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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한글전용비판

한글날을 기념해서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뉴스들이 많다. 다소간 민족주의적 정서를 포함하면서...

 

한글은 구어에 적합한 문자가 없었던 언어공동체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목적의식적으로 창조된 문자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인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쉽게 '민족주의'적으로 선전된다.

 

번역을 하면서 어찌하다보니 '한글전용론' 비판의 관점을 취하게 되었는데, 한글의 문자로서의 우수성을 무시하면 안 되겠지만, 우리 말에서 한자어를 배제한 한글 전용이 가능한지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문자가 언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기완 선생님이 순우리말로 쓴 책을 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쉽지 않았겠지만, 그게 정말 필요한 지 의문이다. 그렇게 쓴다고 지식인이 아닌 기층 민중이 더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수세기 동안 우리 말 안에 들어와 있는 한자어는 아무리 익숙해져 한자를 표기하지 않고 한글만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기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한자어 기원이 불분명해지면 상호변별력을 갖지 못하는 한글표기 사이에 의미 혼동이 초래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쓰는 언어 속의 상당수 개념과 단어는 비록 한글로 적고 있더라도 한자어 기원을 전제한 상태에서 유효한 변별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족주의적 '문자'가 민족의 '언어'를 대체하려는 한글전용론은 일차적으로 한자어의 한자와의 관계를 소거하기 시작한다. 이는 한자를 공용하고 있는 다른 언어의 글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적용되어 한자어 기원을 갖는 번역어로 번역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내가 다른 포스팅에서 장황하게 부연하였는데, 이러한 한글전용론에 입각한 번역 원칙이 바로 원음주의이다. 이 원음주의의 기원도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본래 원음주의는 일정하게 엘리트주의적 기원을 갖지 않나 의심해 본다. 제3세계에서 외국어 구사는 지식인의 필요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엘리트주의적 방식으로 외국어를 외래어로 번역하는 노력을 하기 보다는 번역 없이 외국어를 들여와 우리말 처럼 쓰면서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이 미국이나 유럽 등 공통적 문화 기원을 가지지 않는 지역의 외국어, 특히 한자와 같은 문자를 공용하지 않는 외국어였기 때문에 '원음주의'는 하나의 번역 방식이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음주의 표기가 원음과 가깝다고 볼 수는 없다. 그저 일정한 변별력을 갖는 번역 방식의 하나로 채택될 수 있을 뿐이다.

 

아무튼 '현지 원음'은 적어도 우리의 한자어 발음과 거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번역을 할 경우 한자어 기원을 갖는 외래어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이는 한글전용론에 부합하게 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번역은 그 대상이 고유명사이든 일반명사이든 모두 그 뜻을 최대한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중국어나 일본어의 고유명사가 그 뜻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다고하더라도 번역은 엄연히 이를 최대한 번역해줄 의무를 갖는다. 인명과 지명의 경우에 주로 그러한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인명과 지명은 '뜻'이 없거나 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명과 지명도 그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름에는 나름의 의미 부여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학교 이름, 신문 이름 등등 수 많은 고유명사는 그 뜻이 매우 명확하다. 사실 그래서 생겨난 기이한 현상이 한글전용 원음주의로 번역을 해 놓고 괄호 안에 원어의 한자를 표기해 주는 방식이다. 결국 원어의 한자를 모르면 한글전용으로 번역된 우리말 한글의 뜻도 알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왜 처음부터 한자의 우리말 음으로 표기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한자와 그에 해당하는 우리말 음은 이미 상당기간 그 연관성이 익숙해져 있어서 비교적 쉽게 익힐 수 있다. 예를 들어, 상하이라고 쓰고 上海라고 병기하는 것은 上海에 대한 한글전용 번역어를 새로 배워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해라고 쓰고 上海라고 병기하면 기존의 습관대로 익히면 그만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한글전용 실천을 가장 적극적으로 한 매체가 한겨레 신문이다. 내가 보기에 한자어 기원과 관련을 소거하는 것은 대중적 매체이기 때문에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쓰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미 한자어 기원을 갖는 수많은 개념을 쓰고 있는 마당에, 그 한자어가 순우리말로 전환되지 않는 이상(물론 이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 단순히 한자를 뺀다고 더 잘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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