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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0/30
    국정감사, 겹눈으로 바라보기(외부 기고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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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10/27
    'peyo기자님은 저 싫어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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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4/10/25
    아니 이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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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10/24
    오천번째 방문객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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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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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10/23
    부산 국감 출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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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10/21
    레드삭스 역스윕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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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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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4/10/16
    데리다 오비츄어리, 발리바르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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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10/16
    갈림길에 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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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 겹눈으로 바라보기(외부 기고글)

노동자의 힘 기관지 이번 호에 실린 글입니다. 국정감사가 끝나기 일주전 주말이 마감이라 그 때 상황까지 보고 쓴 글인데 국감 전체에 대한 조망글로 봐도 별 무리는 없을 듯 하네요. 미뎌 참세상에도 정리 글 한 번 썼어야 됐는데 어, 어, 하다가 그냥 때 놓쳐버렸네--;; 맨날 이런단 말야 ㅠ.ㅠ

 

국정감사, 겹눈으로 바라보기


17대 국회 첫 국정감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사실 그 동안의 국정감사라는 것이 그들만의 리그인데다가 공무원 불러다 놓고 삿대질 하며 고래고래 고함치다가 제 풀에 심드렁해지기 일쑤인 짜고 치는 고스톱인지라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번 국정감사도 마찬가지인 것이 고등학교 교과서가 친북이니 성매매금지법안 때문에 청춘 남성들이 성욕을 풀 기회를 잃어 버렸다는니 하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보수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환경노동위원회를 필두로 재정경제위원회, 교육위원회 등에서 주목할 만한 감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의회전술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깔아놓은 멍석을 본체만체 한다는 것은 현명한 자세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현장의 노동자들은 국정감사를 활용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중이다. 예상 질의 내용을 뽑아 엄청난 양의 답변 자료 준비로 방어하는 관료들 보다 자신들의 싸움을 의회공간에 까지 확장시키려는 노동자들의 노력과 준비는 더욱 성실했다.


국정감사가 시작된 10월 4일 리베라, 풀무원, 성람, 효성 등 20여개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은 상경투쟁을 시작했다. 2박 3일의 상경투쟁을 마치고 10월 6일 해단식을 가졌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0월 7일 서울, 대전, 경인 노동청에 대한 국감을 앞둔 서울지방노동청 앞에서 국감을 시작하기 한 참 전부터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의 집회가 있었다. 지난 10월 7일 환노위 국감장에는 성람재단 이사장, 리베라 호텔의 사주인 신안그룹 회장과 더불어 노조 위원장들이 증인으로 나란히 출석했다.


국정감사를 앞둔 장기투쟁 사업장들의 준비는 철저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우리의 비참한 상황을 굽어 살펴달라’ 는 식의 의원나리에 대한 읍소 전략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투쟁의 전술로서 의회공간을 적극 활용해 냈다는 점이다.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의 “국회는 깡패집단” “야마가 돌아” 발언으로 화제가 된 10월 7일 국감에서 박순석 회장을 몰아붙인 것은 단병호 의원이지만 박순석을 궁지에 몰게 만든 자료는 전부가 리베라 호텔 노조에서 준비해서 제공 한 것이었다. 박순석 회장이나 대전지방노동청장이 어떤 발뺌을 할지라도 노조가 준비한 자료(박순석 회장의 노조 불허 발언 녹취록, 기 합의된 사항을 손바닥 뒤집듯 한 증거자료)를 벗어날 수 는 없었다. 이는 경기지역이 대표적 장기투쟁 사업장인 성람재단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 실태가 노동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직후 벌어진 10월 13일 국정감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날 국정감사에서는 현대중공업에 대한 불법파견과 산업재해에 대한 문제들이 적극적으로 다뤄졌다. 울산지역 하청사업장 노조들의 꼼꼼히 취합한 자료 앞에서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나 부산지방노동청장, 울산지방노동사무소장의 변명은 별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특히 노동부가 내놓은 비정규 개악안에 대한 투쟁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행 법규 아래서도 온갖 불법, 탈법적 파견과 노동탄압이 벌어지고 있음이 의회 공간 내에서 폭로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환경노동위원회 내에서는 심지어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의원들 조차 현행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수긍하는 분위기였고 두고 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노동부의 원안이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하기는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국정감사에서는 ‘일등 기업 삼성’ 도 도마 위에 올랐다. 16대 까지는 의회에서 삼성의 ‘삼’ 자는 물론이고 그보다 한 끝발 낮은 이건희의 ‘이’자도 국회 속기록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국정감사는 달랐다. 휴대폰을 이용한 불법적 위치추적 문제로 삼성 SDI임원을 증인으로 채택하자는 단병호 의원의 제안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야합에 의해 무산되었을 때만해도 ‘역시 삼성은 삼성이다’라는 중평들이었지만 국정감사 첫날 삼성측이 총력을 다해 대비하고 있던 환경노동위가 아니라 재정경제위에서부터 삼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삼성그룹 계열사 간 출자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하는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생명에 대한 과세 문제에 대한 지적은 이건희, 이재용 부자의 탈법적 증여와 상속 여부로 까지 확장됐다. 법제사법위 국정감사에서는 삼성의 무노조 정책이 위헌이 아니냐는 추궁에 대해 “헌법이 노동권을 보장하고 있고,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라는 사실” 이라는 서울지검 지검장의 답변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국감을 통해 삼성 저격수로 성가를 높이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이다. 우원식 의원은 10월 5일 노동부 국감에서 삼성 SDI의 근로기준법 위반과 삼성 SDI 만의 특이한 근무시간 산정을 폭로해 최초로 삼성그룹 계열사에 대한 노동부 차원의 특별근로감독을 이끌어냈다. 연이어 7일에는 삼성전자의 부당노동행위와 위장하도급을 문제를 제기해 경인지방노동청의 특별조사를 이끌어냈다. 물론 삼성의 노동탄압은 널리 알려진데다가 여러 경로를 통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삼성일반노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삼성 내부에 운동주체가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노동운동진영 내에서는 삼성 문제가 소홀히 다뤄진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시민단체나 인권단체 쪽이 삼성 문제에 대해 더 공을 들여온 느낌까지 든다. 물론 투쟁의 단초들이 삼성재벌과 그를 비호하는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삼성전자를 필두로 삼성 그룹이나 이건희가 한국사회에서 신화화까지 되고 있는 현실이나 전경련이 아닌 삼경련으로 불리는 현실, 해외 순방을 다녀온 노무현 대통령이 삼성재벌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 현실에서 총자본의 상징인 삼성에 대한 공격은 매우 중요하다. 2세 경영을 넘어 3세 이재용에게로 원활한 상속을 위한 여론 정지를 위한 이미지 메이킹에 삼성이 온 힘을 쏟고 있는 현 상황에서 실체 폭로를 통한 여론화 작업이 필수적일 것이고 의회는 중요한 경로임에 분명하다. 이 지점에 대한 운동진영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진보정당의 의회진출도 처음이고 국감도 처음이라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긴 하지만 지난 수개월간 의회 내에서 민주노동당이 정국 방향타에 대해 유의미한 역할을 했다고 보긴 힘들었다. 물론 그나마 국정감사는 당의 힘보다는 개별 의원실의 역량이 발휘되기가 용이한 장이긴 하다. 그러나 국감 자체의 한계(부산, 울산, 대구광역시와 경남 경북을 포괄하는 지방 노동청 감사에 할애된 시간이 세시간 반에 불과하다)와 그 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민주노동당 10개 의원실의 역량 차이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또한 수많은 장기투쟁 사업장이나 불법파견을 비롯한 비정규 사업장들이 자신의 이름을 국회 속기록에라도 올리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고 실질적 사주의 어이없는 망발로 모든 미디어에 오르내린 리베라 호텔 노조는 천운을 얻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또한 국정감사에서 지적되고 폭로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국감장에서 공무원들은 ‘시정하겠습니다.’ ‘서면으로 답변하겠습니다.’ ‘검토하겠습니다.’ 란 세 가지를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었다. 노동탄압이 폭로된 사업장의 업주들도 증인으로 출석해선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개선 하겠습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이 세 가지 답변을 적절히 섞어가며 대응했다. 개별 의원실의 의지와 역량을 아주 높게 쳐준다손 치더라도 관료집단과 자본가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사후 확인 한다는 것은 공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국감장에서 언급이라도 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의회를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의회로 모든 요구안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진보정당’ 의원이 국회에 없다고 해서 의회 공간을 활용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깔린 멍석을 못 본 체 하는 것도 그 만큼이나 멍청한 짓 이다. 이제 첫 국감이 마감되려고 하는 시점에서 운동진영이 의회 아니 좁혀서 말하자면 국정감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정확한 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게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를 한 단위는 국정감사를 통해 소기의 성과를 끌어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미 지난 2001년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국회본회의장에 펼침막을 들고 요구안을 외쳤던 선례가 있다.


개별 운동주체들이 국정감사 이후 의회를 지렛대로 어떻게 전술을 펼쳐야 나갈지 제시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러나 몇마디 제언을 덧붙여 본다. 물론 개별 투쟁 단위들의 철저한 준비는 기본이다. 그러나 여러 사안들이 개별 의원실로 취합되는 경로가 명확하지 않다. 개별 단위들이 알아서 찾아가 직거래 하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과도한 의회주의, 대리주의로 수렴되기도 쉽다. 노동자 출신 의원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의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는 것 아닌가?

 

개별 사업장이나 개별 투쟁단위가 개개의 의원실과 손발을 맞추다 보면 당연히 무게 중심도 의원실로 쏠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좀 더 조직적인 경로를 통해 의원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배타적 지지가 현실인 상황에서(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민주노총 중앙의 역할이 좀 더 필요하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중앙위원 지분이나 최고위원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의회에 연락관을 파견해 상주시킬 것을 제안한다.  경제부처 관리들과 재벌들은 이미 조직 내 핵심인자들을 서로 교환 근무시키고 있다.  의회 투쟁은 민원이 아니다. 대등한 위치라는 것을 자각해야 하고 또 그 자각과 실천을 위해선 그 만큼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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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yo기자님은 저 싫어하는 것 같아요'

오늘 좀 요상한 소리를 들었다. 타 매체 기자가 'peyo님은 저 싫어하는 것 같아요. 아니 우리 매체를 싫어하시는것 같더라구요. 그죠?' 하고 내 동료한테 말했단다. 술먹고 한 소린지 맨 정신에 한 소린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떈 '뭐 그래라~' 싶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여러가지 잡상들이 교차한다.

 

그 친구랑 개인적으로 딱 한 번 밖에 본 적 없다. 밥 같이 먹고 이야기 좀 나누고.. 정치적인 이야기 한 것도 없고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이거 하기 전에 뭐 했어요? 등등) 쬐금 하고 여성주의에 대해(여성주의에 대해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우리는 오늘 성폭력예방교육 받는다' 고 내가 말했더니 '우리 사무실은 사람들이 별로 안 친해서 성희롱 같은게 생길 일이 없어요'고 답한데 이어 'Peyo 기자님은 봉건적인 이번 성매매 금지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묻길래 좀 황당해 하는 표정으로 몇 마디 했는데...사실 그 말을 하면서 이 친구가 볼 땐 내가 투철한 여성주의자로 보일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 많이 찔리더라ㅠㅠ 그러나 내 동료가 말하는 것보다 내가 간단하게 답하는게 낫겠다 싶어서 그냥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얘는 나한테 정말 성매매금지법안에 대해 묻는건가 아니면 떠보는건가 싶기도 했고)  한 것 밖에 없다. 도합 삼사십분 쯤 시간 같이 보냈을라나? 그 친구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기사 잘 보고 있다고 이야기 한테 반해 난 입에 발린 소리 하나 안 했긴 하다.

 

그 기자 개인이 싫을 이유는 없지만(사실 싫다기 보다 갑갑과 짜증 사이의 그 무엇을 느끼긴 한다.그리고 솔직히 그 친구가 쓰는 기사들 논조도 별로로 느껴진다. 그치만 머 그런 기자가 한둘인가? 대부분이지... ) 순진한 건지 순진한 척 하는 건지 모르겠긴 하다. 그 쪽 사람들 만날때 보통 드는 생각이긴 하지만. 또한 그가 속해있는 매체는 꽤 싫어한다. 가끔은 웃기고 가끔은 황당하고 가끔은 해악이라고 생각도 한다. 이 세가지 경우 외에는 그럭저럭 우리 사회의 진보(?)에 힘을 보태는 매체겠거니 싶다.

 

하여튼 타 매체 기자의 저런 발언을 듣고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먼저 냉혈한 민완 기자--;;의 관점에서 드는 생각

 

내 속내가 저렇게 쉽게 드러났나 싶다. 학생운동 할 때만 해도 그 쪽 친구들이랑 얼굴 마주볼 떈 그럭저럭 잘 지냈는데 얼굴이 그 때보다 훨씬 두꺼워진 지금 저런 평을 듣다니..정말 반성해야 겠다 싶다. 관료, 보수정당 구성원, 자본가들 상대로 취재할 떄도 앞에선 실실 웃으면서 맞장구도 치면서 취재하는 판국에 앞으로 주구장창 상대해야 할 저 쪽 친구들한테 감정 표현을 드러나게 했다는건 나의 잘못이다. 다음에 만날 때 벌써 그 친구는 나한테 한자락을 깔고 상대할 것 아닌가? 게다가 취재원들한테 소문이라도 나면...상당히 힘들어질테고. 공적으로 비판할 일이 있어도 사적으로 이런 느낌을 먼저 줘버리면 비판이 제대로 안 먹히기 마련이기도 하고...기회 잡아서 소주라도 한 잔 하면서 오해(?)를 풀어야 겠다는 생각.

 

 

그 다음은 다른 맥락에서

 

사실 주위 사람들이 저 쪽 친구들한테 날선 반응을 보일때면 난 항상 '뭐 그러냐 쟤네도 똑 같은 사람인데..' '아닐떈 아니고 같이 할 떈 같이 하고 그러면 되는거지 난 쟤네가 적이라곤 생각 안해' 하는 식으로 쿨하고 대범하게 충고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타 매체 기자' 라면 나(진보넷 구성원) 한테 절대 저런식으로 말안할 거다. 내가 저 쪽 친구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평소에 미운정 고운 정 쌓인 사이면 또 좀 다르지만)  순진한 표정으로 '뽀글이 정말 웃기지 않아요.' 라고 말할 리가 없듯이. 그래서 참 헷갈린다. 저 친구는 정말 순진하던지 아니면 순진한 척 하는 고도의 정치꾼이든지 둘 중의 하나인데...얼굴을 보면 '나 착해' 하고 이마에 써붙이고 있을 정도다. 까놓고 말해 저 쪽 친구들에 대해 무시하거나 우습게 생각하고 있는건 사실이고 그들이 하는 주장에 대해선 더 심한 생각들을 갖고 있긴 하다. 하지만 개인을 대면한 자리에서 저런 느낌을 받을 만큼 행동했다는건 내가 상당히 폭력적이었다는게 아닌가 싶다. 여기 저기 쑤시고 다니고 이것 저것 조지는 기사들을 쓰다보면 상처 받는 사람들이 발생하는건 어쩜 당연하기도 하지만 내가 상대한 개별자가 나에 대해 저런 느낌을 받게 했다는 건 정말 내 수양이 덜 됐다는게다. (에구 결론이 냉혈한 민완기자 관점과 비슷하네...)

 

근데 참 내가 기사를 통해 조졌던 대상들은 나의 까댐에는 까딱도 안 하는 사람, 집단이 대부분이었네--;; 조지 부시가 내 기사 보고 열받았을리 만무하고....열우당에서 내 기사 보고 열받았다는 소식도 없고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이 항의 전화 한 적도 없다. 심지어 한나라당 배 모 의원은 열라게 씹어논 인터뷰 전문을 자기 홈피 초기 화면에 한동안 떡하니 내걸고 또 우리 바이라인도 제대로 달아줬다 -- (내가 호의적으로 기사를 쓴 많은 곳-개인, 단체-들 조차 우리 매체 이름을 '기타'  심지어 '참소리'(참소리는 우리 기사를 전재하는 전북인터넷 신문이다.)라고 자기네 홈피에올리기도 하는데...게다가 우리 매체 이름 기자 이름 다 잘라먹고 내용만 자기네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곳도 있다. 여긴 내가 전화까지 했건만 안 고쳤단 말이지..내 마음의 기자 수첩에 다 적어놓았다. 두고 보자고--;;)  

 

게다가 국감 부터 시작된 이주 노동자 때리기의 허상을 파헤치고자 오늘 평등노조, 이슬람 전문가인 한양대 이희수 교수 인터뷰 하고 다와툴 이슬람 코리아, 그 상급 단체로 알려진 자마이티 이슬라미에 대해 조사하고 법무부 출입국 관리소, 한나라당 김재경에 대해 삼각취재까지 철저히^^ 마친 고로 내일 기사를 낼 예정이지만...큭 법무부랑 한나라당 김재경은 까딱도 안 할께 뻔하다--;;

 

 아웅...생각의 가지가 이 까지 미쳤구나. 하여튼 저 쪽 사람들이나 나에 대해 언급한 그 기자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생각나는 시가 하나 있다. '우리 학생회' 뭐 이런 노래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개인적으로 난 이런거 정말 싫어한다. 닮기도 싫고 닮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역편향으로 불성실 해진것 같기도 한 것 같아 문제다. 지금 컴으로 '우리는 통일꽃' 듣고 있는데 역시 노래는 참 좋다.

 

 

 

<< 바보 과대표 >>

-시.홍치산

우리학교 1학년에 바보 과대표가 한 명 있다.
술만 먹으면 개가 되고
밍맹몽, 007빵 무얼 하더라도 진짠지 가짠지.야튼 맨날 걸려 얻어맞으며 헤헤 웃고
벌주 발칵발칵 마시며 배꼽 뚜딜겨
뽕짝 걸판지게 뽀아대는 천하에 바보가 있다.
항상 그 바보 곁에 사람들이 드글거리고

그 수첩에는 120명 동기 이름 모두 적혀있다.
누구누구와 언제 만났고
누구의 고민은 무엇이고
누구와는 아직얘기 못해 보았으니.
멋있는 싯구 하나 없지만 그런 것들이 잔뜩 쓰여있다.
수업 안들어오는 애들 리포트 알려주고
시험때는 쏘스 제비 벌레 물듯 물어와 노놔주고

역사연구반이니, 사회과학 연구반이니
소수의 의식을 위한 것보다
바둑반이니 농구반이니
그런 모임을 만들어 120명 모두를
함께하는 고민으로 자기 과 소모임에 참여시켰다.


일기장에는 자신의 참된 삶의 문제
누구보다 겸허하게 치열하게 고민하였으며
개의 안락에는 추호의 타협이 없었으며
항상 5시간 수면을 철저히 지킬것을 강제했고
서재에는 항일 무장투쟁사가 손 때묻어 간직되어 있었다.


그날
자기 과 친구들에게는 아직 이르다며 본대에 있으라 하고
아스팔트 하이바에 우리 선배 전투조들 떨고 있을때
익살스런 춤 "간다 간다 뽕간다"
신명나게 두려움 누그려주고
전투대장의 진격의 나팔 우렁차게 울리니
그는 누구보다 최전선에서 정확하게 꽃병을 꽃았다.


드디어 놈들이 사나운 이빨 으르렁 거리며 덤벼들때
한 친구 전사는 미끄러지고
모두 안타까이 돌아 섰을 때
그 바보 전사 바보처럼 의연히 달려 나갔다.


다음날 한계레신문에 조그맣게 바보 이야기가 실려다.
고대에서 2명이 화염병으로 잡혀오고 100명이나 친구들이
성북서 항의 방문을 했다고 바보를 풀어 달라고 울부짓었다.
총학생회장님이 잡혀가도 그런 일이 없어는데

 

그리고 다음날 교문과 식당에서는
바보의 바보같은 친구들을 누구나 만났다
그들 손에는 당구 큐대가 아니라
볼펜이 아니라 오락실 운전대가 아닌
규탄 성명서가 들여있었다.

 

그리고 며칠 지난 뒤 학생의 날 가투 전투조 사전모임에서
한 1학년 학우의 결의 발표가 나의 심장을 쳤다

 

"나는 바보의 다른과 친구입니다.
투쟁하란 말은 없어지만
그 친구는 말은 없어지만
저는 아직 짱돌 한 번 던진적 없었지만 바보들 잡아간 놈들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비록 제가 잡혀간다하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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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오천번째 방문자가 안 나타났네...세금이라도 물릴까 싶어서 그랬나?

 

오천번째 방문자 소원을 하나 들어주려고 했는데 꽝이네... 물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자그마한 소원중에 하나를 들어주려 했다.

 

예를들어   2005년 5월에 선발하는 한국 최초의 민간 우주인으로 뽑혀서 우주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 혹은 부시의 낙선, 미군 철수 같은 거... 정말 소박한 것으로는 신라 호텔 중식당 팔선에서 이건희와 함꼐 요즘 한참 제 철일 상하이 게를 함께 먹은 다음 삼성의 무노조 정책에 대해 끝장 토론을 벌일 기회라던가...

 

내가 들어주기는 좀 벅차지만 여남평등의 전면적 실현, 노동해방, 세계평화 이런 소원을 말한다면 그래도 최선을 다해 들어주려 했지만 쩝...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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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번째 방문객께.

오천번째 방문객은 저에게 반드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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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익, 김주익, 김주익

김주익 열사 추모제에 다녀와서 몇 꼭지나 되는 관련 기사를 썼고 한 참 지나버렸지만 어떻게든 정리를 해놓고 넘어가야 되겠다 싶더라. 사실 그 동안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워버리곤 했다.

 

1주기 추모제가 벌어지기 이틀 전 총연맹 부산본부 갔다가 자료집 한 권을 얻었다. '85호 크레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절절했던 추모사,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보냈던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일기들, 김주익 지회장의 유서, 관련 자료들을 일년만에 다시 읽었고 또 김지회장에 대한 정은임의 멘트들 까지 다시 찾아 읽었다. 집에서 눈물 좀 미리 빼고 그 다음날 한진중 노조 사무실에 갔더랬다.

 

거기서 정말 멋진 형님 한 분을 만났다.( 바로 박성호 한진중 열사정신계승 사업회 회장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1178&page=2&category1=1) 예전엔 현장 마다 멋진 형님들이 참 많았었는데 요즘은 참 멋진 형님을 만나기 힘든 시절이다. 최근에 국회에서 다시 만난 옛날 형님으로는 배일도 행님이 있다 --;; (엊그제 성폭력예방교육 받고 멋진 형님 찾는 나도 구제불능이지만..뭐 어때? 멋진 누나는 멋진 누나고 멋진 형님은 멋진 형님이지..) 벅찼던 과거, 슬픈 이야기, 힘든 현실과 헤쳐낼 각오들을 비장하게 풀어내는 사람들은 꽤 많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을 웃으면서, 칼날을 솜에 숨긴 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박성호 회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국감 땡땡이 치고 참석한 심상정 의원도 멋진 누님이었다. 박성호, 김주익, 심상정, 노무현 이 네 사람은 박창수 열사를 매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었더랬다. 박창수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박성호 회장은 노조 교선부장이다가 해고 당하고 열사 대책위 간사 활동을 했다. 그리고 또 구속당하고...김주익 열사는 문체부장이었는데 겨우 해고를 피했단다. 그리고 심상정은 박창수 비대위 상황실장을 맡았었고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박창수 진상규명단장을 맡았더랬다.

 

작년에 심상정은 한진중 상급연맹인 금속 연맹 교섭 대표를 지냈다(9월 30일까지) 심상정이 금속에서 임기를 마친 후 17일만에 사고가 났고...인터뷰 때 이 누나가 '국회에서도 가끔 김주익 지회장이랑 이야기 하곤 해요' 라고 하더라. 첨엔 뭔 말을 하는가 싶었지...그리고 작년 김주익 지회장이 제 몸을 달아맸을때 노무현 대통령은 '아니 아직도 한국에 이런 일이 있냐' 고 탄식했다고 열우 모 의원께서 이야기 해주더라. 노무현 대통령이 통치하는 한국에 그런 일은 참 많다. 김주익 열사의 일주기가 되던 날 법원은 효성 노동자들에게 또 손배 칠십억을 때렸다.

 

추모제 당일 아침 일찍 한진중에 나갔더랬다. 눈에 들어오는건 바로 85호 크레인, 햇빛 때문에 제대로 올려다보기도 힘든 운전실.

 

 

사실 나는 열사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35 미터 높이에 있는 저 무쇠방을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더라.  천이백명의 조합원을 남겨두고 혼자서 저 위로 기어올라가 문을 잠궈버리고 백스물 아홉날의 여름밤을 지켜낸  그 마음을 , 비닐 봉지에 담긴 밥을 밧줄로 매달아 올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넘기던 그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여름밤에 휴대 전화기가 울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통화가 막친 후 더 고고해졌을 적막은 어찌 견뎠을까? 천이백 파업 대오가 칠십으로 줄어 자기 몸뚱아리를 매달땐 솥발산에 먼저 누워있는 박창수 선배가 생각났을까?

 

파업에 참가하면 무급이지만 그냥 결근해버리면 70퍼센트 임금 준다는 회사 앞에서, 생활비 때문에 그리고 고등학교 다니는 딸래미가 눈에 밟혀 몸이 안좋다는 핑계로 여남믄 날 동안 파업 대오에서 빠지다가 결국 후배의 죽음을 맞이한 곽재규 열사의 죄책감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85호 크레인 아래 4호 도크로 제 몸을 던져서 피로 유서를 써내려갔을까? 그들이 짊어졌을 짐의 무게를 난 짐작조차 못하겠더라.

 

추모식 날 광장을 가득 메운 작업복의 물결들, 참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한마디로 뽀다구 나더라.

 

 

조합원들이 유급 참여를 보장 받은 이 시간에 사내 하청 노동자들과 이주 노동자들은 조선소 여기저기에 두더쥐들처럼 박혀 일했다. 물론 그건 한진중 조합원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니다. 노조에서 비정규직의 비 짜만 꺼내도 사측이 어떻게 대응하는진 나도 잘 알고 있다.  차해도 한진중 지회장의  안타까워 하던 모습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란 것도 잘 안다. 한진중 조합원들이 얼마나 힘든 싸움을 치워냈는지도 안다. 그리고 그들더러 이제 또 당신들이 앞장 서시오 하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없다.  하지만 추모식이 끝난 후 함께 선 밥줄에서 이런 위원장, 저런 위원장, 노동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을 훔쳐 보던 하청 노동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을.

 

남한 노동 운동의 위대한 전사  현대 중공업이 올해 금속연맹에서 제명당했다. 94년 파업 이후 그들은 십년 무쟁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 쟁의 안 할 수도 있지 뭐. 하지만  '현장파' 출신 탁학수 집행부는 자본과 손을 잡고 해고자들을, 비정규직을 몰아내는데 집중했다. 지금 현중 집행부는 심지어 해고자들의 아침 선전전에 가끔 참여하는 현중 해고자 울산 동구청장 이갑용을 직무유기로 고발하기도 했다. 근데 아직도 현중노조원들은 '영원하라 현중노조' 노래를 부를까? '칠천만의 해방을 위해 영원하라 현중노조'라는 부분을 부를땐 좀 간지럽지 않을까?

 

육해공군 상륙작전 전쟁 선포에 맞섰던 현중이, 그리고 이갑용,이영현, 조돈희의 현중이, '동지들 새해 복 많이 쟁취하시라'는 시로 백무산이 노래했던 그 현중이, 전노협의 상징이었던 '골리앗의 그림자'라는 투쟁가가 헌정되었던 그 현중이, 영국에서 만난 칠십 먹은 노동당원 할아부지까지 투쟁 비디오를 봐서 알고 있던 현중노조가 특별히 나쁜 놈들로  이루어져 이 모양 이 꼴이 난건 아닐게다. 

 

추모식에 참석한 여러 장기 투쟁 사업장과 금속연맹내 비정규직 조합원들. 뿐만 아니라 리베라 노조, 성람재단, 풀무원 아저씨 아줌마 조합원들...이들이 모두 김주익이다, 그리고 곽재규다. 비정규 노동자 앞에 내놓은 노무현 정부의은 비정규직 개악 법안은 바로 21년차 노동자 김주익이 받아들었던 13,5000짜리 가압류된 월금 명세서다. 한진중은 '귀하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고 말하며 저 명세표를 내밀었고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보호하겠노라며 개악안을 들이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내몰리고 있는 거리가 바로 85호 크레인이다. 우리는 김주익을 추모하지만 되살릴 순 없다. 이제 또 다른 누군가를 추모하진 말자. 열사란 말 난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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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감 출장 이야기

간만에 취재 뒷다마를 쓴다. 사실 그동안 쓸거리가 많았는데 부산 출장건을 어떻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나 싶어 다른 이야기들도 못썼다. 지난 주에 부산엘 다녀왔다. 국감 취재 건이랑 김주익 열사 일주기 추모행사 건으로...

 

기사를 통해 하고 싶은 말들 거진 다했지만 가슴 짠한 일들이 많았다.

 

먼저 국감때 문성현 만난 것, 한달 전 즈음에 매일노동뉴스 인터뷰를 보고 '아 이 양반이 아직 살아있구나 '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참 안 됐더라. (이런걸 보면 나도 마음이 좀 여린가 보다--;;) 호강할려고, 대접 받으려고 그 사람이 운동한 것도 아니었겠지만 알아보는 사람도 드문 '문전투'(내가 알아보니 참 반가워 하더군--;;)를 단병호 의원이 불러내 소개시키고 각종 행사에서 내빈의 말석을 지키는 그 양반을 보니 참...게다가 당 운동의 막차를 탔는데 그것도 그리 길이 넓어보이진 않고..하여튼 내가 궁금해서 그 양반 인터뷰 했는데 왜 갑자기 문성현이냐며 뜬금없다는 소리를 꽤 많이 들었다ㅠㅠ 에이 그래도 기사 거리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서 사라지진 않는다--;;

 

부산에서벌어진 국감은 부산, 울산, 대구, 경남, 경북이라는 광대한 지역의 노동문제를 커버하는 국감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달랑 세시간 반 정도--;; 서부 경남의 끝자락 의령에서 버스를 타고 와 국감장 앞마당에서 집회를 했는데도 자기들 이야기 한마디 안나온게 한이 맺혀 의원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가겠노라던 풀무원 의령 공장 아줌마, 아저씨들 생각하면 아직도 짠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주름 패인 얼굴, 얼굴들...일요일은 쉬게 해달라며 외치다가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 '손을 막상 잡고 나니까 그 당당하던 구호도 못외치고 목메어 울던 그 모습. 양귀자 소설 중에 '슬픔도 힘이 된다' 란 중편(단편이던가?) 가 있었다. 불법화 시기의 전교조 이야기 였는데 풀무원 아저씨, 아줌마들에게도 슬픔도 힘이 될까? 국감 마치고 구내 식당에서 들렸던 진주 지방노동사무소장 목소리가 기억 난다. '풀무원 사측에선 의령공장 접겠다던데?' 의령공장은 7월 1일 주5일제 실시를 앞두고 십수개로 쪼개져 버린 풀무원 사업장 중의 하나다. 주5일제 법안 실시를 앞두고 천명이 넘던 풀무원 생산 라인은 7, 80명의 작은 회사 십수개로 쪼개졌다.  태백산맥 보면 '지주가 빨갱이 만든다요' 라는 구절이 나온다. 정말 세상이 투사 만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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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삭스 역스윕해버리다!

빨간 양말들이 양키스를 꺾었다. 삼연패 뒤 사연승.기가 막힌 역스윕.

 

메이저 리그가 대단하고 안 대단하고를 떠나서 스스로에게 지워진 짐과 징크스를 벗어내 버린 빨간 양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베이브 루스가 살던 주소에 사는 어린 야구 팬의 이빨에 야구 공이 맞아 밤비노의 저주가 사라졌다고 보스턴 인간들이 우기더니 정말 그런건가?

 

그리고 6차전까지 26타수 3안타에 그쳤던 자니 데이먼의 연타석 홈런. 확실히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진부한 격언을 증명해냈다. 데이빗 오티즈가 살린 불꽃을 자니 데이먼 교주가 피워냈다.

 

보스턴 팬들은 이번 월드시리즈를 우승 못해도 속이 시원할게다. 그리고 a-rod의 영입에도 불구하고 보스턴에게 한 방 맞아 버린 스타인브래너 영감에겐 ' 하하하 고소하다.' 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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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가기 귀찮기도 했지만 타 매체 돌아가는 이야기 하나 들을까 싶어서, 내 나와바리가 아닌  곳 커버하는 기자 이야기 들을까 싶어서, 뉴저 네트웍 할 수 있을까 싶어서...아니 뭐 내가 언제 부터 이렇게 열혈 조직원이었다고 허허...아 내가 생각한 이 번 주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또 뻔한 술자리를 다녀왔다. 물론 술은 많이 안 먹고 먹는 척 정도만 했지만. 샤갈 전시회도 연장됐고, 불꽃 축제 표도 얻었고, 세종 문화회관에서 하는 모 공연 표도 주겠노라는데, 슈퍼 스타 감사용도 보고 싶은데...게으른 탓인가? 물론 내가 남 부럽잖게 게으르긴 하지. 흑 다음주말은 친구 결혼식 때문에 목포--;;까지 갔다와야 된다. 쨰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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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오비츄어리, 발리바르 추모사

며칠전 자끄 데리다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사 하나를 썼다. 데리다의 개인 이력을 검색해서 확인했고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들을 녹일려고 했는데 참 힘들더라. 일단 내가 무식한 탓에... 예전에 봤던 맑스의 유령들에 대해서만 썼다. 해체주의에 대한 언급은 하지도 못한채. 그러고 나니 요즘 참 '책'을 안 읽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비츄어리는 처음 써보는거지만 '오늘은' 에서 죽은 사람들을 몇번 정리 해봤던게 큰 도움이 됐다. 안타까운 것은 데리다의 이론과 실천 작업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된 기고를 받아 올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거다. 우리 바운더리가 좁아서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몸을 사려선진 모르겠지만 몇몇 기고청탁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초라한 내 기사 하나는 너무 부족했다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간만에 여기 저기 서핑을 하다가 에띠앤 발리바르가 뤼마니떼(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지금은 그냥 좌파계 일간신문)에 기고한 추모사를 발견했다.문장들이 좀 씹히긴 하지만  잘 정리된 글이란 생각이 든다.  최원이 자기 홈페이지에 번역한 것을 몇몇 문구만 수정해서 다시 올린다.  근데 꼽아보니 발리바르도 환갑을 넘긴지가 몇 년 된 것 같다. 참 다들 늙어가는구나.

 

 

곧 만납시다, 자끄 데리다.

 

철학자 에띠엔 발리바르

 

자크 데리다가 사라진지 몇 시간이 안된 지금 나는 그의 작업을 몇 마디 말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하나의 명칭안에 가두어두고 싶진 않습니다. 단지 학생으로, 동료로, 친구로 만날 수 있었던 삶과 생각의 몇몇 순간들을 회상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저는 그가 고등사범학교에 도착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교수자격시험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우리에게 '프랑스의 뛰어난 현상학자' 라는 그의 명성에 앞서, 무엇보다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관한 눈부신 에세이의 저자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역사성과 진리으 질문을 사회학주의와 심리학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부터 빼앗아 왔습니다. 그는 곧바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갔습니다. 증명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질문-이를 형식적 보증이라는 문제로부터 시간 속에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흔적' 이라는 그의 위대한 테마를 예상하는)로 이행하게 만들면서- 이나 기록/글쓰기의 활동과 사고와 물질성 간의 연결이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강의들은 웅변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개념들의 성립과 텍스트 읽기에 있어 엄격했습니다. (이 강의들의 엄격성을 증명하는 것은 <우정의 정치>를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수년 후 저는, 그의 해석의 힘과 명쾌함 덕에 제가 강의들의 모든 전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위대한 가르침의 이러한 실천에 저는 더욱 일반적인 교훈을 관련시키고 싶습니다. 세계적으로 상당한 미디어적인 인물이 된 데리다는 대학에서 작업하길 결코 멈추지 않았고 철학적 활동의 근본적인 장소를 대학 안에서 보길 멈추지 않았습니다(비록 대학은 그를 단지 초라하게만 인정해 주었을 뿐이며 자기 나라의 대학은 그나마 인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79년 철학의회 혹은 1983년 국제철학학교의 창설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그는 대학이 자신의 위계제적인 굴레와 분과들 사이의 배타주의와 민족주의(이는, 프랑스에서처럼, 스스로 “보편적” 가치들을 담지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민족주의이기 때문에 더더욱 [대학을] 불모로 만드는 민족주의입니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시도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학이 그가 1998년 스탠포드 컨퍼런스에서 조건 없는 대학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권력의 경계선들과 통제들을 넘어 인간의 모든 노동들을 다시 사고하고 기계화와 세계화의 시대에 가능한 것을 (그리고 심지어 불가능한 것을) 발언하는 과제를 떠맡는 대학 말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후 “해체”라고 부를 이 새로운 방법론에 관한 세 가지 선언인 <목소리와 현상>, <기록학에 관하여>, <기록과 차이>의 1967년 출판 및 이들의 철학과 문학 사이에서의 미묘한 교차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가 행한] 루소의 독해에 관한 레비-스트로스와의 논쟁, 데카르트에 관한 푸코와의 논쟁 같은 대논쟁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를 오늘 다시 그만큼의 철학적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논쟁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철학적 구조주의는 형이상학과 자신의 구별을 행하고, 따라서 이미 자신을 “후기-구조주의”로 전화시킬 잠재성, 즉 자신을 구조라는 관념(특히 구조가 “총체성”들을 표상한다는 주장/오만)의 내적인 비판으로 전화시킬 잠재성을 유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휴머니즘의 관점이나 주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행해지지 않고 인간에 관한(따라서 “인간의 목적들”과 권리들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것의 양가성(의식과 무의식, 육체와 정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차이들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집니다. 왜냐하면, 차이들은 모두 이원론적 대립들로 환원할 수 없는 초과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이 같은 초과(데리다가 “기원적 보충-대체”라고 부르는)는 해석의 재개와 증식 뿐 아니라 동일성의 기계주의의 폭력과 세계 전유의 전술들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의 성숙기의 위대한 테마들, 특히 계산 불가능한 “도래할 것”으로서의 사건이라는 인식의 맹아를 봅니다—이 사건이라는 인식 안에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책임성이 극단화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발언의 결과들을 “수행적으로” 지배/제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와 발언이 무한히 권리와 정의라는 문제의 재활성화 및 재정식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이 없는 지성인들로서, 그가 “새로운 국제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시도했던 그 모든 상황들(얀 후스 연대의 한복판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역적” 지성인들에 대한 원조에서 시작해서, “외국인들”에 대한 공안정치와 낙인에 반대하여 유럽에서 피신권을 방어한 일을 지나, 그리고 팔레스타인 인민의 권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적대자들의 화해를 위한 입장을 표명한 일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저는 이에 관해선 대충 지나가고 있습니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항상 분석과 역사적 참조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여기 또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종종 데리다의 주도로, 우리는, 대중의 폭력을 야기하고 그것을 되받아 배양하는 국가와 시장 주권들의 지배력에 대한 다형적이고 다극적인 저항을 구성함에 있어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고유한 역할을 갖는다는 확신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담론들의 해체와, 그리고 자신들의 적들/경쟁자들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과합니다(데리다는 얼마전에 테러리즘과 “불량배 국가들”에 대한 항구적 전쟁을 선동하는 기계를 분해하기 위해 자신의 오래된 “적”인 하버마스와 힘을 합침으로써, 여기에 실례를 제공했습니다)

대학의 도래 혹은 “도래할” 철학, 지성인들의 책임, 지구적 교통의 세계 안에서 그들의 자리의 문제인 이 모든 것은 데리다의 기여 없이는 반성하기 한층 어려운 것입니다만, 이 모든 것은 그의 모범과 글 안에서 사유의 원천들을 구하길 그리 빨리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잘 가요 자끄. 아니 차라리, 곧 만납시다.

 

À bientôt, Jacques Derrida

par Étienne Balibar
philosphe.

Quelques heures après la disparition de Jacques Derrida, je ne veux pas tenter de caractériser son oeuvre en quelques mots. Je veux encore moins l’enfermer dans une étiquette. Seulement me remémorer quelques moments d’une vie et d’une pensée que j’ai eu la chance de rencontrer comme élève, collègue et ami.

Je me souviens de son arrivée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où nous préparions l’agrégation. Précédé de sa réputation de « meilleur phénoménologue de France », Derrida était surtout, pour nous, l’auteur d’un essai éblouissant sur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 Husserl, dans lequel la question de l’historicité de la vérité était arrachée aux débats entre le sociologisme et le psychologisme. Il y allait d’emblée au plus difficile : la question des conditions de possibilité de la démonstration, en la faisant passer d’un problème de garantie formelle à un problème de reproduction dans le temps, anticipant sa grande thématique de la « trace », ou de la connexion entre l’activité de la pensée et la matérialité de l’écriture. Ses cours étaient - éloquents, mais surtout rigoureux dans l’établissement des concepts et la lecture des textes (comme ils le resteront toujours, il suffit de lire Politiques de l’amitié). Je découvris des années plus tard que j’en avais mémorisé des développements entiers grâce à la clarté et à la force de ses interprétations.

À cette pratique de grand enseignant, je veux rattacher une leçon plus générale. Derrida qui, dans le monde entier, est devenu une figure très médiatique, n’a jamais cessé de travailler dans l’université et d’y voir le lieu fondamental de l’activité philosophique (même si, dans son pays du moins, elle ne lui a concédé que chichement la reconnaissance). Par des initiatives telles que les états généraux de la philosophie de 1979, ou la création du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en 1983, il a tenté de l’aider à sortir de son carcan hiérarchique, de son exclusivisme disciplinaire et de son nationalisme (d’autant plus stérilisant lorsque, comme en France, il se croit assuré de porter les valeurs « universelles »). Il est vrai que l’université dont il s’agit là est ce que, dans une conférence à Stanford de 1998, il appelle une université sans condition, s’assignant par-delà les frontières et les contrôles du pouvoir, la tâche de repenser tous les travaux humains et d’énoncer le possible (et même l’impossible) à l’époque de la mécanisation et de la mondialisation.

Je me souviens de la publication en 1967 des trois manifestes de cette nouvelle méthode qu’on appellerait plus tard la « déconstruction » : la Voix et le Phénomène, De la grammatologi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et de leurs subtils croisements entre philosophie et littérature. Je me souviens des grandes controverses avec Lévi-Strauss sur la lecture de Rousseau, avec Foucault sur celle de Descartes, qu’on peut relire aujourd’hui comme autant de « querelles » fondatrices du structuralisme philosophique, où se joue sa démarcation avec la métaphysique et, déjà, la virtualité de sa transformation en un « post-structuralisme ». C’est-à-dire en une critique interne de l’idée de structure (en particulier de sa prétention à représenter des « totalités »). Cette critique, toutefois, ne se fait pas du point de vue de l’humanisme ou de la liberté du sujet, mais du point de vue des différences qui compliquent notre idée de l’homme (donc des « fins de l’homme » et de ses droits), et en soulignent l’ambivalence : la conscience et l’inconscient, le corps et la lettre, le masculin et le féminin (et le neutre). Car, elles comportent toutes un excédent irréductible aux oppositions binaires, formelles. Un tel excédent de sens (qu’il appelle le « supplément d’origine ») ouvre aussi bien à la violence des mécanismes identitaires et des stratégies d’appropriation du monde qu’au recommencement et à la multiplication des interprétations. On trouvera là le germe des grands thèmes de sa maturité, en particulier sa conception de l’événement comme un « à venir » incalculable, dans lequel la responsabilité individuelle ou collective est portée à l’extrême, non parce que nous serions capables de maîtriser « performativement » les conséquences de nos actes et de nos paroles, mais parce que nous savons déjà qu’ils entraîneront à l’infini la relance et la reformulation du problème du droit et de la justice.

Enfin je me souviens de toutes les circonstances dans lesquelles - depuis le secours aux intellectuels « dissidents » de Tchécoslovaquie au sein de l’association Jan Hus jusqu’aux prises de position pour les droits du peuple palestinien et la réconciliation entre les adversaires dans le conflit israélo-palestinien, en passant par la défense du droit d’asile en Europe contre les politiques sécuritaires et la stigmatisation des « étrangers », j’en passe évidemment - nous avons tenté de contribuer, en tant qu’intellectuels sans attaches sinon sans engagements, à l’émergence de ce qu’il a appelé un « nouvel internationalisme ». Non pas que nous ayons toujours été entièrement d’accord dans nos analyses et dans nos références historiques. Mais, là encore avec beaucoup d’autres, et souvent à son initiative, nous avons partagé la conviction que les intellectuels et les artistes ont un rôle propre à jouer dans la constitution d’une résistance multiforme et multipolaire à l’emprise des souverainetés d’État ou de marché qui engendrent la violence de masse et s’en nourrissent en retour. Ce qui passe par la déconstruction de leurs discours et par le dialogue constructif entre leurs adversaires (comme il venait d’en donner l’exemple en joignant ses forces avec celles de son vieil « ennemi » Habermas pour démonter la machine de propagande de la guerre sans fin contre le terrorisme et les « États voyous »).

Tout cela, qu’il s’agisse de l’avenir de l’université ou de la philosophie de l’« à venir », de la responsabilité des intellectuels et de leur place dans le monde des communications globales, est plus difficile à réfléchir sans sa contribution, mais ne cessera pas de sitôt de chercher des ressources de pensée dans son exemple et ses écrits. Adieu, cher Jacques, ou plutôt à d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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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 서다.

이박 삼일의 일정으로 부산에 다녀왔다. 국감 이랑 김주익 열사 일주기 취재를 하고 왔다. 꼽사리로 미 대선 토론 기사도 한 건 쓰고...간만에 아니 추석지난지 얼마 안 됐지만 부산 집에서 지내다 왔는데 집에선 저녁 한끼 아침 한끼 밖에 못 먹었다.  꼭 밥을 먹어야 맛은 아니지만 집에 가서도 너무 바쁜 척 한게 아닌가 싶어서 엄마, 아버지한테도 좀 미안하다.

 

남들 보기엔 모자람이 많을지 몰라도 요즘 내 머릿속은 온통 일로 가득 차 있다. 돌이켜보면 나 자신을 위해 투여하는 시간도 거의 없다. (뭐 당신들도 마찬가지라고?) 그런데도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어디 가면 좀 더 파보고 싶고 이런 사람도 만나고 싶고 머릿 속에 떠오르는 기획들이나 다른 뉴스 볼 때 잡히는 실마리들을 풀어보고 싶고...

 

타 매체에서 내가 잡기만 하고 못 건드린 꺼리들을 가지고 쌈박하게 뽑아내는 걸 보면 '에이 씨 내가 했으면 더 잘 할 수 있을건데' 하는 생각이 들기 일쑤다. 내가 실제로 더 잘 할 수 있는지는 별개로. 아 모르갔다. 정신 없이 뛰다가 문득 멈춰서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가끔은 옆 사람들한테 짜증도 나고 그런다. 틱틱 거리고 싶기도 하고 '나 요즘 너무 착한 척 하는거 아닌가 하고 싶은 말 참고 사는건 아닌가?' 하는 되도 안하는 잡상들이 스멀거리기도 한다.

 

스스로를 좀 더 몰아 붙일 것인지 너무 빵빵해져 터질 것 같은 타이어의 바람을 약간 빼줄것인지 결정할 시간이 왔다. 지금까지는 그냥 아예 타이어 터뜨려 버리고 뒷자리 옆자리에 탄 사람들이야 어쩌던 말던 나 혼자 내려버린적이 수두룩했지만 이젠 그럴 순 없고...근데 여기서 바람 약간 빼버리면 좋은게 좋지, 딴 매체야 어떻게 하든 우리는 우리 형편에 맞춰 우리 페이스로 가면 되지 하면서 주저앉아 버리게 될것이 뻔하다. 역시 도스께끼? 도스께끼의 결과는 옥쇄? 헉!

 

운동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중독자로 불리는 한 선배가 문득 떠오른다. 도대체 저 양반은 업무가 그렇게 좋아서 저러고 있는걸까 아니면 다른 할 일이 없어서 회사일에만 매달리는 걸까 궁금했었는데 이제 내가 그 짝 나는게 아닌가 싶다ㅠㅠ

 

막상 주말에 뭔가 딴 걸 해야겠다 (놀러간다던가 영화를 본다던가) 싶은데 마땅한 것도 안 잡히고 같이 할 이도 없다. 돌아보니 술친구 할만한 사람들만 보인다.  정말 무서운 현실이다...글 쓸 것 두 꼭지 있는데 있는데 그냥 그거나 쓰고 다음 주 기획이나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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