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루시퍼와 큰 타자 - <콘스탄틴>을 보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불쌍한 일도 없지만, 얼마 전 나는 정말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극장에 들어갔다. 사람으로 북적거렸다면 짜증마저 났을 터이지만, 몇 명 없는 사람으로 인해 모처럼 조용해진 극장을 위안삼아 걸려있는 여러 영화를 죽 훑어보았다. 오직 커다란 스크린에 어울릴 법한 영화를 보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콘스탄틴>이란 영화를 골랐다. 보고 난 뒤의 느낌은? 뭐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라고 할까. 영화 자체가 매우 훌륭하다거나, 뭐 배우가 멋있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난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위에서 말한 "뭐 나쁘지 않군"이라는 반응보다 더 흐뭇한 기분이 계속 남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그 느낌이 뭘까라는 의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내 생각에 <콘스탄틴>은 기독교적인 선, 악 구도를 나름대로 재해석한 영화인 듯 싶었다. 하느님과 사탄이라는 절대선, 절대악 사이에서 인간은 그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단, 한 가지 단서가 달려있는데 저승세계의 선과 악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했던 것처럼 직접 영향력을 행세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반드시 그들은 그들과 인간의 혼혈종을 통해서만 이승의 세계로 개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묘한 균형을 이루던 중, 사탄 즉 루시퍼의 아들이 하느님의 충복인 가브리엘과 손잡고 사탄의 눈을 속여 지상에 강림하려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브리엘이 왜 인간 세계를 모두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루시퍼의 아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냐고? 인간은 고통이 심해질 수록 선한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보다 심한 고통 속에 몰아넣어 인간의 선한 본성을 극대화시키겠다는 어이없는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주인공인 퇴마사 키아누 리브스는 이 시도를 깨기 위해 자살을 시도해서 자신의 영혼을 호시탐탐 노리는 루시퍼를 불러내고, 그 찰나에 아들의 시도를 알게된 루시퍼는 말썽꾸러기 아들을 데리고 가버린다. 

 

뭐 이러저런 이야기를 다 빼고 대충 이런 이야기인데, 여기서 내가 제일 맘에 들었던 것은 루시퍼의 형상이다. 루시퍼는 배트맨 포에버에 나올 법한 짙은 화장을 하고, 흰색 양복을 쫙 빼입은 제비족처럼 차려입고 등장했던 것이다. 물론 말투는 리마리오를 빰칠 정도로 느끼하고...ㅋㅋㅋ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희생을 통해 지옥에서 천당으로 방향을 급선회하자, 비겁하게 폐렴에 찌든 폐를 주물럭거려 그를 다시 살려낸다. 다시 살면서 나쁜 짓을 더해서 꼭 지옥으로 오라고 말이다. 영화 전체의 대전제를 구성하고 있는 한 축인 절대악, 그 절대악을 상징하는 인물이 이런 식으로 등장했을 때 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계속 남아 있던 흐뭇함은 바로 이 루시퍼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즐거움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데 오늘 라깡과 지젝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난 이 루시퍼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상징계에 의해 소외된 주체는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대타자가 '정답'을 갖고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대타자에게서 그것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대타자도 주체가 찾는 '숨겨진 보물'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경험을 함으로써만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홍준기, 지젝의 라캉 읽기 -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라깡에 의하면 주체는 상징계에 의해 필연적으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상징계는 주체를 이러저한 주체로 미리 규정(호명)한다. 그러나 항상 그 규정은 어긋날 수밖에 없기에 그 결여가 소외로 경험된다. 그 소외를 벗어나려면? 먼저 환상효과를 노린다. 즉 상징계를 구성하는 대타자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즐거운 해결책은 대타자 또한 결핍 덩어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거기서 주체는 집착에서 벗어나 "분리"된다.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 대립 구도에 매달려, 끊임없이 한 쪽 편을 신성화하고 반대쪽 편은 배제하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주체는 끊임없이 환상을 재생산하는데 집착할 수밖에 없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방방곡곡 외치고 다니는 전도사들처럼. 하지만 절대악이 위에서 말한 "루시퍼"처럼 결점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신성불변의 대립 구도의 한 축을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리스의 신들이 결점 투성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인간들이 보다 즐겁게 살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고.

 

대타자와 주체의 관계 문제는 비단 종교의 문제에 해당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 또한 군대라는 상징계 속에서 이미 군인 혹은 군인을 길러내는 훈육관이라는 위치에 호명되어 있기에 그 역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군대라는 감시체계에 적응하지 못해, 군대라는 빅브라더 혹은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대타자"가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었고, 군대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이상적인 군인을 길러내는 훈육관의 역할이라는 환상과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심리적 압박감을 느껴왔었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런 심리적 압박감은 교관으로 생활하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환상에서 벗어나 분리될 때 오히려 이곳에서의 일도 잘 풀리는 것 같기고 하고.

    

아무튼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라깡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쉬고 있을 때, 경쟁자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가 아니라 "내가 쉬고 있을 때, 경쟁자도 쉬거나 딴 짓을 하고 있다"라는 즐거운 사고방식이 아닐까. 어쨌거나 이런 생각과 더불어 <콘스탄틴>에 등장한 루시퍼는 나에게 즐거운 기억으로 한동안 남을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