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4/10/01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0/01
    71년생 다인이, 누나(2)
    molot
  2. 2004/10/01
    1936년 오늘(10.1) 프란시스 프랑코, 스페인 파시스트 정부 수반 취임(2)
    molot

71년생 다인이, 누나

 

일군의 신세대 소설가 중에 김종광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문구 틱한 의뭉스러움이나 이 시대를 나름대로 눈 돌리지 않고 바라보려는 모습이 참 좋고 한국 문학에서 한번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제2캠퍼스의 이야기 풀어놓는 것도 맘에 든다. 다만 후일담스런 냄새를 팍팍 풍기는랑,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운동의 시대는 지났다며 힘 빼는 소리하는 건 맘에 안 든다. (가만 보면 다들 지가 운동 그만 둔 때를 기점으로 ‘운동의 시대는 끝났노라’고 선언하는 경향이 있단 말야--;; 아마 앞으로도 이런 선언은 주구장창 계속되겠지?)


여하튼 김종광 소설 중에 '71년생 다인이' 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말 그대로 71년생, 90학번 양다인이 주인공이다. 주인공 양다인이는 고딩때는 전교조의 세례를 받고 대학와서는 전대협에서 한총련을 건너는 바로 그 시기에 어느 수도권 지방대에서 운동의 끝자락을 부여잡고(아마도 엔엘) 빵살이도 한 번 하고 이런저런 단체에도 일하다가 벤쳐랍시고 하다가 말아먹고 삶을 팍팍해하는 그런 여성이다.


하여튼 71년생 다인이가 가슴에 좀 남아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머냐고? 내게 결핍된 그 무엇, 바로 누나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난 형제 중에 장남이고 친가 쪽 사촌형제 열 셋도 전부다 남자다! (근데 외려 이런 환경 덕에 어려서부터 가사노동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남중, 남고를 나왔고...--;;


이런 전차로 어릴 때 부터 누나 있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마침내^^ 평균과 많이 다른 성비를 지닌 단과대, 학과로 진학했을 땐 동기들 중에 여자애들 많은 것보다 때 늦은 누나 풍년이 든 게 참 좋았었다. 그 때만 해도 과방 한구석에서 통기타 줄을 튕기면서 노래 부르는 고운 누나들이 좀 있었다. 돌이켜 보면 기타 연주 실력이야 초보 수준을 겨우 벗어난 수준이고 레퍼토리야 그닥 강하지 않은 멜로디를 지닌 민중가요가 대종이었지만 맑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모습은 무구한 자태 바로 그것이었다. 노래 한 곡조 뽑고 담배 연기 코로 내 뿜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안 시켜도 커피 뽑아다 바치곤 했었는데--;;


그 뿐인가? 강경대 열사가 죽은 지 삼년이 되는 그날 내 손목을 붙잡고 명지대로 데려간 누나도 있었고(생각해보면 그 때 따라간 후배가 나 하나였다. 그 누나는 속으로 얼마나 열불 났었을까^^) 최루탄 향이 알싸하게 날릴 때면 손으로 눈 비비지 마라며 내 눈에 자기 담배 연기를 불어넣어 주던, 마음 싱숭생숭하게 만들던 누나도 있었다. 깡마른 체구에 목소리는 쇳소리인데다가 재미도 없는 커리로 세미나 시키던, 그러나 욕하는 모습은 묘하게 섹시했던 누나도 있었고,,,말썽꾸러기 일학년 둘(나하고 황 박사과정)이랑 생일이 같았던 누나 둘도 있었네. 단대 선거 지고 나서 질질 울던 누나들도 있었고^^


근데 내가 군대를 일찍 간 탓에 누나의 풍년 사태는 딱 일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ㅠㅠ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난 참 순진하고 착했던 것 같다.^^ 꿈에라도 연상의 연인 어쩌구는 생각도 안 해봤단 것 아니겠어?


지금 시점에 내 주위엔 누나가 딱 하나 있다. 십년 전에 처음 봤을 땐 범접하기 힘들고 그 카리스마가 무섭기 까지 했던 누나다. 당시엔 누나 라기 보단 할머니였지 할머니..내 운동의 아빠들의 엄마뻘이니 말야. 난 귀염둥이 손자고^^  하여튼 소설의 주인공 양다인이랑 동기인 이 누나가 어제 꽃등심*^^* 도 먹여주고 반찬까지 싸줬다.(양이 얼마 안된다고 집에 두고 혼자 먹으라고 했지만 사무실에 갔고 와서 나눠 먹어야겠다. 누나가 알면 섭섭해할라나..)


이젠 별로 무섭지도 않고 귀엽기 까지 하지만 내가 누나라고 편하게 부르고 또 나를 얼라 취급할 수 있는 딱 한 사람인데 귀한 누나인 걸 명심하고 잘 모셔야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936년 오늘(10.1) 프란시스 프랑코, 스페인 파시스트 정부 수반 취임

 

1936년 10월 1일 스페인 왕당파 파시스트 반란군 지도자 프란시스 프랑코가 내전 와중에 왕당파 정부 수반 자리에 올랐다. 1936년 7월 17일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은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하며 봉기를 선언했고 그 다음날 스페인 본토 각지에서도 군부의 반란이 연이었다.  프란시스 프랑코는 역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카나리아 제도에서 쿠테타를 선언하는 방송을 했다.


프랑코는 북아프리카 침공에 혁혁한 공훈을 세워 34세의 나이로 1926년 장군에 진급할 정도로  명성을 떨친 ‘나름대로’ 스페인에서 알아주는 장군이었다. 1931년 스페인 왕정이 무너지고 부르주아지와 사민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공화국이 선포되었을 때부터 군부의 젊은 야심가 프랑코를 중심으로한 쿠테타 가능성은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1936년 2월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연합인 인민전선이 집권하자 쿠테타에 대한 경고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 출신의 인민전선 수반인 마누엘 아자냐는 그 경고를 무시했고 군부내 파시스트들에 대한 숙청 제안도 묵살했다. 심지어 쿠테타가 일어난 후 스페인 카톨릭 교회와 대부분의 부르주아지들이 공개적으로 쿠테타 지지 선언을 했는데도 아자냐는 그들에게 유화 제스쳐를 보낸 반면 스스로 무장하여 파시스트들을 진압하려는 노동자들을 통제했다.(이거 참.. 4.19와 5.16 막간에 있었던 민주당 정부 생각나게 하지 않나?)


결국 인민들은 노동자들이 무장하면 정부의 권위에 금이 간다는 인민전선 정부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반군 병사들을 설득해 무장을 해제 시키기도 했고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발렌시아등 대도시의 파시스트 병기고를 습격 무기를 탈취했다. 공화국 군대가 파시스트 반란을 일으킨 반면 인민들이 그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 경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듯 하다.  프랑코를 중심으로 좀 더 이야기 해보자.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측이 다양한 정치세력으로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측도 한지붕 여러 수십 가족으로 구성됐었다. 예컨대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추종하는 자들과 단순히 왕정복고를 꿈꾸는 복고주의자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극우들은 정파간의 이견을 접어두고 ‘반사회주의’라는 기치아래 프랑코를 중심으로 대동단결--;; 했던 것이다. 나는 독일, 이탈리아의 지원이나 트로츠키 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스페인 공산당의 어이없는 탄압(심지어 내전이 한참이던 1937년 5월에 인민전선 정부군-스페인 공산당-은 아나키스트 계열인 전국노동자연합(CNT)이 파시스트로부터 사수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전화국을 공격하기도 했다.)에도 책임이 돌아가겠지만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가 승리한 원인의 많은 부분은 바로 우파의 ‘통 큰 단결ㅠㅠ’ 이 차지 하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하여간에 내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코는 2차대전이 벌어지자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게르니카 폭격을 생각해 보라구!)  파시스트 동지들인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뒷통수를 쳤다. 히틀러의 참전요구에 대해 파시스트 의용군을 동부전선(대소련 전선)에 참전시켰다가 바로 철수시키고 연합국 측에 철광석 같은 군수물자를 수출해 환심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반파시스트 정서 때문에 고립되기도 했으나 그를 구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냉전이다. 1953년 프랑코는 미군의 스페인 주둔을 허용하여 관계 개선을 했고 1955년에 파시스트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하기에 이른다.  이런 걸 보면 우파들은 대단하다. 정말 잘 뭉친다.


거의 40년간을 독재자로 군림한 프랑코는 천수를 누린 끝에 1975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세간에서는 프랑코를 가장 행복한 독재자로 부른다고 한다--;; 프랑코는 죽기 전부터 철저히 사후를 대비했다. 축출된 왕가의 왕자를 후계자로 지목해놓았다. 뿐만 아니다. 그는 현재판 피라미드인 ‘사자의 계곡’ 에 묻혔는데 암반지역에 255m의 길이와 150m 높이의 대형터널을 뚫어서 만든 그 구조물은 1940년 착공해서 20년만에 완공됐다고 한다.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에서 전사한 5만의 파시스트 군인들과 함께 묻혔다. 이건 뭐 거의 진시황의 무덤에 부장된 수천기의 병마토용 수준이잖아....


가장 행복한 독재자 프랑코를 닮길 꿈꿨던 작자들은 꽤 된다. 칠레의 피노체트가 거의 근접할 뻔 했는데 피노체트는 면책특권을 박탈당했고 피노체트의 사법처리 수순을 밟기 위한 의료검진이 진행중이다. 88살이나 먹었으니 콩밥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으며 실질적으로 콩밥 먹을 가능성 보단 상징적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많지만 행복하게 눈 감은 독재자는 프랑코 하나로 족하다. 자연사 하기 전에 제발 피노체트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내려지길 바랄 뿐이다.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1936) : Robert Kapa (1913-1954)

어느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 보도사진 집단 매그넘의 창시자 이며 전설적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를 유명하게 만든 사진이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글이 나올때면 거의 90퍼센트 자료사진으로 사용된다. 이 글도 그 90퍼센트에 속하나 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