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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혁명의 선전물은 어깨걸고 모여라!

3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3/29
    120째 [3월 23일]
    꿈꾸는나비
  2. 2006/03/11
    대풍으로 이어지는 뜨거움
    꿈꾸는나비
  3. 2006/03/11
    100일째 촛불을 밝히며 쌀을 지키는 사람들
    꿈꾸는나비
  4. 2006/02/25
    우리 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집회
    꿈꾸는나비
  5. 2006/02/17
    우리쌀과 농업을 살리기 위한 촛불집회 80일째(1)
    꿈꾸는나비
  6. 2006/02/15
    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2
    꿈꾸는나비
  7. 2006/02/10
    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1(2)
    꿈꾸는나비
  8. 2006/02/09
    꺼지지 않는 우리쌀 살리기 촛불집회 76일째
    꿈꾸는나비
  9. 2006/01/23
    [긴급 제안] 지율 스님을 생각하며(1)
    꿈꾸는나비

120째 [3월 23일]


 
      모심의 자세로, 살림의 길을 - 나락한알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문화제와 서명운동 120일째]
작년(2005년) 11월 23일 쌀협상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 한 후 11월 24일부터 2006년 3월 23일까지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비바람과 눈보리가 몰아쳐도 단하루도 빠지지 않은 120일째까지, [쌀포기 농업포기 국회비준 무효다] [대책없는 쌀개방 국회비준 철회하라] [식량주권 포기한 노무현정권 물러나라] [쌀은 생명이다. 반드시 지켜내자] [쌀은 주권이다. 끝까지 지켜내자] [정부가 버린 쌀과 농업. 시민의 힘으로 지켜내자] [쌀은 생명이다. 농민은 존엄하다] [농촌이 뿌리다. 농사가 희망이다] [쌀없이 평화없다. 반드시 지켜내자] [우리민중 쥐어짜는 한미FTA 반대한다] [평택 미군기지확장 막아내고 올해도 농사짓자] [한평도 내줄수 없다. 미군기지 물러가라] [생존의 적 평화의 적 미군기지 몰아내자] 등등...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쳐댔습니다. 120일이 넘은 지금. 매일매일 힘 빠지는 일들만이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지만, 기꺼이 일어서서 나아가는 힘을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풀뿌리, 민초, 그들이 있어 우리들은 집회내내 즐거운마음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쌀! 지켜야지"하시며 서명을 하고 가시는 그분들입니다. 그간 일만여명이 넘는 대구시민들이 서명에 동참하셨습니다. 쌀과 에너지와 물이 없고서야 이 땅을 살아가는, 주권을 가진 者라 할 수 있는지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왜 포기하라하고 왜 포기하는지 이 정부의 속내를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쥐꼬리만큼 남아 있는 주권마저 포기하라하니 이 정부가 과연 우리의 정부이며 그들은 이나라 사람들이 맞기나 한 것인지 그도 알 길이 없습니다. 120일을 지키는 오늘은, 촛불을 들고 있는 내내 오늘 벌어진 일들이, 뉴스에 나온 일들이 머리속을 뱅뱅돌며 답답한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어둠에 찬 이 반도의 항구란 항구엔 밥 짓는 쌀과 가공용 쌀들을 실은 배들이 밀고 들어 왔다고 합니다. 뉴스에 실려나온 내용인즉, '밥 짓는 쌀' 용도로 국내에 처음으로 수입되는 미국산 칼로스쌀 1372t이 23일 오전 6시 30분 부산항 감만부두에 도착했고, 부산, 경남, 경북 지역 농민 100여명은 0시 30분께부터 부산항 감만부두에서 수입쌀 입항 저지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감만부두 정문 철문을 뜯어내고 부두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하고. 23일부산항 감만부두정문 낮에는 수입쌀 입항 저지를 위해 강원도 동해항에서 사흘째 천막농성 중이던 전농 강원도연맹 소속 농민 10여 명이 중국산 쌀을 싣고 동해항에 입항한 뒤 하역작업을 하던 베트남 선적 빈동3호의 갑판을 기습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다 1시간20여분 만에 전원 연행됐다합니다. 중국산 현미 5668t를 싣고 목포항에 입항하려다 농민들의 반발에 밀려 목적지를 바꾼 베트남 국적 화물선은 23일 새벽에 인천항에 입항했는데 이 중국산 쌀들은 가공용이라고는 하지만 과자나 떡볶이, 가래떡 등으로 만들어져서 결국에는 우리들의 먹거리로 둔갑을 하고야 말, 쌀들이라고 합니다. 2006년 3월, 개나리는 활짝 개화를 시작했으나 과연 이 땅에 진정한 봄이 오고는 있는 걸까요? 2006. 3. 23. 땅과자유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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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풍으로 이어지는 뜨거움

대풍으로 이어지는 뜨거움

 

100일을 맞아 각자 준비를 많이 했을텐데, 음향이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하는 바람에 아쉬웠지만, 뒷풀이에서 풀어 놨습니다. 100일 동안, 거의 집회가 끝나면 자연스레 대풍으로 발걸음이 향해지곤 했습니다. 대풍식당 어머니께서도 100일 이라는 걸 아셨는지 기본안주로 계란말이도 내주셨고, 두루치기 안주도 많이 주셨습니다. 뒷풀이 자리에 이승렬 교수님과 민주노동당 동지들과도 함께 했습니다.

 

▲방을 가득 메운 땅과자유 동지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감독이자 땅과자유 시인인 장우석 동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낭독하고 있다. 

▲며칠 뒤면 합천으로 돌아가시는 농군이자 기타리스트, 소리꾼인 학진선배.


▲몇 달만 선보이는 하모니카 연주, 김현식의 '한국사람'으로 분위기는 익어 간다.


 

 

▲'청계천 8가'와 '저 창살에 햇살이' 노래를 시원하게 부른 준희형.

▲땅과자유 재주꾼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된 영우선배.


▲다 외우지 못 하는 우리의 교가 '천리길'를 힘차게 부르며, 우리의 흥은 절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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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째 촛불을 밝히며 쌀을 지키는 사람들

 100일째 촛불을 밝히며 쌀을 지키는 사람들

 

3월 3일(금) 늦은 7시 부터 한시간 반 가량 대백 앞 민주광장에서 쌀을 지키기 위해 100일째 촛불을 밝혔습니다. 우리쌀을 지키위해 30명이 넘는 동지들께서 참석해 주셨습니다. 민주노동당 동지들,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교사모임 동지들, 민중연대 동지, 녹색평론을 읽는 대구독자모임 동지들, 영남대 이승렬 교수님, 최연소 참가인 이산, 땅과자유 동지들 그리고 민주광장의 4그루 느티나무. 그 동안 함께 해주셨던 동지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멀고도 험한 길을 이제 몸풀기 정도 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날 아쉽게도 후원금으로 마련한 음향을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만 함께 했던 동지들의 뜨거운 연대를 확인했습니다. 101일째, 102일째... 한 걸음 또 한 걸음, 항상 동지들과 함께.

 

 

 

 ▲준비한 피켓과 초가 모지랄 정도로 함께 해주신 동지들.


▲서명 작업을 위해 100일 동안 목이 터져라 외쳤던 이진홍샘과 상민 


 ▲항상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시는 민주노동당 동지들.


  영남대 영문과 이승렬 교수님께서도 참석해주셨습니다.


▲떡과 막걸리를 준비해주신 환경과생명을 지키는 교사모임 동지들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신 민주노동당 동지들.


▲평택 미군기지 몰아내고 올해도 농사짓자!!


▲끊이지 않는 서명 열기.


  ▲펼침막을 달기 위해 이 나무를 타고 가지에 묶었다. "고맙다. 나무야!" 



▲100일 동안 함께했던 4그루의 느티나무에게 큰 절을 올리고, 막걸리를

 부어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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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집회

                               우리 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집회

 

며칠동안의 집회 모습을 모아서 전합니다.

입춘과 우수가 지나고 경칩을 앞둔 따스한 봄날이 오긴 하지만 쌀과 농업에 대한 문제는 오히려 엄동설한인 것 같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새삼스럽지만 이 말이 절로 나옵니다.

 

동지 여러분!

함께 합시다. 매일 저녁 7시, 대백 앞에서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이닌 거여.

 

                                                                                                -이현주 <밥 먹는 자식에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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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 21(화)  90일째

  날이 갈수록 시민들의 참여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90일째 촛불을 들고 있는 땅과자유 동지들 



 ▲91일째를 이어가기 위해 날짜를 고치는 장우석 동지. 


2006. 2. 22(수)  91일째

  민주노동당 달서구위원회 이종진, 여기복 당원의 참여로 91일째 집회를 힘차게 출발을 하였습니다.

 


▲흥겨운 기타 소리에 맞춰 힘차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서명하면 정말 우리쌀을 지킬 수 있냐며 물어보면서 서명한 학생들.

 


2006. 2. 23(목)  92일째

▲김기훈 동지와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김두현 사무처장님께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대백 앞 거리의 인파 속에서

 



▲집회를 마치고 뒷풀이 장소인 대풍식당에서 쌀밥을 받아 들고는 앞의 시를 생각했습니다.

"밥이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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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쌀과 농업을 살리기 위한 촛불집회 80일째

우리쌀과 농업을 살리기 위한 촛불집회 80일째

                                                           (2006. 2. 17)

 

 

 

 

2월 17일(금) 오늘로 촛불집회가 86일째가 됩니다.

지역의 많은 분들의 참가로 이렇게 촛불집회가 이어졌습니다.

 

결코 멈출 수가 없기에,

오늘도 내일도 계속됩니다.

 

7시~8시

대백 앞 민주광장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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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째 촛불집회입니다.



 

-내일은 평택에 가는 날입니다. 수근선배가 평택대행진을 위해 피켓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피켓옆에 녹색평론에서 이번에 새로나온 책 웬델 베리의 '삶은 기적이다'도 있습니다. 


 

-진홍이 선배가 서명하신 분들과 아는 사이인지 너무나 친근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구요. 혹시 제자인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성분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얼굴에 화색이 돋는 기홍이^^.. 무지하게 친절해 지더라구요...ㅋㅋ



 

 

*80일째의 촛불집회가 지나고, 오늘은 86일째 촛불집회를 위해 대백앞 민주광장에 도착해서

준비하고 있을 선배와 후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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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2

     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2

 

 

2월 1일(수) 밤 늦게 도착해서 2월 4일(토)까지 머물다 온 대추리의 모습을 전합니다. 

 

  

-희망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트랙터가 포탄을 얼마든지 몰아 낼수 있다. 어쩔 수 없다라고 모두들 말하지만 사실 내가 포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꾸는 것이라도 제대로 꾸고, 꾼 그대로 행할까 한다.


-이 땅에 미군기지는 물론이고 한국군의 기지 또한 존재의 이유가 없다.

대추리에 집집마다 걸려 있는 깃발은 말하고 있다. 이미 대한민국 국기의 존재의 이유는 없다고.


-대추초교 운동장에서 열린 520째 촛불행사. 같은 날 대구 대백 민주광장에서는 우리쌀을 지키기 위한 촛불집회 71일째가 진행되었다. 방방곡곡이 현장이 아닌 곳이 없다. 각자가 촛불을 들고 있는 그 곳이 전선이고, 투쟁의 현장이다.


-520일째의 촛불행사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서울지역의 인권활동가모임과 박원순 변호사 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빈집에 민변 법률상담소 개소식이 있기 전 길놀이에서 문정현 신분께서도 어깨춤을 덩실덩실. 대추리 우울증이 했던가. 하지만 이렇게 신명날 때는 한바탕 하고 막걸리 한잔이며 한시름 놓지 않을까요.

 


-신부님께서는 그것도 잠시 곧 쳐들어 올 정부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뭔가를 생각하시고 있는 것 같다.

 


-이 담장도 강제철거로 인해 곧 있으며 무너질 수도 있다. 평화가 살아

숨쉬는 이 담장을 당신들의 법으로 무너뜨리며 평화는 법전 속에만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믿는다. 손을 맞잡고 함께 한다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이루어 질 것이다.

 



-지킴이네 집에 붙어 있었다. 깃발 들고 함께가는 동지들이 보인다.

라르작에서도 그랬고, 평택에서도 그럴 것이다. 라르작이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평택이 라르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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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1

  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1

 

 

2월 1일(수) 밤 늦게 도착해서 2월 4일(토)까지 머물다 온 대추리의 모습을 전합니다.

 

 

 

-들이 울고 대추리 농민이 우는데 국가는 눈물을 닦아주기는 커녕 법을

핑계삼아 폭력을 사용하겠다고 경고장을 붙이고 있다.

 


-빈집인지 아닌지는 계량기가 있느냐 없느냐로 알 수 있다. 없어진 계량기는

국방부에 잘 모셔져 있을 것이다. 단전이 되면 전기는 물론이고 물도 난방도

안 된다. 이 겨울을 빈집에 거주하겠다고 들어간 전사들의 상황은 설명 안 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협의매수해서 이사를 간 집들은 하나 같이 이렇다. 쓸만한 것 모두

박살나있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 때문인지 더 흉흉하게만

느껴진다.

 


-뜯겨져 나가는 상황에 마냥 있을 수 만은 없어서인지 이를 악물고

카메라를 챙겨들고는 열심히 찍고 있는 마리아. 

 


-오전에는 용접으로 뜯어내더니 오후에는 크레인이 와서 이렇게 부수고

있다.

 


-빈집의 깨진 창문으로 보이는 건 황새울 들녘이다. 그리고 보인다.

머지 않아 저 들판에서 모심기에 정신이 없을 농민의 모습이.

 


-이 땅의 주인은 나락이다.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냐. 한 평도

내 줄 수 없다.

 



-이 들녘은 끝은 철조망이다.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게 아니다. 라고

김남주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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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우리쌀 살리기 촛불집회 76일째

 꺼지지 않는 우리쌀 살리기 촛불집회 76일째

 

 

 2006년 2월 7일(화)도 어김없이 대백 앞 민주광장에서 7시에서부터 8시까지 진행하였습니다.

 

 

-촛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農은 산이의 미래입니다.

 


-맞은 편의 찬송가 노래 소리에 아랫배에 더욱 힘을 주어 구호를 외쳤습니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서명 열기는 더해 갑니다.

 



-평택미군기지 막아내고 올해도 농사짓자!!  2.12 평화대행진의 선전을 위해 붙인

  달리는 선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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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제안] 지율 스님을 생각하며

[긴급 제안] 지율 스님을 생각하며

아래 붙이는 글은 작가 김곰치 씨가 쓴 글입니다. 지율 스님의 마지막 호소에 '공명'하기 위한 작은 노력으로서, 김곰치 씨는 이 글을 썼고, 전태일 열사의 모친이신 이소선 여사께도 전달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단지 이소선 여사께만 올리는 '사신'은 아닙니다. 지율 스님이라는 존재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에 '공명'하고 무엇을 기억하고, 그리고 과연 무엇을 지금 해야 하느지를 함께 생각하자는 간절한 제안이고 호소인 듯합니다.

 

김곰치 씨는 이 글을 자신의 이메일 주소록에 있는 모든 분들께 보내면서,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공명'을 덧붙여 또 자신의 주소록에 속해 있는 분들께 전달하는 방식으로 오늘 하룻동안 만이라도 이 메시지를 우리사회 곳곳에 널리 퍼뜨려 줄 것을 제안했습니다. (물론 홈페이지, 블로그, 카페 등에 올리는 것도 좋겠지요.)

 

우리가 지금 당장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도 한가지 의미있는 온라인 '초록의 공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함께 노력을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바란건대, 내일쯤은 이소선 여사께서 지율 스님을 직접 찾아뵙고 그 앙상한 손을 잡아주시기를, 그리하여 '전태일'과 '지율'이 만나는 하나의 '사건'이 이 땅에 깊은 생명의 파문을 일으키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지율 스님의 그 가느다란 수맥으로 부디, 부디, 초록 생명이 마르지 않고 흐르기를, 그리하여, 앙상한 겨울나무가 봄기운과 함께 겨울의 침묵을 털어내고 연두빛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시 소생하듯 그렇게 기운을 차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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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어머니,
 

제가 '전태일'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겨울입니다. 글쓰기를 해볼까, 하고 문학동아리에 입회하려고 동아리 룸의 쇠로 된 문 손잡이를 돌리면서입니다. 손잡이 옆에 엽서 크기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 노동자의 유서를 수동 타자기로 찍어 붙인 스티커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눈물이 잠깐 흘렀지만 어쩐지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고, 신학대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과 펜팔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학생이 책을 한 권 보내주었고, 저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자 열심히 읽었습니다. 민중신학 관련 책이었습니다. 거기서 읽은 서남동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역사의 현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그리스도적인 죽음을 알아보게 하는 빛이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태일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합니다 

군대를 다녀와 1995년, 저는 한 월간지에 기자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해가 전태일 사후 25주년이었죠. 제가 어머니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전태일의 수기, 일기 등을 모은 책, 어머니의 구술록 〈어머니의 길〉을 읽고, 전태일의 막내 여동생을 먼저 만났고, 그리고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뭔가 새로운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후 작가의 꿈을 이루고자 직장을 그만 두었고, 저는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낙향까지 했지요. 불현듯 어떤 한 이야기에 감동해 장편소설을 쓰게 되었고, 그걸 한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보름 정도 수정 기간을 주면서 출간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몹시 기쁘면서도 저는 무서웠습니다. 이제 곧 책이 나오게는 됐지만, 이 소설 이후 내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단명작가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눈앞의 장편을 수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주일은 다음 장편을 구상하고, 나머지 일주일에 지금 장편을 수정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슨 인연처럼, 전태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이 사회에서 작가로서 생존하는 것이 두려워 딱하게 몸부림을 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런데 위기의식을 가지고 전태일 생각에 매달리자, 이 자리서 상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전태일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전태일이 몸에 불을 붙이고 숨을 거두기까지의 몇 시간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고, 순간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것 같았습니다. 전태일이 얼마나 신실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는지, 그의 완전한 '진심과 본심'을 제대로 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전태일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잠도 거의 자지 못하고 전태일에 홀려 있던 아주 격렬한 1주일 동안, 제 주변에서 괴이한 일이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쩌면 일상의 사건과 뉴스일 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제 이해도를 쉴 새 없이 높여오는, 전태일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아프고 또 아름다웠다니!
  
저도 몰랐던, 제 안에 있는 작가적 기질, 일종의 몰입능력이 활짝 피어났던 것이지만, 전태일에 한없이 몰입하던 그 감정상태가 끝난 것은, 고향마을의 한 선배님이 불의의 화재를 당하고 결국 숨을 거두게 되는 일이 벌어졌고, 그 소식을 어머니한테 전해 들으면서였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음이 되어 책상 위의 장편을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은 사랑입니다
 
 

그 후,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6년 전 1주일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 안에 들어와 살아 숨 쉰 전태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그 감동을 소설로 쓰는 데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지만, 제 인생의 시간이 뜻있게 허락된다면, 언젠가는 쓰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친구들한테 "나중에 내가 죽으면, '전태일을 소설로 쓰려고 수십 차례 시도했으나 끝내 못 쓰고 죽은 작가'라고 묘비에 써다오"라고 말하며 각오를 다집니다.
  
제 마음 속의 전태일은, 어쩌면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간단하게만 말하면, 그저 그럴지 모릅니다. 어쨌든 서남동 목사님의 말씀이 참 맞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제가 전태일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적인 죽음이자 빛이었다는 것입니다.
  
서남동 목사님은, 전태일의 분신을,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분명 물리적으로 실재했던 그 불꽃, 그 시간을 일러 '그 순간 전태일은 시대의 아픔을 완전히 흡수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흡수'라는 말이 정말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마음의 눈이 봅니다. 그 불꽃, 그 시간 속의 전태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그가 온 마음으로 세상의 아픔을 다 빨아들였습니다. 세상의 아픔은 일순 없어졌습니다. 전태일이 다 먹어버렸습니다. 아픔을 자기 속으로 다 흡수하여, 아픔으로 뱃속이 꽉 차서 목까지 올라와 마침내 터져버렸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불이었습니다.
  
병원에 숯이 되어 실려 간 전태일은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사실상 위로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저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오래오래, 두고두고, 생각해보면, 제가 왜 이랬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의 '오래오래 두고두고'라는 말이 참 깊이 들어옵니다. 즉 전태일 자신이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무서운 행동을 하게 된 것도, 정말 '오래오래, 두고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라는 믿음을 줍니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사람이 쓴 것으로 믿기지 않는, 수기의 뛰어난 문장이 그의 비범한 사고력을 이미 증명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심시키려고 그 자리에서 "태일아, 그래 난 이해한다"라고 말하십니다. 그 말씀, 정말 잘하셨습니다! 전태일은, "역시 우리 어머니는 나를 이해해!" 하고 아이처럼 좋아합니다. 인간사에서 가히 유례가 없는 참혹한 순수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태일은 또, 자신의 뜻을 어머니가 대신 이루어달라고 요구합니다. 어머니는 "알았다"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줄 압니다.
  
저는 전태일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 그 추동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신뢰하고 체현하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기관지가 화기(火氣)에 녹아버려 숨쉬기가 힘들어 전태일은 의사를 향해 "내 목을 따라!"고 명령하고, 의사가 목의 붕대를 푸는 도중에 숨을 거둡니다. 사랑으로 존재가 완전해 있지 않으면, 그런 명령이 일체 나올 수 없습니다. 분신행위 자체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8시간 가량 전태일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면 누구든 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기가 주어지면, 저는 언제라도 전태일에 또 새롭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영원히 끝이 날 수 없는 이유는, 전태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는 존재가 전태일입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 그 추동력이 사랑입니다.
 
 

지율 스님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이소선 어머니, 저는 며칠 전 〈프레시안〉에 글을 하나 써서 보냈습니다. 지율 스님이 왜 또다시 아무도 원치 않는 죽음의 길에 나섰는지를 소상히 밝히려 정말 열심히 쓴 글이었는데, 글 말미에 전태일 생각이 났고, 전태일을 '우리 민족의 은인'이라고 썼습니다. 자기 목숨을 바친 그의 행동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그 후 독재정권의 탄압 속에 타락해버린 우리 민족의 감수성을 결정적으로 씻어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태일의 그런 사랑과 실천이 있어 지금도 한국 민중이 세상을 향해 발언을 하게 하고 또 힘겨우나 뜻있는 실천을 하게끔 하는, 배후의 한 든든한 힘이 되어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어찌 그가 우리 민족의 은인이 아닐 수 있습니까. 한없이 감사를 드리고 싶은 분입니다.
  
이소선 어머니,
  
이제, 저는 어머니께 지율 스님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다 읽으시면, 왜 제가 꼭 어머니께 지율 스님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며칠 전부터 지율 스님 생각에 제가 좀 미쳐 있습니다. 지금 스님이 어떤 형편에 있는지, 어머니도 뉴스를 들어 아실 겁니다. 아니, 스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지관 스님께 전화로 묻기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에 걸친 지율 스님의 단식은, 종교인의 단식'수행'이면서, 천성산을 지키려는 싸움에 있어 하나의 '전술'로도 많이 활용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해 왔습니다. 단식으로 어쨌든 단기적인 목표를 매번 성취했지 않습니까. 몇 차례의 아주 긴 단식을 늘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번 단식 소식을 들으면서도, 스님은 죽지 않으실 거다,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전술적이기도 했던 스님의 단식이 그런데 제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것을 남겼나 봅니다. 그것이 단식'수행'이라면 언제든 감동적이지만, '전술'의 성격이 강하면, 왜 또 저러시나? 이제 저 방식은 제발 그만 좀 하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단식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걱정되어서였지만, 〈프레시안〉을 통해 공개적으로 스님의 단식에 반대했던 한 숨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은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지율 스님이 가을부터 80여 일 동안, 거의 아무도 모르게 단식하였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흔들어 왔습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천성산을 향한 스님의 집착을 두고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전술로는 완전히 최악인데, 왜 저러시나? 압도적인 여론을 어떻게 저리 정면으로 거스르나? 이번에는 정말 죽음의 수행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셨나? 저는 겁이 났습니다.
  
조마조마 하고 있는데, 병원으로 옮겨진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다행이라고 안심한 것도 잠시, 스님이 그 어떤 치료도 거부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이 외진 시골집에서 큰 병원으로 가셨고 위급한 상황이 오면 언제든 의료진의 조치가 취해질 테니 쉽게 돌아가시진 않을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율 스님을 자주 만난 스님 한 분이 "딴 건 몰라도 밥 굶는 데는 도가 텄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한참 웃었던 기억도 납니다. 절대 허망하게 돌아가실 분은 아니라고 저는 용감하게 믿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월 16일,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스님이 언론에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전날! 저는, 지율스님에 대해 꽤 자주 보도를 하던 한 언론이 '내일 병실을 공개한다'며 '지금 스님은 몸무게가 39Kg로 알려졌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제 마음이 아주 복잡해졌습니다. 병원에 가기 전에 30Kg이라 하더니…. 스님이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스님 측 사람들이 과장한 것이었나? 병원에 입원해 어쩔 수 없이 몸무게를 재보니 실제로는 39Kg로 나왔나? 한 달은 더 버티시겠네. 그 사이 뭔가 대책이 나오겠지.
  
생각해 보면, 경북 안동에서 서울 병원으로 옮길 때도, 제가 본 사진 속의 스님은, 예상보다 처참하지 않았습니다. 모포에 가려 있어 얼굴을 잘 볼 수 없었기도 했습니다. 저는 '39Kg'라는 기사에 왠지 지율스님한테 속았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전술로서의 단식은 이제 완전히 끝났어!
  
그런데 언론에 막상 병실이 공개된 날 침대에 누운, 사진 속의 스님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제 머리를 누가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 같았습니다. 완전히 '미라'였습니다. 예술적 감성 하나는 정말 영민했던 지율 스님이 기력이 딸려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을 보는 것이 제일 괴로웠습니다. 얼굴 살이 없어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진에서 지율 스님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이제야 지율 스님의 본 뜻을 알겠습니다
  
 

제가 받은 충격은, 사실 무엇보다 죄책감입니다. 꽤 오랫동안 지율 스님을 옆에서 봐 왔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저는, 지율 스님이 정말 산과 함께 죽을 수 있는 분이라고는 한 번도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39Kg'이라는 터무니없는 오보를 믿었습니다. 아, 이렇게 자학할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따뜻하게, 아니 정확하게 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스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간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싸움의 목표를 수 차례 얻어낸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어쩌면 저는, 누구보다도 스님의 모든 것을 믿고 싶어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제 나름의 인식 기준에서 도대체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또 안 믿어져서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교활한 지식이 끝없이 공격해 와서 스님을 완전히 믿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끈질기게 의심하고 끈질기게 믿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스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쉽게 생각이 끊어지더군요. 그런데 사진 속의 스님을 보자마자 그 모든 의심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죽음 목전에 이른 스님의 사진을 보고서야 저는 스님과의 지난 모든 기억,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지난 세월, 스님의 모든 행동, 말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였는지, 갑자기 새로운 빛으로 거의 완전히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설마, 설마, 했는데, 지율 스님은, 정말 산이 되어, 산과 함께, 아니 산보다 먼저 죽을 수 있는 분이었구나!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바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사실 굉장히 겁 많고 여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지율 스님이 돌아가신다면,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고는, 제가 몽둥이를 들고 한국철도시설공단 사무실의 기물을 때려 부수는 상상이 다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스님을 알고 난 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스님을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다고 착각했던 게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착각한 대로 간사한 입이 그저 못 참아 마구 평가해대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이런 사람, 스님은 저런 사람, 그 편의적인 입들! 스님을 만나 무엇보다 용서해 달라고 빌고 싶고, 스님을 따뜻한 눈물로 안아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당장 서울로 가자,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지금이라도, 그동안 내가 하지 못한, 스님이 원한, 내가 할 일을 하자, 하자, 하자…. 근데 무엇을 할 것인가!
  
충격과 분노와 자책과 참회와 깨달음과 혼란….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복잡한 감정의 파도가 지나간 뒤,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정말 좋은 감정이 저를 휩싸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천성산을 향한 스님의 사랑, 그 안의 온갖 생명붙이들을 향한 집념어린 스님의 사랑이 새삼 너무나 놀랍고, 스님을 향한 경외심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두 번째로 '본심과 진심'을 똑똑히 본 것입니다. 지금 현재 진행 중인, 실제 존재하는, 세계의 본심과 진심을! 이 세계에 본심과 진심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 확신이, 제게는 왜 이리 감동적인 일이었을까요!
  
무엇을 할 것인지 명확해졌습니다. 내가 본 이 본심과 진심을 세상에 알리자! 지금 이 세계의 본심과 진심, 지율스님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저는 바로 책상에 앉아 며칠째 밀려 있었던 글부터 번개같이 마무리지었습니다. 단 하루라도 열심히 글을 쓰고 나니, 죄책감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율 스님이 바로 '전태일'입니다
 
 

이소선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제가 쓴 글을 보지 못하셨겠지만,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했습니다. 〈프레시안〉 의 댓글 게시판에는 스님에 대한 독한 욕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제 글을 찬찬히 읽어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지율스님에 관한 글이라면 아예 읽으려 들지 않고 공격부터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다시 두려워졌습니다. 너무 늦은 일일까. 이제 와 아무리 해도, 스님의 뜻을 살릴 길은 없는 걸까. 그 뜻을 전술적으로 잘 알리려면, 글을 쓸 때 지율의 지자도 들어가면 안되는 걸까. 세상이 너무 냉정하다. 오래 전에 지율스님을 포기해버렸다!
  
낙담하고 있는데, 구원이 왔습니다. 〈부산일보〉에 근무하는 손문상 화백이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손 화백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해 시대의 여러 아픔을 신문 지면에 참 열심히 그리는 분입니다. 〈동아일보〉에 근무할 때 데스크와의 의견다툼 때문에 결연히 사표를 낸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형이라 부르는데, 형은 제 글을 애정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생명, 생태보다 노동에 훨씬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 글 마지막에 한 말이 참 맞는 것 같네. 전태일이 노동자들 인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하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쳐 분신을 한 것처럼, 지율 스님은 천성산과 자연을 위해 하다하다 안되다가 결국 저리 되신 거 맞아. 전태일 때는, 전태일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다가 사건이 터지고 나서 사람들이 아, 하고 알게 되었는데…. 죽어가는 방식도, 지율스님이 평소 말하는 생명, 생태처럼… 얼마나 생태적이냐. 노동자 전태일은 한날한시 몸에 불을 확 지르고 죽고, 스님은 몇 달째 나무처럼 빼빼 말라 비틀어져서 끈길기게, 끈질기게… 근데 이제 어쩌니?"
  
사태를 새삼 안타까워하는 형의 말씀이 너무 고맙고, 제게 큰 용기가 되었습니다. "지율 스님은 지금 치료를 시작한다 해도 소생 가능성이 극히 적은데, 저는 이제부터라도 스님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해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겁니다!" '소생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그래도 나는 스님이 꼭 사셨으면 좋겠네…."라고 하십니다.
  
그 말이 또 참 고맙습니다. 스님의 사진을 본 이후, 제가 정말 이상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스님을 걱정하는 말 하나하나가 그냥 무조건 고맙습니다. 또 그런 말을 듣거나 보면 그냥 눈물부터 나오려 합니다.
  
이소선 어머니,
  
어머니 말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께 드리는 이 편지를 볼 것입니다. 지율 스님 사진을 보고 충격과 죄책감에 빠지고, 이어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불같이 일어나면서, 사진을 본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닷새 동안 정말 놀라운 심리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이해될 것 같고,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고, 그 어떤 악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6년 전 제가 전태일 생각에 홀려 있을 때와 아주 똑같은 심리 증상입니다. 저는 '지율 스님 안티'들에게마저 알 수 없는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정도입니다.
  

산을 위해, 다른 하찮은 생명을 위해 자기가 죽을 수 있는, 정말 죽는 스님을 보니, 그분의 사랑이 너무 놀랍고 감동적이어서, 제가 그 사랑에 완전 감전된 것만 같습니다. 스님의 진심과 본심을 저조차 때때로 의심을 했기 때문에, 저는 '지율 스님 안티' 분들을 미워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저보다 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때 '안티'였기 때문에 나중에 참회와 깨달음의 감동이 저보다 훨씬 더 엄청나고 격렬한 것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제 자신부터 사랑하고 싶어졌습니다. 과거의 의심들, 스님의 호소에 겨우겨우 감동했던 제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지만, 그러나 스님의 진심과 본심을 똑바로 보고 똑바로 믿고 제 속으로 받아들이자마자 마치 존재가 승격된 것처럼 제 자신에 대한 신선한 애정을 느낍니다. 온몸에 힘이 솟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가 없는, 너무나 신비로운 변화입니다. 지율 스님의 사진을 보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가히 마음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뭔가 어떤 진정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고, 그 사건이 정말 진정하지 않다면, 한 치의 거짓이라도 개입돼 있는 사건이라면, 이런 신비로운 마음의 기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 인생에서 꼭 두 번째입니다. 제 마음 안의 재현된 전태일 사건, 그리고 바로 지금 지율스님 사건입니다.
  
좋은 감정이 많은 새로운 다짐을 연이어 낳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 스님처럼, 나도 세상을 사랑해야겠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하고 이를 악물고 결심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절망과 냉소의 이유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 절망과 냉소에 굴복하여 스님이 이 세상을 심정적으로 포기하셨다면, 한국의 법제도를 지금처럼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망 직전의 너무나도 힘겨운 상황에서 스님이 지금에도 간절한 마음으로 대법원을 바라보며 "공명해주세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이 돌아가시면, 저와 변호사님이 재판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의 부탁이기도 하고요"라고 오랫동안 스님과 함께 해온 부산의 손정현 님이 전화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은 대법원이 올바른 판단을 내려줄 거라고 지금도 믿고 계신 것입니다. 스님은 사실 이 세상을 천성산만큼 사랑하고 싶은 분입니다. 늘 기다리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지금의 세상 꼴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는 없지만, 스님의 천성산 사랑의 열도와 깊이를 생각하노라면, 누구보다도 이 세상을 안쓰럽게 연민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수없이 스님에 대한 제 개인적인 옛 기억을 새롭게 깨달으며 감동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납니다. 스님의 블로그에 들어가 예전에는 상투적으로 읽기도 했던 스님의 글들이 한 구절 한 구절 너무 무겁게, 너무 빛나게 읽힙니다. 그러나 이런 감동의 시간에서 저는 순간순간 벗어나기도 합니다. 죽어가는 스님을 향해 냉소와 비하를 퍼붓는 이를 보면, 그때마다,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저들이 언제쯤 스님을 제대로 볼까, 그래도 저마다 여린 마음이 있는 한 인간인데, 나중에 후회를 어찌 감당하려고, 싶어집니다. 인터넷 공간의 실물 없는 아이디들이지만, 저 아이디가 제 누이, 여동생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말을 보는 것이 사형장면을 보는 것처럼 무섭습니다.
  
이소선 어머니,
  
전태일과 지율스님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두 분 다 그저 너무너무 고마운 분입니다. 제 일생 일대의 감동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스님을 의심하기도 했던 제 마음이 진정한 감동의 시간을 계속 연기시켜 왔다고 할지 모릅니다. 완전한 확신이 아니면 제게 이런 감동은 오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스님에 대한 의심이 분명 있었습니다. 세상의 온갖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 저리 많은데, 그 애착 때문에라도 스님은 못 죽는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정말 죽을 정도의 사랑인지는 참 몰랐습니다. 죽을 정도의 사랑은 죽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방식이 단식이어서 우리는 스님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도 죽을 정도의 사랑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병상의 스님은 완전한 인간이 되어 있습니다. 저의 경험에는 전태일에 이어 두 번째 완전한 인간입니다.
  
 

어머니, 지율 스님을 만나 주세요
 
 

어머니, 지금 지율스님은 이미 살고 죽는 문제를 떠난 분입니다. 오직 한사람이라도 더 마음의 눈을 뜨기를, 시체 같은 모습으로 그러나 맑은 목소리로 공명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님의 공명을 거부합니다. 저래 봤자 터널은 뚫리게 돼 있잖아! 하고 도대체 끝날 것 같지 않은 패배감을 나날의 양식으로 먹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님의 사진을 보고도, 고집 부리다 저렇게 가는구나, 하고 차가운 눈길마저 얼른 거둬내고는 생활의 일에 일희일비하며 경박하게 살아갑니다.
  
어머니, 저는 이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 부탁 하나를 드리려고 어머니께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노령에 몸이 많이 불편하실 테지만, 병원을 한번 방문하여 주세요. 지금 지율스님은 면회가 불가능한 상태인 줄 압니다. 때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맑은 정신일 때는, 최근 손봉숙 국회의원을 만나서는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합니다. 면회가 안 된다면, 어머니가 스님의 여동생이라도 만나 손을 잡아주세요. 아, 제발 면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기다리셨다가 스님이 의식을 차릴 때, 병실에 들어가 주세요. 그러나 부탁하건대,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제발 살아달라'란 말부터 하지는 마십시오. 스님의 이야기를 우선 좀 들어보세요. 5분만 이야기를 나누어도, 이 사회의 숱한 죽음의 현장에 섰던 지혜로운 어머니는, 스님이 전태일인지 아닌지, 바로 알아볼 것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죽는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온전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죽음은 정말 귀합니다. 어머니가 보시기에 지금 스님의 죽음이 전태일과 다르지 않다면, 세상에 꼭 알려주세요. 누가 우리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놨느냐! 이 어리석은 세상에 불호령을 내려주세요!
  
제 마음의 눈이 완전하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전태일이 노동자의 인권만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에 그렇게 시작했었지만, 결국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연약한 생명을 향한 불같은 사랑을 가진 이가 되었지 않습니까. 10년 전, 제가 어머니를 취재할 때, 거실 벽에 걸린 아들의 유서에서 '나를 아는 모든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를 가리키며, "내 아들은 다른 모든 존재를 자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전태일 이름은 많이 알아도 이런 진짜 전태일의 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전태일의 진심은 천성산이 바로 자기라고 하는 지율스님의 진심과 똑같습니다.
  
어머니, 이 세상에 전태일을 사랑하는 분들은 참 많습니다. 그 사랑하는 전태일이 지금 저렇게 죽어가고 있다면, 어찌 이리 무관심하고 냉정할 수 있을까요. 지금 전태일님은, 숱한 단식으로 몸이 많이 아픈 채 동국대학교 일산병원에 누워 계십니다!
  
전태일만큼 세상의 연약하고 안쓰러운 것들을 사랑했고 그 사랑이 너무 아파, 그 사랑을 도무지 어쩌지 못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신 분, 지율스님은, 스님의 지금 단식은, 전태일이 몇 개월에 걸쳐 길고긴 분신행위를 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여동생의 손만 잡아주어도, 그것을 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 하고 지금 벌어지는 이 끔찍한 사태의 본질을 새삼 분명히 깨달을 것입니다. 사회의 부정의와 부패, 냉소와 불신, 무기력과 만나 싸우고 설득하고 끝없이 사랑과 자비를 호소한 스님을 제대로 알아볼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거대한 사랑의 울음이 터져 나와 세상을 적실 것입니다. 돈독이 잔뜩 오른 이 민족의 감수성이 또 한 차례 깨끗이 씻기는 것입니다.
 
 

지율 스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전태일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은, 이 글을 여기까지 다 읽으셨다면, 조금이라도 공명하셨다면, 대법원에 탄원서를 보내주시기를 간청하고 싶습니다. 대법원을 하늘처럼 섬기며 현명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진심으로 써 주십시오. 과장 없이 솔직하게 개인적인 공명의 이야기를 써주십시오. 저도 미력이나마 제 할일을 계속 하려 합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면, 저는 언제라도 쓰겠습니다. 어떤 하찮은 댓글의 내용도 다음 글에 다 담아 제가 해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지율스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아보는 날까지, 수천수만 매의 글을 쓰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세상 어두운 곳에서 울고 있는 모든 눈물을 이제는 정말 사랑합니다. 패배감과 무기력에 빠져 그 눈물을 회피했던 지난 많은 시간을 참회합니다. 지율 스님의 천성산 사랑을 사랑합니다. 제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 이 사랑을 지키겠습니다. 
   
 
 
  김곰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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