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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무치한 변협, 계속 법으로 지켜줄만한가?

정말 날카로운 혜안이다.

구속 수사 관행을 폐기하고 불구속 수사 원칙이 확립되면

위협받을 변호사의 밥그릇!

 

 

후안무치한 변협, 계속 법으로 지켜줄만한가?
입력 :2005-10-14 20:21   강세준 컬럼니스트(전 한겨레신문 기자) 
대한변호사협회가 화가 난 모양이다. 변협은 천정배 법무장관의 강정구 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지휘가 알려지자 13일 즉각 성명을 내놓았다. 한마디로 천 장관의 불구속수사 지휘는 잘못됐고, 검찰은 이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호사단체를 인권의 보루로 여기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고 울화가 치민다. 이 따위 단체를 법정 유일단체로 만들어 보호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의문이다.

변호사 제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 이끌어낸 인류의 위대한 성과물이다.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민중들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고안해 낸 최고의 사법적 발명품 가운데 하나다. 변호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권을 우선시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이유다.

천 장관은 이번에 불구속수사를 지휘했다. 무죄추정원칙을 규정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취지를 따지면 어쩌면 당연한 것을 상기시킨 것에 불과하다. 물론 검찰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 있다. 자기들 재량을 침범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변협은 도대체 뭔가. 왜 천 장관을 공격하는가? 도대체 형사사건에서 불구속수사를 반대하는 변호사가 변호사일 수 있는가?

천 장관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법무무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는 법적으로 보장돼 있는 것이고, 예전에도 전화상으로, 구두로 무수히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왜 유독 이번만 변협이 마치 자기 일처럼 못 견디겠다고 난리통을 피우는가.

필자는 변협이 검찰권 독립 운운하지만, 그 속내는 딴 데 있다고 본다. 즉 변협, 정확히는 변협 지도부가 겁내는 것은 검찰권의 독립성 훼손도, 검찰에 대한 정치적 외압가능성도 아니다. 그들은 불구속 수사라는 당연한 원칙이 이 땅에 뿌리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치사한 장삿속이 변협 성명의 이면에 숨어있다. 지금의 변협 지도부는 지난 선거에서 주로 대형로펌과 전관 등 보수 기득권층 변호사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이들은 현재의 사법구조가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제도라고 여기고 있다. 일반 변호사들은 광고도 제대로 못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들은 이미 장악한 명성과 기득권으로 편안한 장사를 하고 있다.

기득권 변호사들에게 가장 쉽게 큰돈이 되는 건수 중의 하나가 형사 구속사건이다. 일단 인식구속이 문제되는 사건이 걸리면 기득권 변호사는 신이 난다. 검찰 법원에 있는 인맥만 적당히 이용해도 큰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협지도부는 본능적으로 이러한 질서가 파괴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어찌 보면 이번 사건의 본질을 가장 적확하게 직시한 셈이다. 이번 수사지휘 파동은 쉽게 가라앉을 사안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검찰의 탈법적인 구속수사 관행을 혁파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여론의 무게중심도 그쪽이다.

변협은 이번 사태가 검찰이 불구속 수사원칙 존중이라는 올바른 길로 들어설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것이 변협 지도부의 의뭉스런 속내다. 과연 이런 변협을 법으로 계속 보호하고 권위를 지켜줄 이유가 있는 지, 가슴속에서 울화가 또 치민다.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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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 다그친 전여옥 “지휘권 발동 왜 없었나 말해보라니까!”

무식한 쓰레기... 오늘도 한껀했군

 

김미화 다그친 전여옥 “지휘권 발동 왜 없었나 말해보라니까!”
13일 MBC라디오 인터뷰서 진행자 몰아붙이자 네티즌 비난 쇄도
입력 :2005-10-14 14:25   백만석 (wildpioneer@dailyseop.com)기자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13일 MBC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 출연해 문제가 된 강정구 교수의 주장은 학술지에 게재된 것이 아닌 특정 매체, 일부 편향된 시사주간지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학문의 자유를 운운할 수 없다고 주장해 논란이 예상된다.

학술지 게재 안하면 학문의 자유 없다?

전 대변인은 이날 인터뷰에서 “대학교수의 주장은 논문을 통해 전문학술지에 게재돼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된 발언들은 학문적인 발언도 아니고 학술적인 발언도 아니고 매우 편향적인, 중심에서 매우 멀어져 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런 발언들이 학술지라든가 논문이 아닌 특정한 매체, 일부 편향된 시사주간지, 이런데 (기고) 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지난 7월 27일 본보에 기고한 칼럼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를 통해 ‘6·25전쟁은 후삼국 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삼한통일의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내용은 네티즌들과 정치권에서 뜨거운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

그는 “대학교수가 왜 그런데다가 글을 쓰고 그런 의도를 갖고 얘기하나. 그러려면 아예 방송인으로서 또는 시사에 대한 하나의 컬럼니스트의 의견이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라며 “(논란이 된 발언들은) 강 교수가 학자로서 얘기한 게 아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의 주장은 학자로서 정식 논문을 통해 발표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강 교수 처벌에 반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학문의 자유’ 논란은 근거가 없다는 것.

전 대변인은 이어 “학문의 자유가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게 학문의 자유 아닌가. 학문이 뭘 위해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전 대변인은 “학문은 모든 사람들의 인권과 모든 사람의 자유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스스로 답하면서 “그런데 (강 교수는) 남북이 통일되고 사회주의 통일돼도 좋다고 한다. 나는 우리 아이를 꽃제비로 만들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지휘권 발동은 강 교수 풀어주라는 완전한 압력, 이 나라 법치국가 맞나”

한편 전 대변인은 전날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강정구 교수의 불구속수사를 지시하는 검찰지휘권을 발동한 것에 대해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또 한나라당은 천 장관의 해임건의안 상정을 유보한 게 아니라 자진해서 물러나도록 사퇴권고를 한 것이며 만일 물러나지 않으면 해임결의안을 내기로 결정된 상태라고 말해 지난번 윤광웅 국방부장관에 이어 또다시 장관 해임을 둘러싼 본회의 표대결이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했다.

전 대변인은 “학문의 자유도 좋지만 학문도 대한민국이라는 틀 안에서 해야 한다”고 밝힌 후 “그런데 대한민국의 뿌리 자체를 흔든 강 교수를 도와주기 위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법무부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천 장관이 처음 임명됐을 때 ‘검찰을 독립시키겠다’고 얘기했었다”고 지적한 후 “그런데 검찰이 구속수사가 맞다며 독자적 의견을 올리자 ‘구속하지 말라’며 정치장관으로서 눌렀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독립성, 중립성을 가장 보호해야 할 법무부장관이 오히려 검찰에 상처를 내고 일격을 가했다는 게 전 대변인의 생각.

법적으로 보장돼 있는 검찰지휘권에 대해 검찰총장이 저항하는 것을 독립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전 대변인은 “그것은 저항이 아니라 독립”이라고 응수했다.

그는 “왜 지금까지 검찰지휘권이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겠는가. 그만큼 (지휘권 행사가) 국민의 감정이나 우리의 법체계를 다 뿌리뽑는 엄청난 행동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 대변인은 이어 사회자인 김미화 씨에게 “(지금까지 검찰지휘권 발동을) 왜 안 했다고 생각하나. 한 번 말씀해 보라. 말하면 검찰총장이 다 순종해야 하는데 왜 안했겠나. 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연거푸 다그쳤고 이에 김 씨는 ‘사람들마다 다 생각이 다를 것’이라고 답변했다.

지금은 사퇴권고 한 것, 물러나지 않으면 해임건의안 낸다

전 대변인은 또 한나라당은 천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유보한 게 아니라 단지 사퇴권고를 먼저 한 것이고 물러나지 않을 경우 즉각 해임건의안을 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해임건의안이 결정됐다. 다만 우리는 천 장관이 자진해서 물러나길 바라기 때문에 먼저 사퇴권고를 한 것이다”고 말한 후 “천 장관이 절대 사퇴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즉각 (해임건의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 대변인은 이어 한나라당이 해임건의안을 취소하기 위해서는 “천 장관이 ‘강 교수 구하기’를 그만두고 검찰총장이 권력의 시녀라는 것을 공표하는, 불구속수사를 지시하는 지휘권 발동을 거둬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네티즌 “기본 예절 없고 진행자 무시한다” 비난 봇물

이날 전 대변인의 인터뷰가 방송된 뒤 이 프로그램의 게시판에는 전 대변인의 태도를 비난하는 네티즌들의 글들이 쇄도했다.

이영환 씨는 전 대변인이 인터뷰에서 “기본 예절도 모르고 진행자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했고 정지니 씨는 “전 국민이 듣는 생방송 중에 진행자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태도나 말을 못하게 자기의 일방적인 주장만 펼치는 안하무인격 인터뷰였다. 과연 그러한 사람이 거대 야당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인지 묻고 싶다”고 지적했다.

조성일 씨는 ‘김미화 씨가 못한 대답’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왜 지휘권 발동을 안 했는지 이유를 다그치던데, 전에는 지휘권을 발동할 이유가 없었다. 전화 통화로 명령하면 되는데 지휘권이란 거창한 법 장치를 사용하나”라고 밝혔다.

장세은 씨는 “어째서 학자의 사상이나 연구물이 논문을 통해서만 반영돼야 하나”라고 문제제기하며 “싸움하자고 부른 것도 아닌데 방송 게스트로 나와서 공격적인 어투로 말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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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논문은 되고 컬럼은 안되나요?” -김충환 “네”

 

 

손석희 “논문은 되고 컬럼은 안되나요?” -김충환 “네”
MBC 100분 토론 중간에 강정구 교수, 김충환 의원에 자료출처 요구
입력 :2005-10-14 12:57   최고다 (no1@dailyseop.com)기자
[기사대체: 2005-10-14 15:43]

14일 ‘강정구 교수 사법처리 논란’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MBC 100분 토론에서 참석한 패널들은 가시 돋힌 설전을 주고받으며 토론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날 토론회에서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강 교수의 불구속 수사를 지지하는 입장의 패널로,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과 이승환 변호사는 구속수사를 지지하는 입장의 패널로 참석했다.

과열 양상을 보이던 토론은 결국 특정인을 지칭하는 과격한 발언이 나오는가 하면 자료의 출처 시비까지 일면서 격론을 거듭했다.

논문은 YES, 칼럼은 NO, 논문을 기사화 하면?

▲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이 자신이 인용한 강정구 교수의 출처를 찾기 위해 자료를 뒤지고 있다. MBC 화면캡처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은 이날 토론에서 강정구 교수의 글을 일일이 인용하며 사법처리 가능한 경우와 불가능한 경우로 나눠 구속수사를 해야하는이유를 설명했다.

김 의원은 “강 교수의 논문은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국가에서 강 교수를 사법처리 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언론사에 기고하는 컬럼과 학생들에게 하는 강연은 사회적 파장이 우려되기 때문에 강 교수의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손석희 아나운서의 질문이 쏟아진 것은 이때부터.

사회를 맡은 손석희 아나운서는 김 의원에게 “논문은 위법이 아니고 컬럼은 위법이라는 말씀이신지요”라고 묻자 김 의원은 “컬럼의 경우 확실히 문제가 된다”고 밝혔다.

손석희 아나운서가 재차 "그러면 학술발표회에 논문을 냈는데 방송에서 그 논문의 내용을 보도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고 김 의원은 역시 "처벌해야한다"고 물었다.

이 후 손석희 아나운서는 의아한 듯 “학술발표회를 신문이 크게 다룬다면 그 경우에도 처벌 가능한 것이냐”고 거듭 반복해 묻자 김 의원은 “중대한 사안일 경우에는 그렇다”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끝내 인용 출처 못밝힌 김충환 “14일까지 밝히겠다”

이날 토론회에서 김충환 의원은 강정구 교수 글의 일부분을 토론 내내 인용하며 강 교수의 구속수사와 사법처리를 주장했다.

이에 강정구 교수가 결국 100분토론이 진행되던 중 제작진에게 전화를 걸어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에게 토론 내내 인용한 본인의 글에 대해 출처를 명확히 밝힐 것을 요구하고 만약 밝히지 못할 시 김 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김 의원이 강 교수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6 ·25는 통일 내전이며 김일성은 왕건과 같다’ ‘한국은 공산주의를 택하는 것이 옳았다’ ‘주적은 북한이 아닌 미국이다’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전쟁은 한달 안에 끝났다’ ‘미국은 4백만을 죽인 원수다’ 라는 부분.

김 의원의 인용이 끝나자마자 노회찬 민노당 의원과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즉각 출처를 밝히라고 말했다.

특히 노회찬 의원은 이 대목에서 언성을 높였다. 노 의원은 “잘못된 자료”라며 “책임있는 정당에서 어떻게 그런 왜곡된 자료를 가져왔느냐”고 따졌다. 이어 노 의원은 자료의 출처를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고 김충환 의원은 계속 서류를 뒤적여야만 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노 의원은 “김 의원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나도 똑 같이 가지고 있다”며 “김 의원이 못 밝힐 테니까 내가 밝히겠다”면서 “2시간 짜리 영화를 말할 때는 영화 전편을 보고 말해야지 5분만 보고 다 본 듯 말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노 의원은 김 의원의 발췌능력을 비꼬며 “무슨 5공 시대도 아니고...”라며 푸념섞인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이어 홍윤기 교수는 “사회과학을 하려면 ‘가치명제’와 ‘사실명제’는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 교수가 6.25를 통일전쟁이라 지칭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실명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의원은 토론이 끝난 다음날인 14일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강 교수의 글이 워낙 많기 때문에 아직 강 교수 측에 자료를 밝히지 못했다”며 “14일 오후에는 본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인용한 강 교수의 글의 출처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홍윤기 교수, 상의 무회장 발언 두고 “그 작자...” 흥분

한편 이날 토론에서 '강정구 수업 수강하면 취업 시 불이익 주겠다"는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김상열 씨의 발언도 다뤄졌다.

홍윤기 교수는 “김상렬 씨의 발언은 동국대 학생들을 겨냥한 신 연좌제”라며 흥분하면서 “그 작자”라고 표현, 토론 말미에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한편 노회찬 의원은 누가 진짜 범법자인가를 가려야 한다며 한 법조인의 말을 빌려 “강정구 교수의 수업을 듣는 것은 학생으로서 위법사항이 아니지만 범법을 저지르지 않은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행위는 위법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이번 강정구 교수의 사법처리 논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무조건 수사하고 감금했던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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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 다그친 전여옥 “지휘권 발동 왜 없었나 말해보라니까!” / 백만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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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서’ 뒤에 숨어 장난치는 동아일보

 

 

국민정서’ 뒤에 숨어 장난치는 동아일보
국민정서법의 서글픈 유전보다 더 슬픈 건 궁색한 언론의 초상
입력 :2005-10-13 11:57   문한별 편집위원 (mhb1251@dailyseop.com)
참 신기하다. 그놈의 '국민정서법'.

글자도 아닌 것이, 모양도 없는 것이, 오직 소리없는 공감으로만 존재하며, 법률보다 헌법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해 사사건건 모든 일을 간섭한다 하여 일명 '도깨비법'이란 이름을 얻기도 했는데, 바로 그런 까닭에 갖다 쓰는 사람에 따라 중국 전래의 변검 묘기처럼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변덕쟁이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타고 났으니....

12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들춰 보자. 1면톱을 장식한 기사가 <청와대, "강정구 교수 구속 신중해야"... 검찰에 의견 전달>이다. 요지인 즉슨, 청와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강정구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 문제와 관련해 검찰에 '신중한 수사'를 요구한 것은 '검찰의 독립'을 훼손하는 지극히 우려스러운 행태라는 것.

▲ 2005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4면에 실린 관련기사 

기사는 강 교수 구속에 반대의견을 피력한 몇몇 여권 인사들의 발언을 선별적으로 인용한 뒤, 그에 반발하는 일선 검사들의 항변을 비중있게 소개하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대목은 일선 검사들과의 회의에서 익명의 대검 간부가 내뱉었다는 다음과 같은 말. “검찰은 국민의 보편적 법 감정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운운.

풀어 말하면, 강정구 교수와 같은 빨갱이를 당장 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게 작금의 국민정서인데 검찰은 이를 어기는 일 따위는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국민정서법의 위대한 찬가라 할 이러한 내용은 이날자 4면 <검찰, 구속방침 정하고도 5일째 장고>라는 관련기사에서 거듭 되풀이된다. 육법전서 외에 국민의 정서까지 헤아려 주시는 고마운 검사들의 말을 들어 보시라.

"검사들의 수사 의견서에는 “이번 사건은 검찰 공안부의 존립 문제, 그리고 국민의 보편적 법 감정에 관한 문제란 점을 고려해 구속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표현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검사는 “구속 수사가 마땅한 것은 검찰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의 감정이 아니냐”며 “정치권은 정치권이고 검찰은 검찰”이라고 말했다...."

국민을 생각하는 검찰의 마음씀씀이가 보통이 아니다. 검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보편적 법 감정을 고려해 강정구 교수를 구속 수사해야 한다지 않는가. 그뿐 아니다. 어느 틈엔가 정체도 불분명한 국민 대다수의 감정이 하나님과 동급이라는 검찰에 맞먹는 지위에까지 수직 상승했다. "검찰 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의 감정"이라는 표현을 보라. 놀라운 댓구 아닌가.

여기서 잠시 영화 <백 투더 퓨처>를 흉내내 가까운 과거를 여행해 보자. '과거'라는 단어를 쓰기조차 민망한 불과 두달 전의 일이다.

▲ 2005년 8월 10일자 '광화문에서' 코너에 실린 문제의 칼럼 
지난 8월 10일자 동아일보 '광화문에서' 코너에 <판도라가 X파일 앞에 선다면>이라는 인디아나 존스 풍의 제목을 단 컬럼이 하나 실렸다. 컬럼을 쓴 이는 한기흥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 삼성총수 이건희가 돈을 미끼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언론·검찰을 멋대로 주물렀다는 내용을 담은 희대의 범죄극 'X파일'을 "까발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노래한 글이다.

그 글에서 한 차장은 X파일 공개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논의를 좁혀가고 있는 정치권의 움직임을 "여론에 더 큰 압박을 느끼는 것 같다"고 비판하면서 "하긴 ‘국민정서법’이 어떤 법보다 상위에 있는 게 한국의 현실 아닌가"고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흥분한 국민정서를 거스려 냉정을 촉구하는 지엄한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보시라.

"X파일 공개와 관련해 거론되는 국민의 알권리 이면엔 남의 행동을 엿보고, 엿듣고 싶어 하는 이상 심리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민의 알권리는 소중하지만 위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X파일의 내용이 아무리 궁금하더라도 호기심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법적 안정성과 바꿀 수는 없다...."

앞글에서 법 전문가인 검사들조차도 서슴없이 승인 추앙하는 '국민정서'가 여기서는 졸지에 천박한 '관음증'으로, 혹은 '법적 안정성마저도 허물 수 있는 위법하고 불온한 호기심'으로 매도된다. 돌연한 변신이다. 눈길 따라가기도 바쁜 초특급 변덕이다. X파일의 '냉탕'과 강정구 교수의 '열탕'을 바삐 오가는 신문지에 걸맞는 신기한 묘기랄까.

신문사의 편의에 따라 "민심은 천심"이라는 '하늘의 목소리'가 되기도 하고, '유혹자의 음성'에 홀린 "저열한 말초적 호기심"이 되기도 하는 국민정서법의 서글픈 유전이 새삼 눈물겹다. 내세울 게 없어 '국민정서법'에 기대 강정구 교수를 손가락질하는 궁색한 언론의 초상 또한.

국민정서는 말이 없고, 오직 신문지만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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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언론 구속 주장이야말로 헌법 정신에 위배”

 

 

보수언론 구속 주장이야말로 헌법 정신에 위배”
[특별기고] “공개적인 지휘서가 어떻게 정치적 외압인가”
입력 :2005-10-14 10:19   임지봉 건국대 교수(헌법학) 
강정구 교수 사건이 법무부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권 발동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애초에 차분하고 논리적인 토론의 화두가 되었어야 할 한 학자의 주장에 어설프게도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려는 시도가 있더니, 구속이 아닌 불구속 수사를 지시한 법무부장관의 적법하고 정당한 지휘권 발동을 야당과 일부 보수언론이 ‘정치적 외압’ 운운하며 저질 정치공방으로 변질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법무부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권 발동 조치는 그 ‘형식’에 있어 적법하고 정당한 것이다. 우리 검찰청법 제8조는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 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 감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검찰사무의 최고책임자인 법무부장관에게 일반적 지휘감독권을 주면서도, ‘검찰수사의 독립성’을 위해 구체적 사건에 대한 지휘감독은 수사검사에게 직접하지 못하게 하고 검찰총장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행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규정은 나름대로 정당한 입법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 헌법이 중요한 기본원리로 채택하고 있는 ‘권력분립의 원리’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간의 권력 분장과 상호간의 견제장치를 통한 균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기관내부에 있어서도 내부 조직간 업무 분장과 견제권의 행사를 기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즉,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검사동일체의 원칙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검사조직과 법무부장관은 다 같이 검찰사무를 관장하는 검찰기관이지만,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을 통한 지휘권 발동 조치를 통해 검사조직의 검찰권 행사가 적정한 것이 될 수 있도록 견제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정신이 바로 검찰청법 제8조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적법하면서도 정당한 법무부장관의 지휘권 행사를 두고 야당과 일부 보수언론은 헌정사상 처음있는 법무부장관의 수사간섭이라느니,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검찰조직을 보호해주어야 할 법무부장관이 앞장서서 검찰수사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훼손하려 하고 있다며 열을 올리고 있다.

일부 보수언론은 검찰총장이 조직보호의 차원에서 법무부장관의 지휘권 행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야당의원들은 법무부장관을 직권 남용 및 국민선동죄로 고발하고 해임건의안을 추진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놓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법무부장관의 지휘권 행사를 호도하여 강정구 교수 사건을 다분히 저질 정치공방으로 변질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주장대로 법무부장관이 검사조직에 ‘정치적 외압’을 가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법무부장관이 이처럼 문서에 의해 공개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사정권 등에서 곧잘 행해지던 종래의 관행처럼 비밀스럽게 검찰총장을 불러다가 불구속 수사를 강압적으로 지시했을 것이다.

원래 ‘정치적 외압’이라는 것은 이처럼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다반사고 그 때 효과도 가장 크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의 검찰인사 관행을 생각해보자. 법무부장관이라는 자리는 검찰총장의 승진코스 정도로 여겨졌고, 실제로 많은 검찰총장들이 법무부장관으로 승진해 올라갔다.

따라서, 검찰총장은 법무부장관을 자신의 미래 모습 정도로 여겼고,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은 오랜 검사생활 동안 선후배 검사로 지내면서 끈끈한 인적 커넥션을 형성한 동료집단이었다.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간의 이러한 인적 커넥션이 존재했기에 법무부장관의 의중은 이심전심으로 자연스럽게 검찰총장에게 전달될 수 있었고, 의사전달이 잘 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에는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 그야말로 법무부장관에 의한 효과만점의 ‘수사지휘’가 행해졌을 수 있었던 것이다.

종래의 이런 관행이 ‘정치적 외압’이다. 투명하게 공개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자체가 ‘정치적 외압’의 의도가 없었음을 반증하는 대목인 것이다.

법무부장관의 지휘권 발동 조치는 그 ‘내용’에 있어서도 적법하고 정당하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구속사유로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속의 기준은 법전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을 뿐, 유죄의 혐의가 인정되고 실형이 예상되는 사건에서 검찰이나 법원은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 경우에까지도 ‘구속수사’라는 칼을 너무도 쉽게 빼들었다.

이 점은 법무부장관의 불구속 수사 지시를 수사간섭이라 비판한 한 야당 국회의원의 말 속에서 오히려 너무도 명백히 드러나 있다. 검사출신의 그 국회의원은 “그간 법집행의 현실을 보면 유죄가 확실시되고 법원으로부터 실형이 예상되는 경우 구속수사가 관행으로 돼있다”며 강정구 교수처럼 유죄가 확실시되고 실형이 예상되는 혐의자를 왜 구속하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항변한다.

검찰 내부에서도 구속사안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게 개진되었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검찰 내의 분위기와 그릇된 관행 때문에, 검찰 스스로가 구속을 유죄의 예비선언이나 유죄판결의 선집행 정도로 인식했고 국민들도 ‘피구속자=죄인’이라는 오해를 갖게 되어 구속된 사람들을 은연중에 죄인 취급하는 경향을 낳았다.

이는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모든 형사 피의자와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되며 어떤 경우에도 죄인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우리 헌법상의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 피구속자는 ‘무죄추정’이 아니라 거꾸로 ‘유죄추정’을 받아왔던 것이다.

또한, 구속은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제한이기에 법률과 적법절차에 의해 필요부득이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강제처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지난 한 해에만 8만 5000명 정도가 구속될 정도로 구속이 남발되고 있다. 이웃 일본의 세 배가 넘는 구속 규모다. 이러한 구속의 남발은 분명 반헌법적, 반인권적인 공권력 남용이라 믿는다.

강정구 교수 사건에서 인멸할 증거는 없어 보인다. 이미 언론에 게재해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그의 글을 지금에 와서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지워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강정구 교수가 세 차례나 경찰의 소환조사에 응한 것을 보더라도 도주의 우려도 존재하지 않는다.

▲ 임지봉 건국대 교수(헌법학) 
따라서, 원래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규정한대로 법을 적용하면 불구속 수사가 옳은 것이니, 종래의 그릇된 관행대로 유죄나 실형선고의 예단을 갖고 ‘구속’을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이 바로 법무부장관 지휘권 행사의 핵심이다. 즉, 원래 제대로 된 법치주의국가에서 원칙으로 지켜져야 할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이제부터라도 철저히 지켜 나가라는 정당한 메시지를 검찰에 주문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불구속 수사’ 지시와 ‘수사 중단’ 지시는 다르다.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고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다가 유죄판결을 받으면 그 때 가서 구속될 수도 있다. 재벌이나 유력 정치인 등 돈있고 힘있는 이들에게만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지키라 주장할 자격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국민 모두에게 법이 정한 구속사유가 없으면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지키라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번 강정구 교수 사건을 보수 대 진보의 막가파식 세력다툼이나, 여당 대 야당의 소모적인 정치싸움으로 변질시키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니, 오히려 이번의 진통을 국민의 사상‧표현의 자유와 인신의 자유를 한 단계 발전시켜 대한민국이 진정 인권국가로 한걸음 더 성숙해가는 계기로 승화시켜 가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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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교수가 두렵나? / 한의사
강정구 교수를 사법처리하라!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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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 &quot;역사에 남는 일 했다고 자부&quot;

 

 

천정배 "역사에 남는 일 했다고 자부"
인터넷매체 편집국장 간담회에서 밝혀... "국회의 비판 두렵지 않다"
텍스트만보기   최경준(235jun) 기자   
한나라당이 강정구 교수에 대해 '불구속 수사' 지휘권을 발동한 천정배 법무부장관에 대해 자진사퇴를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천 장관은 "국회에서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두렵지 않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천 장관은 13일 저녁 인터넷매체 편집국장과의 간담회에서 "내일(14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국회 대표연설에서 나에게 사퇴하라는 등 많은 충고를 할 지 모르겠다"면서도 "국회의원 출신으로 국회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국회에서 말하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천 장관은 이어 "앞으로도 국회에 불려나갈 일이 많겠지만 내 생각을 제대로 소신껏 얘기하고 싶다"며 야당의 비판에 대해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검찰, 수사 지휘권에 당혹스럽고 언짢았을 것"

특히 천정배 장관은 이날 오후 김종빈 검찰총장이 수사 지휘권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 것에 대해 "검찰 입장에서는 (나의 수사권 지휘가) 당혹스럽고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기 때문에 기분이 언짢을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장기적으로 사법부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천 장관은 "검찰이 강 교수에 대해 구속하고 책임지겠다는 입장이었던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용인하든가, '불구속 수사' 지휘권을 행사하는 선택의 문제였다"며 "나는 평소 불구속 수사에 대한 소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권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결국은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중 누가 책임을 지는가 문제였다"며 "궁극적으로는 구속수사를 하든 안하든 국무위원인 법무장관이 책임을 지는 것 아니냐"고 말해 수사지휘권 행사에 대한 고심의 흔적을 드러냈다.

이어 그는 "단기적으로는 정치적 파장으로 퇴보나 역풍이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법부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법무부 장관 하면서 '천정배'가 역사에 큰 일을 한번 했다는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일부 검찰 내부의 반발에 대해서도 "국보법이나 강 교수 혐의에 대해 뭐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고, 불구속을 얘기한 것뿐"이라며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결은 남겨진 그들의 몫"이라고 반박했다.

천 장관은 특히 "나도 정치인이라 나름대로 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서 자기 생각과 소신을 바꾸거나 왜곡할 생각은 없다"며 "주어진 일을 제대로 수행해서 정치적 평가를 받고 싶다"고 강조했다.

천 장관은 이날 일부 보수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는 "일부 언론에서는 사설에서 '언제부터 법무부 장관이 이렇게 구속 수사에 대해 강력한 문제의식을 갖고 지휘권을 행사했느냐'고 지적하는데, 그렇다면 법무부가 과거 잘못된 관행에 계속 의지하라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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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교수, 구속사유 충족 단정 어려워

드디어 확인했다.

나는 구속 수사 사유에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말고 따로 뭔가 고려할게 더 있는지 알았다. 그런거 없다.

꼴통들아! 수사 안하겠다는게 아니다. 단지 불구속 수사하겠다는 것이다. 꼴통들아

 

법률상 다시 확인한다. 당연히 장관은 검찰총장 지휘할 수 있다.

법무부 장관은 검찰을 일반적으로 지휘·감독하고(검찰총장은 일선 검사들을 구체적으로 지휘한다),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만세!

 

 

강교수, 구속사유 충족 단정 어려워
헌법정신은 공안사건에도 예외 없다"
천정배 법무, 강정구 교수 '불구속 수사' 지휘
텍스트만보기   최경준(235jun) 기자   
[기사 보강 : 12일 저녁 8시30분]

▲ 천정배 법무부장관은 12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 대해 불구속 수사를 하도록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지휘함으로써 강 교수는 불구속 상태에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사진은 이날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강 교수.
ⓒ2005 오마이뉴스 권우성

강 교수 "반가운 일... 아직 안 끝났다"

강정구 교수는 12일 법무부가 자신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불구속 수사' 지침을 내린 것으로 확인되자 "반가운 일"이라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강 교수는 이날 저녁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수사지휘서를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보낸 것으로 확인된 직후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뜻밖의 소식이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 교수는 "검찰 수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만큼 앞으로도 변호사와 상의해 법적 대응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천정배 법무부장관은 12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 대해 불구속 수사를 하도록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지휘했다. 이날 오후 대검이 강 교수에 대해 '구속수사' 의견을 낸 것을 반려한 셈이다. 법무부장관이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에게 공식적으로 수사지휘를 내린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천 장관은 이날 김 총장 앞으로 보낸 수사지휘서에서 "이번 사건의 피의자 강정구에 대하여는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구속사유를 충족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할 것이므로 불구속 수사를 하도록 일선 검찰을 지휘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천 장관은 "우리 헌법에서는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규정하여 이를 최대한 보장하고 있고, 형사소송법에서는 헌법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특별히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피의자 및 피고인을 구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전제했다.

이어 "이런 정신과 기본 원칙은 공안사건에 대하여도 달리 적용되어야 할 이유가 없고, 여론 등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될 것"이라며 "검찰은 인권옹호기관으로서 이와 같은 헌법과 법률의 정신을 구현함으로써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인권을 옹호해야 할 중대한 책무를 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천 장관의 이같은 수사지휘는 검찰청법 제8조에 따른 것이다. 검찰청법 8조는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감독자이나 정치적 공무원(국무위원)이기 때문에, 검찰사무가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하도록 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전에 김종빈 검찰총장과 40여분간 통화

▲ 천정배 법무부장관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천 장관의 수사지휘에 따라 강 교수는 검찰로부터 불구속 수사를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대검 관계자는 "김종빈 총장은 검찰청법에 따라서 천 장관의 수사 지휘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날 오후 천정배 장관이 수사지휘서를 발송하기 앞서 김종빈 총장과 40여분에 걸쳐 전화통화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천 장관과 김 총장이 강 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 결정에 대해 사전에 조율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특히 천 장관이 강 교수의 신병처리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수사 지휘를 하고 나섬에 따라, 향후 강 교수에 대한 기소 단계에서도 천 장관이 수사 지휘를 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대표적인 국가보안법 반대론자인 천 장관이 강 교수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섬으로써 향후 검찰 수사의 방향에 귀추가 주목된다.

이에 앞서 강정구 교수는 인터넷매체에 대한 기고문과 토론회 등에서 "한국 전쟁은 북한의 통일전쟁"이라고 주장, 서울경찰청이 수사에 나섰고, 경찰은 지난 7일 강 교수에 대해 국가보안법 7조를 적용 '구속수사' 의견서와 수사기록 일체를 검찰에 제출했다.

이어 1500쪽에 달하는 수사 기록을 검토한 검찰 역시 이날 오후 법무부에 강 교수에 대한 '구속수사' 의견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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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개구쟁이 스머프’를 학살했나

 

 

누가 ‘개구쟁이 스머프’를 학살했나
유니세프, 소년병 재활기금 조성 위해 스머프 폭격하다
구본권 기자
▲ 유니세프가 스머프 원작자인 페요 가족의 동의 아래 광고기획사를 통해 만든, 소년병 재활기금 조성용 애니메이션. 평화로운 스머프 마을의 공동체에 폭격이 퍼부어진 뒤 꼬마스머프들이 울고 있다. 전체 동영상은 기사 아랫부분의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누가 스머프를 죽였나? 가가멜? 아니다.

세계 어린이들의 친근한 벗인 ‘개구쟁이 스머프’ 마을이 폭격을 받아 불에 타고 스머프들이 학살당하고 있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이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기 위한 TV 모금캠페인 광고에 인기 만화영화 캐릭터인 ‘스머프’를 등장시킨 것이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최근 벨기에 발로, 파란 피부의 스머프들이 폭격으로 학살당하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다룬 기사를 상세히 보도했다.

25초 분량으로 제작된, 유니세프의 스머프 애니메이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스머프 마을에 쏟아진 폭격…파괴된 공동체…스머트들의 울음

평화로운 스머프마을에 스머프들이 손을 잡고 캠프파이어 주변을 돌며 노래를 부르며 나타난다. 갑작스런 폭격이 시작되기 전까지 파란 새들이 날아가고 토끼들은 버섯 모양의 집들로 이뤄진 친숙한 풍광의 스머프 마을 주변을 돌아다닌다.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폭탄의 충격과 불길을 일으키는 폭발이 일기 직전에, 작은 스머프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혼란스런 모습이 이어진다. 뒤이어 불길에 그을린 채 찢어진 옷을 입은 아기 스머프가 폭격으로 엉망이 된 또다른 스머프들에게 둘러싸인 채 주저앉아 구슬피 우는 장면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전쟁이 아이들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지 말자”는 메세지의 자막이 지나간다.

짧지만 소름끼치는 이 애니메이션은 유니세프가 만든 캠페인 광고로, 다음주부터 세계의 여러 나라의 텔레비전에 방송될 예정이다. 벨기에TV는 10월초에 25초짜리 이 애니메이션을 저녁뉴스를 통해 먼저 공개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유니세프 벨기에지부로 하여금, 아프리카 부룬디의 소년병 출신 아이들을 위해 재활기금 7만파운드를 조성하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이 성인용 애니메이션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이 에피소드를 우연히 보게 된 어린 아이들은 공포에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스머프의 원작자 페요(1992년 사망)의 가족들에 의해 허가되었다. 유니세프와 스머프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IMPS는 이 애니메이션이 오후 9시 이전에 방송되지 않도록 했다.

벨기에 유니세프의 대변인 필리페 헤논은 “제3세계 분쟁지역의 고통받는 이미지로는 TV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힘이 없다는 것이 이런 충격적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논쟁의 여지는 많다. 전에 이런 식의 캠페인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동안 평범한 캠페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낮았다는 것을 학습해왔다.”

“스머프들이 팔과 머리를 잃은 진짜 전쟁과 같은 모습 그리려 했지만…”

이 캠페인을 기획한 광고대행사 퍼블리시스는 전쟁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일찍이 벨기에TV 시청자들이 ‘가장 행복한 장면’으로 기억하는 것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958년 10월23일 만화책으로 첫선을 보인 <스머프>를 선택했다.

이 캠페인을 만든 퍼블리시스의 줄리 라무로는 대행사의 애초안보다는 표현수위가 낮아졌다고 말했다.

“우리는 스머프들이 팔을 잃거나 머리가 사라져버린, 진짜 전쟁과 같은 장면을 그리려 했지만, 유니세프쪽이 ‘그건 안된다’라고 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스머프 공식 팬클럽으로부터도 잠정적인 승인을 받았다. 대변인은 “이 애니메이션이 일부 사람들을 각성시킬 것 같다. 애니메이션은 매우 스머프답지 않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은 뭔가 생각할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벨기에는 <땡땡>과 <럭키 루크>를 비롯해 <스머프>까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만화캐릭터들의 고향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 벨기에TV 스머프 동영상 보기: 40초 이후부터 애니메이션 방영

■ 스머프 홈페이지

■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사

<개구쟁이 스머프>는 어떤 애니메이션?

▲ 한 싸이월드 이용자(jojay)의 미니홈피에는 다양한 스머프 캐릭터를 캡처받아 놓았다.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개구쟁이 스머프>는 어린이용 만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안 메시지는 상당한 정치·사회적 함의가 깊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스머프에 담긴 정치·사회적 함의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국내에도 번역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마르크 슈미트)가 쓴 ‘스머프 만화의 정치사회적 주제’로 소개되었다.

이 책의 필자는 <개구쟁이 스머프>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우화로 풀이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생활체의 전형으로 독립적이며 토지도 개인소유가 아닌 공동체의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마르크스를 상징한다. 나이와 지혜로, 스머프들의 존경을 받는 그는 수염을 기르고 늘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를 떠올리게 한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마을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철저한 분업, 평등, 공동소유 ‘이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성인용 우화

스머프 사회는 철저하게 분업사회다. 이들은 각기 다른 직업과 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평등하다.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 중요하기는 하지만,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스머프를 탄생시킨 벨기에 애니메이션 작가 페요가 스머프를 다듬고 있다.(사진)

집단 내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인민복을 떠오르게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도, 사제 스머프도 없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고 두 번째는 스머프를 잡아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하지만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참조 :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마르크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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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개입안했으면 여운형 집권했을 것”

암살되지 않았으면...

이정도야 학자들에게 기본이지

 

미·소 개입안했으면 여운형 집권했을 것”
[전격인터뷰] “‘6·25는 통일전쟁” 강정구 교수 심경 토로
이본영 기자 이정아 기자
▲ 강정구
[관련기사]
“6·25는 통일전쟁” 등의 글이 문제가 돼 보수언론의 집중표적이 된 데 이어 구속 위기에까지 몰린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장과 심경을 털어놨다.

강 교수 입장은 한마디로 “분단과 전쟁의 한국 현대사를 학술적으로 접근하는데, (보수언론과 수사기관 등이) 자꾸 오늘날의 기준에서 몰역사적인 결과론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 체제를 편들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내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분단체제가 다행스런 것일 수도 있다”고까지 말했다. 자신의 분단과 한국전쟁에 대한 접근은 어디까지나 당시 상황의 객관적 전개에 기반한 것이지, 오늘날의 북한 체제를 추켜세우려는 데 본뜻이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11일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1시간30분간의 인터뷰에서 던져진 비판적 관점의 질문에 대해, 자신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북한 입장에서든, 남한 입장에서든, 유엔군 입장에서든 통일전쟁”

-최근 보수언론이나 수사기관이 문제삼는 여러 문장이나 발언 중 대표적인 것이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통일을 지상 과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북한이 선제공격해 일어난 한국전쟁을 합리화한다는 인상을 주는 면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6·25가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거나 나쁜 것이라는 가치평가가 아니다. 전쟁 전에도 북한은 민주기지론, 남한은 북진통일론을 주창하며 무력통일을 추구했다. 유엔은 1950년 10월7일 총회결의안을 통해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추인하면서 “한반도에서 통일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즉 북한 입장에서든, 남한 입장에서든, 유엔군 입장에서든 통일전쟁이었다는 얘기다. 그것을 북한 식의 사회주의적인 통일을 하자는 주장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렇게 뻔한 얘기를 가지고 사법처리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주류 종이신문이 그렇게 몰고 가서 그렇지, 과연 일반인들에게 그렇게 충격적인 표현인지 의문이다.




“학문한다는 진중권씨의 부화뇌동에 ‘미쳤구먼’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한 인터넷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통일전쟁론’을 언급하며 강 교수를 “아주 위험한 사람”이라고 했다.
=진씨는 진보적인 사람으로 분류되는데, 그런 역사적 서술을 전쟁하자는 의도의 표현으로 둔갑시켰다. 극우진영의 색깔몰이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학문한다는 그가 그러는 것을 보고 “미쳤구만”이라고 해 줬다.

-맥아더가 있어서 남한체제가 유지됐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강 교수가 그를 ‘원수’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겠나.
=맥아더를 원수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지나쳤다고 인정한다. 처음엔 ‘생명 박탈자’로 묘사하려 했는데, ‘은인’과 대비되는 말을 찾다보니 ‘원수’가 떠오른 것이다. 마침 맥아더 동상 허물기 논란이 일어, 60년 동안 구세주이고 생명의 은인이라고만 생각해 온 그를 재평가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했다. 논쟁을 통해 맥아더에 대한 ‘은인론’, ‘구세주론’, ‘영웅론’을 검증하자는 거였다. 그러자면 점령사령관으로서의 역할, 이승만과의 관계 등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 달 안에 전쟁이 끝났을 것이고, 사망자는 1만명 이하였을 것이다.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와 민간인학살이 겹치면서 사망자가 400만명에 달했다. 맥아더가 모든 한국인들한테 원수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사망자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맥아더를 원수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지나쳤다”

▲ `한국전쟁은 북한이 시도한 통일전쟁‘ 발언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강정구 동국대 교수 지난 4일 오전 옥인동 보안분실앞에서 3차 소환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제자들이 선물한 엽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연합)
-그렇다고 전쟁의 숱한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을 맥아더한테만 지우는 것은 적절치 않고, 오히려 북한이 침공을 하지 않았거나,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줄었을 것이라는 반박도 가능하지 않나.
=전쟁이 한 달 안에 끝났어야 좋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국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표현했지, 모든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맥아더를 논하다 보니까 미국 부분이 강조된 것이다. 중국의 책임을 따질 기회가 되면 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북한의 얼굴을 그리라고 해서 얼굴을 그렸더니, 왜 주체사상이나 개인독재 같은 발바닥은 안그리냐고 따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국을 비판했다고 해서 중국에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다.

-강 교수의 입장은 한국전쟁은 1948년 이후부터 진행된 남한 내 내전의 연장이라는 이른바 수정주의적 시각인가.
=꼭 무슨 시각을 들지 않더라도, 당시 역사가 그렇게 전개됐다. 1948년 2월 이후 1950년 6월24일까지 남한의 내전 과정에서 10만명이 죽었다.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에서, 지리산과 오대산에서, 또 38선에서 전투가 계속됐다. 난 한국전쟁이 1948년에 시작됐고, 6·25는 그런 한국전쟁의 부분집합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강 교수는 인터넷매체 기고문에서, 해방 직후 고압적인 내용의 맥아더 명의 포고문과 소련군 치스챠코프 장군의 포고문을 비교하며 미군의 점령군적 성격을 강조했다. 정치적 수사일 수도 있는 포고문을 가지고 당시 한반도 주둔군의 성격을 재단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은가.
=소련군도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본다. 미국은 직접적으로 군정을 실시했고, 소련은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넘겨줬다는 차이가 있다. 소련 입장에서는 동유럽에서 그랬듯, 그냥 조선인들한테 맡겨도 사회주의로 가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외세척결이 제일의 과제였다는 점에서, 미군이나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곧바로 철수했어야 한다고 본다.

“미국·소련 개입안했으면 김일성집권도 불가능…여운형 집권했을 것”

-해방공간이나 한국전쟁에서 미국이나 맥아더의 개입이 없었다면 결국 김일성이 지도하는 북한체제가 남한을 삼켰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가정 아닌가.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의 집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여운형 선생이 집권했을 것으로 나는 본다. 또 해방정국에는 김구 선생도 있었고, 김규식이나 안재홍 등 중도파들도 있었다. 사회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연립정권 형태의 정치체제를 향해 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해방 후 남한 민중의 77%가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게 당연했다는 논리 역시 지금의 일반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지 않나.
=1946년 미국무성과 미군정의 보고서 등은 여론조사 결과 등을 근거로 “조선은 공산화되기 쉬운 경제적 조건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 부분은 1988년 강만길 교수의 논문에 나온 것을 내가 89년에 재인용한 것이다. 만약 외세개입이 없고 조선사회가 스스로 결정했다면, 인민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근거들 중 하나를 거론한 것 뿐이다. 어떤 신문은 사회주의 지지가 70%고, 공산주의 지지는 7% 뿐이라고 반박했는데, 당시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또 공산주의가 탄압받는 분위기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해도 사회주의라고 답했을 수도 있다. 그게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조선 사람들이 원하는 식으로 했어야 한다는 게 내 시각이다. 그런 시각을 오늘날의 기준을 적용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몰역사적 결과론이다. 민주적 기준으로 봐서 다수가 원하는 길로 가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지, 지금 기준으로 잘됐다거나 잘못됐다고 한 게 아니다. 어제(10일) <미국의 소리>와 인터뷰하며, “만약 당시 여론조사 결과대로 갔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보다 나쁜 것이 됐을 것이다”고 말했다. 지식인으로서의 내 성격상 입도 뻥긋하기 힘든 북한체제가 더 힘겨울 것이다.

“해방공간 여론대로 갔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보다 나빴을 것”
“지식인으로 입뻥긋하기 힘든 북한체제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부분을 묻겠다. 한 신문에서는 강 교수의 부인을 인터뷰해 큰아들이 미국에서 법률회사에 다니고 있고, 작은아들은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쳤다고 보도했는데.
=반미하는 사람이 미국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식의 생각으로, 참 한심한 얘기다. 그렇다면 내가 미국에서 유학한 것부터 문제삼아야 하지 않나. 인터넷에는 심지어 내가 (사실과는 다르게) 타워팰리스에 산다는 글도 올라와 있다. 집사람과 함께 유학생활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란 큰아들은 내가 육군에 가라고 해서 육군으로 복무했다. 그러고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녔는데, 미국은 로스쿨을 다니는 과정에서 직장을 잡기 때문에 미국 회사에 취직했다. 작은아들도 큰아들처럼 군복무를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유학 등의 사정으로 부모와 오래 떨어져 살아 그런지,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다. 집사람은 그런 애가 적응을 잘 못해 사고를 당할까봐 카투사로 보내려고 했다. 나는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집사람 고집을 꺾지 못했다.

-강 교수는 현재의 주한미군을 점령군으로 보는가.
=점령군은 아니지만,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실체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작은아들 일은 부끄럽다.

“논문에 통일한국 체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여야 한다고 썼다”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이 강 교수를 둘러싼 논란을 언급한 뒤 ‘반시장경제적’ 강의를 들은 학생들에게 취업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동국대나 동국대 학생들이 도마에 오른 것은 미안하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사람이 내 강의를 들어봤는가? 파쇼적인 얘기다. 나는 1998년 학술지 <경제와 사회>에 게재한 논문 ‘4월혁명과 자주·민주·통일의 과제’에서 “통일된 한국의 사회경제체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돼야 한다”고 썼다. 좋아하든 않든, 이미 사회주의는 몰락했다. 또 북한도 개혁·개방으로 나와야 한다고 했다.

-이번 논란에 대한 심경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부터 이런 시련을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에 쓴 글은 지탄의 대상은 될지언정 사법적 잣대가 동원되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이제는 소모적이고 과거지향적인 게 아니라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 진통이 필요하지 않나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 폐지가 시급하다. <한겨레> 글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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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필화사건을 되돌아보며

개한민국 현수준이다.

 

6·25 필화사건을 되돌아보며
[특별기고] 통일전쟁론 사법처리, 국내-국제법과 배치되는 모순
입력 :2005-10-12 12:05   강정구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unikorea@cvnet.co.kr)
일주일 만에 빨리 걷기 운동을 하던 동네 야산에 올라갔다. 가을인데도 유달리 싱싱한 잎사귀는 여름을 연상시키고 풀냄새는 더욱 향기롭고 싱그러운 맛을 풍긴다.

오늘 내일 다가올지 모르는 불길한 굴레 때문인지 자연의 아름다움이 더 한층 생생하게 다가온다. 덕분에 울적하던 마음도 가시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릴 때 숲속과 풀밭에서 뒹굴던 까마득한 옛날 옛적을 떠올리게 되었다. 자유에 대한 솟구침일까 왜 갑자기 그 옛날로 돌아갔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곧 상상의 나래는 20여 년 전 박사논문을 쓰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그 때 남몰래 혼자서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오빠생각’, ‘두만강’, 황성옛터 등의 민족 애환이 담긴 노래를 부르면서 나를 달랬다. 한국전쟁 중의 세균전 자료와 일본 731부대에 의해 세균전 실험대상으로 희생된 조선 사람들을 연상하면서, 그 가운데 한 명이 행방불명된 사촌 형님이 아닐까 하는 가상을 해 보면서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해방인 줄 알았더니 또 다시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외세가 우리 역사를 난도질 한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더구나 이런 오욕의 역사를 오욕이 아니라 자랑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은 역사왜곡에 의분과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현대사 바로그리기’와 ‘통일 터닦기’를 학문적 소명과 정체성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 미래를 조용히 관조해 보았다. 쓴 웃음으로 내린 결론이 여러 가지 시련을 함께해야 되는 팔자였다. 이러한 전망에 유학후배 부인께서 왜 그런 짐을 자진해서 걸머지려 하느냐면서 안타까워 하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난다.

여러 가지 시련이야 어차피 팔자소관이지만 이를 둘러싼 온갖 허무맹랑한 혐의나 비방 등은 바로 잡아둘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또 많은 분들이 의도치 않게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도 상당한 것 같다.

하나,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미국에 배은망덕 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제기

조선 시대의 유림과 선비들은 비록 부자지간의 인연일지라도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하고 필요하면 사죄를 촉구하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쳤고 필자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이런 교습을 받았다. 더구나 참, 진실, 진리를 추구한다는 학문하는 사람까지도 조그마한 인연인 미국 유학에 발목 잡혀 미국의 문제점에 눈감게 되면 이 세상에 정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런 자세로는 왜곡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참모습은 결코 밝혀지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유학이라는 인연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와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때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고, 학문은 꽃이 피고, 우리 사회는 투명해지고 정의가 살아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친일민족반역자 아들딸들이 자기 부모와 조부모에까지 이런 엄격한 잣대를 대었더라면 시민사회 수준의 과거청산이 자발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을 해 본다면 이 문제제기가 얼마나 잘 못된 것인지는 분명할 것이다.

둘, 국민정서에 반하는 6·25통일전쟁론이라는 문제제기

학문적 결론은 객관적 자료, 타당한 방법론, 논리적 추론, 연구자의 양심 등이 종합·포괄화 되어 귀결되는 것이지 학자가 남의 눈치나 보면서 그들이 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권력의 간섭과 탄압, 국민정서라는 여론몰이, 돈과 명예 등을 초월하고 이들 간섭으로부터 굳건히 독립을 견지해, 곧 학문의 자유 속에서 귀결된 학문적 결론만이 값진 것이다.

참이나 진실은 결코 산술평균값이나 중간 값이 아니다. 이런 것에 구애되거나 국민정서에 맞는 학문만이 허용될 때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코페르니쿠스의 지적혁명도 불가능 했을 테고,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쟁도 정당화 되고 말 것이다. 또 국민정서는 수시로 바뀌므로 학문적 귀결은 국민정서의 변화에 따라 춤을 추듯 바뀌게 되는 이 엄청난 사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셋, 통일전쟁론의 찬양·고무성 문제제기

‘6·25는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내전’이라는 필자의 전쟁성격 규정은 남의 공식입장인 ‘6·25불법남침론’에서 남침을 인정한 셈이다. 이는 오히려 북의 공식입장인 남한의 북침에 대한 정당방위론을 부정한 셈이다. 이처럼 학문적 결과는 어떤 이해당사자에게 때로는 득이나 실도 되고, ‘찬양’도 되고 ‘이적’도 될 수밖에 없다.

학문적 결론은 객관적 자료 등에 의해 학문적으로 귀결되는 것이지 어느 단체나 특정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 만약 달라진다면 그것은 객관성도 설명력도 없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과학적 지식이나 학문이 아니다. 이는 진실과 진리를 배반하고 학자의 양심을 파는 것이며, 곡학아세해 지식인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자기부정이며, 학문의 존립기반 자체를 허무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국보법 7조의 찬양·고무라는 사법적 잣대는 원초적으로 학문의 자유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넷, 소영웅주의의 발로라는 문제제기

이번 필화사건이 소영웅주의의 발로라면 나의 학문 일생 전체가 소영웅주의의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밝힌 것처럼 박사논문을 쓸 때부터 나는 ‘현대사 바로 그리기’와 ‘통일터닦기’를 학문적 소명과 정체성으로 삼았고 이후의 학문적 궤적이 온통 일관되게 이 소명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현대사의 참과 진실을 은폐하고 남북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가로막는 주범인 냉전성역을 허무는 작업이야말로 현대사 바로 그리기와 ‘통일 터닦기’의 요체이기 때문에 여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성역허물기 이게 나의 학문일생이었다.

이 냉전성역은 지난 반세기 이상 극단적인 냉전분단체제 아래 남북이 서로를 원천적으로 적대·부정하여 상대방에 극단적인 덫 칠을 가하여 악마화하고 자기 것은 절대적인 선으로 미화하거나 신성시 해온 과정에서 형성된 불가침의 금기영역이다. 이에는 공식적인 단일 표준정답이 있어 일체의 다른 해석이나 평가는 비록 학문연구라 하더라도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어 옥살이나 죽음 또는 불이익을 강요당할 정도여서 냉전성역은 파시즘과 폭압 그 자체다.

이에는 6·25, 주한미군, 연방제 통일, 주체사상, 김일성, 김정일, 민족자주, 평화협정, 정통성, 항일무장 투쟁, 민간인학살 등이지만 6·25는 냉전성역 0순위로 성역 중에 성역이다.

냉전성역은 그 기반이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과 같은 맹목적 반공반북이데올로기다. 반(反)과학이기에 진실의 왜곡·은폐이고 반(反)이성적이며, 맹목적이기에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래서 남북의 진정한 화해, 협력, 평화, 통일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으며 학문사상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기본을 침해한다. 그래서 이 성역은 허물어져야 한다. 이성적이라면 응당 이 냉전성역 0순위인 6·25에 대한 필자의 냉전성역허물기를 색깔몰이 할 게 아니라 밀어주고 끌어줘야 할 것이다.

박사논문 때부터 여러 가지 시련과 굴곡을 각오한 이 같은 학문적 행위가 소영웅주의라면(물론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 학문공동체에 정말 이런 소영웅주의자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말 많았다면 나의 학문의 길은 훨씬 덜 외로웠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어이없는 일들은 벌써 사그리 지게 되었을 것이다.

다섯, 미군정 여론조사 ‘왜곡’의 문제제기와 역사평가

2005년 10월 3일(월) 2:59 <동아일보>는 아래와 같이 필자에게 포문을 열었다.

“강정구교수 ‘국민 다수가 공산주의 지지’ 발언 진위 검증”이라는 제목 아래 “▽광복 직후 실제로 공산주의 지지자가 압도적이었는가?=강 교수는 발표문의 16쪽 각주(脚註) 19번에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분명 남북 전체가 공산화됐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1946년 8월 미군정 여론국이 전국의 84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지지 세력이 무려 77%였고 자본주의 지지는 겨우 14%였다. 당시 조선 사람 대부분이 원하는 것이면 응당 그 체제를 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가 인용한 미군정 여론조사 결과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973년 펴낸 자료집에 실려 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강 교수가 조사 결과를 상당히 부정확하게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은 1946년 7월 서울 지역 1만 명에게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강 교수가 인용한 1946년 8월 조사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됨). 그 결과 ‘대의 민주주의’라고 응답한 사람이 85%로 압도적이었다.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계급 지배’는 5%에 불과했고, 과두제가 4%, ‘1인 독재’가 3%였다.

또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일부 자료엔 7%), 나머지는 ‘모른다’였다. 강 교수는 공산주의 지지율이 겨우 7%(혹은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여기에 사회주의 지지율을 합쳐서 당시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훨씬 더 좋아했다고 주장하는 논리의 비약을 한 것이다 ... 이처럼 여러 조사는 당시 남쪽 국민 사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권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 우선 이 여론조사는 서울대 민교협 발표문에서 각주에서 처리될 정도로 진부한 이야기였고 논문에서는 지엽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논문전체를 논하기보다 학계에서는 진부한지 오래인 각주 하나를 두고 너무 과잉반응을 보였다.

뒤에서 길게 인용한 필자의 1989년 발표 1990년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민족주체적 시각에서” 한국산업사회연구회편 <경제와 사회> 통권 7호 1990년 가을호 204~212쪽) 210쪽에서 필자는 그 출처를 각주9(아래 인용은 각주4)에서 밝힌 것처럼 1989년판 강만길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했다.

이후 1996년판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에 재수록된 위의 논문은 출처를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3> 104~105쪽’으로 고쳤고 잘 못 인용한 부분도(공산주의 지지율 4%를 7%로) 수정했다. 이처럼 이 여론조사는 필자가 1989년에 인용할 정도로 오래된 것으로 이번에 처음 인용하거나 새로운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2. 해방공간인 당시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큰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인식했다. 단지 조선공산당이 탄압받았듯이 공산주의의 경우 미군정의 탄압과 반공흑색선전 때문에 응답자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의도적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고 보기에 그 구분은 필자에게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물론 오늘도 일반인이 사회주의 자체를 막연하게 알고 있듯이 당시에도 응당 그랬고 또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차이 역시 잘 모르고 있었다. 이런데도 <동아일보>처럼 “당시 남쪽 국민 사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당시 반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높은 지지도를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3. 이 여론조사에서는 정치형태를 묻는 질문 항이 있었지만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집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필자 역시 <동아일보>의 최근 주장을 보고 이를 확인했다. 이 정치형태 질문에 대한 답항은 “가. 개인독재(민의와는 무관하게) 3%, 나. 수인독재(민의와는 무관하게) 4%, 다. 계급독재(타계급의 의지와 무관하게) 3%, 라. 대중정치(대의정치) 85%, 마. 모릅니다 5%”로 응답자의 85%는 ‘라. 대중정치(대의정치)’를 선택했다. 이를 두고 <동아일보>(2005.10.3)는

“ ‘대의 민주주의’라고 응답한 사람이 85%로 압도적이었다.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계급 지배’는 5%에 불과했고, 과두제가 4%, ‘1인 독재’가 3%였다. 또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일부 자료엔 7%), 나머지는 ‘모른다’였다. 강 교수는 공산주의 지지율이 겨우 7%(혹은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여기에 사회주의 지지율을 합쳐서 당시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훨씬 더 좋아했다고 주장하는 논리의 비약을 한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질문 항은 질문으로서 기본을 갖지 못한 것으로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답항 ‘라’의 대중정치와 대의정치는 동일하다고 보기 힘들고 오히려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마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답항을 억지로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답항으로 자격이 없는 질문항을 근거로 당시 조선 사람들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를 선호했다고 볼 수 없다.

<동아일보>는 더 나아가 답항 ‘라’의 원문인 ‘대중정치(대의정치)’를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대중정치와 대립될 수 있는 ‘대의 민주주의’로 자의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심과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것 같다.

해방공간의 여론조사를 해석할 때 유의할 점은 당시에는 ‘민주주의’란 결코 자본주의 옹호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트루만의 회고록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해방공간 남한 땅에는 두 종류의 민주주의가 있었다.

하나는 미국식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식 민주주의였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모두 다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는데 위의 답항 ‘가, 나, 다’ 는 모두 독재를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응답자 대부분은 응당 ‘라’ 답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공식적인 국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만을 보더라도 해방공간 민주주의는 우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4. 필자는 이 여론조사를 하나의 자료로 보았지 이 여론조사 결과라는 단독 자료 때문에 해방공간 당시 조선사람들 대부분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호했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뒤의 긴 인용문에서 서술된 것처럼 필자는 이미 1989년부터 여러 가지 주객관적 조건 때문에 “외세의 개입 없이 순수한 내적인 역동력에 의해서 조선사회가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더라면 그것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역사통로였다... 이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인민 민주주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고 결론지었다.

아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조선사회 전체가 사회주의화 될 객관적 요인으로는 사적 소유가 미미했던 경제토대의 특성, 계급구조의 불균형, 구래지배계급의 정통성 상실, 조선인 구지배계급의 경제적 지배계급에 국한된 제한성 등을, 주체적 요인으로는 노동·농민계급의 계급역량 성숙, 이들의 급진화, 좌익급진민족주의자의 독립운동의 헤게모니, 지배계급의 온정주의적 지배를 피지배계급이 극복한 점 등을 제시했다. 또한 국면적 요인이면서 촉진요인으로는 조선총독부의 건준 대상 정권이양, 해방이전의 소련군 진주 등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역사자료로는 1945년 초기 해방이전에 발표된 미 국무성의 조선정세보고서, 1946년 트루만 미 대통령의 특사로 남북을 방문한 Pauley 특사의 보고서, 위의 <동아일보>가 제시한 여론조사, 미군정청 각종 자료 등이었다.

주목할 사항은 1943년 중경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외교부장 조소앙이 당시 주중미대사관에 전달하자 미국무성은 그해 8월 2일자 보고서에서 “비록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좌익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비혁명적인 과정을 통해서 반(半)사회주의 경제를 제창한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석과 논증의 기조에 이 여론조사 결과가 일치했기 때문에 자료로 활용한 것이지 아무 자료나 활용한 것은 아니다. 또 이 여론조사를 활용했다고 해서 이 여론조사 결과라는 단독요인만으로 해방공간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지향성을 논증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해방공간의 사회주의 지향성은 종합적 분석과 논증의 결과이지 단순히 미군정 여론조사 하나로 내려지는 결론은 결코 아니었고 최소한 필자에게는 새삼스런 학문연구 결과도 아니었다. <동아일보>에 필자의 논지를 반박한 몇몇 학자들이 과연 이 1989년 논문과 이후 이의 연속인 필자의 논문들을 제대로 읽어 보고 내린 결론인지 의심스럽다.

5. 이 분석에서처럼 해방공간의 역사흐름이 사회주의 지향이었고 또 여론조사에서도 이것이 반영되었다면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당시의 역사지향이 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학자로서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든, 무정부주의든, 사회주의든 선택은 당시의 조선 사람에게 응당 맡겨져야 하는 것이지 외세가 개입할 성격은 분명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는 일제의 35년 식민지 통치로부터 갓 벗어난 시점이기에 민족자주 지향은 최상의 덕목이었고 목표였다. 바로 친일파 숙청이 당시의 최우선 과제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는 명확하다 볼 수 있다.

엊그제 10월 10일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와의 국가보안법 문제에 관한 인터뷰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때 필자는 아마 사회주의 통일한국에서 보다 지금의 남한에서의 나의 개인적 위상은 더 나았을 것이고 나에게 이로웠을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지만, 학자로서 이 개인적 기준에 따라 당시의 역사가 당연히 자본주의로 가야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처럼 개인의 이해관계, 오늘날의 기준에서 과거의 역사평가를 복속시키고(몰역사적 결정론) 가치를 개입시키면 객관적 역사평가는 불가능해지고 학문은 학문으로서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여야 한다.

6. 필자는 역사관에 관한 한 남북이 함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곧, 북은 ‘발생적 결정론’(genesis determinism)에 빠져있고 남은 '몰역사적 결정론'에 빠져 있다고 비판해 왔다. 북한의 발생적 결정론 역사관은 “북한의 처음이 좋았으니까 지금도 좋고 남한은 옛날이나 처음이 좋지 않았기에 지금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의 친일파 청산 등과 같은 대남 우위성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는 문제점을 북한의 역사관은 가지고 있다. 남한의 몰역사적 결과론은 “지금 현재가 좋고 대북 우위에 있으니까 과거도 좋았고 대북 우위에 있었다” 면서 과거를 미화하고 정당화 하여 역사를 왜곡시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조사 과정에서 강조했지만 이 몰역사적 결정론은 현재의 기준을 역사평가의 잣대로 삼기 때문에 현재를 언제로 삼느냐에 따라 역사평가가 들쑥날쑥 춤을 추게 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 몰역사적 결정론은 오늘날 남한이 거의 모든 면에서 북쪽에 비해 우세하므로 오늘의 남쪽 기준에서 해방공간을 평가해 역시 분단이 사회주의식 통일보다 잘 됐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서 1970년 초반까지 북한은 남한에 비해 경제역량이 높았고 자주성도 앞섰다. 이 때문에 4·19 당시 경제적 요인 때문에도 ‘통일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쳤다. 몰역사적 결정론에 의하면 1960년 당시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고 자주성이 높았기 때문에 해방공간 사회주의식 통일을 했어야 한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이처럼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평가할 것이 아니라 남북을 아울러 우리 모두는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여섯, 사상검증의 문제점

앞의 여론조사와 관련된 필자의 서술을 마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수언론들은 색깔몰이로 덫 칠을 가해 왔다. 논문이나 컬럼 어디에도 가치지향적인 언술이 없다. 학자로서 역사를 평가할 때 자본주의는 선, 사회주의는 악이라는 반공이데올로기를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친북한도 안 되고 친남한도 안 된다. 필자의 경우 남북을 초월한 친민족이 기준이고(이를 두고 응당 민족지상주의로 몰아서는 안 될 것이다) 친역사적인 것이 잣대이다.

남한의 공식적인 해석과 역사를 찬양일변도로 평가하지 않으면 친북과 색깔몰이로 낙인찍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이러한 필자의 학문적 기준과 잣대는 지금처럼 친북이나 친공으로 매도되기 일쑤다. 이렇게 학문·사상의 자유가 폭력몰이, 색깔몰이, 사법처리 등으로 원천적으로 제약될 때 자율성은 속박되고 이 결과 역동적 창조성은 녹슬고 말 것이다.

경찰조사도 가치지향의 문제로 연결시켜 진행되었다. 이에 필자는 굳이 아래의 논문을 제시해 사상검정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변화된 조건 속에 우리가 추진해야 할 통일의 방향에 관하여 시론적인 수준에서 논하겠다. 첫째, 통일 경제형태는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한 자본주의적 경제형태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중국형 사회주의를 포함한다. 이는 선택의 문제나 주관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데 따라 변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행사하고 있는 객관적 규정력의 산물이다.” 출처: 강정구 “4월혁명과 현 단계 자주·민주·통일의 과제”(한국산업사회학회, <경제와 사회> 1998년 가을호, 통권 39호 227쪽).

학문이 살아 숨 쉬는 사회가 너무나도 필자에게는 소중하다. 물론 대부분의 연구자에게 국가보안법은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연구주제가 연관이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사람에게 해당된다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족쇄는 용납될 수 없다. 냉전성역 허물기를 학문의 소명으로 삼고 있는 필자의 경우 왜 이렇게 소중한 것인지를 법정에서 밝힌 적이 있다.

냉전성역 허물기라는 학문지향에 대하여 법정에서 변호사는 “혹자는 피고인의 이러한 태도가 너무 비판적인데 치우쳐, 학문으로서의 객관성이 약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라고 물었다.

“저는 저의 학문이 객관적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학문적 연구결과가 객관성이 약한 것처럼 보이고 마치 학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저의 주 연구분야가 현대사, 통일, 북한이고 이 분야의 연구주제는 대부분 냉전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되었기에 이것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마치 학문이 아닌 것 같고 객관성이 덜한 것처럼 보이게 마련입니다. 대표적인 본보기가 한국전쟁입니다.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을 보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저의 학문연구 결과가 마치 객관성이 약한 것처럼 보이는 것 자체가 제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적 좌표인 민족, 민중, 비판 학문에 충실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진술했다.

일곱, 6·25는 불법 침략전쟁이기에 통일전쟁론은 성립될 수 없다는 문제제기

이 문제제기는 모순의 극치를 이룬다. 통일전쟁론은 전쟁주체자의 전쟁목표를 기준으로 한 전쟁성격 규정이다. 이에는 민족해방, 계급해방, 단순한 권력야욕(왕위쟁탈 전쟁이나 왕위계승전쟁), 민족통일, 지역통합, 종교 전파, 분단고착화, 징기스칸처럼 정복이나 영토 확장 등의 전쟁성격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따른 6·25의 성격규정은 1950년 10월 7일자 유엔총회 결의 376호처럼 통일전쟁, 북한의 규정처럼 조국해방전쟁, 남한의 북진통일론처럼 통일전쟁 등이 있을 수 있다.

대조적으로 침략전쟁은 국제법적 기준에 의한 전쟁성격 규정이다. 이에는 1950년 6월 15일과 27일 유엔안보리 결의 82호와 83호와 같이 평화파괴나 또 평화위협, 침략전쟁, 테러 등의 성격규정이 있을 수 있다. 위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6·25를 별개의 주권국가 간의 전면적 군사행위인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고 평화파괴(breach of peace)로 규정했다. 동시에 유엔은 북한을 별개의 주권국가로 승인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6·25는 한반도 내의 5·10선거가 실시된 지역에 한정해 합법성을 유엔총회로부터 1949년 10월 21일 인정받은 대한민국과 아직 주권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북한이라는 실체(국제법적으로는 반도단체) 사이의 내란, 곧 집안싸움인 것이다. 국제법 차원에서 내란은 무력행위 주체를 반도단체 수준에 한정할 때의 규정이고, 이 반도단체를 교전단체로 인정할 때 내전이 된다.

6·25의 경우 초기에 ‘동란’이나 ‘사변’으로 지칭했던 것은 동학란이나 농민반란 등과 같은 수준의 내란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당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2호에서 북한을 평화파괴자로 규정하면서 교전단체가 되어 내전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6·25가 침략전쟁이냐 아니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유엔의 승인이라는 국제적 기준에 의하면 이는 내전이지 침략전쟁일 수 없다. 그러나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권의 외교적 승인을 기준으로 하면 북한은 별개의 주권국가가 되므로 국제법적 기준으로 침략전쟁도 될 수 있다. 남한은 뚜렷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어쨌든 전쟁목표를 기준으로 한 통일전쟁 성격규정과 국제법을 기준으로 한 침략전쟁 규정은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양립가능하다. 곧 침략전쟁이면서 통일전쟁이 될 수 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독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침략했을 경우 이는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침략전쟁이다. 이처럼 6·25를 남한의 공식 규정인 침략전쟁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통일전쟁이나 민족해방전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침략전쟁을 통일전쟁으로 성격규정 했기 때문에 정체성을 위배했다는 등의 주장은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또한 이 필화사건에서 가장 우려스런 것은 사실논쟁을 이념논쟁과 가치논쟁으로 환원시켜 색깔몰이로 판결을 내리려 한다는 점이다. 필자의 학문적 귀결인 통일전쟁론이 틀렸다면 실증적 차원에서 남북지도부가 전쟁의 목표에 통일을 배제한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면 된다. 곧, 북의 민주기지론이나 남의 북진통일론이 통일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입증하면 된다.

또 무력이나 사회주의식 통일은 통일이 아니고 평화나 자본주의식만이 통일이라는 것은 기치논쟁이지 사실논쟁이 될 수 없다. 하나로 합치면 통일이지 누가하면 통일이 되고 다른 누가 하면 통일이 안 된다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지 논리와 현실은 아니다.

자본주의식 흡수통일인 독일통일만 통일이고 사회주의식 통일인 베트남통일은 아직도 통일이 안 되고 분단되어 있단 말인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베트남 사람에게 물으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사람이면 사람이지 백인만 사람이고 황인종과 흑인은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백인종이 황인종과 흑인종보다 우수하다는 인종차별주의라는 가치관이 따를 수는 있지만 이런 인종차별주의조차 흑인과 황인종을 최소한 인간으로는 취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김대중 전대통령과 수구의 대표격인 조갑제도 6·25를 신라통일과 같이 통일시도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사실 차원에서 통일전쟁이고 맥아더가 전쟁광이라고 본 것이지 ‘잘됐고 못됐고’의 가치논의는 하지 않았다.

실재 필자의 한국전쟁 성격론은 1993년 <역사비평> 여름호에 “미국과 한국전쟁”이란 논문 발표 이후 시대 흐름에 맞춰 수정·보완 작업이 연속적으로 이뤄져 전쟁성격 규정도 변화 발전되어 왔다. 이 논문에 대해 수 십 개의 우익단체들이 고발했지만 당시 공안당국은 이에 내사를 벌였으나 학문자유 침해 여지가 있다고 내사 종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 “미국과 한국전쟁” <역사비평> 1993년 여름호 계간21호,(195쪽 표2 ‘한국전쟁 5단계’는 민족해방전쟁과 조국해방전쟁 및 계급해방 전쟁으로 성격규정)
: “미국과 한국전쟁”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205쪽 표2 ‘한국전쟁의 5단계’에서 민족해방전쟁과 계급전쟁으로 규정)
: “한미관계사:38선에서 IMF까지” 강치원 엮음,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백의, 2000. (‘한국전쟁 5단계설’ 도표에서 65쪽 통일전쟁 처음 등장)
: “한국전쟁과 민족통일: 전쟁의 통일을 넘어 평화와 화해의 통일로” <경제와 사회> 48호 2000년 겨울호(233쪽 표1. ‘한국전쟁 5단계설’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민족해방전쟁, 통일전쟁, 분단고착화전쟁으로 성격규정 함)
: “통일과 한국전쟁” 강정구, <민족의 생명권과 통일>당대, 2002,(98쪽 표1. ‘한국전쟁 5단계설’ 역시 통일전쟁과 민족해방전쟁 및 분단고착화전쟁으로 성격규정하고 북한이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조국해방전쟁보다 민족해방전쟁으로 서술하고 있음)“
: “6·15평화통일시대 한국전쟁의 역사적 재조명”(인천통일연대주최 토론회 발표문, 2005년 6월 30일)
(위와 같이 통일전쟁, 민족해방전쟁, 분단고착화전쟁으로 성격규정하고 있음)


여덟, 통일전쟁론을 부정하기 위한 요건의 문제

‘6·25 통일내전론’을 국가보안법이란 법의 잣대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학문적으로 부정(否定)하려면 북의 국토완정론이나 남의 북진통일론이 전쟁목적에서 통일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차원의 실증적 역사자료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1950년 10월 7일자 유엔총회 결의안 376호를 폐기시켜야 한다.

이 ‘한반도 통일결의안’은 1950년 10월 1일 한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을 침공한 시점에서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결의안이다.

1950년 6월 25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2호는 6·25를 침략의 개념으로 규정짓지 않고 ‘평화파괴’(a breach of the peace)로 규정했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이 철수할 것만 결정 했다.

Determines that this action constitutes a breach of the peace,
Calls for the immediate cessation of hostilities;
and Calls upon the authorities of North Korea to withdraw forth with their armed forces to the thirty-eighth parallel. 출처: Resolution 82 Adopted by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June 25, 1950)


또 1950년 6월 27일자 유엔 안보리결의안 83호 역시 38선 이북으로의 북한군 철수만을 결의하고 이를 위해 군사적 지원을 하도록 결정했다.

Recommends that the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furnish such assistance to the Republic of Korea as may be necessary to repel the armed attack and to restore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in the area. 출처: Resolution 83 Adopted by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June 27, 1950.

이들 유엔안보리결의안이 유엔군의 활동을 38도선 이남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38선을 월선하려면 응당 유엔의 별도 결의가 필요했고 이게 바로 1950년 10월 7일자 총회결의안 376호다. 376호 결의안은 38선 이북의 침공을 명시적으로 승인하지 않고 권고사항 1항의 a, b, c 에서 한반도의 평화회복, 통일선거, 통일독립국가의 수립을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아래 인용처럼 권고했다.

1. Recommends that
(a) All appropriate steps be taken to ensure conditions of stability throughout Korea;
(b) All constituent steps be taken, including the holding of election, under the auspices of the United Nations, for th establishment of a unified, independent and democratic government in the sovereign State of Korea;
(c) All sections and representative bodies of the population of Korea, South and North, be invited to cooperate with the organs of the United Nations in the restoration of peace, in the holding of elections and in the establishment of a unified government. 출처: RESOLUTION ADOPTED ON THE REPORTS OF THE FIRST COMMITTEE, 376(v).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294th plenary meeting 7 October, 1950).


이는 유엔이 유엔군의 38도선 이북 침공을 통일전쟁으로 규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유엔은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고 ‘평화파괴’라고 서술해 내전(civil war)으로 규정했다. 남한의 공식적 주장인 불법 남침이라는 침략전쟁과는 배치된다. 이 때문에 <한반도 평화조약의 체결>(국제법출판사, 1993)에서 김명기 국제법 전공 교수는 36쪽에서 유엔결의안을 분석하면서 침략전쟁이 아닌 내란으로 해석했다.

“위 결의는 북한의 대남 적대행위가 ‘평화의 파괴’를 구성한다고 했고, ‘침략행위’를 이룬다는 표현은 없다. 이는 당시의 무력을 내란으로 간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침략행위는 국가 간에만 이야기 될 수 있고 국내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김명기,『한반도 평화조약의 체결』국제법출판사, 1993, 36쪽).

이처럼 유엔도 통일전쟁론으로 규정하고 있고 위의 김명기 교수같은 분은 평화협정이 맺어진다하더라도 유엔사령부가 해체될 필요가 없고 유엔군 명의로 미군이 계속 주둔할 수 있는 근거로 바로 이 유엔의 통일결의안 376호를 들고 있을 정도다.

대한민국은 엄연히 유엔가맹국이다. 유엔이 규정하고 지구촌의 대부분 학자들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고, 일반인도 실재 통일목적을 부정하지 않은 이 엄연한 현실에서도 이런 보편주의를 거절하고 국보법의 금과옥조에 따라 나 홀로 식의 통일전쟁 불가론을 고집하는 정신상태는 정밀 검진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아홉, 글로벌 시대와 국내법에 맞게 6·25 전쟁 성격론의 재고를

글로벌 시대를 맞아 6·25 전쟁성격 규정에서도 이제까지 남한의 ‘표준정답’이었던 침략전쟁론을 이제 국제법이나 유엔의 기준에 맞게 글로벌화 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법과도 일치시키는 법치주의를 지켜야 한다. 그 대안은 내전형식의 침공이나 통일내전으로 전쟁성격을 재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대로 국제법상 별개의 주권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면 침략전쟁으로 규정할 수 없다. 유엔은 50년 6월 25일과 27일 결의안에서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고 ‘평화파괴’라고 규정했고, 10월 7일 통일결의안 역시 통일을 전쟁목적으로 삼아 한 나라 안의 문제 곧, 내전으로 성격규정했다. 6·25이전에 유엔은 남한만을 38선 이남 합법정부로 승인했지 북을 별개의 주권국가로 승인하지 않아 침략전쟁의 성격규정 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국제법적으로 또 유엔의 규정에 따르면 6·25는 침략전쟁이 아닌 내전이다. 내전에서 전쟁주체자의 전쟁목적이 통일이었기에 통일전쟁이다. 국제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을 일방적으로 또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보편주의 원칙과 요즘 금과옥조처럼 들먹이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 설사 냉전기간에는 그랬다하더라도 이제 탈냉전-글로벌시대에는 이런 구각의 굴레에서 응당 벗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내법과도 상치된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규정하고 있다. 또 국가보안법에 의해 북한은 주권국가가 아닌 반국가단체로 판시되어 있다. 남한 법체계는 최소한 북한이 유엔에 공식적으로 가입한 1991년 이전까지는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고 불법적인 반국가단체였다.

국내법에 의하더라도 1991년 이전에 발생한 남북 간의 전쟁인 6·25는 별개 주권국가 간의 전쟁일 수 없기 때문에, 곧 주권국가인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 존재하는 반국가단체에 불과한 북한과의 전쟁이기에, 침략전쟁이 성립될 수 없고 단지 내전일 수밖에 없다.

군사평론가인 김성전 예비역 중령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보수 세력이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한다면 이는 북한을 반국가단체가 아닌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셈이다. 이는 보수 세력들이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을 위배한 것을 의미한다. 국가보안법을 엄밀히 적용한다면 이들은 모두 사법처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수 세력이 국내법을 어기고 6·25를 침략전쟁으로 보면서 통일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거나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김성전의 지적처럼 스스로 모순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국내법에 맞게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부정하면, ‘6·25는 내전이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통일전쟁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 경우 6·25를 통일내전이라고 학문적 결론을 내린 필자의 전쟁성격 규정과 완전히 동일한 주장을 펼치는 것이므로 필자에 대한 사법처리 요구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6·25 통일내전에 대해 사법처리 운운하는 이 땅의 일부 세력은 국제법이나 국내법을 초월한, 영어식 표현으로는 over and above either the internal or external laws= the lawless= outlaw인 셈이다.

“북한을 독립된 주권국가로 본다면 수구세력들은 북한이라는 실체를 국가로서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수구세력들은 통일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한 국가가 또 다른 국가를 통일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무력으로 통일해야 한다면 그것은 침략전쟁으로 국가를 몰아넣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구세력들이 북한을 독립된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전을 누가 먼저 일으켰건 목적이 통일이라면 통일을 위한 내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교수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출처: 김성전, “강정구 전에 수구세력부터 처벌하라!”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게시판, 2005-09-05 05:36:16 From : 221.145.82.104


이제 이런 모순된 자화상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더구나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더드 화를 밥 먹듯이 외치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말이다.

열, 마무리말

필자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맥아더 컬럼 들머리에 맥아더 동상 철거공방에서 폭력몰이와 색깔몰이는 이제 그만하고 냉정한 이성적 논쟁을 하자는 당부를 했다. 이를 비웃기나 하듯이 논증이나 설득이나 설명이 아니라 색깔몰이 일색으로 또 일부에서는 폭력몰이로 결판을 내고자 한다. 여기에 공안당국마저 사법처리 운운하고 가세하는 기막힌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올해는 해방과 분단 60년 환갑의 해다. 환갑은 지난 일생을 성찰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전환의 출발이다. 이번 필화사건을 마지막 소모적인 진통으로 마무리시키고 분단 60년에 즈음해 우리 남북 모두는 잘못된 지난날을 겸허히 반성하고, 시야를 남북 한 쪽에 고착시키는 외눈박이가 아니라 전 민족 차원으로 넓히고, 외세가 강제한 분단과 적대를 직시하고, 19세기 말의 각축전이 재연되고 있는 엄중한 오늘의 동북아정세를 남북이 함께 대처하고,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한 실천에 나아가기를 염원하고 촉구한다.

끝으로 의도하지 않게 강의에 차질을 빚고 대학 업무에 불편을 끼친 점 등 각종 사항에 대해 동국대 학생과 동국대학교 당국에 유감을 표한다.



유첨: 강정구,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민족주체적 시각에서” 한국산업사회연구회편 <경제와 사회> 통권 7호 1990년 가을호 204~212쪽

.......
해방과 동시에 조선은 역사전환기 또는 사회변혁기에 돌입한다. 그런 왜 이런 역사전환기를 맞지 않을 수 없었는가에 대해 구조적 요인과 국면적 요인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순수해방공간에서 조선은 일제가 남겨놓은 사회구조를 유산으로 받았고, 이 유산의 기초 위에 구성되었던 계급구조에 변동을 겪었고, 유산으로 받은 사회경제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의 순수해방공간의 조선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역사행로를 걸었던 것임이 거의 확실시된다. 즉 외세의 개입 없이 순수한 내적인 역동력에 의해서 조선사회가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더라면 그것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역사통로였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대략적인 개요는 ①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제를 일소하여 반봉건 착취제도를 근절시키고, ② 중요산업이나 기간산업 들을 국유화해서 독점자본주의 착취를 청산하고, ③ 경쟁자본주의는 육성하여 생산력 발전을 꾀하고, ④ 친일파를 숙청하고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사대주의도 배격하는 반제국주의 노선을 택하고, ⑤ 복수정당을 허용하고 표현·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⑥ 농민과 노동자 등 피지배계급의 경제적 이익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이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인민 민주주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각주1: 인민민주주의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민대중의 혁명적 정권으로 설명되어진다. 이는 “2개의 상이한 사회구조의 영속적 또는 공존적 형태는 아니면 자본주의적 요소를 순차적으로 제거하고 일소하기 위한 형태임과 동시에 장래의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발전・강화시키기 위한 정치형태이다.” 고희정 지음, 이남현 옮김, 『북한경제입문』, 청년사, 1988, 225쪽)

그럼 순수해방공간에서 왜 조선사회는 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했고, 또한 외세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구비되었던 것으로 판단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첫째로 지적해야 할 사항은 식민지로부터 전승한 경제적 토대가 사회주의 이행에 적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해방이 되는 시점에서 철도, 항만, 광산 등은 거의 100%, 다른 중요산업은 90% 정도가(공정 자본금 기준으로는 93%) 토착조선인의 소유가 아니라 일본인 또는 조선총독부의 소유여고, 농지의 경우도 거의 18% 정도가 일본인 또는 조선 총독부의 소유였다.

이 사실은 해방과 동시에 이들 중요산업의 90% 이상과 농지의 18% 가까이가 하루 아침에 소유주가 없는, 즉 임자 없는 재산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생산수단은 일제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민중을 착취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전사회나 국가의 공공소유화되어야 된다는 점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경제적 특성은 해방 후 활성화하기 시작한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이나 소작제의 실질적 와해가 확산되는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둘째, 해방공간과 동시에 식민지 패퇴라는 요인에 의해 초래된 계급구조의 불균형이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중요산업자본의 90% 이상이 일본인 소유였다. 이것은 독점자본이나 대규모자본은 일본인 자본가에 의해 장악되고 조선인 자본가는 거의 전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규모자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도적 자본가는 일본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데, 일본인이 패퇴한 순수해방공간에서는 계급구조상 자본가 없는 노동자의 형성이라는, 자본주의 계급구조상 불균형적인 계급구조형태를 띠게 되었다.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요인이 계급구조상으로 형성되었고 일부 지주와 소작인 관계도 이러한 모습을 띠었다.

셋째, 토착지배계급인 조선인 지주와 자본자의 대부분은 친일 행위로 인해서 지배 계급으로서의 정통성을 상실하여 피지배 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의 철저한 민족 차별정책과 지배전략에 의해 토착 조선인이 대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지극히 일부에게만, 친일행위를 한 경우가 허용되었다.

그래서 조선인 자본가는 지극히 수적으로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혔다. 기타 대부분의 자본가나 일부 지주들은 그들의 경제적 지위를 지속시키기 위해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친일 행위를 강요 받았고 또한 이에 순응하였다. 일본인 지배 계급의 와해로 생긴 지배 계급의 지배력에 대한 공백을 구래의 조선인 지배 계급이 메꿀 수 없었던 요인은 특히 조선인 자본가 계급의 저형성(underevelopement)과 친일 행위로 인한 정통성 상실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 식민지 통치기간 동안 조선인 구지배계급은 경제적 지배 계급으로서의 지위는 일본인 지배 계급과 공유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지배 계급의 역할은 부여받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과 동시에 정치권력이 곧바로 와해되고 그것을 계승할 정치적 지배 계급이 육성되지 않았기에 국가기구, 그 중에서도 경찰과 군대의 통제가 불가능해져 결국은 폭력수단의 독점이라는 국가 기구의 중요한 고유 영영이 상실되었다.

이상은 주로 경제구조와 계급구조에 관련된 객관적 요인에 치중하여 요인 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해방공간을 역사 전환기로 보는 것은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이 구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일본인 지배 계급의 위치를 계승해서 사회 통제를 수행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러한 객관적 조건이 변혁주체세력의 자동적인 형성과 역량강화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급이익이나 집단이익의 실현은 의식적인 조직운동과 실천운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직운동, 의식운동, 실천운동을 통해서 계급이나 집단 역량이 강화되고 이익실현을 위해 다른 계급과의 활발한 계급 투쟁을 전개할 때, 즉 주관적으로 변혁의 주체를 형성하고 실천할 때에 변혁기나 역사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다. 이제 주관적으로 계급 형성과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주체적 조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일제시대에 활발했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서 노동자·농민의 역량이 성숙했다. 특히 1930년대 공산당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가 자생적인 운동으로 전화한 적색 농민운동과 적색 노동운동 등은 커밍스의 해방 후 임시인민위원회의 분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해방 후 노동자 자주 관리나 소작제 철폐, 인민위원회에 의한 통치 지배권 장악 등을 수행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급진민족주의자들과 노동자·농민들 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노동자·농민이 급진화되었다. 급진민족주의자의 노선은 민족해방운동이 단순히 일본인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조선인 지배로 대처하는 사람바꿈식의 독립운동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와 수탈로부터도 해방되는 구조바꿈을 지향한, 즉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의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급진성이 노동자·농민들이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지방인민위원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의 권력 기반을 제공한 주요인이다.

셋째, 민족해방투쟁에서 1920년대 후반 이후 급진민족주의자들이 민족 개량주의자나 문화민족주의자를 압도하여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독립운동주체라는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고, 실제로 건국동맹 등의 기존조직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 조선 인민 공화국, 지방 인민위원회 등의 형성으로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미점령에 의한 반혁명과 반공산주의정책이 테러통치와 폭력에 기반하여 강력히 전개되지 않았다면 이들 급진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정치권력이 장악 및 통치되었음에 틀림없다.

넷째, 커밍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제식민지 기간 동안의 인구이동은 기존의 토착조선인 지주들이 종래의 가부장적 또는 보호자적인 전통관계로 소작 및 농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무너뜨렸다. 징용이나 징집, 고향을 등지고 일본, 북한, 만주의 탄광, 공업지, 농지 등으로 또 징집 및 징용으로 전쟁터에서 비정통적이고 비가부장적인 조직과 환경 속에서 생활한 이들 귀향인들은 더 이상 농민도 아니었고 또 집단 작업장에 배치되어 있는 정규 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어느 정도 급진사상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들이 해방 후 해외에서 귀환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의 인적 자원 동원 능력은 고양될 수밖에 없었다. (각주2: 이에 대해서는 브루스 커밍스 지음, 홍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참조 바람.)

위와 같이 주체적 요인을 살펴보았다. 이들 객관적·주체적 요소들은 순수해방공간을 역사 전환기, 즉 사회 혁명기로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변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원인변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혁명이나 변혁을 촉진시키는 촉진변수(reinforcing variable)의 역할도 중요하다.

주로 촉진변수의 역할을 한 국면적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총독부가 급진 민족주의 세력인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한 여운형 집단에게 해방정권을 이양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한민당 계열의 민족개량주의자인 송진우나 김준연 등에 해방정권 이양교섭을 총독부에서 제의했다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음모의 일환일 가능성이 놓다.

조선총독부는 급진민족주의자에게 행정권을 이양함으로써 조선민중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일본인의 안전을 어는 정도 기해보자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했고 이러한 조건에 가장 알맞는 조선인이 민족정통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 민족개량주의자에 대한 행정이나 치안권 이양은 조선 민중의 엄청난 분노와 반발을 야기하리라는 것을 총독부는 감안했음에 틀림없다.

치안행정권을 이양 받은 급진 민족주의자의 일환인 건준은 조선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했고 동시에 정치범, 즉 대부분의 민족독립운동가를 석방했고 치안확보를 위한 치안대의 조직 등 국가고유기구인 폭력사용권 등을 확보함으로써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수행할 기반을 재빨리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건준이나 나중에 창설된 조선 인민공화국은 전국 규모의 건준 지부, 지방 인민위원회가 비록 시민사회 내의 자생적 요인에 의해 창설되었다 하더라도 이들 지방조직의 구심적 역할과 지주의 역할을 함으로써 지방의 시민사회가 급속히 면혁역할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둘째, 45년 8월 15일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하기 이전 단계에서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조선 땅에서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행위를 전개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의 주목적은 물론 조선해방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민족 해방을 위해 직접 전투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장차 소련의 역할이 크고, 또 급진주의자의 활동 영역이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게 했다. 실제 북한의 경우 소련군의 전투 행위와 그 이후 주둔은 북한의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에 유리한 지형을 제공해주었다.

이제까지 열거한 주·객관적 및 국면적 조건에 의해 조선 사회는 급진적인 역사전환기를 맞았다. 이러한 내적인 역사 전개 방향에 대해서, 즉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해방된 조선이 나아갈 방향인 테로스(Telos)로 설정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나아갈 필연성을 확인하는 자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1945년에 작성한 미국무성 보고서는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용이한 조건을 제공할 것”과 “러시아 지원의 사회주의 정권이 한반도에서 쉽게 인민들의 지지를 획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각주3: U.S State Dept, Foreign Relation of the United States, 1945, V.6, 561~563쪽)

또한 1946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남·북한을 방문했던 폴리(Pauley)특사도 그의 보고서에서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공산화되기 쉬운 경제적 조건을 가진 나라라고 주장하면서 시민사회에서 일고 있는 이러한 급진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귀속 재산을 미국의 전리품으로 계속 확보하여 이들 귀속 재산이 인민위원회(공산당이라고 표현했음)에 귀속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46년 5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조선민중이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해방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보고 있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점령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반혁명, 반공산주의를 위한 테러통치와 이데올로기 조작을 수행한 지 9개월이 지난 뒤에 실시된 여론조사임에도 불구하고(즉 순수해방공간이 아니라 반혁명, 반공정책을 시행한 외세의 개입이 장기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자의 14%가 자본주의, 4%가 공산주의, 8%가 모른다, 70%가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비록 한정된 여론조사라 할지라도 응답자의 4분의 3이상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했다는 것은 순수해방공간에서의 역사추동력이 어느 방향을 지향했는가를 극명히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각주4: 강만길, “분단의 근본원인”, 『통일론 강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통일위원회 편, 1989, 중원문화 17쪽)

이와 같이 미군정의 자료 외에도 3년간 지속된 미점령군 군사통치에 관한 보고서 여기저기에서 이러한 급진운동인 급진성향이 팽배했음을 나타내는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순수해방공간의 역사전개방향을 가늠하는 좋은 지표는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지방인민위원회, 여러 중요 정당들의 강령을 검토해보는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집단의 하나인 김구계의 상해임시정부(이하 ‘임정’)의 건국강령만 하더라도 토지국유화, 중요산업 국유화, 무상교육 등 진보적인 정책을 천명했고 이를 검토한 미국무성은 임정이 “비록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좌익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비혁명적인 과정을 통해서 반(半)사회주의 경제를 제창한다”라고 평가했다. (각주5: U.S. State Dept, R & A No. 1028, "Recent Korean Documents Relating to the Korean Provisional Govemment in Chunking", Aug. 2, 1942, 4쪽.)

대부분이 구지배계급인 지주와 자본가로 구성되어 있고 친일·친미파의 소굴이었던 한민당을 제외하고 모든 우익정당들조차 비록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천명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고려할 때에 순수해방공간에서의 역사진로는 진보적 민주주의이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농지 개혁에 관한 한민당의 강령은 농지제도의 합리적인 재편성이라는 추상적이고,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이현령비현령식(耳縣鈴鼻縣鈴)의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정당들이 농지개혁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순수해방공간의 시대적·사회적 요구에 직면하여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정강 아닌 속임수 정강을 내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순수해방공간의 역사추상형은 사회주의 지향이라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이제까지의 논리에서 충분히 도출해낸 것 같다. 그러면 실제로 진행된 역사의 흔적은 어떤 것인지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실현 시킬 역량을 충분히 갖춘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가 미점령군의 본격적이고 성공적인 반혁명적·반사회주의 캠페인 이전에는 모든 조직을 압도하였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경험적인 자료들은 우리 현대사의 구석구석에서 너무나도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필자는 조선 인민공화국의 압도적 우세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 그리고 이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극우보수세력을 비교한 미군정의 자료를 간단히 인용함으로써 순수해방공간은 인공의 주도하에 진보적 민주주의로 또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역사추상형을 띠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그들(인민위원회)은 모든 수준에서 통치조직을 가졌고 실제로 많은 지역에서 노동, 농업, 산업, 경찰 등 여러 분야의 기관장을 포함하고 집행위원회를 통하여 실질적인 정부통치기능을 수행했다. 농촌지역을 광범위하게 답사한 후 언더우드 박사는 ‘인공’이 ‘남’조선의 전역을 통틀어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활동적인 정치조직이라고 기술했다.(각주6: History of The State Armed Forces in Korea, "Part Ⅱ, Korean Politics and People", p.11.)

비록 그들 좌익주의 강세가 자발적인가 또는 강제적 성격인가 하는 것은 추측의 문제이지만 분명한 사실을 이들 좌익집단들이 주로 인민공화국의 조직력을 통해서 남조선 인민의 다수를 대표한다는 것이다.(각주7: U.S Armed Forces in Korea, "G-2 Weekly Reports", No. 23,24, 돌베개, 『미군정보고서』 11권, 311쪽.)

비교적 잘 알려진 명사들이 ‘한민당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그 조직은 매우 약하고 층이 얇다. 아마도 머리는 크지만 몸뚱아리는 작은 거인과 같은 조직이 한민당인 것 같다. 아마 한민당은 미군사 정부와 밀접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각주8: “G-2 Weekly Summary", No.12, No.2, 돌베개, 위의 책, 11권,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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