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8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9/23
    의료보장제도 - 돈과 생명의 거래(5)
    ninita
  2. 2006/08/16
    가족의 탄생 / 김태용(2)
    ninita
  3. 2006/08/14
    나나 / 오오타니 켄타로
    ninita
  4. 2006/08/13
    친밀한 타인들 / 빠뜨리스 르꽁뜨
    ninita
  5. 2006/08/10
    가끔씩, 다시 영화광.
    ninita
  6. 2006/07/30
    아담 가르시아(1)
    ninita
  7. 2006/07/28
    괴물 / 봉준호(1)
    ninita
  8. 2006/06/02
    라스트 데이즈 / 구스 반 산트
    ninita
  9. 2006/04/26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 / 로잔나 아케트
    ninita
  10. 2006/04/02
    망종 / 장률
    ninita

의료보장제도 - 돈과 생명의 거래

한참만에 꺼내보았다. 뉴욕의 지역미디어센터 dctv를 설립한 존 알퍼트의 다큐.

 

 

서로 마주보고 있는 킹스 카운티 병원과 다운스테이트 병원은,

너무도 극명하게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과 죽음을 교차시킨다.




촬영은 어설프고, 편집은 정직하다.

기교없는 나레이션에 변변한 음악조차 없다.

그러나 6개월간 두 병원을 오가며 촬영한 내용에는,

돈이 없어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들을 항상 대하는 의사과 간호사,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공무원들과의 인터뷰,

제도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과 인터뷰가 있다.

 

툭 끊기듯 끝나지만, 풍부한 내용은 분노와 슬픔의 여운을 길게 남긴다.

 

77년작인데, 어느 의사와의 인터뷰를 보면 60년대와 비교하면서 그 때는 돈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70년대 후반에도 이 지경이었는데, 근 40년이 되도록 상황은 더욱 나빠져 가고 있고, 대체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지, 생존 자체가 경이로웠다.

 

생존과 삶은 어감이 참 다르다. 어느 누구의 삶도 삶이어야지, 극한의 생존이어서는 안 된다.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 이토록 풍요로운데, 미국에는 이제 백만장자라는 말이 억만장자에 밀려 퇴출될 지경이라는데.

 

엊그제 응급실 한 번 갔다왔더니 진찰료랑 피검사 소변검사료, 엑스레이, 진통제값 해서 8만8천9백원이 나왔다. 거기에 외래진료를 받으라 해서 그리 나간 돈이 또 1만5천2백30원. 하룻밤새 10만원을 쓴 셈이다. ..

 

http://www.eidf.org/2006/fall/sub/program_view.htm?prog_no=135

 

뒤늦게 찾아본 씨네 21 인터뷰

http://www.cine21.com/Magazine/mag_pub_view.php?mm=005001001&mag_id=40189

 

호호호, 닮고 싶은 사람이군.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가족의 탄생 / 김태용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나 / 오오타니 켄타로


 
glamorous sky / 나카시마 미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친밀한 타인들 / 빠뜨리스 르꽁뜨


 

그는 그의 방을 통째로 옮겼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가끔씩, 다시 영화광.

기억하기로, 수줍은 말투가 인상적이면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던, 한상준 선생의 번역서가 나왔다.

 

 

김영진의 은근한 책광고 : http://film2.co.kr/column/roughcut/roughcut_final.asp?mkey=167



트뤼포도 지독한 영화광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지독한 영화광의 800페이지로 요약된 삶을 번역해 낸 또다른 지독한 영화광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방대한 작업을 또 누가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비브르 사 비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한상준 선생의 수업이 한몫 했다. 그는 영화에 대한 애정을 한껏 안은 채로 수업했고, 수도 없이 본 그 영화에 대해 여전히 아련하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학생들의 동의를 구할 땐, 저 지칠 줄 모르는 애정이 철없어 보여 참 많이도 웃었더랬다.

전혀 생각해 보지 못 했던, 지금 들으면 그건 과도한 해석이라고 놀릴지도 모를, 그런 영화읽기가 참 많이 즐거웠는데.

 

선생님은 여전히, 때로 동네 치킨집에서 홀로 맥주를 마시며, 외로움을 달래며, 영화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영화라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종의 시체애호증처럼 필름이 마모될 때까지 우리는 스크린 속 꿈의 실체를 거듭 음미하고자 영화관을 찾는다. 비디오와 DVD로 매체가 호환되는 현대에 그런 영화광의 매혹은 점점 과거의 것이 돼가고 있지만 유한한 실제 삶과 달리 실제 삶을 모방한 이미지는 불멸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트뤼포의 영화적 스승이기도 한 평론가 앙드레 바쟁의 명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영화는 현실에서 되살릴 수 없는 일종의 시체와 같은 것이지만 동시에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불멸성의 화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화에 대한 내 감정도 양가적이다.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스러운 요즘 같은 때 더더욱 그 간극은 멀어졌다 좁혀지기를 반복한다.

 

시원한 골방에 처박혀 지나간 대학시절을 추억하며 한상준 선생의 땀이 고스란히 배어있을 800페이지를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라고 쓰면서도 아아아... 정말이지, --;;;;;; 당장 끝내야 할 리포트와 녹취 작업과 가슴에 묻어둔 프로젝트와 포항건설노동자들과 깨진 빼트의 카메라와 찢어진 안프로의 뒤통수와 종로구청 앞에서 노숙 중인 장애인 활동가들과 여전히 싸우고 있는 하이텍 노동자들과 9월에 있을 한미fta 3차 본협상과 한미정상회담과 광우병 쇠고기 수입 재개와 국정홍보처의 횡포와.. 강제철거를 코앞에 둔 평택 상황과.. 냉방병과 더위 먹은 나의 삐리리함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담 가르시아

 

아무래도, 코요테 어글리에 아담 가르시아가 없었다면. 흠... 다시 봐도 꺄아.

사랑스러운 영화. 그런 진부함에도 이런 에너지가 담겨 있다는 게 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괴물 / 봉준호

 

"그러나 그들의 싸움을 가로막는 진짜 적은 괴물이 아니다. 어쩌면 괴물은 맥거핀에 불과하다. 이 처절한 가족은 지금 ‘2006년, 대한민국’이라는 괴물과 싸워야 한다."

 

정지연의 평론에 동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라스트 데이즈 / 구스 반 산트

 

이런 장면이 있었던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앵글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그의 삶에서 사라진, 아무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그러므로 실상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 마지막 며칠을 담기로 결심했다. 시적인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펀트>의 누이 같은 영화. 사실 나는 그닥 좋지 않았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날들을 어떻게 상상했을지, 그것이 궁금해서 찾아간 극장. 당연히 <도어스>를 바랬던 것은 아니다.

 

오프닝은 아주, 아주,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선택적으로 농도를 달리하는 앰비언트 사운드와 낮은 웅얼거림, 보일 듯 말 듯 나뭇가지 사이로 흔들거리는 걸음이 아주 마음에 들었단 말이다. 컷이 바뀌고 나서 반대편 기슭에 있던 그가 이편으로 건너와 뒷태를 보이는 움직임까지도.

 

그런데 확실히 나는 낯선 것에 호의를 베풀지 않는 사람. 생경함을 사랑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나의 몰입은 끝이 나 버렸고, 오프닝에 이어 두 장면 정도 - 창가에서 원경으로 빠지는 장면이랑 it's the long lonely journey from death to birth 부르던 장면 - 를 제외하곤 떨떠름해 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커트 코베인 같던 블레이크가 마이클 피트로 보이기 시작한 것도 문제. 난 마이클 피트가 싫다. 어른이 되다 만 애 같은 얼굴이 정말 꼴사납다. 유난히 싫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가리워진 마지막 순간을 이토록 표현해 낸다는 것, 그것은 인정이다. 예를 들어 기형도의 죽음 같은 것, 개인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의 시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오롯이 빚어낸 영화는 어떤 느낌일 수 있을까. 고정희의 죽음. 예민한 이들의 죽음들. 최승자가 죽고 나면 뭐라도 하고 싶어질 것 같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권력을 창의적인 발상의 실현으로 연결 지으며 변방의 아웃사이더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서 아웃사이더로서의 예술가로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는 그의 모습과 주변 현실이 상업주의의 최전방인 미국에서 목격되는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며 실험이란 젊은이의 특권이란 것이 허상임을 깨닫는다. 삶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도 실험은 성숙의 결과물로 제시될 때 더 감동적이다." - 김영진, 필름 2.0


 

후후... 두 갈래의 길이 있었고,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했고, 훗날 한숨을 쉬며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그 앞에는 모호한 길이 놓여 있었구나. 이제서야 보고 웃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 / 로잔나 아케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망종 / 장률





 

언니들, 창호, 흔들리는 발걸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