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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오늘(9.9) 모택동 영면

1976년 오늘 모택동(1893~1976)이 8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사실 이 디렉토리를 꾸준히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마오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늘날 모택동을 이해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아직도 마오주의에 입각해서 투쟁을 하는 세력들은 전세계에 몇군데 있고 중국에선 모택동 부적이 명절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며 모택동을 냉혈한 마키아벨리스트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뿐인가? 마이크 타이슨의 팔뚝에는 체 와 더불어 마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문신으로 박혀있다.

 

한 인물, 한 사건에 대한 진실한 해석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게 옳을 것이며 마오의 진실은 그에 대한 몇가지 해석 줄기 가운데 어딘가쯤 혼재되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에 대한 반대자나 지지자들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1911년 청년 마오가 혁명전선에 뛰어든 이래로 죽는 날까지 마오는 전근대적 농업사회에서의 반제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에 관한 교과서를 한 줄 한 줄 자신의 온 몸으로 써내려간 인물이다. 누구보다 철저한 공산주의자 였으면서도 창의력 있는 혁명가 였던 것이다.

 

모스크바랑 직접 라인을 대고 있던 이립삼 같은 초기 중공당 지도자들이나 프랑스 근공검학 출신인 등소평등과는 다르게 마오는 철저히 중국문화의 세례 속에서 커온 사람이다.(이것은 그의 큰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여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마오가 학습하던 영문판 공산당 선언이 후일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communist party 라는 원문에 마오가 달아놓은 주석은 뭔고 하니 '공산주의자 연회(宴會)'...--;; 파티가 당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잔치(연회)로 해석했다는 말인게다. 믿거나 말거나^^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 가운데서 마오가 남긴 주옥 같은 어록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정권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울 수 있다' 등등

 

결국 대장정을 마치고 이차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투쟁 중인 1943년 마오는 중공당 중앙정치국 주석, 중앙서기처 주석에 올랐고 죽을떄까지 중앙위원회 주석직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전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그 이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한국전쟁)에 장남 모안영을 참전시켰는데 모안영은 공중전 도중에 전사했다.

 

이후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문혁 와중에서 수많은 동지들을 숙청했고 좌편향적 정책들로 인해 인민들에게 해를 입혔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아직도 중국 인민들은 자주독립과 주권 수호,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의 그의 공이 과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중공당은 1981년 6월 당 중앙 11기 6중전회에서 '건국 이래 당의 역사적 몇가지 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그 결의에 따르면 모택동 사상은 중국에서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고 그것은 여전히 중공당의 중심사상이며 중국인민의 중요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앞으로 얼마나 우경화 해날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우경화와 별개로 능구렁이 중국인들이 마오에 대한 위와 같은 공식적 평가를 쉽게 바꿀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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