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생각은 ‘심상정’이라면 마땅치는 않으나 투표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라면 적어도 말은 통하겠지 싶었다. 나는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
어쩌면 선거야말로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재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오래되었으나 짧은 제도는 그야말로 사람들을 제대로 길들였다는 생각이다. 어쨌건 찍을 사람이 없는 이 선거, 그렇다면 찍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정답인 동시에 오답이다.
한 사람의 투표 거부는 ‘기권’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투표 거부는 정치 행위가 된다. 수능을 거부한 고등학생은 ‘고졸’이 되지만, 전체 고등학생이 수능을 거부한다면 거대한 운동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으로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세상은 그렇게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대신 지배하려는 힘에 대항하는 다른 힘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반발력이 정치 행위로 등장했을 때 지배력은 그 힘을 무시하기 어려워진다.
정치가들의 입맛에 따라 바뀌는 법률은 대다수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힘이 정치가들과 기업들에 있다는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힘들더라도 사람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따라가고 점차 익숙해진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길든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 이끌림을 거부하고 대다수가 멈춰 선다면 이 이끄는 자는 다른 방안을 고민해야만 한다. 이 다른 방안이 독일지 당근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번의 반발은 다음 반발을 예상하게 한다. 이제 지배력은 반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현 민주주의라는 제도에서 가장 큰 반발은 단연코 선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선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선거’만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이 제도는 개인의 자발성이 한데 묶여 집단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고 이를 구체화한 것이 선거이나 꼭 선거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늘’ 여기에 있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지도자를 자리에 앉히고자 이놈 저놈 한 번씩 다 찔러보는 것으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난 투표 안 한다. 기권이 아니라 거부다. 난 몇몇 잡것들이 세상을 짜맞추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는 대표의 자리에 앉을 것이고 잡것들의 구성은 세상을 짜맞추려 할 것이나 적어도 그 손놀림이 가시에 찔릴 수도 있음을 고려하게는 해야 한다. 한 사람의 거부는 그저 웹상의 쓰레기 데이터로 뿌려질 뿐이겠으나 집단의 거부는 세상을 주물이려는 손을 베게하는 날 선 칼이 되게 한다. 적어도 어떤 정책을 시도하려면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