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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어찌보면 2007년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유학길에 오를 때 부터 어느 정도 정향되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다들 중국으로 갈 때, 나는 대만으로 갔었다. 어쩌면 당연히도 나는 '사회학'을 전공했다. 이후 문화연구로 전공을 바꾸었고, 시간이 흘러 박사까지 마쳤다. 그 이후로도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미국을 거쳐 국내로 안착하는 듯 했지만, 곧 학술체제의 현실에 부닥쳤다. 이내 좌절감을 안고 귀국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책을 싸들고 대만으로 갔었다. 2년 동안 대만에서 중화권에서의 안착 가능성을 타진해봤으나, 결국 쉽지 않았고, 다시 귀국하여 광주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한번 좌절한 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타협은 디폴트였고, 그이상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실을 맺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이제 어렵게 되었다.

어제 비자를 받고 마음이 엄청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막상 받고나니 무겁다. 다들 중국을 기피하는 시기에 중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40대 중반으로 접어든 내 나이를 고려하면, 아마도 이후의 삶은 기본적으로 중국을 기반으로 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다행히 중문과 소속이기 때문에 강의가 '소외된 노동'이지만은 않을 것 같다. 중국의 중문과는 사실상 거의 모든 인문사회 분야를 포괄할 수 있는 용광로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쩌면 왕 선생님 말씀처럼, 내가 있을 곳은 중국이었나보다.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그동안 중단된 연구를 어떻게 다시 이을 수 있을 지에 관한 고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선 사유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 자존감 회복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국내에 안착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기반도 없이 독립적으로 자기 공부를 지속한다는 건 불가능한데, 국내에 학술적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유일한 기반이 될 수 있었던 '운동'을 다소 적극적으로 상대화했기 때문에,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조차도 이제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기간 잘 마무리하고, 7월초 중국으로 건너가 제2의 인생을 맞이하게 될 듯하다. 물론 생각대도 다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이제 중장기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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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2

이제 구직활동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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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7

https://www.youtube.com/watch?v=DNH49yfgO9c

어디선가 누군가 그렇게 얘기한 듯 하다. 나이 먹으면 새로운 노래 보다는 익숙한 노래를 듣게 된다고. 그래서일까... 평소에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처럼 조금은 외롭고, 또 서럽고, 또 억울한 마음에 혼자 한 잔 할 때, 나는 늘 김광석 노래를 찾아본다.

오늘은 조금은 특이한 발견을 한 것 같다.

1989년 1월 26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우리 세대에게 익숙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김광석이 동물원을 대표해서 노래를 몇 곡 했다. 

사회자 이문세는 마지막 곡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을 소개하면서 짧막하게 "노무현 국회의원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하다"(20:16)는 말을 남긴다. 

별 거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내게는 참 묘한 느낌을 줬다.

그 시절 나는 아직'국민학생'이었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지나서 보면 이러한 시대전환의 분위기는 충북 괴산 벽지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교회에서 성극을 하면서 노무현 역할을 했던 게 바로 직전 성탄절이었다.

게다가 그 시절 중학교 다니는 누나는 전교조 선생님들로 인해 마음 아파 했고, 아버지도 물론 그렇게 순수하지는 않았지만, 농민 운동하신다고 바쁘던 시절이었다. 한겨레 신문이 그 시골까지 배달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종종 하루 늦게 왔던 것 같다.

묘한 느낌이란, 아마도 그 이후의 궤적에 대한 여러 가지 권위적 서사가 적어도 이런 나의 사소한 듯한 작은 경험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서 연유한 게 아닐까 싶다.

이문세가 아무런 설명 없이 노무현에게 감사하다고 했던 그 마음이 이문세 뿐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마음이었을 듯 싶고, 그래서 더더욱 그 마음을 지금의 형국에 가둘 수 없다는 그럼 미묘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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