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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표 헌법과 초헌법적 권위주의

부제 : 문재인 수석의 부당한 인식과 똘레랑스

 

이래 인용부분은 문재인수석(이하 경칭 생략)이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권 행사에 관련하여 그 정당성에 관해 웅변한 내용중의 일부이다.(필자가 이 글에서 지칭하는 헌법은 민주적정당성을 가진 '87년 헌법을 가리킨다.)

 

"...검찰도 그런 시대정신을 존중해 나가야 된다. 문제는 그 시대정신을 그러면 누가 해석하는가, 그 시대정신을 물론 검찰도 하고 또 법원도 하고 여러 곳에서 하겠지만 적어도 정부 내에서는 정부기관 간에 이 시대정신에 대한 해석이 다를 경우에 그 최종적인 해석, 권한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에게 있다고 본다."

 

문재인이 시대정신(여기서는 법)은 사법부도 해석하고 행정부도 해석하는데 "(행)정부내의 정부기관간에 시대정신(법)에 대한 해석이 일치하지 않을 때 최종적인 해석, 권한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에게 있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문재인의 이러한 부당한 인식과 유사하게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선거법관련, 권력구조등과 관련하여 여러 번 그 일단을 내 비친 적이 있다.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

 

(자연)법다워야 하는 헌법은 일응 주권자인 국민의 총의 혹은 국민의 결단이라고 일컬어진다. 성문법주의인 우리나라 헌법전은 그 자체가 종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국민의 의사의 결집(복수의 사상의 주체의 결단 내지 의지)이라 할 수 있다. 이 헌법전에 시대정신이 구현돼 있으며 공동체의 최고규범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선거법개정문제나 사회양극화 해소문제 또한 평등이념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 수렴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청산이란 참여정부가 새롭게 안출한 그리하여 신패러다임이 아니라 헌법에서 규정한 당위적 상태로의 복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노무현정권이 '패러다임의 전환'이니 뭐니하며 미화. 선전한 것은 포퓰리즘이거나 정치선전인 셈이다.

 

이 헌법전에 정해진 소정 절차에 따라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피선된 것이고,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도 또한 헌법전에 규정된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친노세력(일부 언론매체 포함)들은 탄핵이 부당한 것이라고 헌법재판소가 결정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친노세력들과 민노당은 적어도 강정구의 사상의 자유니 뭐니를 운위할 처지가 아니다. 헌법에 체현된 주권자의 (일반)의사이기도 한 탄핵제도를 무시하여 정치적으로 단죄하는 행태를 실질적으로 헌법제정(개정)권력의 주체인 주권자인 국민의 경합적 사상의 무시이거나 유린이기 때문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삼권분립제도를 채택한 배경은 권력자는 "부패하거나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농후하다"라는 비관적 인성관을 토대로 하고 있다. 삼권 중 입법부는 헌법을 구체화하는 법 제정권을 가지며, 사법부는 구체적 사건에 대해 법이 무엇인지를 밝혀 선언하며, 행정부는 법(률)을 일반적으로 집행하는 국가기관이라 이해할 수 있다.

 


최종적인 해석, 권한은 헌법재판소에, 궁극적 권원은 주권자의 (일반)의사

 

위에 인용한 문재인의 발언 "(행)정부내의 정부기관간에 시대정신(법)에 대한 해석이 일치하지 않을 때 최종적인 해석, 권한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에게 있다고 본다"라는 인식이 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정부기관간의 권한에 대해 다툼이 있을 때는 권한쟁의라 하며 최종 유권해석기관은 헌법재판소이다. 이것은 주권자인 국민이 정한 주권자의 명령이며 (일반)의사이다.

 

법조인이기도 한 문재인이 시대정신을 법률관계가 아닌 것으로 한정하여 개혁 방법론등의 재량영역에서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간의 최근 문제된 사안은 법률관계이다. 대통령이 최종해석권(한)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문재인의 이와 같은 황당한 인식은 주권자인 국민의 권위인 헌법을 참징하며 주권자를 농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반헌법적인 부당한 작태라는 점에서 반민주적 인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당한 인식을 가진 참모가 대통령을 보필하고 있으니 노무현의 초헌법적 발언들이 심심찮게 터져나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대통령은 입법기관도 아니요, 사법기관도 아니다.

 


천정배장관의 지휘의 당위적 형태

 

천정배가 행사한 사상 초유의 지휘권은 검찰의 부당한 인신구속 관행 일반에 대한 지휘였어야 했다. 즉 "남용되어 온 관행적 인신구속을 개선하라"라는 형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피의.피고인에 대한 인권보장차원에서 이처럼 일반적 지휘여야 함에도 특정의 구체적 사안인 강정구건에 대해 사상 초유의 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독립이 보장되어야 하는 검찰업무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려 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는 것이다.

 

헌법은 국민의 의사의 결집체요 곧 일반의사이다. 그런 까닭에 헌법을 무시하는 것은 곧 주권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요, 시대정신을 노무현만이 안다는 식의 노빠들의 궤변은 헌법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초헌법적인 파쇼요 독선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헌법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개폐되기 전에는

 

공직에서 봉사하는 자들은 누구나 금과옥조로 존중해야 하는 주권자인 국민의 (일반)의지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피선되어 국정을 운영할 때는 '선서'한 바대로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이지 문재인의 황당한 인식처럼 헌법위에 군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관용(똘레랑스)개념의 와전

 

이른 바 저명인사들의 글에서 강정구건에 대해 사상의 자유니 학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즐겨쓰는 볼테르의 말이 있다.
“당신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이 그 말을 할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가 그것이다.

 

위 볼테르의 발언은 파시즘이나 나찌즘이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18세기 초엽에 신앙(신교과 구교)의 자유에 관련된 발언이다. 구교도인 볼테르입장에서 구교의 신교에 대한 배타성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한 말인 것이다.

 

그런데 항간에서 쓰여지는 형태를 보면 마치 모든 사상들이나 생각들이 무차별하게 가치로워 존중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악의적으로 와전되어 쓰이고 있다. 볼테르의 <관용론>에서 따온 아래 글을 읽어보며 '똘레랑스'와 '자유의 한계'에 대해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시민 개개인은 ...그 이성이 지시하는 것만 고려해도 될 것인가? 그렇다. 단,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엇을 믿거나 믿지 말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법과 관습을 존중해야 할 의무는 있기 때문이다. 출전 : 볼테르 저 <관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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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김욱교수

아래는 김욱교수(이하 경칭 생략) "검사님들, 웬만하면 법대로 하시죠"에 대한 부분적 비평이다.

(이런 것을 밝혀야만 하는 것 자체가 불만스럽지만, 필자가 사법부의 과거를 긍정적으로 보고 그리하여 맹목적으로 옹호하려는 취지에서 쓰는 글이 아니다. 김욱의 무지함을 지적하기 위한 글이다.)



* * *

김욱의 글에 등장한 아래 내용을 보자.

"만약 집안 싸움인 이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테고, 물론 우리가 실재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사회과학적 추론이라면 유력한 조건들을 매거하여야 타당한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강정구가 위 문장을 서술할 때 '실재 겪었던 살상과 파괴'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6.25동란 전과정을 염두에 두고 썼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개입한 참전국은 연합군(미국)과 중공이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 문장속에는 아래와 같이 세 개의 문장이 포함 돼 있다.

'1. 미국이 개입하다', '2. 전쟁이 끝나다', '3. 비극은 없다'이다.

여기서 강정구의 가치평가가 개입되는 징후를 살펴보자.

1.문장에서는 부당하게 '중공'이 배제되었다. 이 부분은 사실을 불완전하게 서술한 가치관계적 서술이거나 학자답지 않은 서술이다.
2.문장은 원래 '한 달 이내'라는 부사구를 추가하여 강정구의 주관적 추론이 완성된다.
3.문장에서 "비극"이라는 수사는 가치평가가 개입된 판단이다.  

이를테면 갑,을,병이 싸웠는데 갑을만을 싸웠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사화과학적 실험실'을 동원하여 강정구를 변호하는 김욱의 학자적 바닥이 드러나는 셈이다.


또, 머릿속에서 추론형태로 전개되는 픽션을 사실판단이라고 말한다는 무식함이다. 사실판단이란 가치평가가 개입되지 않는 명제이다.

위 문장이 바르게 사실판단이려면 "중공과 미국이 개입해서 전쟁은 3년여를 끌었고 그런 인명과 재산피해가 초래되었다"라는 문장이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공과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3년여를 끌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인명과 재산피해는 없었을 것이다"가 된다. 이 명제야말로 사화과학적 방법론상의 가언추론이며 사실판단이라 할 것이다.



* * *

김욱은 강정구의 발언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는 '가치의 문제'다. 내가 북한이 시도한 통일전쟁이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가치판단한 게 아니다. 1950년 10월 1일 남쪽이 38선을 넘어 북진 통일을 위해 밀고 올라갔다. 이것에 대해서도 정당하냐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 적 없다. 다만 사실적 차원에서 남과 북이 서로 '통일'을 목표로 나갔다는 이야기다." (<오마이뉴스>, 2005. 10. 12)

그러나 가치의 문제는 당부에 관한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안을 재단함에 있어 가치관에 입각해서 조망한다면 가치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이라고 할 때는 당부의 가치판단은 아니지만 미학적(aesthetic)인 관점의 가치판단이다.

따라서 김욱이 강정구의 문장을 사실판단이라고 변호하며 전개하는 자체는 무지한 소리이다. 김욱의 엉터리 논리전개는 계속된다

김욱은 "예컨대 기상청의 어떤 통보관이 '이런저런 조건으로 봐서 내일은 비가 올 것이다'를 사실판단이라고 말한다. 이게 사실판단인지 보도록 하자.

정확히 '이런저런 조건으로 봐서 내일은 비가 올 것이다'에서 예보내용인 전체문장이 사실이며 가언추리(판단)이다. 사실판단이 아니다. 실제로 판단이 수행되는 대상은 "비가 오지 않았다"라는 사실과 예보내용(사실)이라는  둘의 관계이며 그 둘의 부합여부를 따지는 것이 사실판단이다.

* * *
김욱은 인용한 헌재의 결정을 보자.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ㆍ고무 등) 제1항 및 제5항은 각 그 소정 행위가 국가의 존립ㆍ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 적용된다고 할 것이므로 이와 같은 해석하에서는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고 할 것이다."(헌재 1990. 4. 2. 89헌가113)

해당 조항이 적용되는 경우를 보면


소정행위가

1. 국가의 존립ㆍ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나
2.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주는 경우나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

일 때 이른바 구성요건요소를 충족시키게 된다.

위험성이란 반드시 현실적인 위험의 노정이 아니다. 글자 그대로 위험성이 있는 경우이다. 전염병이 퍼질 때 방역이나 예방을 생각해 보면 된다. 이 위험성은 사법부가 '법과 양심'에 따라 운용하게 되는 기속재량영역이 된다.  천정배가 개입한 부분이 바로 이 기속재량영역이다.


* * *
김욱의 황당한 해석론

"사랑도 팔고 사는 속이고 속는 세상,♪ 오로지 믿고 의지한 당신마저도, 나를 버리신 서울이 싫어 싫어졌어요.♬"라는 김수희의 가사를  "자본주의 서울을 부정하고 공산주의 평양을 찬양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그녀는 <서울여자>라는 노래를 통해 '평양남자'와의 '붉은 사랑'을 열망했던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김욱의 뇌리에는 자본주의체제와 공산주의 체제라는 2분법적 조망만이 존재한다. 이런 해석론이야말로 빨갱이 마녀사냥식 해석론이다. 왜 비자본주의적 양상은 공상적사회주의, 김수희만의 유토피아, 서구라파의 사회주의, 토마스만의 유토피아, 어떤 주체의 주관적 이상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김욱이 검사나 판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랬더라면 마녀사냥의 주범이 됐을 것 같다.



* * *
김욱의 황당한 해석론

김종빈이 떠나면서 남긴 변 "지휘권 행사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고 하여 따르지 않는다면 검찰총장 스스로 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검찰은 통제되지 않는 권력기관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을 김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불구속 수사 지휘는 적법하지만 타당하지 않다? 검찰의 수장이었던 그는 지금 아마도 잘못된 법률에 저항했던 '시민불복종 운동'의 기수 소로우의 심정인 모양이다.

필자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된다.

"검찰총장자리는 김종빈 아닌 사람에게도 열려 있다. 형식적 합법성을 갖춘 장관의 지휘를 따르지 않는다면 항명이 되므로 비록 수용하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므로 사임한다."

물론 김욱이 국보법과 인권보장이라는 이상에 지배되어 김욱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야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소위 법학자가 강정구의 사상의 자유니 학문의 자유를 위해 하는 변호치고는 누구의 소신(사상)을 의도적으로 곡해하여 해석하는 것은 학자로서 할 짓이 아니다.


* * *
김욱의 황당한 소리는 계속된다.

"이런 구시대적 글이나 쓰고 있는 나도 정말 한심하다 못해 짜증이 난다"라고 한다.  아니 인권보장, 사법부독립만큼 중차대한 이슈 외에 김욱이 한심하지 않게 생각하는 아젠다는 뭘까?  이런 태도야말로  시건방진 아젠다 모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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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진영의 네오매카시즘과 그 폐단

작금에 사상의 자유에는 한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주장들인 강정구의 의법조처 주장을 색깔론으로 매도하는 신흥-매카시즘이 부상하고 있다.

 

그런식이라면 친일부역배 관련 과거사 청산이 지지부진하여 세월이 많이 경과한 터라 종이매체에 흔적을 남긴 자들에 집중되고 있는 까닭에 그들에 대한 과거사청산문제도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작업일 수 밖에 없다.  

 

 강정구는 지엄(?)한 교수신분이라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그 사상의 피력은 완전히 보장받아야 되고, 그 외 장삼이사의 사상의 개진은 맹목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신분에 의해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 천부적인 평등이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양상은 전근대적인 특권의식이라는 부정적 모습이다.


한국판 네오매카시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대한민국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하여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Neo-New)을, 중세의 마녀사냥 범주로 포섭될 수 있는 과거 미국의 매카시즘을 의용하여 네오매카시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국민의 콘센서스(consensus)가 체현된 헌법에 반하는 강정구의 발언들이야 새삼 이 한정된 공간에 적시하여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강정구에 얽힌 문제를 보수vs.진보적 이념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정략적이며 바르지 않는 태도이다.  그런 행태야말로 사상의 자유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주장들은 무차별하게 모든 것이 용인될 수 없다는 사상의 자유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모습이다.

 

색깔론과 신색깔론

 

간단히 빨강색이 아닌데 빨강색이라고 뒤집어 씌워 인권을 유린하는 것을 색깔론이라고 하는데,  신색깔론은 빨강색을 빨갛다고  얘기하는데도, '무고한 사람 잡는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레드콤플렉스의 피해망상증 증세이다.  빨강색을 빨강색이라고 말할 때는 색깔론이 아니다. 

 

무모한 만용과 본질 왜곡 

 

병리적측면에서 한 사람이 조류독감에 감염되었다 하여 '겨우 한사람이니 문제없다'는 식으로 예방조처나 안전조치를 소홀히 해야 할 것인가?   심사숙고할 여지도 없이 사전예방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강정구와 같은 자 때문에 우리 사회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체제의 우월성과 자신감을 내세우는 낙관론자들은  불온한 사상들이 건전한 사회공동체라는 제방을 무너뜨리는 것이  조그만 쥐구멍(균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이 네오매카시즘의 등장은 이른 바 진보언론매체의 부상, 친좌파적인 시민단체나 NGO의 성장, 친좌파적 성향의 네티즌들의 증가에 힘입은 것이라 진단된다.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특징은 자신들의 주장은 진리고 그 외의 비우호적인 주장들은 모조리 일고의 가치도 없는 수구.보수라고 몰아부쳐 딱지를 붙인다.

 

이 딱지붙이기의 대상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하며,  과거 독재세력을 추종하며 권력의 시녀로서의 인권유린을 초래했던 색깔론의 폐해를  초과하는 심각성이 있다.

 

이러한 독선적 특징은 나찌스, 파시즘, 공산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징표이다.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두려운 징후이다. 지금 강정구와 얽혀 논란되고 있는 사태의 본질은 자유의 본질과 범위의 문제이지 이념논쟁이 아니다. 이념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치적입지를 목적으로 하는 정략이고 이에 편승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바른 태도가 아니다.

 

강정구에 우호적인 자들의 자충수

 

작금의 강정구건에 대한 논란은 친미니 반미의 용공이니 반공이니의 관점에서만 봐서는 안 되는 자유의 본질과 그 범위에 관련된 헌정수호차원의 사안인 것이다.

 

강정구에 우호적인 자들의 이러한 독선적이며 이그러진 마녀사냥식 딱지붙이기 독선은  결코 좌파 진보주의자의 입지를 제고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진보진영의 이러한 배타적 독선적 태도에 터잡은 네오매카시즘의 부상은 사회적 공감을 얻는데 실패하여 스스로를 위축시키고야 마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국가보안법의 존재의의와  그 당위성을 실증하고 있는 셈이며 색깔론의 부정적 모습뿐만 아니라 아울러 체제수호라는 긍정적 측면까지 부상시키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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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강단좌파들의 무지한 자유론

필자는 인류역사의 위대한 유산인 인간의 존엄, 평등, 자유의 가치를 결코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취지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근자에 마치 자유 - 특히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 가 절대적인 것처럼 호도하는 경향이 있어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글이다.


자유라는 천부적 기본권의 역사
 
국가이전의 천부적인 인간의 권리의 주체로서의 자유는 일응 역사적 유산임이 명백하다. 비록 오늘날에는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누구나 부정하지 않게 됐지만,  예를 들어 최근세 이전에만 하더라도 노예제도가 공인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인도주의적인 양상이 시대정신에 의해 하나 하나 꺼풀 벗겨져 천부적(생래적)기본권이 된 역사에는 수 많은 투쟁과 희생이 점철돼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위대한 인류문화의 유산에 대해서 오늘 날 일부 식자들과 매체들은 자유가 마치 절대적인 양 호도하는 반사회적인 작태를 뻔뻔하게 자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 본질(범위)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자유와 관련한 절대적. 상대적이란?

우선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확인하는 차원에서 정리하자면 절대적이란 공간적.시간적.관계적으로 타당함을 얘기한다. 부연하자면 자유는 장소에 무관하게, 시간에 무관하게, (타인과의) 관계등에서 무관하게 제약없이 보장되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 필자가 부각시켜 논하려는 측면은 이하에서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 집중하려 한다.


이른 바 한계와 제한의 개념에 대한 잠정적 약속

흔히 법이론에서 한계와 제한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한계란 국가를 전제하지 않고 법과 무관하게 그 본질상 내재하는 제약(원리)을 논할 때 사용되며, 제한이란 국가를 전제하고 (실정)법체계내에서 제약(원리)을 다룰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 필자가 논지를 전개할 때 이렇게 사용할 것이다.


일반론으로서의 자유의 한계는 존재하는가?

평등한 자유향유 주체간의 갈등국면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한계나 제한이 논해질 실익이 있다. 즉, 무인도에서 독거한다면 자유는 아무런 실천적 의미가 없을 것이다. 즉 어울려 살아내는 사회적 인간들에서야 비로소 실익이 있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즉 자유의 본질을 궁구하는 전제가 자유의 향유주체간의 문제라는 의미에서 상대적인 것이다.

또, 한 편 평등한 자유의 향유주체간의 갈등국면에서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의 문제가 대두된다. 자유의 범위가 제약없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무인도에서 독거하는 입장에서나 가능한 공허한 이상론이다. 유감스럽게도 평등한 자유를 향유하는 주체들인 '나'와 '너'의 그리하여 '우리'의 관계에서는 절대적일 수 없다.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2인석에 여행객 A와 B가 착석한다. A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 B의 영역까지 침범하여 자신의 자유를 주장(행사)한다는 것은 부당하여 방종이라는 것임을 유치원생정도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처럼 자유는 국가, 법이전에 이미 일정한 본질적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렇듯 본질적 한계가 엄존하는 자유의 본질(속성)로 해서, 역사적으로 수다한 희생을 수반하며 검증된 사상들을 걸러낼 수 있다. 희대의 인종차별적인 나찌즘, 포폴리즘의 광기로 얼룩졌던 파시즘, 현실사회에 자신의 사상을 폭력적으로 구현하려는 '폭력노선을 맹종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와는 다름-'등은 자유의 본질마저 유린하는 사상(경향)들이므로 건전한 가치관이 정착된 사회에서는 용인될 여지가 없으며 용인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사상의 자유경쟁시장은 그 이면에 가치(사상)의 우열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비효율적인 낭비를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필자가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검증된 세가지 경향(사상)을 예시한 취지는 그 밖의 재고할 가치가 있는 것(사상,경향)은 용인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꽃피울 적격은 참여주체의 평등함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환경을 그 전제로 한다.

역사적으로 부정적이라고 판정된 사상들마저 사상의 자유시장에 진입할 자격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스로가 나찌식으로 가스실로 보내져도, 파시스트에 의해 사회에서 격리되어도, (위에 언급한) 공산주의식으로 폭력으로 배제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자로서 그러한 비인도적 나락에 떨어져도 그것을 감내하며 용인한다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이라는 주장하에 이러한 사상들을 옹호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향유하는 평등한 주체들에 대한 결과론적 가해자 지위에 서고야 말 것이다. 이런 몰상식하고 무지한 자들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실정)법상의 자유의 제한의 존재여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존재하며 제약가능하다. 위에 언급한 한계를 (법)제도적으로 구현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고, 혹은 공동체의 특수한 환경조건에서 공동체구성원들의 합의로 제도화되었거나 용인되는 제약원리를 든다면...,

대표적인 것으로 미 판례법(불문법)상의 Homes판사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법리가 있다. 다음으로 서독에서 채용된 방어민주주의라는 법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헌법제37조2항에 규정된 일반적 유보조항-공공의 안녕질서, 국가안보, 공공복리-이 있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가 무제약적인 절대적 자유라고 주장하는 자가 이런 법리를 언급하며 원용하는 순간 절대적인 자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자가당착을 범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는 법이전에 한계가 존재하며 (실정)법상의 제한도 존재한다는 입장이 자유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 입장이 옳다.


이른 바 사상의 자유는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사상의 자유를 논의의 편의상 나눠서 고찰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상형성의 단계와 이 단계를 초과하여 외부로 표출되어 발현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사상형성의 단계는 외부에서 인식할 표지(징후)가 없으므로 그 성질상 국가권력(법적 제재)이 간섭할 여지가 없는 영역으로 일응 절대적으로 보장된다.

그러나, 이 영역이 절대적이라고 하여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섣불리 얼룩소를 검정소라고 단정하는 부당한 일반화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성의 다음단계인 다른 평등한 사상의 향유주체인 사회속으로 그 사상이 발현(노출)될 때 - 이 때는 표현의 자유문제도 얽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절대적인가를 따져 비로소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를 판가름해야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상의 자유가 외부로 표출된다는 것은 곧 특정 사상이 체화된 그 자유의 향유주체의 실존적 실천단계이다. 사상의 자유도 자유의 한 갈래이므로 위에 언급한 자유의 본질(범위)에 대한 일반론이 사상의 자유에도 그대로 타당하다. 즉 사상의 자유도 절대적인 자유가 아닌 것이다.

혹자는 Homes판사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리의 해석을 '명백하고 현존하는 <구체적인> 위험'으로 부당하게 제한을 가한다. 물론 그러한 한정적 수식어를 부가하는 취지가 자유을 존중하는 취지라고 일응 이해할 수 있으나, 이른 바 자유의 적에 대해서 거꾸로 관대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헌정사에서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인권을 유린한 불명예스러운 전례때문에 제도자체를 백안시하는 태도도 또한 문제이다. 그러한 제도만능주의적 사고라면 결코 인권유린의 수치스러운 역사는 불식될 수 없다. 국민 각자가 잠재적인 인권유린을 범할 수 있는 권력을 감시하며 비판하는 풍토가 보다 보편적이 될 때 수치스러운 역사는 종식될 것이다.

노파심에서 필자의 논의를 이론적으로 논박하지 않고 반공이데올로기에 함몰돤 자라느니 파쇼라느니 하는 이른바 사상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의 딱지붙이기가 있음직해서 덧붙이는데, 필자도 사상의 자유의 향유주체로서 이렇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음에도 그런식으로 딱지붙이기를 자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빨갱이 마녀사냥임을 지적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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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의원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

열린우리당 김부겸의원(이하 경칭 생략)이 최근에 노무현의 연정 군불지피기에 나섰다한다.  이하 김부겸의 지난 글들을 인용하여 김부겸의 정체성을 추적하며 따져 보기로 하자.

 

김부겸은 87년 이후 한국정치를  .'짬뽕', .'꽈배기'정치판으로서 '3김정치인'지역주의 정치라고 규정한다. 그리하여 신당으로 둥지를 바꾼 독수리 5형제들의 행위는  긍정적인것으로 정당화되었고, 총선시민연대는 이들을 철새정치인으로 지목하지 않음으로써 박자를 맞춘 적 있다. 

 

주지하다시피,  반민주독재정당에 뿌리를 둔 한나라당은 그러한 과거의 행태에 대해 대국민사죄를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김부겸이 87년 이후의 정치를 이렇게 규정하며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무차별하게 몰역사적으로 등치시키는 연유를 추론한다면, 그것은  (주체적이며 자주적인) 김부겸이 그러한 당에 휩쓸려 몸 담았다는 사실이 어떤 점에서도 간과하기 어려운 불명예스러운 흔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변명을 위해 역사까지 멋대로 재단하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나라당에서의 김부겸의 흔적을 확인해 보자.

 

한나라당에 대한 김부겸의 평가

 

한나라당이 점점 더 극우화해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영남지역의 지지기반을 꽉 움켜쥔 채 어떠한 변화와 개혁도 거부하고 있습니다...'건곤일척'의 심정으로 당 개혁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엔 결코 적당히 물러서지도 않겠다고도 했습니다. 이제 점점 그때의 약속에 대한 책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듯 합니다. (필자주 : 극우란 더 이상 右向할 수 없는 극단으로 한계개념이다.  김부겸은 이 때 극우정당인 한나라당소속 극우의원 혹은 우파였다)

 

...인적 청산을 통한 정치개혁이 과제입니다. 그런데 한 당(필자주:한나라당)은 아예 그럴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이고, 한 당(필자주:새천년민주당)은 내부에서 격렬히 저항하고 있습니다.(필자주 : 한나라당소속 김부겸)

 

한나라당은 이렇게 해서 영원히 이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놓겠다는 겁니까? 그만큼 무고한 사람을 짓밟았으면 됐지, 아직도 성이 안차는 겁니까? 도대체가 구제불능입니다.(필자주: 열린우리당소속 김부겸)

 

한나라당은 4.30 재보선 대승 이후 완전히 옛날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념은 전통적 반공주의와 보수주의로 후퇴하고, 정책은 정부여당의 그것에 반대하는 방향으로만 맞춰지고, 대화와 협상에선 도무지 양보와 타협을 모릅니다.(필자주 :  한나라당의 과거로의 회귀)

 

한나라당에 대한 이러한 김부겸의 인식과 주장이 옳다고 간주하면 노무현의 한나라당과의 연정론을 옹호하는 김부겸의 입장은 비정상이다.  정상적 모습은 소연정 주장이다. 

 

다음에는 김부겸의 이념적 정체성을 그의 발언들을 추적하여 들여다 보자.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제대로 된 보수정당과 개혁정당 (필자주 : 김부겸은 보수주의자)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간의 이념논쟁은 중도주의와 보수주의간의 이념논쟁(필자주 : 김부겸은 중도주의자)

 

양당(필자주 -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의 이념은 차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  한나라당이 자유주의(자유나 성장)에 더 큰 비중을 둔다면 열린우리당은 두 이념의 균형(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복지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정도의 차이. 그런 차이를 둘러싸고도 활발한 이념논쟁이 전개되어야 함. (필자주 : 김부겸은 중도주의자)

 

위에서 김부겸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 변화가 이념적 층위가 다른 것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김부겸의 당적변경은 단순한 정치개혁을 위한 것 뿐 아니라, 김부겸자신의 이념적 정체성변화까지 수반했음을 보여 준다.  노무현이 즐겨쓰는 말로 김부겸의 패러다임의 변화인 것이다. (한나라당으로 봐선 변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부겸의 이러한 한나라당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따른다고 할 때, 노무현의 대연정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당이란 정당이념의 추구라는 것이 본질임을 주목할 때,  상생과 타협으로 대연정 와중에서 안출될 정책이란 최선이 중도우파적 그것이요  최악은 보수정책으로 귀결될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이 여당임에도 절대과반수를 만들어 준 취지가 개혁추동력의 부여라는 역사적 소명이라 할  때,  열린 우리당 스스로  실기로 보선에서 여소야대국면을 자초한 후  여소야대라는 추동력상실을 빙자하여 개혁의 후퇴(혹은 연기)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준 지지자들에 대한 민주적정당성의 부정이요,  그런 의미에서 패륜정치이다.

 

그렇다면 김부겸이 노무현(의 대연정론)을 응원하고 나선 것은 김부겸의 본래의 모습인지를 확인해 보자.


김부겸이 말하는 정책의 우선순위 : 경제분야및 정책경쟁

 

온건 합리세력이나 중도세력이 더 커지기 위해서는 우리편은 무조건 이쁘고 남의 편은 무조건 없어져야 한다는 식의 패거리 정치가 없어져야 합니다. 정치보복은 더 이상 안됩니다.  정치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좋은 정치인이 좋은 정치를 만들지 선거법이나 정치자금 제도를 잘 만든다고 해서 좋은 정치가 보장되는 건 아니더라는 말씀입니다.(필자주 :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김부겸의 결론) 그러러면 좋은 사람이 정치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정치는 성실한 시민이 봉사정신과 소박한 명예심으로 누구나 참여하는 것일 때 활짝 꽃필 수 있습니다. (2002.9.15) (필자주 : 한나라당 김부겸)


 정치에서 경제로, 이념에서 정책까지 확장해 가자는 겁니다. 굳이 어느 게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참여정부의 임기가 경과할수록 더 많은 노력을 경제 분야 개혁에 기울여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필자주 : 열린우리당 김부겸)


...실질적 민주주의의 문제가 뒷전으로 밀린 가장 중요한 이유...리더십의 실종, 대표성의 부재, 정책적 무능만 노정함...이념, 제도, 세력의 측면에서 민주주의 주체세력을 강화해야 함...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간의 이념논쟁은 중도주의와 보수주의간의 이념논쟁으로 그칠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 민주주의 진전을 위해서는 민노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주의도 이념의 시장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음...정당을 선거정당에서 정책정당으로 변모시키는 것. 이런 과제는 상당부분 실현되고 있음...점차 국회가 법안 생산의 중심이 되고 있고 정책경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음...특히 얼마전까지만 해도 국회를 이념공세와 정쟁의 장으로 악용하던 한나라당이 최근 들어 그런 구태를 벗고 각종 정책이나 법안을 선도적으로 제기하여 인기를 높이고 있음. 이에 대해 여당이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음...건강한 보수와 합리적 개혁진보가 공존하며 정책경쟁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전부터 그려오던 정치발전의 모델임...한나라당이 계속 지금처럼 잘 해주기를 바람.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당에게도, 또 우리 국민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임 (필자주 : 열린우리당 김부겸)

 

확인했다시피 김부겸의 발언을 종합해 본다면 노무현의 대연정을 옹호하는 이유는 김부겸의 정치적 연명을 위한 것 외에는 없는 셈이다.

 

그럼 김부겸이 절개(또는 지조)를 지켰는가를 따져보자.

 

...우리 한나라당이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정당’으로 자리잡길 바랍니다. 저희 이회창 총재가 3김청산과 함께 분명한 원칙과 깨끗한 법치로 나라를 다시 한번 일으켜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저의 혼신의 힘을 보태겠다는 각오... (필자주 : 한나라당 이회창후보 지지)


당(필자주:한나라당)의 외연을 넓히겠습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열려 있고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당을 만들겠습니다. 저는 출신과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개혁적 자세를 가진 누구와도 함께 정치발전을 도모할 각오입니다. (필자주 :  김부겸은 한나라당 부흥주의자)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제대로 된 보수정당과 개혁정당의 모습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정당이 이념과 노선에 따라 분화되는 것은 정치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필자주 : 김부겸은 보수주의자)

 

...민주당이 기껏 국민참여경선으로 뽑은 노무현 후보를 상대 후보를 이길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이유로 흔들고 뒤집을 때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정몽준 후보가 등장..상한가..단기필마..과연 대통령이 되면 누구와 함께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또 다시 '철새'들의 군무가 시작됐습니다. (필자주 : 김부겸의 이회창지지)


지난 5년 내내 DJ정권은 병풍, 세풍, 북풍 등등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공격해댔지만 결국 어쩌지 못했고 거꾸로 DJ정권은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만큼 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이회창 후보는 그런 시련을 통과, 단련되면서 반DJ의 중심에 선 반면 노무현 후보는 DJ정권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입만 열면 반창(反昌)을 외치는 건 효력이 떨어진 주문을 계속 외는 것에 불과합니다. (필자주 : 노무현, DJ정권에 비판적이며, 이회창 지지)

 

오늘 현재는 노무현의 연정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전도사로 나선 김부겸,  결국 이제는 당적을 바꿔 '열린우리당 부흥'을 위해 매진하는 속내라고 추단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연명을 위한 화려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지역주의에 대한 김부겸의 인식은 일관되는지 들여다 보자.

 

- 맹목적 지역주의에서 이념적 지역주의로 전화 : 이번 총선을 통해 호남=진보, 영남=보수로 이념성과 지역성이 등식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그 반증의 하나로 수도권 영호남인은 영남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나라당을, 호남인이라고 해서 우리당을 지지한 것 같지 않다.  즉, 이런 수도권의 탈지역주의적 투표 행태는 지역주의가 출신지가 아니라 거주지의 문제라는 걸 의미하고 따라서 이제는 특정 지역 몰표 현상을 지역주의의 결과로 볼 게 아니라 이념성의 문제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념은 그 자체로서 형성, 표출되는 게 아니라...지역→세대→이념으로 연동되고 있다는 얘기임

 

혹자는 지역주의가 약화되고 있다, 계급적 균열로 대체되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여전히 우리 안에는 여전히 강고한 지역주의가 내장되어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 안의 지역주의’는 아직도 시퍼렇지 않은가요?

 

지역주의가 오로지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적 지지행태를 기준으로 편리하게도 멋대로 재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87년 이후의 정치지형을 짬뽕정치 꽈배기정치라고 규정한 김부겸은 신당에 몸담으며 국민을 향해 이념정당을 외치더니,  다시 짬뽕, 꽈배기정치지형으로 되돌아가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열린우리당으로 날아 간 김부겸은 철새정치인이 되었고  따라서  뻔뻔스러운 기회주의자가 된 셈이다.

 

필자의 분석에 오류나 이의가 있다면 김부겸은 따갑게 질책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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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의 철딱서니 없음에 대한 단상

사상은 단편적인 생각이나 사변이 아니다.
사상은 체계적이며 유기적인 가치관이다.

 

사상의 투절한 특정 주체는 그 사상의 토대에서 말과 행동을 관철한다.
따라서 어느 주체가 발언을 함으로써 사상을 표현하고 장차 자신의 신념(사상)을 실천할 기회가 닥쳐올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실천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할 것이다.

 

혹자는 이런 사상의 자유를 절대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를 천착하여 분해해 보면 사상형성단계와 사상이 외부로 표출되어 사상의 주체와 연계되는 외부와의 관계를 맺는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이 때 사상형성단계는 외부에서 포착할 단서가 없으므로 개입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일응 절대적보장을 받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때문에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일부분이 검은 콩을 보고 검정콩이라고 단정하는 부당한 일반화를 범한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외부와의 연계로 나아가는 다음 단계의 사상의 자유에 대해 그 자유가 절대적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그것마저 절대적으로 무제약적인 자유라 하더라도 법체계내에서의 제한을 또 살펴봐야 한다.


인간은 천부적인 자유를 누리는 주체로서 존엄하고 평등하다. 이러한 절대의 대명제로부터 필연적으로 즉자대자적인 사회속에서 각각의 구성원들이 누리는 자유는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


이른 바 법 이전의 자유의 범위문제로 이른바 한계라고 말하여진다.

 

사상의 자유가 외부로 표출 될 때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파시즘, 나찌즘, 폭력혁명을 맹종하는 공산주의가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사조(경향)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위해하다는 점을 재차 검증할 필요가 없다.  이런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부정적인 사상들이 사회에서 활보하는 것을 용인하고 여론과 사상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체정화기능으로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이른바 똘레랑스를 들먹이는 부류들은 똘레랑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이이다.

 

똘레랑스는 관용으로 번역될 수 있는 불어로서 또한 앙똘레랑스라는 반대어를 가지고 있다.


똘레랑스는 잡다하고 다양한 사상들을 무조건 용인하는 환경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앙똘레랑스를 배제하는 사상의 자유경쟁환경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토론 혹은 사상의 자유시장의 대전제는 토론의 주체들의 자유로운 의견개진과 대등한 지위로 상호 논박하여 정화하는 환경이다.  그런데 파시즘 나찌즘 폭력혁명을 맹종하는 공산주의는 앙똘레랑스 성격을 갖는다.  즉 토론이나 사상의 자유시장에 진입할 자격미달의 사상인 것이다.  이 자격미달의 사상들은 인류역사에서 수천만의 인권유린이라는 희생으로 검증된 진리이다.

 

강단좌파들이나 좌파진보주의자들이나 민노당이 말하는 사상의 자유의 절대적주장은 이런 점에서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다.  도대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경쟁할 때는 옳고 그름을 빼고 한다는 말인가?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부정적이라고 단정된 사조(사상)마저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꽃피우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런 주장을 내 뱉는 주둥이에 나찌식 가스를 채우든가 사상범으로 단죄해도 좋다는 사고방식이므로 덜 떨어진 사고방식에 재갈을 물려야 마땅하다.

 

즉 사상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 자유의 속성상 법 이전에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상의 자유는 법 이전의 한계만을 가진 제한적 자유인가? 

 

그것은 아니다. 법체계내에서 사상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공공의 안녕질서, 국가안보등을 위해 제한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때 즐겨 언급되는 제한원리가 미제의 홈즈 대법관의 판례법(Case law)의 원리로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리'가 있다.

그리고 서독기본법에 규정된 방어민주주의 개념도 있다.


그런데 강단죄파나 좌파진보주의자들은 오로지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 자유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제한원리를 즐겨 인용한다. 한 마디로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조차 못하는 어리석은 작자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하는 매체로 한겨레신문과 이른바 진보매체들이 있다.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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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준/'강정구교수 사법처리 철회해야'에 대한 비평

일단 강정구교수(이하 경칭 생략)를 사법처리한다면 무엇이 충족되어야 할 것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순서이다.


경찰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완료하여 검찰에 송치하면 검찰이 기소하고 기소내용을 살펴 법원은 판단을 내린다.  이 때, 판단의 지침이 되는 것은 헌법과 국가보안법이라는 법률이다.

주지하다시피 국가보안법은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 그 근본적 책임은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입법부의 무성의 탓이다.  그리하여 경찰을 포함한 사법부는 헌법과 법률을 지침으로 강정구를 단죄하는 것이다. 사법부란 법률을 만들거나 폐지하는 입법부와는 다른 소이이다. 그 입법권은 온전히 국회에 일임 돼 있다.

장창준이 강정구교수에 대한 경찰의 발언인 '사법처리-구속수사한다는 의견-'방침을 마녀사냥이라 한라면 조승수를 단죄한 사법부도 진보죽이기라는 마녀사냥이었고 그 판결에 관해  탄원한 의원 114명의 탄원서도 위법하지 않은 조승수를 범죄자임을 전제로 한 셈이다. 즉, 입법기관의 무능력과 무지를  그대로 실토한 셈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장창준의 말에 의하면 경찰이 혐의를 두고 있는 부분은 ‘통일전쟁...운운’과  “1946년 당시 조선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는 발언이라고 한다.

필자는 강정구의 통일전쟁관련 글에 대한 비평을 한 바 있다. 그것은 자가당착적 내용과 편의주의적 사실인용으로 학문적 가치가 별무한 글이다.


이하 장창준의 강정구옹호논리를 보자.

‘통일전쟁’ 발언이 실린 글은 인과관계를 맥아더와 미국이라는 틀속에 부당하게 한정시키고 침략자인 북한에 대한 비난은 전혀 없고 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혐오스런 내용으로 일관돼 있다.  비유해서 표현한다면 연속동작에서 동작의 일부만을 편협하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편파적인 관점으로 평가하는 글일 뿐이다.

그런데 인과관계를 조금 확장해 살펴보면 강정구가 신뢰해 마지 않는 커밍스가 인용한 논문에 의하면 그토록 혐오하는 일제가 38선분단을 제공한 원흉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백만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야기한 침략자인 북한과 동족상잔으로 일제의 전후 부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북한당국에 대한 비난은 한 줄 언급함직한 데도 언급은 커녕 결과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즉, 생각하라고 있는 머리는 몸통위에 달려 있지만 균형있는 생각을 할 수 없는 무뇌아이고, 시력을 교정키 위해  안경을 쓰고 있는 멀쩡한 두 눈은 맥아더와 미국 대한민국 유엔참전국, 북한, 소련 중공이라는 전쟁참여자 중 미국에만 고정 돼 있다. 이런 문제있는 글을 학문이라고 비호한다면 유치원생들의 글이 더 훌륭한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추론이라는 그 부분을 보자.

 

"만약 6.25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 달 내에 전쟁은 끝났을 테고 인명피해는 1만 명 이하일 것"이라고 강정구는 말했다.  형식논리학으로 그 명제를 따져보기 위해 불필요한 수식어는 사상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B(한달 내 전쟁이 끝났을 것 and 인명피해는 1만명 이하)일 것이다라는 가언추론판단이다. 강정구의 추론을 좀 더 완전하게 보완한다면 B부분의 결과에 '적화통일이 됐을 것이다'라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음은 알 수 있다. 필자 자의로 단순하게 삽입한 것이 아니라 강정구의 글의 맥락에서 그렇다.

 

보다 명료하게 살펴보기 위해 위 명제의 진위를 고정시킨 채로 질을 바꿔 다시 써 본다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된다.

 

A(미제가 개입했)기 때문에 B(한달 내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and 인명피해가 1만명이상으로 늘었고 and 적화통일이 되지 않았다)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총의 혹은 결단을 문서형식으로 택한 성문헌법국가이며 그 내용으로 자유민주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대한민국 헌법에서 사상의 자유란 모든 사상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체제 혹은 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인류역사가 교훈으로 남긴 파시즘, 나찌즘, 붉은 공산주의등은 그 사상과 노선(행동원칙)이 그대로 자유의 적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나 사상의 자유와는 양립할 수 없고 인정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명백한 자유의 적인 사상까지 무제한으로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자의 주둥이를 가스실이나, 공산주의식 사상범으로 단죄해도 불만이 없다는 논리가 된다.  말하자면 그런 사상을 무제한적으로 용인하는 사회는 그러한 류의 노선이 적극성 - 혁명이나 포퓰리즘 - 을 띠고 있으므로 그 속성상 그들에 의해 체제가 파괴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토론이나 여론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토론이 뭔지를 모르거나 여론재판을 하자는 말과 같다. 토론은 파쇼적이 아니거나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파쇼나 나찌나 공산주의는 토론의 전제인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체제이다.

 

이를 위해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서독에서 안출되었다.  비록 국가보안법이 공안당국에 의해 악용 - 국가보안법의 원형은 1공화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되었다.고 하지만, 노무현정권의 검찰에서 그것을 악용하거나 악용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민주대 반민주싸움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강단좌파나 민노당은 노무현정국과 꿈의 파트너라고 하는 것은 반민주세력과 제휴하는 당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참고로,  예비 음모에 관한 죄가 있다 .  민노당이나 장창준이나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반사회적인 중대범죄에 한정해 규정된 단순한 준비나 예비단계에 불과한 행태를 단죄하는 것마저도 사상의 자유니 양심의 자유를 이유로 폐지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임직 하다. 왜 국가보안법만을 안달하며 악법이라고 하는 지 그 저의가 의아하다- 공안당국에 의해 인권유린의 전력은 별론-.

 

아무튼 따져보면, 강정구가 말한 내용은 결과적으로 '적화통일이 되지 않아 유감이다'라는 소리와 하등 다름없다. 따라서 반정부가 아니라 자유민주체제를 선택하고 있는 우리 헌법에 상치되는 반(대한민국)헌법적인 발언인 것이다.

 

둘째는 "과거 통계 조사 인용"건에 대한 얘기이다.

 

장창준은 강정구의 과거 저술에서 여론조사를 인용한 바 있었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 내용으로 "8,453명의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4%가 자본주의, 70%가 사회주의, 7%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라며 미군정청의 통계자료이므로 과장했을리는 없다고 단정한다. 게다가 그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1947년 7월 3일 조선신문기자회가 서울시민 2,495명을 대상으로 한 가두여론 조사'조선인민공화국을 국호로 하자는 의견이 70%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자는 의견 24%보다 훨씬 많았으며, 정권형태 역시 인민위원회가 71%로 압도적이었다.'다고 인용한다.

 

그리하여 당시 ‘남조선’ 백성들이 어떤 이유가 되었건 간에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ㆍ공산주의를 선호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강정구가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에 포함시켜 다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장창준이나 강정구식대로 이해한다면 필자가 강정구와 민노당 그리고 서구의 사회주의 정당들을 폭력혁명노선을 교조적으로 답습하는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할 수 없다. 맑스나 레닌 노선 그대로 즉 교조주의적 공산주의노선을 채택한 정당은 지구상에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강정구의 학자로서의 인용이 명명백백한 '객관 진실'이라고 옹호해서는 안 된다. 있다면 바로 아래와 같은 사상적 기반에서나 가능한 논리이다.

 

공산주의자는 이른 바 궁극적 유토피아인 공산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하며 그 이상향은  '국가가 해체되는 공산주의'라는  사적유물론을 신봉하지만 국가소멸은커녕 공산주의 원조국인 소련이 붕괴된 것에서도 알 수 있으려니와,  혁명노선을 버리지 않고 케케묵은 교조주의자적 시각에서 오로지 사회현상을 계급으로만 쳐다보는 인식에 서 있음이 확실하다.  자주독립이나 반미제 반일제를 들먹이지만 그들은 역사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오류투성이인 외제 맑시즘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주체의식이 결여된 외래사상-의존적 색맹들에 불과한 것이다.

 

장창준은 한국<민권>연구소에서 일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더욱 더 북한의 비인도주의적 참상에 대해서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을 법한데 그러한 1당노동당독재체제를 (결과적으로) 옹호하는 강정구를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빙자해 옹호하는 것은 한국민권연구소의 성격이나 장창준의 사상적 기반이 의아하다.

 

강정구의 주장들은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인 자유민주체제의 혜택위에서 자유민주주의에 위해한 주장을 일삼는 반체제적, 반헌법적, 반역사적 글로서 강정구는 그가 선호하는 북으로 가야 마땅한 인물이라 생각한다.

 

* 햇볕정책은 폐쇄적인 북한체제를 우월한 체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개방하도록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이질화가 심화된 상태를 완화시켜 장차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통일과정에서의 충격을 줄이려는 것이어야 한다.  얼마 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동안이라도 비참한 질곡에 허덕이는 북한동포들에 대한 인권에 눈 감는 자들은 진정한 인도주의자도 아니고 햇볕정책을 추진할 주체로서 부적격하다 할  것이다. 북한당국은 대화나 협상의 파트너로서 인정하면 족할 뿐이지,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대북정책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북한당국도 남한의 인도주의적 노력에 상응하는 상호주의적 태도와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일관된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 이하 비평의 대상이 된 원문 ---------

강정구교수 사법처리 철회해야
<기고>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인가
장창준  


마녀사냥에 시달리는 강정구 교수
강정구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이 끝이 없다. 경찰은 강정구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사법처리할 방침을 내비쳤다.

서울경찰청 보안2과는 10월 4일 강정구 교수를 세 번째 소환하여 조사를 벌였는데, 논란이 되었던 ‘통일전쟁’ 발언 이외에도 9월 30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했던 “한미동맹은 본질적 속성상 반(反)민족적ㆍ반(反)통일적ㆍ예속적인 것이며, 1946년 당시 조선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는 발언까지 문제삼았다.

경찰청은 “강 교수의 주장은 과거 통계 조사의 일부만을 인용해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라며 “이는 국가보안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개정 논란이 있지만 이 같은 행위는 구속 수사 등으로 엄벌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며 사법처리 방침을 내비쳤다.

다음날 허준영 경찰청장은 ‘구속수사 의지’를 밝히면서 강정구 교수 구속을 위한 여론공세를 강화하였다. 허 장관이 10월 5일 국회 정보위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강 교수의 처리 방침이 뭐냐”는 한나라당 정형근의 질의에 “구속 수사한다는 의견”이라고 답변한 것이다.

‘통일전쟁’ 발언이 사법처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다. 여기서는 지난 9월 30일 발언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논리를 살펴보자. 

‘과거 통계 조사의 일부만을 인용’했다는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것인가?

강정구 교수 발언의 근거는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에서 실시했던 여론조사였다. 강정구 교수는 이미 1995년 『통일시대의 북한학』이라는 본인의 저서에서 이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한 바 있다.

8,453명의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4%가 자본주의, 70%가 사회주의, 7%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미군정청이 자신들에게 불리할 내용을 과장했을 리는 없다.

또한 이같은 결과는 1947년 7월 3일 조선신문기자회가 서울시민 2,495명을 대상으로 한 가두여론 조사에서도 확인되기도 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을 국호로 하자는 의견이 70%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자는 의견 24%보다 훨씬 많았으며, 정권형태 역시 인민위원회가 71%로 압도적이었다.

당시 ‘남조선’ 백성들이 어떤 이유가 되었건 간에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ㆍ공산주의를 선호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었다. 따라서 강정구 교수의 발언은 ‘여론 호도’가 아니라 ‘객관 진실’인 것이다. 명명백백한 ‘객관 진실’에 어찌 반통일악법인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댄단 말인가.

더 가관인 것은 10월 5일자 중앙일보 사회면의 기사이다. 중앙일보는 “강 교수 역사 가정법 논리적 타당성 부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있다. 강정구 교수의 소위 ‘역사추상형 비교방법론’이 논리 전개 과정에서 허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 바로 위에는 “강정구 교수 사법처리 방침”이라는 제목으로 경찰 관계자 발언을 소개한 기사가 있다. 마치 ‘학문적 타당성 부족’과 ‘사법처리’를 같은 선상에서 놓고 있는 듯 보인다.

 

예속과 분단의 고통을 고발하는 강정구교수
‘학문적 타당성 여부’와 ‘사법처리’는 엄연히 다른 범주의 주제이다. 만약 중앙일보가 두 주제를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싶었다면 강정구 교수의 방법론을 비판한 학자들의 ‘강정구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에 대한 견해’를 함께 실어야 했다. 그러나 그 기사에는 그에 대한 의견은 단 한 줄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법처리 될 만한 불온한 글이 학문적 타당성도 부족하였던 말이야?”, 혹은 “학문적 타당성까지 부족하니 사법처리는 어쩔 수 없네!” 식의 여론을 조성하고자 하는 중앙일보의 얄팍한 술수가 엿보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설령 100% 양보하여 강정구 교수의 발언이 학문적 타당성이 부족하였다 하여도 그것이 국가보안법에 의한 사법처리 방침에 정당성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학문적 비판과 토론을 통해 심화되어야 할 학문활동이 공안당국의 사법처리로 인해 중단되거나 위축받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냉전과 분단 그리고 독재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평화통일시대에 접어든 현 시점에서도 사상과 학문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찌 민주주의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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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수판결관련 -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경우...

행인나라사람들 | 딱지놀이의 한계에 대한 글을 읽고

제목 혹은 부제란 글 전체에 대한 함축을 내포한 것이다. 이제부터 비판에 대한 재비판 혹은 변론을 시작하겠다. 시작하기 전에 형평면에서 의문이 있다고 밝혔으며 사법부를 옹호하려는 취지의 글이 아니었음을 재차 밝힌다. (재비판의 대상이 된 글은 아래 전체 인용하였다).

 

대법원은 법률심이라는 것을 주지사실이고, 양형이 문제되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양형해야 할 사항 - 이때는 사실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법률문제이다- 을 배제하여 양형하지 않은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 논란의 핵심인 양형문제가 법률문제인가를 따져 봐야 한다.

 

논란이 되는 사안은 사법기관인 대법원이 사실심 기관인 법관의 양형(재량 엄밀하게는 기속재량)이 합당여부와 법리오해가 있는지에 관련된 것이다. 보통 대법원이 하급심 재판관의 재량인 양형면에서 위법하거나 이유없다는 판단을 하려면 내규(내부규칙)등과 같은 양형기준을 명백히 간과하는 등의 재량을 일탈했는가를 따지게 될 것이다.

 

그에 위배되지 않았다면 유사한 각 사건마다 기소이유나 취지가 상이한 판결주체인 하급심 재판관의 양형문제 형평성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지난한 일일 수 밖에 없고, 결국 법과 양심에 따른 (기속)재량행위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유사사건에 대해 오히려 경한 양형을 고치라는 논리까지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조승수에 대한 진보진영측의 이의는 오로지 형량을 깎으려는 관점에서 시도된다는 차원에서 불량한 태도이다.

 

아울러 비판자는 양형면의 위법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이라고 지적하는데 사실관계(예: A)는 이미 하급심에서 확정된 사안이고 사실관계인 A에 대한 양형문제를 대법원에서 다루는 차원일 때는 A와 하급심판단주체인 법관의 평가(관계)에 있어서의 재량권한의 행사가 위법한가에 대한 평가이므로 여전히 법률문제이다. 이 점 비판자는 혼동하고 있다.

 

조승수가 위반한 내용이 금전시비가 아닌 정책문제이므로 당연히 무죄라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법은 일단 제정되어 형식적 합법성을 갖추게 되면 그것이 위헌이라는 헌재의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권위를 갖는다. (노파심에서 명백한 위헌이나 부당한 법률은 헌재의 결정이전에도 적용이나 준법을 거부할 수 있는 차원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참고로 필자는 법실증주의자나 제도만능주의자는 전혀 아니다.)

 

조승수가 범한 해당조항을 지키지 않아서 위법하다는 관계는 전국에 걸쳐 존재하는 지역구후보자들과의 형평면에서 따져 볼 때, 그들은 위반하지 않았으므로 결과적으로 준수한 것이라 볼 수 있고 조승수는 그것을 준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위법하지 않은 후보들은 조승수에 비해 기회를 갖지 않음으로써 뭔가 기회를 잃은 셈이다. 법은 보통 <일반적> 금지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만이 제대로 법 - 법이 지배계급의 도구인지는 별론 - 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역으로 다른 후보들이 정책피력기회를 가져 위법을 범했다면 똑 같이 단죄될 것이다. 형평성은 이러한 맥락이 닿는 사안과 비교하며 들이대야 제대로인 것이다. 금품살포가 문제가 없다는 의미로가 아니라 예를 들어, 유사사건들인 선거범죄들을 일별해 보니 많아야 그 대상이 기십명인데 그 런 유형의 득표활동이 모든 시민의 이해가 관련된 사안에 대한 정치활동과 단순비교되어 조승수의 정치활동이 경하다고만 말해야 될까?도 의문이다.

 

필자가 조승수관련글을 쓸 때, 진보진영측의 영웅만들기식 논리를 보다 못해 펜을 든 것이다. 지금 형세를 보라. 진보진영의 아까운 인물이 형평에 어긋나는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했다며 대법원을 보수니 수구니 몰아세우며 범죄자인 조승수는 일약 <억울한 영웅>이 되어 있고, 마치 양심범처럼 오히려 범죄자로서 반성하지 못하고 공공연하게 부끄러울 게 없다고 떠든다.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추켜 세운다면 누구나 판결에 불만이 있는 자는 양심범이 되어 법원을 욕하게 될 것이고 사법부의 권위는 정말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비판자는 "강금실씨 등을 변호인으로 동원했는데 그것을 뒤집지 못했다면 필시 명백한 법률위반임이 분명하다"라고 단정했다며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황당한 3단논법을 들이대며 비판한다. 필자는 각각의 사건의 판결이유와 판결취지를 살피려 했음에도 할 수 없었고 강금실이 변호인으로 동원됐는데 그럼에도 뒤집어지지 않은 것을 보니 필시 위법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런데 비판자는 단순3단논법형태로 결론을 도출한 양 도식까지 제공하며 '단정'했다고 뒤집어 씌운다. 그러지 말 일이다.

 

비판자를 필자 입장에서 그런 식으로 똑같이 비판한다면 대립당사자인 법률전문가들인 변호인과 재판관들의 권위를 구체적 관계를 언급함이 없이 자신의 개인적 권위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불합리한 주장인 것이다. - 물론 개인의 권위가 변호사나 공공기관의 권위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무리한 주장을 토대로 필자의 주장이 신뢰성이 없다고 전제하면서 비난한다면, 비판자의 주장이나 논리에 대해서도 필자 또한 신뢰성이 없다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주장만을 옳다고 내세우는 독선이지 토론이 아니다. 비판자의 필자에 대한 비판은 그러한 자세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하 각 항목에 대한 비판자의 문제제기를 검토해 본다. 필자는 세 가지 경우를 or로 얘기했다. 모두 해당되거나 혹은 하나만 해당될 수도 있음을 상기하자.

 

1. 무능한 국회의원들이 만든 해당 선거법이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부분

 

시비가 되는 사안에 대해 법이 무엇인지를 선언하는 수동적인 대법원이나 하급심에서, 헌재의 위헌결정이 나기도 전에 입법기관인 국회역할을 침범해서 법을 제정하란 말인가? 그것은 국민이 만든 권력분립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생각이다. 필자가 지적한 점이 정당한 것이다. 때문에 필자가 무능한 국害의원이라고 쓴 것이다.

 

아무튼 비판자가 1.이 아니라고 우기니 그렇다고 보고 넘어가 보자. 그러면 2나 3이 될 것이다.

 

조승수가 출마한 지역구민들의 요구사항은 당연히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얽혀있지 않고 한 방향으로 완전히 지역구민의 의견이 일치된 사안이라면 지역구민을 위해 실행여부만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해관계가 얽힌 그것을 비판자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당연히 수용하고 검토해야만 하는 정치적 사안"이다. '정치적' 사인이다. 정리하면 그것은 정당활동이면서 한편 정치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어떻게 비판자가 하는 말처럼 "어떤 관점에서 보든 통상의 정당활동"이 될 뿐이겠는가?

 

비판자의 판단 혹은 주장대로라면 양형시비가 아니라 무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진보진영측의 대세적 주장이어야 할 것이다. - 필자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다. - 그리하여 3심 모두가 법리해석을 잘못했다는 비판자의 주장 내지 결론인데 대법원만을 질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급심인 법원뿐만 아니라 검찰측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비판의 대상에서 대법원이 주타켓이 되는 것은 형평성을 잃은 것이다. 또, 비판자가 사법부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과연 그럴까는 매우 의문이다. 위에 지적한 법률문제와 사실문제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법률맹인이지 않는가?

 

또한 비판자는 기소의 대상도 아니며 따라서 판단의 대상도 아닌데도 기소하고 판단한 멍청한 사법부를 배려해서 어렵게만 법을 만들어 내는 입법부에 대한 문제로는 전혀 볼 수는 없을까? 이렇게 위법이니 적법이니 논란의 소지를 없게 명확한 법제정을 하라는 의미로서 말이다.

 

2. 노무현 정권의 검사가 구형에서 유사사건들과의 형평성을 잃었는가?에 대한 부분

 

비판자는 수동적인 검찰이 유독 조승수에 대해서만은 선관위와 관련없이 직접 수사를 하고 공소제기까지 하였는가가 불만이다. 그 점은 공익의 대변자인 이른바 검찰이 범죄사실을 직접 인지할 때는 법원의 수동적 개입과는 달리 직접 수사를 개시할 수 있고 기소할 수 있다는 점을 놓친 것이다. 필자가 각각의 유사사건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경위까지는 알지 못한다. 어떻게 필자더러 기소경위까지 헤아리라는 것인가? 그리고 필자는 비판자가 제기한 그 형평성 문제를 똑 같이 제기한 것을 간과한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검사라는 수사를 물고 늘어지는데 필자는 <사이비 개혁>정권하의 검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쓴 것이지 거꾸로 <반듯>한 검찰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이 점 비판자가 거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의심나면 필자의 정부비판적인 글들을 참고해 보라.

 

3. 법원이 정실이나 이해에 따라서 형평성을 잃고 부당한 양형을 가했는가?에 대한 부분

 

실제 이 부분 때문에 필자가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비판자의 말 "법원이 정실이나 이해에 따라서 형평성을 잃고 부당한 양형을가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 그대로 볼 때 범죄자 조승수에 대한 형량산정고려단계의 차원이므로 명백한 범죄자인데, 오히려 영웅만들기가 진행되고 있는 괴상한 세태때문에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비판자는 필자의 말 "정의감이 앞선다면 범죄자를 옹호하지 말고 구체적인 문제점을 들어 형평성 시비를 벌이거나 법률을 제정한 국회를 비난해야할 것이다"을 어이가 없다고 한다.

결국 비판자는 필자가 제기한 여러 가능한 경우를 간과하고 강금실보다도 사법부보다도 권위가 있는 비판자의 무죄주장과 같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필자를 '딱지붙이기 놀이'를 하고 있다고 몰아세운다. 필자는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조승수 영웅만들기가 못마땅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 피곤하지만 오랜만에 트랙백에 찍힌 글이라 해명한다. 글을 제대로 해독할 것이며, 자신의 주장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바로 독선임을 자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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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25님의 [조승수 전의원 판결시비에 관한 단상] 에 관련된 글.

조승수 의원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과 이로 인한 의원면직을 둘러싸고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부분의 비판은 대법원의 행위가 매우 몰상식한 행위이며, 법률적으로도 하자가 많은 행위라는 것이다. 더구나 대법원의 행위는 최고심급의 그것으로서는 제대로 함량미달이다보니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비판할 재료조차 찾기 어려운 황당한 경우였다. 그러다보니 대법원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대법원이 보수화 되고 있다'는 말도 하고 있다. 사실 대법원은 '보수화'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기관 중에 단연 가장 보수적인 곳이 대법원임은 익히 아는 사실이니까.

그런데 대법원 비판자들에 대해 '딱지놀이'를 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어 주목된다. 즉, 조승수 의원 사건과 관련하여 일부 사람들이 진보는 '진리'이고 대법원은 '보수'라는 '딱지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진짜 '딱지놀이'는 이분이 하고 있다. 누군가가 '딱지놀이'를 하고 있다는 '딱지놀이'. 시민25라는 분의 앞 글의 부재는 이렇다. "진보진리교와 대법원보수딱지 붙이기"

적어도 이 분이 이렇게 특정한 비판세력을 '딱지놀이'하는 자들로 분류하려면 그들의 '딱지'질이 어느 정도나 '딱지놀이 수준'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분, 막연하게 '그럴 것이다'라는 전제 하에 대법원 판결에 대한 평가를 한 후 그것을 합법이냐 악법이냐 하는 식으로 엉뚱하게 입법부의 문제로 회귀시킨다.

우선 그는 대법원의 판결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대법원의 업무가 양형의 가감인 것처럼 판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일견 타당하다. 그런데 그 문장 말미에 그 역시 "(하급심에서) 심히 부당하게 양형사항을 배제했다든가 하는 경우에" 대법원 역시도 양형에 대한 검토를 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급심이 양형사항을 배제한 재판상의 위법이 있었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그 검토를 위해서는 대법원 역시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을 해야만 한다.

이번 사건에서의 문제점은 하급심에서 사실관계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법률의 적용에 하자가 발생했음을 변호인단이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이를 무시한 채 하급심 재판과정의 법리적용과정만을 살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왜 대법원이 오인된 사실관계에 대해 침묵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가 비판되는 것이다.(사실관계에 대한 간단한 언급은 이전에 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재론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을 무시한 채 "강금실씨 등을 변호인으로 동원했는데 그것을 뒤집지 못했다면 필시 명백한 법률위반임이 분명하다"는 단정을 시민25는 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전혀 타당치 않은 주장이다.

강금실(과 같이 유명한 변호인)이 변호를 했다 →원심을 뒤집지 못했다→법률위반이다

전형적인 전제오류다. 이런 부당한 삼단논법을 통해 "법률위반"임을 증명한다는 것은 시민25의 이하 주장에 신뢰성을 부여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이 사안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다분히 감정적으로 대법원에 대한 비난을 제기하고 있다면 시민25의 주장은 그 논리적 타당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경청해야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25가 제기하는 3가지 문제를 검토하더라도 시민25의 '딱지놀이'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 3가지 문제만 분석해보자.

1. 무능한 국회의원들이 만든 해당 선거법이 문제가 있는지

- 공직선거법(구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지적된 것은 한 두 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 법률을 뜯어 고치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시민25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행 선거법의 내용이 이렇게 위헌적 요소의 규정마저도 가지고 있게 된 배경은 그동안 각종 선거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이 너무나 컸고, 그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사전선거운동 금지의 내용이 통상적 정치행위까지 규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가혹한 점에 대해서도 위헌시비는 끊이지 않는다. 조승수 의원의 사건 이전에도 이 부분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개정요구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개정이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불법적인 사전선거운동에 대한 제한을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선거법에 문제가 있고, 특히 조승수의원의 사건과 관련하여 통상적 정치행위가 사전선거운동으로 규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이 법은 문제가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입법행위에 대한 논란은 조승수의원 사건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 법률에 의할지라도 "통상의 정당활동"(제59조제1항제4호)은 '선거운동'에 해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사전선거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역구민들의 요구사항은 조승수 의원의 국회의원 당선여부와 관련 없이 정당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수용하고 검토해야만 하는 정치적 사안이었다. 이에 대해 해당지역의 정당 지구당이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지역구민들의 의사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의견을 표명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든 "통상의 정당활동"일 뿐이다.

따라서 지금 이 문제는 입법의 불비 또는 악법의 시행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항이다. 법리해석에 오류를 범한 사법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민25의 제1번 문제제기, 즉 선거법 자체의 문제는 여기서 논할 일이 아니게 된다. 이번 사건이 사법부의 문제를 입법부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시민25는 간과했다.

2. 노무현 정권의 검사가 구형에서 유사사건들과의 형평성을 잃었는가?

- 검사의 의무는 범죄사실을 적발하고 이를 수사한 후 기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승수 '후보'의 행위가 위법한 것이었음을 발견했을 경우 이를 기소하고 구형을 하는 것은 검찰의 당연한 의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소위 '형평성'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시민25의 주장대로라면 대한민국 검찰은 조승수 이외에 대한민국의 모든 공직선거과정에서 발생한 선거비리사범 일체를 직접 조사하고 직접 기소하여야만 한다. 그것이 형평성의 원칙에 부합한다. 그런데, 왜 다른 선거사범의 경우 선거관리위원회의 고발이나 수사의뢰에 의해 선거사범 수사에 나섰던 검찰이 유독 조승수에 대해서만은 선관위와 관련없이 직접 수사를 하고 공소제기까지 하였는가가 의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민25는 형평성을 이야기하면서 검사의 '구형'에만 논의를 한정하였는데, 이러한 범위의 한정이 사실은 '형평성'을 잃은 주장이라는 것이다. 시민25가 '형평성'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면 당연히 검사의 혐의포착 및 수사착수에서부터 그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검찰 상당히 바쁘다. 다른 사건들도 한참 많고, 때마다 국정감사철이 되면 주성영의원과 폭탄주 마시고 뉴스거리도 만들어줘야하는 참으로 공사가 다망한 사람들이다. 그러다보니 선거사범에 대한 직접수사를 선거철마다 천명을 하더라도 혐의포착부터 수사개시를 직접 담당하기 너무나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선관위의 고발에 목매달고 선거사범 수사를 하는 거다.

그렇게 바쁜 검찰이 하필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만큼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선관위조차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고 공소제기까지 하게 되었는가? 왜 이런 친절을 베풀까? 이것에 대해 시민25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의문에 "노무현 정권의 검사"라는 수식어를 더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만의 문제로 본질을 희석시키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때는? 노태우 정권때는? 김영삼정권이나 김대중정권때는 특히 검사들이 형평성을 잃지 않고 있었나?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은 따로 제기해야할 문제이다. 이런 식의 수식어를 통해 문제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물타기일 뿐이다.

3. 법원이 정실이나 이해에 따라서 형평성을 잃고 부당한 양형을 가했는가?

- 시민25가 전제하는 것처럼(사실 그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점은 위에서 지적했지만) 법률을 위반한 것이 사실이라면 조승수 의원에 대한 형량을 가볍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다른 선거사범에 대해서도 강력한 처벌을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논리상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에 대한 비판 중 다른 선거사범에게 내려진 결정에 대한 비판은 없나? 전혀 아니다. 사실관계를 허위로 기재한 유시민은 무죄다. 향응접대 등을 행한 다른 의원들의 경우는 형량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파기환송되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지 않고 있나?

물론 다른 의원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조승수 의원에게 내려진 형량이 과도하다는 비교론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비교론은 궁극적으로 '조승수에 비해 다른 의원들의 형량이 약하다'는 논리가 아니라 왜 '조승수에게는 가혹하면서 다른 의원들에게는 관대한가'에 대한 의문이다. 시민25가 제기한 의문처럼 혹시 "법원이 정실이나 이해에 따라서 형평성을 잃고 부당한 양형을" 가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 점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위법한 행위를 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면 이 의문은 가질 필요가 없다. 위법한 짓을 했으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 위법성의 정도를 판단한다면 법원의 양형은 형평성 이전에 법률의 규정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양형과정의 부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통상의 정당활동"이 왜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되었어야 하는가이다.

시민25의 글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사실 어이가 없다.

"정의감이 앞선다면 범죄자를 옹호하지 말고 구체적인 문제점을 들어 형평성 시비를 벌이거나 법률을 제정한 국회를 비난해야할 것이다"

조승수가 위법행위를 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판단이다. 누가 지금 '범죄자'를 옹호하고 있는가? 누가 지금 '구체적인 문제점'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으로 사건을 재단하고 있는가? 왜 사법부의 문제가 분명한 사건을 입법부의 문제로 치환해야 하는가? '딱지놀이' 그만하시길 바란다. 조승수 의원 면직사건과 관련하여 대법원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범죄 옹호자' 딱지를 붙이는 것은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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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숙 수석의 변절과 대정부 공개질의

적어도 불혹을 넘긴 이른 바 지식인이라면 체계적인 철학과 수미일관된 가치관을 토대로 글을 쓸 수 있다.  이하 조기숙의 글을 인용하며 조기숙의 정체성을 탐색해 보자.

 

지역감정과 지역주의와 지역구도의 관계

 

지역감정과 지역주의와 지역구도의 관계는 어떻게 다르고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자.  이들 개념들에서 '지역'이라는 부분은 지역연고자들과 절연된 텅 빈 토지나 행정구역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역연고자들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개념들이다. 특히 지역구도는 지역유권자들과 반드시 관련된다는 차원에서 지역감정과 지역주의보다도 가장 지역연고적인 셈이다.

 

조기숙은  "선거제도의 변경이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정당의 전국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는 할 수 있겠지만 '지역감정 완화' 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텃밭에 연연하는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연고주의가 인사나 분배정책을 좌우하고,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구시대 정치인을 낙선시키기 위한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이 법으로 금지되는 한, 어떠한 선거제도 아래서도 지역주의는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모든 이해당사자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 "상당수 국민들은 아직도 지역주의에 얽매여 기득권세력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도 아니면 뒷짐 쥐고 극도의 정치불신을 보일 따름이다." "지역주의 투표의 원인은 무엇보다 박정희로부터 시작되어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역대 경상도 대통령의 지역차별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위 인용부분에서 지역감정과 지역주의가 거론되었는데, 지역구도는 곧 지역감정 혹은 지역주의적 투표행태가 선거제도를 경유해 파생된 결과물임을 조기숙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기숙에  따른다면 지역구도는 '1. 정치인들의 지역감정악용의 근절,  2. 연고주의등 정실문화 해소, 3.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의 제도적 보장' 등 이들 모두 -  그것은 위 세 가지 선결과제가 or가 아닌  and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한다면 - 가 우선 전제된 후라야 선거제도가 약발이 먹힐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의 대연정론은 조기숙의 인식과는 거꾸로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 편,  노무현은 집권 후 반민주적인 극단의 지역차별(영호남과 비영호남)주의자가 되어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무차별하게 지역정당으로 딱지붙여 등치시키는 반역사적 레이블링을 서슴치 않았고,   조기숙이 주장하는 위에 열거한 선거제도변경 당위의 전제에 대한 진지한 노력은 커녕 자신의 민주적정당성의 뿌리인 유권자를 모독하는가 하면  몇 번이나 경망스럽게도 대통령직을 사행성 도박대상으로 삼은 바 있다.  대통령직을 놓고 벌어지는 노무현의 희한한 작태를 보노라면 대선경선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인물이며, 또 한 편으로 스스로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고백인 것이다. 

 

이렇듯 일국의 대통령이란 자의 책임의식의 실종은 곧  전임정권으로의 책임전가로 이어졌는데, 노무현은 최근 종합주가지수가 1000을 넘었다는 사실을 놓고 경제가 좋아진 양 말했다.  이 경제관에 비추어 본다면  IMF직전인 '95년에 역시 1000을 넘었고,  IMF환란당시 종합주가지수 최저가 277이었고 최고가 1066이었으니 무려 385%만큼 전임정권에서 경제가 좋아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아울러 참여정부들어 최저가 512 - 노무현은 대선후보시절인 2002년 5월7일 강원도 원주체육관 연설에서 ‘올 연(2002년)말쯤 가면 주가지수가 1000을 기록할 것’이라고 장담함 - 에서 오늘 현재 1238이니 242%나 3% 좋아졌다는 소리이다.  이런 노무현의 황당한 경제관에 비추어 보면 국민이 현재 느끼는 한랭 체감경기는 집단적 비정상상태라고 노무현은 인식하는 셈이다.

 

조기숙과 노무현의 한나라당에 대한 인식 비교

 

이 번에는 노무현의 대연정주장에서 그  파트너인 한나라당에 대해 조기숙은 과거에 어떻게 인식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설마 광주정신을 이어받은 국회의원이 그들과 손을 잡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부패신장개업당(필자주:민주당)이 이제 막 부패원조당(필자주:한나라당)을 따라 가려고 하는데 노무현대통령 때문에 모든 것이 깨졌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민노당의 당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도 민노당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공격에 협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구당(필자주:한나라당)과 보수당(필자주:한나라당)이 같다는 양비론은 결국 민노당이 현재에 만족하겠다는 생각으로 보입니다. 그 발언으로 인해 많은 보수 인사들이 민노당에 주려던 정당표를 거둬들였습니다" "노무현의 DJ와 YS의 화해를 추진하는 ‘신민주연합론’은 ...원래 지방선거는 총선과 달리 지역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YS와의 연대가 노 후보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시적인 성공은 늘 치명적인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라는 조기숙의 발언을 종합하자면 

 

열린우리당은 뿌리가 같은 민주당과도 다르고 한나라당과는 노선자체뿐 아니라 연혁과 정체성까지도 다른 공격대상이며 연정적격 파트너는 민주노동당뿐임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총선 후 한나라당은 질적으로 달라진 바 없다.  그리하여 최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과는 대차가 없다는 노무현의 발언과  대연정 추진에 일조하고 있는 조기숙의 최근의 행태는 과거의 조기숙의 인식이나 주장과는 양립할 수 없는 상충되는 입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기숙의 선거구제에 대한 견해

 

다음에는 선거구제에 대한 조기숙의 입장을 알아보자.

"강경하게 소선거구 유지를 원했던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중대선거구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된 배경은 ...지난 대선의 국민참여 열기가 총선으로 이어져 선거혁명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십수 년 간 소선거구의 보호막 속에서 지역주의에 기대 쉽게 정치하던 정치인들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정치생명을 연장하는 방법 중에 중대선거구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있겠는가." "우리의 선거가 표면적으론 지역주의 선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당투표라고 할 수 있다.  이회창 후보가 영남출신이 아니고, 노무현 후보가 호남출신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지난 대선이 온전히 지역주의 투표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당의 가장 큰 균열이 지역이기는 하지만 이념이나 역사적 유대감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단번에 지역주의를 깨겠다는 것은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지역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한 구체적인 정책이 정당명부비례대표제였다. 이 제도는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앞으로 제도화 방향에 있어 그 초점이 민주당의 영남 진출과 한나라당의 호남 진출이 아니라 두 정당의 지역독점체제를 해소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중대선거구제는 위축된 지역주의정당이 연명하기 위한 도구라는 조기숙의 견해이다.  또한 지역주의 선거, 구체적으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유권자의 선택은 정당투표라는 조기숙의 인식이다.  그리고  이상적인 선거구제로서 조기숙은 "정당명부비례대표제"에 우호적임을 알 수 있다.  조기숙이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에 노무현과 유시민은 중대선거구제를 거론했다.  조기숙의 견해와는 어울릴 수 없는 입장들이다.

 

종합해 보면  조기숙은 자신의 발언과 인식에 반하는 행태를 뻔뻔하게 합리화하는,  권력을 향한 불나방이 되어 곡학아세하는 사이비지식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청와대에 들기 전에 조기숙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필자의 분석이나 비판에 이의가 있다면  신랄한 반론을 기대하겠다. (필자는 변절을 '주장을 바꾸거나 절개를 버리는 것'으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이제 마지막으로 정치학자이며 지역주의에 관한 전문가이며 공인이 된 조기숙에게 건설적이며 생산적인 토론을 위해 공개적으로 질의하겠다.

 

1. 유시민이나 노무현의 지역구도가 선거제도탓이라는 주장에 수긍할 수 없다.  소선거구제가 지역구도의 주원인이라고 한다면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는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망국적) 지역구도가 발견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제도 변경론은 모종의 음모나 불순한 정략이다.

 

2. 이른바 진보학자들이 주장하는 뭉뚱그린 보수대 진보의 정당구도는 국민의 정당선택의 폭을 오히려 인위적으로 제약시켜 국민의 참정권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을 뿐 아니라 보수정당간의 차별성을 없애버리는 반역사적이며 반민주적 발상으로 위헌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

 

3. (부정적인) 지역주의, 지역감정, 지역구도는 그 근본적 원인이 박정희의 수출드라이브정책을 위한 불균형성장정책및 장기집권음모에 의한 지역차별에서 유래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영역에 고착된 인위적인 사회현상으로  제도탓이 아닌 정상모리배의 작품으로서 후대 정치인들이 정상으로 복원시켜야 할 대상이다.

 

필자의 공개질의에 홍보수석인 조기숙의 개인적 입장과 참여정부 차원의 친절한 답변을 기대하겠다.


아래 글은 각 인용부분마다 링크된 조기숙 글들의 짜깁기이다. 그러나 조기숙을 비판하기 위해 일부만을 똑 떼 낸 것이 아니라 글 전체취지와 어울리는  부분들로서 조기숙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했음을 밝힌다.

 

지역주의 투표의 원인은 무엇보다 박정희로부터 시작되어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역대 경상도 대통령의 지역차별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원인분석에서 해결책을 도출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민주당으로 선거를 치르면 백승할 것이 당연한데 왜 분당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 말도 일리가 있다. 지역주의 청산보다는 개혁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더 심화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이 그렇게 성공적일 수 있었겠는가?  영.호남의 배타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기 때문이다. (인용자 주 : 지역주의는 더 약화되었다는 조기숙의 말)

 

설마 광주정신을 이어받은 국회의원이 그들과 손을 잡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부패신장개업당이 이제 막 부패원조당을 따라 가려고 하는데 노무현대통령 때문에 모든 것이 깨졌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지역주의 선거는 곧 사라질 것이므로 개헌 같은 것을 통해 인위적으로 지역을 동원해서는 안된다

 

상당수 국민들은 아직도 지역주의에 얽매여 기득권세력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도 아니면 뒷짐 쥐고 극도의 정치불신을 보일 따름이다.


총선에서 개혁세력이 과반수의석을 확보한다면 시민혁명은 클라이막스를 넘어 성숙기에 접어들 것이다. 시민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주도세력을 교체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사회전체적인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진짜 시민 혁명은 문화혁명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지역정당을 극복하겠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한나라당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압력을 이용해야 한다. 노대통령은 "만일 중대선거구제였다면 내가 절대로 부산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자신들을 선거구제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거제도가 바뀌면 정당제도도 덩달아 바뀌기 때문에 이들이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할만한 근거는 없다. 소선거구제에서 2등 했으니 중대선거구제에서도 2등으로 당선될 것이라는 가정은 참으로 순진무구하다. 대통령은 협상의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의 입장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거구제 개혁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다.


선거제도의 변경이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정당의 전국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는 할 수 있겠지만 '지역감정 완화' 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텃밭에 연연하는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연고주의가 인사나 분배정책을 좌우하고,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구시대 정치인을 낙선시키기 위한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이 법으로 금지되는 한, 어떠한 선거제도 아래서도 지역주의는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모든 이해당사자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 시민대표가 배제된 채 현직의원들에게만 개혁을 맡겨두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중립적인 학자와 시민단체의 대표를 포함하는 정치개혁 특위가 구성돼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끝으로, 최종 개혁안은 모든 당사자에게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만족을 주어야 한다. 국민을 무시한 정치인끼리의 담합은 유권자의 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민노당의 당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도 민노당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공격에 협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구당과 보수당이 같다는 양비론은 결국 민노당이 현재에 만족하겠다는 생각으로 보입니다. 그 발언으로 인해 많은 보수 인사들이 민노당에 주려던 정당표를 거둬들였습니다

 

노무현의 DJ와 YS의 화해를 추진하는 ‘신민주연합론’은 ...원래 지방선거는 총선과 달리 지역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YS와의 연대가 노 후보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시적인 성공은 늘 치명적인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상생이란 ...파이를 키움으로써 더 큰 이익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에서 갈등은 당연한 것이며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데에 상생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윈윈은 협상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상생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상생을 위해서 나의 이익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치가 무한게임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상생의 정치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충분한 의사소통과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편견과 아집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당에 소속된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다. ... 정치인들이 상생의 정치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유권자가 심판관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원래 개혁은 승리가능성이 낮은 정당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던 민주당이 지난 대선에 성공한 결정적인 이유도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의 개혁드라이브가 항상 국면전환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정략이야 어찌됐든 정당의 시도가 기본적으로 국민의 욕구에 부합하는 명분을 가질 때에만 효력을 발휘한다. 정당이 내건 개혁안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하려는 술책에서 비롯되었다면 오히려 더 큰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동안 강경하게 소선거구 유지를 원했던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중대선거구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지난 대선의 국민참여 열기가 총선으로 이어져 선거혁명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십수 년 간 소선거구의 보호막 속에서 지역주의에 기대 쉽게 정치하던 정치인들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정치생명을 연장하는 방법 중에 중대선거구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있겠는가.

 

우리의 선거가 표면적으론 지역주의 선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당투표라고 할 수 있다.  이회창 후보가 영남출신이 아니고, 노무현 후보가 호남출신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지난 대선이 온전히 지역주의 투표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당의 가장 큰 균열이 지역이기는 하지만 이념이나 역사적 유대감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단번에 지역주의를 깨겠다는 것은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지역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한 구체적인 정책이 정당명부비례대표제였다. 이 제도는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앞으로 제도화 방향에 있어 그 초점이 민주당의 영남 진출과 한나라당의 호남 진출이 아니라 두 정당의 지역독점체제를 해소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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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수 전의원 판결시비에 관한 단상

부제 : 진보진리교와 대법원보수딱지 붙이기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쏟아진다.  사법부(검찰, 법원등)가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주지 사실이다.  이런 얘기를 먼저 해야 하는 이상한 세태가 비참하게 느껴지지만  사법부를 옹호하는 취지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1심과 2심은 사실심이며 3심인 상고심인 대법원판결은 법률심이다.  대법원이 법률적용의 위반이나 법리오해등을 검토하는 심급인데도 마치 양형을 가감하는 것이 그들의 업무인양 떠들어 댄다.  양형에 대해서 대법원에서 문제삼는 경우는 심히 부당하게 양형사항을 배제했다든가 하는 경우에나 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물론 필자 또한 조승수와 다른 사건과의 형평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이 사건들의 이유나 취지를 보기 위해 판례검색을 시도하였으나 보지 못했다.)  강금실씨등을  변호인으로 동원했는데 그것을 뒤집지 못했다면 필시 명백한 법률위반임이 분명하다.

 

선거법위반은 그 성질이 형사사건에 준하며  당사자중 원고는 공익을 대변하는 <검사>가 되며  피고는 이 사건에서 조승수등이다.  그런데 어떤 글을 보면 <검사>가 기소했다는 것을 유독 강조하며 검사를 욕한다.

 

그런데 형평성논란만을 따져 본다면 법률을 위반한 것은  명백한 것이며 논점이 아니므로  가볍게 판단을 내린 그리하여 형평성을 잃은 유사사건들을 오히려 더 무겁게 해야 한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이 사건에 관한 글들을 지켜보면서...
이른 바 민노당과 그 지지자들 그리고 진보우호적인 자들이  민노당진리 혹은 진보진리라는 흑백논리로 이 사건에 관한 한 대법원이 보수로 회귀했다는 비판론은 이런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예를 들어 조중동 수구언론이라고 딱지를 붙여놓고  조중동이 보도한 사실관계(이것은 수구든 진보든 친노든 보수매체이든 무관)를 인용해도 수구언론의 그것을 인용했다고 그르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이상한 어거지 논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모습은 대단히 불합리한 태도요 우리 사회에서 불식되어야 할 태도일 뿐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되는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무능한 국해의원들이 만든 해당 선거법이 문제가 있는지
2. 노무현정권의 검사가 구형에서 유사사건들과의  형평성을 잃었는가
3. 기소가 되어 판단이 대상이 되어야 비로소 움직이는 수동적인 법원(하급법원인 부산과 울산의 법관)이 정실이나 이해에 따라서 형평성을 잃고 부당한 양형을 했는가이다.


정의감이 앞선다면 범죄자를 옹호하지 말고 구체적인 문제점을 들어 형평성시비를 벌이거나 법률을 제정한 국회를 비난해야 할 것이다.

 

무려 10여개의 이른 바 진보법안을 주도한 조승수 전의원을 위해 국회의원 114명이 탄원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하니, 그들이 조금만 힘쓰면 그 법안이 상정돼 확정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다. 국회의원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참고 :  관련사건

울산지방법원  2004고합292
부산고등법원  2005노33
대법원 2005도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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