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사는 일 / 나태주

1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 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나래 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다 죽는다.

 



세상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퇴근 버스를 놓친 날 아예
다음 차 기다리는 일을 포기해버리고
길바닥에 나를 놓아버리기로 한다

누가 나를 주워가 줄 것인가?
만약 주워가 준다면 얼마나 내가
나의 길을 줄였을 때
주워가 줄 것인가?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시험삼아 세상 한 복판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다

나는 달리는 차들이 비껴 가는
길바닥의 작은 돌멩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모두가 즐거운 몽상가일 뿐?

<69><몽상가들>

 

모두가 몽상가일 뿐이었다고,

그 시절은 꿈의 시절이었다고,

빛나는 젊음은 무엇이든 탐닉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고,

무엇이든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위한 여정에 다름 아니었다고,

그렇게만 말해 버리는 것이 싫었다.

 

한 때 뜨거웠으나 이제는 시시해져버린 청춘들이 그렇게 떠들어대지 않아도,

지금 이 세상은 뜨거워 본 적 없이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청춘들로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 그들 모두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사랑해.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야 할, 그러나 빼앗긴,

자기 몫의 삶을 되찾기 위해 피눈물 흘리는 자들 앞에,

영화는 이렇게 무력한가? 혹은,

이렇게 무력함을 조장하는가?

 

그 꿈을, 그 에너지를 어떤 '비전'으로 보여준다기 보다는,

모르겠다. 나에겐 그랬다. 무력함, 이었다.



<69> 역시 거슬리는 구석이 상당하지만, 그나마 귀엽게 봐 줄 수 있겠다.

 

 

우리들의 청춘 시절이 비극적인 까닭은 지독한 입시지옥에 시달려서가 아니다. 돌이켜 생각할 때 가장 아쉬운 것은, 나와 내 친구의 꿈이 같았다는 것. 나와 친구가 아닌 이의 꿈도 같았다는 것. 청춘이 꾸는 꿈만으로 이 세상의 어느 한쪽에서는 바람이 불고 태풍이 일 수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 우리를 둘러싼 갑갑한 세상을 향해 돌 한 번 던져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는 빛나는 청춘의 시간이 없었다는 것. 너무 빨리 늙어버려서, 이제는 세상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이 빠져버렸다는 것. - 소설가 공선옥..

 

<몽상가들>을 읽어내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영화광들의 영화다.

68년 5월 혁명의 작은 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앙리 랑글루아(씨네마떼끄 관장) 해임 사건으로 시작해서... (재현과 뉴스릴의 흥미로운 교차편집)
"신선한 이미지"를 보는 행위에 대해 표현하는 나레이션은.. 관능적인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이자벨의 처녀성이 그렇게 비유되는 건, 아.. 싫어..)

 


 

베르톨루치는 매튜의 입을 빌어 영화 만들기에 대해,

피핑 탐, 관음증, 부모의 침실을 훔쳐보는-거역할 수 없는 짜릿한 범죄...

그런 얘기들을 한다. 이 영화 역시, 그에 충실하게 '훔쳐보기'의 매력으로 짜여져가고..

나로 말하자면... 예술의 자기반영적인,

그러니까 이런,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이런 식의 편집이나 대사들을 즐긴다.

서로가 서로의 레퍼런스가 되고 중첩되고 분열되고 새롭게 의미가 생성되는.

(여기서는, 글쎄. 새로운 의미의 생성까지 나아가는 것 같지도 않다.)

 

그 정치적 관점의 모호함만 아니라면 좋아했을텐데. 쩝.

모호함이 아니라 불쾌함인가.

(무셰뜨의 자살과 이자벨의 자살이 같이 놓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거미의 계략"은 20대 초반이었던 나에게 꽤나 충격적인 영화였고,

일견 각성시킨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던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길거리에 TV 방송국을 세우다

길거리에 TV 방송국을 세우다

: 이탈리아 공동체TV 운동

 

김희정(ACT! 편집위원)

telestreet, 즉 이탈리아의 해적TV  방송에 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웹에서 볼 수 있다. 왼쪽 그림을 클릭하시라..

 

인터내셔널미디어에 올리려고 찜해놨던...

번역할 시간이 없는데, 누군가 해 주었으면.. ~.~

 

보시려면 퀵타임플레이어 필요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현장 속으로, 현장 밖으로!

* 이 글은 30 bullets/sec님의 [현장 속으로, 현장 밖으로!] 에 관련된 글입니다.

[편집자주] 이번 호부터 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국내 영상활동가들이 직접 쓴 원고를 연재한다. 오랫동안 활동해 온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로부터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통해 새로이 유입된 인터넷 매체의 영상활동가까지,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를 고민들을 담아보는 기획이다. 원고의 내용과 형식 모두 자유이며, 기고하는 활동가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솔직한 필치를 기대해 본다.

그 첫 원고,

현장 속으로, 현장 밖으로!

- 비정규직노동자 영상운동에 대한 모색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녀들, 하나 되어 투쟁하다


아래에서는 위를 보고, 위에서는 아래를 보고,
"동지들, 힘내라"고 말했다.

생일을 맞이한 지상의 동지에게,
하늘의 농성자들은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2005년 3월 21일, 민주노동당 거점농성 96일 차.
이 날의 기습 농성 - 시위 현장에서 그녀들은 하나였다.

그녀들의 승리가 멀지 않았음을 믿.는.다.

 

05. 03. 21. 경찰청고용직노조, 서대문 기습 고공농성 벌인 날.

 

영상 출처 : 미디어참세상



편집하다가... 웃는 얼굴들이 너무 예뻐서 캡처했다.

초상권 무더기로 침해하는군.. ㅡ.ㅡ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 주리라 믿어요..

경찰청고용직노조 화이팅~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봄, 3일의 休.

멈추어라멈추어라멈추어라.

일요일 저녁 7시다.

앞으로 12시간 안에 씻고 자고 일어나 다시 씻고 사무실로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

 

묵은 것들을 삭히려면 3일이 아니라 3년은 13년은 걸릴 것 같은데.

내일이면 중심을 잡아야 한다.

 

며칠간 함께 한 것들.

 



극영화/어져스터, 아톰 에고이앙 (done)

소설/바늘, 천운영 (done)

다큐/인간의 시간, 태준식 (done)

기타/현대가족이야기, 조주은 (nearly)

다큐/기차길 옆 공부방, 서경화 (done)

수필/홀로 사는 즐거움, 법정 (not much)

기타/분노의 그림자,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 (not much)

소설/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done)

극영화/밀리언달러베이비, 클린트 이스트우드 (done)

극영화/여자 정혜, 이윤기 (done)

수필/인생은 아름다워라(영혼의 순례, 묘지기행), 맹난자 (nearly)

 

여자, 정혜.. 애정만세를 떠올리게 하지만 애정만세는 아닌... 상처마저 도식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그 배열들을, 모른 척 넘어가며 영화에 이입할 수 없다. 상처 가진 독신녀에게 모성을 환기시키는 후경의 배치와 오프사운드들도 거슬릴 뿐. 호명, 응시, 눈부신 초록 - 그것이 희망인가?

 

밀리언달러베이비.. 단단한 근육은 모두 살로 흘러내린 모건 프리맨 할아버지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그들의 노년이 아름답다는 생각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헐리우드 영화로군. 물론 영화 속의 모습일 따름이지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바늘 / 천운영

1.

천운영은, 내게는 낯선 작가다.

 

그녀가 등장한 새천년 즈음부터 소설 읽기에 게을러진 탓이려니 한다.

어디선가 스치듯 들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밤샘 끝의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갈을 견디지 못해 서점에 갔을 때, 도둑질 하듯 그녀의 첫 단편집을 집어들었다.

 

천운영의 소설이 새로운 것은, 두 가지 지점에서였다.


 



2.

하나는, 육식성과 폭력성을 갖춘 '추한' 여자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였다.

그러나 육식성도 추함도 '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야생성.. 여자들은 야생의 초원이거나 동물, 그 양자다.

월경 越境..하는 여자들..

 

3.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건만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좀체 일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일상에 대한, 역시, 세밀한 묘사.

문신은 어떻게 하는지, 소 머리는 어떻게 가르는지, 곰장어 껍질은 어떻게 벗겨내는지, 박제는 어떻게 하는지...

그 어떤 것도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거리가 있는 일이건만, 치밀한 묘사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어버린다.

 

4.

여기에 덧대어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랑, 성애, 가족의 이야기는 잔혹하고 처연하다.

어느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단편이 없다.

동물적인 자극이나 피비린내 나는 충격 따위 좋아하지 않는 나인데,

그런데 어쩐지 천운영의 소설들이 마음에 들어버렸다.

 

<월경>, <등뼈>는 베스트, <포옹>은 시점을 바꿔가며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의 종횡무진이 마음에 드는 작품.

 

그러나 명확한 것은, 소설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거다.

영화라면, 몸서리치게 싫어했을 것 같다.

 

5.

소재에 강하게 기대는 그녀의 작품들이 과연 어디까지 변주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소설이고 영화고 간에 동어반복이라고 생각한다.

주제에 있어서건 형식에 있어서건 반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졌다면, 그를 작가라 칭할 수 있을 거다. 천운영이 독특하고 강한 소재에 천착한다 해도, 세상으로부터 그 소재를 선택하고 이끌어낼 줄 아는 시각은 이미 그녀만의 스타일이다.

 

조만간 두 번째 소설집인 <명랑>을 읽어야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가슴 아파 죽겠다

토요일 기아-현대차 본사 앞 집회. 건너편에서 집회를 마치고 짧은 행진을 해서 본사 바로 앞까지 왔다. 누군가 채증을 해댔고, 열받은 노동자들은 준비해 간 달걀을 예정보다 빨리 유리문에 던져댔다.

 


사진 왼쪽 아래,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보일까?

달걀이 깨져 내리기 무섭게, 한 청소용역노동자가 빗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바로 옆에 있던 노동자가 말한다.

 

"저거 봐. 아주머니 또 청소하네. 가슴 아파 죽겠다."

 

 

 




 

이래서 가슴 아프고, 저래서 가슴 아프고,

산다는 게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보드카 라임.


 

천장에 시계가 있던 바,

그리고 보드카 라임.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

 

세 번의 통화. 갑자기 끊겼거나 먹통이었고, 심지어는 받지 못 했지만.

더이상 아쉽지 않음을 확인하며 기뻤던.

 

----------------

 

050318 _ 레니, 프라우다, 두 분에게 고마웠다는 걸 기록해 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히드'들을 기억하자.

* 이 글은 migrant님의 [ 왜 자히드를 돕는가?] 에 관련된 글입니다.

 

왜 자히드를 돕는가, 라는 글을 읽으면서..

연대를 위한 상상력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고맙다.

 

 

이주노동자인터뷰프로젝트를 찾아보니, 역시나 자히드가 있었다.

 



고용허가제 실시되던 날,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나는 자히드를 인터뷰 했었다.

그 날 블로그에 썼던 글 을 찾아봤다.

 

"스무살에 한국으로 건너온 방글라데시 출신 자히드씨는 이제 서른살이다. 7년 반을 같은 제과점에서 일했다. 나중에는 팀장까지 했다. 한국말도 능숙하고 기술도 익혔고 한국 문화도 안다.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자히드씨는, 농성 생활이 힘들긴 하지만, 자살한 동지들을 생각하면(작년 고용허가제 법안 통과 후 단속 기간에 열명이 넘는 이주노동자가 자살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하면, 새로 들어올 이주노동자들을 생각하면, 투쟁을 접을 수 없다고 했다."

"노동허가제 쟁취하면, 가능하면 빵집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길..."

 

이런 말들이 적혀 있다.

부끄럽지만, 오늘도 난 '연대'를 다짐한다.

수많은 '자히드들'과의 연대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