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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발턴"?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719144928

 

김원 선생님의 서평이다. 제목은 '지식인은 들을 수 있는가'. 나는 이 쪽 관련한 책들을 제법 많이 가지고 있지만, 정독한 책은 몇 권되지 않는다. 차르테지 선생도 몇 번 강연을 들은 적은 있지만, 그렇게 깊이 매료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암튼 김원 선생님의 서평을 읽고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선생님의 책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에서 살짝 엿보았던 '긴장'이 다시 생각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엔 내가 지지하는 측면과 비판하는 측면이 긴장을 이루고 있는데, 이건 별도의 지면이 필요하다.

 

이 서평은 흥미롭게도 내가 관심을 갖는 '번역', '지식', '윤리'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잘 모르지만 몇 마디 메모를 남긴다. 주로 마지막 소 주제와 관련해서...

 

암튼 이 서평을 읽고 난 후의 내 느낌은 단적으로 '난해하다'이다. 나름 맥락 속에서 충실한 소개를 하고, 선도적 문제 제기를 하려는 지점에서 좋은 글이라 보지만, '서발턴'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방식은 여전히 '반-서발턴'적인 것 같다. 이는 어떤 '반지성주의'의 표현은 아니다. 나는 '난해함'과 '낯섬'을 구별하는데, 대체적으로 '이론주의-엘리트주의-포퓰리즘'적인 '번역되지 않은' 담론이 나에게는 '난해'하다. 대체적으로 다수의 1차원적인 것들이 난삽하게 얽혀 있는 것들인데,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난해하지만, 또한 보편성의 힘이라 할 수 있는 그런 1차원성 때문에 수십개의 언어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은 역으로 이야기하면 이 서평이 다루는 내용도 한국어로 쓰여졌지만 보편적 맥락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무리 없이 쉽게 '번역'될 것이다.

 

내게 '낯선' 것은 제대로 번역된 것들인데, 그럴 경우 그런 담론은 번역자를 통해 나와 번역자가 일정하게 공유하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동요하는 결여된 개방적 '주체성'과 타자의 '이질성'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 사회 속의 비판적 담론으로 제시된다. 내가 보기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이제 '이러 저러하게 서발턴 연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서평자의 모종의 제안 자체가 서발턴 연구를 모종의 '기원 또는 본질'을 갖고, 그로부터 어떤 '보편/특수성'을 획득하는 담론으로 제시하는 어떤 '익숙'한 수용 모델로 귀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물론 이는 내용적 측면 보다는, 주로 '형식'적 측면에서 학문적 주체성의 결여가 낳은 필연적인 수용 모델일 수도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 문제는 바로 '서발턴'이라는 번역어를 통해서 풀어 이야기해볼 수도 있다. 기존에 블로그에서 여러번 반복해서 지적한 것처럼, 현실 속의 우리의 언어문화는 '음역'(즉 '무 의미'한 번역, 이것은 '번역'일까?)을 하지 않고는 개념들의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신의 역사적 언어문화 자원을 상실해 왔다. 이는 역사적 '현대화'('보편/특수주의화')의 과정의 일정한 표현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는 '한글전용'이라는 보편/특수주의 이데올로기의 일환이었던 '탈한자화'의 효과, 즉 '언어의 현대적 국민화'의 효과이다. 한자를 한글이라는 기호 뒤로 감추기를 지속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연동성은 약화되고, 언어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한자어를 대체한 외국어 '음역어'들이 충만해졌다. 이러한 '음역어'는 100% 가상에 기초한 '원음'이라는 근거에 따라 '외국어'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기호화'하기는 했지만, 별도의 주석 없이는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번역'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번역'으로 가장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는, 즉 그 외국어를 아는 '지식인' 엘리트들의 승인이 있고 이를 추종하는 포퓰리즘적 '속물 지식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이택광 교수의 '인문병신체'에 대한 변호는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전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벤야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의 발언은 더욱 그의 몰인식을 반영한다. 벤야민적 맥락과의 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언사이다.(관련 블로그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rderland&logNo=130082357319 이 교수는 이에 대해 트위터에서 “발터 벤야민은 철학의 개념어를 창문에 비유하면서 원어에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사유에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벤야민이 지금 한국에 살아있다면 정말 몹쓸 인문학자로 비난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문제는 다시 '역사의 부재'로 돌아온다. 역사 속에서 '세계 속의 민족적 개별성'을 파악하여, 주체성의 반성적 자원으로 삼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 속의 개체성' 또한 보편주의적 담론에 의해 지배되고, 개체 또한 '보편화된 주체'로 소외되어 사회적 주체로 형성되지 못하게 된다. 지금 할 일은 우선적으로 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렇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역사에게 물어보는 일이다. 계속해서 '역사 없는' 허공 속의 붕 뜬 주체로 살고 싶지 않다면.. '보편성'에 기대어 지식인의 삶, 나아가 민중의 삶의 희생을 방관하려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서발턴 연구'가 혹여나 이름만 바뀐 채 다른 모종의 '보편화'된 외부 담론에 우리의 개별적 역사와 현실을 꿰맞추는 착오를 범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참고로 중국어에서 subaltern은 보통 '庶民'으로 번역된다. 우리말로 읽으면 '서민'인데, 그 의미가 중국어과 크게 다를까? '타자'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우리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번역이 불가능하고 음역어를 쓸 수 밖에 없다는 말은 사실 매우 특이한 모종의 '현대주의적' 논리이다. 모든 민족적 언어는 본래 타자를 전제로 하여 그 관계 속에서 '번역'을 거쳐 형성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우리말에 번역되어 있지 않은 "레 미제라블"은 중국어로 <悲慘世界> 즉 '비참한 세계'로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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