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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이 멀다.

대체적으로 나에게 어떤 지식의 형성은 나의 모종의 공백이 만들어내는 불안감(그에 이은 개방성)과 개별적 대상에 대한 인식불가능성이 결합되면서, 대상의 개별성에 의미가 부여 되는  과정인 것 같다.

 

지난 밤, 왕 선생님의 극본 <안티고네>의 초역을 마쳤다. 이 연극에 참여할 한국의 배우 두 분께 먼저 보내드렸다. 이 극본이 어떤 연극으로 태어날지 자못 궁금하다. 기대도 크다. 극본의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해야 할 것 같다.

 

왕 선생님과 이야기하면서 내가 연극과 맺게된 인연의 의미를 좀더 생각하게 된다. 마치 왕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맺어진 역사적 인연처럼 느껴진다. '아름다움', '미학'이라는 범주가 본래 내 사유 속에 자리잡고 있던 '문학'적 실천의 범주를 포함하면서 대체하는 것 같다.

 

무엇을 아름답다 하는가? 왜 왕 선생님은 연극의 핵심 요소로서 '비판적 담론'과 '미학적 형식'을 이야기할까. 이 둘은 어떻게 결합되는걸까. 내가 보기에, 기본적으로 보편/특수주의(그것이 세계주의이든 국민주의이든, 아니면 동일한 원리를 공유한 지역공동체든)적 현대성에 기반한 인식과 지식으로는 담론적 비판성을 확보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러한 형식적 동일성에 기반해서는 미학 또한 추구될 수 없다. 그것이 총체성에 기반한 것이든, 다원성에 기반한 것이든. 결국 내가 보기에 이 둘에 공히 관계하는 것이 '역사'이다. 물론 여기에서 '종교'적 초월로 나가는 방향도 있는 것 같다.

 

역사를 매개로 한 '민족'적 지식은 변혁적 주체화의 내용일 것인데, 그 구체적 실천 과정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윤리성의 문제가 미학과 관련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미학은 형식적 측면에서의 혁신을 지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형식은 보편주의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역사'로부터 주어진다. 그러나 그 형식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지만, 그 현실에 묶인 채 해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적 담론과 결합되는 차원에서 그 혁신의 의미를 온전하게 얻게 된다.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다. 왕 선생님이 나와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가 늘 말하는 것처럼 내가 '좌파'(왕 선생님 나름의 해석이 있을 듯)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비판적 담론과 관련한 나의 모종의 민감성 그리고 언어적 표현 능력 때문일 것이다. 달리, 나는 왕 선생님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적 판단과 표현이 궁금하다. 다시 말해 그가 내 앞에서 어떤 인식불가능성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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