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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표결에 부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폭력사태'의 진실 - 3. 단상점거 by 비정규직완전철폐를위한영상프로젝트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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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 : 대관식에 맞서다

* 이 글은 hey1님의 [부시 취임식에 가다2 - 집회와 가투에서 만난 사람들.] 에 관련된 글입니다.


MANDATE? : confronting the coronation

 

우연히 뉴스를 봤다.

지지자들의 거리에서는 땅을 밟으며 천천히 걷고,

반대자들의 거리는 황급히 지나가는 부시 행렬. 

무지 웃기다 싶었는데,

마침 뉴욕 imc에 이 날을 담은 짧은 다큐멘터리의 예고편이 뜬 걸 발견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스를 채택한 영상이었고, no rights reserved라고 되어 있어서..

나도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면서 영리 및 개작허용이라고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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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흘러가는 강물만 바라보란다.

침도 피도 튀기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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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bye, 수전 손택.

 

 

1933 - 2004

 

Let's by all means grieve together.

but  let's not be stupid together.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p.154 '타인의 고통')

 

일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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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쌍둥이 자매가 있다면.

 

언제였더라.. 광주비엔날레에서 만난 사진작가.. 제니에타 에어...

그녀의 작품에는 늘 쌍둥이가 등장한다.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작품들도 좋지만, 나는 저 사진이 제일 좋았다.

매끈하고 건조해 보이는 마른 몸매와... 무엇보다 저 무표정한 얼굴.

네 곁에 있지만 난 널 이해하거나 공감하려 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라도 있어주면,

좋을 것 같아..

 

그러고보니, 에곤 쉴레의 그림 중에서 내가 젤 좋아하는 건 '자위하는 소녀'

어째 좀 비슷하군.

 

 

내게도 쌍둥이 자매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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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재회.


풍동에, 다녀왔다. 거진 6개월만의 방문?

풍동철대위가 승리 보고 대회를 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채남병 위원장님은,

내게 승리라는 '선물'을 하게 되어 기쁘다고 하셨다.

나야말로 기쁘다. 올해 안에 풍동의 승리를 볼 수 있어서.

활동 초기에 만난 현장이 승리를 했다니, 정말 기쁠 수밖에.



풍동에 처음 간 건, 총선이 있었던 4월 15일.

 

3월엔 대통령 탄핵 사태가 있었고, 세상은 미쳐돌아가는 듯했다.

총선 날, 미친 세상과는 상관없이 일상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카메라를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선택했던 현장이 풍동 철거촌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노숙 투쟁 중이던 장애인들의 집회였다.

 

(첫 방문 후에 썼던 기사 : 그 많던 풍동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첫 만남이 있은 열흘 쯤 뒤던가, 풍동에 침탈이 들어왔고, 침탈 직후에 다시 찾아갔었다. 그러다 5월 초,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진 대대적인 침탈이 있었고, 그 날은 오후 내내, 저녁까지 풍동 골리앗 앞에 있었다. 애초에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위원장님은 위험하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다. 별 수 없이 바깥에서만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거렸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주변엔 덩치 큰 용역들 뿐. H빔을 단 포크레인이 골리앗을 두드려팼고, 철대위 분들은 정말이지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포크레인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돌을 던지고.. 그런데 용역들은 고립된 공간인 골리앗 안으로 화염병을 던져 넣고 있었다. 그건 안에 있는 사람들더러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작은 카메라 한 대 들고, 추위에 떨고 있던 난, 용역들의 위협에 또 한 번 떨어야 했다. 두려움과 무력함. 그 날을 생각하면 그렇게 막막했던 기억 뿐이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쉬운대로 내 촬영본을 편집해 올렸는데, 다음날, 풍동 골리앗 안에서 촬영한 소스를 얻었다.

결과적으로 내 촬영본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되어버렸지만. ^^

골리앗 안에서의 촬영본은 참혹함 그 자체였고,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public_access&id=1024&page=3)

사이트에 올리자마자 연대하던 여러 사람들이 소스를 퍼나르면서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주류 방송사에서도 빨리빨리 움직여줬다.

 

수많은 언론에서 관심을 기울였고,

풍동은 미디어를 통해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한 행복한 사례로 남게 됐다.

어느 누구도 풍동을 쉽게 건드릴 수 없었고,

수차례의 협상 끝에 결국은 요구했던 가수용과 영구임대주택 입주권을 쟁취했다.

 

(참세상에서 올린 기사 및 영상은 풍동 철대위 언론보도 페이지의 제일 위에 모여 있다.

 http://raracult.lin4u.com/nobreak/press.php)

 

그 과정에서, 내가 한 역할은 따지고 보면 참 미미했다. 기존에 열심히 연대하던 분들의 힘이 컸다. 그럼에도, 채남병 위원장님을 비롯해서 처음부터 매번 만나고 인사하고 이야기나눴던 몇몇 분들은, 내게 너무 고마워들 하신다.

나는 외려 그 분들이 고마운데 말이다.

 

골리앗 마당에 도착하자마자 소사 김상원 부위원장 아저씨랑 눈이 마주쳤는데,

아저씬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나를 때리려 했다! ㅡ.ㅡ

김상원 아저씨는, 처음 봤을 때 무쟈게 무서운 인상이었다.

게다가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는 태도를 깔고 말씀을 하시는데 정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풍동에 가기 전에 철거민 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간 덕에, 아주 다행스럽게도 아저씨의 질문에 적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찾아가면서 신뢰를 얻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찌나 이뻐 하시는지.. ㅡ.ㅡ

소사 쪽도 붙고 있다는데, 꼭 한 번 오란다. 아....휴......

성락경 아저씨도, 조직부장 할머니도, 김 총무님도.. 뭐 다들 여전하셨다..

규찰 나섰다가 용역들에게 정신 잃도록 얻어터졌던 아저씨도,

아주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셨다.

그 분만 해도, 김상원 아저씨 못지않게 나를, 내 카메라를 믿지 못 해 인터뷰 한 번 하기가 무서웠던 분인데, 지금은 나만 보면 고맙다고 웃으신다.

 

그건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내가 노력했던 과정들, 그리고 결과적으로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는 느낌.


 

풍동 분들은, '투쟁'이라는 걸 통해서 '연대'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고 있었고,

자신들도 언제든, 어떤 문제에든 '연대'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난 그 분들을 쉽게 좋아할 수 있었다.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 거기서 힘을 얻고, 또 싸워나가고, 그 과정 속에 단단해지고.

 

채남병 위원장님, 그 분이 늘 앞에 서 있었다.


 

참 수줍은 사람. 어쩌면 위원장이라는 직책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줍고, 긴장도 잘 하는 분.

 

처음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가 기억난다.

도무지 내 눈은 쳐다보지도 못 하고,

경직된 채로 문건을 그냥 줄줄줄줄 읽으면서도, 종이 든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서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변화의 폭은 놀랍도록 컸다.

다음엔 내 눈을 보셨고, 다음엔 말도 자연스러워졌다.

기자회견 때는 가감없이 스스로의 감정을 표출하면서도 중요한 말씀을 잘도 하셨다.

괜히 내가 뿌듯할 정도로..

 

소주 한 잔 건네시는데, 흔쾌히 받았다. 그래봤자 입술만 적시는 나지만.

위원장님은 조만간 옥살이를 하게 될 거다.

어차피 다 아는 거, 그냥 인생대학 간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어떻게 사실 거예요? 하고 물으니, 인생대학 다녀온 후엔 지역 일반노조 건설에 힘을 보탤 거란다.

 

내가 요즘 답답한 문제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길 했더니,

어차피 이 체제 하에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다, 고 하신다.

가난한 자들이, '체제 전복'과 '혁명'을 얘기하며 같이 웃었다.

 

풍동을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지만, 동시에 다른 철거촌을 찾아가지 못 했던 죄스러움이 참 크다.

오늘만 해도 상도2동 철거민(작년 사제총 논란이 일었던, 그 건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출소한 지 1달 되었단다), 소사 철거민, 월곡동 철거민, 청와대 앞에서 벌써 석 달 넘게 자리잡고 투쟁 중인 철거민.. 많은 분들을 만났고, 그 분들은 하나 같이 '한 번 찾아오라' 했다.

 

그 마음 안다.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정말 미안하다.

 

나는 '네'가 아니라 '노력할께요'라고 얼버무렸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슬펐다.

그 자리에서 난 믿음을 드릴 수가 없었다.

 

이주노동자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민수씨랑도 오랜만에 인사했다.

 

풍동 가는 길은 참말이지 멀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마을 버스를 타고서야 겨우 도착하는 곳.

그래도 가길 잘 했다.

 

입주날에도 꼭 오라고들 하시는데, 가봐야지...

심지어는 그 후에도 놀러오라고 하시는데,

 

^^

고맙습니다...

승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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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원정투쟁, 그 3일의 기록' 정리하면서.

뭐가 문제였는지 기억해 둘 필요가 있어서 기록..

 

겨우 업로드. 결국은 지저분하게 끝났다.

한 번 정도, 수정을 하게 될 것 같군.

 

* 블로그홈에 게시하지 않아도, 와서 글을 읽을만큼 저에게 애정이 있는 분들이라면, 영상 보고 나서 꼭 코멘트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 댓글도 좋고, 메일도 좋고. 저의 메일은 toiless@jinbo.net입니다. (과연 누가 와서 볼까? ㅋㅋㅋ)

 

 

덧붙이자면, 나는 이런 식이 싫다.



- 일본원정투쟁 동행 취재라는 갑작스런 배치, 기획을 할 여력이 없었다는 점.

(시간이 있어도 딱히 기획을 하진 못 했을 것 같다. 전혀 상이 그려지지 않았으므로.)

미리미리 계획이 되고, 아주 낮은 수준을 뛰어넘는 정도의 기획이 필요할 듯. 뭐, 현장에서 많이 달라지는 거야 당연하지만, 적어도 어디에 방점을 찍겠다는 것 정도는 있어야. 원정투쟁단만 쫓을 것인지, 일본 노동운동계도 짚을 것인지, 누구를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보일 것인지 등등.

 

- 텍스트까지 해야한다는 부담감에 현장에서 영상에 대한 고민을 할 여력이 없었다는 점.

기사에 적당할 법한 인터뷰는 많이 했지만, 정작 영상에는 적당하지 않았고,

현장에서는 그 인터뷰를 하느라 다른 장면들을 풍부하게 담을 수 없었다는 점. 다음부터는 절대 두 가지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겠군.

 

- 텍스트에 대한 부담 혹은 현장에 대한 판단 미숙으로 인해 모든 현장을 담으려 했던 과도한 욕심. 어차피 불가능한 건데 말이야. 전노련이나 렝고까지 갔던 건, 모르겠다. 다른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충분히 활용 가능한 소스겠지만. (일본 노동운동에 대해 얘기하고자 했다면.) 결국 기획 부재에 따른 문제로 볼 수 있겠군.

 

- 아, 이 부실한 체력. 3박 4일 내내 생리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가방 짊어지고 하루 12시간 이상씩 움직이면서 기간 중에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했다고 토닥거려주고 싶긴 하지만, 다녀온 이후에 체력 회복이 너무 더뎌서 다른 일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 작업에 착수하는 것도 늦었다. 별로 개선의 여지 보이지 않음.

 

- 사실 작업이 늦어진 가장 큰 이유는, 내 촬영에 대한 불만 때문에 다시 테이프를 쳐다보기조차 싫다는 점이었다. 애초에는 좀 중요하게 생각했던 장면들이, '렌즈를 닦지 않아서' 쓸 수 없다는 걸 도착과 동시에 알았고, 카메라를 너무 많이 움직이는 바람에 쓸 그림이 없을 거라는 자책과 또 뭐가 있었더라... 핀마이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집회 때 피사체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습관 때문에, 모든 인터뷰를 대문짝만한 클로즈업으로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것도 있고..

 

- 사실 FTA의 문제에 대해서 짚으려 했다면 원정투쟁보다는 투쟁 이전과 이후의 소스와 더불어 FTA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인터뷰들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장에서 많이 담아내지 못 했고, 이후에는 그냥 '원정투쟁의 기록'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다 포기했는데, 그러다 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FTA가 뭔데? 혹은 왜 반대해야 하는데? 에 관한 명확한 규명이 필요하다는 것. 뭐냐면, 내 친구들도 봤을 때 FTA를 저지해야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한다는 거다.

 

- 듣자하니 '못 가진 자들의 행진'에서 일본이라는 '선진국'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단다. 체불임금 달라고 하는 노동자를 죽인 토목회사 사례를 비롯해서 '못 가진 자'들이 실태가 어떠한지 아주 절절하게 얘기들이 나왔던 모양인데, 그 때 나는 워크샵을 촬영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분담했던 거고 소스를 받기로 했던 거니까 뭐 내 탓은 아니지만, 아쉽긴 하네.

 

- 일본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사전에 대강 공부를 하긴 했지만, 언어 문제도 있고 다루기 힘들었다. 아주 대략적으로라도 담고 싶었지만, 전노련, 렝고 촬영분을 다 버리기로 하면서 포기.. 실은 한국 노동자들에게 일본 노동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보면서, 한국 노동운동의 현재에 비추어 어떤 생각을 하는가, 같은 질문은 했어야 옳다. 근데 왜 생각을 못 했지? 나중에 정용택씨 촬영분 보면서 반성했다. 현장에서 분명히, 구호 마지막이 '비정규직 철폐'인 걸 들으면서, 질문거리를 생각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ㅡ.ㅡ 그리고 말하자면 연대투쟁에 대해 기록하면서, 일본 쪽은 너무 안 다뤘다. 소스부터 일단 한국 투쟁단 쪽에 치중해 있긴 했지만, 일본 측을 아예 안 다룬 건 아닌데, 번역 맡길 사람도 딱히 없고 하다 보니 편집할 때 다 빼버린 것 같다. 내가 했는데 기억도 잘 안 난다. ㅡ.ㅡ 망둥어 같으니라구.

 

- 편집 호흡이 너무 빠르다. 근데 조절을 잘 못 하겠다. 20분 넘어가는 작업도 처음 해 보는 거고. 무리수가 많았다. 예전에 풍동 작업할 때도, 호흡 조절 한다고 했는데 막상 극장 가서 보니까 너무 빨라서 당황했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호흡이 빠르다는 건, 내 영상에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거다. 자꾸 넘기고 싶어하고, 자꾸 다른 걸 보여주면서 관심을 돌리고 싶어한다는 얘기니까.

 

- 단순한 원정투쟁의 기록이라 해도, FTA의 기본적인 문제점은 짚어주고 싶었고, 한일 노동자의 연대가 필요하고, 이런 비민주적이고 파괴적인 세계화에 대항해서 저항의 세계화, 희망의 세계화가 필요하다는 메세지를 아주 낮은 수준에서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게 힘들었다. 워크샵 촬영분을 좀 활용했다면 아마도 김어진씨 발언 등을 통해 얘기를 할 수 있었을텐데, 이종회 대표 발언 중에도 짤막하나마 있었고. 하지만 워크샵은 아예 뺐고, 이종회 대표는 다른 발언을 넣는 바람에 그것까지 넣을 수가 없었다. 결국 문제를 잘 짚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해 제대로 얘기한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 FTA의 문제는 한둘이 아니다. 양자간 협상이니까 강자의 논리가 적용되면서도 다자간 협상보다 높은 수준의 자유화를 논의하기 쉽고 타결도 쉽다. 관세 및 비관세 장벽 철폐를 얘기하는 '자유무역협정'이다 보니, 비교열위의 산업은 다 죽어야 한다는 걸 기본으로 한다. 비교열위의 산업, 예를 들어 그것이 농업이라면, 그 산업이 지닌 비시장적 가치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는 것도 문제다. 비교열위의 산업이 죽었을 때의 대책 또한 없다. 비관세 장벽을 없애야 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는 똥통에 처박는다. 지적재산권이니 서비스 개방이니 뭐니. 암튼 다 열어제껴서 투기자본만 맘껏, 양껏 활개치고, 나머지는 다 죽으란 소리다. 공개하면 공격받을 거 뻔하니까 숨어서 협상하는 주제에, 이 비민주적인 협상의 결과는 국내법보다 위에 놓인다.

 

그런데 정작 영상에서는, 노동권에 대한 얘기만 겨우 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뭐, 일반 시민들이 내 영상을 볼리야 만무하지만, 난 분명히 그들도 설득하는 영상을 만들고 싶단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그러니까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조차 잘 인식하지 못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노동권 제약 때문에 FTA를 저지해야 한다는 건 설득 불가능한 주장이다. 아..... 알지만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참... 답답하고 화나고.. 그런다..

 

아직 내 능력은 여기까지라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어차피 내가 잘 하는 일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힘들게 작업할 거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다.. 한숨 나오는군.. 난 왜 쥐뿔 못하는 걸 좋아하고 지랄일까. 썅.

 

뭐, 그건 그렇고. 문제를 인식했다면, 다음에는 눈꼽만큼이라도 나아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까.

 

관심의 오지랖은 대서양태평양인데 능력의 오지랖은 세숫대야구나. 씁.

 

...

 

2005 인디다큐페스티발 상영

2005 전주인권영화제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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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것들.

짜증이 늘었습니다. 걱정만 앞세우고 정작 몸은 뒷짐지고 있습니다. 타인을 부러워만 합니다. 챙겨야 할 것들을 챙기지 않고, 의지하려고만 합니다. 몸을 돌보지 않습니다. 먹지 않거나 자지 않고,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많이 잡니다. 똑바로 걸을 수 있는데 자꾸 비틀거립니다. 자주 눈물이 납니다.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굴곤 합니다.

 

스물여섯 겨울입니다.

 

스물일곱이 시작되는 겨울부턴,

모든 것으로부터 반발짝만 떨어지기. 반만 웃고 반만 울기.

 

그렇게만 해도 반뼘은 어른이 되어 있을거야.

 

...



glide / 호흡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그리하여
겨울이다. 자네가 바라던 대로
하늘에는 온통 먹물처럼 꿈꾼 흔적뿐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는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고.



1.

한 블로거가 이 글에 트랙백을 걸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 것이지만, 그의 글에 트랙백을 다시 걸고, 덧글을 남겼다.

 

"개인적인 투정 속의 단어들이 타인에겐 이런 연상의 결과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도, 좋기도 합니다..... "

 

그러네 정말... 당혹스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덕분에 읽게 된 김명인 선생의 글은 참 좋았다..

 

2.

"몸 전체가 눈물주머니" 같다는 그는,  스스로의 "눈물의 힘"이 여전히 "소중한 삶의 밑천들"이며,  그 힘을 빌어 "겨자씨만큼이라도 그릇된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 지불"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일종의 대리체험이며 면죄의식"이라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을 경계하지 않는 순간, 그는 "세련된 세치 혓바닥을 지닌 눈물주머니"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런 내가 무섭습니다" 라고 말하고,

"값싼 눈물로 곧 짓물러터지게 생긴 노안 두 덩어리"만 남았다며

"일찍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러운 새벽"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노안은 혜안일 터.

 

진심이 절절한 글에는 기꺼이 속을 테다.

 

3.

나 자신, 곧잘 울곤 하며,

아직까지는 그 "눈물의 힘"이 내 "삶의 밑천"이라 믿는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나 역시, 나의 눈물을 경계한다.

 

4.

요절 시인들의 시를, 

팔이 아프도록 베껴쓰곤 하던 십대 시절로부터 나는,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 한 것 같다.

 

두 가지 의미에서,

나의 눈물이 반이면서 두 배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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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스만의 사진

 

율스만의 사진엔 제목이 없다.

 

호명되지 않으면 의미있는 존재일 수 없다고 노래한 시인이 떠난 밤,

존재가 지워졌으며,

또한 제목이 없음에 누구도 호명할 수 없는 사진을 보며,

희미하게 흥을 느낀다.

 

그런 밤이다.

 

_ 싫다.

 



굿 윌 헌팅을 보면.... 로빈 윌리엄스가 맷 데이먼한테 하는 대사가 있다.

 

_ it's not your fault.

 

_ 네 잘못이 아냐.

_ 네 잘못이 아냐.

_ 네 잘못이 아냐.

 

로빈 윌리엄스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_ 네 잘못이 아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내게 _ 네 잘못이 아냐, 라고 말해줬으면.

 

피식.

아무리 짱똘을 굴려봐도 소용없다.

 

_ 내 잘못 맞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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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을 다시 읽어야겠다.

몇 줄만 떼어낼 수 없었다. 평생을 세상과 반목해 왔다는 사람. 어설픈 화해가 자꾸 회자되는 요즘, 그의 존재를 되새길 수 있어서 기뻤다.

 

 

"노동자들 신음소리에 숨이 막힌다" / 이문영 기자

(사진 클릭하면 레이버 투데이 기사로 넘어갑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와 난쏘공부터 찾았다.

2000년에 새단장하고 나왔을 때 구입한 건데,

지금 보니 이런 말이 적혀 있네.. 훗..


 

나로서는 꽤나 공들여서 또박또박 쓴 글씨다..

요즘은 저렇게 글씨 안 쓰는데...

 

4년 전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그 때도 깨어있는 사람이고 싶기는 했나보다..

 

아직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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