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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8
    전화가 왔다.
    ninita
  2. 2008/01/29
    F코드(4)
    ninita
  3. 2008/01/21
    (10)
    ninita
  4. 2007/07/06
    hope
    ninita
  5. 2007/05/12
    여행을 떠나요.(11)
    ninita
  6. 2007/04/17
    스물 아홉.(5)
    ninita
  7. 2007/04/14
    아가 (2)
    ninita
  8. 2007/04/09
    서글프게도,
    ninita
  9. 2007/04/02
    2007년 4월 2일
    ninita
  10. 2007/04/01
    가족
    ninita

전화가 왔다.

에콰도르에, 아마도 평생을 두고 가끔은 그리워 할, 사람을 하나 두고 왔다.

 

허름한 버스에 올라타 플랫폼에 서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날 이후,

한 차례 이메일이 오가고 그 이상의 연락은 서로 없었다.

 

두 달쯤 뒤에 메일을 한 번 썼지만 답이 없었고,

석 달쯤 더 지나 나는 한국에 왔다.

 

다시, 오랜만에 메일을 썼다. 언제 읽을 지도 알 수 없는 아주 짧은 안부 메일을.

섭섭한 생각은 없었다. 에콰도르는, 한국처럼 인터넷을 하는, 그런 나라는 아니니까. 언젠가는 읽게 될 거고, 그럼 분명히 나를 찾을 거라고, 그러고는 그냥 잊어버렸다.

 

2주가 흘렀나 보다. 그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거의 매주 너한테 메일을 썼어.

하지만 답장이 한 번도 없어서 네가 나를 잊었다고 생각했지.

메일 보니까 너무 기쁘다.

 

전해지지 않은 편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는데..

핸드폰에 낯선 번호가 찍혔다.

 

여보세요.....

 

저 편에서 들리는 소리는.... 여보세요, 가 아닌.. 알로, 였다.

 

알로, 올라!!

 

그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하려는 타이밍이 겹치거나 엇갈렸다.

겨우 알아들은 질문에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 했다. 머릿 속이 하얬다.

결국 대화가 아닌, 다만 목소리만 확인하는 통화는 아주 짧게 끝이 났다.

끊자고 말할 새도 없이 상대편 카드가 다 되는 바람에.

 

그래도 기뻤다.

그에게는, 내가 무슨 행동을 하건 말을 하건, 앞서나가거나 창피하거나 한 게 아니라서 좋았던, 그 느낌이 여전해서.

 

다시 에콰도르에 오게 된다면, 전화만 하라며 웃던 모습이 이제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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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코드

기타를 칠 줄 알았으면 하는 오래된 소망은, 그림을 잘 그렸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나한테는 로망에 가까운 일이다. 중 3 때 마지막 시험을 끝낸 후, 기타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F코드를 제대로 짚을 정도로는 하지 않고 겨우 한 달 만에 내팽개쳤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스무살 하고도 몇 살쯤 더 먹었을 무렵부터 다시 기타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집에 내 기타가 남아있을까? 이번에 집에 가면 찾아보고 혹 있으면 들고 와야겠다, 그렇게 맘을 먹었다. 하지만 웬걸. 집에만 오면 기타 찾는 걸 잊는 것이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며칠 전에 꿈처럼 멍하게 기타 생각이 둥실 떠오르길래 냉큼 엄마한테 물어봤다. 엄마 옛날에 나 갖고 놀던 기타 아직도 있나? 어쩌면 피아노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거 작은 방 농짝 위에 있잖아, 하는 거다.

 

아, 있었다. 예전 그대로, 가방엔 지퍼가 떨어진 채로, 주머니에 있던 피크가 어디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신이 날 수가. 인터넷을 뒤져 겨우겨우 튜닝은 했어도 기억나는 코드가 하나도 없어 그냥 조카랑 기타 몸통을 두드리고 놀기만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기타첫걸음교본을 사왔다. 얼마나 가겠냐 싶으면서도, 다시 찾은 기타인데 오래오래 갖고 놀아야지, 하는 거다. 쉬운 코드들 먼저 짚어보는데 그럭저럭 소리가 나는 게 신기하고 재미나다. 하지만 역시 복병은 F코드. 아무 소리도 안 난다. 손이 아프도록 연습해야 한다는 사실은 예전에도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혹시 왕도가 있을까, 그냥 심심풀이로 F코드를 검색해 보니, 검지에 굳은살 배기도록 연습하란다. <미저리>의 한 구절도 나온다.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없는 수백만 가지 일이 있어. 커브 볼은 못 쳐. 팔팔하던 고등학교 때도 못 하던 거야. 물새는 수도꼭지 못 고쳐. 롤러스케이트 타기나 기타로 F코드 잡고 제대로 소리내는 거 못 해. ㅎㅎ 그래, F코드란 그런 거다.

 

근데, 그거 말고도 사는 데 F코드가 참 많다. 오기가 생기다가도 제풀에 죽어버리고 말게 되는. 이번에는 어떻게 될 지?

 

(문득, N'aitun에서 본 재즈기타 공연이 생각난다. 베이스기타 주자는 오동통하니 배가 뽈록 튀어나온 참 귀여운 남자였는데, 흘러내리는 얇디 얇은 기타를 계속 추어올리면서도 참 멋진 연주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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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다.

그리고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스터섬에는... 여러 도시들과의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었다.

어딘가는 멀고, 어딘가는 가까웠다.

 

그 때,

거리야 어떠하건, 가자고 맘먹었다.

그래서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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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e

 

나와 그녀는 정신적으로 어딘가 닮아있었다

 

 

그 순간 영원, 마음, 영혼, 같은 것이

어딨을지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3년간 살아온 모든 것을 서로 나눈 것 같았고
 다음 순간...견딜 수 없이 슬퍼졌다
  


 아카리의 그 따스함을
 그 영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디로 가져가면 되는지
 나는 몰랐으니까
 
 우리는 앞으로도 죽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우리의 앞에는 너무나 거대한 인생이
 아득한 시간이
 감당할 수 없게 가로놓여 있었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은 불안은
 이윽고 천천히 녹아들어
 아카리의 부드러운 입술만이 남았다
 
 그날 밤
 우리는 밭 옆에 있던 작은 헛간에서 보냈다
 
 낡은 모포에 웅크리고 오랜 시간 이야기하고
 어느 새 잠들어 있었다
 아침 움직이기  시작한 전차를 타고
 나는 아카리와 헤어졌다
 
 저기, 타카키군
 
 타카키군은 분명 앞으로도 잘할 거야
 고마워
 
 아카리도 건강해야 해
 편지 쓸게 전화도
 
 아카리에게 보낼 편지를 잃어버린 것을
 나는 아카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키스의 전후로
 세계의 모든 것이 변해버린 것 같아서다
 
 그녀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다고
 강하게 염원했다
 

그 생각만을 하면서 나는 언제까지나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i miss you so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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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1.

혼자만의 여행은 지루하고 불편하고 외롭기 짝이 없음을 안다.

기간이 짧아도, 길어도, 그것이 국내건, 해외건 마찬가지다.

발구덕 마을로의 첫 여행부터 그러했다.  

이번 여행은 지금까지의 여행 중 아마도 가장 힘들고, 외롭지 않을까.

알면서 왜? 답은, 그래도 간다, 다. 답이 없다. ㅎㅎ

 

2.

아스완의 어느 시장골목 길, 부른 배를 두드리며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눈 앞에 커다란 배낭을 멘 젊은 커플이 보였다.

행색이 꾀죄죄한 게 무척 오래 떠돈 모양인데,

먼지 날리는 지친 뒷모습이 꽤나 인상적으로 남았다.

최초로 장기여행을 꿈꾼 순간.

 

3.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4.

언제나 내 걱정에 마음 졸이지만 놓을 땐 놓을 줄 아는 나의 멋진 엄마는,

당신이 이루지 못 했던 어떤 자유를 내게 주고 싶어했다.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

엄마 때문에 내 인생이 너무 답답하다고 여겼던 십대 시절은,

돌이켜보면 결코 길지 않았다.

사진 한 장 찍는 순간에도, 엄마가 내 곁에 있을 것만 같다.

 

5.

안부를 묻고 싶거덩 toiless@gmail.com을 이용해 주세요.

집주소 남기면 엽서 보내드릴께요. ^^

 

6. 대략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를 돌아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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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

거의 매년 나이와 관련된 포스팅을 하는군. 나이가 들어서 괴롭다거나 새롭다거나 하는 건 아닌데, 나이가 한 살 먹을 때마다 스치는 생각들이 있다.

 

영화판에서 일하는 지인들과 관계를 끊기 전에 (--; 지금은 거의 끊은 거나 다름없다) 한 친구에게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내가 스물 아홉쯤 됐을 때 하는 일이 없고, 네가 영화판에서 꾸준히 버티어 경력을 쌓고 있었다면, 나를 이끌어 줘. 스크립터도 좋고 연출부 막내도 좋아. 한 번쯤은 해 보면 좋을 것 같아. 뭐, 그런 내용이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닌 것 같고, 다만 스물 아홉이라는 적당히 멀고 적당히 막막한 미래에 이런저런 가능성 없는 계획들을 연결지었던 것이다. 지금 또하나 기억나는 건, 한 친구 녀석과 얘기를 주고받던 중, 스물 아홉이 되어도 너나나나 애인이 없으면 같이 살아 보자 했던 거다. (그 녀석한테 애인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재취업은 했나? ㅎㅎ)

 

같이 살아보자거나, 같이 멀리 떠나보자거나, 그런 의미없고 부질없는 이야기들을, 이제 스물 아홉이 된 나는, 더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20대는 그냥 흘러갔다. 대학교에 들어갔고, 별 거 아닌 대학생활을 했고, 그즈음의 분위기를 타고 휴학이다 뭐다 졸업도 늦게 했다.(지금 생각하면, 걍 7학기만 다니고 졸업은 일찍 할 걸 후회막급이다.) 사랑했고 이별했고 아프기도 많이 아팠다. 뭔가 늘 동경하던... 그런 일을 하게 됐고 한동안은 열심히, 온마음으로 푹 빠져 있었다. 신념은 있었지만 부족했고 얕았고 좁았다. 하지만 때로 승리하거나 성취했고, 그 기억은 나를 이 곳에 붙잡아 주었다.

 

잠시 멈추어선 지금, 뒤를 돌아보거나 앞을 내다보는 일은, 영영 쉽지 않을 그 일은 나를 더욱 막막하게만 할 뿐이어서 덮어두기로 했다. 일단은, 덮어두기로. 해가 바뀌어 다시, 거의 새로운 한 시기를 뛰어야 할 때 나는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거다. 그 상황은 아마도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고, 구하고자 하는 답은 늘 멀리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이상한 낙관주의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부딪치는만큼, 나는 혼자가 아닐 거다.

(어차피 혼자인 건 혼자인 거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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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찡찡이. 깽깽이. 뿡뿡이.

엄마가 가만히 '아가'라고 부를 때의 느낌이 좋다. 아가 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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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프게도,

병아리 로봇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선 금세 혹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고 싶지만, 여지껏 키우지 못 하는 이유는.. 가족들의 극구만류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오래도록 반려동물을 책임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닌텐독스나 병아리 로봇 같은 대체물들을 때때로 갈아치워 가며 살 것 같다. 다마고치가 유행일 때, 거들떠 보지도 않고 우스워했건만. 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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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일

분신 노동자 상태 악화.

한미FTA 협상 타결.

한덕수 총리 인준안 가결.

 

5일 아침에 이어서.

허세욱 아저씨의 수술 이야기를 보았다. 장기 상태가 좋아 피부이식 수술을 빨리 할수록 좋은데, 이후의 간병과 부양을 할만한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가족들이 수술을 극구 반대했던 모양이다. 결국 주변인들의 각서에 의지해 수술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FTA 체결 전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러한데, 어쩌면 그래서 그 분은 더욱 공감하고 더욱 절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더욱 먹먹해 졌는데.... 수술비와 얼마간의 성금은 모일 지 모르겠지만.. 모두의 책임인 그의 남은 삶을 얼마나 가까이서 바라봐 줄 수 있을지, 거기에 마음이 쓰인다. 시간이 흐른 다음, 결국 모든 게 가족의 몫으로 남고 나면, 그 가족에게 우리는 정말 못 할 짓을 하게 되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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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나 어릴 적, 그러니까 엄마가 끔찍스런 시집살이에 자주 울면서도 버티어 나가던 그 시절, 엄만 아빠와 그의 혈족을 싸잡아 비난하기 위해 '이씨 집안 사람들'이란 말을 애용했다. (물론 그 말엔 특별히 할머니가 포함된다.) 그 때 난, 그 경멸의 함의 속에 어쩔 수 없이 나도 포함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그냥 싫은 것도 아니고, 몸서리치게 싫었다.

 



언니가 친정에 가 있는 동안 오빠는 집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1동에서는 언니가 차려주는 밥 먹고 꼼짝도 않고, 6동에서는 엄마가 차려주는 밥 먹고 꼼짝도 않는다. 첫 며칠 동안은 눈꼴이 시어서 잔소리를 좀 했다. 계속 그러기도 민망해서 입을 닫은 후로는, (언니한테는 남편이요, 엄마한테는 아들이다 보니, 내가 계속 뭐라 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던 거다 --;;;) 오빠한테 시켰으면 싶은 일을 내가 하게 되었다. 반찬을 나른다거나 간단한 설거지를 한다거나, 오빠가 했다면 난 다른 일을 분담했을텐데. 으휴. 결국 악순환의 고리를 깨지 못 하고 나도 그 안에 들어간 셈이다. (안타까운 건 언니의 태도다. 굳이 나를 '아가씨'라 부르며 오빠에게 하듯 내 뒤치다꺼리까지 하려는 언니를 난 이해하기가 어렵다. 내 이름을 부른다고 언니에게 뭐라할 사람도 없는데 말이지. 엄만 시집 와서 처음에 고모 이름을 불렀다가 할머니한테 혼났다고 한다.)

 

엄마랑 아빠는 하루에도 최소한 두 번은 통화를 한다. 집안일을 혼자서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빠는, 콩나물국을 끓일 때도 방청소를 할 때도 쓰레기를 버릴 때도 엄마한테 물어본다.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는데 충격이 크다. --;;;; (물론 외로움도 한몫 할 거다.) 오빠도 아빠 나이면 아빠나 똑같아지겠지. 엄마는 너도 똑같으니 할 말 없다고 하지만, 몰라서 못 하는 거랑 알지만 귀찮아서 안 하는 건 다르다! 새삼 알게된 사실은, 엄마에게 기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 거.

 

대학 들어간 후부터 우리집은 형편이 나아졌고, 같이 안 살면서 가족들끼리 애틋함 때문에 정이 더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운좋게도 가족 안에서 나는 별로 피곤할 일이 없었다. 엄마는 엄마였고 아빠는 아빠였고 오빠는 오빠였으니까. 관계에서 오는 피로는 학교에 가서나 생기는 것이었고, 집에서는 아니었다. 물론 가족관계도 얼마나 피곤할 수 있는지, 얼마나 냄새나는 정치가 작용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내게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빠가 결혼하면서부터, 그러니까 내게 언니가 생기면서부터 관계의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언니는 좋은 사람이다. 엄마 역시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 된 타인들 아닌가. 가치중립적인 언사 하나도, 그 사람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될 지 모른다는 걸, 요즘 새삼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해도 '얄미운 시누이'가 된 것이다. 예상치 못 했던 역할에 조금 당황스럽다. 아무리 엄마라지만, 혹시 언니가 책잡힐 수 있는 말은 옮기지 말아야 하고, 언니한테도 오빠한테도 그냥 생각나는대로 얘기하면 안 되는 입장이다.

 

오늘도 할머니의 전화는 엄마의 화를 돋구었다. 그냥 모른 척했다. 어차피 뻔한 거고, 엄마의 반응만 봐도 알 만하고, 난 그들을 나와는 상관없는 족속으로 생각한 지 오래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도 최소한이길 바라고, 최소한의 가족 안에서도 최소한의 역할만 하기를 바란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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