 부활이 이루어진다면, 마니아들로서는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일이 될 것이다.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있다면 가장 개성적이었던 악당인 '죠스'도 다시 모습을 선보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영화라는 것은 주인공도 그렇지만, 일단 악당이 벌이는 일이 기본적인 현실성이 깔려 있어야 하고, 악당들이 '현실 속에서 살아 있어야' 더 큰 매력이 느껴진다. 지금의 007 시리즈의 악당들이 벌이는 일은 너무 말이 되지 않아서 관객으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은 편이다.

영화는 그 규모가 작더라도 얼마든지 깊이를 추구할 수 있는 장르다. 007 시리즈의 초기작 3편은 시끄러운 총성과 화려하게 펑펑 터지는 폭발 없이도 인상적인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모범답안이 된 영화다. 결국 007 시리즈는 그렇듯 미래를 위해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숙제가 남겨진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 크레이그는 어려운 때에 '독이 든 성배'를 들게 된 셈이다. 제임스 본드는 과거의 전형성과 함께 본인의 개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진정한 성배를 들 수 있는 어려운 캐릭터다. 하지만 <골든 아이>의 연출 경험도 있는데다가 조로 시리즈를 통해 액션에는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마틴 캠벨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이안 플레밍이 가장 아꼈다는 시리즈라는 사실에서 <카지노 로얄>의 경우 하드웨어는 잘 받쳐주는 영화다. 이 하드웨어의 매력을 잘 살릴 수 있는 핵심은 결국 배우, 그중에서도 새롭게 중심에 선 다니엘 크레이그가 얼마나 무난하게 제임스 본드를 소화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몰리고 있는 부정적인 견해엔 한편으로 새로운 희망에 대한 기대가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직접 보지 않은 이상, 우리의 예측은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에 비하면, 의미를 찾기 힘든 해답 없는 논쟁이 될 수밖에 없다. '독이 든 성배'를 다니엘 크레이그는 어떻게 마실까? 영광스러운 술이 담긴 성배로 만들어 마실지, 아니면 독을 마시며, 티모시 달튼의 뒤를 이을지, 그 이후는 오직 그에게 달려 있다고 본다.

'조금 더 풍부한 표정으로, 그리고 조금 더 여유 있게.'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으면서 잊어서는 안 될 좌우명이다. 그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처럼 어둡고 경직된 분위기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다면, 그 이후는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모든 것은 그에게 달려 있다. 그가 숀 코네리만큼이나 최고의 제임스 본드가 되어 우리를 즐겁게 해주길 기대해본다.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의 제 개인블로그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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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전설의 완성

 

 

아햏햏뉴스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전설의 완성!

2005-11-11 14:02:53

 

영화는 처음부터 ‘매혹적인 볼거리’로 출발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기차가 도착하는 광경을 담은 ‘동영상(?)’을 보며 관객들이 혼비백산했을 때부터, 그리고 마술사 멜리에스가 1902년에 위대한 구경거리인 <월세계 여행>을 발표했을 때부터 그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의 각본 작업을 시작했던 1970년대 초의 미국에서는 이러한 시각적 경이에 대한 순수한 숭배 정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초대형 스펙터클 서사극은 1960년대 말을 기점으로 거의 자취를 감췄고, 한 때 ‘미국인의 신화’로 일컬어지던 서부극 역시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신비평의 열풍 속에 재능 있는 신세대 감독들이 하나 둘 두각을 나타나고 있었지만, 이런 일군의 젊은이들 중 ‘스펙터클에 대한 구닥다리 숭배 정신’ 따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는 조지 루카스가 유일했다.

비평가 제이 콕스 - 그는 한 때 ‘타임’지에서 영화평론 글을 썼으며, 마틴 스콜세지와 조지 루카스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후에 <갱스 오브 뉴욕>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 는 조지 루카스를 가리켜 “내가 만나본 중 가장 순수한 로맨티스트”라 평했다. 루카스는 머지않은 미래에 ‘시각적 경이에 대한 숭배 풍토’가 다시 도래할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순수성에서 비롯된 그의 선견지명(?)이야말로 훗날 <스타워즈>의 신화를 일군  원동력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친구 루카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20년 가까이 루카스의 천재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 알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수많은 ‘연구’와 사색 끝에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루카스는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미래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난 20여년을 몸 바쳤다’”

2005년, 루카스는 자신이 보았던 미래의 ‘마지막 조각’을 드디어 공개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이하 <시스의 복수>로 줄임)를 본 대다수의 관객들, 특히 평론가들의 반응은 앞선 두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 때와는 사뭇 달랐다. “The Force returns with most of its original power regained in Star Wars: Episode III : Revenge of the Sith!” 토드 맥카시가 내린 이 짤막한 진단은 영화의 개봉 당시 주류 평론가들의 반응을 거의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다.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스타워즈> 골수팬들도 루카스가 (두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시스의 복수>에서 클래식 삼부작의 유려한 스타일을 드디어 부활시켰다고 목청 높여 외쳤다. 물론 이들의 진단은 여러모로 ‘정확’하다. (이런 종류의 논쟁에 있어서 ‘정답’이라는 건 있을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간과한 부분들이 있다. 그리고 이 부분들이야 말로 어쩌면 <시스의 복수>가 지닌 ‘포스의 정체’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시스의 복수>는 스타일이나 정서 상 <스타워즈> 클래식 삼부작 중 가장 유사하다고 느껴지는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과는 어쩌면 ‘대칭점’에 위치한 영화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바로 ‘루카스는 프리퀄 삼부작을 연출함에 있어서 단 한차례도 방향성을 잃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시스의 복수>는 여러모로 앞선 두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들과 차별되는 작품이지만, 한편으로 그 ‘유려한 스타일’은 두 편의 앞선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구현 가능한 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세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 간에는 분명한 연속점과 일관된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자, 그럼 하나씩 풀어나가 보도록 하자.

스타일 상 <시스의 복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엑스포지션(Exposition, 예비서술장면: 서사극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기에 앞서 인물들과 사건에 대한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설명적인 부분’) 장면이 모조리 ‘시각화’ 됐다는 점이다. 영화 연출에 있어 엑스포지션 부분은 영원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은 관객에게 플롯을 이해시키고 주인공의 차후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필수적인 요소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남용될 경우에는 영화 자체가 지루하게 되기 십상이다. 반대로 이 부분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관객이 플롯을 따라잡지 못하고 영화 자체에 대해 흥미를 잃기 쉽다. 이 부분이 이상적으로 배치된 작품 중 가장 최근의 예로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꼽을 수 있으며, 스필버그의 최신작 <우주전쟁>의 경우는 이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부족했던 영화의 대표적인 예(물론 이것은 다분히 ‘고의적인’ 것이었다)이다. 보통 이 부분은 적절한 길이의 대사와 설명 조의 장면들로 구성돼 있는데, 클래식 삼부작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곤 하는 <제국의 역습>의 경우는 전통적 의미의 엑스포지션 장면들이 가장 멋들어지게 구현/배치된 예이기도 하다. 다시 <시스의 복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루카스는 <시스의 복수>에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사소한 것들은 차치하고, 굵직한 사건들만 나열해도 다음과 같다:

1.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팰퍼틴의 유혹에 넘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한다.

2. 아나킨이 형제와도 같았던 제다이들을 학살하는 장면 역시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한다.

3. 공화국의 몰락과 제국의 성립 과정을 짧은 시간 내에 보여주어야 한다.

4. 30년 가까이 팬들이 꿈꿔왔던 클라이맥스 신, 아나킨과 오비완 간의 운명의 광선검 대결 장면을 최대한 길게, 그리고 임팩트감 넘치게 보여주어야 한다.

5. 쌍둥이의 탄생 과정, 아나킨이 ‘검은 마스크’를 쓰게 되는 과정, 그리고 요다의 은둔 과정도 보여주어야 한다.

만일 ‘정석대로’ 영화를 연출한다면, <시스의 복수>는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 수준의 러닝 타임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피터 잭슨’이 아니다. 굳이 ‘상업적 딜레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영화가 인내심 부족한 ‘어린 계층’(혹은 ‘동심’)을 주된 타깃으로 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 비록 최종 결과물은 (<스타워즈> 시리즈로는 최초로!) PG-13등급이었지만, 그럼에도 <시스의 복수>는 여전히 ‘동심’을 겨냥한 것이었다 - 세 시간 이상의 러닝타임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루카스는 ‘과감한 생략의 미학’을 적용하기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부분’으로는 오프닝의 ‘클론 전쟁’ 신의 비중을 드라마틱하게 줄여버린 것을 들 수 있다. (본래 루카스는 <시스의 복수>를 <에피소드 2: 클론의 습격>으로부터 2년 뒤의 이야기로 설정하여, 오프닝 신에서 치열했던 클론 전쟁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영화의 길이가 부적절하게 길어질뿐더러, 플롯의 내용도 ‘아나킨의 변절’이라는 중심주제에서 크게 이탈할 위험성이 있었다. 결국 루카스는 <시스의 복수>의 시기를 <클론의 습격>으로부터 3년 뒤의 이야기로 재설정하여 막바지에 다다른 클론 전쟁의 상황만을 간단히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용된 생략의 미학이다. 이는 바로 조금 전 언급한 엑스포지션 부분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이며, 많은 관점에서 ‘모험’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시스의 복수>에서 이런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앞선 두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 - 나아가 클래식 삼부작을 포함해 다섯 편의 에피소드 - 전체가 관객에게는 거대한 엑스포지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둘째, 관객들은 이미 <시스의 복수>의 결말을 ‘상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사상 최초로) ‘결말이 만천하에 공개된 블록버스터물’이라는 <시스의 복수>만의 고유한 특질이야말로 루카스가 ‘러닝타임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루카스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오랫동안 <시스의 복수>의 이야기를 머리 속에 그려왔다. 루카스는 <시스의 복수>에서 관객들의 상상력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할 구심점들만을 엑스포지션으로 배치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제 문제는 ‘그 구심점들을 얼마나 세련된 방식으로, 최대한 짧게 제시하느냐’로 귀결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루카스는 ‘엑스포지션 전체를 시각적으로만 제시한다’는 다소 모험적인 전략을 내 놓았다. 엑스포지션 부분 전체에서 대사를 아예 없애거나 (삽입하더라도) 최소화 한다는 것이다. 비단 엑스포지션 부분뿐만이 아니다. (액션 장면 이외에) 캐릭터들의 심경 변화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장면이나 플롯의 전환점이 되는 주요 장면들 역시 대사를 극도로 자제한 채 오로지 ‘시각적’으로만 짤막하게 연출되고 있다. 말하자면, <시스의 복수>는 “영화는 볼거리이며 눈속임의 예술이다”라는 명제에 정확히 부합하는 영화가 된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루카스가 오랫동안 갈망한 ‘그런 종류’의 영화 형태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전통적인 극영화 구성 방식’에 비교적 충실했던 <제국의 역습>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자, 그럼 이 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스타워즈> 클래식 삼부작 중 가장 (부당하게) 저평가 받는 <에피소드 6: 제다이의 귀환>에서 루카스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다음 신이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6: 제다이의 귀환>에서

팰퍼틴 황제의 포스 라이트닝에 의해 죽어가는 아들 루크를 바라보며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황제의 편에 설 것인가’를 놓고 심하게 갈등하게 된다. 베이더의 복잡한 심경은 (놀랍게도) 이미지만으로 감상자에게 드라마틱하게 전달된다. 황제와 루크를 번갈아 바라보며 갈등하던 베이더는 결국 ‘최후의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감상자는 이 모든 과정을 눈으로 보듯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상자가 이런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베이더가 ‘마스크를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 장면에서 감상자는 (서술자의 개입 없이)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해 베이더의 심경을 읽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시스의 복수>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된 ‘시각화’의 기본 원칙이었다. 예컨대, <시스의 복수>의 플롯 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음 장면을 보자

메이스 윈두를 비롯한 제다이 마스터들이 팰퍼틴 의장을 체포하러 떠난 후 아나킨은 팰퍼틴의 편에 설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갈등하게 된다. 이 부분은 사실 아나킨이 변절과 관련된 가장 중추적인 부분이기에, 대단히 치밀한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이었다. 만일 감상자가 이 부분을 납득하지 못한다면, 영화는 완전히 실패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스는 이 중차대한 장면을 단 한 줄의 대사나 독백도 없이 오로지 시각적 요소와 음산한 분위기의 음악만으로 ‘짤막하게’ 처리해 버렸다. 그러나 그 효과는 실로 막강하다. 루카스는 아나킨과 파드메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 뒤, 아나킨의 암울한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부각시킨다. 감상자는 절묘한 편집과 음산한 음악을 통해 이 장면이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완벽하게 읽어내게 된다. 감상자에게 이 짤막한 장면은 마치 10분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상상력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이다. 즉, 이 장면에서 감상자는 아나킨이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팰퍼틴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는 과정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시스의 복수>에는 이와 같은 장면이 상당히 많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다음 장면도 이런 부분의 대표적인 예다.

제다이 사원을 ‘쓸어버린’ 후 화산 행성 무스타파에 온 아나킨은 ‘수수께끼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감상자는 직감적으로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를 ‘느낄’ 수 있다. 아나킨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잘못된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의 눈물과 표정에서는 회한과 절망감, 그리고 결연한 의지가 동시에 엿보인다. 또한 이 장면을 통해, 감상자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변절했던 아나킨이 이후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무한한 파워’에 집착하게 되리라는 것도 직감하게 된다. 이러한 시각적 암시 효과는 심지어 사소한 이야기 설정이나 디자인에 등에도 숨어있다. 이를테면, 영화의 초반부 공중전 장면에서도 중요한 메타포가 하나 부각된다. 바로 ‘아나킨이 컴퓨터와 로봇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에피소드 4: 새로운 희망>의 클라이맥스 신에서 루크가 (오비완의 포스의 영의 충고에 따라) 컴퓨터에 의존하는 대신 ‘포스’를 이용해 X-윙을 몰던 장면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한 이는 후에 ‘기계에 생명을 의지하게 될’ 아나킨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버스 장군’이 사이보그로 설정된 것 역시 이러한 아나킨의 운명을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부분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부분들로 인해 러닝타임 140분의 <시스의 복수>가 가진 ‘실질적 플롯 정보량’은 어마어마한 것이 되었다.

<스타워즈> 클래식 삼부작을 연출함에 있어, 루카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기술의 제약’이었다. 제이 콕스의 지적처럼, 클래식 삼부작 중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과 같은 (보편적 의미의) 걸작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구상한 것을 모두 시각화 할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제약으로 인해 루카스나 (<제국의 역습>의 감독인) 어빙 커쉬너는 극적 감흥의 창출을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성 방식과 연출, 아날로그식 편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이런 의미에서 <제국의 역습>은 스타워즈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전통적인 극영화 양식’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물론 프리퀄 삼부작의 제작 과정에서는 이런 기술적 제약이 거의(혹은 ‘아예’)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천혜의 환경’은 두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를 (성인) 관객들이 받아들이기 버거울 정도로 ‘유치한(?)’ 것으로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앞선 두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는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혁명적 제작방식’을 도입했음에도, 감성만은 구닥다리 어린이용 스페이스 판타지극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했다. 바로 이것이 앞선 프리퀄 에피소드 두 편이 비평적 뭇매를 맞은 결정적 요인이기도 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열혈 팬인 케빈 스미스는 <에피소드 1: 보이지 않는 위험>이 개봉한 후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이 실망감을 표시한 이유를 “동심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기대치’라는 비유를 들었다. 즉, 많은 관객들이 <보이지 않는 위험>을 본 뒤 “(어른이 된) 내가 그토록 너에게 기대를 걸었는데 이것 밖에 못 되다니!”라고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다. 루카스는 20여 년 전 클래식 삼부작을 보며 자란 어린이들의 대부분이 (어른이 된 후에도) 프리퀄 삼부작을 보기 위해 극장문을 노크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다 : ‘스타워즈 붐’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어른’들이 원하는 것은 ‘동심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입장에서) 향수를 느끼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동심을 겨냥한 영화’를 ‘어른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오류를 스스로 범하고 있었던 셈이다. 20여 년 전 <새로운 희망>을 볼 때의 ‘순수함’을 망각한 채 말이다. 앞선 두 편의 프리퀄은 거의 철저하게 ‘동심의 복고’ 쪽에만 초점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프리퀄 에피소드를 보며 신비평적 관점으로 텍스트를 분석하고 배우의 연기력을 비판하며 정치성을 들먹이는 순간, 동심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경이감은 공중분해 돼 버린다. 케빈 스미스는 살인적인 혹평을 던진 많은 어른들과는 달리, 어린이들은 <보이지 않는 위험>을 보며 (20여 년 전 바로 그 어른들이 그랬듯) 여전히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한다. 비평적으로 뭇매를 맞았을지언정, <보이지 않는 위험>은 루카스가 타깃으로 한 ‘동심’에는 여전히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어른의 ‘변절’이나 ‘이율배반적 행위’는 결코 비난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신화의 창조자’인 루카스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었다. 21세기가 ‘불관용의 시대’이자 ‘순수를 상실한 시대’라는 점을 놓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시스의 복수>가 보여준 ‘변절(?)’은 바로 이 같은 자각에서 비롯됐으며, 그것은 나아가 ‘스타워즈의 신화’ 자체를 재정의하기에 이른다. 릭 멕컬럼의 표현을 빌면, <시스의 복수>는 'PG-18'등급 - 물론 이런 등급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짜리 영화다. 단순히 <시스의 복수>에 사지가 절단되는 등의 잔인한(?) 신이 많이 나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스의 복수>가 표방하고 있는 정서 자체가 아이들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무겁고 심각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측면에서 - 그리고 PG-13등급을 받아 <스타워즈> 신화를 일군 ‘주된 관객층’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 <시스의 복수>는 분명히 ‘변질된 어른용 판타지극’에 가까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 <시스의 복수>는 앞선 두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가 받지 못했던 비평적 찬사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질적 변질’은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프리퀄 삼부작을 연달아서 DVD로 감상하면 실로 놀라운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바로 삼부작 전체가 (아나킨의 성장 과정에 맞춰)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순차적/연대기적’ 감성을 차례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동심’을 타깃으로 하여 출발했던 <스타워즈> 신화는 종국에는 ‘동심을 상실한 어른’들을 완전히 포용하는 데 이르게 됐다는 말이다. 그것은, 1973년 루카스가 <스타워즈>의 스크립트 초고를 쓸 당시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았던 것이기도 했다. 루카스가 30 여 년 전에 쓴 <새로운 희망>의 프로덕션 노트에는 자신이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코난 도일의 판타지 소설 <잃어버린 세계>의 서문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는 단순한 계획을 세웠다. 반쯤 어른인 소년에게 혹은 반쯤 소년인 어른에게 한 시간의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우선 리뷰글을 이제야(!) 올리게 된 점, 사과드린다. 다른 타이틀은 몰라도 <시스의 복수>의 리뷰만큼은 꼭 출시일 이전에 올리려 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그 이유는 DP 운영진의 박건일 씨가 국내 DVD 게시판에서 상세히 언급한 바 있다). 사실, 글쓴이의 입장에서도 이런 초 대박 타이틀의 리뷰글을 뒤늦게 쓴다는 것은 여간 맥 빠지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의 복수> DVD는 자세히 조명할 값어치가 충분한 타이틀임에는 (이미 타이틀을 구입하신 분들의) 대다수가 동의하실 것이다. 서설은 이쯤(?)하고 본격적인 타이틀 리뷰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DVD 메뉴화면 캡쳐사진

타이틀의 구성은 앞서 발매된 두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와 거의 동일하다. 영화 본편은 2.35:1 아나몰픽 와이드 스크린과 DD 5.1 EX 포맷을 지원하며, 루카스 및 스텝진의 음성해설이 수록돼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글 자막이 제공된다) 서플먼트 디스크에 수록된 부가영상의 양과 내용, 구성도 앞선 두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와 거의 동일하다. 메뉴화면 역시 앞서 발매된 에피소드들과 완전히 동일한 컨셉으로 디자인됐으므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한다.

‘보나마나’ 최상급일 것이 뻔한 타이틀을 평가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크레더블> 때도 그랬지만, <시스의 복수>와 같은 ‘예정된 레퍼런스급 타이틀’은 첫 감상 때부터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에 초점을 맞춰 평가를 하기보다는 ‘과연 어디에 허점이 존재할까’에 중점을 두어 (약간 삐딱한 방향으로) 평가를 하게 되기 마련이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종국에는 백기를 들고 만다!). Digital-to-digital 방식으로 제작된 본 타이틀의 평가는 일단 ‘AV 퀄리티가 완벽하다’는 전제하에 시작해 부족한 부분이 발견될 때마다 점수를 조금씩 깎는 ‘감점법’을 적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가 내린(그리고 DP 운영진이 동의한) 점수는 ‘올 10점’이다!

이미 타이틀을 구입한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겠지만, 한마디로 본 타이틀의 화질은 ‘기본적으로는’ 판타스틱하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실 분은 거의 없을 것으로 믿는다. 자, 그럼 이제는 (약간 ‘치사한’) 감점법을 적용할 차례다(!) 본 타이틀의 화질은 어쩔 수 없이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에피소드 2: 클론의 습격> DVD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사실 ‘완벽할 것’으로 예상됐던 <클론의 습격>의 화질은 약간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미세한 디지털 노이즈나 생각 외로 눈에 띄는 그레인 현상, 그리고 차가운 금속성의 질감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약점들은 대형 스크린으로 갈수록 더욱 부각된다. 그럼 이번 <시스의 복수>에서는 이런 문제점이 100% 시정됐느냐? 안타깝게도 그것은 아니다. 물론 이번 <시스의 복수>의 촬영에 사용된 HDC-F950 소니 디지털 카메라는 <클론의 습격>에서 쓰인 HDC-F900보다 분명히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기술적인 설명은 차치하고, ‘결과적’으로 화질 면에서 가장 부각되는 향상된 부분은 바로 ‘그레인 표현의 정제감’이다. 쉽게 표현하면, 차갑고 기계적이었던 <클론의 습격> 영상에 비해 이번 <시스의 복수>의 그것은 보다 ‘부드러운 필름 질감’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DVD의 한정된 해상도와 화소 표현력으로는 이 향상효과를 그다지 느낄 수 없다. 물론 시각적으로 유난히 예민하신 분들 중에는 대형 디스플레이를 통해 본 타이틀을 감상하면서 화질의 향상 효과를 뚜렷이 느끼신 분들도 있을 것이나, 다수의 일반 감상자들은 그러지 못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글쓴이가 프로젝터 화면과 50인치 PDP, 36인치 CRT 디스플레이를 번갈아가면서 감상한 결과 이렇다: 화질이 <클론의 습격>에 비해 향상된 것은 분명하다. 입자의 표현이 한층 부드러워졌고, 원경의 윤곽선 노이즈도 줄어들었으며 질감도 한층 깊이 있는 것으로 ‘진보’했다. 그러나 그 향상의 정도가 ‘현격한 수준’은 아니다. 더불어, (상대적으로 <클론의 습격>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표현상의 약점 또한 군데군데 눈에 띈다. 비교적 짙은 색감이 지배적인 부분에서는 그레인 현상이 눈에 띄며 원경에서 (비록 미세한 수준이긴 하지만) 지글거림과 노이즈가 감지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는 본 타이틀의 화질에 ‘만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것이 현 DVD 포맷으로 구현할 수 있는 화질의 ‘한계점’이라는 느낌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시스의 복수>의 영상 정보량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극장에서 수차례 반복관람을 하신 분들은 아마도 예외 없이 이 영화의 놀라운 미장센 수준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정적인 장면’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적이라고 느껴지는 장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경에서는 먼지 크기의 우주선 (혹은 기타 ‘사물’이나 ‘생명체’)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물론 우주선이나 인물의 복장과 같은 기본적 요소의 질감 표현의 정교함은 세삼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한 마디로, <시스의 복수>는 기본적인 영상 정보량이 현 DVD 포맷의 한계를 너무나 뛰어넘고 있기 때문에 타이틀 감상 시 불만족스러운 요소들이 더욱 불거지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HD급 차세대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글쓴이가 본 타이틀의 ‘한계’를 먼저 언급한 것은, 굳이 ‘우수성’에 대해 자질구레하게 설명할 필요성 자체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현 DVD 포맷이 구현할 수 있는 화질의 한계점’이라는 한 마디 표현으로 사실상 ‘게임오버’가 아니겠는가? 반복 감상할수록 한계점이 절실히 느껴지긴 하지만, 본 타이틀의 색감 및 디테일 표현 수준은 마냥 놀랍기만 하다. 거대한 우주선의 리얼한 표면 묘사에서부터 유타파우 행성의 돌리네 묘사, 그리버스 장군의 기계 몸을 장식하는 먼지와 녹, 무스타파 행성의 용암 등 모든 시각적 경이의 대상들이 감탄사를 자아낼 정도로 빼어나게 그려진다. 물론, 영상 면에서 본 타이틀의 하이라이트는 오비완과 아나킨이 무스타파에서 ‘운명의 광선검 대결’을 벌이는 신이다. 영상정보가 넘쳐나고, 운동량 또한 대단히 많은 현란한 신임에도, 입자가 흐트러지거나 디테일이 망가지는 등의 부작용은 발견할 수 없다. 감상자를 삼킬 듯 달려드는 용암의 움직임과 표현 상태도 리얼함의 극치에 달해있다. 이 밖에 CG로 그려진 배경과 캐릭터들의 그림자 및 명암 표현 상태도 매우 뛰어나 이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잡티 따위는 러닝타임 전체를 통틀어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본 타이틀의 사운드트랙에 대한 설명은 이 한마디로 족할 듯하다. “이것은 <스타워즈> 시리즈 중 ‘가장 최근작’의 사운드트랙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시스의 복수>의 사운드트랙은 ‘공격적’이다 못해 ‘전투적’이기까지 하다. 당장 오프닝의 그 유명한 ‘우주 공중전 롱테이크 신’에서부터 감상자는 온 몸을 휘감는 멀티 서라운드 음향의 위력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스카이워커 사운드의 음향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세삼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본 타이틀의 사운드트랙은 파워가 다소 과도하게 강조된 전작 <클론의 습격>보다도 더욱 섬세하고 깊이가 있다는 느낌이다. 음향 요소들간의 배치도 대단히 논리적이며 스코어의 음량과 재생 상태도 이상적이다. 백 서라운드 채널의 활용도 우수하며 다이내믹한 채널 간 음향의 이동 효과도 두드러진다. 저음을 특별히 선호하여 우퍼 볼륨을 다소 과다하게 키운 상태에서 감상하는 습관이 있으신 분들은 ‘놀라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란다. 또, 무작정 볼륨을 올려 본 타이틀을 감상하시다가는 이웃집 사람들에게 ‘저음 테러범’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으니 각별히 유의하시길.

본 타이틀은 음향 요소도 다채롭기 그지없다. 당장 전술한 오프닝 전투 장면만 하더라도 수십 대의 우주선 소리에서부터 ‘삐빅~’하는 로봇의 소음, 인물의 대사와 스코어 등 셀 수 없이 많은 음향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데 음간의 간섭 현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시스의 복수>는 영상 몽타쥬와 더불어 사운드 몽타쥬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인데 이런 면에서 볼 때 DVD 음향의 명료한 표현 상태는 단순히 AV적 쾌감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영화감상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이 측면에서 본 타이틀의 음향을 평가하자면 ‘10점 만점에 10점’이 아깝지 않다. 특히 무스타파에서의 ‘운명의 대결’ 장면에서 스코어와 주변 음향들이 이루는 멋진 앙상블은 영상과 더불어 본 타이틀 사운드트랙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중상을 당한 아나킨이 검은 마스크를 쓰고 ‘거친 호흡’을 처음 내뱉을 때의 감흥은 (글쓴이가 너무 자주 쓰는 표현이긴 하지만) 감상자를 ‘졸도 지경’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하다. 음향 설계 면에서 본 타이틀은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해 대사 부분의 음량이 약간 작다는 것이다. 이것은 글쓴이가 앞에서 언급한 영화 자체의 특성(대사가 아닌 비주얼로써 플롯을 전달하는 영화)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물론 이 때문에, 영화의 스코어와 음향 효과가 더욱 두드러지는 측면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 타이틀의 서플먼트 구성방식은 앞선 두 편의 프리퀄 에피소드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영화 본편 디스크에 수록된 음성해설 트랙에는 조지 루카스, 릭 멕컬럼(제작자), 그리고 특수효과 팀원들(롭 콜만, 존 놀, 로저 가예트)이 참여했다. 참여자들의 명단에서 대충 짐작하시듯, 본 트랙은 철저한 ‘정보 전달’ 위주의 음성해설 트랙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발랄하고 위트 넘치는’ 음성해설 트랙을 선호하시는 분들은 본 음성해설을 다소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본인에게는 실례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루카스의 음성은 단시간 내에 듣는 이의 졸음을 유발하는 ‘자장가형’ 음성이다! 게다가 녹음에 참가한 특수효과 스텝들의 해설 역시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다) 그러나 극장에서 영화를 수차례 관람한 뒤 물음표를 산더미처럼 껴안고 있던 열혈 팬의 입장이라면, 본 트랙에서 건질만한 유용한 정보가 적지 않다. 특히 특수효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루카스가 틈틈이 제공하는 제작 관련 뒷이야기들과 연출 컨셉도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

서플먼트 디스크에 수록된 부가영상은 모두 1.85:1 아나몰픽 와이드스크린 포맷으로 제작됐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메인 메이킹 다큐에 해당하는 1분 안에 Within a Minute: The Making of Episode III(약 1시간 19분 분량)다. 다큐멘터리 모음 메뉴인 ‘다큐멘터리와 단편’ 내에 포함된 이 영상물은 일반적인 메이킹 다큐와는 차별되는 독특한 컨셉으로 제작됐다. 본 영상물이 제재로 다룬 것은 약 48초 분량의 ‘무스타파 결투(오비완과 아나킨 간의)’ 신이다. 이 짧은 신을 완성시키기 위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했는데, 본 영상물은 그 험난했던 제작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48초에 불과한 신의 제작과정은 넓게 보자면 ‘영화 전체의 제작 과정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감상자는 본 메이킹 다큐를 통해 <스타워즈> 프리퀄 제작팀이 확립한 독특한 제작 프로세스의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킹 다큐, '1분 안에 Within a Minute: The Making of Episode III'

<스타워즈> 프리퀄 삼부작, 특히 <시스의 복수>의 제작과정은 가히 ‘영화사의 제3의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각본 작성->사전 제작->촬영->편집 및 후반 작업으로 뚜렷이 구분된 전통적인 영화 제작 방식과는 달리 <시스의 복수>의 제작 과정은 각 단계의 장벽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루카스는 ‘확정되지 않은 컨셉’으로 각본 초고를 작성한 뒤 후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계속 수정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끊임없는 회의를 거쳤고, 스텝들의 창조적인 의견을 수용해 반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스의 복수>에도 ‘Principal Photography' 단계가 분명히 존재하긴 했지만, 기실 후반 작업이 시작된 뒤에도 끊임없이 재촬영이 이루어졌다. (물론 배우들은 영화 제작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리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편집 역시 최초 촬영 단계에서부터 계속 진행되어 최종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기할만한 점은, 편집 과정이 ‘디지털 후반작업’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즉, 촬영분에서 미진한 점이 발견됐으나 재촬영이 곤란한 경우는 디지털로 이미지를 수정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특히 <시스의 복수>는 1억불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 영화로는 최초로 ‘스튜디오 내에서만’ 촬영이 진행된 혁명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예외가 있다면, 오웬 부부가 루크를 건내 받는 엔딩 장면(<클론의 습격> 제작 당시 미리 촬영), 그리고 배경으로 실제 촬영분이 일부 포함됐다는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배우들은 늘 블루/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하여 연기를 해야 했다. (사실 프리퀄 삼부작에서의 배우들의 연기는 이런 ‘기본적 제약 사항’을 어느 정도 고려하여 평가해야 마땅하다. 또한, 이안 멕디아미드나 이완 멕그리거, 사뮤엘 잭슨 등 주요 출연진들이 기본적으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이완 멕그리거의 경우는 <보이지 않는 위험>때부터 알렉 기네스 경의 독특한 발음을 흉내 내야 한다는 ‘또 다른 연기상의 제약’이 있었다) 이런 독특한 제작 환경을 미리 이해한 후 본 다큐를 감상한다면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실감나는 장면을 위해: 에피소드 III의 스턴트 It's All for Real: The Stunts of Episode III'

다음으로 수록된 다큐멘터리는 실감나는 장면을 위해: 에피소드 III의 스턴트 It's All for Real: The Stunts of Episode III(약 11분 분량)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본 영상물은 스턴트 코디네이터 닉 길라드가 안무한 스턴트에 관해 다루고 있다. <시스의 복수>에서 젊은 배우들은 대부분 격렬한 스턴트 장면들을 직접 소화했지만, 때로는 스턴트 전문 대역이 활약하기도 했다. 특히 이안 멕디아미드나 크리스토퍼 리와 같은 ‘어르신’ 배우들이 활약하는 신에서, 이런 스턴트 전문 대역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시 됐는데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후반 디지털 보정 과정에서 스턴트 대역의 얼굴을 배우의 것으로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본 영상물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소개된다.

다음 영상물은 선택된 자 The Chosen One(약 15분 분량)로, ‘다스 베이더의 비극’에 관한 다채로운 뒷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신화의 창조자’인 루카스가 직접 설명해주는 플롯의 뒷이야기와 해석이 담겨있으므로, 절대 놓치지 마시길.

다음 메뉴는 (아마도 본 타이틀을 구입한 분들이 가장 관심을 가질) 삭제 장면 Deleted Scenes이다. 서플먼트 중 유일하게 돌비 디지털 5.1 포맷을 지원하며 총 6개의 신으로 구성됐는데, 각 신의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겠다.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들임에 틀림없으나, 생각보다 양이 적다는 점이 아쉽다. 많은 분들이 기대했던 오프닝 전투신의 확장버전이 빠진 것(물론 특수효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은 이해할 수 있으나, 제작 초기 단계에 거론됐던 ‘소년 한 솔로의 등장 신’과 같은 것은 각본이나 스케치 버전으로라도 따로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것은 글쓴이의 주관적인 푸념일 뿐 ‘딴지 거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삭제 신들은 독립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고, 루카스 및 스텝들의 인트로와 함께 감상할 수도 있다. 요다가 데고바로 은둔하는 신은 제작자 릭 멕컬럼이 가장 아쉬워한 삭제 장면이기도 한데, 이 장면의 인트로 부분에서 릭 멕컬럼은 ‘철없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감독이 언젠가 영화를 감독판으로 재편집을 해서 이 장면을 영화 속에 삽입했으면 좋겠어요” (릭 멕컬럼은 자신이 무심코 던진 이 한마디가 ‘포스병 환자’들의 심장박동수를 얼마나 증가시킬지 정말 몰랐단 말인가?!)

다음 메뉴는 15개의 웹 다큐멘터리가 수록된 웹 다큐멘터리다. 많은 분들이 이미 이전에 감상을 하신 영상물일테니, 설명은 생략하도록 한다. 이 외에 독점 공개하는 제작 현장 사진(기쁘게도 ‘100% 한글화’된 텍스트 설명이 포함됐다), 게임 예고편(디스크를 X-Box 콘솔에 넣고 작동시키면 'STAR WARS BATTLEFRONT II'의 데모 버전을 즐길 수 있다), 포스터, 극장 예고편 등이 서플먼트로 포함됐다.   

1.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것은 (극장판) <스타워즈>의 마지막 에피소드다. 위대한 스페이스 서사시의 완성 과정을 생생히 목격한 당신은 어쩌면 영화사에서 가장 축복받은 이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DVD의 음성해설의 끝부분에 담긴 루카스의 메시지를 Final Verdict으로 대신하도록 한다.

“이 (시리즈)는 원래 약 2년 정도면 끝날 간단한 영화에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20년이나 걸리는 작업이 됐습니다. 제작도 정말 힘든 일이었고, 어찌 보면 제 삶을 정의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제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이런 길을 걸어왔고, 영화가 제게 던진 도전을 받았다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제작의 결과에 만족합니다. 모든 에피소드들과 전체적 줄거리에 만족합니다. 이제 끝까지 완성해서 정말 마음이 편합니다. 결승점까지 왔잖아요? 전 세계가 아직도 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행복합니다” - 조지 루카스

2. 한글 자막의 번역 상태가 다소 아쉽다. 본 타이틀은 극장 개봉 당시에 쓰였던 한글 자막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이 자막은 <스타워즈>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관객을 지나치게 배려한 탓에, 의역의 정도가 심한(혹은 ‘심각한’) 부분이 자주 눈에 띈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 부분은 ‘일장일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번역자에게 <스타워즈>의 세계에 충실한 ‘전문적인 번역’을 요구하는 것은 - 열혈 팬들의 검수를 거치지 않는 한 - 무리라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스타워즈> 시리즈라면, 자의적인 의역보다는 최대한 본래 대사에 가까운 ‘직역’ 형태의 번역이 더 어울린다 할 것이다. 감상자의 입장에서, 'Star Systems'를 ‘태양계’로 잘못 번역한 것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두 문장 이상 되는 길이의 의미심장한 대사가 어이없이 짤막하고 가벼운 느낌의 문장으로 둔갑해버린다든지, 본래 대사에 있지도 않은 묘한 뉘앙스의 ‘한국 신세대형 유머’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등의 경우는 실로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일반 관객’뿐만 아니라 (비록 얼마 안 되는 수일지는 몰라도) <스타워즈> 시리즈의 열혈 팬들까지 고려한 한글 자막이 수록됐으면 하는 아쉬움(혹은 ‘욕심’)이 든다.

3. <스타워즈> 6부작이 ‘완성’된 지금, 모든 팬들의 관심은 루카스의 다음 횡보에 집중돼 있다. 루카스는 현재 ‘또 한명의 테크놀로지 전사’ 제임스 카메론과 ‘공모’하여 3-D 시네마 혁명을 추진 중이다. 루카스가 <스타워즈> 6부작을 3-D 버전으로 재포장하여 2007년부터 차례로 개봉할 예정이라는 소식은 이미 많은 분들이 접하셨을 것이다. 이 획기적인 ‘로드쇼’와 더불어, 그는 (현재 3-D 영화의 매력에 푹 빠져있는) 카메론과 함께 3-D 영화를 효과적으로 안방에서 구현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잊지 마시라. <스타워즈>의 신화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200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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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라! 재밌는 '교과서 튜닝'

애새끼덜 일단 맞아야^^

 

 

모여라! 재밌는 '교과서 튜닝'

2005-11-12 09:06:07

 

 

  조금만 지나면 고3 수험생들이 힘들게 준비해온 수학능력시험을 치르게 된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나면 쳐다도 보기 싫은 것이 바로 교과서 및 참고서들이다. 이에 기말고사까지 끝나고 나면 바로 버리거나 헌 책방에 팔아버리는 경우가 대부분.

  그런데 이런 교과서들을 보고 싶게 만드는 게시물들이 올라오고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교과서 튜닝'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오고 있는 게시물들이 바로 그것. 교과서 표지에 글씨나 그림을 이용해 표지를 바꾸는 것은 예전부터 많은 학생들이 해오던 일종의 낙서다. 그런데 단순히 글자 한 두개를 바꾸던 예전에 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교과서 낙서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교과서 튜닝의 종류도 다양한 편이다. 하지만 'dmstjsj'과 같은 네티즌은 무엇보다 기존의 글자와 그림에 글자를 빼거나 더하는 형식으로 바꾸는 것이 정석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국사'가 있으면 '국'과 '사' 사이에 다른 단어를 넣어 '순대국밥사줘'로 바꾸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과학'을 '고문과 학살'로 바꾸고 '벌써 20명 째'라는 글을 삽입하거나 피를 흘리는 눈의 모습을 그려넣은 것도 인상적이다. '체육'교과서를 '카트캡터 체리의 육체미'로 바꾼 것도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기존의 글자를 그대로 이용하기도 하지만 약간의 변형을 통해 재밌는 낙서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다. '불량가출청소년 3년꿀은'은 '가정'책에서 '정'자를 '청'으로 바꾸어 재밌게 바꾼 경우다. 표지에 그려진 가족사진에 '가족이 그리워'라는 말풍선이 인상적이다.

  '국어'의 '국'을 '붕'으로 바꾸어 만든 '민물 붕어찜'도 재밌다. '불법 체류'책이 되어버린 '체육'책도 마찬가지다. 특히 표지에서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 여자 선수 옆에 경찰을 그려 넣는 재치를 보인 네티즌도 있었다.

  이렇게 글자를 이용한 낙서는 한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ENGLISH'의 'E'를 지우고 'KO'를 그려넣어 '2년동안 배운건 KONGLISH'로 바꿨다. 뿐만 아니라 'ENGLISH'를 교묘히 바꾸어 '토요미스테리'를 만들고 거기에 괴물들의 모습을 그려넣어 만화책처럼 바꿔놓은 영어책도 있다.

  한편, '세계사'를 '섹시코만도'로 바꾼 교과서의 경우, 예전에는 직접 책의 표지를 그리는 방식을 이용했다. 하지만 요즘 게시물 중에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깔끔하게 합성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교과서 튜닝에 일정한 주제를 갖춘 방법도 있다. '성 교육부'에서 출판한 '정자 활동 실습'이 그 중 하나. 성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야한꿈자리''섹욕과긴장그리고흥분''음란물은생활의활력'등도 비슷한 교과서 낙서다.

  또 '노름''판치기'등으로 바꾼 교과서도 네티즌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표지 속 인물들에 대사를 집어넣거나 설명을 첨가했다.

  이러한 게시물들을 본 네티즌 중 일부는 '책을 소중히 다뤄야 할 학생들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릴 적에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아이디어가 좋다''책 표지에 낙서한다고 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재치 있어 좋다'라는 반응을 보인 네티즌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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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렇게 놀아요&quot;, 학생들의 GIF 애니 인기

 

 

우린 이렇게 놀아요", 학생들의 GIF 애니 인기

2005-11-14 09:47:10

 

청소년들의 학교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진들이 인터넷에 올라와 네티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GIF 애니메이션 파일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사진들은 요즘 학생들의 학교생활 모습으로 재미와 웃음을 동시에 주고 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www.naver.com) 붐 게시판에 ‘xiahfkqnld’라는 ID의 네티즌은 여학생들의 학교생활 모습이 담은 사진들을 올렸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어울려 노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움직이는 GIF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사진을 올린 네티즌은 “여학생들도 이렇게 놀면서 지낸다”라고 말하면서, 여학생들만 모인 반에서도 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생활한다고 덧붙였다. ‘wndus1209’, ‘kwon7845’ 등의 여러 네티즌은 “우리 학교 친구들도 이렇게 논다”며 공감한다고 말했다. ‘dlarnrxor’라는 ID의 네티즌은 “남녀공학만 다녀서 그런지 몰라도, 노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어 보인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이러한 사진들은 한 동작씩 촬영한 여러장의 사진을 하나의 GIF 애니메이션 파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GIF 애니메이션은 컴퓨터 사진 편집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간단히 만들 수 있고, 용량이 크지 않아 많은 학생들이 이와 같은 사진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노는 모습을 실감나면서도 약간 과장되게 보여줄 수 있고, 하늘을 나는 등의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습들도 연출이 가능해 학생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한편, 남학생들의 재미있는 학교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도 눈길을 끈다. 이 사진들도 GIF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인데, 여학생들의 사진보다 좀 더 독특하고 기발한 놀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1. 무중력 신발 착용 > < 2. 괴롭히지 맙시다 > < 3. 백일 때부터 불도를 닦았다는 >


< 4. 춤 신동 > < 5. 벌레 인간 > < 6. 회심의 똥침 >


< 7. 스트리터 파이터(1) > < 8. 마하의 영역에 다다른 학생 > < 9. 스트리터 파이터(2) >


< 10. 만화 따라하기 > < 11. 스트리터 파이터(3) > < 12.. 해리포터 >


< 13. 수퍼 손가락 > < 14. 매트없이 2 >


< 15. 멀리뛰기 세계 신기록 > <16. 천정 짚고 돌아다니기 >

다리 대신 팔을 이용해 걷는 모습, 주먹을 맞고 멀리 날아가는 모습, 교실 바닥을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모습 등 재미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또한 게임 <스트리터 파이터>와 영화 <매트릭스>, <해리포터>를 패러디한 사진들도 눈에 띈다.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남학생들의 노는 모습이 너무나 재밌다”고 말하면서, 사진 촬영을 위해 학생들의 고생이 많았겠지만, 힘들게 만든 사진들을 보면서 매우 뿌듯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GIF 애니메이션 사진들은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학교를 졸업한 네티즌들에게는 즐거웠던 학창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는 폰카로 촬영한 같은 방식의 폰카애니 또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데 이와 같은 작품들은 네티즌들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더해져 또다른 놀이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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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당 “유전특검잔혹사 연출한 한나라, 책임지고 사과하라”

 

 

우리당 “유전특검잔혹사 연출한 한나라, 책임지고 사과하라”
15일 한나라당도 논평 “노 정권 권력비리는 특검도 안 통하는 철옹성” 비판
입력 :2005-11-15 18:15   김성곤 (skzero@dailyseop.com)기자
열린우리당은 15일 유전의혹 특검이 특별한 성과없이 3개월 만에 막을 내린 것과 관련 “세금만 탕진한 한나라당의 ‘유전특검 잔혹사’”라고 비꼬며 한나라당의 책임과 사과를 촉구했다.

15일 수사결과를 발표한 유전의혹 특검팀은 이광재 의원의 개입 여부와 관련 “일정 부분 관여했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인정되나 핵심 당사자인 허문석씨를 조사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의원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증거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우리당은 이와 관련 이규의 부대변인 명의의 논평에서 유전의혹 특검 수사는 검찰 수사 이외에 새로운 사실은커녕 검찰이 기소한 피고인들의 추가 혐의조차 밝혀내지 못해 검찰 수사가 공정했음을 재확인한 특검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16억원의 예산을 사용한 40여명의 수사팀이 200여명의 인원을 소환조사하고 400여개의 금융계좌를 추적 조사하는 등 특검치고는 결론이 너무 허무하다면서 한나라당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규의 부대변인은 “정략적 이해타산으로 특검이 무용지불이 되어버린 책임은 전적으로 허풍당당 한나라당에 있다”면서 “수사는 검찰에 맡기고 정당은 민생에 전념하자는 우리당의 충고를 무시하고 세금만 낭비하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을 언급, 이번 특검은 한나라당이 연출한 ‘유전특검 잔혹사’라고 비유한 뒤 △ 반사이익을 취하려는 의혹 부풀리기식 정치공세 △ 권력형 비리로 연결짓는 터무니없는 공작정치 △ 검찰의 수사 방해와 국민의 정치불신 가중 △ 감사원과 검찰수사 등 적법한 질서 교란 △ 민생과 경제활성화를 위한 국민적 역량의 훼손 등이 그 실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나라당을 겨냥 ‘국세보존 가처분신청’은 물론 ‘특검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보상도 청구를 해야할 것이라면서 참여정부와 우리당이 마치 비리가 있는 것처럼 국민의 눈과 귀를 어지럽힌 한나라당은 책임지고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한나라당도 이날 이정현 부대변인 논평을 통해 특검팀이 사건 실체를 규명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라며 “노무현 정권 권력비리는 특검도 안 통하는 철옹성인가”라고 비판했다.

이정현 부대변인은 “사건의 핵심인물인 허문석씨를 조사 한번 못해보고 권력비리 관련자들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것”이라면서 “이번 일은 내로라하는 권력실세들과 기관의 힘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노무현 정권에서는 권력비리에 대해 특검을 해도 진실 규명이 어렵다”면서 “대통령 직속의 수사기관 신설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며 여권의 공직자부패수사처 설치 움직임을 비판했다.

유전의혹 특검 수사 결과와 관련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밝힌 권영세 의원은 특검 무용론을 경계했다.

권 의원은 “특검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특검제도 전반의 재검토를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지적하고 “법무장관이 인사권과 수사지휘권을 통해 사실상 검찰을 예속시키는 현실에서 대단히 의미있는 제도”라고 밝혔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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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도올 김용옥 &quot;교원평가는 우리 사회 기층 도덕의 파괴&quot;

 

 

이 땅의 스승들이여, 들으시오!
교권은 존엄, 평가대상 될 수 없다
[특별기고] 도올 김용옥 "교원평가는 우리 사회 기층 도덕의 파괴"
텍스트만보기   도올 김용옥(news)   
교원평가제 강행을 둘러싸고 정부(교육인적자원부)와 교원단체(전교조, 교총 등)의 갈등이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 학부모단체들도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대해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도올 김용옥 순천대 석좌교수가 기고를 보내왔다. 도올은 교권의 존엄성은 유교적 가치의 핵심이라면서 이를 깨뜨리는 교원평가제 실시를 적극 반대했다. <오마이뉴스>는 이 글에 대한 반대 입장의 글도 환영한다. <편집자 주>
반대 지난 7일부터 11일까지 이수일 전교조 위원장은 교원평가 강행에 반대하며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철야·단식농성을 벌였다.
ⓒ2005 오마이뉴스 권우성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다. 광풍노도처럼 대지를 쓸어버릴지, 떠도는 낙엽을 휘감으며 소리없이 스러질는지, 그 전망이 불투명한 채 회오리바람은 우리의 심연(心淵)에 파문을 던지며 떠돌고 있다.

그 바람에 휘감긴 자들은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고, 또 자신의 판단의 이중성 때문에 수치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는 자신의 투지에 대한 정확한 의미부여를 보류한 채 방황키도 하고 있다. 이 모두가 우리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확고한 가치판단이 결여된 탓이다.

그 가치판단의 보편타당성을 운운하기 전에 그 가치판단을 밑받침하는 자신의 주체적 체험의 절박성과 정당성에 대한 당당한 외침이 없는 것이다. 외칠 수 있으려면 철두철미한 삶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티끌 하나라도 전 우주의 거울에 비춰볼 수 있는 전체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해방 후 우리의 교육은 교사들에게 이러한 인식의 바탕을 마련해주기에는 너무도 빈곤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요즈음 세간(世間)의 모든 쇄사에 침묵으로 일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말이 들릴 리도 없고, 들릴 수도 없고, 들려야 할 까닭도 없는 세태가 스스로의 관성에 의하여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쇄사에 대한 잡언(雜言)이 대간(大幹)을 휘어잡을 까닭이 없으니 나 도올은 방관 속에 흘러가는 역사를 방치할 뿐이다.

유교윤리의 핵심, 교권의 존엄성

그러나 '교원평가제'라는 이 한마디에 대해서만은 나는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나는 여태까지 한 회갑의 생애 동안 교육자로서 일관된 가치관을 유지해왔다. 내가 이 땅의 후학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사명에서 일순간도 떠난 삶을 산 적이 없다. 나는 교육에 관한 한 봉사와 헌신으로 일관해왔다. 그러한 삶의 역정의 축적이 나에게 던져준 강인한 신념을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모든 스승들과 공유코자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칼 맑스(Karl Marx. 1818∼83)는 정치·법률·문화 등 상부구조라 부르는 사회적 의식형태의 토대에는 물질적 생산력과 생산관계라고 하는 하부구조가 있으며, 그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단순한 도식을 역사발전 법칙으로 표방하였다. 이러한 경제사관적 교조주의나 경제결정론과는 아랑곳없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오히려 인간의 경제적 행위의 토대에는 지배적인 정신적 가치가 있다는 종교사회학적 주장을 폈다. 서구적 자본주의의 성공의 배면에는 프로테스탄트윤리라고 하는 정신적 가치가 그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상부구조니 하부구조니 하는 따위의 말은 원래 건축용어에서 온 것인데 지상으로 드러난 건축의 외관만을 보아서는 그 건축의 구조를 제대로 알 수 없으며, 반드시 지하에 숨어있는 토대를 알아야만 그 건물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일면적 타당성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인간사회의 네트웤이라고 하는 것은 건물처럼 상하로 완벽하게 이분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하가 상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단순한 도식도 유치한 발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하부구조가 물질이어야만 할 필요도 없고 정신이어야만 할 필요도 없다. 상하의 이원론이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 모두 화엄(華嚴)철학의 원융(圓融)한 관계론을 망각한 지난 20세기의 유치한 발상들이다. 그런데 베버는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의 필연적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형성에 실패한 동양의 유교적 윤리를 그 반증의 예로서 상술하였다.

그러나 20세기를 지난 오늘날, 발전된 사회학·역사학·인류학의 제반성과가 입증하는 것은 유교윤리(Confucian ethics)야말로 아시아적 자본주의 성취의 핵을 이루는 정신가치라는 것이다. 유교윤리는 자본주의 정신과 근원적으로 상치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가 우리 생활세계(Lebenswelt)를 침식하면서 발생시키는 비인간적 제반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합리적인 규범윤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유교윤리의 핵심에는 바로 '교권의 존엄성'(the Dignity of Teacher's Right)이 자리잡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단언컨대 교원평가제란 넌센스요, 어불성설이요, 망국의 근원이다. 그것은 관료주의의 안일한 타성이 빚어낸 소치일 뿐이며, 일고의 가치조차도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라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시대에서 과연 우리 조선문명이 지닐 수 있는 장점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역사의 키를 장악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부표하게 될 것이다.

동그라미 색칠식 수량적 직접평가는 아니된다

찬성 '합리적인 교원평가 실현을 위한 학부모·시민연대'는 8일 오전 서울 중구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교원평가제 시범실시 수용을 촉구했다.
ⓒ2005 오마이뉴스 권우성
첫째, '교원평가'라는 것이 가능하면 좋겠는데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 평가라고 하는 것은 객관화될 수 있는 수량적·계량적 기준을 말하는 것인데, 교사라는 인격체는 그러한 방식으로 평가될 수도 없고, 평가되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의 조선의 사상가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인정>(人政. 사람의 정치. 1860년작)이라는 저술에서 이미 측인(測人. 사람을 헤아림)의 방법으로 '감평(鑑枰)'이라는 계량화된 점수표를 제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방법의 한계를 절절이 논구하고 있다.

현재 대학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교수평가 설문지만 하더라도 하등의 의미가 없다. 우선 학생들이 설문지에 진지하게 응하질 않는다. 진지하기에는 너무도 그 설문의 내용이 하찮은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 평가가 반드시 교수의 정신세계에 대한 공정한 기준이라고 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한 교수의 점수가 예외없이 60점 이하로 나온다면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한 80점에서 100점 사이의 경우 그 사이에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참으로 구차스럽고 추저분한 것이다. 내 체험으로 말하자면, 요즈음 대학분위기에서 학생들에게 95점 이상의 점수를 따는 교수가 85점 정도의 평가를 받는 교수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희귀하다.

오히려 낮은 점수를 받는 교수가 더 무게있고 더 진실하고 더 실력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식의 경쟁체제는 교수에게 '인기영합'이라는 부담을 주며, 교수방법의 다양성을 말살시키며, 자기가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식게 만들며, 또 교수 동료들 사이에서 불필요한 심기를 조장시킨다.

내가 다닌 하바드대학에서도, 물론 학기초에 모든 강의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는 책자가 발간된다. 그런데 그것은 학생회에서 자체적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만드는 것이며, 그 강의를 가장 잘 이해한 학생이 수강소감을 문장으로 써서 타인의 수강신청자료로 활용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무지막지하게 획일적인 동그라미색칠 식의 수량적 직접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강의의 장·단점이 인간적이고 격조높은 언어로 잘 기술되어 있다. 교육이란 교육자나 피교육자나 자율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그 자율의 인격적 관계를 타율적 기준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무리 일시적 긍정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치는 구원한 부정효과에 비한다면 너무도 사소한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판사의 판결보다 더 권위 보장받아야

나 도올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나의 사상의 자유와 학생들의 배움의 자율과 교권의 불가침의 권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대학강단을 떠났다. 나는 그 뒤로 교수로서의 나의 권위를 한치도 양보한 적이 없다. 도산서원이라는 배움터는 기본적으로 퇴계를 흠모하는 학생들이 그의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모여들어 형성된 장(場)이다. 도산서원이라는 영역 속에서 이퇴계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녀야 한다. 그는 학생으로부터 평가되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대학으로부터 끊임없이 강의의 권유를 받는다. 그때마다 내가 내거는 조건은 나의 강의에 대한 일체의 제도적·수량적 평가가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강의의 주재자요 신(神)이다. 그러한 프라이드가 없이 강의를 한다는 것은 비굴이요 아첨이요 굴종이요 생계수단으로의 하락이다. 최근에도 중앙대학교에서 이러한 조건으로 내 강의를 설강하여 크게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 교육은 다양한 가치의 함양인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너무도 지고한 교육철학과 존경받을 수 있는 실력과 자존의 바탕을 가지고 큰소리치는 것일 뿐 일반적 교사에 대한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잠깐 공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나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述而>)

여기 '세 사람'이라 함은 실제로 3명의 인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하고 같이 가도 그들이 모두 다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자의 집주(集注)에 "세 사람이 같이 간다 함은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이니, 나를 제외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선하고 한 사람은 악하다는 뜻이 되니, 결국 두 사람 다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배움을 얻는 스승이라 함은 반드시 최선의 인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요, 불선한 사람이라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선한 스승을 보고도 나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게 되니 그것 또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육이란 합리적 커뮤니케이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합리의 용인이나 비합리의 대비 속에서도 합리성의 추구가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잘난 선생이 있으면 못난 선생이 있게 마련이다. 또 못난 선생이 있기에 잘난 선생이 돋보이게 마련이다. 내가 학생들의 평가를 거부한다는 뜻은, 내가 실력있는 교수이기에 항시 학생들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암묵적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기대를 근원적으로 단절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봉사와 헌신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기대하는 순간 이미 나는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상실하는 것이다.

교육이란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했으니, 교육자와 피교육자간의 끊임없는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다이내믹한 변증법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을 매학기 매강의마다 수량화되는 기준으로 즉각적으로 평가하여 고정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행일 뿐이다. 지금 한 학생의 의식세계 속에서 불만스럽게 보이는 선생의 세계가, 성장하고 난 20년 후에 지고한 교훈으로서 자리매김될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근원적으로 일시점적·수량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피고나 원고가 판사의 판단을 평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평가에 의해 판사의 판단의 권위가 흔들릴 수 있다면 그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내가 생각키엔 스승의 가르침은 판사의 판결보다도 더 지엄한 권위를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공자의 수제자는 안회(顔回)였다. 매우 이지적이고 과묵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잘 돌아가고 수완이 좋은 자공(子貢)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공자가 자공을 독대했을 때 이와 같이 물었다: "너와 안회, 누가 더 나으냐?"(女與回也孰愈?) 그러니까 자공이 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넘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뿐이옵니다."(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래, 너는 안회만 같지 못하다. 그래, 나와 너, 두 사람 모두 안회만 같지 못하다."(弗如也. 吾與女弗如也.) 여기에 스승인 공자의 정직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스승이라 할지라도 제자만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훗날 안회는 공자를 평가하여 이와 같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어볼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봄에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우리나라 '스승의 노래' 가사의 출전이 된 이 안회의 말은 결국 사제지간의 호상겸손과 존경의 염을 표현한 것이며 유교적 덕성의 전범을 나타낸 것이다. 공자는 <술이>(述而)편에서 자신의 배움의 세계를 가리켜, "나는 나면서부터 저절로 안 자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며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자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하였다. 스승의 세계도 결코 일시에 잘날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는 노력을 통한 배움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교원평가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

ⓒ2003 오마이뉴스 권우성
둘째, '교원평가'에 대한 학부형의 지지가 그러한 평가를 통하여 좀 저질스러운 교사를 솎아내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주안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기대는 근원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다. 아무리 평가를 많이 한다 해도 그것은 저질적 교사의 징계에까지 이르는 법적 효력을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력을 수반하지 않는 평가는 결국 교육의 장에 불필요한 잡음과 불신과 교육적 열의나 신바람의 냉각만을 초래할 것이다.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헛지랄'만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헛지랄에 교육부공무원들의 번문욕례가 기생하고 이간질을 통한 원격조정의 계책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국력만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원평가의 근원적 목적이 저질적 교사의 퇴출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원조직과 교육부 사이에서 어떤 법적·제도적 투쟁의 문제가 되어야 하며, 피교육 당사자인 학생이 연루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스승과 학생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인격 대 인격의 도덕적 관계가 되어야 하며 계량가능한 지식전달의 효율로써 평가되는 관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초·중·고등교육의 주된 가치는 지식전달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향후 바른 지식을 추구할 수 있는 바탕과 인격의 함양에 있는 것이다. 숙명여고의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돌리며 조사해본 바로도, 학생들 대부분이 자기들이 배우는 선생을 곧바로 평가한다는 문제에 대하여 도덕적 부당성이나 제자로서의 어색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요즈음의 어린 학생들은 어른보다도 더 어른스럽고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교원평가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새삼 숙지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학교 다니던 60년대만 하더라도 서양에서는 토론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데 반해, 동양에서는 권위주의적 주입식 교육이 주류라서 낙후되었다는 통론이 휩쓸었고 그래서 세미나적 교육방법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대만대학에 유학갔을 때 세계적 대석학이신 나의 스승 황 똥메이(方東美. 1899∼1977) 교수가 강의시간에 동양의 서원전통 교육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일갈을 하시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서양에 가서 강의를 해보면 쓸데없는 질문이 많다. 그리고 학생의 질의가 타인의 학업을 방해할 때가 많다. 교수란 제한된 시간 내에 더 많은 학생에게 더 많은 학문내용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토론이란 강의 후에 학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있는 성의를 다해 그 시간에 모든 학생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지혜를 짜야 한다. 명강의란 주입식교육 만큼 더 좋은 딴 방법이 없다. 주입식이라지만 학생들은 항상 교수를 평가하며, 선생이 전달하는 정보를 끊임없이 취사선택한다. 주입식이라 해서 생도들의 자율적 권한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생을 평가한다. 되돌아서면 학생들끼리 수군거리고, 별명으로 평가하고, 걸어가면서도 토론하고, 시험 보면서도 학습내용을 비판하고, 선생의 점수를 매긴다. 그리고 그것은 무언으로 축적되어 보이지 않는 전통으로 후배들에게도 전달된다.

그리고 요즈음은 학생이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객관적으로 부당한 사례에 직면했을 때는 인터넷에 올리거나 다양한 게시판을 통해 사회화시킬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정보가 일방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웤이 형성되어 있는 나라다. 따라서 교원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토론식이니 주입식이니 하는 것도, 교육방법의 효율성과 다양성에 관한 문제일 뿐이며, 우열의 문제는 아니다.

훌륭한 부모들이야말로 침묵하는 대중

넷째, 교원평가제에 관하여 학부형들은 모두 찬성하고 있고 교사들만이 저항하고 있다는 여론은 근원적으로 매스컴의 정보조작에 의한 호도된 인상일 수가 있다. 학교교육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부모일수록 학교교육을 망치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자녀를 3명이나 키웠지만 자녀들의 문제로 학교에 가본 적은 한번도 없다. 참으로 훌륭하게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훌륭한 자신의 사회적 삶에 열중하여 자녀들에게 바른 가치관의 모범을 보이지, 학교교육에 일일이 참견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부모일수록 학교교육의 자율적 특성을 신뢰하며, 불필요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훌륭한 부모들이야말로 침묵하는 대중이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은 학교에 가서 설치는 부모들의 참여를 바람직하게 생각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유한(有閒) 족속이 될 삶의 여가가 없다. "학부형들 모두 찬성-교사들 모두 반대"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교원평가제에 관한 논의를 밥그릇싸움이나 이권싸움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원평가제에 관한 교사들의 반대의 근원적 모티브에는 참교육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우리는 믿어주어야 한다. 2천여 년의 유교전통을 지닌 우리나라의 교육자의 양심과 양식이 아직 그런 수준에까지 변질되어 있지는 않다.

다섯째, 여태까지 우리가 우려했던 중고등교육의 부정한 실태는 근원적으로 교육제도의 문제이며 교원의 내면적 도덕성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교사가 시간에 들어가도 학생들이 다 졸고 있었고, 또 교사가 그런 학생들을 질책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나 권한이 주어져 있질 않았다. 학생들이 저녁에 과외로 사교육에 에너지를 쏟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학입시제도가 수능위주에서 내신성적 위주로 전환됨에 따라 그러한 현상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지금도 고교 2·3학년 반에 들어가면 학생들이 집중하지 않지만, 1학년 반에 들어가면 조는 학생도 없고 놀라운 집중력을 보일 뿐 아니라, 학생들이 날카로운 질문공세를 편다. 학교 강의시간에 충실하는 길이 대학입시의 첩경이라는 생각이 생도들에게 편재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조차 촌음을 아껴 예습·복습을 하며 점심시간에도 영어독해책을 놓고 씨름하는 광경을 목도하는 선생의 눈에는 오랜만에 감격의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다. 이와 같이 제도적 변화가 학습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이지 학생과 교사의 도덕적 심성의 우열의 문제가 그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원평가제를 강행하려는 자들의 발상의 근저에는 수능위주에서 내신위주로 전환됨에 따라 교원자질의 향상이 교육계의 주된 테마가 되어야 하므로 교원을 채찍질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깔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우선 타이밍이 나쁘다. 최소한 내신위주의 긍정적 변화를 2·3년이라도 지켜본 후에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할 문제지 지금 당장 교원평가제를 도입하여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졸속한 발상이요, 하릴없는 공무원들의 생색내기 작전에 불과한 것이다.

노자의 말에 '위자패지, 집자실지'(爲者敗之, 執者失之)라는 말이 있다. 자꾸 뭘 쓸데없이 하려고 하면 더욱 그르칠 뿐이요, 자꾸 잡으려고 하면 더욱 놓치게 될 뿐이라는 뜻이다. 쓸데없이 세금낭비 하느라고 보도블록을 뒤집는 짓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고 말 수가 있다. 교원평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사들의 충심의 협조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분란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교원평가제는 수능위주가 내신위주로 전환하는 것과도 같은 그러한 제도적 변화와 동일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원평가제는 제도적 문제가 아닌 교권이라는 인격의 도덕성과 실력에 관한 문제이며 그것은 결코 단순한 제도적 장난으로 달성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자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다언삭궁'(多言數窮)! 말이 많을수록 자주 궁색해진다는 뜻이다. 교원평가제를 운운한 공무원님들이시여! 이제 그만 입을 다무시는 것이 어떠하실런지요.

교권의 자기부정과 자기반성도 필요

여섯째, 제도의 문제가 거론된 김에 일갈을 가하자면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문제는 99%가 중고등학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의 문제라는 것이다. 대학입시제도의 여하에 따라 변질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입시제도의 문제는 곧 대학교육의 전체체제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대학의 서열화와 사회진출의 학벌패거리의식이다.

이러한 문제의 핵심에는 서울대학교라고 하는 암적 존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학에 못들어갔다는 피해의식 하나로 평생을 그늘진 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은 서울대학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서울대학을 없애버린다는 것이 관악캠퍼스를 폭파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서울대학을 현금의 대학이 아닌 프로펫셔날 스쿨의 집단인 상위개념의 대학원대학으로 승격시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학병의 핵을 보다 창조적인 국가에너지로서 진화시키자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서울대학교를 대학원대학으로 만들어버리고, 나머지 국립대학들을 현금의 서울대학교 수준의 국립대학으로 통폐합하면 우리나라 교육의 절반은 해결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학교육 체제개선에 관한 다양한 논의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다 수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철저히 묵살하고 있다.

왜냐? 우리나라의 모든 체제를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보이지 않게 장악하고 있고, 이들이 암암리에 이러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황당한 무계지언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 체제개선에 관한 정직한 논의가 없이 일선 교사들만 닦달치는 말엽적 논의는 벼룩 하나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홀랑 태워버리는 짓거리와 똑같다. 본(本)을 개선치 못할진대 말(末)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지어다. 군자는 무본(務本)이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일지니.

일곱째, 교원평가제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는 궁극적으로 교원의 자질이 향상되어야 한다는 염원이 깔려있을 것이다. 자질이란 전공과목에 관한 학구적 실력과 도덕적 인격의 양면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도 결코 교원평가로서 이루어질 수가 없다. 평가가 자질을 향상시키지는 않는다.

일요일 저녁마다 KBS에서 방영하는 고교생들의 골든벨 퀴즈 프로를 나는 곧잘 보곤 한다. 그곳에서 항상 영어문제가 하나 출제되는데 출연한 고교의 영어선생이 나와 그 문제를 읽고 학생들과 영어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충격을 받은 사실은 내가 본 수십 번의 프로그램 중에서 영어발음이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씨부렁거리는 영어의 수준이 매우 천박한 회화수준에 그치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학생들이 나와서 하는 쇼를 보거나, 그들의 조크를 보거나, 천편일률적인 몸짓이나 천박한 언행밖에는 없다. 그런 행동거지도 귀엽게 봐줄 수도 있으나 문제는 보다 고상하고 기발한,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아가 빈곤하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웃김 패턴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처리가 대부분 한국인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어색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학생들의 선생에 대한 평가나, 교사들 상호간의 평가, 학부모들의 평가로서 개선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어발음과 회화가 그 수준인 사람이 아무리 평가해도 달라질리 만무하다. 다시 말해서 교원양성의 교육과정과 선발과정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이는 교사들의 자질개선은 이루어질 길이 없다는 것이다.

더이상의 구체적 논의는 삼가겠지만 결국 우리사회 변화의 추세가 폐쇄 시스템(closed system)에서 오픈 시스템(open system)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언급하여 둔다. 오픈 시스템으로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고수해야 할 것은 교권의 존엄이지만, 나의 논의는 교권의 자기부정과 자기반성의 촉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학생에게 평가받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

▲ 도올 김용옥 교수가 상명고등학교에서 특강하는 모습.
ⓒ2005 통나무 출판사
여덟째, 교원평가제에 관한 나의 논의는 결국 우리사회의 미래모습에 대한 총체적 블루프린트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사상사적으로 말하면 근대성(Modernity)의 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근대성은 항상 합리성(Rationality)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우리사회가 지금 많은 좌절이나 인기없는 듯이 보이는 정치판세의 엎치락뒤치락 속에서도 꾸준히 합리성의 증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시스템의 복잡화, 권력의 분권화, 가치의 다변화와 더불어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합리성이라 함은 리(理)에 합당(合當)하다는 뜻인데, 이때 리가 반드시 서구에서 말하는 계량적 이성, 도구적 이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리(理)는 정(情)적인 모든 요소를 포괄하는 것이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퇴계·율곡의 모든 논의가 서구적 이성(Reason)에 관한 것만은 아니며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도덕적 주체의 총체적 책임의식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유교적 윤리라는 것도 협의의 언어중심적인 진위체계의 진리를 넘어서는 매우 총체적인 몸(Mom)의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것이다. 나의 몸철학적 논의는 근대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서구인들이 근대를 초극하려는 모든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과를 포괄하는 논의로 이해되어야 한다. 초월적 실체의 전제나, 개인의 자율적 가치의 묵살이 없이 어떻게 간주관적 공공세계에 규범윤리적 합의를 도출하느냐 하는 문제이며, 서구인들이 근대성의 벼랑 끝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모든 가치가 이미 우리 실존에 내재되어 있다는 우리 사회의 강점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민족의 교육을 효율성과 계량성의 장으로서만 오인하는 현금의 모든 교육계 동향은 깊게 반성되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은 동질적 장의 연속체일 뿐이다. 학생이 결국 교사가 되며, 또 교사는 학생을 생산한다. 그러한 연속의 순환체계가 우리나라의 문화를 형성해가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의 장으로서 기업의 합리성의 증대는 당연한 추세이지만 그러한 기업의 합리성의 가치가 우리의 생활세계를 식민지화시켜서는 아니 된다. 기업이 타국이 아닌 자국민의 생활세계까지 식민지화해 버리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학의 운영이 모두 기업의 합리성과 경쟁성의 모델을 따라가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모두가 반성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기업의 장점의 근저에는 유교적 합리성의 성과가 자리잡고 있다. 교육에 대한 열정, 근면, 공검, 절약, 대의를 위한 헌신, 초월적 세계의 부정, 인간의 정감에 대한 배려, 재빠른 판단력, 예의바름 등등의 미덕이 기업을 구성하는 성원의 인격의 바탕이 되고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유수기업의 위용에 대한 과신 때문에 교육의 장마저 그러한 효율성과 계량성의 장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러한 기업은 미래에 다시 탄생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도덕적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게 될 것이다. 교육은 백년대계의 장이다.

내가 하바드대학에 유학하던 시절, 나는 군사독재정권과 투쟁하며 캐나다에 망명하고 계시던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 목사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우리나라 자유신학·해방신학의 근원이며, 간도 용정에서부터 규암 김약연(金躍淵. 1868∼1942) 선생의 지도하에 민족정기를 키우신 장공 선생, 나는 한국신학대학에서 그로부터 동양사를 배웠다. 그때 장공 선생께서 나에게 건네주신 글씨가 있다.

"일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고, 십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고, 백년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하나를 심어 하나를 얻는 것은 곡식이다. 하나를 심어 열을 얻는 것은 나무다. 하나를 심어 백을 얻는 것은 사람이다."(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百年之計, 莫如樹人. 一樹一穫者, 穀也; 一樹十穫者, 木也; 一樹百獲者, 人也.)

내가 학생에게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비굴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나는 가르치기를 포기하거나 죽음을 택할 것이다. 물론 교사들에게는 나와 같은 선택의 여지가 주어져 있지를 않다. 나의 학문, 나의 사상은 자유를 구가한다. 때로는 만길 절벽 위에 우뚝 선 사자처럼 포효하고, 때로는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때로는 광인처럼 깔깔대고, 때로는 실연한 연인처럼 눈물을 흘려도 나의 학생들은 나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영혼의 비상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획일적 잣대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교육에 관하여 심중한 절기라고 판단될 때마다 발언을 계속하여 왔다. 이미 20년 전에 중고생을 위하여 <철학강의>를 썼으며, 전교조가 최초로 구성될 때에도 교육자의 행위가치는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권면했으며, 네이스(NEIS)에 관해서도 치열하게 반대하였다.

나의 입장은 일관된 것이다. 그것은 보수나 진보의 잣대로 평가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는 네이스투쟁을 통하여 학생들의 인권을 지켰다. 이제 우리 스승들! 이 땅의 40만 교사들은 일치단결하여 교원평가라는 저질적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 우리 스승들의 인권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것은 스승들의 삶의 이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백년대계의 운명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외친다. 유교적 가치의 핵심은 교권의 존엄이요 지엄이다.

2005년 11월 14일
새벽 3시 20분
낙한재(駱閒齋)에서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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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도올, 시대를 거스르는 궤변은 그만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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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나 졸리, &quot;성을 사는 남성들, 여성 인신매매 공범&quot;

 

 

 

안젤리나 졸리, "성을 사는 남성들, 여성 인신매매 공범"
[한국일보 2005-11-10 19:06]    
유엔 글로벌 인권상을 받은 미국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30)가 인신매매 퇴치의 첨병으로 나섰다.

졸리는 최근 미국의 음악 전문 케이블 방송 MTV의 인신매매 근절 캠페인 홍보를 맡아 30분짜리 다큐멘터리 ‘비인간적인 인신매매’에 출연했다.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이 다큐멘터리는 각국의 인신매매 피해자와 포주, 남성 성 구매자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담고 있는데 졸리는 내레이션과 진행을 맡았다.

졸리는 다큐멘터리에서 “인신매매는 포주와 인신매매범만이 아니라 돈을 내고 여자를 사는 평범한 남자들에게도 잘못이 있다”며 “이들이 인신매매업자를 부유하게 만들고, 젊은 여성들을 노예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는 “지금도 수천 명의 여성이 인신매매를 통해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다”면서 “적극적인 신고와 단속으로 인신매매를 퇴치하자”고 호소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여성가족부 주최로 14일 서울 리츠칼튼호텔에서 열리는 ‘제3차 국제 인신매매 방지 전문가 회의’ 개막식에서 상영되며, 여성부 홈페이지(www.mogef.go.kr)에서도 볼 수 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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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안병직 70년대도 그랬듯 지금도 현실감각 없어”

한편 이하... 쓰레기 글은 안단다

 

 

진중권 “안병직 70년대도 그랬듯 지금도 현실감각 없어”
고뉴스 칼럼 “안 교수 비판 얼마나 건전한 논증 위에 서 있는지 궁금”
입력 :2005-11-11 15:38   김유정 (actionyj@dailyseop.com)기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노무현 정부는 국내 정치는 물론 국제 정치에서도 아무 하는 일 없는 건달정부”라고 말한 것과 관련,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가 “안 교수의 문제는 70년대 사회를 식민지반봉건 사회로 바라보던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전혀 현실 감각이 없다는 데에 있다”며 안 교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진 씨는 8일 인터넷 언론 ‘고뉴스’에 올린 칼럼에서 이같이 밝히고 “안병직 교수가 현 정권을 ‘건달정부’라 부를 자유는 내가 그를 ‘건달교수’라 부를 자유만큼 소중하지만, 문제는 그 비판이 얼마나 건전한 논증 위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에 대한 안병직 교수의 비난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고 말한 그는 안 교수가 뉴라이트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일 정권을 그냥 두고 통일하자는 것은 남쪽이 김정일 정권 밑으로 들어가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 내용을 인용했다.

이어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개성공단의 경제협력이 계속되고, 남북이산가족의 만남이 이어지고, 심지어 한나라당에서마저도 휴전선에 경제특구를 건설하자고 하는 상황에서, 아직도 이런 발언을 하는 이들도 있다”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진 씨는 또 “이런 시각을 갖고 있으면 앞으로 대북관계에서 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며 “게다가 그의 말대로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켜 놓으면 그 다음엔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는 “안 교수는 이제 와서 현 정권을 민족주의적이라 비난하지만, 운동권 일각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준 게 바로 안병직 교수”라고 꼬집으며 “70년대 한국의 사회구성체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규정한 그의 논리는 이미 80년대에 폐기처분됐다"고 말했다.

“안 교수의 머리를 끝까지 사로잡은 것은 한국의 자본주의가 외세 때문에 발전을 못 한다는 민족주의 이념이었는데, 식민지라는 한국에서 자본주의는 계속 발전하기만 했다”고 진 씨는 진단한 뒤 “한국사회를 부당하게 식민지라 규정해 놓았으니 그 속에서도 경제발전이 이뤄진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기적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한편 진 씨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은 9일 뉴라이트 홈페이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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