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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탄생 65주년과 사망 25주년

 

 

존 레논 탄생 65주년과 사망 25주년

2005년은 존 레논(John Lennon) 탄생 65주년과 사망 25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입니다.

이를 기리는 존 레논의 베스트 앨범 '워킹 클래스 히어로(Working Class Hero)'가 10월 4일에 발매될 예정이며, 그의 고향 리버풀에서는 레논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멘딥스(Mendips)의 집에서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존 레논 탄생 65주년에 맞추어 발매되는 이 음반은 레논이 생전에 솔로로 불렀던 노래들과 미발표곡 등 38곡(2시간 30분)을 두 장의 CD에 새롭게 편집한 것으로, 미망인 오노 요코(Yoko Ono)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이 음반에는 그의 히트곡들인 "이매진(Imagine)", "러브(Love)", "해피 크리스마스(Happy Xmas-War Is Over)", "콜드 터키(Cold Turkey)", "워킹 클라스 히로(Working Class Hero) 등과 레논이 부른 벤 E. 킹(Ben E. King)의 노래 "스텐 바이 미(Stand By Me)", 그리고 1972년 레논이 뉴욕 메디슨 가든 콘서트에서 부른 비틀즈 라이브 버전 "컴 투게더(Stand By Me)"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리버풀에서 열리는 기념 전시회는 유년기의 집에서 발견된 유년기의 존 레논의 모습과 간니 복제품, 그리고 오노 요코가 선정한 레논의 유년기 그림 4점과 주일학교 출석표, 첫 여권 복사본, 전후 신분증, 그리고 수영 실력 증명서, 비틀즈 콘서트 포스터 등 유년기와 관련된 그의 유품들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맨딥스에 있는 존 레논의 유년기 집은 2002년 오노 요코가 구입해 문화보호협회에 헌납한 것으로, 이 협회에 의해 레논이 살았던 당시의 모습으로 새롭게 복원되어 2003년 3월 29일 일반에게 최초로 개방되었습니다.

존 레논은 이곳에서 이모 미미(Mimi)와 삼촌 조지(George)와 함께 1945년부터 1963년까지(5세에서 23세) 살았습니다.

존 레논이 성장한 멘딥스와 폴 매카트니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포슬린 로드(Forthlin Road) 20번지의 집은 10월 30일까지 수요일에서 일요일까지 개방되며, 입장은 가이드 투어와 미니버스로만 가능 합니다.

존 레논은 1940년 10월 9일 잉글랜드 리버풀에서 태어나 영국의 세계적인 4인조 록그룹인 비틀즈의 중심맴버로 활약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일본인 화가 오노 요코와 결혼하였으며, 1969년에는 암스테르담의 호텔에서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7일간의 '베드인(bed-in)'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20세기 전세계의 문화적인 우상이었으나 1980년 12월 8일 뉴욕 맨하탄의 집 앞에서 한 광적인 팬이었던 마크 채프먼의 총탄에 맞아 4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습니다.

<리버풀 여행 안내>


존 레논(John Lennon, 1940. 10.9 ~1980. 12.8)

존 윈스톤 레논(John Winston Lennon)은 1940년 10월 9일 아버지 프레드와 어머니 줄리아 레논의 아들로 리버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성장하면서 부모와 헤어져 삼촌과 이모 메리 스미스의 집에서 보내게 됩니다.

존은 여전히 밴조를 배우도록 보살펴준 어머니 줄리아와의 사이가 좋았으며, 후에 밴조에서 기타로 전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17세때 줄리아가 차에 치여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의 첫 밴드는 스키플(195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재즈와 포크가 섞인 음악) 그룹으로 그의 학교 뒤에 있던 쿼리 강둑의 이름을 따서 '채석공(The Quarrymen)'이라 불리웠습니다. 1957년 15세의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가 참여했고, 다시 1년 뒤에는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참여하게 됩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존은 리버풀에 있는 예술학교에 들어갔으며, 여기서 친구 스튜어트 섯클리프(Stuart Sutcliffe)를 만나게 됩니다. 섯클리프가 이 그룹의 베이시스트로 가입하였고, 여기에 새로 드러머인 페이트 베스트(Pete Best)와 함께 그룹명을 '비틀즈(The Beatles)'로 바꾸어 독일 함부르크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이 그룹은 악명높은 시내 홍등가 야간무대에서 미친듯이 연주하며 자신들의 실력을 연마하였고, 1961년 섯클리프는 다시 그림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그룹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있어 뇌출혈로 사망하고 이것은 존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줍니다.

리버풀로 돌아온 비틀즈는 시내 카번에서 공연을 게속했으며, 이어 시내에서 음반 유통업을 하고 있던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을 그들의 매니저로 고용합니다. 후에 영국 최대의 음반사였던 데카사에서 비틀즈의 오디션을 거부했던 일은 유명하며, 페이트 베스트 대신 링고스타(Ringo Starr)를 드러머로 영입한 비틀즈는 마침내 EMI사와 계약을 맺고 레코드를 취입하게 됩니다.

첫번째 싱글은 "러브 미 두(Love Me Do)"로 영국 차트 17위를 차지하지만 계속해서 "플리즈 플리즈 미(Please Please Me)"로 영국 차트 1위에 오르게 됩니다. 비틀즈매니아들이 탄생하였습니다. 1963년에는 연속 1위곡 앨범을 쏫아내는 가운데 존은 그의 첫번째 부인 신시아(Cynthia)에게서 아들 줄리안을 얻었고, 다음해에는 미국에서도 정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6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비틀즈는 세계적인 빅 밴드로 자리잡았고, 레논과 매카트니의 작곡 솜씨는 숨막힐정도로 빠르게 성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Martin)과 함께 "Rubber Soul"과 "Revolver"로 지적 음악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며 팝음악의 변수로 등장합니다.

비틀즈의 경력은 1967년 가상의 그룹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공개와 함께 최고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해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는 모습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레논과 일본인 여인 오노 요코(Yoko Ono)와의 사랑은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레논은 아방가르드 화가 오노 요코를 위해 끝내 신시아를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1969년에 결혼했으며, 신혼여행 도중에 존과 요코는 'bed-in' 시위를 벌이며 전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화이트 앨범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길을 걷던 비틀즈는 1970년 해산을 맞게 됩니다.

이 기간동안 존은 솔로로 활동하면서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평화를 외치고 사회의 억압과 모순을 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발표한 'Imagine'은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뉴레프트들에게는 찬송가처럼 여겨졌습니다.

두 커플 사이에는 신(Sean)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존은 아이가 다섯살 되던 해 긴 이별을 고하게 됩니다. 1980년 그가 새로운 앨범 'Double Fantasy'를 만든다고 발표한 후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집 다코다 아파트 앞에는 마크 채프먼(Mark Chapman)이라는 살인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엔 팬들의 자살이라는 슬픈 소식이 이어졌으며, 이후 센트럴파크에 모인 10만 추도인파는 10분간에 걸친 긴 묵념을 하였습니다.

레논은 요코에게서 난 아들 신과 신시아와 사이에서 낳은 줄리안에 의해 살아 남았습니다.

<존 레논 웹사이트 가기>


비틀즈(The Beatles)

영국 리버풀 출신의 4인조 룩그룹 비틀즈(The Beatles)는 1960년대의 음악과 시대상을 대변해주는 전설적인 그룹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맴버는 리드 싱어 존 레논(1940년 10월 9일생), 폴 메카트니(1942년 6월 18일생), 키타리스트 조지 해리슨(1943년 2월 25일생), 드러머인 링고스타(1940년 7월 7일생)로 모두 리버풀에서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레논과 메카트니의 만남으로 시작된 이 그룹은 처음에 "퀘리맨(Quarrymen)"으로 불리웠습니다. 나중에 해리슨이 가세하면서 그룹 이름을 '실버 비틀즈(The Silver Beatles)'로, 다시 1962년 링고스타가 가세한 후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비틀즈(Beatles)"로 명명하게 됩니다.

그들은 리버풀의 클럽(Cavern and Jaccaranda)에서 비틀스의 음악을 발전시켰으며,첫 음반인 "Love Me Do(1962)"와 영국 최고의 록그룹으로 만들어준 "Please Please Me"(1963)"를 발표했습니다.

1964년 발표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미국에서 "Beatlemania"를 만들면서 세계적인 그룹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투어에서 콘서트마다 팬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음반도 수백만장이 팔려나갔습니다. 그들의 첫 영화인 'A Hard Day's Night (1964)'가 발표되면서 이전에 록음악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에게까지 폭넓게 인정받게 됩니다.

비틀스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음악세계를 창조(주로 레논과 메카트니)하면서, 다른 그룹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그들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하게 됩니다.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어린이같은 "Yellow Submarine"과 사회성을 띤 "Eleanor Rigby"와 초기 팝 형식을 패러디하고, 새로운 전자음향, 첼로, 바이올린, 트럼펫, 기타와 드럼등을 가미한 다양한 노래들을 창조해냈습니다.

약간 실험적인 앨범인 "Rubber Soul(1965)"과 "Revolver(1966)"는 비틀즈 음악의 정점에 있으며, "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는 그들의 베스트 앨범들 중에서도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게 됩니다.

비틀즈는 1970년 그들의 마지막 앨범 "Let It Be"를 발표한 후 각자의 독립적인 활동을 추구하기 위해 해체됩니다.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은 뉴욕에서 한 광적인 팬에 의해 총격을 당하고 많은 팬들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망하고 맙니다.


리버풀의 비틀즈 투어

1960년대의 전설적 록 그룹인 비틀즈가 태어나고 성장한 항구 도시 리버풀(Liverpool)은 거리 전체가 온통 비틀즈의 체취로 넘쳐 납니다.

비틀즈 투어는 알버트 독(Albert Dock)에 있는 비틀즈의 박물관인 '비틀즈 스토리(The Beatles Story)에서 시작됩니다. 가장 많은 방문객들이 찾고 있는 곳으로, 비틀즈의 데뷔시절 공연 사진과 존 레논의 피아노 등 비틀즈에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비틀즈 지도(Beatles Map)를 구할 수가 있는데, 많은 비틀스 매니아들이 이 안내지도를 들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나섭니다.

매튜 거리(Mathew St.)는 60년대 초반 디스크 숍이나 펍이 줄지어 있었던 리버풀 사운드의 메카이며, 비틀즈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리버풀을 찾는 여행객들이면 누구나 들르는 곳으로, 무명 시절의 비틀스가 활동했던 캐번 클럽과 맞은 편 '명예의 벽(Wall of Fame)’의 존 레논의 동상을 비롯해 비틀스의 음반과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비틀스 숍과 갤러리, 레스토랑, 바들로 즐비합니다.

비틀즈 버스 투어의 출발지인 카스바(Casbah)에서 약 2시간 동안의 '비틀스 마술 같은 비밀여행(Beatles Magical Mystery Tour)'에 참여하게 되면 비틀즈의 어린 시절을 기억나게 하는 학교와 그들의 음악에 영감을 주었던 페니 레인(Penny Lane)이나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s), 그리고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의 유년기 집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이 투어는 매일 출발하며, 퀸 스퀘어(Queen Square)에 있는 여행안내소(오후 2시 10분)나 알버트 독의 비틀즈 스토리(오후 2시 30분)에서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투어는 메튜 거리에 있는 카번 클럽에서 끝납니다.

비틀즈 투어의 하일라이트는 런던의 애비 로드(Abbey Road)로, 마지막 앨범 "Let it Be"의 재킷 사진을 찍으면서 세상에 잘 알려진 'Abbey Road'의 횡단보도와 비틀즈의 거의 모든 곡이 녹음된 EMI의 Abbey Road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비틀즈 스토리(Beatles Story)

알버트 독에 있는 비틀즈를 기념하는 전시관이자 박물관으로, 1964년 그들의 연대기와 노래를 다룬 다큐멘터리 앨범 "The Beatles' Story"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1960년대 리버풀 4명의 소년이 어떻게 세계 정상의 팝 가수에 오르게 되었는지, 왜 이들이 이렇게 중요한 우상으로 남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비틀즈 전시관입니다.

4명의 비틀즈 맴버인 존, 폴, 조지, 링고의 함부르크와 리버풀의 초기 활동으로부터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18개의 테마로 구성된 비틀즈의 연대기와 자료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데뷔 시절의 공연사진과 그들이 사용하던 악기는 물론 첫 미국공연 때 이용한 항공기의 의자도 전시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존 레논이 ‘이매진(Imagine)’을 작곡할 때 사용했던 하얀 피아노와 조지 해리슨의 첫번째 기타도 볼 수 있습니다.

주소: Britannia Vaults Albert Dock Liverpool Merseyside L3 4AD

개관: 매일 10:00-18:00(마지막 입장은 폐관 1시간전). 12/25, 26 폐관
입장료: 어른 £8.99, 학생 £5.99

<비틀스 스토리 웹사이트 가기>

카번 클럽(Cavern Club)

1957년 1월 16일 재즈 클럽으로 문을 열었으며, 무명의 비틀즈가 1960년대 초에 292회에 걸쳐 공연을 했던 곳입니다.

1961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매일 밤 8시간의 연주를 했던 비틀즈가 리버풀로 돌아온 후 클럽에서 처음으로 연주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화려한 등극을 위한 긴 준비시간을 보냈으며, 1963년 8월 마지막으로 그들의 공연이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그 후 10년간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야드버즈(The Yardbirds), 킹크스(The Kinks), 엘튼 존(Elton John), 후(The Who),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 등 인기있는 그룹들이 이곳에서 연주를 갖었습니다.

이 클럽은 1973년 3월에 문을 닫았으며, 머시레일 지하철 건설로 건물이 헐리게 됩니다.

현재의 카번 클럽(Cavern Mecca로 불리움)은 같은 자리에 오리지널 벽돌을 사용해 1960년대의 오리지널 건물로 복원된 것으로, 1984년 4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맥주가 제공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맥주를 즐길 수 있습니다.

클럽에서는 대부분의 밤과 금, 토, 일 오후에는 생음악이 연주되며, 세계순회공연을 마치고 그들의 탄생지인 리버풀에서 공연했던 매년 8월에는 국제적인 비틀즈 주간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999년 12월 4일 이전의 비틀즈 맴버였던 폴 메카트니가 카번 클럽 무대에 돌아와 그의 새 앨범 "Run Devil Run"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주소: 10 Mathew Street Liverpool Merseyside L2 6RE 개관: 월~수, 11:00~18:00, 목 11:00~02:00, 금, 토 11:00~02:30, 일 12:00~00:30 전화: 0151 236 1965

<카번 클럽 웹사이트 가기>

리버풀 명예의 벽(Liverpool Wall of Fame)

메튜 거리에 있는 유명한 캐번 클럽 맞은편에 있는 벽입니다.

1952년 이후 리버풀에서 넘버 원 차트를 기록한 그룹들과 뮤지컬 주제 음악 등으로 수상한 가수 등 총 55명의 뮤지션들의 디스크와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벽은 정치평론가인 존슨(Arthur Johnson)과 필영(Phil Young)의 아이디어로 2001년 3월 14일 리버풀에서 "Allentown Jail"로 최초로 넘버 원 차트를 차지한 재즈 가수 리타 로자(Lita Roza)에 의해 제막되었습니다.

중앙 벽면에는 넘버 원을 차지했던 55장의 청동 디스크가 놓여 있고, 디스크에는 노래 제목과 연도, 가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중 비틀즈는 "Me To You", "Help!", "All You Need Is Love", "Hey Jude" 등 17회에 걸쳐 넘버 원을 기록했고, 이전의 비틀즈 맴버였던 조지 해리슨도 2회에 걸쳐 넘버 원 디스크를 이곳에 남겼습니다.

그 밖에 캔 도드(Ken Dodd), 실라 블랙(Cilla Black), 프랭키 고우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 소냐(Sonia) 등이 메튜 거리의 기념비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붉은 벽돌벽 앞엔 사색에 젖은 존 레논의 동상이 벽에 기댄 채 캐번 클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소: Mathew Street Liverpool Merseyside L2 6RE

메튜 거리(Mathew Street)의 비틀즈 숍(Beatles shop )과 갤러리(Gallery)

리버풀의 명소인 매튜 거리는 비틀즈가 그들의 초창기 시절에 음악활동을 했던 카번 클럽이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비틀즈 매니아들의 필수 코스이기도 합니다.

약 200M에 이르는 좁고 긴 거리 양편으로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한 바와 레스토랑, 기념품점 등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거리에 있는 비틀즈 숍(31 Mathew Stree)은 1984년에 문을 열였으며, 작은 캐릭터 상품에서 실제 사용이 가능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품이 비틀즈를 캐릭터로 하고 있습니다.

비틀즈 숍 위에 있는 갤러리에서는 공예가 부어맨(Klaus Voorman)과 여류 사진가 키르체르(Astrid Kirchherr.)의 존 레논의 그림과 비틀즈 사진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 갤러리는 1999년 6월 24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근처 스탠리 거리(Stanley Street)에 있는 "엘레나 리그비 동상(Eleanor Rigby statue)"은 폴 매카트니의 노래 "엘레나 리그비"에 나오는 가공의 여인으로, 1982년 12월 조각가 토미 스틸(Tommy Steele )이 비틀즈를 기리기 위해 리버풀 시에 헌납한 것입니다.

동상 안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네잎 클로버와 성경 한구절, 축구 양말 한 짝, 만화, 그리고 4편의 시가 들어 있습니다.

주소: 31 Mathew Street Liverpool Merseyside L2 6RE

<메튜 거리 웹사이트 가기>

카스바 커피 클럽(Casbah Coffee Club)

카스바 커피 클럽은 비틀즈의 오리지널 맴버였던 드러머 페이트 베스트(Pete Best)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커피 클럽으로 1959년 8월 29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개업 기념일 밤에는 드러머 없이 "쿼리맨(The Quarrymen)"의 연주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페이트는 1960년 비틀즈에 가입하기를 원했으며, 이렇게 해서 비틀즈의 오리지널 맴버가 구성되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페이트는 함부르크 시절 비틀즈의 오리지널 드러머(후에 링고 스타로 교체)였으며, 이들은 페이트 어머니가 운영하는 이 클럽에서 90회의 공연을 갖었습니다.

이 클럽은 아직도 오리지널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리버풀에서 아직까지도 변함없는 유일한 비틀즈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하층 내부 천정에는 폴 메카트니, 존 레논의 그림등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존 레논은 연주회가 끝난 후 이곳에 자주 들렀습니다.

주소: 8 Haymans Green West Derby Liverpool Merseyside L12 7JG 개관: 월,목,금,토 11:00~17:00

존 레논 & 폴 메카트니 유년기의 집(Mendips & 20 Forthlin Road)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가 유년기를 보내고 비틀스 맴버들이 만나 초기의 음악들을 작곡했던 1950년대의 테르사 하우스는 조인트 투어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맨딥스의 레논 유년기 집(Lennon's childhood home, 251 Menlove Avenue)은 레논이 그의 이모 미미, 삼촌 조지와 함께 살았던 곳으로, 앞의 베란다와 그의 침실에서 비틀즈 초창기의 여러 곡들을 작곡했습니다.

2003년 3월 29일 문화보호협회에 의해 개방되었으며, 2002년 미망인 오노 요코가 구입해 곧바로 이 협회에 기증하였습니다.

투어는 보호센터(Conservation Centre, 전화 예약:0151 233 2457 )에서 오전 10시 30분과 오전 11시 20분에 시작되며, 스피크 홀(Speke Hall, 전화: 0151 427 7231)에서는 오후 2시 15분과 3시 55분에 시작됩니다.

이 투어는 자주 변경되므로 전화로 먼저 확인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곳까지 바로 가는 차량은 없으며, 도보로도 불가능합니다.

주소: 20 Forthlin Road Allerton Liverpool Merseyside L18 1YP 입장료: 어른 £12.00, 학생 £6.00

리버풀 존 레논 공항(Liverpool John Lennon Airport)

2002년 3월 리버풀 시는 존 레논을 기리기 위해 공항 이름을 'Liverpool John Lennon Airport'로 변경했으며, 공항 모토도 그의 노래 "이매진"의 노래가사 중 "오직 위에 하늘만 있다(Above us only sky)"로 채택했습니다.

같은 해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을 가리는 BBC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존 레논은 8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공항 로고와 유명한 초상화는 존 레논이 그렸으며, 2002년에는 리버풀 출신의 조각가 톰 머피(Tom Murphy)가 제작한 2m 높이의 존 레논 조각상이 공항 내에 설치되었습니다.

이 인상적인 조각상은 존 레논이 중앙 승객 통로에 서서 체크인 홀을 바라다보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리버풀 존 레논 공항은 리버풀 시내 중심부에서 남동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500번 공항버스(Airportxpress)가 매 30분 단위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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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친절한 금자씨>는 들뢰즈의 것이다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텍스트만보기   정민호(hynews20) 기자   
천만 관객 시대가 알려주듯 영화는 이제 국민적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 어느 때보다 영화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진 때가 오늘이다. 더군다나 영화관의 스크린 위에 나타난 영화가 아니더라도 비디오나 TV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영화들까지 생각한다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국민의 문화행위 중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2005 효형출판
그런데 이러한 문화행위는 어느 정도나 그 값어치를 해내고 있을까? 양적인 팽창과 달리 질적으로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소도구적인 역할로 끝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보고 난 뒤에 곧바로 잊게 되는 무의미한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이왕주, 그 역시 이러한 의문을 품었을 게다. 그러나 그는 의문을 품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분야인 철학을 살려 영화들을 한 단계 높은 단계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영화와 철학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는데 그리하여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가 등장하게 됐다.

<디아더스>는 푸코, <친절한 금자씨>는 들뢰즈의 것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영화들을 낯익으면서도 낯설게 여겨지는 철학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디 아더스>는 푸코의 것으로, <친철한 금자씨>는 들뢰즈의 것으로, <슈렉>이나 <존 말코비치 되기>는 칸트의 것으로, <피아노>는 에리히 프롬의 것으로, <북경자전거>는 하이데거의 것으로 해석하는 등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철학을 만나고 철학을 말하면서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 영화와 철학의 만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가령 지은이는 <북경자전거>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을 찾아내는데 그 근거는 '부숴질 수는 있으나 패배할 수는 없는 자', 즉 '존재'라는 개념이 영화 속에 우뚝 솟아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대하는 지안과 구웨이의 서로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에서 자전거를 다루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 속 주인공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 구웨이가 자전거에 달려드는 그것은 자기 세계의 주인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강한 존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이데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물론 구웨이를 욕하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자전거에 보이는 그의 병적인 집착 그리고 한갓 도구인 자전거를 부순다고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돌로 해치는 행동에 거부감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물건과 생명은 그렇게 단순하게 부를 수 있는 고정된 명칭이 아니다. 생명 같은 물건이 있는가 하면 물건 같은 생명이 있다. 혹은 소유물로 위장된 존재가 있고, 존재로 위장된 소유물이 있다. 영웅은 먼저 그것을 준별하는 눈을 가진 자요, 또한 그것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용기를 가진 자를 말한다. 영화에거 구웨이는 그런 눈과 용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본문' 중에서

또 다른 영화 <디 아더스>에서는 푸코의 이름이 등장한다. <디 아더스>는 깜짝 놀랄 반전으로 유명했는데 사실 그 반전을 만들고 가능케 했던 일련의 서사는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된다. 어느 영화에서나 나와 타자의 관계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그것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디 아더스>는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보는 가치관에서 벗어나 '타자로 전락해 버린 나'를 다룸으로써 흥미로운 사실들을 제공해할 수 있었는데 이것에 대한 메시지들 또한 자연스럽게 푸코의 사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나비>에서는 '니체'이름 등장

마찬가지로 <트루먼 쇼>는 안주를 넘어서 떠나려는 열망을 표출하는 유목민의 갈 길을 다루기에 들뢰즈의 이름이 등장하고, <나비>는 삶의 시간을 과거나 미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서 찾는 것임을 보여주기에 '니체'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최상의 조건에서도 안나는 낙태를 선택했으나 최악의 조건에서도 유키는 분만을 선택했다. 한때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때로 진저리치며 잊고 싶은 기억들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까지 껴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을 넘어서는 초인' 사상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본문'중에서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의 이러한 과정들은 낯설면서도 대단히 흥미롭다. 영화가 인생살이를 말하고 철학 또한 인생살이를 기본 바탕으로 두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공통분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와 철학의 만남은 전문가들을 넘어 대중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허나 이왕주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영화와 철학, 그 절묘한 만남으로 영화를 보는 문화행위에 지적유희를 제공하고 그 안에서 철학은 목적 그대로 인생사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영화와 철학, 모두에게 숨결을 불어넣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철학과 영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까지 지적유희를 가능케하고 있다. 철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가장 친근한 문화행위를 통해 효과적으로 설명했으며, 가장 친근한 문화행위를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니 그 즐거움을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모든 것을 가슴 속에 품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에서 언급한 영화들로 시작하거나, 또한 책에서 지은이가 언급한 철학도서들로 시작한다면 강물에 몸을 맡기듯 그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으리라.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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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동 화백 &quot;청계천 도시형 개천, 자연이 없다&quot;

 

 

박재동 화백 "청계천 도시형 개천, 자연이 없다"
양재천 너구리 사랑 작은 음악회 열어... "사람과 동물의 교감 경이로운 일"
텍스트만보기   나영준(nsdream) 기자   
▲ 열창을 해 준 듀엣, '데자부'
ⓒ2005 나영준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귀에 익숙한 문구지만 어디까지나 광고 속 이야기다. 그러나 서울 양재천 부근 시민들에겐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저녁 무렵 산책을 나와 걷고 있노라면 먹이를 달라고 조르는 눈빛의 너구리 가족들과 종종 마주치기 때문이다.

7일 저녁 6시 양재천 수변무대 '너구리 사랑 작은 음악회' 현장. 낯익은 얼굴의 중년신사가 부드러운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박재동(53) 화백이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만화가가 아닌 너구리 지킴이로서 사람들에게 다가섰다.

이날 행사는 박 화백이 사회를 맡고 남녀혼성 듀오 '데자부'와 기타리스트 '고무밴드', 가수 신용택, 이성원씨, 가야금 연주가 이예랑씨 등이 힘을 보탰다. 또 공연 중간 중간 친화경적인 단편 애니메이션이 상영됐다.

우리 삶과 자연을 돌아보는 작은 축제

▲ 재미있고 푸근한 입담으로 지역주민을 즐겁게 해 준 박재동 화백.
ⓒ2005 나영준
"제가 사무실이 이 근처거든요. 저녁 먹고 산책을 하는데 너구리들이 나타나더라고요. 이 녀석들이 먹이를 주고 하다 보니 매일 나타나는데 참 귀엽더군요. 그래서 사무실 식구들이 사진을 찍어 여러 사람과 나누게 된 게 계기가 됐습니다."

마침 그 사진을 보게 된 기타리스트 '고무밴드'가 너구리 지키기 콘서트를 열자고 제의해왔고 소식을 들은 사람들 중 평소 환경과 자연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너도나도 와 주었다며 박 화백은 고마움을 전했다.

- 축제의 취지는.
"순수하게 너구리가 예쁘고 양재천을 사랑하는 작은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작은 축제라고나 할까요. 이런 기회를 통해 자연, 환경, 자기가 사는 곳 등 우리 스스로의 삶을 소중하게 돌아보는 자리가 되면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박 화백은 도시에 사는 야생동물들에게 먹이를 줄 것인지, 주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시기가 됐다고 진단했다. 단순히 한 쪽 주장이 일방적으로 옳다고 볼 수 없다고 한다.

"다 일리가 있어요. 먹이를 주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원래는 바람직하겠지요. 하지만 이곳에서 먹이를 안 주다보면 얘들이(너구리) 민가로 가서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개한테 물리기도 하고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가 나서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어느 한 쪽이 무조건 '맞다'가 아니라 생각하는 논의의 장을 열어 보자는 거지요."

- 서양의 경우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 원칙인 곳이 많은데.
"그것도 한번 생각을 해 봐야 해요. 그건 그 사람들의 생각이고, 그렇다면 개나 고양이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겠지요. 동물과 사람이 먹이로 친해지고 경계를 허물 수가 있거든요. 그렇게 서로 교감한다는 건 정말 경이로운 일이죠."

"청계천은 도시형 개천일 뿐, 자연이 없다"

▲ 안내판에 그려진 귀여운 너구리들.
ⓒ2005 나영준
그는 그런 관심 때문에 극장용 애니메이션 <오돌또기> 제작과 학교 강의 등으로 바쁘지만 자리를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이번 행사도 인간과 환경에 천착하던 그의 작품세계와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문득 얼마 전 복원한 청계천에 대한 그의 평가가 궁금해졌다.

- 복원한 청계천에 대해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자연과의 조화에 대한 의견은.
"전체적으로 물길을 낸 것에 대해선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전 문화를 제대로 복원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중요한 것은 강이라는 것은 울퉁불퉁해야 물도 천천히 흐르고 고기도 숨을 데가 있거든요. 그걸 길을 내듯이 똑바로 해 놓았으니…. 그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똑바로 하는 게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 물고기가 살 수가 없잖아요."

박 화백은 양재천도 근래 손을 본 곳은 도로를 내듯 일자로 뚫어버려 물고기가 못 사는 것은 물론 빠른 물살에 사고위험까지 생겼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어 "(청계천은) 시각적으로도 단조로울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도시형 개천을 보고 고향 정취를 찾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앞으론 나간 박 화백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왜가리, 이름 없는 들풀, 딱정벌레, 메뚜기, 여러 물고기들 모두 반갑습니다. 양재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구름 속에 가려진 달과 별을 느끼는 이런 날이 있어 기쁩니다. 그럼 '너구리 사랑 작은 음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비가 그친 후 다소 쌀쌀한 날씨, 스무 명 남짓한 이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찾아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곧 이어 많은 이들이 동화 같은 그의 이야기에 이끌려 발길을 멈췄다.

"얼마 전 밥먹고 산책을 나왔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앗, 저것봐라!'고 하더군요. 너구리였습니다. 꼬마 너구리가 살짝 숲에서 나왔다가 싹 사라지더군요. 요 꼬마 녀석들이 처음엔 세 명이었다가 먹이를 주니까 네 마리 다섯 마리, 나중엔 열두 마리까지 늘어나더군요. 한 가족이 모두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도 도망을 안 가더군요. 얘들이 그새 많이 컸습니다. 이 녀석이 이젠 중학생쯤 되겠군요. 참, 초등학생도 있답니다."

그렇게 지역주민 모두 너구리 가족 이야기를 통해 천일야화의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어 멋진 노래가 울려 퍼지고 통기타와 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이 물을 타고 흘렀다. 공기는 맑았고 자리에 모인 이들은 천천히 가을밤의 향기에 취해 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그가 사랑하는 너구리 가족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 쌀쌀한 날씨에도 많은 지역주민이 함께 했다.
ⓒ2005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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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에는 청계천에 오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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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41년 감옥생활은 '가혹했다'?

우리와는 멀리만한 프랑스 선진국이다. 경제대국만이 아닌...

 

 

그에게 41년 감옥생활은 '가혹했다'?
[해외리포트] 프랑스 전대미문 아동살해범 뤼시앙 레제 출소 '파문'
텍스트만보기   박영신(jocaste) 기자   
"나는 충분히 죄를 뉘우쳤다. 사회로 돌아가면 건실한 소시민으로 살 것이다."

가석방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관들 앞에 선 무기수 레드. 하지만 간절한 호소에도 그의 요청은 번번이 묵살된다. 그렇게 40년이 흐른 어느 날, 이제는 자유에 대한 의지도, 어쩌면 삶에 대한 희망마저도 가물가물한 모습으로 심사관을 마주한 레드.

그에겐 더 이상 이들을 설득할 의지도 희망도 없다. 그 순간 레드의 서류에 힘차게 찍히는 도장, 가·석·방! 영화 <쇼생크 탈출>(1995, 프랭크 다라본트)의 한 장면이다.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던 이 영화에서 무기수 레드를 연기한 것은 실력파 배우 모건 프리만이었다.

이제 현실의 레드가 감옥에서 출감했다. 현실의 레드가 감옥에서 보낸 세월은 41년.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을 통틀어 최장기수로 알려진 뤼시앙 레제(68)는 1964년 프랑스를 공포에 떨게 했던 전대미문의 아동살해범이다.

유럽 최장기수 41년만에 출소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

▲ 프랑스 최장기수 뤼시앙 레제의 출소를 전하는 <프랑스2> TV.
지난 3일 0시가 조금 지난 시간, 결코 움직일 것 같지 않던 두터운 철문이 열렸다. 뤼시앙 레제가 장장 41년만에 감옥 밖의 공기를 호흡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철창 밖 레제를 맞이한 것은 경찰의 철통감시 아래 허용된 1개의 TV채널과 1개의 일간지가 전부였다. 여론의 동요를 우려한 불가피한 조처이기도 했지만 '조용히 세상으로 복귀하고자' 한 레제의 주문이기도 했다.

1984년부터 레제의 옥바라지를 도맡아온 뤼시앙 베르나르의 자동차가 나타났고 레제가 올라탔지만 밖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종이상자와 가구들로 채워진 베르나르의 자동차 속에 레제도 가구 일부처럼 몸을 숨겨야 했던 것이다. 입양한 5명을 비롯 총 8명의 자녀를 키워낸 전직 제빵사 베르나르의 자동차가 향한 곳은 프랑스 북부 인구 2400명의 작은 마을 랑다. 여기서 레제는 베르나르 부부와 함께 기거하며 지역 적십자센터의 자원봉사자로 활동, 극빈자들을 위해 음식물과 옷가지들을 배급하게 된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 TV채널 <엘쎄이(LCI)>의 카메라를 통해 전파된 레제의 첫 마디였다. "나와 감옥 사이에 차이는 없다"거나 "자유와 나는 같은 것"이라는 등 냉소적인 선문답으로 일관한 레제의 자기애적 태도는 41년의 긴 세월에도 녹슬지 않은 듯 보였다.

41년 전 레제의 손에 죽어간 어린 뤽의 어머니 수잔 타롱은 그의 석방에 유감을 표하기는 했으나 최대한 말을 아꼈다. "종신형 선고는 거짓말이었나?" 레제 석방 며칠 전 <프랑스2> TV를 통해 정부 당국을 원망하는데 그친 수잔 타롱은 그러나 레제가 혹 자신의 이야기를 엮은 저서를 출판하는 일만은 막아줄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

1979년부터 석방청원 자격을 갖게 된 레제는 지금까지 13차례의 가석방, 3차례의 대통령 사면청원을 법원에 제출했으나 매번 기각됐다. 올해 7월 다시 14번째 석방청원 제기. 마침내 지난 8월 31일 두에 관할 법원이 조건부 석방을 결정함으로써 사회의 공기를 호흡하게 됐다. 그러나 앞으로 10년간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거주지역인 빠 드 깔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등 까다로운 규율을 따라야 한다.

샤를 드골 대통령이 백내장 수술을 받았고 저니 홀리데이가 한창 인기를 끌었다는 게 레제가 기억하는 프랑스의 전부였다. 레제가 복역하는 동안 프랑스 대통령이 다섯 번 바뀌었고 17명의 총리가 내각을 거쳐 갔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아동 살해범들이 교도소로 흘러들었고 상당수가 20여년의 복역을 마친 뒤 출감했다. 그렇다면 레제의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41년 전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동살해, 그리고 39일간의 숨바꼭질

1964년 5월 27일 이른 아침 프랑스 에손 지방의 베리에르 숲에서 어린 아이의 사체가 발견됐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파리 8구 경찰서로 이브 타롱이라는 남자가 찾아와 자신의 11살 된 아들 뤽이 실종됐다고 신고했다. 실종된 아이와 발견된 사체의 인상착의는 정확히 일치했다.

이어 그날 저녁 익명의 전화 한 통이 라디오 <유럽1>의 데스크로 걸려왔다. 마리냥 3가에 세워진 자동차 앞창에 끼워둔 쪽지를 회수하라는 것이었다. "베리에르숲 사건. 뤽의 아버지가 아이의 몸값을 거절했고 오전 3시에 나는 아이의 목을 졸랐다. 이것은 다음 유괴를 위한 경고다. 몸값 아니면 죽음!"

다음날인 28일 <아에프페(AFP)> 통신사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뤽의 유괴범이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정보를 준다…." 그 정보는 뤽의 웃옷을 버린 장소였다.

이같은 쪽지는 6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 라디오로, 신문으로, 경찰서로 심지어 내무부로까지 무차별적으로 배포됐다. 차례로 순번이 매겨진 쪽지의 발신자는 'XXX'였다.

6월 2일, 뤽의 장례식에 분산 배치된 경찰은 장례식 참가자들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했다. "장례식은 완벽했다. 참가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다음날 경찰을 비웃듯 도착한 새로운 쪽지, 그리고 이때부터 'XXX'라는 발신자 서명은 '교살자'로 바뀌었다.

지하철역 벤치나 파리교통공사(RATP)의 분실물 보관소 등이 교살자가 애용한 '숨바꼭질'의 주무대였다. 신문 전단지에 끼워진 '벅스 버니의 모험' 광고에서는 손으로 직접 휘갈겨 쓴 글이 발견되기도 했다.

정신병원 간호사 뤼시앙 레제가 범인이다!

▲ 프랑스 최장기수 뤼시앙 레제의 출소를 전하는TF1 TV.
"정면을 보고 후두 부분을 엄지손가락 두 개로 누르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나는 뒤에서 단지 손가락 네 개만으로 목을 졸랐다. 시간이 좀더 걸렸다."

대다수 언론의 1면을 장식하기 시작한 '교살자'는 점차 '썩어빠진 사회'를 힐난하거나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가 행한 고문 등을 고발하는 등 까탈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거나 혹은 이미 저질렀다고 협박하는 '교살자'의 쪽지 내용은 갈수록 잔인해졌다. 6월 10일자 쪽지는 뤽의 아버지 이브 타롱을 겨냥했다.

"고통스러운 사실을 상세히 알려주마. 아이의 목을 조르다 멈칫한 순간이 있었다. 손가락에 쥐가 났기 때문이다." '교살자'는 자신이 주도하는 숨바꼭질을 '술래'가 따라잡지 못한다며 간혹 역정을 부리기도 했다. 쪽지가 발견되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6월 26일, 뤼시앙 레제라는 이름을 가진 빌주이프의 정신병원 간호사 한 사람이 자동차를 도난당했다며 파리 앵발리드 경찰서에 모습을 드러낸다. 7월 1일 다시 경찰서를 찾은 남자는 '피로 얼룩진' 자신의 자동차를 되찾았다고 했다. 같은 날 저녁 '교살자'는 <라디오-뤽상부르>에 전화를 걸어 피갈에서 죽은 부랑자의 사체를 처치하기 위해 '뤼시앙 레제라는 사람의 자동차를 훔친 것은 본인'이라고 밝힌다.

그로부터 5일 뒤 프랑스 최대 석간신문 <프랑스수아르>에 도난당했다던 자동차를 운전하는 뤼시앙 레제의 사진이 긴 인터뷰와 함께 실리고 경찰은 이 미심쩍은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 즉시 가택수색에 돌입한다. 그들이 레제의 아파트에서 발견한 것은 벽에 도배된 '교살자' 관련 신문 기사들이었다.

같은 날, 밤을 새워 경찰의 취조를 받은 레제는 오전 7시 30분 마침내 자백하기에 이르렀으나 11개월 뒤 생각을 바꾼다. 1966년 5월 3일 성난 군중이 '사형'을 외치며 법원을 에워싼 가운데 처음 열린 재판에서 레제는 '교살자' 명의의 쪽지를 본인이 쓴 것은 맞지만 뤽 타롱의 죽음과 자신은 무관함을 주장한 것.

"나는 가증스럽고 추악한 소설의 인물을 창조했을 뿐이다."재판이 진행된 5일 동안 레제의 주장은 횡설수설로 일관했고 전문가들이 그의 정신장애를 진단함으로써 사형판결에서는 비껴갔다. 1966년 5월 7일 레제에게 떨어진 것은 종신형이었다. 이날 프랑스의 언론은 '레제, 목숨은 건졌다'고 썼다. 레제의 나이 27세였다.

뤽의 아버지 이브 타롱은 1980년대 초 <파리마치>를 통해 '내가 곧 법'이라며 레제가 출소하면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경고하며 별렀으나 2001년 이브 타롱도 아들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이로써 '교살자'는 프랑스인의 머리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는 듯했다.

41년 후... 레제의 출소가 불러온 '장기복역' 논란

그러나 레제는 지난 3일 41년만에 세상으로 복귀했다. 41년이라는 세월은 41년 전에 레제가 저질렀던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보다 그가 '갇힌 채' 지내야 했던 오랜 시간을 더 많이 상기시키며 또 한번 세상을 흔들고 있다.

지난 4월 레제의 변호사 드펠리스는 유럽인권재판소에 프랑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한 사람을 40년 이상 감옥에 가둬두는 '국가의 비인간성'에 정면 도전한 것. 드펠리스는 종신형 장기 복역자들을 '느린 죽음'의 희생자로 규정하며 2001년 10월 26일자 일간지 <르몽드>를 통해 아래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인권국가를 자처하는 프랑스가 사형제도를 폐지한 것은 1981년의 일이다. 사회보호의 미명 아래 필요 이상으로 형벌을 가한다거나 속죄의 수단으로서 사형제도가 효과적이지 않다는 연구가 뒷받침됐고 국가에 살인면허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의 범죄를 합법화는 도구라는 인식,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오판, 많은 경우 사형집행이 정치적으로 이용돼 온 점 등 사형제도는 실질적으로 보호해야 할 생명의 존엄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한 이후 이제는 종신형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할 때다. '느린 죽음'이라 불러도 무방할 종신형은 사회로부터 한 개인의 생명을 제거하고 구석에서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가 지난 5월 1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2000년 이후 평균 20년을 복역한 20여 명의 종신형 장기수들이 매년 출감하고 있다.

1995~2005년 사이 실시된 같은 조사를 보면 프랑스 장기 수형자들의 수감기간은 80년대 말부터 평균 3년이 늘었다. 같은 기간 조건부 석방, 사면, 만기출소 등으로 석방된 사람들의 3분의 2는 20년 이하의 징역을 살았고 나머지는 그 이상이었다. 프랑스에서 종신형으로 복역하는 수감자는 현재 562명이며 그중 131명이 복역한 지 20년 이상된 사람들이다. 이들 131명 중 17명은 30년 혹은 그 이상 감옥에 갇혀 있다.

'종신형 폐지' '최고 30년형과 조건부 석방' 실현을 위해 싸우고 있는 국립과학연구소 범죄학자 피에르 투르니에는 "장기수들에게 출소는 '제2의 탄생'"이라며 "감옥은 실제 수형자들이 범한 죄보다 과한 벌을 가하고 있어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범죄자들이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질 정도로 책임감을 상실하게 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이들이 출소할 시기가 되면 '현기증 없이 거리를 걷는 법, 두려움 없이 군중과 섞이는 법, 돈 쓰는 법, 먹는 법' 등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 투르니에는 "장기수들에게 출소는 한 마디로 '난폭한 충격'으로 어쩌면 진정한 형벌은 출소와 함께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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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심은데 콩 나고, 털 심은데 털 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털 심은데 털 난다?
[탐방] 천연허브 성분의 탈모방지제품 만드는 '난다모'
텍스트만보기   홍성식(poet6) 기자   
▲ 한국 발모제 시장 규모는 5천억에 이른다. 대기업들이 다수 진출해있는 이 시장에서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중소기업 난다모의 제품.
ⓒ2005 난다모 제공
게임 시나리오업체에서 근무하는 J(34)씨는 요새 부쩍 고민이 늘었다. 업무 스트레스 탓인지 이십대 중반부터 시작된 탈모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피가 보일 정도로 듬성듬성한 머리숱 탓에 대학에 다닐 때는 실내에서도 줄곧 모자를 써온 J씨.

그의 소원은 친구들처럼 시원스럽게 벅벅 문질러가며 머리 한번 감아보는 것이다. 회사 회식자리에서 "머리칼이 나기만 해준다면 수명이 10년쯤 줄어도 좋겠다"는 그의 푸념에 동료들은 깔깔댔지만, 심각한 J씨의 표정을 보곤 얼른 웃음기를 거두었다.

탈모 고민에 시달리는 사람은 비단 J씨만이 아니다. 한국의 성인남성 4명 가운데 1명 꼴인 23%(350여만 명)가 탈모인구로 추정되고, '대머리가 없다'던 여성들 역시 환경적 요인으로 인한 탈모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발모제시장 규모도 크게 확대돼 왔다. 업계에서는 잠재적 고객까지 포함한 발모관련제품 시장의 규모를 5천억으로 보고 있다. 발모제를 만드는 회사도 40여 개가 넘는다. 이중에는 CJ와 LG생활건강 등 대기업들도 포함돼 있다.

2002년 봄. 발모제 시장에 뛰어들어 짧은 시간에 업계 1위에 오른 난다모. 지난해 한국표준협회 컨설팅 조사결과 발모제 부문에서 '웰빙지수 1위 제품'으로 선정되기도 한 난다모는 남미에서 수입되는 천연허브를 주성분으로 사용해 발모제를 생산한다.

쟁쟁한 대기업과 경쟁하며 탈모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있는 난다모 고도윤(46) 대표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나 발모제업계와 회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물었다.

"초기엔 사기꾼 취급도... 직접 인디언 복장으로 홈쇼핑 출연"

▲ 난다모 고도윤 대표.
ⓒ2005 난다모 제공
- 발모관련 제품 사업을 시작한 계기가 있는지.
"젊을 때부터 건설업과 외식업 등의 사업을 했다. 98년경에는 스틸하우스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IMF가 터졌다. 하던 일이 모두 스톱되고 나니 막막했다. 사업을 하면서 알고 지내던 분이 '아직 젊지 않냐. 외국으로 나가서 네가 할 일을 찾아보라'는 충고를 했고, 이탈리아와 미국을 거쳐 멕시코에서 8개월 정도 머물렀다.

거기서 조그만 회사를 했는데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칼이 하루에 한 뭉치씩 빠져나갔다. 보다못한 현지 직원이 식물 몇 가지를 뭉쳐와서 머리에 발라보라고 했다. 별 기대없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3일만에 탈모증세가 호전됐고, 20일쯤 후에는 머리칼이 더 이상 빠지지 않았다.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사업 아이템으로 구상해 귀국했다."

- 초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았을텐데.
"가족들조차 내 사업구상을 무시했다. 약국으로 영업을 나가 '이걸 사용하면 머리칼이 납니다'라고 말하면 사기꾼 취급을 받기도 했다. 후배인 신경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환자들에게 사용권유를 해서 일정부분 효과를 봤고, 약사 한 명이 직접 써보고는 발모가 돼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공신력을 얻은 건 2002년 2월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피부과학교실이 우리 제품에 관한 임상실험 보고서를 내면서부터다. 4개월에 걸친 임상 결과 사용자의 83%가 만족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단위면적당 71%의 발모율이 있다는 사실이 발표된 것이다. 그 때부터 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영업을 할 수 있었다."

- 현재 매출규모와 직원 수는.
"지난해의 경우 250억 정도였다. 직원은 경기도 이천 공장과 서울 서초동 사무실을 합해 50명 가량 된다. 99년 나와 직원 1명으로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눈에 띄는 성장이다. 회사 규모가 커졌다는 건 사회적 책임도 커졌다는 이야기다. 그 부분을 늘상 생각하고 있다."

- 홈쇼핑 판매를 통해 급성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홈쇼핑에 첫 방송되던 날까지 기억하고 있다. 2002년 4월 19일이었다. 나서는 모델이 없어 내가 직접 인디언 복장을 하고 출연까지 했다. 진행대본도 직접 작업했다. 감기만 하면 되는 편리성과 임상실험 결과를 강조하고, 발모관련 제품 최초로 환불제도를 도입한 것이 주효해 이듬해에는 현대홈쇼핑 판매 1위 상품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마케팅'의 힘... "단시간에 머리칼 안 나니 차라리 가발" 조언하기도

- 탈모의 원인은 뭔가.
"학계에서는 스트레스와 유전적 요인, 과도한 음주와 흡연 등으로 보고 있다. 여성의 경우는 출산 후에 머리가 빠지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염색과 스프레이의 사용이 탈모를 부추기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한국에서 발모관련 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숫자는. 그리고, 난다모가 타사 제품과 변별되는 점은 뭔가.
"40~50개 정도다. 대기업도 적지 않다. 일단 난다모는 천연성분의 안정성과 편리성이 시장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다른 회사 제품에 비해 가격경쟁력도 있다. 이것들보다 중요한 건 사실에 근거한 광고와 마케팅이다. 발모제 업계에선 과대과장광고로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고객들이 이를 묵과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이 부분은 가슴에 새기고 사업을 할 것이다."

- 회사를 운영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는.
"이른바 일류대학을 나와 대기업 기획실에 근무하는 30대 초반 남자와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곧 결혼을 한다는 그가 '단시간에 머리칼이 나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고 하길래 '그런 방법은 없으니 차라리 가발을 쓰고 한동안 아내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조언해줬다. 이것도 사실에 근거한 마케팅을 하자는 회사 방침을 지킨 것이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지내느냐고? 잘 산다고 하더라(웃음)."

- 초창기의 어려움을 상쇄해주는 보람도 있을텐데.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르지만 탈모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빠지는 머리칼 한 올 한 올이 눈물겹다. 탈모로 인해 비관자살한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들에게 조그마한 희망이나마 주고 있다는 것이 우리 직원들의 긍지라면 긍지다. 우리 고객이 60만명이다. 이들이 겪는 심리적 압박과 절망감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믿는다."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르는 탈모의 아픔, 조그마한 희망 주며 긍지"

- 수출이 전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이며, 어떤 나라로 수출하는지.
"올 목표액을 500만 달러로 잡고 있다. 내수가 80%라면 수출은 20% 정도다. 향후 수출을 늘려가기 위해 미국과 일본, 대만에 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중국에는 원료를 수출하고, 일본에는 '보보'라는 이름으로 완제품 수출을 한다. QVC라는 홈쇼핑업체를 통해 판매하는데 하루에 15억원 어치가 팔린 적도 있다.

서양에서는 대머리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칼을 포함해 신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양이 발모제 판매가 많은 편이다."

- 향후 회사의 지향점은.
"우리가 시작한 아이템으로 업계 최고가 되자는 것을 사원들에게 강조한다. '가장 좋은 하나'의 제품을 만들고싶다. 그런 의미에서 직원들에게도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 일류(최고)가 되자고 이야기한다. 이런 목표가 이뤄지면 구축된 유통망을 통해 생활건강 용품 유통업에도 진출하려한다."
2005-10-05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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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후보 뒤집어보기⑧] 권영길, 척박한 보수의 땅에 진보의 나무를 심는 큰 형님

 

 

[대권후보 뒤집어보기⑧] 권영길, 척박한 보수의 땅에 진보의 나무를 심는 큰 형님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10-07 12:47]
▲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자료사진)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데일리서프라이즈는 2007년 대선 유력 후보들을 연속 해부하는 특집기사를 연재합니다. '그가 대통령이 돼야하는 이유 10가지'입니다. 조선닷컴이 최근 연재한 '...안되는 이유 10가지'를 뒤집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매체가 어떤 의도로 그런 연재를 했는지의 이유와 함께 후보군들에게서 또 다른 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칼릴 지브란이 이런 말을 했더군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은 쉽게 보지만 정작 보아야 할 자신의 허물에는 어둡다." 본보가 연재할 '...돼야하는 이유 10가지'에서 나타나는 각 후보들의 장점이 실제 경선에서 득표율과 연결될 지의 전망은 독자 여러분들에게 맡깁니다.<편집자 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진보정당을 상징하는 대표 브랜드다. 그는 김대중, 이회창 후보와 대결한 97년 대선과 노무현, 이회창 후보와 맞붙은 2002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의 독자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에서 진보정당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애당초 보이지 않았다. 진보세력의 독자 후보들은 87년 이후 대선 때마다 사퇴와 연대 요구에 시달려왔다. 많은 이들은 “이길 수도 없는 선거에 왜 나서서 범민주개혁세력 후보의 표를 갉아먹느냐”고 비판했다.

권영길 의원은 두 번이나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시도했다. 결과만을 보면 당선은 커녕 기대했던 득표율에도 미달했다. 하지만 그가 감행한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지난해 4 ·15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이라는 소중한 씨앗이 됐다. 이후 민노당은 군소정당의 한계를 뛰어넘고 진보적 의제를 공론화시키는 정책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제도권 내에 진보정당의 씨앗을 뿌렸던 권영길은 그 결실을 거둬야 하지 않을까. 차기 대선은 고건 전 총리를 비롯 여권에서 김근태, 이해찬, 정동영,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손학규, 이명박 등 쟁쟁한 후보들이 거론되고 있다.

개혁완수를 위해 재집권을 희망하는 열린우리당이나 정권탈환이 실패할 때 당 해체가 불가피한 한나라당으로서는 차기 대선에서 불꽃 튀는 격돌을 벌일 것이다. 진보진영 또한 외연확대와 안정적 뿌리내림 더 나아가 2012년 집권 플랜을 위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한판이다.

조선닷컴은 최근 대선후보 시리즈를 통해 진보진영의 유력 후보 권영길 편에서 ‘황당 공약을 남발하는 위장서민’이라는 의문부호를 달고 다소 색깔론적인 시각에서 권 후보를 평가했다.

본보는 권영길 의원과 민주노동당을 유기적으로 결합, 차기 대선 가능성을 전망해봤다. 조선닷컴이 지적대로 권영길 의원의 대통령 당선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와 소속 정당이 실력만큼의 정당한 평가를 받고 2012년 집권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개인 권영길이 아니라 진보정당 대선후보 권영길

차기 대선은 개헌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2007년 이후 5년간 한국을 이끌어나갈 국정 최고 책임자를 선출하는 것. 조선닷컴은 권영길 의원과 관련 차기 대권 여론조사의 낮은 지지도에 근거로 “대통령의 꿈은 역부족일 것”이라며 “그는 왜 대통령이 되기 힘든 것일까”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이어 조선닷컴은 △비대중적 한계와 기득권층의 반감 △독자적 득표력의 취약성 △부유세 등 극단적이고 허황한 공약 △위법경력 △노회찬 의원과의 경쟁관계 △위장 서민 논란 △부친의 빨치산 전력 등을 약점으로 일일이 거론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대통령이 될 수 없을까? 조선닷컴은 특히 ‘뜨는 노회찬, 지는 권영길’이라는 구도를 사용, 최악의 경우 (권영길 의원이) 차기 대선후보조차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지난 4월 11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의회진출 1주년 기념 <민주노동당의 길-빈곤극복과 평화실현> 토론회에서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 권영길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민노당은 기존 정당과는 시스템이나 체계나 다른 정당이다. 이 때문에 정치인 권영길 개인이 아닌 진보정당 대선후보 권영길로 평가해야 그의 대선 전망에 대한 합당한 평가가 가능하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등 기존의 여야 정당이 이념적 스펙트럼이 혼재돼 있다면 진보성이라는 비교적 단일한 이념으로 조직돼 있고 당내 민주화에 있어 훨씬 돋보이는 정당이다. 기존 정당들은 누가 대선후보가 되느냐에 따라 당의 전반적인 컬러는 물론 실세그룹도 자연스럽게 교체된다.

반면 민노당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권영길 혹은 노회찬 그리고 제3자 누가 나서더라도 민노당의 대선후보는 당의 핵심적 가치와 이념을 실현해내는 매개자일 뿐이다. 인물보다는 소속 정당의 가능성에 보다 포커스를 둬야 한다.

이 때문에 권영길과 소속 정당인 민노당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민노당의 입장에서 2007년 집권은 실현이 어렵겠지만 2012년 집권의 가능성은 충분히 탐색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차기 대선에서 권영길 의원은 2012년 집권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분파주의 노동운동을 통합으로 이끈 리더십

권영길 의원은 90년대 한국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상징이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아직 ‘국회의원 권영길’보다는 ‘위원장 권영길’ 혹은 ‘대표 권영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 권 의원과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영역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다양한 인사들은 아직도 ‘위원장’ 혹은 ‘대표’로 그를 부른다.

먼저 ‘위원장 권영길’은 과거 노동운동 지도자 시절의 그를 가리키는 것. 또한 ‘대표 권영길’는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대표’를 역임하며 진보정치의 상징으로 활동한 경력을 담아낸 호칭이다.

권영길 의원은 80년대 말 노동운동에 투신, 1994년까지 언론노동조합연맹 초대부터 3대 위위원장을, 95년부터 97년까지는 민주노총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후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국민승리21’ 창당과 97년 대선 출마, 2000년 16대 총선 출마, 2002년에는 민주노동당 후보로 대선전에 뛰어들었다.

오랜 노동운동 생활과 진보정당의 풍부한 경험 속에서 그가 가지는 강점은 통합의 리더십이다. 정치는 한마디로 이해집단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하는 예술. 권 의원은 특히 노동운동 지도자 시절과 진보정당의 대표를 역임하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직들을 큰 대과없이 무난히 이끌어왔다. 특히 김영삼 정권 말기 노동법 개악안이 날치기 통과된 것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이끈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매카시즘은 독이 아니라 득

색깔론은 지역주의 정치와 함께 우리 정치를 후퇴시킨 가장 고질적인 악재였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통해 민주화에 헌신했던 인사들은 ‘빨갱이’라는 딱지를 천형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과거 독재정권의 논리대로 본다면 민노당은 ‘빨갱이 집합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좌우파를 막론한 운동권 인사들이 주요 포스트에 포진해있다.

조선닷컴은 대선후보 권영길의 약점으로 부친의 빨치산 경력을 거론한 바 있다. 조선닷컴은 대선후보 시리즈 권영길 편에서 “부친 전력 문제는 물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고 전제하면서도 “국가 지도자로서 자격을 논할 때 큰 걸림돌이 될 것임을 부인하기는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색깔론의 냄새를 짙게 풍긴 부친의 빨치산 경력이 ‘과연 약점이 될까’라는 점은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를 볼 때 다소 의문이다.

▲ 지난 3월 21일 오후 열린 국회 통외통위(독도문제 현안보고) 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반기문 장관에게 질의하고 있다.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후보 시절 장인의 부역 의혹에 맞서 “유권자 여러분들께서 부역자의 딸이 아내라는 이유로 제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대통령 후보를 포기하겠습니다”고 호소했다. 이에 국민들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선택, 그의 아픈 가족사를 보듬어 안았다.

2002년에도 통하지 않았던 이른바 색깔론이 2007년에 통할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색깔론은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 과거 선거 때마다 몰아친 매카시즘적 광풍에 휩쓸리지 않은 만큼 우리 사회는 이미 성숙해있다.

△개혁 대 진보로 재편되는 정치구도

87년 이후 대선이나 총선의 주요 국면에서 진보진영을 가장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정권의 탄압도 내부의 갈등도 아니었다. 어쩌면 독자 당선이 어려운 상황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사표심리로 진보진영은 범민주개혁세력 후보의 당선을 도와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때문에 개혁과 진보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많은 유권자들은 머뭇거렸다. 실제 권영길 후보의 경우 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각각 1.2%와 3.9%에 불과한 투표율을 얻었다. 특히 2002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는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대선 정국 최대의 유행어를 만들어내고 방송토론 등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 진보정당의 의미있는 득표를 기대했다.

하지만 대선 전날 정몽준 의원의 지지 철회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 많은 지지자들이 노무현 일병 구하기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4.15 총선 직전에도 ‘거대 야당의 부활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표이론이 등장, 민노당은 적잖은 손해를 겪었다.

과연 차기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도 이러한 관행들이 여전히 반복될까? 가능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민노당은 원내 진입 이후 누구나가 인정하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이는 10석이라는 군소정당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한마디로 진보적 의제설정에 성공한 것이고 이는 지지자층의 확대로 늘어났다.

X파일로 드러난 한국사회의 추악한 정경언 유착 구조에 대해 민노당은 가장 선명한 입장을 견지,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점을 중요하게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의석수로는 민주당이 3당이지만 일반인의 인식에서는 민노당이 여전히 3당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아울러 보수라는 이념 앞에 ‘합리적’ ‘개혁적’ ‘혁신적’ 이라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거나 뉴라이트 운동의 확산 등은 보수가 처한 위기감을 그대로 나타낸다. 이와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개혁 대 진보라는 구도로 변화해나갈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설득력 얻어가는 공약들

권영길과 민노당의 이미지 중 하나는 과격하다는 것. 또한 민노당의 강령과 부유세 등 주요 정책들 또한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먼저 강령부분. 딱딱한 사회과학적 용어의 사용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유렵식 사회민주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민노당의 강령을 지나치게 삐닥하게 보는 시선은 우리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그만큼 왜곡돼있다는 반증이다. 실제 많은 학자들은 민노당이 추구하는 이념이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지향하는 수준보다 더 우파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홍세화 한겨례신문 기획위원은 과거 권영길 의원의 대선출마와 관련한 글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정당이 존재한다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도 존재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선 유권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서민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정당은 없었다”면서 “민주노동당은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사회를, 돈이 없어서 대학에 갈 수 없는 사회를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당신이 노동자, 농민, 서민이라며 사회경제적 처지에 걸맞는 정치의식을 가져야 한다”면서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에따른 정당 선택이 이뤄질 때 한국사회는 비로소 하나의 ‘사회’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노당이 주장하는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등은 정말 허황된 공약인가? 교육과 의료, 부동산의 문제로 우리 국민들이 감당해온 엄청난 비용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황당한 공약으로 평가하기보다 진보적 관점에서의 고민과 문제해결이라는 데 무게를 둬야 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또한 이에따른 사회 양극화는 사회 안정성을 해칠 수 있는 수준으로 진전되고 있다.

사실 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 위기 탈출은 고통분담이라는 슬로건에도 노동자와 서민층의 고통전담으로 어느 정도 극복됐다. 하지만 이후 이들의 삶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너무 미진한 편이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등 민노당의 3대 핵심정책은 지난 대선에서 그 참신성에도 실현 가능성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차기 대선에서도 과연 ‘황당한 공약’이라고 평가받을 것인지는 현재 한국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과 토대, 복지수준만을 살펴봐도 답은 나온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 2004년 12월 5일 오후 이해찬 국무총리가 7일째 단식농성중인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을 찾아 유감표명의 뜻을 전하고 있다.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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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도 모르다’는 야한 말이다

'쥐불울도 모르다'가 표준말

 

‘쥐뿔도 모르다’는 야한 말이다

‘노가리 까다’, ‘곱살이 끼다’ 등 재미있는 우리말 어원 이야기

미디어다음 / 최이연 프리랜서 기자


559돌 한글날이다.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한 여러 행사가 도처에서 열린다. 한글날 하루만큼이라도 바르고 고운 우리말을 사용하는 데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우리가 많이 쓰는 우리말 표현 중에는 정작 어원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특히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분위기, 사실 등을 나타내는 관용구나 속담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기는 하지만 그 뜻을 거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원을 알고 쓰면 더 재미있고 감칠맛이 나는 게 우리말이 지닌 매력이다.

지금까지 우리말 어원 관련 도서들이 꾸준히 발간되고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원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에는 적당하다. 그 중에서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1·2’(조항범 지음, 예담, 2004)와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이재운 편저, 책이있는마을, 2003)은 우리가 자주 쓰는 관용구의 어원을 속 시원하게 밝혀준다.

“쥐뿔도 모르는 게”

뿔 달린 쥐는 없다. 그렇다면 ‘쥐뿔’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옛날 커다란 쥐가 사람을 내쫓고 주인 영감 행세를 하자, 가짜로 여겨져 내쫓긴 주인이 억울해서 스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스님이 알려준 대로 고양이를 풀어 쥐를 내쫓은 주인은 부인을 앉혀놓고 ‘쥐좆도 모르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쥐뿔’이 ‘쥐불’의 변형이고 원래는 ‘쥐의 불알’에서 왔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이야기이다.

쥐도 작은데 쥐의 성기는 아주 작을 것이라는 데서 ‘쥐뿔’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쥐뿔도 모르는 것이니, 앞뒤 분간도 못할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종종 쓰는 비속어이지만 사실은 은근히 야한 말이다.

“맥주 한잔 하면서 노가리나 깔까?”

수다를 떨거나 그럴듯하게 이것저것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을 ‘노가리를 까다’라고 한다. 노가리는 명태의 새끼. 흔히들 노가리 껍질을 벗겨가며 시끄럽게 잡담을 하며 술을 마시는 풍경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노가리를 까다’는 명태가 한꺼번에 많은 알을 낳아서 새끼를 까는 데서 유래한다. 이렇게 명태의 새끼인 노가리의 수가 많다는 데서 말을 많이 하다는 비유적인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또 말을 많이 하면 실수도 많이 하고 그만큼 진실성도 떨어지기 쉽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다라는 의미가 더해졌다고 한다. 노가리를 잘 까는 사람은 재미는 있지만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곱살이 끼지 마”

남이 하는 데 끼어서 어떤 일을 쉽게 하려는 것을 가리키는 말. 흔히 ‘꼽사리 끼다’라고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곱살이 끼다’는 노름판에서 유래한 말이다. 노름할 때 판돈을 대는 것을 ‘살 댄다’라고 하는데, 밑천이 부족하거나 패가 좋지 않아 쉬고 있다가 패가 좋은 것이 나올 때 살을 댄 데다 또 살을 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곱살’이라고 한다. 자기 힘으로 하려 하지 않고 남의 노력에 쉽게 묻어서 가려는 얄미운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말짱 도루묵이지”

도루묵은 물고기의 이름이다. 이 말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피란길에 오른 선조가 처음 보는 생선을 맛보고는 그 맛이 너무 좋아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 생선의 원래 이름은 ‘묵’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 맛을 잊지 못한 선조가 그 생선을 다시 먹어보았지만 그 맛은 온데간데 없었다. 결국 선조는 “도로 묵이라 불러라”고 명했다고 한다.

재미는 있지만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사실 물고기의 원래 이름은 ‘목’이었고 그 앞에 붙은 ‘돌’은 돌배, 돌복숭아에서처럼 맛이나 모양이 좋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돌목’은 목이라는 물고기 가운데서도 질이 떨어지는 물고기. 결국 힘들게 그물질해 건져 올렸으나 별 이득이 없으니 ‘헛수고’를 한 셈이다.

“저 어리버리 또 왔냐?”

‘어리버리하다’는 요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주 쓰는 표현이지만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원래는 ‘어리바리’가 표준어. ‘어리바리’는 ‘정신이 또렷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어 몸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을 뜻한다.

먼저 ‘어리’는 중세국어에서 ‘어리석다’라는 뜻으로 쓰이던 ‘어리다’의 어간이 부사화한 것이다. ‘바리’는 어원을 규명하기가 어렵다.

요즘은 ‘어리버리’라는 말이 훨씬 많이 쓰인다. 행동이 굼뜨고 좀 모자란 사람을 가리켜 ‘어리버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기가 스스로를 ‘어리버리하다’고 할망정 남에게 들으면 기분이 썩 좋을 리는 없다.

“아, 쪽팔려”

부끄럽거나 민망한 상황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다. ‘쪽팔리다’에서 ‘쪽’은 우리가 흔히 짐작하듯이 ‘얼굴의 한쪽’이나 ‘얼굴짝’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쪽팔리다’는 ‘얼굴이 팔리다’라는 뜻이다. 그리 점잖은 표현은 아니어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잘못 썼다가는 정말로 체면을 깎일 수 있으니 주의하는 게 상책이다.

한편 ‘쪽을 못 쓰다’에서 ‘쪽’은 족(足)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씨름판에서 나온 것. 상대에게 배지기로 들렸을 때 자신의 발등을 상대의 종아리에 대면, 상대가 더 들지도 내려놓지도 못하고 힘만 빼면서 애를 먹는다. 이런 기술을 ‘발쪽을 붙인다’라고 하는데 그런 기술도 못 써보고 당한 상황처럼 꼼짝도 못하고 당하는 것을 뜻한다.

“재수 옴 붙었네”

되는 일도 없고 도무지 재수가 없을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혹은 막 뭔가를 시작하려는데 싫은 사람이나 훼방꾼이 끼어들었을 때 운이 막혔다는 뜻으로 쓴다.

‘옴’은 원래 옴벌레가 옮기는 전염성 피부병을 일컫는다. 이 병은 한번 붙으면 좀체 떨어지지 않고 손가락이나 겨드랑이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악성 피부병이라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나쁜 일이나 사람에 빗대어 많이 쓰인다. 덜 할수록 좋은 말이라 할 수 있다.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고 있네”

겉으로는 얌전한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온갖 짓을 다한다는 것을 뜻하는 속담. 옛날 매우 가난한 선배가 살았다. 어느 날 선비가 밖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자 아내가 무언가를 입에 넣으려다 황급히 엉덩이 쪽으로 숨겼다.

자기 몰래 음식을 먹었다는 생각에 선비가 아내를 추궁했다. 그러자 당황한 아내는 “호박씨인 줄 알고 까먹으려 했는데 쭉정이더라구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와 속담의 유래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사실 호박씨를 까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물며 뒷구멍으로 까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속담은 뒷구멍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요리조리 무슨 일을 은밀하게 꾸미고 있다는 뜻이다. ‘호박씨 까다’는 ‘안 그런 척 내숭을 떨다’라는 의미로, 이 속담의 의미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시치미를 떼 봐야 소용없어”

‘시치미를 떼다’는 알고도 모르는 척, 하고도 안한 척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우리가 자주 쓰는 이 말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려시대 때 매사냥이 성행했는데 매사냥 인구가 늘다보니 길들인 사냥매를 도둑맞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매에 특별한 꼬리표를 달아 표시했는데 그것이 ‘시치미’였다. 이 시치미를 떼버리면 누구의 사냥매인지 알 수 없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살다 보면 시치미를 떼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기왕이면 시치미를 딱 잡아떼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또 삼천포로 빠졌네”

이야기를 한참 잘 하다가 곁길로 빠지는 것을 ‘삼천포로 빠지다’라고 한다. 삼천포(三千浦)는 사실 경남 진주 아래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이름이다. 지금은 사천시로 바뀌면서 그 이름이 사라진 상태.

한 장사꾼이 장사가 잘 되는 진주로 가려다 장사를 망쳤다거나 부산에서 기차로 진주에 가는데 기차를 잘못 갈아타서 삼천포로 가게 되었다는 등의 여러 가지 유래설이 전해진다.

원래는 ‘길을 잘못 들다’라는 뜻이지만 무슨 일을 하다가 엉뚱하게 다른 일을 하거나 이야기가 곁길로 빠지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삼천포에서 가서는 ‘잘 나가다가 샛길로 빠지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당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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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성 두산 회장 총수일가 피진정인 전원 출국금지

 

 

박용성 두산 회장 총수일가 피진정인 전원 출국금지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 피의자 신분 조사도
입력 :2005-10-07 11:30   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두산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조사 부는 7일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박용만 부회장 등 총수 일가의 피진정인 전원을 출 국금지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기존에 출금한 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박용성 회장 장남), 박용욱(박용곤 그룹 명예회장의 막내 동생) 이생그룹 회장,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사장( 박용곤 명예회장 차남)등 3명 외에 해외 출장을 마치고 전날 귀국한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 등을 추가 출금, 총수 일가의 피진정인을 전원 출금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다음 주부터 계열사를 통한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는 박진원 상무, 박용만 부회장, 박용성 회장 등 총수 일가 인사들을 차례로 불러 조사한 뒤 이달 중으로 사법처리 수위를 결정할 예정이다.

검찰은 또 이날 두산그룹 3세대 형제의 막내인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고 있다.

검찰이 7월21일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측의 진정을 접수한 이후 총수 일가 인 사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은 박용욱 회장을 상대로 그가 경영하는 두산그룹 납품업체 넵스가 지난 5 년 간 하도급 업체를 통해 수십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하는 데 관여했는지, 회사에서 조성한 비자금을 전달받았는지 등을 확인하고 있다.

검찰은 박 회장을 상대로 넵스가 두산산업개발에 주방용품 등을 대량 납품하는 과정에서 납품단가를 부풀리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박용만 그룹 부회장에게 전달했다는 의혹도 조사할 계획이다.

검찰 관계자는 "두산 총수 일가 중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기는 이날 박용 욱 회장이 처음"이라며 "횡령 또는 배임 혐의를 파악하고 있으며 이날 중 조사를 마 치는대로 귀가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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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뉴라이트...박정희 똥을 양식으로 아는 똥파리?”

 

 

진중권 “뉴라이트...박정희 똥을 양식으로 아는 똥파리?”
5일 고뉴스 기고 통해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유치하다” 일갈
입력 :2005-10-06 16:51   신재우 (withwit@dailyseop.com)기자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자신에게 ‘진중권, 박정희 대통령이 개로 보이는가’라며 비판한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에게 “유치하다”는 답을 돌려줘 화제다.

진 교수는 5일 ‘고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솔직히 신지호씨의 글을 읽고 그의 유치함을 비웃으며 박장대소를 했다. 나름대로 비장하게 쓴 글, 진지하게 읽어줘야 하는데, 횡격막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은 인간의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라며 뉴라이트 진영의 신 대표를 공격했다.

신 대표는 지난 3일 ‘본보가 진 교수와 가진 인터뷰 내용을 두고 “진중권은 얼치기 좌파”라며 “그의 논리는 한심하기 그지없다. 박정희와 김일성을 ‘둘 다 개 같은 인물’이라며 동렬로 취급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진 교수는 남한의 개발독재와 북한의 수령독재를 좌파, 우파의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독재라고 동일선상에서 비판했다는 것이다.

신 대표는 “박정희가 독재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김일성처럼 직업선택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등 기본적 권리마저 박탈하고 비판언론 및 야당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횡포를 부린 것은 아니다”며 “왜 저들의 눈에는 이토록 명백한 차이가 보이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학습부족으로 인한 무지의 발로이거나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삐딱 심리’의 발동”이라고 진단하고, 진 교수를 겨냥해 “만에 하나 박정희 전대통령이 개라면 진중권 당신은 개똥을 먹고사는 파리”라고 비난했다.

신 대표의 이와 같은 발언에 진 교수는 “만약 내가 김일성을 ‘개 같다’고 하고 대구 폭탄주 사건의 주역을 ‘개 같다’고 하면, 신지호 대표는 또다시 몸을 바르르 떨면서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는 다르다’며 나에게 덤벼들어 요란하게 항의를 할까? 그리하여 ‘주모 의원이 개라면 너는 그 똥을 먹고 사는 파리다’라고 목청을 높일까?”라며 반박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싸놓으신 똥을 길이 보전하며 먹고 사는 것은 바로 신지호 대표를 비롯한 뉴 라이트이고, 박정희 똥을 일용할 양식으로 알고 살아가는 똥파리는 신구 쌍 라이트 형제들”이라며 비판했다.

진 교수는 신 대표가 아직도 ‘박정희 대 김일성’의 대립구도에서 박정희 향수를 사유하고 있다며 “신 대표는 6~70년대로 돌아가 자신이 김일성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있다고 믿으며 저 혼자 비장해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일성과 박정희를 똑같이 ‘개’라 부르면 부당하다고 힘차게, 힘차게 주장하면서, 김일성이 개 같다면, 박정희는 최소한 소 같아야 한다고, 차마 들어주기 민망한 썰렁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고 신 대표를 공격한 진 교수는 “이것으로 보아 뉴라이트, 아무리 반성을 했다고 해도 정작 들여다보면 올드라이트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고 주장했다.

진 교수는 또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의 구별 운운하는 신지호 대표. 나름대로 그걸 잘난 척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영 봐주기 민망하다”며 “앞으로는 자신의 전공인 정치학의 영역에서 저서를 좀 냈으면 좋겠다”고 비꼬기도 했다.

이하는 진중권 교수와 본보와의 인터뷰 내용 중 신지호 대표가 문제 삼은 부분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판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자이기도 한데, 이인화 교수 등의 ‘박정희 영웅 만들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인화의 경우는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다. 박정희를 숭배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장사하려고 쓴 책일 거다. 이인화는 책은 열심히 읽는데 정리가 잘 안되는 사람이다. 그가 논리를 구성한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대신 시류에는 아주 빠르다. 돈 되는 게 뭔지를 잘 안다. 다만 ‘뉴라이트’는 이인화만도 못하다. 뉴라이트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언론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지금 한나라당이 잘 나가면 쑥 들어갈 존재다.”

- 최근 강정구 교수가 데일리서프라이즈에 기고한 글이 논란에 휩싸여 있다.

“(강정구 교수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6 ·25라는 통일전쟁을 하느라고 수십만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럼 지금도 통일하자고 전쟁하자는 소리냐. ‘통일전쟁을 결심해야 한다’는 조갑제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일전에 ‘SBS 전망대’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대화가 안통했다. 낡은 사고방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해방 직후에는 단독정부보다는 통일이 먼저였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임정이나 통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강정구 식의 인식은 박정희와 김일성 둘 중 하나를 편들라는 논리인데, 내가 왜 그 둘을 편들어야 하나. 둘 다 개 같은 인물들인데 말이다. 정통성은 남이냐 북이냐가 아니라, 누가 잘 먹고 잘 사느냐와 누가 민주화를 했느냐에서 찾아야 한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관/련/기/사
진중권 “이명박 대통령? 상상만으로도 잠이 안온다” /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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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국가보안법으로도 모자라 이제 시장보안법까지?”

바로 이얘기다. 이제 아주 대놓고 천민자본주의 하자는구나...

창피함을 모르는 인면수심의 메인스트림

 

진중권 “국가보안법으로도 모자라 이제 시장보안법까지?”
6일 SBS전망대, 대한상의 김상렬 부회장 강도 높게 비판
입력 :2005-10-06 11:10   신재우 (withwit@dailyseop.com)기자
김상렬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부회장이 지난 4일 강정구 동국대 교수를 겨냥해 반시장적인 교수의 강의를 들은 학생은 기업채용 때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발언을 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 교수는 5일 SBS라디오 ‘진중권의 SBS전망대’에서 “국가보안법으로도 모자라 이제 시장보안법까지 생길 모양”이라며 “김상렬 대한상의 부회장의 발언, 그 속에서 한국식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무식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 부회장은 ‘6·25는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한 강 교수를 두고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며 “이런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시장경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지, 올바른 경제관이나 역사관을 가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 “기업 채용 때 대학수업 내용 등을 참고하도록 경제 단체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대한상의 부회장의 이같은 발언이 ‘상식을 넘은 것’이라는 비판이 강한 가운데, 진 교수도 “앞으로 대학가 반시장적 교수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겠다는 대한상의가 ‘반시장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기준은 뭐냐”며 시장질서를 흐리는 것은 기업인들이라고 지적했다.

진 교수는 “가령 대한상의 회장이신 두산의 박용성 회장, 비자금 조성, 대출이자대납 등 비리의혹을 받고 있는데, 이런 거 비판하면 반시장적 딱지가 붙냐”고 말했고, “반시장적이라는 교수들의 강의가 ‘전공필수’라면 어떡하냐”고 물었다.

“그 교수들의 강의를 듣자니 취직이 안 되고, 안 듣자니 졸업이 안 되고, 학생들만 죽어나겠다”는 진 교수는 “강의하는 교수는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고, 그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시장보안법으로 처벌하고, 사회가 미쳐버렸나 보다”며 강 교수에 대한 경찰과 재계의 대응을 함께 비판했다.

진 교수는 “강 교수를 구속하라고 인민재판을 벌이는 그 분들이야말로 사상의 자유시장을 믿지 못하여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반시장주의자들”이라고 말했고, “분식회계니 비자금이니 뭐니 해서 비리를 저지르는 일부 기업인들이야말로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는 반시장주의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진 교수는 “시장경제의 모범이라는 미국에서는 그런 짓 하는 기업인들은 종신형으로 다스리던데 우리 일부 기업인들은 시장질서 흐리는 일 밥 먹듯 한다”며 “김상렬 대한상의 부회장의 발언, 그 속에서 한국식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무식함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고 말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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