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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바디우 저, 이종영 역)에 관한 노트

바디우의 <윤리학>이라는 책이 내 책장에 꽂힌지는 좀 오래 되었다. 일전에 박사 과정 초기에 개인적으로 마르크스 엥겔스에 대해 ‘독단적’으로 정리를 하고, 교수 한 명과 두 학기에 걸쳐 ‘알튀세르 다시 읽기’, 그리고 ‘현대정치철학 중의 스피노자’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바디우의 책들을 모아둔 적이 있었다. 그때 국내에 번역된 바디우의 책들도 내 책장에 들어오게 된 듯 하다.

그게 대략 2010년일테니, 대략 3년 전 일인데, 나의 사유는 그 사이 ‘거대한 전환’을 겪은 바 있다. 그런데 근래 마침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책장에 ‘윤리학’이라는 책이 꽂혀 있어 어제 오늘 시간을 좀 내서 읽어보게 되었다. 100여 페이지 정도의 짧은 책이지만 바디우의 철학적 사유의 체계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책을 읽고 나서 이종영 선생님의 역자 후기를 보니, 내가 노트해 둔 것들과의 대비들이 한 눈에 들어와 매우 흥미롭다. 이종영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 ‘인권의 윤리’와 ‘차이의 윤리’를 비판하고 있는 이 책의 1장과 2장은 전적으로 프랑스적 맥락에 위치하고 있다”(115쪽)

 

그런데, 역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특히 문제되는 ‘차이’가 ‘문화적 차이’라면, 우리는 헤겔이 말한 우연성으로서의 문화가 벗어나야 할 대상이지 존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문화는 개별성을 억누르는 것이지 해방시키는 것이 켤코 아니기 때문이다.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각자의 개별성이지 문화적 또는 사회적 차이가 아니다. 그리고 각자의 개별성은 오로지 인간적 동일성이라는 보편성에 토대해서만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다.”(115~116쪽)

 

나는 앞서 언급된 ‘프랑스적 맥락’과 이와 같은 ‘보편성’의 도입이 매우 모순적이라고 보고 있다. 나는 독서 도중에 다음과 같은 노트를 한 바 있다.

 

“바디우. 진정하게 ‘프랑스’적 현대성에 내재적인 철학으로서 보편주의적인 철학. 구체적 역사적 현실의 차원에서 ‘독일’적인, 즉 유럽의 ‘주변부’적인 철학 전통과의 차이로부터 볼 때, 이는 유럽적 보편주의의 원형으로서의 사유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헤겔과 같은 ‘민족’ 주체의 형성을 위한 교육, 문화, 종교의 사유가 결여 되어 있고, 그로 인해 ‘대중’을 사고할 수도 없다. 그리고 더말할 나위도 없이, 대중은 세계 속의 ‘민족’에 의해서만 무차별적인 피동적 주체가 아닌 개별성을 갖는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의 인식론적 전제와도 크게 차이가 난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의 도입부를 읽으며, 어떤 의미에서 동물적인 ‘욕망’의 인간학을 넘어서는 ‘이성’의 인간학의 측면에서 헤겔과의 연관성을 엿보았다. 윤리학의 성립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다. 바디우는 이를 ‘진리의 윤리학’으로 전개시킨다. 대체적인 논의는 내 느낌으로는 전에 읽던 낭시의 그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나에게 그들의 논의는 그 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암튼 이 ‘진리’는 내가 보기에 개별적 ‘역사’가 배제된 보편주의적 가상적 추상적 공간에서의 사유의 범주(이른바 ‘해방적 정치’, ‘과학’, ‘예술’, ‘사랑’)와 현실의 대상의 관계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래서 이러한 사유는 구체적 역사의 전개에 대해서는 늘 사후적으로만 주관적 ‘진리’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더 큰 문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윤리학’이 역자가 기대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로서의 윤리에 맞서 싸우는 해방적 실천 그 자체가 새로운 윤리학에 의해 지탱되어야만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해방적 실천’ 자체의 윤리학은 그것의 형성 과정과 전개 과정 그리고 이를 통한 변혁적 구성의 단계에 걸쳐 공히 관련되는 대중적(‘민족민중’적) 주체의 형성과 그 안에서의 지식의 모순에 모두 관계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진리의 윤리학’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추상적 범주를 통해 닫힌 역사적 무차별적 사례 속에서 그 닫힌 ‘주체’의 지식과 실천의 측면으로만 파고들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한계와 모순을 둘러싼 더 큰 ‘역사’적 맥락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는 윤소영 선생님이 ‘공산주의 상수론’으로 비판한 측면과 관련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 변수론’이 한발 더 나간 것임은 분명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역시 궁극적으로는 ‘역사’를, 나아가 ‘지식’을 아래로부터 다루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프랑스’의 바디우에게 이는 무리일 것이다. 물론 책임을 바디우에게만 물을 수도 없지만… 다시 말해 내가 보기에 해방적이고 변혁적인 실천의 좌절로부터 출발해서,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것이다. 내가 볼 때, ‘민족’적 지식, 즉 개별적인 역사로부터 주어지는 공동체의 주체적인 자기/세계 인식의 계기로부터 출발한 지적/정치적 실천만이 ‘소외된 지식’(그것이 좌익이든 우익이든)을 매개로 한 피동적 동원된 주체화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주체형성을 가능하게 하고, 또 나아가 변혁적 전망을 만들어 감에 있어서도 세계 속에서 개별성을 갖는 대안적 ‘민족’의 형성에 밑받침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바디우의 윤리학은 한계는 분명하지만, 나름 성실한 ‘프랑스적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프랑스적이고, 유럽적이고, 보편적인 ‘윤리학’이 주장되는 데는 바로 역자와 같은 제3세계의 지식인의 공헌이 크다 하겠다. 이들 제3세계 지식인들은 그들에게 그들의 ‘외부’가 없음을 증거하고, 제3세계 민중들에게는 우리는 ‘무지’하다고 반복하여 지적 강박증을 유포하며 ‘지적 위계’를 공고히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지식이 진정한 변혁적 ‘주체’ 형성에 매개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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